청춘극장/2권/20장

허 운옥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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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으나 유경의 소식은 통 알 길이 없는 채시국은 점점 긴박해 가고 전국은 차차 험악해졌다.

중국 전에서는 十[십]월 달에 접어 들면서부터 일본군이 태호(太湖) 서남방에서 신작전을 펴고 광덕(廣德), 선성(宣城) 등을 점령하였으나 한편 구라파에서는 바도리오 수상의 휴전포고로 이태리가 무조건 행복을 한 후부터 소위 추축국의 태세는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맹우(盟友) 무쏘리니를 잃어 버린 히틀러 총통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려오는 소련군의 신공세를 드니에플강에서 사수(死守)하려는 미증유의 대격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태평양 방면에서는 지난 봄부터 일본은 「가달카날」섬을 잃어버리고 연합 함대 사령장관 「야마도도」원수의 전사, 「아쯔」섬의 비참한 함락 등을 거쳐 九[구], 十[십]월에 들어서서는 「브겐빌」, 「웨크」, 「라 바울」 「뉴우기니아」 등지에서 「맥아더」 장군의 치열한 공세를 맞이하다가 마침내 저 유명한 「솔로몬」 군도을 피로 물들인 일대 격전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국내에서는 五[오]월에 조선과 대만에 「해군 특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고 八[팔]월 一[일]일에는 오랫동안의 현안이던 「조선징병 제도」가 무자비하게 실시되어 조선의 청년들이 일선으로 끌려 나갔다.

十[십]월 중순,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의 방책에 의하여 각 대학 전문학교의 문과계통이 三[삼]분의 一[일]로 정비되는 한편 그 보다 앞서 발표된 재학생 징병 연기를 전면적으로 정지하여 법문과 계통의 재학생들을 九[구] 월에 졸업 시키고 十[십]월 二十一[이십일]일 일본 전국의 학도병의 굉장한 장행회가 명치신궁 외원 경기장에서 열리었는데 그 보다 하루 앞선 二十[이십] 일 아아, 마침내 조선 학도병의 지원을 총검으로 강요한 「소화十八[십팔]년도 육군 특별 지원병 임시채용 규칙」에 관한 성령(省令)이 공포되어 조선 민중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조선인 징병 실시와 함께 이 지식계급에 있는 조선인 학도병의 출정이야말로 오랫동안 전쟁을 모르고 살아 온 조선 민중의 인생관을 고치게 하였다.

그것도 자기를 낳아 준 조국을 위하여 죽는다면 당연하거니와

「무엇 때문에 일본을 위하여 죽느냐?」

하는 피의 항의가 무서운 증오와 함께 불타 올랐다.

그것은 十[십]월 중순, 이 무서운 신문 기사가 아직 발표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청량리 근교에 애린원(愛隣院)이라는 초라한 고아원이 있었다. 조그마한 산 비탈을 등지고 논밭 가운데 외로이 서 있는 「바락크」식으로 된 이 고아원 마당에는 지금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을 등지고 너더댓 살에서부터 열 여덟 살까지의 소년 소녀가 저녁을 먹고 나와 날뛰며 놀고 있다.

원장실 앞에 서 있는 은행 나무 아래서 운옥은 조무래기들과 함께 곱게 물들어 떨어진 은행잎을 줏고 있었다.

「선생님, 누가 많이 줏나 내기해 봐요.」

나나라는 금년 다섯 살 먹은 계집애가 그러면서 운옥을 쳐다보았다.

「그래, 내기 하자. 내가 많이 줏지, 그래 네가 많이 줏겠니?」

그랬더니 다른 조무래기 들도 일시에

「그래 내기 해요. 내기 해요.」

하고 떠들면서 운옥의 주위로 욱 몰려 왔다.

운옥은 조무래기들과 함께 마당에 우수수하니 떨어진 은행 잎을 열심히 줏는다.

「선생님이 많이 줏나?…… 내가 많이 줏지.」

「너희들이 많이 줏겠니? 내가 많이 줏지.」

「아이구 아이구, 내가 많이 줏지.」

「아이구 아이구, 내가 많이 줏는다. 자아, 이제 그만 주어요.」

「아이, 선생님, 조그만 더 주어요.」

나나는 어리광을 피면서

「선생님은 손이 크니까 많이 줏지」

「너희들은 치마 자락에 싸니까 많이 줏지」

그때 운옥이는 허리를 펴며

「자아, 인제 정말 그만 줏고 다들 이리 와요.」

그래서 조무래기들이 와악 밀려와서 운옥이를 둘러 쌌다.

「자아, 하나씩 세 보기로 해요. 누구부터 셀까?」

그러면서 운옥은 몰려 들은 까망 머리를 둘러 보았다.

「나부터 세요.」

「나부터 세요.」

아이들은 은행 잎을 한 줌씩 쥔 조그만 손을 저마다 쳐들어 보인다.

「먼저 복녀부터 세 봐요.」

그 말에 복녀라는 네살 먹을 계집애가 조갑지 같은 조그만 손에 담뿍 담아 쥔 은행 잎을 세기 시작 하였다.

「하나, 둘, 셋, 다섯, 일곱……」

「아니다. 셋 하군 몇이지?」

「셋, 다섯, 일곱……」

「복녀야, 틀렸다.」

하고 이번에는 다른 아이들을 돌아다 보며

「자아, 셋 하군 몇인지,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 봐요.」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아이들은 제가끔 손을 내민다.

「어디 나나가 한번 세 봐요.」

그 말에 나나는 아주 신이 나서 세기 시작하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열……열……」

손에는 아직도 은행 잎이 대여섯 남았으나 나나는 열 밖에 더 세지 못하고 눈만 깜박깜박 하면서 운옥을 쳐다본다.

「자아, 그 담부터 셀 줄 아는 사람, 손들어 봐요.」

「선생님」

「선생님.」

아이들은 또 손을 들었다.

「어디 덕봉이가 세 봐요.」

「열 하나, 열 둘, 열 셋……」

그러는데 주방으로부터 식모가 뛰쳐 나오며 운옥을 불렀다.

「홍 선생님, 빨리 들어 오셔요! 강 선생님이 암만 해두 좀 이상해요!」

그 말에 운옥은 후닥닥 놀라며

「아, 강 선생이?……」

하면서

「나나야. 빨리 방으로 들어 가자! 엄마 병이 덧치나 보다!」

운옥은 얼른 나나를 업고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홍 금순(洪琴順) ── 그것은 허 운옥이가 김 준혁과 박 준길이의 눈을 동시에 피하려는 변성명이었다.

반 년 전, 매와 한 분을 준혁의 책상 위에 장식해 놓고 병원을 나온 허 운옥은 저번 장 일수가 유숙하고 있던 청량리 밖으로 찾아 가서 주인 할머니에게 청을 대어 며칠을 묵고 있다가 근방 고아원에서 침모를 구한다는 소문을 들어 고아원으로 들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늙은 원장은 운옥이같은 여자를 침모로 쓰기는 아까울 뿐만 아니라, 원아가 늘어서 강 숙희(姜淑姬)라는 보모 혼자서는 손이 바빠 돌아가는 것을 보고 침모는 또 새로이 구하고 운옥을 보모로 승격시켰다.

이리하여 운옥은 늙은 원장의 지극한 귀여움을 받으며 전심전력, 불상한 고아들의 자모가 되어 이 성스러운 사업에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바쳐왔다.

어딘가 이 고아원 생활은 운옥의 생리에 맞는 것 같아서 일생을 이 사업에 바치리라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생각하고 있는 어제 오늘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다사로운 부모의 손에서 떨어진 그들의 고독한 신세가 어쩐지 운옥은 자기 자신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러던 것이 동료인 강 숙희가 지난 초가을부터 폐병으로 자리에 들어 눕게 되자 운옥은 두 사람분 일을 혼자 맡아 하였다. 그래도 운옥은 불평이 없었다. 불평이 없는 운옥을 원장과 강 숙희는 끝없이 감사해 하고 미안해 하였다.

더구나 어머니가 자리에 눕게 되자 나나는 운옥을 어머니처럼 따랐다. 딸처럼 나나를 귀여워하는 운옥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운옥을 평양 태생인 숙희는 마치 자기의 친 언니처럼 따르고 믿고 하였다.

「나나, 엄마가 죽으면 누구하구 살겠니?」

숙희가 피를 토할 때마다 하는 소리였다. 그러면 나나는

「홍 선생님하고 살지.」

하면서 피를 토하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운옥의 품안으로 뛰어 들곤 하였다.

그러는 나나를 운옥은 측은하고 가엾어서 오그라지도록 나나의 조그만 몸둥이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숙희,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서 나나를 무섭게 하는 거야?」

「금순 언니, 나 아무래두 죽을 목숨인걸. 나나의 정을 얼른 떼 버려야겠어요.」

그러면서 일부러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나를 흘겨주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나는 점점 어머니가 무서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무서워지면 질수록 나나의 정은 점점 운옥이에로 옮아가는 것이다.

나나의 손목을 잡고 허벙지벙 운옥이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숙희는 양철 대야에다 쿨렁쿨렁 피를 토하고 있었다.

「아, 숙희!」

운옥은 달려 가서 숙희의 이마를 부축하며 여윈 어깨를 쓰다듬었다. 침모와 식모는 숙희의 병 간호에는 통 책임이 없다. 보고도 못 본척, 모두 슬슬 피했다. 피하지 못할 경우에는 운옥을 불러 대곤 하였다.

나나는 무서워서 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섰다. 피를 토하고 나면 어머니는 반드시 무서운 얼굴로 자기를 흘기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다.

「자아, 인젠 좀 반뜻이 누어 있어요.」

운옥은 얼른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나나가 바르르 따라 나가려는 것을

「나나 ──」

하고 숙희는 창백한 얼굴로 불렀다. 그러나 그 순간 나나는 대답은 않고 홱 돌아서서 오뚝 담벼락에다 얼굴을 대고 두 손으로 자기 눈을 꼭 감겼다.

어머니가 흘기는 그 무서운 얼굴을 나나는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것이 측은하여 숙희는 나나의 등 뒤에서 이불깃으로 눈물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