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18장

사랑의 방법론

편집

안국동 신 성호의 하숙 집 대문 밖에서 늙은 차부는 빈 인력거를 세운 후에 찌꿍하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섰다.

「댁에 신 성호씨란 분이 계십니까?」

저녁을 먹고 책상에 들어 붙어서 원고를 쓰고 있던 신 성호가 뜰 아랫 방에서 문을 열고 내다보며

「네, 내가 신 성홉니다. 어떻게 찾으십니까?」

「아, 신 선생이십니까. 저 편지를 갖구 완뎁쇼.」

차부는 봉투 한 장을 신 성호에게 내 주었다.

그것은 춘심이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글월이 적혀 있었다.

「── 성호씨를 만나 본지가 하두 오래서 춘심이의 마음에 곰팡이가 쓸었다우. 나 조금도 성호씨에게 무리한 청 하지 않을테니 성호씨의 그 고운 얼굴 한번만 보여 주세요. 걸작을 쓰시는데 방해가 될까보아 길게 만나지 않을 테니 선심 쓰시는 셈치고 한 시간만 만나 주세요. 장소는 명월관, 인력거를 보냈으니 꼭 좀 와 주세요. 파아랗게 녹이 슨 춘심이의 마음이 님의 발자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홀로 앉아 있다우. ──」

그순간, 신 성호는 춘심이의 어여쁜 얼굴 모습이 안타깝게 눈 앞에 어른거렸으나 마음과는 반대로 말씨가 무척 퉁명스럽다.

「가서 그래요. 나는 기생이 아니니까 인력거 타고 요정으로 손님 맞으려갈 수는 없다고 가서 그래요!」

그리고는 홱 방문을 닫쳐 버렸다.

「그러나 선생님을 꼭 좀 모셔 오라구, 열 번 스무 번 간곡한 당분뎁쇼.」

「듣기 싫어!」

꿱 하는 소리가 방안에서 튀어 나왔다. 차부는 그만 후닥닥 놀래다가

「그래두 선생님께서 춘심 아씨가 울면서 기다린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이 늙은이는 오랫동안 춘심이의 단골 차부였다.

「절 붙잡구, 선생님을 꼭 좀 모셔 오라구, 눈물을 흘리면서 하시는 당분뎁쇼. 암만해두 효자동 댁 살림이 재미없게 되시는가 봐요. 보기에두 어찌나 딱한지……」

「아니, 썩썩 못 물러 갈테야?」

다시금 튀어 나오는 고함 소리에 늙은 차부는 그만 하는 수 없이 손을 한참 동안 부비고 섰다가 주첨주첨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차부가 사라진 후에 신 성호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앉아서 약 한 시간 동안이나 책상에 들어 붙어서 원고를 쓰다가 마침내 붓을 던지며

「아아 ──」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팔꿈치를 베고 책상 앞에 번뜻 나가 누워 버렸다.

누워서 지긋이 감은 눈동자 속에 한 떨기 향기로운 꽃송이처럼 피어 오르는 춘심이의 아아, 화려한 자태여, 요염한 모습이요!

「그까짓 천한 기생 하나 쯤……」

왜 못 잊느냐고, 열 번 스무 번 자기를 책망으로 하여 보았으나 신 성호의 순정은 그리 쉽사리 춘심을 잊어버리질 못했다.

「돈, 돈, 돈! 돈이 나쁘지, 춘심이가 왜 나뻐?」

신 성호는 그렇게 생각하였으나 시들어 빠진 오 창윤의 품 안에 얼싸 안겨서 가진 아양을 다 부릴 춘심이의 토실토실한 몸둥아리를 상상할 때, 신성호는 세상을 저주하였다.

그때, 찌꿍하고 대문이 열리자 곤드레 만드레 취해 버린 춘심이가 차부의 부축을 받으면서 신 성호의 방문을 홱 열고 들어 왔다.

「할아범은 인제 가요. 수고 했수.」

「그럼 아씨, 재미 많이 보시우.」

차부는 도로 나가 버렸다.

쥐어 짜면 술이 뚝뚝 흐를만큼 춘심이의 몸둥이는 취해 있었다.

팔꿈치를 베고 신 성호는 책상 앞에 번뜻 누운 채 춘심이의 몸둥이를 말없이 쳐다볼 뿐이다. 우울한 얼굴로 덤덤히 춘심이를 쳐다보는 신 성호의 가슴패기 위로 춘심이의 흩으러진 몸둥아리가 육중하게 덧두겨져 내려 왔다.

「요 망종아! 사람의 가슴을 왜 요렇게도 태우는거야?」

연분홍 빛으로 무르녹은 춘심이의 흥분된 얼굴이 신 성호의 목을 껴안으면서 무섭게 달겨 들어 왔다.

「아, 숨이 막혀. 목을 좀 놓아요.」

이리 저리 비키는 신 성호의 얼굴을 춘심의 젖은 입술이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

「요 안타깨비야. 왜 요리 말썽이야? 뭐가 잘 나서 말썽이야?」

마침내 얼굴과 얼굴이 덧두겨지는 일 순간을 두 사람은 가졌다.

신 성호는 목을 걸머 잡은 춘심이의 팔에서 간신히 벗어 나면서 일어나 앉았다.

「나 여기서 자구 갈테야. 나 좀 재워 줘.」

춘심은 그러면서 신 성호 대신 방 한복판에 번뜻 나가 누워 버렸다.

「언젠가처럼 자장가를 불러서 좀 재워 줘요. 나 녹았어. 나 신 성호 한테 홀딱 녹았다니까 뭐 더 말할 것 없지 않어?」

「나는 춘심이의 기생이 아니니까 재울 수는 없어. 가요! 냉큼 일어나 나가요!」

「바가질 긁는 거야?」

나가요 그래 냉큼 일어나 「 . 못 나갈테요? 효자동 늙은이가 춘심이의 몸둥아리를 기다리고 있을테니 빨랑빨랑 가 봐요.」

「흥, 우리 늙은 수캐가 동경 여행을 간줄 몰라?」

「………… 흥, 난 정말루 마음에 곰팡이가 슨 줄로만 알았더니 공방이 되어서 외도를 할 셈으로 왔었군!」

그 말에 춘심은 발딱 몸을 일으키면서

「이거 왜 빈정거리는 거야? 나를 오 창윤에게 시집 보낸 게 누구게 그래?

빈정만 거림 제일이야? 날 왜 시집 보냈어? 가만히 앉아서 눈물만 흘림 제일이야? 돈만 없댐 핑게가 될줄 알아? 돈이 없음 왜 칼을 들구 강도질은 못 해? 춘심이에 대한 사랑이 고것 뿐이야? 그래 고걸 가지구 빈정거리는 거야? 나 참 글쓰는 양반들 입술만 살아 가지구 빈정거리는 꼴 보기 싫어서…… 그래 오 창윤의 뱃대기엔 칼날이 안 들어 가나? 춘심이의 가슴엔 칼날이 안 들어 가나? 왜 춘심이의 가슴에다 칼날을 한번 못 들어 보는 거야?

그래두 춘심이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신 성홀 버리구 오 창윤한테 첩 노릇을 갈 것 같애? 되지 못하게 빈정만 거림 제일인 줄 알구…… 고것 뿐이야, 그래?」

그러면서 춘심은 무릎 걸음으로 발칵 달려들자 신 성호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 쥐고 무섭게 흔들면서

「그래 고것 뿐이야? 고것 뿐이야? 요 안타깨비야! 요 망종아.」

하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외쳤을 때, 신 성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춘심이의 그 애정의 학대를 달갑게 받고 있다가 그만 격정에 못 이기어 춘심을 끌어안으며 무섭게 외쳤다.

「맞았다! 춘심이의 말이 꼭 맞았다! 인제야 말로 나는 춘심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다! 아아, 내 사랑 내 사랑 춘심이!」

「성호씨!」

춘심이의 타오르는 영혼과 육체가 신 성호의 품안에서 구슬피 느껴 울고 있을 즈음, 오 창윤은 경성역에 내렸다.

아현동에 들려서 간단한 보고를 부인에게 전하고 오 창윤은 곧 효자동으로 달려 갔다.

식모의 말을 들으면 춘심은 거의 매일처럼 외출을 했고 오늘도 저녁 전에 나가서 아직껏 안 돌아 온다는 것이었다.

오 창윤은 시계를 쳐다 보았다. 열한 시가 거의 가까운 무렵이다. 오 창윤은 하는 수 없이 바지 저고리로 갈아 입고 술상을 채려 오래서 푸푸하면서 쓸쓸히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딸의 행방불명에 대한 어버이로서의 걱정근심이 어찌 수월하랴만 터 놓고 보면 유경이가 이 세상에 없어서 못살 것 같지는 않았다. 춘심이가 이 세상에 없으면 정말 인타깝게 쓸쓸해서 못 살 것도 같았다. 유경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춘심에 대한 그것은 좀 더 유기적이고 직접적이고 실제적이고 피부적(皮膚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 창윤으로서는 춘심의 뺨을 안 갈길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결코 후회는 하지 않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춘심이와의 관계가 재미없게 될 것을 오 창윤은 걱정하는 것이다.

술 기운이 훈훈하게 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오 창윤은 이 며칠동안에 있어서의 춘심이의 정조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나 없는 사이에 누가 찾아 오지 않았소?」

오 창윤은 식모더러 물어 보았다.

「별루…… 아, 저 아저씨의 친정 오빠와 함께 최 주사가 오셨댔지요.」

「최 달근이가?…… 음, 자식이 어름어름 하면서 공연히 춘심이의 꽁무니만 따라 댕기구……」

춘심이를 중매 설 때부터 그런 눈치가 보이기는 했으나 원체 춘심이가 받아 주지를 않아서 오 창윤은 어지간히 안심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춘심이의 뺨을 갈겨 준 오 창윤으로서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래 무엇하러 왔어?」

「그저 놀려 오셨던가 봐요. 세 분이서 술 주정을 하시군 활동사진 구경 가신다구 하면서 나가셨다가 그날 밤은 다방골 친정에서 주무시구 오셨는뎁쇼.」

「어디서 자구 왔는지 누가 알아?」

그러나 이것은 오 창윤이가 입밖에 낸 말이 아니고 마음 속으로 외치는 말이었다.

「음 ──」

오 창윤은 질투에 불타오르는 신음을 하였다.

「늙은 녀석이 젊은 기생 데리구 살려면 그만한 것쯤 눈 감아 줘야지 별 수 있나?」

하지만 그것을 말 뿐이지, 장년처럼 절륜한 정력가인 오 창윤의 생리는 좀처럼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소처럼 씩씩거리면서 술만 자꾸 퍼 마시는 오 창윤이었다.

늙은이의 애욕의 질투처럼 더러운 것은 없다. 오 창윤의 머리에는 괴상망칙한 광경이 자꾸만 떠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어멈!」

「네?」

「다방골 좀 갔다 와요.」

그러는데 대문 밖에서 자동차 멎는 소리가 나면서 춘심이의 혀꼬부라진 말소리가 들려 왔다.

「요 어여쁜 안타깨비야. 무어가 무서워서 내 집엘 못 들어 오는 거야?…… 바이, 바이! 미스터 . . 안타깨비!」

이윽고 자동차는 다시 사라지고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멈! 문 좀 열어요! 행복의 문을 활짝 좀 열어 재껴요!」

신을 거꾸로 신고 당황히 뛰쳐 나가는 식모와 술잔을 든 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오 창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