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창윤과 백 영민
편집1
편집영민은 먼저 자기 집안 사정을 간단히 소개한 뒤에, 열세살 때 허씨 딸 한 사람을 민며느리로 맞아 들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아버지의 의협심은 드디어 불량배 박씨 일가의 원함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그 박씨 딸 한 사람이 자기에게 짝사랑을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와 자기는 그 외로운 신세를 지닌 허씨 딸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았으나 그 사랑을 마침내 한 사람의 이성으로서 받아들이지를 못 하고 무슨 혈육을 나누운 누님처럼 사랑하였다는 이야기와 영민이가 일본 유학을 떠나는 날, 허씨 딸이 절망의 구렁지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돌아오는 길에서 박씨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할 뻔한 이야기와 은장두로 사나이의 눈을 찌르고 탑골동을 떠났다는 대목에서 오 창윤은 돌연
「잠깐만 백군!」
하고, 영민의 이야기를 막았다.
「동리 이름이 무엇이라구 그랬지?」
「탑동리지만 탑골동, 탑골동 하고 부릅니다.」
「탑골동?」
오 창윤의 얼굴이 무섭게 긴장을 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춘심이, 아니 분이의 고향이 아닌가!
「은장두로 눈을 찔리운 그 사나이의 이름이 뭣이지?」
그 말에 영민은 묵묵히 오 창윤의 긴장된 얼굴을 쳐다보다가
「박 준길입니다.」
「응?……준길이! 으음 ──」
오 창윤은 황급히 들었던 술잔을 탁 하고 술상 위에 놓았다.
그것은 분명히 춘심이의 오빠가 아닌가!
「그리고 백군에게 짝사랑을 하였다는 그 여인의 이름은?」
영민은 한참 동안 오 창윤의 그 너무나 당황한 얼굴을 부처님처럼 말없이 바라보고 앉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박 분이 ── 기생이 된 후 부터는 박 춘심이라고 부릅니다.」
「박, 분, 이! 음 ── 이게 대체 어찌 된 노릇인고!」
태산이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한 옛날 글귀를 오 창윤은 그 순간, 세상이 넓다 한들 하늘 아래 땅이로다, 하고 마음속으로 제 멋대로 해석을 하면서 놀란다.
영감의 계집이 박 춘심이라는 말을 줏어 들은 부인도
「아이, 어쩌면?……」
하고, 외치면서 깜짝 놀란다.
「아, 그 박 준길이란 사람이 지금 헌병 노릇을 하는 이가 아닙니까? 박준길이라는 애꾸눈이……」
하고, 그때 죽혁이가 묻는 말에
「그렇습니다. 헌병 앞잽이지요.」
그 말에 오 창윤은 거듭 놀라면서
「김군, 준길이를 아는가?」
「네, 언젠가 한번 제 병원으로 찾아 왔던 적이 있읍니다.」
「무슨 일로?」
「아, 저…저 손에 부스럼이가 났다구……」
준혁은 대답을 피했다. 오 창윤을 협박한 장 일수의 행적을 더듬으려고 신성호의 뒤를 밟아서 찾아 왔었다는 이야기를 감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 창윤은 그때 당황한 마음을 억지로 진정하며
「그래 백군은 그 춘심이란 여자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도 잘 알겠군?」
「잘 알고 있읍니다.」
「아, 아, 그, 그래!」
오 창윤의 숨결이 무척 가쁘다.
「거기 대한 이야기는 뒤로 밀고 어서 군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요.」
거기서 영민은 다시 동경서 유경이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자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인생의 꿰도를 부설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총명한 반려자를 발견하고 백년해로의 굳은 약속을 바꾸었다는 말을 숨김 없이 이야기 하고 유경은 지금 임신 중이라는 말을 하였을 때 일동은 이구동성으로
「뭣이?……」
하구, 외쳤다.
「유경이가 임신을 했다구요?……아니, 그것이 사실 말이요?」
오 창윤의 그 허덕이는 부르짖음이 일동의 놀라움을 대표하듯이 튀어 나왔다.
「사실이 올시다!」
영민은 머리를 숙이면서 분명히 대답하였다.
「아이머니나! 저 일을 어찌노?」
부인은 누구 보다도 더 놀라면서
「글세 암만 해두 어딘가 좀 수상하더니만…… 아이 어머니나!」
그때 오 창윤은
「음 ──」
하고, 깊은 신음을 하고 나서 침착한 목소리로
「잘 알겠소! 분명히 이야기를 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오. 잘 알겠소.
그만 했으면 잘알아 들었소. 임신은 몇 개월이요?」
「육개 월입니다.」
「좀더 자세한 것을 이야기해 주시요. 유경인 왜 행방불명이 되었소?」
「첫째로는 제게 불찰이 있었읍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 어떤 중상 때문에 유경씨가 저를 지나치게 오해를 했읍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여 보시요.」
2
편집「五년 전 제가 허씨 딸과의 결혼을 거절하고 동경으로 건너 갈 때, 가친께서는 극도로 분노하시어서 이후 어떤 여자와도 정을 통하여서는 아니 되리라는 굳은 맹세를 저에게 시켰읍니다.」
오 창윤은 머리를 끄덕이며
「어떤 여자와도 정을 통하지 말라! 음, 그래 군은 그것을 맹세하였소?」
「했읍니다.」
그 말에 오 창윤은 얼굴을 번적 들면서
「했다?……」
「했읍니다. 제가 결혼을 거절한 것은 딴 여자에게 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였읍니다.」
「허어!」
오 창윤의 감탄사가 대단이 길다.
「될수만 있으면 일생을 딴 여자에게 정을 두지 않고 지나려 하였읍니다.
그것이 늙으신 아버님에게 바치는 저의 단 하나인 효성의 길일 뿐만 아니라, 그 불행한 여인에게 주는 저의 단 하나인 성의를 표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훌륭하오!」
「그러나 저는 끝끝내 아버님과 바꾸운 맹세를 이행하지 못하였읍니다. 노력은 하였읍니다만 어찌 할 수가 없었읍니다. 아버님께 드리고자 한 저의 효성 보다, 그 여인에게 바치고자 한 저의 성의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보람있는 것을 유경에게서 발견하였읍니다. 지나간 겨울 방학에 가친께서는 저와 유경씨와의 관계를 아시고 대단히 격분하셔서 부자지간의 인연을 손수 끊으셨읍니다.」
「응? 인연을 끊었다?……집을 쫓겨 났다는 말이요?」
영민은 머리를 숙였다.
「학비 문제는 어떻게 되었소?」
「끊어졌읍니다. 그러나 선생님, 아버님을 나무래서는 아니 되십니다. 생각이 약간 고루하신 데가 계시지만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거기서 준길의 아버지 박 삼룡이와 아버지의 관계를 이야기하여 아버지가 땅을 팔지 않은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였을 때
「음, 훌륭하신 분이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있다는 말이 꼭 들어 맞았소!」
하고, 오 창윤은 날로날로 몰락하여 가는 백 초시의 가운에 깊은 동정의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래 학비가 끊어졌으면 학교는 어찌 되었소?」
「고학을 하고 있읍니다.」
「고학을?……고학은 무엇을 하오?」
「…………」
영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금도 상관 없으니 말해 보시요. 군은 좋건 싫건 내 딸의 남편 될 사람이요. 사양 말고 이야길 하오.」
「그러나 그런 것은 아실 필요가 없으실 것 같읍니다.」
「알 필요가 있는 것이요. 군이 그처럼 탐탁히 보아 준 오 유경이의 부모가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니까 ──」
「어떤 제빵소에서 빵을 배달하고 있읍니다.」
「빵을 배달한다고?……」
오 창윤은 놀라면서 영민의 얼굴을 한번 더 탐탁히 쳐다 본 후에
「보수는 얼마나 되오?」
「그 이상 물어 주시지 마십시요.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한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음, 그렇다면 구태여 묻지 않겠소. 그래 유경인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요?」
「제가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모를 것입니다.」
「모른다고?……그런 중대한 일을 어째 알리지를 않았소?」
「알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알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소?」
「저는 다만 유경씨를 위하여 노력을 할 필요는 느꼈읍니다만 그 노력을 상대자에게 표시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못이요! 큰 잘못이요! 파탄의 원인은 거기 있었소. 유경이가 어떠한 동기로써 군을 오해했는지 모르되 양친과 인연을 끊고 집을 쫓겨 나고 빵 배달을 하고 ── 그러한 눈물겨운 노력을 군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일 유경이가 알았다면 유경은 절대로 군을 오해하지 않았을 것이요. 만일 그런 사실을 알고도 유경이가 군을 오해하였다면 나는 그런 경박한 딸을 둔 것을 깊이 후회하오.」
「그렇습니다. 제가 불찰이 있었다는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그러나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은 저번 유경씨가 잠간 귀국했을 때 ──」
거기서 영민은 자기 하숙에서 유경이와 최후의 작별을 하던 날 밤의 광경을 숨김없이 말하였을 때
「잘 알아 들었소. 모든 원인은 춘심이에게 있는 것이요. 음, 기구한 운명이요. 늙으막에 한번 외도를 해 보자는 것이 이러한 벌을 내 가정에 내린 것 같소!」
오 창윤은 분하고 괘씸하여 치를 부들부들 떨었다.
「천벌이지, 천벌이야!」
부인은 눈물을 글썽글썽하며
「그래 여섯 달이나 된 몸을 가지구 유경인 어디로 갔다는 말이요?」
「음, 원체 성미가 뾰족한 애가 돼서 걱정이요.」
「큰일을 저질지나 않았으면 오작 좋겠소?」
일동은 암담한 마음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닐 유경이의 가여운 신세를 생각하며 묵묵히 앉았다가
「자아, 이러구 앉았을 때가 아니요! 백군은 피곤 하겠지만 오늘 밤차로 나와 같이 동경으로 떠나야겠소.」
하는 오 창윤의 말에 일동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춘심이를 한번 만나 봐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