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혁과 백 영민
편집1
편집행복은 먼 산 너머 있는 것이 아니고 눈 앞에 있다는 현실주의자 김 준혁 박사! 지나간 날 유경이가 영민을 내 놓고는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아 한다는 진실한 과학자 김 준혁!
그 김 준혁이가 오늘날 백 영민 앞에 뜻하지 않고 나타난 것이다.
그때 부인이 들어 오면서
「아니, 동경서 오셨다구요?」
하며, 유경이에 관한 무슨 소식이나 갖고 온것이 아닌가고, 그 어떤 커다란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네.」
일단 앉았던 몸을 일으켜 영민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사모님두 좀 앉으시지요. 이 학생이 바로 그 백 영민이란 사람입니다.」
「아이머니나?……」
부인은 후닥닥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처음 뵙겠읍니다. 백 영민이란 사람입니다. 너무 돌연히 찾아 와서 저으기 놀라실 줄을 모른 바는 아니었읍니다 마는 사세부득이 이처럼 찾아 왔읍니다.」
「아이머니나!」
하고, 부인은 한번 더 놀라며 학생의 아래 위를 무섭게 훑어 본다.
그때, 준혁은 엄숙한 목소리를 물었다.
「당신의 용건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이편에서 먼저 당신에게 물어 볼 말이 있읍니다.」
「무엇이든지 물어 주시요.」
영민은 조용히 대답하였다.
「당신은 혹시 유경씨의 소식을 아십니까?」
「…………」
영민의 표정이 무섭게 놀란다.
「역시 유경씨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읍니까?」
그러면서 영민은 괴로운 듯이 머리를 푹 수그리었다.
「자세한 것을 이야기 해 주시요. 유경씨는 약 두주일 전에 동경서 일단 돌아 왔다가 다시 동경으로 간다는 간단한 편지 한 장을 정거장에서 띄워 놓고는 떠나 갔읍니다. 그리고 그때 유경씨는 아주 집을 떠날 작정으로 몰래 옷가지를 챙겨 가지고, 그리고 피아노를 팔아 가지고 떠나 간 사실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고 집안에서는 여간한 걱정이 아닙니다.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여 주시요.」
「아, 그렇습니까!」
영민은 고개를 수그린채 깊은 우수와 함께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경씨는 다시 동경으로 왔읍니다. 그러나 그 어떤 피치 못할 뜻하지 않은 우연한 사실에 봉착하여 유경씨는 다시 어디론가 행방불명이 되었읍니다.」
「행방불명이라고요?」
부인과 준혁이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렇습니다. 저는 행여나 집으로 돌아온 것이나 아닐까고 부랴비랴 이처럼 달려 왔읍니다마는…」
그러면서 영민은 법정에 선 죄수처럼 두 사람 앞에 머리를 공손히 숙이면서
「민망스럽습니다! 유경씨의 행방불명에 대한 모든 책임은 오직 저에게 있읍니다.」
「그 책임을 당신은 충분히 이행할 수가 있겠읍니까?」
「있읍니다!」
「어떠한 방도로 이행하겠읍니까?」
「저의 생명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저는 책임 이행에 전력을 다하겠읍니다.」
「그러나 유경씨의 부모 되시는 분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따님의 생명과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일 개 당신의 생명을 똑같이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요. 당신의 생명을 백 개 희생해 보앗댔자 사랑하는 따님 유경씨의 생명 하나를 보상(補償)하지 못할 것이요. 그래도 당신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할 수가 있겠소?」
그순간, 영민은 숙였던 머리를 후딱 들었다. 그리고 엄숙하면서도 힘 있는 한 마디가 무섭게 튀어 나왔다.
「말을 삼가시요! 말이란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으로써 형성 되는 것이 아니요. 말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요!」
「뭣이?」
김 준혁 박사의 안색이 무섭게 긴장되는 순간이다.
언제 돌아 왔는지 그즈음 오 창윤은 응접실 문 밖에서 방안의 광경을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 창윤은 벌써부터 집에 돌아 와 있었다.
효자동 춘심이의 입으로부터 유경이가 집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 온 오 창윤은 동경서 손님이 왔다는 식모의 말을 현관에서 듣고 황급히 응접실로 들어가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반쯤 열려진 응접실 문 밖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방안에서 벌어진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흐응, 저 학생이 바로 유경이가 말하던 백 영민이라는 학생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학생의 태도를 객관적 입장에서 잠깐 관찰할 셈으로 멈추었던 발걸음이었다.
그러던 것이 학생과 준혁의 대화의 내용이 점점 격화해짐을 따라 논리의 전개와 아울러 두 젊은이의 인격적 대조에 흥미를 느끼면서부터 좀더 이대로 서서 구경을 해보자는 뱃장을 오 창윤은 가졌다.
2
편집이집 주인 오 창윤이가 자기네 등 뒤에서 듣고 있는 줄도 모르는 두 젊은이는 감정과 감정의 대립상태에서 상대방의 논리의 모순을 적발하고 있었다.
준혁은 긴장된 어투로 반문하였다.
「말을 삼가라고?……대체 무슨 뜻이요?」
「말은 입으로 하지 말고 머리로 하라는 뜻입니다.」
학생의 어투가 더한층 긴장되어 있었다.
「무슨 뜻이요? 똑똑히 말을 하시요!」
「하리다. 과연 유경씨의 양친에게 있어서는 유경씨 한 사람의 생명이 나 같은 사람의 생명 백 개를 희생하여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나 나는 지금 유경씨의 양친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 유경 대(對) 백영민이가 문제입니다. 오 유경이라는 한 사람의 생명에서 움터 나온 하나의 인격과 백 영민이라는 한 사람의 생명에서 발아(發芽)한 하나의 인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 당신이 과거에 있어서 오 유경과 어떠한 인연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읍니다마는 이러한 가장 엄숙한 자리에 있어서 양친의 입장을 끄집어 내어 나의 인격을, 아니 나의 생명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소위가 아니오니까?」
「신사 답지 못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만일 조리를 갖춘 예의 있는 신사라면 나의 생명의 가치를 평가하기 전에 먼저 내가 지는바 책임의 원인을 물어 주었어야 할 것 입니다. 그것도 물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이 나에게 대하여 책임 추궁만을 일삼으려는 것은 당신의 심중에 한점 맑지 못한 부분이 개재하여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 그것이야 말로 당신의 선입관이요. 당신은 과거에 있어서의 나와 유경씨와 관계를 미리부터 짐작하고 나에게 대하여 반대 공격을 하는 것이 분명하오. 당신이야말로 심중에 일점 맑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을 수술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요?」
「아니요. 나는 당신의 신분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논리를 공격하는 것이요. 당신이 오늘날 이 자리에서 이 사건에 참견할 의사를 가졌나면 먼저 나의 책임을 추궁하기 전에 그 책임의 원인을 물어 주시요.」
바로 그때였다.
「내가 그 원인을 물어 드리리다!」
하면서 선뜻 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가장 심각한 표정을 띠인 이집 주인 오 창윤이었다. 두 젊은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서들 그대로 앉으시요. 먼 길에 얼마나 고생스러웠소?」
「선생님, 처음 뵙겠읍니다. 백 영민이 올시다.」
영민은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벌써 다 짐작하구 있었소. 오 창윤이요. 유경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요.」
오 창윤은 털석 의자에 걸터앉으며
「당신도 여기 앉으오. 앉아서 백군의 이야기를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 봅시다.」
하고, 부인에게 권하다가
「아, 당신은 어멈을 불러 술상을 채리도록 얘기를 하시오. 목간물도 데도록 일러 두시요. 먼 여행엔 한 잔 술과 뜨뜻한 목욕이 제일 약이요.」
「목욕 물을 벌써 데 놨는걸요.」
「아, 그래요? 그럼 백군, 먼저 한탕 들어 갔다 나오시오. 여보, 당신이 좀 안내를 하구려.」
「아니 선생님, 저는 사양하겠읍니다.」
「어서 들어 갔다 나오시오. 몸이 풀리면 마음도 풀리는 것이요.」
「후의는 고맙습니다 마는 저는……저는 지금 그러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읍니다. 용서하십시요.」
「없는 여유를 만들자는 것이요. 그러나 굳이 사양을 한다면 더 권하지는 않겠소. 그럼 김군, 백군과 같이 안방으로 들어 가도록……」
「선생님, 저는 가 봐야겠읍니다. 환자를 그냥 내버려 두고 왔읍니다.」
「될 말인가! 이 넓은 세상을 그처럼 좁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한 잔 술을 나누면서 백군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막혔던 군의 감정이 도리어 풀릴지 또 누가 알겠나?」
「선생님, 무슨 말씀을……」
「아니야. 내가 다 알구 있어. 내가 눈여겨 본 이만큼 군도 그리 편협한 인간은 아니야.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도 있는 법이야.」
그러면서 오 창윤은 앞장을 서서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 갔다. 두 젊은이도 그 뒤를 묵묵히 따라 들어 갔다.
이윽고 안방에서 술상이 벌어졌다. 영감의 눈치를 짐작한 부인은 오손도손 술상을 탐탁히 채려 들였다. 둘 중에 하나는 사위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준혁과 영민은 오 창윤의 권에 못이겨 서너 너덧 잔씩 받았을 뿐, 오 창윤만이 얼근해 졌다.
부인은 수심 찬 얼굴로 술상 옆에 붙어 앉아서 불의의 침입자인 백 영민의 얼굴을 눈, 코, 귀, 입, 할것 없이 돌아가면서 뜯어 본다. 뜯어 보면서 준혁이의 그것들과 자꾸만 비겨 보는 것이다.
「자아, 그럼 백군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볼까?」
「네, 말씀 드리겠읍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읍니다. 그것을 여쭙고자 달려온 저 올시다. 그러나 유경씨와의 관계를 여쭙기 전에 제 짧은 인생의 이력서를 설명하겠읍니다.」
「좋아」
오 창윤은 머리를 끄덕끄덕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