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57장

여성 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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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은 몰랐다. 아버지를 만나기만 하면 당장에 무슨 끝장이 날줄로 믿었던 유경이언만 이렇게 뱀장어처럼 미끈하고 손에서 빠져 나갈 줄은 전혀 몰랐다. 어찌나 능청 맞은지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슬슬 넘긴다는 어머니의 말이 새삼스럽게 생각키는 것이다.

그래서 유경이가 휙 아버지의 뒤를 따라 나가려는데

「아가씨.」

하고, 춘심이가 불렀다.

유경이의 모욕을 참지 못하여 조금 전까지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춘심이의 입술이 따리야꽃처럼 화려하게 웃으며서 던지는 한 마디였다.

「………」

유경은 댓돌을 내려 서려다가 멈칫하고 뒤를 돌아 보았다.

「올라 와서 놀구 가시지 않구, 그래 종시 그대루 가세요?」

「난 당신하구 놀러 온 사람이 아냐요. 당신은 그저 잠자쿠 보구만 있음 되잖어요? 쓸데없는 간섭 하지 말아요.」

여전히 똑똑 떨어지는 말투였다.

「아이 참, 아가씨두 어쩌면……」

가슴 속에선 욱하고 불이 붙어 올라 오건만 춘심의 얼굴은 여전히 화려하다.

화려한 그만큼 춘심의 인생은 유경의 그것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내 이름 유경이야요. 아가씬 또 무슨 아가씨야요?」

「아이 참, 분명두 허시구, 똑똑두 하시네!」

춘심이의 말투가 점점 삐뚜러져 간다. 춘심이 같은 여자가 삐뚜러지기 시작하면 걷잡질 못하는 법이다.

「왜 분명한게 서운해서 그래요? 그 누구처럼 흐리터분 하지를 못해서 그래요?」

「흐리터분한 막걸리같은 인생두 인생이구요, 아가씨처럼 샘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 같은 인생두 인생이구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분명하시단 잘못 하믄 큰 코를 다치리다.」

「무슨 뜻이야요? 똑똑히 말을 해 봐요―」

유경은 한 걸음 우뚝 다가서며 춘심을 쏘아 본다.

「흥, 아까 뭐라구 그랬었죠?…… 스스로 모욕을 받구 싶어서 받는 사람은 말할 것 없다구요?」

「그렇지 않구 뭐야요? 왜 좀 자각있는 인생을 못 살아요?」

유경은 아까 춘심을 첫 눈에 보는 순간, 그 활짝 피어난 다리리와도 같은 미모에 이유 모를 반항심을 품었었으나 춘심을 나무랄 하등의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돌아 가려던 유경이었다.

그러나 판국이 이렇듯 되고 보니 그대로 순순히 돌아 가기에는 콧집이 글렀다. 유경은 한번 춘심을 마음껏 학대해 주리라 생각하였다.

그와 반대로 춘심은 또 춘심이 대로 요 당돌한 애숭이를 어떡허면 한번 혼을 내나? 찍 소리도 못하게, 그리고 아주 무자비하게 진흙 발로 한번 싫건 문질러 주리라 생각하였다.

「자각있는 인생이라구요? 흥, 팔자 좋은 헛소리는 학교 교실에서나 해 봐요. 이거 왜 이러시우?」

「왜 뭐가 못 마땅해서 그래요? 하필 왜 곁붙이 살림이요? 왜 남처럼 똑똑한 결혼생활을 못하는거유? 왜 더럽게 기생충이야?」

「뭣이 더럽다구?」

찍하고 성냥을 그어 담배를 붙이며

「이거 왜 그러는 거야? 누구는 잘 나서 대학엘 다니구, 누구는 못 나서 첩 노릇을 하는 줄 알아?」

그러면서 춘심은 담배 연기를 힘껏 빨아 유경이의 얼굴에다

「후훗 ──」

하고, 뿜어 주었다.

서로가 상대방의 자존심을 꺾어 줌으로써 승리의 쾌감을 얻으려는 두 젊은이의 대립된 감정이었다.

「아이, 더러워!」

유경은 휙 풍겨 오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막으며 그렇게 외쳤다.

「흥, 목구멍에 거미 줄이 안 쓰니까 제법 큰 소리만 탕탕 하구…… 아직 비린내 나는 풋고추가 뭘 안다구 날뛰는 거야? 뭐, 자각있는 인생? 똑똑한 결혼생활?…… 누구는 몰라서 못하는 줄 알아? 가방 들구, 양복 입구 학교나 다니니까 나같은 건 쓰레기 통의 구데기 같애?」

「…………」

유경은 대답을 못하고 사지를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아아, 이런 모욕이 어디 있으랴! 유경은 오늘 날까지 이런 혹독한 모욕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유경은 격분으로 말미암아 온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도 입을 열어 대꾸를 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분했다.

춘심이의 말 마따나 이때까지 쓰레기 통의 구데기 같이 생각해 온 한 낱 기생의 입으로 이러한 혹독한 모욕을 받은 것도 심외한 일이거니와 그 기생의 입으로부터 지금까지 정말 등한히 여겨 왔던 인생의 심각한 일면을 교훈 받을 줄은 전혀 뜻밖이었다.

「분하지만 내가 졌다!」

하는, 생각이 유경이의 이성을 아프게 자극하였다.

「그래 자각있는 인생을 걷고 똑똑한 결혼생활을 자기는 할것 같애?」

「왜 못 할것 같애요?」

「흥, 당신이 그런 결혼을 한다믄 내 손가락에다 불을 켤테야!」

「무슨 뜻이야요? 똑똑히 말해요!」

유경이가 입술을 깨물면서 다가 들었다.

「박 춘심이가 오 창윤의 첩 노릇을 하는 것과 오 유경이가 백 영민의 첩 노릇을 하려는게 뭣이 다르단 말이야?」

「옛, 백 영민?」

그것이야 말로 청천의 벽력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잘 놀아 먹었다! 놀래긴 왜 놀라는 거야? 백 영민이가 총각인 줄 알아?」

「아, 잠깐만, 잠깐만……」

유경은 비틀비틀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마루 기둥에 의지하며

「그것이……그것이 정말이야요?」

「이거 왜 이처럼 분명치가 못해? 본처가 있음 첩이지 뭐야? 장가를 갔음 총각은 아니지 뭐야?」

「그건……그건 어떻게 알아요?」

「박 분이가 탑골동 태생인 줄을 몰라?」

「아아, 탑골동! 그래요. 분명히 그이는 탑골동이야요!」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일음이다.

「흥, 백 영민은 어렸을 때 허씨 딸에게 장갈 들었어. 아주 예쁘고 얌전한 색시였어. 그러나 본래가 바람잡이 백 영민은 딴 여자에게 마음을 두고 본처를 내쫓았어.」

「그이가……그이가……바람잡이라구요?」

유경은 하늘이 핑핑 돌았다.

「처음에야 착실해 뵈지. 흥, 그러나 지나보면 바람잡이야! 누가 처음부터 바탕을 내놓는 바람잡이가 어디 있담?」

「아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이 만은 절대루 그럴 리가 없어요! 그이는……」

「호호호…… 믿는 자는 행복하지! 다 나처럼 한번씩 속아 봐야 아는 거야.」

「뭐요?……나라구요?……」

「나를 몰라?…… 박 분이를 몰라? 흥, 모르면 행복하니까! 그이가 누구 때문에 본처를 내쫓은 줄 알아? 나야, 나! 그러나 아아, 불쌍한 분이! 분이 두 일시는 행복했지만 그러나 분이두 역시 그 작자에게 속았어! 색마! 그이는 색마야!」

「………」

「색마?」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그럴 리가 없어요! 거짓 말이야요. 거짓 말이야요!」

하고, 유경은 실신한 사람처럼 마루 끝에 덜썩 주저 앉았다.

거짓 말이람 나두 「 기쁘겠어. 흥, 四[사]년전 그이가 처음으로 동경을 들어 가던 남행열차 二[이]등 침대실에서 그이가 누구와 같이 여행을 했으며 누구와 서로 입술을 바꾸었는지 돌아 가서 물어 봐요. 달빛 어린 승강구에서 밤새도록 군밤을 까던 다정하던 그리운 내 사람이었어. 아아, 그러나 어여쁜 악마! 나같은 천한 몸임 모르지만 그래 남의 집 귀한 아가씨에게 또 손을 댔어?」

「증거가…… 증거가 뭐야요? 무슨 증거가 있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야요?」

유경은 발악 하듯이 외쳤다.

「증거는 그이에게 물어 보는게 젤루 정확한 증거겠지만……」

춘심은 마음이 시원해 진다. 보아라, 요 당돌한 풋고추야! 네가 뻗치면 얼마나 뻗치구 네 나를 업신여기면 얼마나 업신여길테냐?

「그러나 흥, 또 하나 얘기해 줄까?」

「무어야요? 무슨 말이 또 있어요?」

「원한담 한 가지 더 얘기해 주마. ── 저번 겨울방학에 나왔을 때, 영민이가 당신하구만 만난줄 안담 어리석은 생각이야.」

「………」

「당신하구 사이 좋게 기차를 타구 떠나간 전 날 밤, 영민이가 누구하구 만난 줄 알아?」

「누구야요?」

「물어볼께 무어야? 옛날의 연정을 잊지 못하고 동대문 밖 천일관에서 이 박 분이와 만났어!」

그 순간, 유경은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발딱 일어섰다가

「아아……」

하고, 외치며 비틀비틀 건너방 툇마루에 몸을 의지하면서

「그만 두세요! 듣기 싫어요! 인젠 그만 두어요! 다 알았으니까 그만 두어요!」

「인제야 알았어? 그러니까 지나치게 분명함 코를 다치는 법이야. 아직 비린내 나는 풋고추가 무슨 인생을 안다구 그러는 거야? 보기에는 그저 잘 익은 능금 같지? 흥, 그러나 알구 봄 영감 말 마따나 설 익은 개살구야.」

그러다가 춘심은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아, 참 아가씬 아까 증거를 보이라구 그랬죠? 아주 똑똑하신 아가씨니까 제 눈으로 증거를 보지 못하군 믿질 않으실꺼야.」

그러면서 춘심은 일어나 삼면경 위에 놓인「핸드ㆍ빽」에서 조그만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옅은 하늘빛 명주 바탕에 가는 흰「레 ― 쓰」를 두른 손수건이다.

「이것이 누구 건지 아시겠구려?」

「아, 이건……」

너무나 낯이 익은 손수건이 아닌가? 그것은 유경이가 정성을 들여 만든 손수건이었으며 영민에게 푸레센트로 보낸 손수건이 아닌가!

「아니, 이것이 어떻게……」

「그러니까 모르는 것이 행복이구 아는 것이 탈이란 말이야요. 저번 천일관에서 단 둘이 만났을 때 영민이가 잊어버리구 간 거야. 그걸 내가 줏어 두어서 마침 잘 됐군요. 그처럼 분명하신 아가씨에게 증거를 보여 드릴 수 있으니까요! 호호호…」

그러나 그때는 벌써 손수건을 움켜 쥔채 대문간을 향하여 돌풍처럼 뛰어 나가는 유경이의 뒷 모양이 오쭐오쭐 춤을 추고 있었다.

「하하하핫……하하하핫……」

춘심이의 유쾌스런 웃음이 언제까지나 멎을 줄을 모르고 흘러 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