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애인
편집1
편집이튿날 아침, 유경은 조반을 먹고 열 시쯤 해서 김 준혁 외과에 전화를 걸었다.
「준혁 오빠?」
「에?……아, 유경이! 아, 유경이가 언제……」
하고, 반가이 외치다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며
「그런데 유경씨가 언제 나왔읍니까?」
하였다 준혁의 안색이 갑작스럽게 . 변하는 것을 유경은 전화통 속에서 분명히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빠, 왜 또 유경씨유? 동생한테 존칭을 쓸램 나 이 전화 끊을테야요.
좋으세요?」
「…………」
「끊어도 좋와요?」
「…………」
「오빠! 준혁 오빠!」
「…………」
「오빠, 거기 계시우?」
「유경씨, 어서 말을 하시요.」
침착한 목소리였다.
「아이, 난 참 또 어디로 홀랑 달아나 버린 줄만 알았죠. 어쩜 오빠두 숨박꼭질을 그처럼하신담!」
「숨박꼭질이라구요?」
「후훗………전화로 숨바꼭질을 하는건 오빠 첨이죠?」
「유경씬 언제 봐도 쾌활한 분입니다.」
「분은 너무 심한데! 이러단 정말 전화가 끊길 것만 같구료.」
「…………」
「그래두 나 이 전화 좀처럼 끊지 않을걸요. 이 전활 여기서 끊었단 영영 오빠 하나 잃어버릴 것만 같아요.」
「유경씨, 언제 왔읍니까?」
「유경이 ── 하고 불러 주세요. 동생처럼 불러 주세요.」
「유경씬, 나의 생리(生理)를 무슨 기계처럼 생각하십니까? 스윗치만 누르면 기계가 돌아두 가구, 뚝 멎기도 하구, 삑 소리두 나구, 빽 소리두 나구……」
「…………」
이번엔 유경이 편에서 숨박꼭질을 한다.
「유경씨, 하여튼 고맙습니다. 이처럼 일부러 전화를 걸어 주시니 고마와요. 나도 그런 정도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서 오늘 저녁에 댁으로 가겠읍니다. 그러면 이만하고……」
준혁이가 전화를 끊으려는 것을
「가만, 가만……」
하고, 유경은 막으며 오빠 무척 심각해 「 , 졌어요. 나 그런 줄도 모르고 농담만 해서 미안해요.
저녁에 오심 나 절대로 농담 안 할테야요.」
「문학도 모르고 예술도 모르는 하나의 평범한 외과의가 심각해 졌겠읍니까?」
「…………」
「유경씨, 언제 또 동경으로 떠나십니까?」
「나 이젠 준혁씨 보구 절대로 오빠라고 부르지 않을테야요.」
「그럼 후에 뵙겠읍니다.」
「아, 잠간만 더……나 아직 아버지 뵙지 못했어요. 그래 효자동 댁으로 아버지를 뵈려 갈라구요.」
「아, 그래요? 유경씨가 언제부터 그처럼 어른 답게 되었읍니까?」
「나이를 먹음 어른이 되죠 그럼.」
「반가운 성장(成長)입니다.」
「그리구 슬픈 성장일는지도 모르죠. ── 그런데 나 정말은 아버지의 애인을 만나 보구 싶어서요. 몇번지죠?」
「七十二[칠십이] 번지 ── 종점에서 내려서 조금 들어 가다가 오른편으로 둘째 골목 막달은 집입니다. 아주 찾기 쉽지요.」
「문패는 아버지 이름이야요?」
「어디가요. 박 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읍니다.」
「박 춘심이라면서요?」
「그건 예명이구, 본명이 박 분이랍니다.」
「알았어요. 그럼 후에 ──」
유경은 전화를 끊고 응접실로 나섰다.
2
편집한사코 만류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집을 나온 유경이었다.
효자동 종점에서 내려서 준혁이가 알으켜 준 골목에 다달으니 골목 밖에 자동차가 한 대 멎어 있고 운전수가 끄덕끄덕 졸고 앉았다.
유경은 골목 안으로 들어 섰다.
── 박 분이(朴粉伊) ── 과연 막달은 집 대문에 그런 문패가 붙어 있다. 유경은 오뚜기처럼 우뚝 멎어서 지금 자기 가정에 뜻하지 않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한 여인의 문패를 쏘아 보았다.
집을 나올 때도 유경은 지금 자기 아버지의 정열을 사로 잡고 있는 그 여자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단지 믿고 있던 아버지가 아내와 딸의 하늘같은 신뢰의 마음을 배반하였다는 거기 대한 분격 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목적지에 점점 가까와 옴을 따라 유경은 춘심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여성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여잘꼬 「 ?……어여쁜 여잘까?……나 보다도 예쁜 여잘까?…… 나이가 스물 댓 밖에 안 된다니까, 이건 자기 딸같은 여자를 데리고 사는게 아냐?」
처음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던 박 춘심이가 자꾸만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였다.
「나만 못한 여자라면……」
그렇게 생각할 때는 춘심이에 대하여 약간 관대해지던 유경이도
「나 보다 예쁜 여자라면……」
하고, 생각할 때는 어째 그런지 춘심을 학대해 주고 싶은 야릇한 심경에 유경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럴 리는 없을텐데……」
그렇다. 그럴 리가 조금도 없었다. 자기의 육친인 한 사나이를 사이에 두고 자식인 유경이가 춘심이를 대적하여 항쟁을 할 아무런 이유도 유경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쁘지, 그이야 왜 나뻐?」
그렇게 결론을 지으며 유경은 문고리쇠를 쥐고 대문을 두드렸다. 대문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식모가 나와서 대문을 방싯 열며
「어디서 오셨어요?」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계세요?」
「누구 말씀이세요? 안 주인 말씀이세요? 바깥어른 말씀이세요?」
「둘이 다 ──」
「네, 두분 다 계시는뎁쇼.」
그 말이 떨어지자 유경은 식모가 방싯하니 열어 잡고 있는 대문짝을 휙 하고 떠밀며 눈이 둥그래진 식모를 대문간에 남겨 놓고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갔다.
막다른 집 대문이다. 밖에서 볼때는 예상 이외로 초라하게 보이던 집이건만 이처럼 썩 들어서 보니 , 적으나마 화단이 있고 장독대가 으리으리하고 있어야 할 장소에는 있어야만 할 세간이 안팎으로 갖추어졌다.
유경이가 중문을 선뜻 들어 섰을 때, 三[삼]간 대청에 놓인 전축에서는 긴난봉가가 잦은 난봉가로 넘어 가는 판이었고 알뜰한 술상이 놓인 바루 옆에서 지금 막 외출을 하려고 스프링ㆍ코 ─ 트까지 입은 오 창윤이가 춘심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판이었다.
3
편집「…………」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이 예상 외에 너무나 색채가 짙다. 딸같이 젊은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었을 아버지를 목격할 줄은 정말 꿈 밖이다.
올룽해진 유경의 얼굴이 확확 달아 올라 온다. 눈을 뜨고는 참아 볼 수가 없어서 돌아서 나오려다가 그만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식모의 발등을 밟을 뻔하였다.
그러한 자기의 행동이 쑥스러워 유경은 독심을 품고 다시 홱 돌아서며
「아주 호화판이시구료!」
하였다.
그말에 오 창윤은 후닥딱 춘심의 무릎에서 머리를 들고 대문간 쪽을 바라보다가
「아, 네가……네가……어떻게 여기를……」
하고, 당황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는다.
「왜 난 여기 못 오는가요?」
하면서, 유경은 뜰로 내려 섰다.
「아, 글쎄……글쎄 어떻게 이처럼 갑자기……」
무안해서 아버지는 딸의 얼굴을 똑 바로 보지를 못한다. 어젯밤 딸에게 교훈을 하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유경은 구두 발로 아버지의 전 인격을 혹독하게 문질러 주고 싶은 충동이 불길처럼 일어 났다.
「뚜뚜뚜 ──」
그때, 대문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 왔다.
「흥, 밖에 자동차꺼정 세워 놓구두…… 그래두 못 믿어워서……」
무릎까지 베셨군요! 하려다가 유경은 그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는데 전축에서는 무신경하게도 오 창윤이가 좋아하는 잦은 난봉가가 그냥 흘러만 나온다.
가는 님의 허리를 시름없이 안고 가지나 말라고 생 야단만 친다에 헤 에헤 에헤야 에헤 에헤야 어루마나 지어라 사랑이로구나 춘심이가 냉큼 일어나서 전축의 스윗치를 끊었다.
「흥, 아주 멋진 풍경이로구료!」
그때 춘심이가 화려한 웃음을 얼굴에 지으며
「아이, 아가씨두, 너무 그러시믄 아버지가 무안하시지 않으세요? 자아, 어서 이리 올라 오세요. 먼 길에 얼마나 고생스레 나오셨어요? 아이, 영감두 어서 좀 올라 오라구 그러시구려.」
「아, 글쎄 어서 좀 올라 오지 않구……」
「저거 봐요. 아버지가 이처럼 올라 오라구 그러시지 않아요? 자아, 아가씨, 올라 오세요. 그리구 영감은 어서 나가 보셔야겠수. 본부에 들어가신다구 차를 불러 놓구는 글쎄 자꾸만 소리를 한판 듣고야 나가신다는 거야요.」
그때 또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뚜뚜뚜 ── 하고 났다. 오 창윤은 모자를 쓰며
「응, 나는 나가 보겠다. 좀 올라 가서 놀다 가거라.」
「잠깐만 계셔요! 나 놀러 오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유경이가 또박또박 댓돌 위로 올라 왔을 때였다.
「앗, 이 여자가 바루 그……그 여자가 아닌가?……」
춘심은 후닥닥 놀라며 마음 속으로 그렇게 외쳤던 것이니, 아아, 이 어이 된 인연인고?…… 넉달 전 백 영민이와 함께 남행열차 속에서 한 쌍의 원앙처럼 속삭이며 식당으로 사라지던 바로 그 여자가 아닌가!
4
편집유경이가 처음 중문을 들어 섰을 때부터 춘심은 무척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이 바로 영민이와 사랑을 속삭이던 여자일 줄은 정말로 꿈 밖이었다.
넉 달 전 남행열차 속에서도 춘심을 어디선가 한번 본 여자 같아서 무척 기억을 짜아 보았으나 기억이 좀처럼 튀어 나오지 않은채 세월은 흘렀다.
언젠가 오 창윤은 요릿집 온돌 방에서 춘심의 무릎을 베고 너 내 딸 사진 좀 「 보련? 춘심이 보다 서너 너덧살 아래니까, 춘심인 말하자면 내 맏 딸이지 뭐야!」
하면서 보여 주던 바로 그 사진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춘심은 좀처럼 생각해 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반 년 전에 보았던 그 사진의 기억이 오늘 와서야 비로소 넉 달 전의 기억을 새롭힌 것이다.
「아버지, 나한테 무슨 말 할것 없으세요?」
춘심의 새빨간 심장이 젖가숨 밑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즈음에 새파랗게 화가 난 유경의 샐쭉한 입술이 아버지를 향하여 톡 내 쏘았다.
「너한테 무슨……무슨 말이……」
오 창윤은 어서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어서
「이야기가 있거든 이따 저녁에 하자. 난 좀 바빠서 나가 봐야겠다.」
그러면서 마루에서 내려 오는 것을 유경은 막으며
「아버지가 아무 말 없으시담 내가 할테야요. 그래 이게 뭐야요? 무슨 꼴이야요?」
「얘얘, 글쎄 난 좀 바쁘다니까……」
「그래 이게 딸 자식에게 하는 교훈예요? 어젯밤 딸에게 하던 훌륭한 교훈은 다 어디로 도망 갔수? 인생이 뭐 어떻구 결혼이 뭐 어떻세요? 이것이 그래 아버지의 인생 기업이요? 흥, 아주 훌륭한 기업이시군요.」
「얘, 좀 잠자쿠 있으려므나. 넌 너무 지나치게 분명한 것이 탈이야. 야아, 난 좀 바쁘다. 좀 비켜라.」
「그래 아버진 잘 익은 능금이 돼서 이러세요? 설 익은 개살구는 이런 훌륭한 기업을 못 할까봐 걱정을 하셨수? 돈 없음 첩 살림 못할까봐 그래 걱정예요?」
「얘얘, 글쎄 그런게 아니야. 그것과 이것과는 다르지 않느냐?」
「뭐가 달라요? 다르담 남자에겐 여성을 모욕하는 권리가 있달 뿐이야요.
아버지는 두 사람의 여성을 모욕한 사람이야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욕하구 그리구……」
힐끗하고 유경은 춘심을 흘기며
「그리구 저 사람을 모욕했어요. 그러나 저 사람은 스스로 모욕을 받고 싶어 받은 사람이니까 할 수 없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야 말로 억울한 모욕이야요!」
그 순간, 춘심의 입술이 무서운 속도로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었다.
그때 대문이 찌궁 하고 열리며 운전수가 기다리다 못해 들어 왔다.
「영감, 시간이 많이 넘었는뎁쇼.」
「아, 그래? 자아, 내 다녀 올께. 넌 좀 놀다 가거라.」
「아냐요. 둘 중에 하나를 택하세요. 이 가정을 택하실램 아현동 가정을 버리시구 아현동 가정을 택하실램 이 가정을 버리세요.」
「그래 그 말에 대답을 하면 날 놓아 주련?」
「그럴테야요.」
「아, 거야 두말할 나위도 없잖느냐? 아현동이야 내 조강지처가 있는 소중한 가정이 아닌가.」
그러면서 오 창윤은 유경이 어깨 위로 춘심에게 눈을 한번 껌벅해 보이며
「자아, 알았지! 그만 했으면 알았지?」
딸에게 하는 다짐인지, 춘심에게 하는 다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을 남겨 놓고 오 창윤은 도망하듯이 대문 밖으로 총총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