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이의 귀국
편집1
편집동경을 떠난지 사흘만에 유경은 경성역에 내렸다.
오후 다섯 시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손가방을 하나 댕그라니 들었을 뿐, 아주 간단한 여행이다. 마치 시내 학교에서 나 돌아 오는 것처럼 유경의 표정은 태연하다.
부산서 유경은 집에 전보를 칠까도 생각했으나 전보를 치면 아버지는 또 준혁을 정거장으로 내보낼 것이 빤해서 그만 두었던 것이다.
준혁이가 무서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의 유경으로서는 일부러 준혁이와 대면하여, 서로가 다 어색한 장면을 제 손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급적 유경은 준혁일 피하고 싶었다. 아니, 준혁이 편에서도 될 수만 있으면 자기를 피하고 싶을 것이라고 유경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은 개찰구를 나서는 순간 유경은 무의식중에 어린애처럼 쓸쓸해 지는 자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준혁의 무척 반가와 하는 얼굴을 「푸렛ㆍ홈」에서 발견하지 못한채 차에서 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쓸쓸함은 자기의 성장(成長)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유경은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택시를 잡아 타고 아현동을 향하였다.
「어머니가 정말 위독하신게 아닐까?」
자동차가 점점 집에 가까와 짐에 따라 유경은 갑자기 걱정이 된다. 이때까지 어머니의 병환을 넘겨잡고 있던 자기 자신을 뉘우치기 시작하였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벌써 세상을 떠났음 어쩌나?……」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의 그 슬픈 광경을 유경은 문득 연상하였다. 집안 사람들의 곡성(哭聲)이 유경이의 귀 밑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운전수 양반, 좀더 빨리 몰아 주세요!」
조바심이 유경의 전신을 휩쓸기 시작하였다.
「나 무척 바빠요! 잘못 함…… 잘못함 어머니 운명하시는 걸……」
「아, 그러세요?」
운전수의 얼굴이 긴장을 하는 순간, 위잉하고 자동차는 속력을 냈다. 서대문 네거리를 외인편으로 커 ─ 브를 할 때 하마트면 자동차는 교통 순사의 제지를 받을 뻔하였다.
「여기서 오른 편으로……」
「아, 아현동 꼭대깁니까?」
「중턱이야요.」
이윽고 차는 언덕 길을 쏜살같이 올라가다가 오 창윤의 문패가 붙은 양옥 정문 앞에서 멎었다.
「감사합니다.」
「어서 빨리 들어가 보세요.」
유경은 요금을 치르기가 바쁘게 현관을 향하여 뛰어 들어 갔다.
집안이 조용하다. 조용한 것이 한층 더 유경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현관을 들어 서자 긴 복도를 안방으로 뛰어 들어 가며
「어머니!」
하고, 유경은 외쳤다.
「아, 아가씨가 아니세요?」
부엌에서 식모가 뛰쳐 나왔다.
그러는데 안방 유리 문이 드르렁하고 열리며 웃통을 벗어 부치고 경대 앞에서 화장을 하던 어머니가 한손에 「파프」를 든채
「아이구, 네가 인제야 오는구나!」
하고, 수선을 떨며 뛰쳐 나왔다.
「옛?」
유경의 발바닥이 얼어 붙을 듯이 방문 앞에서 오뚜기처럼 우뚝 멎는다.
위독하다는 어머니가 웃통을 벗어 부치고 화장을 하고 있지 않는가!
2
편집어린애에게 따귀를 얻어 맞은 오뚜기처럼 눈이 울룽해서 서 있던 유경의 얼굴이 그만 기가 막혀서
「헤에?」
하고, 입을 벌린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저 딸의 얼굴을 보는 것이 기뻐서 유경이의 손을 잡아 끌며
「그래 어미가 이처럼 눈이 빠지게 기다리구 있는데, 글쎄 넌 뭣이 그리 바빠서 편지 한 장 변변히 못 하느냐?」
「아이, 참 어머니두! 사람들 골려두 분수가 있지 글쎄……」
유경은 어머니 앞에 펄썩 주저앉으면서 무척 나무라는 것이다.
「골리긴 누가 골린다는 말이냐?」
「골리지 않구 뭐야요? 동경서 예까지 숨이 하늘에 닿아서 뛰쳐 온 사람은 누군데?」
그것은 거짓 말이다. 유경이가 살뜰히 어머니 걱정을 한것은 경성역에 내리면서 부터였다.
「그러지 않군 좀처럼 나오지 않는걸 어떻거니?」
그러면서 어머니는 씽긋이 웃는다.
「그렇게 나오래선 뭣 하려우?」
「네가 자꾸만 보구 싶은걸 그럼 어떡하니?」
「아이, 참! 누구가 어른이구 누구가 아이인지 모르겠구료.」
「그래 네 말 맞았다. 네가 어른이구 내가 아이다.」
그러는 어머니를 유경은 이상 더 나무랄 수는 없었다. 어린애처럼 단순한 어머니, 맘이 내키면 잠시도 참을 줄을 모르는 어머니의 성격은 유경을 어른들처럼 관대히 용서하는 것이다.
「어머니, 어서 저고리나 좀 입으세요. 남 부끄럽게! 위독하다는 전보를 쳐놓고 한가스레 화장만 하구 앉았는 어머니가 세상에 어디 있담?」
「여기 있잖느냐? 후후훗……」
하고, 웃으며 어머니는 약간 부끄러운 듯이 저고리를 입는다.
四十[사십]의 고개를 한두 살 밖에 넘지 않은 어머니의 그 윤택있는 풍만한 피부를 눈 앞에 보는 순간, 지나간 겨울 방학에 왔을 때는 통 느끼지 못하던 부끄러움을 오늘의 유경은 느끼는 것이다.
「이담엔 정말 그런 전보는 치지마세요. 어머니!」
「편지로는 안 나오는걸 그럼 어떠허니?」
「이후엔 정말로 어머니가 위독하셔도 안 나올테야요.」
「그땐 장사 지내려 오램 되지 않어?」
「아이 참 어머니두 정말!…… 남 눈 코 뜰새없이 바쁜데 어머니는……」
「너두 너이 아버지를 닮았느냐? 밤낮 눈 코 뜰새없이 바쁘다구 하면서……」
그러나 그 한 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경은 물론 알 길이 없었다.
「참 아버지는 어디 나가셨어요?」
「눈 코 뜰새 없다구 밤낮 집을 비구 댕기더니 어제 오늘을 강태공이가 됐는지 뒷 뜰에서 화초만 가꾸신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식모를 불러
「유경이가 왔다구 들어 오시라구 그래요.」
「네.」
닷새만에 한번, 열흘만에 한번씩 어슬렁어슬렁 찾아 들어 와서 기껏해야 저녁이나 한 끼 먹어 주고는 부루루해서 효자동으로 가버리던 영감이 어찌 된 셈인지 어제 저녁에 찾아 들어와서는 아직껏 갈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이 부인에게는 은근히 기쁜 것이다.
그래서 부인은 목욕물을 끓여 놓았더니 영감은 한시간 동안이나 들어 앉았다가 뒷뜰로 나가 버렸다.
영감의 뒤를 이어 부인도 목욕을 하고 나와서 얼마 동안을 소홀히 하던 화장을 하고 있는 참에 유경이가 들어 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