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45장

가정 불화

편집

「오 창윤씨가 소실을 두었다 ──」

이런 소문이 부인의 귀에 들어간 것은 석 달이나 후의 일이다.

오 창윤이가 효자동 구석에 사랑의 집을 알뜰하게 장만하고 다방골 춘심을 들여 앉힌 것은 벌써 二[이]월달이 잡히면서부터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시국이 하도 어지러워 눈, 코 뜰새없이 바쁘다는 구실도 이틀에 한번 사흘에 한번씩 , 밖에서 자고 들어오는 남편을 부인은 별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도대체 잘못이었다.

부인은 춘삼월 긴긴 해를 머리를 동여매고 아랫목에 들어 누워서 보냈다.

「어떻거면 이놈의 영감을 한번 혼을 내 줄까?」

심화병으로 얼굴이 바짝 말라 빠진 부인은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멀거니 천정만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효자동을 찾아가서 영감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진 고 방정맞은 년의 얼굴에서 가래침이라도 한번 탁 뱉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두 부인은 그것을 감히 하지 않고 그냥 견데 내는 것이다.

「그년은 나 보다 젊었을 것이요. 젊었으니 나 보다 이쁠 것이 아닌가!」

자기 보다 젊고 자기 보다 이쁜 얼굴을 영감 옆에 보는 것이 부인에게 무척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때 유경이라두 곁에 있었으면……」

한결 부인의 울화가 나을 것 같았다.

「이런 때 말 동무는 아들 보다 딸이 났다는데…」

꽃 시절인 사월이 잡히면서부터 부인은 유경이가 날로 더 그리워졌다.

「유경인 나 보다두 생각이 째인 얘니까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라구?」

그래서 얼마 전에 부인은 준혁을 불러서 의논한 결과 어머니가 몸이 편치 않으니 곧 귀국하라는 편지를 유경이에게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유경에게서는 지금 신학기가 되어 눈, 코 뜰새없이 바쁘니 틈 있는 대로 가급적 속히 귀국하겠다는 간단한 회답이 한 장 왔을 뿐이다.

「계집애두, 제 어미가 이런 줄은 모르구 공부만 하면 장한가?」

편지를 받으면 냉큼 뛰어 나올 줄만 알았던 유경이었다. 그 유경이가 무엇이 바쁘다고 우물거리고 있는 것을 보는 부인은 신경이 더 한층 날카로워만 갔다.

지금까지 하늘처럼 믿고 땅처럼 믿었던 남편과 딸이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시에 자기에게서 멀어져가는 것을 부인은 무척 분해 하였고 무척 슬퍼했다.

「이놈의 영감을…… 이놈의 영감을……」

그러면서 부인은 하루 종일 이불만 쓰고 누워 있었다.

그것도 통 자기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또 모르거니와 한 주일에 한 번 닷새에 한 번씩 그래도 제 집이라고 어슬렁어슬렁 찾아 들어 오는 영감의 징그러운 꼴을 볼 때마다 눈에 횃불이 서서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날도 부인은 식모가 데려다 주는 한약을 한 모금 들이키고 있는데 현관이 열리면서

「화신서 물건 갖구 왔읍니다.」

낮익은 배달군의 목소리였다.

부인은 방문을 방싯 열며

「어디서 보낸거요?」

「댁의 선생님께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배달군을 포장을 한 무슨 상자를 식모에게 내어 주며 다시 나가 버렸다.

「빌어 먹을 영감이 또 무엇을 가지구 사람을 낚구려구…… 흥, 내가 그리 쉽사리 낚시에 걸릴 줄 알구?」

그러면서 부인은 무슨 더러운 물건이나 만지듯이 식모의 손에서 상자를 받았다.

부인은 노끈을 풀고 보라빛 포장지를 펼치니 그 속에 상자가 두 개 들어 있었다.

두껑을 열어 보았다. 하나는 꽃 무늬를 수 놓은 호화로운 케익이 가득 들어 있었고 하나는 속에 크림이 박힌 밤알만큼씩 한 쵸코렡이 수두룩하니 차 있었다.

「빌어 먹을 영감이 누굴 어린앤줄 아나 봐? 유경일 달래던 솜씨를 내게 다 써?」

그러나 온갖 물자가 핍박한 때라, 이와 같은 달콤한 상등 양과자가 그리 초라한 선물은 아니었다.

부인은 식욕이 댕긴다. 식모만 눈 앞에 없으면 혀끝이 녹아날 것 같은 쵸코렡을 한 알 홀랑 입에다 쓰러넣고 싶었으나 그만 체면이 무서워서

「미친 놈의 영감이 누가 이런 걸 사 오랬나?」

하면서 상자를 머리맡에 내던지며 벽을 향하여 핵 누워버렸다.

그러나 이윽고 식모가 나가버린 뒤에 부인은 살그머니 손을 뻗쳐 상자에서 쵸코렡을 한 알 집어다가 돌아 누운채 입에다 쓸어 넣었다.

정말 혀 끝이 녹아날 것 같이 달콤하다. 그래서 부인은 또 한 알 집어서 입에 넣었다. 소녀처럼 부인은 감미로운 미각을 살그머니 향락하는 그이다.

그 감미로운 미각에서 부인은 한낱 아득한 전설로 변해 버린 어여뻤던 자기의 청춘을 회상한다.

다시는 엿볼 수 조차 없는 그리운 추억 속에서 부인은 살그머니 한 알만 맛보려던 것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쵸코렡을 자꾸만 혀 끝으로 녹여 버리는 것이다.

나두 젊었을 땐 「 유경이 보다두 못지 않게 예뻤었는데…… 아아, 흘러가 버린 청춘이며 깨저버린 금슬(琴瑟)이다!」

부인은 벌떡 일어나 경대 앞으로 가서 펄썩 주저 않으며 자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정말 시들어 빠진 얼굴이로구나. 이러다가 영감이 바람을 피는 것두 허는 수 없지 뭐!」

부인은 시름없이 경대와 마주 않아서 부러 한 번 소녀처럼 방그레 웃어 보았다. 옛날 같으면 웃을 때마다 외인편 볼에 귀여운 볼이 옴푹 패워지던 얼굴이건만, 그리고 그것을 무척 귀여워 하던 남편이건만 지금 부인과 마주 앉은 거울 속의 시들은 얼굴에는 볼우물의 흔적은 있는듯 없는듯이 보기 숭한 주름살만이 움푹 패워지는 것이다.

부인은 서글퍼진다.

그러다가 그만 획하고 다시 경대보를 씌우면서

「흥, 단물을 다 빼 먹구 시들어 빠지니까 슬쩍 옮아 앉아? 어디 이놈의 영감 두구 봐라!」

부인은 다시 이불을 쓰구 누워서 또 한 알을 입에다 넣고 우물우물 녹여 버리고 있을 즈음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리께서 오셔요, 나리께서요……」

식모가 문 밖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부인에게 내통을 하였다.

그 말에 부인은 얼른 과자 상자에 뚜껑을 덮어서 웃목으로 밀어 놓고 벽을 향하여 돌아 누었다. 그리고는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 쓰고 무슨 중병 환자인 양 눈을 질끈 감았다.

오 창윤은 복도에 놓인 약탕관을 힐끗 바라보며 문 밖에서

「어디가 아프오?」

그러나 대답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럼입쇼. 현기증이 자꾸만 나시구, 물 한 모금만 마셔두 명치 끝이 딱 막혀서 내리질 않으신답니다. 아주 신색이 말이 안닙지요. 참 보기에두 어찌나 딱하신지……」

절반은 거짓 말이다.

그러나 이런 때 안 주인에게 충성을 다해 두면 후에 반드시 복이 있는 줄을 이 능청맞은 식모는 미리 계산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 창윤은 안주인의 편을 들어 수선을 떠는 식모의 말을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드릴 그런 단순한 위인은 아니다.

흐흥 이놈의 「 , 식모가 마누라에게 톡톡히 매수를 당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말로는 아주 근심스런 어조로

「아, 거 그래서야 원 되겠소. 거 뭐 입에 당기는 걸 좀 사다 먹구 구미를 도 두어야지 않겠소.」

그러면서 오 창윤은 안방으로 들어가서 두루마기를 벗고 부인 옆에 털석 앉으며 웃목에 되는 대로 던져진 과자 상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거 맛나는 양과자가 있더라니 좀 사 들여 보냈지요. 좀 입에 넣어 보았소?」

「…………」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벽을 향하면 누은 부인의 뒷모양을 한 번 희쭉하고 웃는 얼굴로 바라 보다가 얼른 정색을 하며

「거 그래 뵈두 구하기 힘든 과잔데 왜 맛을 좀 보구려」

부인은 그래도 대꾸가 없다.

「그래 유경이한테선 잘 있다는 소식이나 있소?」

「…………」

「실은 아까 준혁이 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조용히 이야기할 말이 있다구 하면서 오늘 저녁 이리로 찾아 오겠다구요.

그때야 비로소 벽을 향한채 입을 열었다.」

「흥, 뭘하려구 어슬렁어슬렁 찾아 들어 왔나 했더니…… 왜 그년의 집에선 준혁일 못 만나우?」

그때까지도 그래두 영감이 자기를 위로할 셈으로 찾아 들어온 줄만 알고 있었던 부인이었다. 그랬던 것이 영감의 목적은 딴데 있지 않는가.

「아, 또 그런 쓸데 없는 이야기는 그만 두구…… 준혁이로 말하면 내 아들이나 다름 없는 사람인데……」

「흥, 아주 체면이 상당하구려? 딸 같은 계집년을 데리구 살면서두 체면만은 있어야겠수?」

「자아, 쓸데 없는 이야긴 이담 하구…… 사실 말이지 어쩌다가 걸려 들어서 그렇게 됐지만 내 영원히 그러겠수? 남들이 다 하는 노릇이니 나두 한일 년 그저 그래 보겠다는 건데, 뭘 그러우? 마누라야 사실 말이지 내 조강지처가 아니요 아 글쎄 ? 조강지처를 몰라 봐서야 벼락을 맞지, 벼락을 맞아.」

「잘 꾸며 대는구려? 고생할 땐 조강지처구 호강할땐 기생년이야?」

「자아, 그러지 말구, 이 양과자나 하나 맛 보구려.」

「그런건 더러워서두 안 먹어! 어서 그 알뜰한 년이나 갖다 주구려」

「이거 봐. 그런게 아니야. 그래두 마누라가 하나 먹을까 하구 큰 마음 먹구 사 온 건데……」

「흥, 큰 맘 두 번만 먹었단 화신을 송두리채 떠 오겠구려」

「자아, 일어 나시우. 일어나서 이 쵸코렡 하나 맛보구려.」

오 창윤은 그러면서 되는대로 내던진 과자상자를 끌어 댕겼다.

그순간, 부인은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감이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면 더러워서 안 먹는다던 쵸코렡이 十[십]여 알 없어진 자리가 판연할 것이 아닌가.

그순간 영감의 비웃는 얼굴이 무서워서 부인은 홱 일어 나면서 지금 막 뚜껑을 열어 놓는 상자에서 쵸코렡을 한줌 움켜 쥐기가 바쁘게

「어서 그 잘난 년이나 갖다 쳐 먹여요!」

하고, 영감의 면상에다 내 갈겼다.

「아, 여보, 이게…… 이게 무슨…… 남 부끄럽게……」

오 창윤은 튀튀하면서 얼굴을 부빈다.

「남 부끄러운 노릇을 누가 하랬수?」

그러나 다음 순간, 쿡하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오 창윤은 간신히 참았던 것이니, 더러워서 먹지 않는다던 쵸코렡의 검으티티한 빛갈이 부인의 입술에 판연하게 묻어 있지 않는가.

「하, 하, 핫……」

오 창윤은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우스우?」

「우스울 이유가 있구려! 하하핫……」

「…………」

그때

「선생님 계십니까?」

하는, 김 준혁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