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42장

청춘 화려

편집

즐거운 여행이었다.

이튿날 산양선(山陽線) 기차 속 사람이 된 영민과 유경은 이 즐거운 여행을 언제까지나 계속하였으면 하였다. 뱃멀미로 고생하던 어젯밤의 고통도 인제는 가뜬하게 가버린 유경이다. 보는 것, 듣는 것이 모두 오늘처럼 명랑하고 즐거운 날이 없었다.

「영민씨, 저걸 보세요. 저걸, 저걸……」

신문을 보고 있던 영민이가 불현듯 머리를 들었다. 차창에 얼굴을 부비듯이 갖다 대고 정오를 넘은 눈부신 태양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내해(內海)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내다보고 있던 유경이다.

「뭘 말이요?」

영민도 유경이와 가지런히 자기 얼굴을 유리창에다 갖다 댔다.

「아이, 놓쳤어요. 배 돛대 위에서 갈매기가 두 놈, 아주 멋들게 희롱하구 있었는데……」

일단 유리창에 부딪쳤던 유경의 입김이 영민의 코밑으로 살살 새어든다.

간지럽다.

거울처럼 잔잔한 바다, 푸른 섬, 흰 돛, 쌔애한 모래밭, 푸른 솔밭, 빨간 지붕을 가진 방갈로, 밀감 나무가 선 농가 ── 스마(.磨[수마]), 아까시(明石[명석])를 지날 무렵의 이 내해의 풍경은 그대로가 한 폭의 그림일 수도 있으며 한 구의 시(詩)일 수 있었다.

오 유경은 그것을 오늘처럼 가치있게 향락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 영민이란 하나의 미지(未知)의 세계 속에 자신을 용감하게 던지면 그만이었다.

「어린애들이 별을 셀 때, 어째 자기두 함께 세죠?」

돌연 유경은 저번 날 영민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한 재롱을 다시 부려본다.

「아, 저 별 하나 나 한나, 별 둘 나둘하고 세는 것 ── 그것 말이요?」

「네, 그걸 아무리 생각해두 모르겠어요.」

「아, 그것은……」

영민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유경씨의 편질 보구 나두 그걸 잠시 생각해 봤지만, 그것은 결국 자연의 어여쁨을 감상하는 주체(主體)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게 아닐까요. 캄캄한 하늘에 무수히 나타난 별을 ── 푸른 별, 노랑 별, 하얀 별, 붉은 별, 초록 별들을 어린애들은 즐겨 세지만 그 별을 세는 주체인 자기를 무시하고 다만 별만을 하나, 둘, 셋, 넷……하고 세라면 단 스물을 세기 전에 흥미를 잃어 버리겠지요. 그러니까 별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하고, 언제든지 자기 존재를 인식하면서 자연을 향락하고 싶다는 인간의 본능을 솔직히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지 하나의 재롱으로서 던져 본 자기의 무심코한 질문을 그처럼 열심히 생각하여 주는 영민의 성실함을 유경은 흡족해 하면서

「이 들창 밖에 흐르는 바다의 풍경이 오늘 따라 몇 갑절 더 이쁘게 뵈이는 것과 마찬가지로……그렇다는 말씀이죠?」

「아마 그렇겠지요.」

부드러운 웃음을 폭 넓게 지으며

「편지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어제 정거장에 나왔던 이가 편지 속에 쓰인 그 진실한 과학잔가요?」

그말에 유경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고 내 배를 째 준 성실한 외과의사예요. 집의 아버지가 무척 눈여겨 보고 있는 인데 영민씨를 내놓군 이 세상에서 젤루 내가 좋아하는 이예요.」

이튿날 아침 기차가 , 기나긴 「단나ㆍ턴넬」로 기어들어 갔을 때, 유경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영민의 손을 살그머니 더듬어 잡으며

「아다미(熟海[숙해]서 내려요, 네?」

하고, 조그만 손으로 영민의 커다란 손을 꼭 쥐었다.」

「아다미서요?」

「나 강이찌와 오미야가 산보하던 길, 한 번 걸어 보고 싶어요.」

그말에 영민은 적지 않은 유혹을 느끼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아, 내릴 준비를 하세요. 이 굴만 빠져 나감 아다미니까요.」

「………」

영민은 대답을 하기 전에 골돌히 생각을 한다. 이 요염(妖艶)한 항구처, 꿈 많은 온천지인 「아다미」에서 두 사람이 내린다는 것이 금후에 전개될 자기들의 운명을, 인생의 항로를 결정적으로 지배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유경이가 대담하게 더듬어 잡은 영민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자아, 빨리 트렁크를 내려 놓세요.」

영민은 벙어리가 된 체 몸을 일으켜 선반에서 자기의 트렁크와 유경의 보스톤 . 백을 내렸다.

영민은 짐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한 말로 불렀다.

「유경씨.」

「네?」

「그대로 가시지요.」

「왜요?」

「두 시간만 더 가면 동경인데……」

「싫으심 그만 둬두 좋아요.」

「………」

그때 기차가 뚜우 하고 기적 소리도 요란하게 턴넬을 쑥 빠져 나왔다. 빠져 나오면서 얼마 동안을 미침질 하듯이 굴러가다가 멀리 해안선을 발밑에 내려다 보는 「아다미」역에서 기차는 멎었다.

「자아, 유경씨, 빨리 내립시다.」

이번에는 영민이가 유경을 재촉하면서 앞장을 섰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쓸쓸한 이 한역(寒驛)에 영민과 유경을 내려놓고 기차는 다시 기적 소리와 함께 떠났다.

여관 보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짐을 맡기고 영민과 유경은 뒤를 따라 해안선으로 내려갔다.

활찍같이 꾸부러진 아담한 해안선에 아침 밥을 짓는 자욱한 연기가 바다 바람 속에서 운치있게 나붓긴다. 인제 방금 꿈 속에서 깨어난 어여쁜 항구처다.

「저기 보이는 것이 매원(梅園)인데 인제 두 주일만 있으면 매화가 만발하지요. 그리고 저기 저 바다 가운데 보이는 조그만 섬 ── 그것이 저 유명한 사랑의 하츠시마(初島[초도])입죠.」

안내인은 그 누구에게도 하는 것처럼 가다가다 눈에 띄이는 대로 설명을 한다.

「그런데 저 강이찌와 오미야가 산보하던 길이 어디야요?」

유경이가 가장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헤이, 바루 이 길입죠. 강이찌가 오미야의 잔허리를 차버린 것이 바루 저 백사장 위니까요. 헤이……」

「아이 참 정말 있던 이야기처럼 이야길 하네?……」

「정말 있던 이야기 이상으로 유명합죠. 자아, 이걸 보십쇼.」

하고, 안내인은 해안선에 면한 二[이]층 여관 앞에서 짐을 내려놓고

「이래서 저희 여관이 유명 하답니다.」

하면서 바루 여관 앞 행길 가에 자연석으로 만들어 놓은 한 기둥의 비석을 가리켰다.

그것은 강이찌 . 오미야의 작자 「오자끼 . 고오요오」의 기념비였다.

동편 유리창으로 아침 햇발이 아물아물 기어드는 온천탕이다.

수증기가 구름처럼 문문 일어나는 욕탕 속에서 영민은 네 활개를 활짝 펼치고 어린애처럼 헤엄쳐 보면서 몸의 때와 마음의 때를 한꺼번에 깨끗이 씻어 버리려는 듯이 한 번 깊이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는 젖은 수건을 머리 위에 얹어놓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용한 목욕탕이다. 영민이만 움직이지 않으면 드높은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 방울 소리까지 분명히 들린다.

천정이 티인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여자 탕에도 유경이 이외는 욕객이 없는 모양이다 쪼르락쪼르락 . 유경의 물 끼얹는 소리가 고요히 들려온다.

「단니ㆍ턴넬」을 지날 무렵에 침침한 어둠 속에서 자기 손을 대담하게도 더듬어 잡던 유경의 고 조그만 손바닥의 감촉이 다시금 새로워진다.

「그렇다. 유경은 확실히 나 보다 대담하였다! 그 대담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유경의 타는듯한 정열과 인제는 정면으로 똑 마주 선 영민이었다.

영민은 눈을 감은 채 집을 떠나던 날 아버지와 주고 받던 최후의 대화중의 한 마디가 문득 생각난다.

「저는 노력하였읍니다. 그러나 어찌 할 수가 없었읍니다……」

유경의 물 끼얹은 소리가 또다시 조용히 들린다.

「아버지께서 그처럼 경박하게 여기시는 오 유경 ── 그 오 유경에게서 저는 삶의 보람을……삶의 가치를 발견 한 것 같읍니다.」

아까 기차에서 유경이가 내리잘 때 제일 먼저 영민이가 봉착한 것은 금후 전개될 유경의 정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불살려 보려는 극히 유혹적인, 감정적이, 향락적인 생(生)의 일면 보다도, 그렇게 해서 불살라버린 정열의 불꽃이 가져오는 하나의 엄숙한 책임문제였다.

그것은 결코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가정을 이룬다는 그러한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물론 있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 보다도 한 순진한 처녀의 애정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 남자가 완전히 점유(占有)하는 데서 오는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성실문제(誠實問題)를 말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애정의 향락적인 일면과 표리(表裏)를 이루는 애정의 노력적(努力的)인 일면이었다.

이러한 일면에 대하여 영민은 최후의 단안을 자기 자신에 내리었다.

이리하여 지금의 영민은 다만 자기 앞에 놓여진 인생의 궤도를 곧장, 그리고 용감하게 달리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있었다.

「유경을 위하여 집을 버리고 부모를 버린 내가 아닌가!」

유경을 위하여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성실을 다하지 못할진댄 차라리 운옥의 그 평범한 애정속에서 일생을 지남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온갖 기반(羈絆)을 박차고 오직 유경을 열심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영민이었으며 유경의 애무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불살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윽고 욕탕에서 올라왔다.

유리창 넘어로 어여쁜 항구가 한 눈에 즐펀하니 내려다 보이는 二[이]층에서 영민은 화로를 끼고 가장 행복한 마음으로 유경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층층대를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라 옥상와 「 ㆍ ㆍ마다ㆍ오유데스까(아, 부인은 아직 목욕하세요)?……」

그것은 유경이가 아니고 조반 상을 들고 올라오는 하녀였다.

그말에 영민은 얼굴이 화끈하고 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