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항의서
편집1
편집「운옥의 편질지두 몰라?」
백 초시는 봉투를 뜯었다. 내용은 채 젖지는 않았으나 여기저기 잉크가 번졌다.
「그렇다. 분명히 여자의 글씨다!」
백 초시는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커다란 희망을 가지고 편지를 읽었다.
행복은 어디 있나요 행복은 행복은 그리워하는 순간에 있죠 행복은 어디 있나요 행복은 행복은 그리워하는 마음에 있죠 으으, 행복을 그리워하는 순간이여, 마음이여 새하얀 드높은 벽이 네모나게 둘러싼 호심처럼 고요한 병실이예요. 역시 하얀 백포를 덮은 침대 위에 엎디어 수증기 어린 유리 들창에 그적거려 본 꿈 많은 유경이의 심심풀이예요.
뗑, 뗑, 뗑, 뗑……성탄제 종소리가 평화스레 들리는 밤이예요. 창 밖엔 눈이 와요. 희뜩희뜩 유리창에 나부끼는 눈송이가 하나, 둘, 셋, 넷 ── 그러나 십이 도나 되는 十二[ ] 병실이지요. 그러니까 눈송이는 내려오기가 바쁘게 녹아 버려요.
하늘이 맑다면 별이래두 세어보고 싶은 밤이예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나 둘 ── 어린애들은 별을 셀 때 어째서 자기도 함께 세나요?
하늘에 달이 있다면 이 태백이와 함께 놀아 보고 싶은 밤이예요.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다지 않어요? 옥 도끼 금 도끼 찍고 다듬어서 초가 삼간 집을 지어 영민씨와 함께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이야기하고 싶은 밤이예요.
유경인 배을 쨌다우, 왜냐구요? 천 년 만 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맹장염이 일면 이야기가 중단 될까봐 아예 미리 수술을 해 버렸어요. 내일 퇴원해요.
상경하면 전화나 혹은 속달을 주세요.
유리창에 그적거린 행복의 위치(位置)를 어떤 진실한 과학자가 신문지로 벅벅 문지르면서 하는 말이, 행복은 바로 우리들의 눈 앞에 있다구요. 그리고 그것을 잘 「캣취」하는 영민과 양식에 있다구요. 그리고 그때 바로 내 눈앞에는 그 진실한 과학자가 서 있었답니다. 그러면 오늘밤은 요만 ── 백 초시는 깜짝 놀랐다.
「근미심차시에 기체후 일향만안」 ── 밖에 모르는 백 초시의 눈에는 정녕 이것은 편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배운 것이 없는 여자랄지라도 이런 편지 법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뿐만 아니라, 운옥이의 편진가고 잔뜩 기대를 가지고 있던 백 초시의 희망의 줄기가 탁 끊어지자 격분의 정이 욱하고 그의 몸둥이를 휩쓸었던 것이니, 아아, 큰기침 한번 못하고 지난 과거 三[삼]년 동안이여, 재노라고 머리를 젔는 삼룡이의 곰보딱지 얼굴이여!
지사 허 상진이의 딸을 배반한 아들이기는 하였으되 그러나 믿었던 아들이었다. 믿었던 아들이기 때문에 금 같은 전답을 해마다 팔았다. 그 아들이 이제는 아비를 배반했다. 누구를 위한 노력이었으며 누구를 위한 굴욕이었던고?……
물에 젖은 편지를 독수리처럼 움켜쥐고 온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방 한복판에 우뚝 서서 눈을 감았다.
스르르 눈물이 흐른다.
2
편집읍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민은 뒷탑골 예배당 마당을 지나면서 문득 들창 너머로 예배당안을 들여다 보았다. 운옥이가 애국가를 불렀다는 조그만 교단이 텅 비인 방안 한모퉁이에 쓸쓸히 놓여있다.
영민은 오늘에야 비로소 주재소에서 가끔 자기를 호출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四[사]년 전, 저 교단 위에서 애국가를 부른 허운옥, 박 준길이의 눈깔을 파내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허 운옥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
영민은 태극령 고개를 넘을 때 도라지탑 앞에서 또 발걸음을 멈추었다. 흰 눈을 헤치면 지금이라도 박 준길의 눈깔에서 흐른 피의 흔적이 시커멓게 땅 위에 인박혀 있을 것만 같았다.
「하늘이여, 그 여인으로 하여금 고달픔을 덜어 주게 하십시요. 그는 외로운 사람이 올씨다!」
영민은 입속말로 고요히 중얼거렸다.
집으로 내려오니 사랑방에서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난다.
「아버지, 지금 읍에서 돌아 왔읍니다.」
문 밖에서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아버지가 찾는다.
「너 이리 좀 들어오너라.」
영민은 사랑으로 들어갔다.
「거기 좀 앉아라.」
아버지 앞에 영민은 꿇어 않았다. 쳐다보니 심상치 않은 아버지의 안색이다.
「너 내게 무엇을 숨기는 것이 있는가본데……」
영민은 머리를 들었다.
「숨겨선 아니될 일을 숨기나본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내게다 물을건 없구……」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모르겠다면 좋아. 내가 아르켜 줄테니까.」
그러면서 아버지는 채 마르지 않은 편전지 몇 장을 봉투와 함께 아들 앞에 내놓았다.
「네게 온 편지니 읽어 보아라.」
영민은 한번 더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면서 편지를 읽어 보았다. 읽어 가는 사이에 영민의 얼굴이 차차 엄숙하여 갔다. 다 읽고나서 영민은 편지를 접어 꿇어 앉은 자기 무릎 앞에 놓았다.
「그 여인과는 언제부터 교제가 있었던고?」
「작년 가을부터 입니다.」
영민은 순순히 대답을 하였다.
「공부를 한 사람이냐?」
「지금 동경서 여자 대학에 다니는 중입니다.」
「대학까지 다니는 사람이 그런 편지 밖에는 쓸줄 모른다는 말이지?」
「………」
「너는 四[사]년전, 이 아비와 약속한 것을 설마 잊지는 않았을 테지?」
「………」
「잊지는 않았을 테지?」
「왜 대답이 없는고?」
「잊지 않았읍니다.」
「그러면?……」
「저는 노력하였읍니다. 무척 노력하였읍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읍니다.」
「집을 떠난 운옥을 가련타 못 생각하느냐?」
「열 번 스무 번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 소자를 꾸짖어 주십시요.」
영민은 머리를 숙였다.
「꾸짖으라는 말은 결국 네 행실이 그르다는 뜻이냐?」
「아니 올시다.」
영민은 머리를 들었다.
3
편집「뭣이, 아니라구?」
백 초시의 눈초리가 번적 빛난다.
「그러면 네 행실이 오르다는 말인가?」
「아버지」
「어서 말을 해 봐라.」
백 초시는 노기가 분분하다. 박 삼룡이에게 대한 격분이 고스란히 그대로 영민에게로 옮아진 백 초시였다.
「아버지, 저는 이 자리에서 그르고 오른 것을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따질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또 그랬댔자 따져질 문제가 아니 올시다.」
「무슨 말인고? 알기 쉽게 이야길 해라!」
「말하자면 여기에는 누구의 잘잘못이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 올시다. 운 옥이의 잘못도 없고 소자의 불찰도 있을수 없읍니다.」
「응? 그러면 네가 이 아비더러 꾸짖어 달라는 말은?……」
「그것은 파계자(破戒子)로서의 꾸지람을 받겠다는 말씀이 올시다. 여인 금단의 굳세인 세약을 일단 아버지께 한 제가 그 맹세를 마침내 지키지 못했사오니 그것을 꾸짖어 주십사는 뜻이 올시다.」
「오냐, 꾸짖으마. 꾸짖구 말구! 그처럼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를 잃어버린 이 아비에게 하는 말이……그처럼 귀한 땅을 팔아 유학을 보내는 이 아비에게 하는 말이 단지 그 한 마디 뿐이냐? 이놈!」
백 초시는 사지를 부들부들 떤다.
영민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아버지, 용서 하십시요! 아버지의 눈물 겨우신 노력을 제가 모를 리 없으며 또한 불우한 운명을 질머지고 집을 나간 운옥이의 노력을 모르는 소자가 아니 올시다. 그러나……그러나 아버지! 저도……소자도 그와 못지 않은 노력을 하였읍니다. 아버지께 드린 맹세의 말을 배반하지 않을려고…… 四[사]년 동안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약해 지려는 마음에 채찍질을 하여 가며 노력하였습니다. 이처럼 너 나 없이 모두가 눈물 겨운 노력을 하였건만 다만 그 노력의 결실(結實)을 보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듣기 싫다!」
꽥하고 백 초시는 벽력같은 소리를 치며
「네놈이 노력은 또 무슨 노력을 했다는 말이냐? 자아, 한 마디로 말을 해 봐라! 이 편지를 쓴 그 경박한 여인과 인연을 끊어버리지 못하겠나?」
「아버지……」
영민은 얼굴을 들었다.
「여러 말 할것 없구……단 한 마디로 알기 쉽게 대답을 해다!」
「………」
「너 같은 놈이 변호사가 된다면 우리 나라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은 땅에 떨어지고 말께다! 자아, 썩썩 대답을 못 하겠나?」
「아버지……」
「여러 말 듣기 싫다! 잘 생각해서……단 한 마디로 말을 해라!」
「아버지! 그것은……그것은 이미 잘 생각하고 취한 행동이 올시다!」
분명한 한 마디가 영민의 입으로부터 조용히, 그리고 극히 엄숙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4
편집백 초시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잘 생각하고 취한 행동이 결국 그것이었다는 말이냐?」
「아버지, 그렇읍니다.」
「얘잇! 이 개만도 못한 놈 같으니!」
백 초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이놈!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아니야! 너 같은 놈을 위하여 삼룡이 녀석 한테까지 모욕을 받은 것이 분하다, 분해!」
백 초시의 눈에는 그순간 눈물이 글썽글썽 괴이기 시작하였다.
불량배가 아닌 이상, 어버이의 말이라면 자식 된 사람으로서의 당연히 들어야 할 줄만 믿고 있던 백 초시의 낡은 도덕이 마침내 무너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백 초시는 눈 앞이 아찔 했다.
다른 집 자식은 몰라도 적어도 자기 아들 영민이 만은 좋건 싫건 결국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말을 들을 줄로만 굳세게 믿고 있던 백 초시가 아니었던고!
그러한 영민이가 끝끝내 반항의 화살을 던지는 것을 보는 순간, 백 초시는 五十[오십] 여 년 동안 지니고 온 인생관의 붕괴(崩壞)로 말미암아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격분에 와들와들 몸을 떨면서
「영민아!」
하고 불렀다.
「………」
영민은 말없이 머리를 들었다.
「삼대독자인 네 한 몸에 나는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 온 사람이다. 나는 너를 기를 때, 네가 어서 어서 자라서 내 아들 노릇을 하여 주고 내 친구 노릇을 하여 주기를 바라 왔다. 너는 내 아들인 동시에 장기 동무요 술 동무가 되어 주기를 바래왔다…….」
영민은 대답을 못하고 엄숙한 얼굴로 아버지의 낯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빤히 아버지의 낯을 쳐다보는 영민의 얼굴에도 뜨거운 눈물이 스르르 흘러 내렸다.
「아버지!」
영민은 억해서 말을 잇지 못한다.
「오냐. 너두 우느냐? 나두 운다!」
「아버지!」
영민은 무릎 걸음으로 다가 앉으며 와들와들 떨고 있는 아버지의 손목을 두 손으로 왈칵 부여잡았다.
「놓아라. 이 손을 놓아라! 남과 남이 손을 무엇하려 잡는다는 말이냐?」
백 초시는 아들의 손을 뿌리치며
「자아,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고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너두 그만 했으면 지각이 있는 자니 내 옆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그것이 너와 나와의 약속이었다!」
「………」
영민은 다시 무릎에 손을 공손히 올려놓고 머리를 다시 깊이 숙였다.
그때 안방에서 낮잠을 자던 어머니가 뛰어 나왔다.
「아니 여보, 영민을 가지구 왜 또 못 살게 그러우?」
「당신은 잠자코 보고만 있으면 돼! ── 너 같은 놈은 위해서 대대손손이 물려 온 금같은 땅을 팔수는 없다, 없어!」
그리고는 팔소매로 눈물을 뻑 씻으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 하듯이
「음, 어버이가 자식을 마음대로 길러 보겠다는 생각이 도대체 잘못이었다! 자식은 어버이의 소유물이 아니니까!……시대가 다르다는 말이지?…
흥, 그러나 자세히 들어 두어라! 시대가 아무리 다르다구 하여도 어버이의 이 욕망은 천대 만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영민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말씀, 잘 알아 모셨읍니다. 제 욕망을 꺾어 아버지의 지극하신 욕망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하는 소자는 불초 올시다!」
「음, 잘 알았다! 결국 너는 네 길을 걷는 것이고 나는 내 길을 걷는 것이다! 음 ──」
사랑방 문 밖에 하나 둘씩 동리 사람이 모여 든다. 그 중에는 소작인 영팔이도 섞여 있었다.
영팔은 그길로 뒷탑골 박 삼룡이를 찾아가서 영민이가 집을 쫓겨 난다는 이야기를 신이 나는 듯이 전했을 때 삼룡은 보아라 하는 듯이 중얼거렸다.
「흥, 집안 꼴 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