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30장

인간 무상 편집

1 편집

탑골동에도 눈이 왔다. 태극령에도 눈이 왔다.

아득한 그 옛날 태극사의 , 젊은 중 법월과 순정의 처녀 도라지가 사랑을 빚어낸 도라지탑 ── 바로 그 옆에서 수난의 여인 허 운옥이가 움켜쥔 은장도로 박 준길의 눈알을 찌른 그 도라지탑에도 햇솜 같은 눈송이가 담뿍 담뿍 쌓이었다.

그것은 양력 정초를 갖 지난 어느날 아침이다.

백 초시네 소작인 영팔이가 도라지탑 앞에서 그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 즈음에 백 영민은 앞탑골에서 뒷탑골로 태극령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아침부터 어딜 가십니까?」

영팔은 굽실하고 인사를 했다.

「읍엘 좀 다녀 오려구요. 주재소에서 또 호출이 왔나봄니다.」

「개 같은 놈들! 괘니 사람을 가지구 콩 볶듯 들 볶는대니까. 편히 댕겨 오시요.」

영팔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어 보이며 또 굽실하고 인사를 하였다.

영민은 가끔 가다가는 주재소로부터 호출을 받는다. 이번 방학 동안에 벌써 세 번째다. 주재소 소장의 말은 호출이 아니고 종종 좀 놀러와 달라는 것이다. 불러다가는 별반 물어보는 것도 없이 한두 시간 잡담을 하다가는 보내곤 하였다. 말하자면 백 영민은 이 탑골동이 처음으로 낳은 대학생이며 동경 유학생이기 때문이다.

영민은 눈길을 뒷탑골로 내려갔다. 읍은 뒷탑골에서도 十[십]리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때 영민은 고개 중턱에서 태극령 고개로 올라오는 곰보딱지 박 삼룡이를 만났다. 사흘 전 서울서 며느릿감을 고르러 내려 왔다는 박 삼룡이다.

삼룡이가 회색 세루 두루마기에 제법 구두를 신고 탑골동에 나타났을 때, 동리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들 눈이 둥그래 졌다.

「평양 기생 박 춘심이의 아버지라면 그래두 서울 장안에선 머리를 들구 댕기는 줄을 몰라? 총독부 무슨 국장, 무슨 과장이 다 내 손 끝에서 놀아난다는 말이야.」

한밑천 잡았다는 바람에 개 한 마리를 잡아놓고 길맞이를 하던 날, 삼룡은 무서운 것 없다는 듯이 벌개진 얼굴을 희번득거리며 호기를 뺐다.

「내가 이번에 고향엘 내려온 것은 오래간만에 자네들과 술도 한 잔 나눌 겸, 실인즉 준길이의 색싯감을 하나 고르러 온 것이야. 자네들은 그저 주재소 순사들만 보면 부들부들 떨지만, 그까짓 순사 쯤이야 문제 되겠나? 헌병의 색시래면 그만이지 더 볼 것 있겠나?」

말하자면 돈과 세력을 가진 셈이다. 그러니까 세법 고향이 그리워서 찾아온 곰보딱지며 고향에서 며누릿감을 고르려는 삼룡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길 맞이 술 좌석에서 앞탑골 백 초시가 땅을 팔려고 내놨다는 말을 주어 들은 순간, 삼룡의 귀가 번쩍 띠었던 것이다.

「음, 백 영감의 땅이라면 내가 사마!」

하나의 승리자로서의 통쾌, 복수자로서의 쾌감이 삼룡의 몸둥이를 전율시켰다.

十[십]년전, 허 상진의 집 토방 마루에서 운옥을 며누리로 달래다가 백 초시에게 받은 모욕이 가슴 아프게 새로워진다. 五[오]백 원 짜리 돈표 두 장이 펄펄펄펄 불타던 광경이 어제 일인 양 눈 앞에 알알하다.

「어떤 일이 있더래두 백 영감의 땅은 이 박 삼룡이가 사야만 한다!」

그는 그날로 백 초시가 내놨다는 토지의 소작인인 영팔이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태극령 고개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팔이를 만나러 가는 삼룡이었다.

삼룡과 영민은 태극령 중턱에서 딱 마주 쳤다. 외발자국 눈길이라, 어느 편이 한 사람 길을 비켜야 되겠는데 비키는 사람이 없다.

딱 마주 선 채 두 사람은 좀처럼 움직이지를 않는다.

2 편집

외발자국 눈길에서 딱 마주 선 영민과 삼룡이다.

삼룡은 그 어떤 비웃음을 띤 눈으로 부처님처럼 표정이 없는 영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삼룡도 말이 없다. 영민도 말이 없다.

그러기를 얼마동안 ── 먼저 입을 연 것은 삼룡이 편이었다.

「그래 길을 안 비킬 작정이야?」

그러나 영민은 대답이 없다.

「흥, 아직두 백 초시의 아들 행세를 할 셈이야?」

「………」

「그래 그래 손 위의 어른에게 하는 행실이란 말이야? 대학굔 뭘 하려구 댕기는 거구, 동경 유학은 다 뭘 배우러 가는 거야?……아니, 그래 빨리 어른에게 길을 못 비킬테야?」

그때 영민은 역시 표정없는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길이 바쁘시거든 손수 비켜 가시지요.」

「아니, 뭐가 어떻다구?」

삼룡은 불끈 주먹을 쥐면서

「옛날의 박 삼룡인 줄만 알구……」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당신의 과거를 깔 본 적도 없는 대신에, 현재의 당신이 그와 신분이 달라졌다고 해서 당신을 우러러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그러면 내게 대해서 행패는 왜 행패를……」

「행패라는 말은 적당하지 못하지요. 나는 다만 이 외발자국 눈길에서 당신과 마주쳤을 따름이니까요.」

「그러면 나이 많은 어른에게 왜 길을 못 비켜?」

「보행이 위태러운 노인네가 아닌 이상, 단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게 길을 비켜 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삼룡은 그때 분노에 부들부들 떨면서

「아니, 이놈이 아직두 정신을 못채리구……내 아들 눈깔를 파낸 것이 누군데?…… 아, 이놈이 예편네 대신 콩밥을 좀 먹어 보려구 그러는 거야, 응?

이 놈! 준길이의 눈깔을 해놔라! 눈깔을…」

「그것은 당신 아들의 눈깔을 파낸 장본인에게 항의를 하시오. 생각컨대 눈깔을 파내지 않으면 아니될 무슨 그런 사정이 있었을 것에 틀림없을 테니까 ──」

「뭐가 어떻다구? 이놈이 정말 해변 개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너 내 아들 헌병인 줄 아직 모르니? 그 년을 잡기만 하면 당장에 총살이다, 총살이야!

어떤 세상인 줄 알구, 아니 예배당에서 애국가를 불러? 음, 어디 너 좀 두 구 봐라. 이놈!」

그때 영민의 얼굴에는 일순간 밀물처럼 복받쳐오는 격분의 표정이 무섭게 떠 올랐다. 그러나 목소리는 역시 침착을 잃지 않는다.

「길을 비키시요!」

「날더러 비키라구?……그래 금같은 땅을 팔아 공부를 하는 놈이 어른에게 길을 비키라구?……」

「그래도 비키지 않는다면 나는 내 앞에 당신이 서 있지 않는 것으로 인정하고 나는 내 길을 걸어 가겠습니다.」

돌연 영민은 삼룡의 어깨죽지를 독수리처럼 움켜쥐자 휙하고 옆으로 잡아챘다.

「아, 아, 이놈이……이놈 봐라?……」

삼룡의 몸둥이가 움푹 패워진 눈구덩이 속으로 데굴데굴 굴러 들어갔다.

3 편집

「이놈이……이놈이……이 개 백당 같은 놈이……」

그렇게 외치면서 눈투성이가 되어 삼룡이가 벌벌 기어올라 왔을 때는 벌써 영민의 그림자는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놈 어디 두구 「 , 봐라. 내가 너이 집안을 몽땅 망쳐 놓구야 말테다!」

삼룡은 눈을 털면서 고개 위로 푸르럭거리며 올라갔다.

영팔이가 도라지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니, 박 주사, 눈에 빠졌소?」

삼룡기가 박 주사가 되었다. 저번 길맞이 하는 날, 삼룡은 술이 얼근해서

「그래두 다방골 박 주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하고, 서울서는 자기가 박 주사란 말로 불리운다는 것을 은근히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을 눈치 빠른 영팔이가 되풀이하는 것이다.

「아, 아니……눈길이 미끄러워서 그만……」

삼룡은 거짓 말을 하였다.

「그런데 박 주사, 윤 선생과의 혼삿 말은 잘 되셨다지요?」

「안될 법이 어디 있어? 헌병 나리의 색시라면 더 할 나위가 있나?」

참 돈이 좋다 곰보딱지 삼룡이가 박 주사가 되고 四[사]년전 운옥의 야학원 선생이던 윤 선생이 외눈깔이 박 준길의 아내 노릇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름군 삼룡으로서는 실로 용이 된 셈이었다.

「그렇구 말구요. 윤선생두 인젠 팔자를 고쳤지요. 병중에 있는 늙은 어머니와 그 수많은 더벅머리 동생들을 혼자서 어떻게 먹여 살려요?」

영팔이의 아첨에 삼룡은 우쭐해서

「그래 일은 어떻게 됐노? 백 영감의 땅이래면 이 박 삼룡이가 기어코 살 테야.」

영팔은 그때 머리를 벅적벅적 긁으면서 면목없는 듯이

「예, 실인즉 어젯밤 백 초시를 찾아가서 그런 말을 했더니, 백 초시는 펄펄 뛰면서, 뭐 박 삼룡이가 내 땅을 사?……하고……」

영팔은 또 머리를 긁는다.

「아니, 이 박 삼룡의 돈은 돈이 아니래던가, 응?」

「그런건 아니지요만……」

「그래 대관절 어떻게 됐노?」

「잔수작 말구 썩썩 물러 가라구, 범같은 호령이야요.」

「그래 아무 말두 못하구 물러 왔다는 말이야?」

「물러 나올 수 밖에요.」

「음, 박 삼룡이의 돈은 돈이 아니다?……음 ──」

삼룡은 푸르럭거리는 그 두터운 입술에 권련을 한개를 붙여 물면서 음 박 삼룡이의 「 , 돈은 돈이 아니랬다?……어디 그래 보아라! 백 영감이 얼마나 뻗치나 두고 보자!」

그리고는 홱 얼굴을 돌리면서

「영팔이.」

「예?」

「지금 곧 백 영감을 찾아가서, 시까 보다 평당(坪當) 一[일]원씩을 더 주겠다고 그래 보게.」

「옛?…… 一[일]원씩을 더 준다구요?」

「그렇다!」

「一[일]원 씩이면 三[삼]천평 잡고 三[삼]만 냥(三[삼]천원)을 남보다 더 준다는 말이에요?」

「물론!」

「아, 그러면야 제아무리 배 초신들……」

그때 뒷탑골에서 우편 배달부가 편지 한 장을 손에 들고 올라오면서

「말씀 좀 물어 봅시다. 백 영민이란 사람이 혹시 저 앞탑골 백 초시의 자제분이 아닌가요?」

「예 그렇습니다. 편지라면 내가 갖다드리지요.」

「그러면 수고로우신 대루……」

그러면서 배달부는 손에 든 흰 봉투를 영팔이에게 넌지시 쥐어 주고는 올라온 길을 다시 돌아서서 내려 간다.

「그러면 박 주사, 내려가서 기다리시요. 내 이내 백 초시 댁엘 댕겨 오리다.」

이리하여 영팔은 앞탑골로 내려가고 박 삼룡을 뒷탑골로 내려갔다.

4 편집

「백 초시 어른, 계시오니까?」

영팔은 백 초시의 사랑방 문 밖에서 잠시 망설거리다가 문을 열었다.

목침을 베고 담벼락을 향하여 아랫목에 누워 있는 백 초시의 머리에는 四 [사]년 전에 보지 못하던 흰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에 띠인다.

「왜 또 잔수작을 하려구 드나드는 거야?」

백 초시는 역시 담벼락을 향하여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물었다.

「그런 게 아니오라, 편지가 왔길래 가지고 왔읍지요.」

「편지?……누구한테?……」

「영민씨 한텝니다.」

「거기 놔 두고 가.」

영팔은 하는 수 없이 돌아누운 백 초시의 등 뒤에다 봉투를 밀어 놓으면서

「저 다른 게 아니오라, 어젯밤은 백 초시께서 그렇게 성을 내실 줄은 모르구 그만 쓸데없는 말을 여쭈어서 민망스럽읍니다.」

「잘 알았네, 잘 알았어. 내가 영팔이더러 성을 낸 건 아니야.」

역시 눈을 질끈 감고 돌아 누운채다.

「어떻게나 민망스러운지…… 아침 일찌기 찾아 뵈려고 했던 것이……」

「글쎄 잘 알았대두 그래?」

「그랬던 것이 박 주사가 찾아 와서 하는 말이……」

「박 주사라니?」

「저 바로 그 삼룡씨 말입니다.」

「삼룡이……삼룡이가 어느새 박 주사가 됐어?…」

「그래 그 박 주사가 하는 말이, 평당 一[일]원씩 더 내마고……」

「………」

「그래 절더러 한 번만 더 가 보라구……」

아아, 분하고나! 이 무슨 모욕이뇨! 돌아누운 백 초시의 어깨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한다. 백 초시는 말이 없다. 지긋이 감은 눈에서 눈물이 핑 도는 순간, 백 초시는 머리에 베었던 목침을 움켜 쥐자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영팔이를 향하여 내려갈겼다.

「썩썩 내 눈 앞에서 못 사라질테야?」

그러나 목침은 영팔이를 갈기지 못하고 문지두리를 쳤다. 문지두리를 치고 튀어나는 바람에 바로 그 옆에 놓였던 냉수 그릇이 보기좋게 쪼개져 나갔다.

영팔은 재빨리 도망을 쳐버렸다.

「불량배 삼용이가 박 주사가 되구……남 보다 一[일]원씩을 더 주고 내 땅을 사겠다?……아아, 백 초시두 인제는 다 됐구나, 다 됐어!」

물 그릇이 깨져 한강수를 이룬 방안에 우뚝 서서 한 걸음 한 걸음 몰락하여 가는 자기의 운명을 물끄러미 백 초시를 바라본다.

아들 하나 동경 유학을 보내는 것이 결코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작년에도 한 뙈기, 재작년에도 한 뙈기 ── 매년 한 뙈기씩 땅을 팔아대는 백 초시다. 대학을 졸업해서 하늘의 별을 딴대도 조상이 물려준 금 같은 땅을 팔 때마다 그래도 三[삼]년 전 까지는 큰 기침을 하고 다니던 백 초시의 기침 소리가 점점 적어져 갔다.

「잘 나서 백 초시나? 돈 있어서 백 초시지.」

그 누구가 빈정거리던 말이 딱 들어 맞았다.

백 초시는 그때 물이 흠뻑 젖은 봉투 한 장을 자기 발부리 앞에 발견하였다.

잉크가 번져서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아들의 편지를 함부로 뜯어 보는 백초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속 편지 내용까지 보이지 않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봉투 뒷등에는 발신인의 이름도 없고 주소도 쓰이지 않았다. 그 순간,

「혹시나? ──」

하는 생각이 백 초시의 가슴을 쳤다.

「四[사]년 동안 행방조차 묘연한 운옥의 편지나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