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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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백운을 누가 알아? 다만 청산은 백운이 알고 백운은 청산이 알 뿐이지! 전피청구혜(田彼靑邱兮), 애써 갈고 써리는 두손의 심정 아는 이 없도다.

아는 이 없음이라. 구름 깊은 저곳에 곁두리 점심 누가 갖다 먹이랴! 그래도 뜻 있음이라. 주린 배 움켜쥐고 씨알 뿌릴제, 한 이는 ‘묵소’(默咲)를 짓고, 한 이는 ‘소아’(咲啞) 자처하더라.

그러나 저기에 무엇이 될까? 쟁기도 꼬눌 줄 모르고 소 멍에 메이며 소도 몰 줄모르고, 써레질하며 두럭도 지을 줄 모르면서 사래 찬 밭 넘보도다. 또한 그리고 씨앗 보구닐 어루만져! 저기에 무엇이 될까?

묵소 대호왈(大呼曰) ‘암, 되지. 다언(多言) 마소. 저 백운(白雲)으로 뒷날에 증거합세.’

모르리로다. 청산 백운을 누가 알아? 모를세라. 뒷일을 어이 알리마는 아무려나 작히 좋으랴. 잘 되거라. 잘 나거라. 잘 크거라. 잘 되거라. 꽃봉오리 적에 잘 피거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믿지 말고, 무궁무궁 무궁화가 네 소원이거라.

해 저문 현량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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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군(默君)과 대팻밥 모자를 빗겨 녹초처처(錄草萋萋)한 앞벌을 거치고, 콩포기 우거진 세제일루(細提一縷) 귀도(歸道)에 올랐다.

해는 모운(暮雲)에 어리어 떨어졌다. 띄엄띄엄 중방(衆芳) 구름 사이로 잔조(殘照)는 억천조(億千條). 대머리 달마옹(達磨翁) 큰재봉(峰) 어른은 찬란한 저녁노을에 눈이 몹시 부시던지 한 어깨를 추석거리며 고개를 돌이켜 현량개 앞 벌을 내려다보는 그 그림자 밖으로, 서너주(株) 세류지(細柳枝)는 한줌 연사(煙紗)의 엷은 선(線)을 드리웠다.

위대한 저가 큰 무엇이 운명(殞命)할 때처럼 서산 고개에서 마지막 눈을 껌벅거릴 때, 온 만유계는 우글우글하며 임종 준비가 매우 바쁘다. 하늘도 바쁘고 땅도 바쁘고, 뫼나 물이나 집이나 사람이나, 또한 현량개나 모두 바쁘다.

황혼의 파도는 석연(夕煙)이 비낀 주봉(朱鳳)뫼 골짜기로 슬슬 밀어 내려온다. 그 파도에 홀로 아니 빠지랴 발돋움하여 허덕거리는 괘등형(掛燈形) 외딴 소나무 애처롭다! 저야 운명의 석조(汐潮)를 면할 수 있으랴! 하는 수 없이 그 파란(波瀾)에 풍덩실…… 아울러 출렁거린다. 아아! 어찌 저만 그러랴.

포플라 무성한 가지에선 쓰르라미 읊조리는 새 곡조가 일어나자, 오리나무숲 참새떼 저녁 굿놀이는 한창 넋이 올랐다.

서녘 하늘 쇠잔한 볕살 사루어지고, 일폭 석류꽃빛 깁바탕에 천만경(千萬頃) 출렁거리던 무수한 청산은 일획의 곡선만 남아 검푸른 윤곽을 그리고, 위로 몇점 화운(華雲)은 유화(油畫)로 찍어낸 듯, 사위는 다 - 유화색(榴花色)으로 반응한다. 산이나 나무나, 사람도 붉은 사람이요, 짐승도 붉은 짐승이다. 밭둑길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이웃집 늙은이는 볕에 그을린 얼굴이 주귀(朱鬼)같이 붉다. 홍화(紅火)가 이는 듯, 나는 내 대팻밥 모자를 만져보았다.

서풍은 솔솔 불어온다. 먹실골서 내려오는 〈농부가〉는 바람결에 한번 무더기로 들리자, 버드나무숲 우거진 이쪽저쪽 풀집에서 밥짓는 저녁연기가 소르르 떠오른다. 이것이 시골의 정경이다. 더구나 저를 좀 보라. 평화롭고 깨끗하고 사람답고 또 태고(太古) 맘인 저 연기. 순후한 촌부인, 사랑하는 어머니같다. 나는 저를 안고 싶다. 안기고 싶다. 젖투정하던 어린아기 어머니 품안에 안겨, 한 젖꼭진 입에 물고 한 젖꼭진 어루만지며 어머닐 쳐다볼 때 사랑하는 어머니 마음이랴.

나의 영(靈)은 저와 조화하여 몽기몽기 떠올라 가끔 바람에 이리 휘뚝 저리 휘뚝. 그러다 영영히 먼곳으로 떠가면…… 그만이지. 그러나 현량개 사람들아, 행여나 자모(慈母)같은 저 사랑 품을 벗어나지 마라. 이 세상 악풍조(惡風潮)를 어찌 느끼랴. 도도한 탁파(託波)가 뫼를 밀고 언덕을 넘어 덮어 민다. 조심하라. 음탕 · 사치 · 유방(遊放) · 나태 · 오만 · 완고, 이 거친 물결을…… 저의 사랑이 엷거든 너른 품으로 훔쳐싸주는 주봉뫼의 사랑을 받으라. 그래도 부족하거든 영원한 저곳, 저 하늘을 우러러보라. 주봉뫼는 그 사랑 품에 모로 안기며, 풀집 연기는 저기를 쳐다보며 뭉기뭉기 오른다.

풋밤송이같은 꼴짐은 깝죽깝죽 흔들거리며 건넛말로 들어가고, 저 뒤로 쇠코잠방이 아래 저사락같은 두다리로 땅을 버튕기며 코센 거먹암소 고삐를 다리며 애쓰는 꼴이야. 저것이 사람인 생명이다. 글도 그가 영물(靈物)이라 끝끝내 영악한 저를 정복한다.

아이 꽁무니 따르기에 뉘집 흰 강아진지 너무 고되다. 아이는 밭매는 젊은 계집더러 “누이- 밥먹으라여-” 무교육한 비향토어(鄙鄕土語)다. 아무리 들어도 어련무던한 시골 말솜씨다. 아이가 돌아서 뛰어가자 강아지는 또 쫄랑쫄랑…… 제비는 공중에서 치뜨고 내리뜨고, 밭 가운데 어린아기들은 “잠자리 동동 파리 동동” 또 “자- 즈 자- 즈”, 이것도 다 의미있는 소리다.

뒤에서 발맞춰 오던 목군(默君)은 밭매는 전부(田父)더러 “시워해 좋지? 나도 좀 해볼까?” 별러서 건네는 수작이야 가뜩이나 바쁜 현량개 또 한거리가 되더라.

나는 홀로 밭둑길 지렁포기를 헤치며 집으로 들어온다. 정시박모천(正是薄暮天)이라. 돌아나는 구름은 너무나 피로한 듯이 머뭇머뭇하며 날 저문 묏부리를 힘없이 돌아든다. 활텃거리 콩밭에선 “오늘 해는 다- 같는지 골골마다 연기 나네.” 칡사리 해 지고 돌아오는 머슴아이 배고픈 엄살, 줄뽕나무 밑에서부터 터진다. 나의 게으른 보조는 사랑마당에 들어섰다.

매일 밭가는 우령(牛鈴)소리는 뎅그렁뎅그렁, 버드나무 숲 컴컴한 속에서 우렁차게 나는 황소 영각. 아울러 어둠을 재촉하다.

잰 며느리야 보는 이 저녁달은 벌써 바리목골 고개에 한입을 베어물렸다. 어둠의 막은 겹겹이 쳐서 온다.

무인어 무물음(無人語 無物音)한데 성하(星河)는 일천(一天), 우주는 묵연(默然)한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다. 물(物)이 있느냐 없느냐, 유물(有物)의 경(境)에 들어간 나는 즐거운지 슬픈지…… 앨 써 늒지 마라. 그믐같은 너의 속, 얼음같은 너의 속, 검고 찬 너의 속, 답답하고 쓰린 너의 속, 누가 어루만져 녹여주랴. 건넛말 뉘집 등잔불 일점 새삼스럽게 반짝반짝. 허공에 휘적거리는 포플라 일주(一株) 새로이 석풍(夕風)을 띠었다. <1919.7>

끝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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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거라 이르지 마소. “問君緣何太瘦生고, 總爲從前作詩苦라.”

묵군왈(默君曰) “이것이 3년 동안 밥먹고 지은 거라고……” 누가 밥 안 먹으랴마는 “밥먹었다” 하는 참 소리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학생모 가죽챙 밑에서부터 참 3년 동안 밥먹어 삭인 것이다. 비노니 못사람들아, “쉬운 거라”말고 어떻든 무궁화라고 너털웃음을 섞어나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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