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방랑
출발
편집통화(通化)는 시골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아직껏 위험하다고들 한다. 그는 진도(陣刀) 모양의 끈 달린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금세 칼집에서 불쑥 알맹이를 드러내는 것이나 아닌지 겁이 났다.
나는 또 그에게 아편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가 어떤 대꾸를 했는지, 그건 잊어버렸다.
그― 그는 작달막하고 이쁘장하게 생긴 사나이다.
안경 쓰는 걸 머리에 포마드 바르는 것처럼이나 하이칼라로 아는 그는 바로 요전까지 종로의 금융조합에 근무하고 있었단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아주 사람 좋고 순진하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인 줄 알고 있다.
그를 멸시할 생각도 자격도 나에겐 추호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현재 만주의 통화라는 곳에 전근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오랜만에 돌아온 경성은 정답기 그지없다고 한다.
경성을 떠나고 싶지 않다.
카페, 그리고 지분(脂粉)냄새도 그득한 바하며 참으로 뼈에 사무치게 좋다는 게다.
통화는 시골이라 오락 기관―그의 말을 따르면―같은 것이 통 없어서 쓸쓸하단다.
나는 그의 말에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상 나는 그 방면의 일은 제법 잘 알고 있을 것 같으면서 조금도 그렇지 못한 것인데, 그는 자꾸만 그런 것에 대해 고유명사를 손꼽아 대곤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가 하면,
또 나아가서는 사계(斯界)의 종업자(從業者)인 나보다도 이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걸 뽐내 보임으로써,
그 천생의 도락벽에다 여하히 달콤한 우월감을 더해 볼까 하는 속셈인 것 같으나,
나는 또 나로서 사실 말이지 그의 여러 가지 이야기에 고분고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하찮은, 한 번에 3원 정도의, 좀더 소규모로는 5, 60전의 도락은 정말 싫증 나는 법이 없는가 보다.
그는 또 무엇보다도 금수강산으로 이름난 평양에 한나절 놀고 싶노라고도 했다.
평양기생은 예쁘다. 하지만 노는 상대는 어쩐지 기생은 아닌 성싶다.
그와 얘기한다는 건 한없이 나를 침묵케 하는 일이다. 그가 하는 이야기에 일일이 감탄을 표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니 말이다.
나는 얘기해서 그를 감격케 할 만한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는 그가 그저 괴상하다는 느낌만 들게 할 따름이리라.
첫째, 나는 나의 초라한 행색을 어떻게 변명해야 좋을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나의 이 빈약한 꼴을 비웃을 것에 틀림없다. 나로선 그것은 참기 어려운 노릇이다.
나의 여행은 진실로 모파상 식이라는 것을 그에게 설명해 주고 싶다.
허나 나의 혼탁한 두뇌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저 무턱대고 초조해하는 수밖엔 없다.
집을 나설 때, 나는 역에서 또 기차간에서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다행히 역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나로선 괴로운 일이다.
나는 기차간에서도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는 이렇게 언짢은 얼굴을 한 나를 보고, 참으로 치근치근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는 그런 일에는 무관심한 모양이다.
나그넷길에 길동무…… 어쩌고 하면서, 그는 자진해서 그의 만주행이 얼마만큼 장도의 여행인가를 설명한다.
경성 신의주 6시간 하고도 20분, 스피드업한 국제열차 아니고선 그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그런다.
그러나 그는 여태 비행기라는 편리한 교통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만 같다.
나는 왜 이렇게 피로해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어제는 엊그제 같기도 하고,
또한 내일 같기조차 하다. 나에겐 나의 기억을 정리할 만한 끈기가 없어졌다.
나는 이젠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엔 별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바위 같은 불안이 공기와 호흡의 중압이 되어 마구 짓눌렀다.
나는 이 야행열차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아니 된다.
미지의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차내의 한구석에서, 나의 눈은 자꾸만 말똥말똥해지기만 한다.
그는 이윽고 이 불손하기 짝이 없는 사나이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인가를 깨달았던 것일까.
비스듬히 맞은편 좌석에 누이동생인 듯한 열 살쯤 난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는 한 여학생 차림의 얌전한 여인 위에 그의 주의를 돌리기 시작한다(그런 것 같았다).
나처럼 그는 결코 여인을 볼 때에 눈을 번쩍이거나 하지 않는다.
느슨한 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과 같이 그야말로 평화스럽다.
평화스러운 눈매 그것이다.
나도 그 여자 쪽을 본다. 잘생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꽤 감성적인 얼굴이다.
살찐 듯하면서도 날렵하게 야윈 정강이는 가볍고 또 애처롭다.
포도를 먹었을 때처럼 가무스레한 입술이다.
멀리 강서 근처에서 폐를 요양하는 애인을 생각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 자신을 암살하고 온 나처럼, 내가 나답게 행동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세르팡』을 꺼낸다.
아폴리네르가 즐겨 쓰는 테마 소설이다.
「암살 당한 시인」.
나는 신비로운 고대의 냄새를 풍기는 주인공에게서 ‘벤케이’를 연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이기 때문에,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에, 저벤케이와 같이 결코 화려하지는 못할 것이다.
글자는 오수(午睡)처럼 겨드랑이 밑에 간지럽다.
이미지는 멀리 바다를 건너간다. 벌써 바닷소리마저 들려온다.
이렇게 말하는 환상 속에 나오는 나,
영상은 아주 반지르르한 루바슈카를 입은 몹시 퇴폐적인 모습이다.
소년 같은 창백한 털복숭이 풍모를 하고 있다.
그리곤 언제나 어느 나라인지도 모를 거리의 십자로에 멈춰 서 있곤 한다.
나는 차가운 에나멜의 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다.
나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얼마 후 꿈 같은 강변으로 나선다.
강 저편은 목멘 듯이 날씨가 질척거리고 있다.
종이 울리는가 보다. 허나 저녁 안개 속에 녹아 버려 이쪽에선 영 들리지 않는다.
나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청년이 헌책을 팔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뒤적거린다. 찾아낸다. 나카무라 쓰네의 자화상 데생 말이다.
멀리 소년의 날, 린시드 유의 냄새에 매혹되면서 한 사람의 화인(畵人)은, 곧잘 흰 시트 위에 황달색 피를 토하곤 했었다.
문득 그가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이건 또 어찌 된 셈일까? 그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미간에 주름살마저 잡혀있지 않는가.
『킹구』―이 천진한 사나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기사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일까?
나는 담배를 피우듯이 숨을 쉬었다.
그 아가씨는? 들녘처럼 푸른 사과 껍질을 깎고 있다.
그 옆에서 저 여동생 같기도 한 소녀는 점점 길게 드리워지는 껍질을 열심히 응시하고 있다.
독일 낭만파의 그림처럼 광선도 어둡고 심각한 화면이다.
나는 세상 불행을 제가끔 짊어지고 태어난 것 같은 오욕에 길든 일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왔다.
그들은 차라리 불행을 먹고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늘 저녁도 또 맛없는 식사를 했을 테지.
불결한 공기에 땀이 배어 있을 테지.
나의 슬픔이 어째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가?
잠시나마 나의 마음에 평화라는 것이 있었던가.
나는 그들을 저주스럽게 여기고 증오조차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멸망하지 않는다.
심한 독소를 방사하면서, 언제나 내게 거치적거리며 나의 생리에 파고들지 않는가.
지금 야행열차는 북위(北緯)를 달리고 있다.
무서운 저주의 실마리가 엿가락처럼 이 열차를 쫓아 꼬리가 되어 뻗쳐 온다. 무섭다, 무섭기만 하다.
나는 좀 자야겠다. 허나 눈꺼풀 속은 별의 보슬비다.
암야(暗夜)의 거울처럼 습기 없이 밝고 맑은 눈이 자꾸만 더 말똥말똥하기만 하다.
책을 덮었다. 활자는 상(箱)에게서 흘러 떨어졌다.
나는 엄격한 자세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이젠 혼자뿐이니까.
차창
편집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다.
그것이 나에겐 아무래도 이상스럽기만 하다.
어째서 앉은 채 사람들은 잠자는 것일까?
그러한 사람들의 생리조직이 여간 궁금하지 않다.
저 여학생까지도 자고 있다. 검은 드로어즈가 보인다.
허벅다리 언저리가 한결 수척해 보인다.
피는 쉬고 있나 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얼굴은 몹시 창백하다.
슬픈 나머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기차는 황해도 근처를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가끔가끔 터널 속에 들어가 숨이 막히곤 했다. 도미에의 〈삼등열차〉가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고양이처럼 말똥말똥해서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이따금 포즈를 흐트려 잠잘 수 있을 만한 자세를 해본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이 뼈마디를 아프게 하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체념한다. 해저에 가라앉는 측량기처럼 나는 단정히 앉아 있다.
창밖은 깊은 안개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능형(菱形)으로 움직이는 차창의 거꾸로 비친 그림자에 풀 같은 것들의 존재가 간신히 인정된다.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이건 또 누구일까,
다가오는 기척이 난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그쪽으로 돌린다.
지극히 키가 큰 사람이다. 중대가리다.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있다.
눈엔 독기를 띠고 있는 것 같기만 했다.
옆에까지 온 그 사람은,
별안간 무엇을 떨어뜨리기나 한 것처럼 커다란 소리를 내었다.
나는 오싹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나가는 무슨 악귀처럼 그 사람의 맞은편 도어를 열고 다음 찻간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저 금융조합 사나이가 가지고 있던 진도 모양의 단장(短杖)을 넘어뜨렸던 것이다. 그 는 잠이 깨지는 않았다.
이건 또 어찌 된 일일까.
사람들은 답답한 숨들을 쉬었다.
개중엔 커다라니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조차 있었다.
폐들은 풀무처럼 소리내어 울렸다.
탁한 공기는 빠져나갈 구멍을 잃고 있다.
송사리떼 같은 세균의 준동이 육안에도 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코를 손가락으로 집어 봤다.
끈적거리면서 양쪽 벽면은 희미한 소리마저 내면서 부착했다.
나는 더 숨을 쉴 수가 없다.
정신이 아찔했다.
안면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 갔다.
다시마가 집채같은, 콘크리트 같은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순간 그들 다시마는 뱀장어로 변형돼 갔다.
독기를 품은 푸르름이 나의 육체를 압착했다.
나를 내부로 질질 끌고 갔다. 이제 완전히 나는 선머슴애가 되고 말았다.
세월은 나의 소년의 것이다. 나는 가련한 아이였다.
풀밭이 먼 데까지 펼쳐져 있다. 언덕 너머 목초 냄새가 풍겨 온다.
빨간 지붕이 보였다. 여기는 대체 어디란 말인가?
나의 강막(綱膜)에 거대한 괴물이 비쳤다.
그것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놀라지 않는다.
이렇게 내 손은 희다.
이 사나이는 또다시 저 진도처럼 생긴 단장을 넘어뜨렸던 것이다.
이 무슨 경망스런 작자일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까 넘어졌던 그걸 일으켜 단정히 세워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것은 얌전하게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치인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또 나는 이 무슨 환상의 풍경을 눈앞에 본 것일까. 나는 그만 꾸벅꾸벅 졸았던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 어쩌면 누군가가 내 옆을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저 단장을 일으켜 놓은 모양이다. 저 사나이는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다.
몹시 두드려대는(도어를) 소리로 해서 나의 의식은 한층 또렷해졌다. 내 앞에서 저 진도처럼 생긴 단장이 뒹굴어 있다. 나는 반쯤 조소로써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어째 알맹이가 없는 그저 그런 장님 진도인 것 같다. 사람들은 저런 걸 사는 것이다. 이걸 만든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저 얼토당토않은 물건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짚어 보았다. 나는 단장 휘두르기를 좋아한다. 머리가 민짜인 그 단장은 휘두를 수는 없다. 나는 발밑 풀을 후려쳐 쓰러뜨리는 그런 시늉을 해 보았다.
풀을 건드리지 않고 단장은 날카롭게 공기를 베었다. 나는 또 그 끝으로 흙을 눌러 보았다. 시뻘건 피 같은 액체가 아주 조금 배어 나왔다. 나는 몸에 가벼운 그러나 추위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고귀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한 여인이 해산을 하고 있다. 치골 언저리가 몹시 아프다. 팔짱을 끼듯 나는 그 애처로운 광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팔굽 언저리는 딱딱한 책상이다. 책상 위엔 아무것도 없다.
말소리가 유리를 뚫고 맑게 울리는 시골 사투리가 되어 들려왔다. 그것들은 더없이 즐겁다. 그리고 좀 시끄럽기조차 하다.
나는 개떼한테 쫓기고 있었다. 나는 쏜살같이 달아난다. 이윽고 나의 속도는 개들의 그것보다 훨씬 뒤진다. 개들의 흙투성이 발이 내 위에 포개졌다. 무수한 체중이 나를 짓누른다. 개들은 나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나를 밟고 넘어선 나의 전방 먼 저쪽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또 어쩌면 이렇게도 숱한 개의 수효란 말인가.
열차는 멈춰 있었다. 밤안개 속에 체온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턱수염인 것처럼 때때로 기관차는 뼈 돋힌 숨을 쉬었다.
차창 밖을 흘깃 내다보았더니 이건 또 유령의 나라 순사인가. 금빛 번쩍거리는 모자를 쓴 사람이 습득물 바퀴 하나를 가지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윽고 태엽을 감기나 한 듯이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어디선지 불이 옮겨 붙었는가 하자, 이미 그 모습은 무슨 방대한 어둠의 본체 속으로 빨려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모골이 송연했다. 보아선 아니 된다. 나는 또 그 무슨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까 내 귀에 산 같은 것이 무너져 떨어졌다.
내 귀는 멀어 있었던가. 그것은 남행의 국제특급인 것 같았다. 그렇다 치더라도 내 귀는 멀어 있었던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리고 모든 것을 남기고 또 하나의 야행열차는 야기(夜氣) 때문에 흠씬 젖은 덩치를 엇비비듯 지나쳤다.
누군가가 슬픈 음색으로 기적을 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은 잠든 사이에 멸형(滅形)되었나 보다.
개찰구에 홀로 우두커니 기대고 있던 백의(白衣)의 사람이 에스컬레이터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빛을 번쩍거리던 사람은 다시 어디선가 나타나서 엄숙하게 거수경례를 해보였다. 나는 내심 혀를 낼름 내밀었다. 이건 혹시 장난감 기차인지도 모른다. 진짜 기차는 어딘가 내 손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위대한 지도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렇게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곁의 그는 어느새 잠이 깨고 그 진도처럼 생긴 단장을 턱에 짚고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고쳐 앉은 나를 향해 지금 엇갈려 간 열차는 ‘히카리’가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구말구 하듯 끄덕여 보였다. 그는 만족한 듯 그 ‘히카리’ 호의 속력이 어떻게 절륜적(絶倫的)인 것인가에 대해 그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얼마나 드물게밖엔 정차하지 않는가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슈트케이스에서 사륙반절형 소책자와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만주 담배라도 들어 있나 했더니, 그것은 만주에서 샀다는 케이스였다. 그때 그의 슈트케이스의 내용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목격하고 말았다. 그 흔해 빠진 여송연 한 개비를 나에게 권했다.
나는 그것을 피우리라. 이미 이 야행열차 속에 10년 전의 그 커다란 잎 그대로의 칙칙한 연기를 볼 수는 없다.
그들은 먼 조상의 담뱃대를 버리고 우습기 짝이 없는 궐련을 피우는 대[竹], 또는 오동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그 맛의 미흡함과 자신의 어지간히 큰 덩치에 비해 파이프가 너무나 작은 멋쩍음으로 해서 눈에서 주루루 눈물마저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구토가 자꾸만 치밀어 목은 좌로 향하고 우로 향했다. 무거운 짐짝 같은 두통이 눈구멍 속에 있었다. 이것은 분명 불결한 공기 탓이리라. 이 불결한 공기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승강구에 섰다. 요란한 음향이다. 철과 철이 맞부딪는 대장간 같은 소리는 고통에 넘쳐 있다. 나는 산소로만 만들어졌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이 정수리를 때리는 것만 같은 음향에 익숙하려 했던 것이다. 공기는 냉랭한 채 머리털에 엉겨 붙었다. 이마에 제법 차가운 손이 얹혀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이 음향에 어서 익숙했으면 좋겠다.
승강구에 멈춰 서 보았다. 몸은 좌 혹은 우였다. 아직 머리는 비슬거리고 있나 보다.
소변을 누어 보는 것도 좋겠다. 달리는 기차 위로부터 떨어지는 소변은 가루눈처럼 산산이 흩어져, 그것은 땅바닥에 가닿지도 못할 것이다.
이때 나의 등 뒤에서 차량과 차량과의 접속해 있는 부분의 복잡한 기계를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있다. 차장일 테지.
그렇다하더라도 익숙한 손짓이다. 나는 소변을 보면서 귀찮은 일은 그만 잊어버리기로 했다.
언제까지나 무엇을 저렇게 만지작거리는 것일까. 고장이 난 것일까. 그런 일이 있어서야 어디 되겠는가. 그렇더라도 너무 시간이 길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돌아다보기로 하자. 아니 이거 아무도 없구나.
가느다란 공기 속에서 그전처럼 철과 철이 광명단(光明丹)을 가운데 끼고 맞부딪고 있다. 그리고 슬픈 소리를 내고 있다. 나의 소변은 어이없게 끝나버렸다. 이젠 이 이중(二重)―이부(二部)로 이루어진 음향에 익숙해져야 한다. 나는 먼 곳을 바라다보기로 했다.
거기엔 경치랄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린 방대한 살기가 어디까지나 펼쳐져 있다. 저 안개같이 보이는 것은 실은 고열의 증기일 것이 분명하다. 이 무슨 바닥 없는 막대한 어둠일까.
들판도 삼켜졌다. 산도 풀과 나무를 짊어진 채 삼켜져 버렸다. 그리고 공기도, 보아하니 그것은 평면처럼 얄팍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입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심원한 거리를 그득히 담고 있다. 그 심원한 거리 속에는 오직 공포가 있을 따름이다.
반짝이지 않는 별처럼 나의 몸은 오무러들면서 깜박거리고 있었다. 이미 이것은 눈물과 같은 희미한 호흡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나는 핸들을 꽉 붙잡고 있다. 차가운 것이 흐르고 있다. 나는 그것을 놓을 수는 없다―저 막대한 공포와 횡포의 아주 초입은 역시 조그마한 초원, 그것은 계절의 자잘한 꽃마저 피우고 있는, 목초가 있는 약간의 땅인 것 같다.
실상 일전에 이 열차의 등불 있는 생명에 매달리려고 필사의 아우성을 치면서―그것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하다.
저기 멈춰 서자. 메마른 한 그루의 나무가 있으면 그것에 산책자이듯이 기대서자. 거창한 동공이 내 위에 쏟아진다. 나는 그것에 놀라면 안 된다.
아름다운 시를 상기한다. 또는 범할 수 없는 슬픈 시를 상기한다. 그리곤 고개를 수그리면서 외워 본다. 공포의 해소(海嘯)는 얼마쯤 멀어진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는다. 내 손에는 어느새 은빛으로 빛나는 단장이 쥐어져 있다. 그것을 가볍게 휘둘러 본다.
그리하여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사람들은 오고야 말 것이다. 오오, 아직 이 살벌한 몽몽(濛濛)한 대기는 나를 위협하고 있다.
하현달이다. 굳이 나는 아름답다고 본다. 그것은 몹시 수척한 심각하게 표정적인, 보는 눈에도 가엾게 담배 연기로 혼탁해 있는 달이다. 함성을 지르기엔 아직 이르다. 공포의 심연 속에는 분노의 호흡이 들린다. 이젠 사람들이 와도 좋을 시기다.
왔다. 일순, 달은 분연(噴煙)을 울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철을 운반해온 것이다. 사람들은 묵묵히 다가온다. 다만 철과 철이 알몸인 채 맞부딪고 있다. 나의 귀는 동굴처럼 그러한 음향들을 하나하나 반향한다. 아니, 이건 또 후방으로부터 오나 보다. 그렇다면 난 방향을 잘못 잡고 서 있는 것일까. 이건 반의(叛意)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이건 단 혼자인 것 같다. 나는 아찔했다. 나는 상아처럼 차갑게 가늘어지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엔 아무도 없다. 나는 끝끝내 대지(垈地)를 분실하고 말았다.
나는 나의 기억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정신에선 이상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 뼈만 남은 몸을 적토(赤土) 있는 곳으로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의 투명한 피에 이제 바야흐로 적토색을 물들여야 할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적토 언덕 기슭에서 한 마리의 뱀처럼 말라 죽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름다운―꺾으면 피가 묻는 고대(古代)스러운 꽃을 피울 것이다.
이제 모든 사정이 나를 두렵게 하고 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는 그것이, 승천하려는 상념 그것이, 그리고 사람들의 치매증 그것마저가.
그러한 온갖 위협을 나는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의 침범으로 정신의 입구를 공허하게 해서는 안 된다.
끝없는 어둠에 나의 쇠약한 건강은 견디어 내지 못하는가 보다. 나는 이 먼 데 공포로부터 자진 도피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등불이 어스름하다. 이건 옥체실(屋體室)임에 틀림없다.
공기는 희박하다―아니면 그것은 과중하게 농밀한가. 나의 폐는 이런 공기 속에서 그물처럼 연약하다. 전실(全室)에 한 사람 몫 공기 속에 가사(假死)의 도적이 침입해 있는가 보다.
이 무슨 불길한 차창일까. 이 실내에 들어서는 즉시 두통을 앓지 않으면 안 되다니.
승강대에 다시 서서 저 어둠 속을 또 바라보았다. 이건 또 별과 달을 삼켜버리고 있다. 악취로 가득 차 있을 테지.
머리 위 하늘을 찌르는 곳에 한 그루 나무가 보였다. 그것은 거멓게 그을은 수목의 유적일 것이다. 유령보다도 처참하다.
몽몽한 대기가 사라지고 투명한 거리는 가일층 처참하다. 그 위를 거꾸로 선 나의 그림자가 닳아 없어지면서 질질 끌려간다.
8월 하순―이 요란하기 짝이 없는 음향 속에 애매미 소리가 훨씬 선명하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저 어둠에 압살되었을 것이다.
따스한 애정이 오한처럼 나를 엄습한다. 또 실로 오전 3시의 냉기는 오한이나 다름없다. 일순 나는 태고를 생각해 본다. 그 무슨 바닥 없는 공포와 살벌에 싸인 저주의 위대한 혼백이었을 것인가. 우리는 더더구나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식어 가는 지구 위에 밤낮 없이 따스하니 서로 껴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마다 정지한다는 이 열차가, 한 번도 정차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의 기억엔 없다. 나는 그것을 모조리 건망(健忘)하고 있나 보다.
먼동이 트여올 것이다. 이윽고 공포가 끝나는 장엄한 그리고 날쌘 광경에 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것은 어둠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미 이젠 저 해룡의 혀 같은 몽몽한 대기는 완전히 가시었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에 흐르고, 별들이 운행하는 소리가 체내에 상쾌하다. 어느 틈엔가 별의 보슬비다. 그리고 수줍어하듯 하늘은 엷은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별은 한층 더 기쁜 듯이 반짝인다.
수목이 시원스러운 녹색을 보이는 시간은 언제쯤일까. 나무들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주 딴 방향으로부터 저 하현달이 다시금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다른 것으로 보아 그것은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약간 따스함조차 띠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사치로 해서 참을 수 없이 빛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나에게 표정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기꺼이 표정을 선택할 것이다.
이런 때, 내가 해야 할 표정은 어떤 것이 제일 좋을까? 어떤 것이 제일 달의 자랑에 알맞는 것이 될까?
나는 잠시 망설인다.
산촌
편집돼지우리다. 사람이 다가서면 꿀꿀거린다. 나직한 초가지붕마다 호박덩굴이 덮이고, 탐스런 호박이 매달려 있다. 그리고 모양은 노랗고 못생겼으며, 자꾸만 꿀벌을 불러 대고 있다. 자연의 센슈얼한 부면(部面)…….
우리 속은 지독한 악취다. 허나 이것이 풀의 훈기와 마찬가지로 또한 요란하고 자극적이다.
돼지, 귀여운 새끼 돼지, 즐거운 오예(汚穢) 속에 흐느적거리고 있는 돼지, 새끼 돼지―수뢰(水雷) 모양을 하고 있는 꿀돼지다.
바람이 불었다. 비는 이젠 저 철골 망루가 있는 산등성이를 넘어서 또 다른 산촌으로 가버렸나 보다.
남쪽은 모로 길게 가닥가닥이 푸르고, 자줏빛 구름은 어쩌면 오렌지 빛 안쪽을 유혹이나 하듯 뒤집어 보이곤 한다.
야트막한 언덕 가득히 콩밭―그것은 그대로 푸른 하늘에 잇닿아 있다. 그것은 그러므로 끝이 없이 넓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 쪽으로는 수수밭, 들판 쪽으로는 벼밭과 지경(地境)을 이루고 있다.
또 바람이 불었다. 개구리가 뛰었다. 조그만 개구리다. 잔물결이 개구리밥 사이에 잠시 보였다.
벼밭에서 벼밭으로 아래로 아래로 맑은 물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논두렁을 잘라 물길을 낸 곳을 샴페인을 터뜨리는 그런 물소리가 끊일 새 없다.
피가, 지칠 줄 모르는 피가 이렇게 내뿜고 있는 대자연은 천고에도 결코 늙어 보이는 법이 없다.
또바람이 불었다. 좀 비를 머금은 바람이다. 수수 옥수수 잎 스치는 소리가 소조롭다. 그리고 정겨웁다. 어쩌면 치마끈 끄르는 소리와도 같이.
농가다. 개가 짖는다. 새하얀 인간의 얼굴보다도, 오히려 가축답지 않은 생김새다. 아래 온천 마을에선 개는 어떤 사람을 보아도 짖지를 않는다. 여기선 조심스럽게 겸손하는 태도마저 보이면서, 한층 더 슬픈 소리로 짖어댔다.
산에 산울림하여 인간의 호흡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밤나무와 바위와 약간 가파른 낭떠러지에 둘러싸여 온돌처럼 따스해 보이는 농가 두셋, 문어귀의 소로까지 양쪽 댑싸리 옥수수 울타리가 어렴풋하게 구부러지면서 지나갔다. 그래서 문어귀를 곧바로 내다볼 수가 없다. 마당에는 공만한 백일초가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다.
울타리 사이로 개가 이쪽을 겁난 눈으로 엿보고 있다. 그리고 마당. 말끔히 쓸어 놓은 마당과 소로엔 수수며 조 같은 곡식이 떨어져 있음직도 하다.
툇마루 끝에선 노파가 손주딸 머리의 이를 잡고 있다. 원후류(猿猴類)가 하듯이―둘이 다 상반신은 알몸이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부엌 속에 이 또한 상반신은 알몸인 젊은 며느리가 서서 일하고 있다. 초콜릿 빛 피부 건강한 육체다.
집 뒤꼍에는 옥수수가, 이것만은 들쭉날쭉으로 서 있다. 커다란 이삭을 몇 개 달고는 가을풀들 사이에 유난히 키가 크다.
바위에는 칡넝쿨이 붉다. 그리고 그것은 바위에 낀 무슨 광물이기나 한 것처럼 찰싹 바위에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검은 바위를 배경삼아 한층 더 붉다.
어린아이 둘이 검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마당 안에서 놀고 있는 것인지 노는 걸 그만두고 있는 것인지, 둘이 다 멍하니 서 있다.
매일같이 가뭄이 계속되어, 땅바닥은 입덧 난 것처럼 균열이 생기고, 암석은 맹수처럼 거칠게 숨쉬었다.
농부는 짙푸르게 개어 오른 초가을 허공을 쳐다보았다. 한 점 구름조차 없다.
삶을 지닌 모든 것은 모두 피를 말려 쓰러질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아카시아 이파리엔 흰 티끌이 덧쌓이고, 시냇물은 정맥처럼 가늘게 부어올라 거무죽죽하다.
뱀은 어디에도 그 꼴을 보이지 않는다. 옥수수 키 큰 풀숲 속에 닭을 작게 축소한 것 같은 산새가 꼭 한 마리 내려앉았다. 천벌인 양.
그리고 빈민처럼 야위어 말라빠진 조밭이 끝없이 잇달아, 수세미처럼 말라 죽은 이삭을 을씨년스럽게 드리우곤 바람에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잠실 누에는 걸신들린 것처럼 뽕을 먹어 치웠다.
아가씨들은 조밭을 짓밟았다. 어차피 인간은 굶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지푸라기보다도 빈약한 조밭을 짓밟고 그리곤 뽕을 훔치라고.
야음을 타서 마을 아가씨들은 무서움도 잊고, 승냥이보다도 사납게 조밭과 콩밭을 짓밟았다. 그리고는 밭 저쪽 단 한 그루의 뽕나무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누에는 눈 깜박할 새에 뽕잎을 먹어 치웠다. 그리곤 아이들보다도 살찌면서 커갔다. 넘칠 것만 같은 건강. 풍성한 안심(安心)이라고도 할 만한 것은 거기에밖엔 없었다. 처녀들은 죽음보다도 누에를 사랑했다.
그리곤 낮 동안은 높은 나뭇가지 위로 기어올라갔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하얀 세피아 빛 과일을 해는 태워 버릴 것만 같이 쬐고 있었다.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천사는 소년군(少年軍)처럼 도시로 모여들고 만 것이다.
풍우에 쓰러진 비석 같은 마을이여. 태고의 구비(口碑)를 살고 있는 촌사람들. 거기엔 발명은 절대로 없다.
지난해처럼 옥수수는 푸짐하게 익어, 더욱더 숱한 주홍빛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고는, 초가을 고추잠자리 날으는 하늘에 잎 쓸리는 흥겨운 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옥수수 수수깡을 둘러친 울타리엔, 황금빛 탐스런 호박이 어떤 축구공보다도 크고 묵직하다.
산기슭 도수장(屠獸場)은 오래도록 휴업중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고무신을 벗어 들고는, 송사리보다 조금 더 큰 붕어를 잡는다.
개들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마구 야위어 갔다. 그리고 시집을 앞둔 많은 처녀들이 노파와 같은 얼굴로 되어 갔다.
줄기는 힘없이 부러지기만 했고, 조 이삭의 큰 것은 자살처럼 제 체중 때문에 모가지를 접질리곤 했다.
마른 뱅어같이 딱딱하고 가느다란 콩넝쿨은 길 잃은 자라처럼 땅바닥을 기고 있다. 그리고는 생식기 같은 콩 두서너 개를 매달고 있다. 버들잎이 담겨 있는 시냇물까지 젊은 두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물길러 왔다.
그리하여 피[血]는 이어져 있다. 메마른 공기 속 깊숙이.나는 물을 마셨다. 시원한 밤이 오장으로 흘러들었다.
귀뚜리 소리는 한층 야단스레 한결 선연해진 것 같다. 달 없는 천근(千斤)의 마당 안에.
홀로 이 귀뚜리는 속세의 시끄러움에서 빠져나와, 이 인외경(人外境)에 울적하게 철학하면서 야위도록 애태움은 어찌 된 까닭일까? 이 귀뚜리는 지독한 염세가인지도 모른다. 램프의 위치는 어쩌면 그 화려한 자살 장소로서 선정된 것이나 아닐지.
그의 저 등피 밖에서 흥분과 주저는 어떠했던가.
귀뚜리의 자살. 여기에 일가권속을 떠나, 붕우(朋友)를 떠나, 세상의 한없는 따분함과 권태로 해서 먼 낯설은 땅으로 흘러온 고독한 나그네의 모습을 보지 않는가. 나의 공상은 자살하려고 하는 귀뚜리를 향해 위안의 말을 늘어놓는다.
귀뚜리여, 영원히 침묵할 것인가. 귀뚜리여, 너는 어쩌면 방울벌레인지도 모른다. 네가 방울벌레라 해도 너는 침묵할 것이다.
죽어선 안 된다. 서울로 돌아가라. 서울은 시방 가을이 아니냐. 그리고 모든 애매미들이 한껏 아름다운 목청을 뽑아 노래하는 계절이 아니냐.
서울에선 아무도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 말인가. 그래도 좋다. 어쨌든 너는 서울로 돌아가라. 그리고 노력해 보게나. 그리하여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삶의 새로운 의의와 광명을 발견하게나, 고안해 보게나.
하지만 나의 이 같은 우습지도 않은 혼잣말은 귀뚜리의 귀에는 가닿지 않은가 보다. 어쩌면 귀뚜리는 내심 나를 몹시 조소하면서도, 외관만은 모르는 척하고 꿀 먹은 벙어리로 있는 것이나 아닐지. 나는 적이 불안하다.
나는 이 지방에 와서 아무와도 친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나를 질색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도 안 되어 슬금슬금 그들은 두어 마디 서너 마디 나한테 말을 걸어 오는 수도 있게 됐다. 그것이 나로선 참을 수 없이 무섭다.
그들은 도대체 나한테서 무엇을 탐지하려는 것일까? 내 악의 충동에 대해 똑똑히 알고 싶은 것이리라. 나는 위구(危懼)를 느껴 마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누구를 보고도 싱글벙글했다. 무턱대고 싱글벙글함으로써 나의 그러한 위구감을 얼버무리는 수밖엔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남을 보면 나는 그저 싱글벙글했다. 그들의 어떤 자는 괴상하다는 표정조차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귀뚜리를 향해 어찌 싱글벙글할 수 있겠는가? 너의 혜안은 나의 위에 별처럼 빛난다.
다시금 귀뚜리는 아무것도 아직 써넣지 않은 나의 원고용지 위에 앉았다. 그리곤 나의 운명을 점쳐 주기라도 할 그런 자세이다. 이번은 몹시도 생각에 골똘한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이 펜촉이 달리는 소리를 열심히 도청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귀뚜리여, 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너는 능히 나의 이 모자란 글을 읽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정녕 선지자 같은 정돈된 그 이지적인 모습을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어떠냐, 나는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요사한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너만은 알 것이다. 보다 속 깊이 싹트고 있는 나의 악에 대한 충동을, 그리고 염치도 없는 나의 욕망을, 그리고 대해(大海) 같은 나의 절망까지도. 그리고 너만이 나를 용서할 것이다. 나를 순순히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러나 귀뚜리는 다시 흰 벽으로 옮아 앉았다. 그것이 내가 필설로써 호소할 수가 전혀 없는 수많은 깊은 악과 고통마저 알고 있다는 꼭 그런 얼굴인 것이다. 나는 나의 무능함이 폭로되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이다. 나는 더욱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