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일] 편집

색향 평양의 봄은 유자의 심사를 어질게 하매 넉넉하거니와 봄이 지나 여름이 되었다고 이 평양은 버릴 수는 더욱 없다.

보라, 기자능의 욱은 유록과 능라도의 가랑버들, 월하의 화방이며, 만일 한발 더 나아가서 모란봉 저편 강변에 꽃 같은 젊은 여자의 빨래하는 무리들이 흥에 겨워 부르는 요요한 노래를 들으며는 그것은 납량객들의 몽매 간에도 잊지 못할 명승의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무심히 흘러 가는 대동강 물에 발을 잠그고 버들 그늘에 누워 얼굴에 실바람을 들일진댄 무력에 젖은 창자도 바야흐로 씻기어 내릴 향락의 하나일 것이니 대자연의 거룩한 조화를 맛보는 자는 봄보다도 오히려 평양의 여름을 탐낼 것이다.

숙종대왕(肅宗大王) 즉위 사년 유월 열나흘날 저녁이었다.

만월에 가까운 둥근 달이 중천에 높이 솟아 있어 대동강변 일대와 청루벽 부근 일대에는 월광을 그리어 나온 사람 시원한 바람을 쏘이러 나온 사람으로 사람의 자취가 끊어지지 아니한데 강물을 흘러내려오는 유선 중에 가장 큰 배 한 척에는 오색빛 초롱 불이 월광과 빛을 다투어 있고 풍류소리 유랑한 가운데에 아릿다운 기생들의 부르는 노래소리 바람에 실리어 강 언덕 납량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저 누구의 노릿 밴지 돈 냥이나 없애네그려.』

하는 자도 있고

『여보게 오늘 밤 같이 달 밝은 밤에는 미상불 한 잔 먹고 놀아야지 우리 같이 빼빼 말라서야 달님이 욕하시겠네.』

하고 부러워하는 자도 있다.

『관가 노린가 보네.』

『이 사람 누구 노린 줄도 모르고 있나.』

『알 턱이 있나 빌어먹을 팔자가 왼 종일 탕건깨나 뜨는 녀석이 저게 뉘 밴지 알 재주 있나. 자네 같이 발이나 재고 이목이 빨면 모르거니와.』

『기생이 한 턱 내는 거라네.』

『어느 놈 삿갓을 씨우고 말이지.』

『아니.』

『그럼 무슨 턱.』

『두옥이란 기생이 있지 않은가, 행수 기생이지.』

『그래.』

『그 기생이 이번 도임한 김 감사한테 수청을 들게 돼서 제 출물로 동무들에게 한 턱을 내는 거라네.』

『아따 자넨 참 어디서 그렇게 소문을 들어 오나 아마도 자네 그 두옥이 속에서 나왔나 보이.』

『옛기 ─ 미친 녀석.』

납량객들은 이렇게 농담 짓거리를 하며 웃고 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노릿배는 기생 두옥이가 주인이었다.

서두옥(徐斗玉)은 본래 강동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인물 곱고 예민하여 미상불 눈총을 들인 사람이 적지 않았었다.

며느리로 달라는 사람 중에는 상당한 가벌과 재산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숙모는 조카딸 두옥이를 큰 보배처럼 여기어 다음날 두옥이로 말미암아 큰 돈을 벌어 보리라는 야심으로 빗발 같이 들어오는 통혼을 절대로 거절하여 버리고는 가무를 가르키었다.

어린 두옥의 소견에는 기생으로 출신하는 것이 결코 소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찌기 부모를 다 여이고 의지 가지 없는 몸을 데려다가 길러준 숙모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그는『여염집으로 시집을 보내주』하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숙모가 만일 자기의 소망이 어그러지게 된다면 결코 좋은 낯을 하지 않을 것이니. 장구한 세월을 두고 숙모의 미움 받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두옥이는 숙모의 말대로 가무를 배우기 시작하매 워낙 재주가 표일한 계집애라 불과 이삼 년에 장래 명기의 기초는 완전히 닦아지고 말았다.

목적의 일단을 달한 숙모는 두옥이를 데리고 평양부중으로 이사를 하고는 그를 기안에 올리어 내세웠다.

二[이] 편집

추봉(雛鳳)의 날개는 이제 완전히 자랐다. 벽운 만리에 소리쳐 날을 기회를 얻었다.

기안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두옥의 이름은 평양 경사항을 완전히 정복하고 풍류탕자의 커다란 목표가 되고 말았다.

『누가 두옥을 손에 넣느냐.』

하는 것이 오입장이 가운데에 한 커다란 수수께끼었다.

일개 기생이니 제 아무리 도도타 한들 내 가벌과 천세와 돈으로 지근덕거릴진대 내 말을 듣지 않고 무얼 하리. 이러한 생각으로 황금을 눈앞에 쌓아 놓고 두옥을 자유로 하려는 자도 물론 있었다. 또는 권세를 빙자하고 위협을 해 보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수단은 허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누구나 두옥의 맘과 몸을 완전히 사로 잡은 사람이 없다. 두옥의 지조가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세상은『두옥이 두옥이』하고 일컬어 주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기생이 가무를 팔아서만 재산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숙모는 당초의 기대와는 어그러지매 실망하여 직접 간접으로

『기생으로 나온 년이 지조는 무엇이냐 늙은 후의 일을 생각하고 서방깨나 얻어야지.』

하고 조르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하였으나 두옥이는 일상

『그것만은 못하겠소.』

하고 매정히 거절을 하여 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오입장이 중에는 미워하고

『두옥이는 고녀라네.』

하는 소문까지 내 돌리었다. 그래서 중간에서 혹시 짖궂은 사람이 있어

『넌 고녀라더구나.』

하고 비웃는 사람이 있어도 그는 태연히

『그런 줄 아시니 조르지 마시오.』

하고 웃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아는 것이 편하다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고녀가 아니었다. 그는 평소에 주견을 가졌으니 그것은 이러하다.

『내 비록 부모가 없는 탓으로 어찌 어찌 하여 기생이 되었을 망정 몸만은 헛되이 남에게 허락하지 않으리라 내 눈에 이 사람이면 평생을 같이 해도 좋다는 인물을 만나기 전에는 이 몸을 허락치 않으리라.』

이러한 결심을 하였던 것이니, 그러나 심지 깊은 그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오늘까지 왔었다.

그러자 이번에 새로 도임한 김 감사 ─ (그의 자손이 현재 상당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이이므로 특히 이름을 쓰지 아니 함) ─ 를 본 두옥은 몸이 기생된 보람이 비로소 생긴 듯이 반가웠다.

김감사는 그의 외모이여 그의 식견 수완 무어하나 험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나이 장년이 될락말락 하여 화직 중에도 화직인 평안도감사를 하였으니 그의 수완도 수완이려니와 문벌이 혁혁한 것을 가히 짐작할 것이며 그의 도량과 수완을 볼진댄 일후 일국 재상의 재목이 분명하다.

여자로 태어나서 일찌기 여염가로 시집 가서 유자생녀하고 평생을 살지 못할진댄 저러한 재상의 애첩이 되어 호화한 생애를 보내 보리라.

내 몸이 기생이 아니면 어찌 하향(遐鄕) 상인의 딸로 일국 재상의 사랑을 받아 볼 수 있으랴.

이러한 생각으로 두옥이는 김감사의 눈이 자기에게 쏠리기를 은근히 신명께 빌었었다.

그랬더니 김감사가 도임한지 불과 삭여에 그의 목적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두옥이더러 수청을 들라는 명령이 내리었다.

당초 김감사가 도임한지 수일 후에 책방이 감사더러

『이 평양부중에는 두옥이란 명기가 있는데 누구에게나 몸을 허락치 않은 처녀라 해서 심지어 고녀란 풍설까지 있답니다.』

하는 말을 하였다. 감사는 그 말에 다소의 흥미를 느끼었지마는 국은을 입어 목민의 중책을 가진 자로 도임 후에 수일에 벌써 색을 나꾸기에 마음을 쓴다는 것이 떳떳한 도리가 아닌 것을 알고 그는 일부러 삭여가 지난 후에 수청 명령을 은근히 내린 것이었다.

수청 명령을 받은 두옥은 딴 사람처럼 기뻐 날뛰었다.

숙모는 다른 의미에서 기뻐 입을 헤하고 벌인 채 다물을 줄을 몰랐다.

『글쎄 우리 조카딸이 고녀니 무어니 하고 욕들을 하지마는 제 생각은 따로 있었던 게지. 서방을 하면 이만 저만한 서방인가.』

하고 동네 집으로 자랑을 하며 돌아다니기까지 하였다.

두옥이 감사의 수청을 순순히 받았다는 소문은 미상불 한 커다란 이야깃거리가 되어서 부중을 돌았다.

『기왕 먹으면 듬쑥히 먹어 보자는 게지.』

두옥의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었다.

三[삼] 편집

김감사는 두옥이란 기생이 지조가 굳다는 소문을 듣고 한때의 호기심으로 그를 수청들인 것이지마는 두옥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은 기쁨에 진심으로 수청을 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옥은 성심성의로 감사의 사랑을 받고자 고심하였다.

수청의 도수는 날이 갈수록 잦아갔다. 그럴수록 두옥이는 언제나 처음 날과 같은 긴장과 성의로써 감사를 대하며 자기의 평생 소원을 말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하여 감사의 허락과 신약(信約)을 받아 두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지 삼삭이 지나지 못하여 두옥에게는 거의 치명상이라고 일컬을 만한 상명이 내리었으니 그것은 김감사의 내직영전(內職榮轉)의 상명이다.

정이 들락말락 하여 헤어지는 것도 치명상이거니와 김감사의 신약을 듣지 못하고 자기의 포부를 말하기 전에 헤어지다니 이 어찌 치명상이 되지 않으랴.

그 소식을 들은 날부터 두옥은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워버리었다.

그의 심령은 희망의 광명을 잃고 캄캄한 절망의 길을 헤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또 하나 두옥에게 깊은 충동을 준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김감사가 부랴부랴 행리를 수습하여 가지고 상경의 길에 올랐다는 기별이다.

도시 이것은 두옥이 관가 사정에 어둔 탓이었으니 벼슬아치로서 이직의 칙명을 받고 보면 곧 그 상명을 봉승함에 있어서 결코 사사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곧 평양을 떠난 것이었다.

두옥이는 깊은 절벽에서 떨어진 듯이 정신이 아뜩하였다. 기위 헤어지게 된 이상에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심중을 토하여 그의 처분도 기다려 보려니와 끝내 그를 뫼시지 못한다 할지라도 생각이 물론 그의 심중에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절망이 아니냐.

사람의 정이란 이다지도 허무한 것인가.

여자의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다지도 허무한 것인가.

두옥이는 환멸을 느끼어 베개를 눈물로 적시었다.

四[사] 편집

두옥의 숙모는 이 기별을 듣고

『아가 너 그리 설어 마라, 그러기에 남정네란 더구나 벼슬하는 이란 믿지 못할 것이니라, 행여 상심 말고 벼슬아치 말고 두둑하게 사는 장사아치나 사귈 생각을 해라.』

하고 위안을 하는 데에도 욕심을 섞어 한다.

두옥이는 이날 하루를 눈물로 보내고 이튿날 일찍어니 일어나서 소복단장하고 나서 숙모를 보고 천만 뜻밖에 고별을 한다.

『아주머니 이런 말을 하오면 저년 환장을 했다고 하시겠지마는 나는 암만 생각해 보아도 김감사 대감을 저버리고는 내내 살가 싶지 않습니다. 이 길로 나는 그 대감 뒤를 따라 서울로 올라갈 테니 아주머니는 이 집과 세간을 다 차지해 가지고 어린 기생 하나 데려다가 살고 계슈.』

『아니 이게 웬 소리냐, 내가 더 산들 몇해나 산단 말이냐, 그야 난들 너를 끝내 이 생활을 허두룩야 두고 싶겠느냐, 인심 후하고 두둑이 있는 사람을 만나 살게 되면 나 같은 것야 어찌된들 설마 나를 굶기기야 하겠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지. 그런데 지금 네가 그 대감의 뒤를 쫓아간다 하지마는 그것두 전일에 서로 언약이나 있었다며는 모르거니와 저편에선 아무 생각도 없는데 짝사랑으로 쫓아갔다가 퇴각을 당하면 그 아니 부끄러우냐. 아서라 그러지 말고 마음을 진정해라. 사람이 정이 있는 이 같으면야 떠날 때에 그래 너를 불러 보지두 않는단 말이냐, 그런 냉정한 사람을 쫓다니 망발이다 망녕이어.』

하고 극구 말리었다.

그러나 두옥의 결심은 굳었다.

물론 그런 언약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뒤에 쫓아왔다 하면 아무리 목석일지라도 어찌 감동됨이 없으랴.

두옥의 마음은 화살 같이 앞으로 앞으로 달릴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집에 고집을 세우고 집을 떠나기로 하였다.

숙모도 두옥의 성정을 잘 아는지라 몇번 달래고 꼬이고 해도 필경 어쩔 수 없는 것을 알고는 시원스리 그것을 승낙하고 보교요 행상이요 하고 부랴부랴 주선을 하여 평양을 떠나 보내었다.

두옥은 누구한테나 작별의 말이 없이 몰래 길을 떠났다.

때는 가을이다.

종달새 풀밭에서 높이 공중에 날아 올라 지저귀고 길가 논에는 황금의 빛이 바야흐로 짙어가서 교군들의 걷는 걸음도 거뜬거뜬 가을의 상쾌한 바람이 보교의 앞주렴을 스쳐 흔든다.

그러나 두옥의 가슴은 밝았다 캄캄하였다 하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희망의 빛이 번득이어 가슴이 두군대지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캄캄한 장막이 눈 앞을 가리는 것도 같았다.

『행하는 얼마든지 할 것이니 김감사의 뒤만 대 주소.』

하고 교군들을 독촉하여 평양을 떠난지 이틀이 지난 때에는 김감사 일행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게 되었다.

五[오] 편집

여기는 임진강 나룻터 주막이다. 전임 평안감사의 일행이 사처를 잡고 중식을 마친 후에 강을 건는다 하여 나룻배의 차비도 굉장하거니와 그 나룻터에는 때 아닌 장을 이룬 듯 일행의 인원이 들락날락 하였다.

이윽고 김감사는 강을 건느기 위하여 자리를 뜨려 하였다. 이때에 함께 서울로 수행하는 책방이 감사의 방으로 들어와서

『기생 두옥이가 대감께 뵙겠다고 뒤를 쫓아왔읍니다.』

『누구?』

『두옥이올시다.』

김감사는 잠간 묵묵히 책방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것이 어째 예까지 쫓아와.』

한다.

『아마 대감 떠나실 때에 뵙지 못했다 해서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막비 정성이지요.』

김감사는 아무 대답이 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르더니

『하여튼 이리 불러드리게나.』

하며 다시 좌정한다.

두옥은 보교에서 내려서 단장할 여유도 없이 감사의 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김감사를 만나 보기 위하여 일편단심으로 수일의 작력을 갑자기 하게 된 두옥이지마는 급기 감사를 만나게 되매 역시 여자이라 고은 단장은 못할망정 하다 못해 옷이라도 갈아 입고 싶었다 그러나 좌우의 사람들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았다.

『지금 곧 배에 오르실 테니 어서 들어가 뵈오.』

하고 재촉을 한다.

하는 수 없이 두옥은 길옷을 입은 채로 김감사의 앞에 나타났다.

『너 웬일이냐.』

김감사의 처음 던지는 말은 이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반가워하는 색이 없었다. 도리어 난처하여 하는 태도만이 두옥의 가슴을 선뜻하게 하였다.

두옥은 얼른 말이 나오지 아니 했다. 어쩐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날 보러 뒤를 쫓아왔다 하니 오는 것도 분수가 있지 수백리를 쫓아오다니 그게 무슨 망거이냐.』

두번째에 하는 말이 더욱이 두옥의 정신을 아뜩히 하고 전신의 피를 영상케 하였다.

세상에 이러한 무정한 말이 있을가. 이것이 며칠을 두고 그리워 하였던 아니 내 평생을 맡기려 한 애인의 입에서 나온 말일가.

『대감께서 내직으로 영전하신다는 기별을 듣고 들어가 뵈이려 했읍니다마는 마침 병중에 있어 이삼일 누워 있는 동안에 몽외에 대감께서 길을 떠나셨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섭섭하온지 이튿날 곧 집을 떠나 대감의 뒤를 따랐읍니다. 평소의 소망이 평생을 대감을 모시고자 하오니 행여 저버리시지 마시고 일행의 뒤를 따라 서울로 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애원을 하였다.

『날 따라 서울로 가다니 그게 무슨 지각 없는 말이냐, 넌 계집이라 그런 경우를 모를리라마는 군명을 봉승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궐하에 엎딜 몸이 하향 벽첩을 데리고 올라가다니 나를 어찌 생각했는지 모른다마는 내가 너를 때때로 수청들인 것은 단지 일시의 파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니 너를 평생 데리고 있자는 생각이 있어서 그리한 것도 아니고…… 대관절 도무지 못될 일이니 냉큼 이길로 네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 얘 여봐라 ─』

하고 하인을 부른다.

『네 ─ 이.』

『이 계집 보교에 태워 곧 돌려 보내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대감!』

울분의 피가 일시에 머리로 거슬러 오른 두옥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눈에는 살기가 등등하였다.

『설혹 대감과 소첩 사이에 전일에 아무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수백리 길을 쫓아와서 따라 가리라고 애걸한다면 그 가련한 성의를 생각하시더라도 지금 같은 말씀을 하시지 못하실 것인데 어찌 그처럼 무정한 분부를 하십니까, 그것이 사람의 떳떳한 처사라 하십니까, 참말이지 비소망어 평일이올시다.』

『저런 당돌하구 발측한 계집이 있나. 내가 널 더러 날 쫓아 오라더냐 냉큼 물러가거라, 요사스러히 계집년이.』

하고 혀를 쩍하고 차고 나서

『아무도 없느냐.』

하고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호통을 친다.

그러나 뉘 나서서 차마 두옥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책방이 들어와서 두옥을 보고

『발악도 할 자리가 있지 이리 나오게.』

하고 달랜다. 그러나 두옥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내버려 두슈 갈 양반은 가구 남을 사람은 남았으면 그만 아뇨.』

악에 바쳐서 두옥이는 이렇게 발악을 하였다. 분한 생각 원통한 생각 이러한 냉혈한(冷血漢)을 천하에 없는 인격자로 믿고 있었던 자기 자신의 불명(不明), 그리고 다시 거둘 수 없는 부끄럼이 전신을 조았다.

김감사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배에 오르고 말았다.

이 날 밤 삼경에 주막을 빠져 나온 두옥이 무심히 흐르는 임진강 물에 몸을 던져 한 많은 짧은 일생을 청산해 버린 것을 독자 여러분도 넉넉히 상상할 수 있는 바이다.

소슬한 가을비는 초저녁부터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구슬피 내리었다.

六[육] 편집

이야기는 여기서 두 갈래로 나뉜다.

서울 서문 밖 약현에 백여간 거옥을 지니고 당내 젊은 벼슬아치로 일세의 권세를 잡은 약전 남구만(南九萬)은 머지 않은 장래에 재상의 인수를 받으리라는 터이어니와 또한 효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신혼 초야부터 내외 불합으로 평생에 내외가 한 방에 모이는 일이 없으되 어머니의 방에만은 신혼정성의 효를 걸른 적이 없다.

하루는 남판서가 어머니 방에 들어가니 전에 보지 못하던 계집애 종 하나이 웃목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선다.

비록 손에는 진 걸레를 들었으되 그의 아미풍협은 청아한 그의 눈과 아울러 진실로 절세의 미인이었다.

출무성한 키, 버들 같이 가는 허리, 옥 같은 살결 무엇 하나 미인의 자질에서 어그러짐이 없었다.

남구만은 그 여종이 마루로 나간 후에 어머니를 뵙고

『그 웬 계집애오니까.』

『어떠냐 그만하면 얌전하지.』

『글쎄요.』

『일전에 그 계집애가 떠들어와서는 내방에서 방종으로 부리어 달라구 하더구나, 보니까 인물도 똑똑하고 행지범절이 그만 쓰겠더라마는 근지를 몰라서 주저했더니, 부모를 다 여이고 당숙 하나를 찾아 서울로 왔다가 그 당숙도 못 만나고 의지거지 없게 되었는데 듣기에 댁의 인품이 좋으시다길래 염치불고하고 왔다고 자꾸 두어달라구 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 방에서 부리기루 작정하고 벌써 사흘째부터 보는데 어찌 아이가 똑똑하구 얌전한지 모르겠다.』

남구만은 설명을 듣고는 별로 이상하게도 생각하지 않는 양으로 밖으로 나가버리었다.

그러더니 그 이튿날부터 남구만의 안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전에는 하루에 두어 번 출입하던 남구만이 이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어머니 방에 출입을 하며 공연히 별일도 없이 안방에 늘어 붙어 있기가 잦았다.

이 행동을 주목하여 보는 어머니는 벌써 눈치를 챘다.

『저 위인이 삼월이에게 생각이 있는 게로다.』

하는 짐작이다. 삼월은 새로 들어온 방종 아이에게 부쳐준 이름이다. 그래서 인자한 어머니는 아들 남구만을 불러들이어 조용히 이런 말을 하였다.

『네가 요새 내 방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보니 필연 소첩을 두어두 몇을 두었을 것인데…… 만일에 내 방에서 부리는 삼월이가 마음에 들거들랑 데려다가 네 방에서 부리도록 해라. 아이가 영리하여 네 수종은 넉넉히 들 것이다.』

남구만은 기실 퍽으나 반가운 말이었지마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그럼 그렇게 해 줍쇼 하는 대답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삼월이는 남구만의 방종이요 겸하여 소첩이 되고 말았다.

과연 삼월은 제백사에 가감하는 남구만의 성품을 받아 지성으로 섬기었다.

그래서 남구만은 하루도 삼월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게쯤 정을 쏟았다.

이리하여 달포는 꿈 같이 지나갔다. 그런데 하루는 평생에 남편을 청함이 없던 남구만 부인이 자기 몸종을 사랑으로 내보내서

『잠간 영감마님 들어오셨다가 나가시랍니다.』

하는 전갈을 하여 왔다. 무슨 일로 날 청하는가 하는 의아가 있으면서도 점잖은 남구만이라 몸종을 돌려 보낸지 조금 있다 후당으로 돌아 들어갔다.

부인은 마루에 나와 서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날 불렀소.』

『녜, 소중하신 몸을 앉아서 청해서 죄송하오이다마는 요즈음 영감께서 부리시는 삼월이란 계집은 반드시 큰 앙화를 영감께 끼칠 인물이오니 십분 조심하십시오. 요새 영감의 기상을 뵈오니 살기가 뻗쳐 있읍이*다. 그러나 행여 투기가 있어 이런 말을 아뢰는가 하고 의심을랑 마시오, 나라에 바친 소중한 몸이시오매 이런 말씀을 합니다.』

하는 권고를 하는 것이었다.

남구만 역시 아내가 새삼스러이 투기가 생기어 그런 말을 하느니라고는 생각지 않었다. 그러나 평일에 천치란 흉을 받는 아내가 자기의 기상을 보았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또 남편의 몸이 소중한 몸이란 것을 알아서 말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라, 빙그레 웃는 열적은 낯으로 아내의 처소를 물러 나왔었다.

그랬더니 기이하게도 자기 처소를 나와 보니 금방 있었던 삼월이가 간 곳이 없다. 사람을 불러 안팎으로 삼월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종적은 연기 같이 사라졌다.

심상치 않은 일이다. 괴이쩍은 사변이다. 전일에 그런 일이 없었던 아내의 기괴한 경고 그리고 그와 시간을 같이 하여 연기 같이 사라진 삼월이 그 두 가지 일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실마리가 움직이어 있는 듯이 생각되어 마음이 께름직 하였다.

저녁에 남구만은 문갑 설합에서 문득 한 종이 조각을 발견하였으니 거기에는 계집의 필적으로

『영감, 소첩은 영감의 사랑을 못내 받지 못할 몸이오라 이제 영원히 돌아 가나이다.』

하는 간단한 유서가 씌어 있다. 삼월이가 황황히 써 놓고 간 것이다.

남구만은 점잖은 체모에 내색은 하지 않았으되 밥맛 조차 없어서 수일을 오뇌로 보내었다.

七[칠] 편집

수일 후에 남구만은 뜻밖에 김정승의 부름을 받았다. 김정승이란 지난해 가을에 평양감사로서 내직으로 영전하여 들어온 김감사 그이다.

그는 월 전부터 장성한 아들이 기괴한 병으로 누워 있어 매일 정사에 앙장(鞅掌)하면서도 근심이 적지 않았다.

기괴한 병이란 다른 게 아니라 밤만 되면 온종일 멀쩡하던 사람이 별안간 통성을 내짖으며 온 방을 헤맨다. 그리고 머리를 얼싸 안고 반은 죽는다.

그리고는 날이 새기 시작하면 씻은 듯 부신 듯 고통은 없어졌다.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다. 의원이며 약이며 무슨 수단인들 강구치 않았으랴마는 도무지 효력을 얻지 못하였다.

김정승은 참다 못하여 남승지를 청하였다. 왜 그가 남판서를 청하였는냐 하면 벼슬로 보든지 나이로 보든지 김정승은 남판서의 선배이지마는 남구만의 지략과 그의 초인적 심령의 힘은 평소에 경모하는 터이었다.

그 초인간적 심령의 힘으로 아들의 병을 보아 달라는 청을 하기 위하여 그를 부른 것이었다.

『밤중에 오시라고 해서 미안하오마는 내 아들의 병이 심상치 않아서 영감의 힘이면 혹 그 병원이나 좀 아실가 해서 청한 것이오.』

하고 극히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남판서는 선배의 청일 뿐더러 그 병이 심상치 않다는 말에 그러지 아니해도 한번 문병 겸 보리라 하는 생각이 있었던 차이라, 그것을 쾌락하고

『소관이 본들 무얼 알겠읍니까.』

하고 겸사하여 김정승의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 갔다.

고통 소리는 방 밖에까지 들리고 상하권솔이 모두 송구하여 중굿 중굿 서서 있다.

김정승은 병실의 문을 열어 준다. 남승지는 그 방으로 한발을 들여 놓으려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방문설주에 양팔을 버티고는 눈을 홉뜨고 들여다 본다.

아 ─ 이 무슨 기괴한 광경이냐.

젊은 계집 하나가 이편을 등지고 서서 무슨 연장으로 김정승 아들의 머리와 몸을 난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은 오직 남승지의 눈에만 보일 뿐이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껏 김정승의 아들을 난타하고 있던 계집이 이 이 편을 휙 돌아다 본다. 휙 ─ 남 판서는 두번째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계집은 과연 누구인고.

수일 전까지 남판서의 총애를 받고 있다가 부지거처가 된 삼월이가 아니 냐. 남판서는 소리를 쳐 호령하였다.

『너 이년 이게 무슨 짓이냐? 냉큼 나가야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별반 조처를 할 테니 냉큼 매를 거둬라.』

하고 눈을 부라린다. 김정승 이하 하배들까지 남승지가 미첬다고 생각하였다. 병자밖에 없는 빈방을 들여다 보고 호령호령은 무슨 일인가.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들의 고통 소리는 그치고 느른히 누워서 금방 잠이 드는 모양인데 이제껏 호령호령하던 남승지는 방문을 조용히 다치고 정승을 돌아다 보며

『인제부터는 아무 일 없을 것이니 맘을 놓으십시오. 그리고 내일 다시 와서 뵙고 자세한 이야기를 사뢰겠으니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겠읍니다.』

하고는 황황히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남승지는 자기 눈에만 보이는 삼월이를 앞장 세운 것은 물론이다.

남승지는 자기 방으로 삼월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대관절 네가 귀신인 것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마는 무슨 일로 김정승의 아들을 그다지 괴롭게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삼월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제 영감의 눈에 띄인 바에야 숨긴들 소용이 있읍니까 소첩은 평양 기생 두옥이란 계집으로……』

하고 김감사 ─ 지금 정승 ─ 에게 뇌각(牢却)을 당한 사실과 임진강에 몸을 던저 죽은 것을 이야기하고 원수를 갚고자 하여 김정승을 노리었으나 그는 왕운이 가득한 사람으로 감히 범치 못하고 그의 아들을 범한 것과 살아 생전에 맘에 드는 이를 뫼시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풀고자 하여 남판서 집으로 들어온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오래 남판서의 총애를 받고자 하였더니 현명한 정실부인이 간파한 바 되어 오래 있지 못할 것을 알고 부지거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남판서는 누누히 두옥의 그른 점을 지적하여 타일렀다. 그리고는 평생 그의 영을 위로해 준다는 조건으로 그를 멀리 떠나게 하였다.

이래 두옥신은 서울 문안에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으나 오강으로 돌아다니며 많은 장난을 하였다 하고 남승지는 사람을 시키어 두옥신 사당을 지어 그의 천도를 빌어 주었다 한다.

두옥신이 와전되어 『두억신』이 된 것은 물론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