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無制限 貸出

이튼날 오전 열한시경, 혜화동 백진주 선생의 저택 앞에는 총독의 자동차 보다도 더 값비싸다는 한대의 고급차 세단이 소리없이 멎자 운전수가 뛰여내려 현관으로 들어간다.

그때 차고(車庫)에서 자동차에 손질을하던 배성칠이가 현관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운전수는 물었다.

『이댁이 백진주 선생의 댁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서대문은행 두취 장현도 선생께서 은행에 나가시던 도중에 잠깐 이댁 선생님을 뵐려구 오셨는데요.』

『그러나 지금 백선생님께서는 외출하시고 안계십니다.』

『그러면 장두취 선생의 명함을 놓고 갈테니, 돌아오시면 내의를 전해주시요.』

그리고 운전수는 성칠이에게 커—다란 명함을 한장 쥐여주고 다시 정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에 올랐다.

『외출하시고 안계신답니다.』

하고 보고하는 운전수에게

『돈이 필요하면 제발로 날 찾아 올테지. 흥!』

하고 거만하게 중얼거린것은 온몸이 금으로 번쩍번쩍 하는것 같은 야비한 인상을 주는 서대문은행의 두취 장현도였다.

그지음 백진주 선생은 이층 자기 방에서 커—텐을 반만큼 열고 자동차안에 앉은 장현도의, 침이라도 배앝어주고 싶으리만큼 더럽고 야비하게 살찐 몸둥이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백진주 선생은 초인종을 눌러 운전수 배성칠을 불렀다.

『불렀습니까?』

『음, 나는 그대에게 서울서도 가장 으뜸되는 자동차를 마련하라는 말을 분명히 한듯 싶은데 그대는 내말을 잊었나?』

『천만에 말씀이올시다. 잊을 리가.......』

하고 배성칠이가 뭐라고 한마디 변명의 말을 할려는것을 막으며 명령하듯이 엄숙한 어조로

『오늘 오후 세시 나는 서울서도 제일류급에 가는 고급차로 외출할 필요를 느꼈으니, 그 시각까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서대문은행 두취 장현도의 자동차를 내집 현관앞에다 준비해놓도록 힘을 쓰라!』

『오후 세시까지라구요?』

성칠은 눈이 둥그래진다.

『그렇다. 아직 네시간이 남었으니 충분할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장두취의 자동차는 매물이 아니올시다.』

『파는 물건이 아닐지 모르나 싯가에 배를 주면 될것이 아닌가? 장현도는 은행가다. 은행가란 자본을 갑절로 만들수있는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면 제힘 자라는데까지 힘써 보겠습니다.』

배성칠은 머리를 긁으며 물러갔다.

이리하여 배성칠이가 물러간지 네시간만에 백진주 선생의 외출시간인 오후 세시는 왔다. 백진주 선생은 초인종을 눌러 배성칠을 불러 들였다.

『자동차는?......』

『네. 선생님, 현관 앞에서 선생님이 타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어느 자동차냐?』

『서대문은행 장두취의 자동차 올시다. 시가 三만원 짜리를 六만원 주었습니다.』

『음, 훌륭한 고급차다. 마음에 드는걸!』

『세시가 지났습니다. 어서 타시지요.』

백진주 선생은 현관으로 내려가자 조금아까 까지도 장현도의 소유물이던 이 자동차에 만족한 표정으로 올라탔다.

『그런데 선생님, 어디로 모실깝쇼?』

『충신동 百八번지 장현도의 집으로!』

『옛? 장두취의 집으로요?』

성칠은 놀랐다.

『성칠이, 놀래긴 왜 놀래는거야? 조금전까지도 장현도의 소유물이던 이 자동차를 타고 장현도의 집을 방문하는데 있어서 자네는 무슨 항의가 있다는 말인가?』

『아, 아, 아니올시다.』

이리하여 자동차는 쏜살가치 충신동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즈음 은행에서 갖 돌아온 장현도는 화려한 응접실 팔거리 의자에 깊이 파묻혀 어저께 배성칠이가 가지고온 백진주 선생의 명함과 상해교역은행(上海交易銀行)으로부터 온 한장의 소개장을 물끄럼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개장에는 백진주 선생에게 대해서 무제한대출(無制限貸出)을 하여도 좋다는 의미의 내용이 씨여있었다.

백진주 선생이라고, 꼭 선생의 존칭을 써서 소개해온 이 인물이 어떤 작자인지는 몰라도, 서대문 은행에서 무제한으로 돈을 갖다 써도 좋다는 이런 끔찍한 소개를 해온 상해교역은행이 장현도에게는 적지않게 얄밉기도 하고 또한편 불안하기 짝없었다.

『흥! 상해에서는 제법 돈푼이나 써보고 자란 작자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그러나 이 장현도를 그리 얕잡아 보아서는 안될걸! 흐흐흐흥.......』

하고 지극히 야비한 코웃음을 그 커다란 입술에 지여 보였다. 그러나 아모리 생각하여도 무제한대출이라는 불안만은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신용있게 거래하던 상해교역은행으로부터의 이러한 소개를 충분히 감당해 나가지 못한다는것은 적어도 은행가로서는 벌써 신용의 파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되 이 장현도도 녹녹치는 않을걸!』

하고 편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깊이 파묻혔던 팔거리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할 때 하인 한사람이

『선생님, 백진주씨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하고 백진주 선생을 안으로 안내하였다.

『아, 당신이 백진주씹니까?』

하고 장현도는 약간 허리를 굽히는 체하며 단연 선생이라는 존칭을 막 떼버렸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서대문은행 두취 장현도 선생이십니까?』

백진주 선생의 이 정중한 한마디에 장현도는 약간 당황한 듯이

『어서 앉으시지요.』

하고 의자를 권하였다. 백진주 선생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의자에 걸터앉으며

『자기에게는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부르게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씨자를 붙이도록 하인을 교육시킨 장두취의 인격을 깊이 존경하겠습니다.』

그순간 장현도는 적지않은 모욕을 느끼며 어디 보자! 하는듯이 입술을 깨물면서 곧 말머리를 돌렸다.

『상해교역은행으로부터 소개의 편지는 분명히 받았습니다.』

『아, 그말을 듣고 나도 적지않게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그 소갯장을 보면 저희 은행에서 백진주 선생이라는 사람에게 무제한으로 대출을 하게 되는 모양인데, 그 의미가 아모리 생각해도 너무 막연한 감이 있어서요. 그래서 실상은 거기 대한 설명을 듣고저 오늘아침 댁에 잠깐 들렀던 것입니다.』

『너무 막연하다는 의미는?』

『아, 막연하다는것은 아닙니다만, 다만 이 무제한 (•••)이라는 글자가 좀.......』

『아 잘 알겠습니다. 상해교역은행의 신용을 당신은 믿을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하아 정말 그렇다면 이거 큰일 났는걸! 나는 그 교역은행에 약간 예금한것이 있는데.......』

『아, 그렇다는것은 아니지요. 다만 이 무제한 (•••)이라는 글자가 금융계(金融界)에서는 너무 막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때 백진주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조소하 듯이

『하아, 그러면 서대문은행의 밑천이 드러날까봐 그러시는군요?』

『뭐, 뭐라구요?』

하고 부르짖으며 장현도는 아주 거만한 태도로 상반신을 번쩍 제치면서

『우리 은행의 금고속을 들여다보고 이렇다 저렇다하는 그런 인간은 아직까지 한사람도 없었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아마 서대문은행의 밑천이 드러날까봐서 걱정하는 맨 처음의 인물일런지도 모르지요. 하하하 하.......』

장현도는 또한번 입술을 깨물지 않을수 없었다. 아아, 이것이 대체 무슨 모욕이랴? 그와는 반대로 백진주 선생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항상 떠돌고 있었다.

장현도는 하는수 없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결심한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 은행에서 돌려쓰실 금액을 대강만이라도 알려 주실수 없을까요?』

『글세올시다. 내가 댁의 은행에서 무제한으로 돌려쓰기를 원한것은 얼마나 써야 될런지, 그 금액을 나 역시 똑똑히 알수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한걸음도 양보할 줄을 모르는 백진주 선생의 논법이었다.

『아,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약 五백만원 가량?......』

『五백만원이라고요?...... 하하하...... 五백만원 쯤으로 될 일이라면 하필 대출은 또 무슨 대출이겠소? 五백만원쯤은 내 주머니 속에도 항상 들어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백진주 선생은 지갑을 끄내 二백만원과 三백만원의 지참인불(持參人拂) 수형을 두장 장두취에게 보였다.

실상 장현도와 같은 인간은 바늘로 찌르는것 쯤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쇠마치로 내리갈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쇠마치의 일격(一擊)은 충분히 효과를 보았다. 그는 백진주 선생의 눈앞에서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았을 뿐이더니, 이윽고

『잘 알아 모셨습니다. 백선생!』

하고 장현도는 비로소 선생의 존칭으로 불렀다.

『그러면 내일 아침 열시까지 우선 三백만원만 내 집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네네. 틀림없이 三백만원! 내일 아침 열시까지!』

장현도의 이마에는 땀 방울이 수증기처럼 맺혀 있었다.

『그런데 백선생, 이 다시없는 기회에 선생의 절대적인 후원이 계시기를 진심으로 빌어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생을 가족적으로 모시기 위하여 제 안해를 선생께 소개하겠습니다.』

『황송합니다. 장두취의 후의를 달갑게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요.』

그러면서 장현도는 하인을 불러 진귀하신 손님을 소개할테니 안해를 불러달라고 말하였다. 하인은 허리를 굽히며

『안방에는 손님이 계십니다.』

『아, 저 조봉구(曹鳳九)군 말인가?』

『네.』

『괜찮으니 둘이 다 이리 모셔오라.』

『네.』

하인이 물러간 후에 장현도는

『조봉구라고 내 안해의 동문데, 전도유망한 청년관리지요.』

『아, 조봉구군이라면 어저께 송준호군의 집에서 인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송준호군을 아시는가요?』

『네 작년 겨울, 상해서 성탄제를 같이 지난 일이 있지요.』

『아, 그러면 상해서 송준호군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이 바루 백선생이 아니십니까?』

『네, 그런 일도 있었지요.』

『아, 그렇습니까! 실은 내 딸 옥영이와 송군 사이에는 지금 약혼이 진행중이지요. 아마 十중八九 성사가 될듯 싶습니다.』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그때 전도유망한 총독부 관리 조봉구와 장현도 부인 심봉채(沈鳳彩)가 응접실안으로 들어섰던것이니, 여러분은 혹시 이 심봉채의 이름을 잊었을런지 모르나, 어젯밤 백진주 선생이 새로이 손에 넣은 아현정 별장 달밝은 뒷뜰에서 운전수 배성칠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젊은 과부의 이름― 검사 유동운의 불의의 씨를 받아 뒷뜰 앵두나무 밑에 파묻었던 죄악의 여인 심봉채! 그가 바루 현재에 있어서의 장현도부인 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