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上海의 聖誕祭

두 청년 앞에 나타난 백진주 선생― 송준호는 모르되 신영철은 그것이 저 진주섬의 주인공인 것을 한눈에 깨달았던 것이다.

『초면에 대하는 선생의 호의! 저이들은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송준호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무슨 말씀을...... 그러신 줄을 알았더라면 벌서 저의 미의(微意)를 표하였을 것을.......』

백진주 선생은 그러면서 두 젊은이를 방안으로 인도하였다.

한편 신영철은 적지않게 거북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자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자기를 몰라보는척하는 백진주 선생의 태도를 볼때, 이편에서 먼저 진주도 아방궁에서 면식이 있었다는 말을 꺼낼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수없이 신영철은 백진주 선생이 먼저 자기를 알아본다는 그때까지 이편에서도 모르는척하고 기다릴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영철은 자기가 상대편보다 우월한 입장에 선것만은 사실로 믿었다. 어째 그러냐하면 자기는 백진주 선생의 비밀을 알고있는데 반하여 백진주 선생은 자기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저편에서 모르는척하면 이편서도 모르는척하고 있었댓자 별반 자기에게 불리한 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 상해의 『크리스마스 • 이브』가 하도 굉장하다기에 일생의 기념삼아 부러 찾아왔습니다.』 하고 신영철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상해는 유명한 국제도시― 각국 사람이 가지각색의 가장(假裝)을 하고 하로밤의 『크리스마스 • 이브』를 춤으로 노래로 즐기는 풍경은 구라파에서도 그리 보기 쉬운 풍경은 아닙니다. 그래 내일의 『크리스마스 • 이브』는 어디로 약속이 되시었습니까?』

『아직 약속이 없습니다. 오늘 이곳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숙소문제로 머리를 앓고 있었으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제가 좋은 데로 안내해 드리지요.』

『고맙습니다, 선생. 선생의 이 절대적인 호의는 타일 반다시 갚어 드리고저 합니다.』

『하하하...... 호의라는것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혹시 서울을 간다면 반드시 귀군을 방문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백진주 선생은 두 청년을 물끄럼이 바라다 보았다. 아니, 백진주 선생은 두 청년 가운데서도 유달리 송준호의 수려한 미목을 뚫어지게 바라 보는 것이었다. 그렇다! 송준호는 계옥분과 송춘식이의 피를 받고 이 세상에 나온 청년이기 때문이다.

『이 상해에서도 성탄제 밤을 가장 호화롭게, 가장 흥미있게 맞이하는것은 『캬피탈 • 땐스홀』이지요. 그중 좋은 자리를 여유있게 약속하여 두었으니, 내일 밤은 그리로 두분을 인도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의 두터우신 호의는 일생을 통하여 찬란한 기억으로서 가슴 깊이 간직해 두겠습니다.』

두 청년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치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두분은 내일밤 가장무도회(假裝舞蹈會)에서 입으실 의복도 아직 준비되지 못하였습니까?』

『아직―.』

두 청년은 약간 얼굴을 붉히지 않을수 없었다.

『아, 그렇습니까? 나에게는 가지각색의 가장복(假裝服)이 준비되여 있습니다. 나의 취미의 하나로서 나는 가장을 즐겨하지요. 아마 두분이 요구하시는 가장쯤은 대략 준비되여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 송군은 무슨 가장을 하시렵니까?』

『저는 중세기(中世紀)의 나이트(騎士)의 가장을 하고 싶습니다.』

『또 그리고 신군은?』

『저는, 인생은 엄숙한 무대 위에서 춤추는 하나의 피에로 (•••)라고 생각하지요. 저는 피에로 (•••)의 가장이 필요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두분의 요구하시는 가장이 모두 나에게 준비되여 있습니다. 내일밤 조금도 사양없이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선생!』

『그런데 한가지 주의하실 것은 이 상해에는 소위 뒷골목 대장이 많습니다.』

『뒷골목 대장이라고요?』

『네, 소위 깽이 많지요. 더구나 내일밤처럼 군중이 흥분한 틈을 타서 략탈, 유괴, 강도...... 등등.......』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 젊습니다. 선생과는 달러서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모험심이 풍부하지요. 뒷골목 대장이 나타나면 한바탕 덤벼볼 용기도 있습니다.』

『부럽습니다. 사람은 어쨌든 늙지 않고 젊어야 하지요.』

두청년은 얼마동안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다가 이윽고 밤이 이슥하여 백진주 선생이 제공한 호화로운 특별실로 돌아 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두 청년은 어디선가 아름다운, 그리고 무척 애수를 띤 호궁(胡弓) 소리가 들림으로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송군, 어디서 나는가? 이 아름다운 호궁 소리가......』

『글세, 분명히 이 三층 어느 방에서 들리는데.......』

『음...... 절절한...... 연연한 이 슬픈 호궁 소리!』

감격하기 쉬운 두청년은 얼마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우리다가 이윽고 자기 방으로 들어 갔다.

화려한 방이었다. 역시 어디선가 고즈넉이 들려오는 애련한 호궁소리는 두 청년을 황홀한 몽현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이 호궁소리는 역시 저 백진주 선생이 동반하고 온 젊은 여인이 켜는것에 틀림 없을것이다.』

『음...... 어떤 여인일까? 이 신비로운 호궁의 선률(旋律)!』

두 청년은 그 신비로운 호궁의 여인이 어떤 인물인가를 무척 알고 싶었으나 초면인 백진주 선생에게 그것을 간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는수 없이 두 젊은이는 자리에 누어 컴컴한 천공에서 치운듯이 오들 오들 떨고있는 수많은 별들을 내다보며 애달프게 흐르는 호궁의 선률에 귀를 기우리었다.

이튼날 밤― 기다리던 『크리스 • 마스이브』는 왔다.

여기는 『캬피탈 • 땐스홀』의 호화로운 『스테—지』다.

상해 일류 교향악단의 유량한 음악과 함께 지금 홀안은 가장무도회가 한창이다. 흥에 겨워 흐느적거리는 사람의 물결! 세계각국의 인종이 가지각색의 가장으로 몸을 감추고 하루밤의 환락을 향락하려는 유흥의 세계!

중세기의 기사로 가장한 송준호와 피에로의 복장을 한 신영철은 모두 눈에 검은 마스크를 하나씩 쓰고 누구인지 헤아릴수 없는 여러 여자를 상대로 얼마동안 춤을 추고 있을 무렵에 백진주 선생은 몸에 피로를 느낌인지, 두 청년을 홀에 남겨둔채 먼저 호텔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신영철도 이 너무나 퇴폐한 분위기에 질식할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송군, 우리도 인젠 호텔로 돌아가는것이 어떤가? 하루밤을 새울 작정으로 오기는 왔으나, 좀처럼 비위에 맞지를 않네그려.』

하고 호텔로 돌아가기를 청했으나 송준호는 신영철의 말을 가볍게 물리치며

『군은 거저 사냥이나 하래야 열심이지...... 그렇다면 애당초 오기는 왜 왔어?』

하고 다시 스테—지로 나갔다.

송준호가 이처럼 호텔로 돌아가기를 좋와하지 않는 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아까부터 벌써 여러번채 같은 여자와 춤추기를 즐겨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도 역시 눈에다 마스크를 하고 서반아의 무희(舞姬)인 양 빨간 복장을 하였었다.

만일 신영철이가 운명의 점바치였다면 이 정체를 헤아릴수 없는 빨간 복장을 한 수상한 여자가 그날밤 정열에 불타기 쉬운 송준호 청년을, 그어떤 뒷골목 대장의 무서운 소굴로 인도한 지옥의 사자였다는 것을 짐작하였을것이며 따라서 송준호를 혼자 내버려두고 자기만이 호텔로 돌아오지는 않었을 것이다.

『그럼 송군, 나는 먼저 돌아가겠네.』

『아, 그러는것이 좋을듯 싶으이. 어서 가서 노루 사냥하는 꿈이나 꾸게. 나는 오늘밤은 여기서 밝히고 내일 아침 호텔로 돌아 갈테니까 그리 알게.』

이리하여 신영철은 먼저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영철 청년이 호텔로 돌아온지 몇시간 만에 기다리는 송준호 대신 호텔 지배인이 한장의 편지를 들고 들어 오면서

『인제 어떤 인편이 이런 편지를 선생께 전해달라고 왔습니다.』

『뭐 편지?』

적지않게 불안한 얼굴로 신영철은 봉투를 뜯었다. 다음과 같은 간단한 내용이 적힌 송준호의 편지가 아닌가!


신군, 이 편지를 보는대로 내 책상 설합에서 돈을 꺼내 주게. 그리고 모자라는 돈은 어떠한 일이 있더래도 군이 극력 주선해서 일금 三十만원을 만들어 이 인편에게 내어 주게. 일금 三十만원이 지금 곧 내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아, 나의 친애하는 친구 신군이여! 나는 군을 믿는다. 뒷골목 대장이 나타나면 한바탕 해보겠다던 우리의 경솔했던 말을 나는 후회 한다. 송준호


그리고 편지 맨끝에 다른 사람의 필적으로 다음과 같은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만일 내일 아침 일곱시까지 三十만원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송준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로 알지어다! 방우호(芳愚虎)


『방우호?......』

편지를 읽고난 신영철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부르짖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니, 방우호― 그렇다. 그것은 아직 二十대의 젊은 몸으로서 상해 암흑가(暗黑街)를 쥐어흔드는 무서운 뒷골목 대장이라는 사실을 신영철은 풍문에 여러번 들었던것이다.

신영철은 놀래여 송준호의 책상 설합을 열어 보았으나 거기에는 단돈 五만여원 밖에 없었다. 신영철은 백납처럼 쌔애하니 변한 얼굴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로 한시! 일곱시까지는 단지 여섯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여섯시간 동안에 어떠한 일이 있더래도 저 무서운 도적 방우호에게 일금 三十만원을 갖다 주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나 타향에 나온 몸이라 어찌 이러한 대금을 별안간에 장만할 수가 있으랴! 신영철은 친구의 신세를 자기의 신세처럼 가슴 아프게 여기며 어떻게야 이 대금을 장만할수 있을까를 골돌히 생각하였다.

그때 문득 신영철의 머리에 번개처럼 떠오른것은 왕후(王侯)와 같은 금만가 백진주 선생의 창백한 얼굴이었다.

『아, 지배인, 백진주 선생이 아직 자리에 들지 않으셨거던 좀 긴급한 용건으로 뵈이려 가도 괜찮은가를 좀 물어다 주시요.』

하고 지배인을 돌아다 보았다.

이윽코 지배인은 나갔다 다시 들어오면서

『백진주 선생은 아직 깨여 계십니다. 말씀을 여쭈었더니, 대단히 걱정을 하시면서 신선생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그래요?』

신영철은 불이낳게 백진주 선생의 방으로 뛰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