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농촌의 협상
일(一)
[레·미제라불]이란 말은 실(實)로 오늘날의 중국(中國)농촌경제(農村經濟)를 말할 때 그 광범(廣汎)한 영역(領域)의 어느 지방(地方) 어느 농가(農家) 어느 농민(農民)을 막론(莫論)한 그 생활(生活)을 표현(表現)하는데 가장 적합(適合)하게 쓰여진 한 개(個)의 대명사(代名詞)일 것이다.
과거(過去) 중국(中國)의 경제형태(經濟形態)는 그 특수(特殊)한 발전(發展)이 실(實)로 세계경제사(世界經濟史)의 빛나는 한 페지를 占領한 때도 있었지마는 전변무상(轉變無常)한 정치적(政治的) 동요(動搖)는 이 중국경제(中國經濟)를 급각도(急角度)로 회전(回轉)하면서 기본적(基本的)인 혁명(革命)을 초래(招來)하지 못한데 또한 중국경제(中國經濟)의 약점(弱點)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는 극(極)히 복잡(複雜)한 역사형태와 착종(錯綜)한 경제요소(經濟要素)가 아즉도 남어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資本主義)도 있고 봉건적(封建的) 잔재(殘滓)도 그냥 남었다. 그 중(中)엔 죄(罪)많은 노예제도(奴隸制度), 원시적(原始的)인 민족조직(民族組織), 단순(單純)한 상품경제(商品經濟)도 있고 심(甚)하면 쏘벹경제(經濟)까지 있어서 그것은 혼돈(混沌)한 세기(世紀)의 축도(縮圖)인 동시(同時)에 중국(中國)농촌경제(農村經濟)가 전화(轉化)한 근본(根本)조건(條件)도 된다.
이(二)
중국(中國)에 있어서 외국(外國)상품(商品)의 유입(流入)은 농촌(農村)의 가내공업(家內工業)을 급격(急激)히 파괴(破壞)하였다. 이 사업(事業)은 중국(中國)농촌(農村)에 일대(一大)변동(變動)을 가저오면서 소농(小農)경영(經營)과 가내공업(家內工業)을 연결(連結)시키고 농민(農民)의 자족(自足)급성(給性)을 완전(完全)히 파괴(破壞)하고 말었으니 외국(外國)상품(商品)의 앞에는 농민(農民)이 싫거나 좋거나 구매자(購買者)가 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동시(同時)에 농민(農民)은 자기(自己)소비(消費)를 위(爲)해서가 아니고 팔기 위(爲)한 상품생산(商品生産)에 종사(從事)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포함(砲艦) 정책(政策)하(下)의 외국(外國)상품(商品)이 노도(怒濤)와 같이 유입(流入)하는 일방(一方) 중국(中國)은 열강(列强)의 원료(原料)국(國)으로서도 운명(運命)을 지게 되었다. 이리하야 중국(中國)농촌(農村)는 급격(急激)한 화폐경제(貨幣經濟)로 전향(轉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재 중국(中國)산업(産業)이 원료(原料)상품화(商品化)한 것이니 최초(最初)에 상품화(商品化)한 농산업(農産業)은 차(茶), 생사(生 ), 대두(大豆), 람(藍) 등이였으나 다음 면화(棉花), 연초(煙草), 감자(甘蔗), 마(麻), 아편(阿片)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現在)엔 곡물(穀物)까지가 벌서 상품화(商品化)하였다. 그러므로 농산물(農産物)이 농민(農民)자신(自身)에 필요(必要)하냐 안하냐는 별개(別個)문제(問題)로서 팔리느냐 안팔리느냐가 농민(農民)의 관심(關心)이 되게 되어왔다. 그래서 미맥(米麥)의 경작(耕作)은 감소(減少)하고 면화(棉花)나 연초(煙草)의 경작(耕作)이 특(特)히 격증(激增)한 것은 농촌(農村)경제(經濟)의 화폐경제(貨幣經濟)에 의 전변(轉變)은 자급자족(自給自足)상태(狀態)로부터 필연적(必然的)으로 시장경제(市場經濟)와 결부(結付)시켰다. 그러나 농민(農民)경제(經濟)의 화폐(貨幣)내지(乃至) 상품(商品)경제화(經濟化)를 중국(中國)의 자본주의적(資本主義的) 발전(發展)이라고 본다면 잘못이다. 웨그러냐하면 중국(中國)농촌경제(農村經濟)의 발전(發展)이 가저온 결과(結果)가 아닌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中國)농촌경제(農村經濟)의 근본적(根本的) 특수성(特殊性)이 있다. 따라서 농산업(農産業)시장(市場)은 아즉 지방적(地方的) 원시적(原始的)이며 농민이 국내적(國內的) 통일(統一)시장(市場)을 가지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中國)매변자본(買辨資本)의 발달(發達)한 한가지 원인(原因)이 있는 것이다.
삼(三)
농촌경제(農村經濟)가 상품화(商品化)하는데 따라 농민(農民)의 생활(生活)을 결정(決定)하는 것은 농산물(農産物)의 흉풍(凶豊)보다도 그 시장가격(市場價格)이다. 시장(市場)은 농민(農民)에 있어 절대적(絶對的) 지배자(支配者)가 되었다. 즉(卽) 시장(市場)관계(關係)의 변동(變動)은 농민(農民)의 생산양식(生産樣式) 농산품(農産品)의 수량(數量) 급(及) 품종(品種) 나아가서는 전(全)생산(生産) 그것까지도 지배(支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중국(中國)에는 산지(産地)시장(市場)이 아즉까지 지배적(支配的)이며 통일(統一)시장(市場)이 형성(形成)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첫재 중국(中國)의 농업(農業)이 소농(小農)경영(經營)인 까닭이다. 상품화(商品化)한 소농(小農)경영(經營)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산량(産量)에 제한(制限)이 있고 또 개개(個個)의 농민(農民)으로서는 농산물(農産物)을 직접(直接)으로 소비자(消費者)의 시장(市場)에 운수(運輸)판매(販賣)할만한 다량(多量)의 생산액(生産額)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농민(農民)자신(自身)들이 너무나 빈곤(貧困)하기 때문에 시장(市場) 내지(乃至) 가격(價格)을 선택(選擇)할 여유(餘裕)가 없을뿐 아니라 오늘의 화폐(貨幣)추구(追求)에 급급(汲汲)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들의 일반적(一般的)인 현상(現狀)은 다른 시장가격(市場價格)이 자기(自己)들의 시장가격(市場價格)보다 고가(高價)이라든지 일개월(一個月)앞으로 물가(物價)가 앙등(昻騰)할 것을 추측(推測)한달지라도 금일(今日)의 생활(生活)을 위(爲)해서 매각(賣却)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形便)이다.
그래서 지방(地方)으로는 삼일(三日)만에 한번식 시장(市場)이 서고 그 외(外)에도 묘회(廟會)라고 하야 사사(寺社)의 제일(祭日)에는 물품(物品)의 교환(交換)이 성행(盛行)하는데 이런 것은 천진, 북평, 상해, 광동 등 대국제도시에서도 이 유풍(流風)을 보는 것이다. 이같이 통일(統一)시장(市場)이 형성(形成)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통(交通)운수(運輸)의 발달(發達)이 유치(幼穉)한데 기인(起因)한 것은 물론(勿論) 최근(最近) 소위(所謂) [운수(運輸)판매(販賣)합작(合作)사(社)]가 성(盛)히 제창(提唱)되는 것도 이 까닭이며 작년(昨年) 사월(四月) 결성(結成)된 항공(航空)합작(合作)도 이러한 의의(意義)를 다분(多分)히 포함(包含)하는 것으로서 봉건적(封建的)체제(體制)에 대(對)한 민족자본주의(民族資本主義)의 항쟁(抗爭)이라고도 볼 수 이t다.
중국(中國)농업공황(農業恐慌)의 중요(重要)한 일인(一因)은 농민(農民)이고 통일(統一)시장(市場)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事實)이 증명(證明)하는 바와 같이 동일(同一)국내(國內) 동일시간(同一時間)에 어떤 지방(地方)은 식량(食糧)의 생산과잉(生産過剩)을 걱정하고 어떤 지방(地方)은 생산부족(生産不足)에 고민(苦憫)하는 현상(現象)이다. 즉(卽) 민국(民國) 23년의 협서(陜西)지방(地方)에서는 식량(食糧)의 결핍(缺乏)으로 인쟁상식(人爭相食)하는 참극(慘劇)이 있는 반면(反面)에 상해(上海)부두(埠頭)에는 농산물(農産物)이 창고(倉庫)속에 썩어나는 형편(形便)이였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상품(商品)자본(資本)의 활약(活躍)에 절호(絶好)의 기회(機會)를 주었다. 그래서 농민(農民)은 일용품(日用品)의 구매(購買)와 농산물(農産物)의 매각(賣却)에 이중(二重)으로 상품(商品)자본(資本)의 지배(支配)를 받게 되었으며 그에 반(伴)한 농민(農民)의 극도(極度)의 빈곤화(貧困化)는 농산물(農産物)의 수획(收獲)도 前에 이것을 賣却하지 않으면 안될 상태(狀態)이니 소위(所謂) [예매(豫賣)]가 그것이다. 여기서 상업자본(商業資本)은 고리대자본(高利貸資本)의 임무(任務)를 하는 것이며 목하(目下)의 농업공황(農業恐慌)에 대(對)하야 그 특수성(特殊性)을 구명(究明)하기로 하자.
사(四)
중국(中國)의 농업공황(農業恐慌)은 생산력(生産力)의 감퇴(減退)에 기인(起因)한 것이며 자본주의(資本主義) 제국(諸國)과 같이 생산과잉(生産過剩)으로 야기(惹起)된 것은 아니다 그나마 생산력(生産力)의 감퇴(減退)라는 것도 단순(單純)한 이유(理由)가 아니고 열강(列强)농산물(農産物)의 [떰핑]의 결과(結果)에 기인(起因)한 것이다. 자본(資本)의 유기적(有機的) 구성(構成)이 박약(薄弱)한 중국(中國)의 농촌경제(農村經濟)는 그것이 벌서 상품(商品)경제화(經濟化)해 잇는 관계상(關係上) 살도(殺到)하는 외국(外國)농산물(農産物)의 [떰핑]에서 받는 타격(打擊)은 상상(想像)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만약 중국(中國)농민(農民)이 운수(運輸)교통(交通)의 은총(恩寵)을 받고 통일(統一)시장(市場)을 가젔다면 기분간(幾分間)이라도 이 급박(急迫)한 공황(恐慌)을 완화(緩和)할지 모르나 현실(現實)은 이와 반대(反對)로 인도면(印度綿)을 상해(上海)에 수입(輸入)하는데는 한 [피클]에 일원(一圓)이면 될 것을 정주면(鄭州棉)을 이입(移入)하자면 약(約)십배(十培)나 되는 십원(十圓)의 운임(運賃)을 필요(必要)로 하는 현재(現在)상태(狀態)로는 완화(緩和)는커녕 문자(文字)대로 중국(中國)농촌(農村)의 경제(經濟)할거(割據)는 공황(恐慌)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다. 하물며 정치적(政治的)무력(無力)과 무역통제(貿易統制)나 위체관리(爲替管理)조차 실시(實施)불가능(不可能)한데랴.
오(五)
중국(中國)농촌(農村)공황(恐慌)의 결정적(決定的)인 원인(原因)의 한가지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인 것이다. 중국(中國)위정자(爲政者)의 생명(生命)의 축대(築臺)가 되는 이 가손(家損)잡세(雜稅)는 실(實)로 일천삼백여종이라는 전율(戰慄)할 수자(數字)를 상상(想像)할 때 얼마나 잔혹(殘酷)한 착취(搾取)를 국민(國民)이 부담(負擔)하고 있는가를 알수 있다.
그나마 지주(地主) 상업자본가(商業資本家) 고리대(高利貸)의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수탈(收奪)은 일반(一般)농민(農民)으로하여금 조금이라도 토지(土地)투자(投資)의 여유(餘裕)를 용허(容許)치 않을 뿐 아니라 농민(農民)의 빈곤(貧困)은 농촌(農村)시설(施設)과는 완전(完全)히 인연(因緣)이 멀고 재해(災害)의 위협(威脅)에 대(對)해도 하등(何等)의 방어력(防禦力)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最近) 기년간(幾年間)의 중국(中國) 재해(災害)상황(狀況)을 본다면 민국(民國)이십년(二十年)에는 중국(中國) 최대(最大)의 풍양지지(豊穰之地)로 유명(有名)한 江淮運河流域의 홍수(洪水)에 재해(災害) 구역십육성(區域十六省) 이재민(罹災民) 오천만 피해액 이십억원에 달(達)하고 민국(民國) 이십일년에는 수해지(水害지) 십일성 이백삼십현에 한해지(旱害地)는 육성 백이십육현에 급(及)하고 민국이십이년에는 강중(江中)의 대홍수(大洪水)로 피해지(被害地) 실(實)로 오십성 이백오십이 현에 급(及)하였으며 그 외(外)에 한해지(旱害地)가 팔성 구십팔현에 충해지( 害地) 십성 이백삼십일현이라는 浩○浮沈하는 중국(中國) 농민(農民)에게는 민국(民國) 이십삼년의 수한해는 실로 결정적(決定的) 타격(打擊)이였으며 민국 이십사년의 한해(旱害)만에도 피해면적은 삼억삼천만 중국(中國)무(畝) 약 십사억원의 손해(損害)였다. 그우에 수해(水害)는 국민정부(國民政府)진무위원회(賑務委員會)의 보고(報告)에 의(依)하면 사천삼백사십만육천 중국(中國)무(畝) (남중(南中)을 제외(除外))로서 원유경지의 육오 퍼-센트에 달(達)하며 한수해를 합산(合算)하면 이십억원을 훨신 돌파(突破)한다하니 농민(農民)의 곤궁(困窮)도 이지경에 가면 차라리 말이 없는 것이다.
육(六)
우에 말한 바와 같이 중국(中國)의 농업공황(農業恐慌)은 전자본주의적(前資本主義的) 농업공황(農業恐慌)의 특질(特質)을 가지면서도 농후(濃厚)한 국제적(國際的)인 관련(關聯)을 가지고 있다.
사실(事實) 중국(中國) 농촌(農村)은 밖으로는 열강(列强)의 [떰핑] 농산물(農産物)에 번농(飜弄)되고 안으로는 연련의 재(災)에 질식(窒息)되어 전면적(全面的) 파산(破産)에 전입(轉入)하고 있다. 최근(最近) 삼년래(三年來)에 외미(外米)의 수입(輸入)은 수입상품(輸入商品)중(中) 제일위를 점령(占領)하였으며 전(全)농산품(農産品)의 수입액(輸入額)은 三○퍼-센트 이상(以上)을 점령(占領)하고 있다. 그 중(中) 민국(民國) 이십삼년도 같은 해는 총수입액(總輸入額) 십억이천구백만원에 미면맥(米棉麥)의 수입(輸入)만도 일억팔천칠백만원으로서 약(約) 이할(二割)을 점령(占領)했으니 원료국(原料國)으로서의 중국(中國)에 폭주(暴注)한 외국(外國)의 떰핑 농산물(農産物)은 중국(中國) 경제(經濟)를 근저(根底)로부터 붕괴시킨것이다.
이러한 적년(積年)의 한해(旱害), 수해(水害), 충해( 害) 급(及) 국가(國家)재정(財政)의 팔할을 차지하는 군비(軍費) 군벌(軍閥) 혼전(混戰) 농업(農業)시설(施設)의 붕괴(崩壞)(그들은 항상(恒常)제방(堤防)을 횡단(橫斷)하야 공산군(共産軍)의 진지(陣地)에 홍수(洪水)를 주입(注入)하는 책전(策戰)을 취(取)한다) 등등(等等) 가손(家損)잡세(雜稅)가 되어 농민(農民)에 부담(負擔)되고 그것이 모다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는 동시(同時)에 농촌(農村)의 생산력(生産力)은 여지(餘地)없이 쇠퇴(衰退)하였으며 타방(他方)으로 지주(地主) 상업자본가(商業資本家) 고리대(高利貸)의 수탈(收奪)에 의(依)하야 농민(農民)은 별서 소한마리가 없어저도 종래(從來)의 규모(規模)에서 재생산(再生産)할 가능성(可能性)을 완전(完全)히 잃었는데 작년(昨年)의 재해(災害)는 그들의 최후(最後)일편(一片)인 희망(希望)까지 뺏어가고 말었다.
그우에 농산물(農産物)가격(價格)은 생산(生産)의 감소(減少)와는 역(逆)으로 저락(低落)의 일도(一途)를 질주(疾走)한다. 미국(米國)의 백은(白銀)매상(買上)은 중국(中國)의 구매력(購買力)을 증대(增大)케 한다는 일종(一種)의 구제책(救濟策)이라든 것도 이제는 완전(完全)히 몽상(夢想)이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注目)할 것은 중국(中國)농촌(農村)의 지가(地價)현상(現狀)이다. 1931년을 100으로 한다면 수전(水田)은 1932년의 육퍼-센트가 1933년은 12퍼-센트로 하락하고 전(田)은 1932년의 7퍼-센트가 1933년은 11퍼-센트로 하락(下落)하였으며 상해(上海)의 지가(地價)는 삼년전에 비(比)한야 오십퍼-센트가 폭락(暴落)이라고 한다. 따라서 산업(産業)의 구매력(購買力)지수(指數)도 강소성의 조사(調査)에 의(依)하면 1931년을 100으로 하고 1932년은 91, 1933년은 79로 저하(低下)되여있다.
이같이 중국(中國)농촌(農村)의 실업(失業)유민(流民)은 격증(激增)하고 토지(土地)집중(集中)은 격화(激化)했다. 미증유(未曾有)의 식량(食糧)공황(恐慌)은 광서지방에서 팔쟁상창(八爭相創)의 참극(慘劇)을 연출(演出)케하고 감숙(甘肅) 등지(等地)에는 농촌(農村)부녀자(婦女子)가 최고(最高) 오원 최저(最低) 일원에 매각(賣却)되야 순연(純然)한 농노(農奴)로 화(化)하고 (기한(期限)내(內)에 생산(生産)한 아해(兒孩)는 매주(買主)의 소유(所有)가 된다) 매춘부(賣春婦)로 전락(轉落)한다. 그래서 지금(至今)이야말로 식량(食糧)소동(騷動)은 각지(各地)에 발발(勃發)하고 이것이 격(激)된 곳은 중국(中國)쏘벹 운동(運動)의 온상(溫床)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전환(轉換)하려는 것이 중국(中國)농촌(農村)의 고민(苦憫狀)이다. 이러한 정세(情勢)아래있는 그들의 농촌(農村)금융(金融)문제(問題)는 어떻게 취급(取扱)되고 있는가 다시한번 검토(檢討)하기로하자.
칠(七)
농촌(農村)의 궁핍하는 자금의 도시편재를 필연한 결과이다. 도시유자에 고민하고 농촌은 금융(金融)고갈에 천식(喘息)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농촌(農村)자본(資本)의 결핍(缺乏)은 순환적으로 새로히 농촌을 곤비(困憊)케 하였다.
중국 농촌의 경제상태는 고리대, 전장, 질옥, 합금(무진등류)가 있고 근대적인 것으로는 농민은행, 창고, 신용합작사, 관영의 농민대비소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것은 근년 도시은행자본이 밖으로 열강 금융자본에 압박되고 안으로 민족 산업의 쇠락에 의한 자기혈로를 농촌개척에 힘쓰는 사실이다.
은행자본의 농촌진출은 두가지 코-스를 취한다. 하나는 신용합작사에 대한 투자이요 하나는 농촌창고의 개설이다. 전자는 고리대 자본에 대한 항쟁이오 후자는 상업자본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나 이틈에 죽는 것은 농민이니 농민의 이할이분는 임금의 중압에 고민한다 그렇다고하아 농민의 차금이 그들의 토지투자이냐하면 너무나 큰 잘못이다. 그것은 차금의 기한장단을 보면 알수가 있는 것이니 현하 중국농민의 부임기한은 일년이하가 금차관의 77퍼-센트를 차지하고 일년이상은 11.4퍼-센트 부정기의 것이 11.3퍼-센트(1934년 11월 중앙농업실험소실정보고)를 점령하고 있다. 만약 농민차금이 일종의 토지투자라면 차금의 기한은 장기라야 한다.
팔(八)
중국농촌금융의 현상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고리대의 이상한 발달이다. 중국고리대 자본의 역사적 발전과정은 여기에 상술할 여유가 없으나 중국에서 고리대자본의 발생이 비상히 오랜 것은 사실이다. 이래 수천년간에 그것이 은연한 위력을 가지고 오다가 중국경제가 화폐경제로 전입하자 그것은 새로운 의의와 중요성을 띠게 되였다. 고리대 자본의 두개작용 다시말하면 호사한 상류계급-본질적으로는 토지소유자에 대한 대부가 자태를 감추고 소생산자 - 특히 농민에 대한 대부가 증대되야 그 사회적 의의를 결정하게 되였다. 그래서 고리대자본의 농민에 대한 지배는 군벌 혼전과 재해의 연속에 정비례하야 강화되였으니 농민의 반수는 많거나 적거나 고리대의 참혹한 혜택(?)을 밪지않을수 없었다.
그러면 농민의 차금자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기 위(爲)하야 1934년 11월 중앙농업시험소 실정보고 육구이십이성팔칠일현의 조사에 의하면 순고리대자본이 농민전부임액의 67.6% 상인고리대자본이 13.1% 질옥자본이 8.8% 전장자본이 5.5% 합작사가 2.6% 은행자본이 2.4%이였다. 이에 고리대의 중요성은 더 말것도 없지마는 그 이율을 보면 보통 월리는 일(一)할(割) 심하면 이할(二割)이다. 소위 [九出十三歸]란 형식은 광동기타지방에 일반적으로 행하여지고 때에 따라서는 은일원(銀一圓)에 일리십선을 지불하는 것은 강소불산현 등지에 보련적으로 통용된다.
그뿐아니라 곡물대부는 그 박탈의 정도가 보다 더 비인간적이니 농촌은 보통 3,4월경에 벌서 식량이 절핍되야 지주상인으로부터 곡물을 차입하는바 이 곡물대부는 북방에서는 보통 칠승오합에 대하야 추수후 4두오승을 상환하고 심하면 일두에 일석을 상환하는 곳도 있으며 일석에 대하야 삼개월 후에 일석팔두의 고리를 상환하는 지방도 매거치 못한다.
고리대자본은 중국에서는 통일적인 계급이 결성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현저한 재산의 축적이 행하여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리자본이 그것만으로는 하등 변화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지마는 이것이 토지집중을 격화하고 재황을 계기로 막대한 임무를 하고 있다. 즉 소작민이 자기의 토지를 파는데 이 최대의 원인은 무엇보다 고리대에 대한 예속으로부터서이다.
고리대자본은 정치상의 부패와 경제상의 유폐를 유도하야 오란동안 계속 시키는데 따라 옛날 [로-마]의 그것과 같이 지배적 계급을 붕괴시키지는 못하였다. 고리자본은 우에 말한 것과 같이 지주와 상업자본을 강력적으로 결부시켜서 삼위일체로 만들었다. 지배계급을 붕괴는 커녕 도리혀 농촌지배층의 강력적인 지주가 되었다.
구(九)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야볼때 중국농촌의 몰락은 벌서 농민개개의 문제가 아니고 농업중국의 파멸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아모리 농업창고의 증설에 전력하여도 농민은 [豫賣]라는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창고에 넣을 수확물을 갖이 못하는 것이며 농촌상업자본은 여기서 완전히 상인고리대 자본으로 화하는 것이다. 즉 상인은 상업자본의 이윤과 고리대자본의 ×취와의 이중 박탈이 가능하게 되였다.
그것은 다음 사실에서 간취할수가 있으니 [豫賣]라는 것은 분명히 법외의 착취가 허용되여 왔다는 농촌 중국 농민이 통일시장을 갖지 못한 필연적 결과로서 농촌지배층의 실상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강소성 민정청의 조사에 나타난 지주의 직업별을 보면 군정관리가 27.33%, 고리대업자가 42.86%, 상인이 22.36%, 실업가가 7.45%로서 이것만 보아도 아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박약한 신흥도시 뿌르조아지-는 농촌의 봉건자력과 결부되는데서만 목적의 이윤의 부분이 더 만히 도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상업자본은 최대착취대상이 중국 내지 하층 농민임으로 입고할 농산물이 없는 농민들에게는 농업창고의 시설은 차라리 상업자본가에 은혜가 도라갈지언정 일반농민에게는 하등 소용이 없고 현정권에 대한 부정은 경제×쟁으로부터 완전히 정치적으로 ××화하야 그 심각한 정도는 그들의 궁핍과 정비례로 격화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