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어류/권14 대학1 大學一

大學一 대학1

  •   綱領

가이드라인

  •  14:1 學問須以大學爲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 中庸工夫密, 規模大. 德明(44이후).

학문은 대학부터 해야 한다. 다음은 논어, 그 다음은 맹자, 그 다음이 중용이다. 중용은 공부(工夫)가 세밀하고[1] 규모가 크다[2].

덕명(德明)의 기록

  •  14:2 讀書, 且從易曉易解處去讀. 如大學中庸語孟四書, 道理粲然. 人只是不去看. 若理會得此四書, 何書不可讀! 何理不可究! 何事不可處! 蓋卿(65때).

독서는 이해하기 쉬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 네 편의 책 같은 경우는 도리가 선명(粲然)[3]하다. 그저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을 뿐, 이 네 서책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무슨 책이든 읽지 못할까? 무슨 이치든 파고들지 못할까? 무슨 일이든 대처하지 못할까?

  •  14:3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㝢(61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대학부터 읽어서 (배움의) 규모를 확정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뿌리를 세우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사람 마음을) 격발(發越)시킴을 보게 하고[4],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서 고대인들의 (사유의) 미묘한 지점을 탐구하게 한다. 대학은 여러 단계와 순서가 모두 모여 한 곳에 있어 이해하기 쉬우니 먼저 읽어야 한다. 반면에 논어는 충실하긴[5] 하지만 말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처음 보았을 땐 역시 어렵다. 맹자는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발시키는 데가 있다. 중용 역시 읽기 어렵다. 응당 세 책을 본 후에 읽어야 한다.

  •  14:4 先看大學, 次語孟, 次中庸. 果然下工夫, 句句字字, 涵泳切己, 看得透徹, 一生受用不盡. 只怕人不下工, 雖多讀古人書, 無益. 書只是明得道理, 卻要人做出書中所說聖賢工夫來. 若果看此數書, 他書可一見而決矣. 謙(65때).

먼저 대학을 보고 그 다음 논어와 맹자를 보고 그 다음에 중용을 본다. 진실로 대학에 공을 들여(下工夫) 구구절절 깊이 침잠하여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도록(切己)[6] 익히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일평생 그 쓸모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공을 들이지 않아서 아무리 고대인의 책을 많이 읽어도 도움이 안 될 것을 걱정할 뿐이다. 책은 도리를 밝힐 수 있을 뿐이요, 독자는 나아가 책 속에서 말하는 성현의 공부(工夫)[7]를 몸소 해내야 한다.[8] 만약 진실로 이 몇 권의 서책을 이해한다면 그 밖의 책들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14:5 論孟中庸, 待大學貫通浹洽, 無可得看後方看, 乃佳. 道學不明, 元來不是上面欠卻工夫, 乃是下面元無根脚. 若信得及, 脚踏實地, 如此做去, 良心自然不放, 踐履自然純熟. 非但讀書一事也.

논어, 맹자, 중용은 대학을 완전히 꿰뚫어서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제는 더 파악할 것이 남지 않은 뒤에야 보면 좋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일(道學)이 분명하지[9] 못한 까닭은 본래 저 위쪽 부분에서의 노력(工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래쪽에 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10] 만약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서 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인간 본연의 좋은 마음(良心)을 상실하지 않고 자연스레 (일상적인 도리의) 실천이 익숙해질 것이니 (이로 인한 파급효과의 범위가) 독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  14:6 “人之爲學, 先讀大學, 次讀論語. 大學是箇大坯模. 大學譬如買田契, 論語如田畝闊狹去處, 逐段子耕將去.”

학문은 우선 대학을 읽고 그 다음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틀(mould)이다.[11] 대학은 (또 비유하자면) 농지 매매 계약서(買田契)이고 논어는 그 농지 각 부분의 넓고 좁은 사정에 맞춰 하나하나 경작해나가는 것과 같다.

或曰: “亦在乎熟之而已.”

누군가의 발언: '역시 익숙해지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12]

曰: “然.” 去僞(46때). 人傑同.

대답: 그렇다.

거위(去僞)의 기록. 인걸(人傑)도 같은 기록.

  •  14:7 問: “欲專看一書, 以何爲先?”

질문: 전적으로 한 권만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볼까요?

曰: “先讀大學, 可見古人爲學首末次第. 且就實處理會卻好, 不消得專去無形影處理會.” 淳(61·70때).

대답: 먼저 대학을 읽으면 고대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과 그 사이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실질적인 지점에서 이해해야 좋으니 형체도 없는 지점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8 可將大學用數月工夫看去. 此書前後相因, 互相發明, 讀之可見, 不比他書. 他書非一時所言, 非一人所記. 惟此書首尾具備, 易以推尋也. 力行(62때).

대학 하나를 가지고 몇 달 힘껏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앞뒤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13] 다른 책들이 비벼볼 수 없다. 다른 책들은 특정 시점의 언설도 아니고 특정인의 기록도 아니다.[14] 유독 이 책은 머리와 꼬리를 완비했기 때문에[15] 의미를 추론하고 찾아내기 쉽다.

  •  14:9 今且須熟究大學作間架, 卻以他書塡補去. 如此看得一兩書, 便是占得分數多, 後卻易爲力. 聖賢之言難精. 難者旣精, 則後面粗者卻易曉. 大雅(49이후).

지금은 우선 대학을 차분히 연구하여 뼈대를 세운 다음 다른 책을 가지고 살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권을 읽으면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 후에는 힘을 쓰기가 쉬워진다. 성인과 현인의 말은 정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부분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의 덜 정밀한[16]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아(大雅)의 기록.

  •  14:10 亞夫問大學大意.

아부가 대학의 대의를 물었다.

曰: “大學是修身治人底規模. 如人起屋相似, 須先打箇地盤. 地盤旣成, 則可擧而行之矣.” 時擧(64이후).

대답: 대학은 수기치인의 골격이다.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한다. 지반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공사를) 거행할 수 있다.

시거(時擧)의 기록.

  •  14:11 或問: “大學之書, 卽是聖人做天下根本?”

누군가의 질문: 대학이란 책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17] 근본입니까?

曰: “此譬如人起屋, 是畫一箇大地盤在這裏. 理會得這箇了, 他日若有材料, 卻依此起將去, 只此一箇道理. 明此以南面,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대답: 이는 집짓기로 비유하자면 여기다[18] 큰 지반을 획정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잘 처리해둘(理會) 수 있으면 나중에 건자재가 생겼을 때 이 기초를 따라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 그저 이 하나의 도리 뿐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남면(南面)[19]한 것이 요(堯)의 임금노릇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북면한 것이 순(舜)의 신하노릇이다.

  •  14:12 大學一書, 如行程相似. 自某處到某處幾里, 自某處到某處幾里. 識得行程, 須便行始得. 若只讀得空殼子, 亦無益也. 履孫(65때).

대학이란 책은 여행가이드북[20]과 비슷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그런데 여정의 거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길을 가야만 한다. 빈껍데기[21]만 읽고 만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리손(履孫)의 기록.

  •  14:13 大學如一部行程曆, 皆有節次. 今人看了, 須是行去. 今日行得到何處, 明日行得到何處, 方可漸到那田地. 若只把在手裏翻來覆去, 欲望之燕, 之越, 豈有是理! 自修(65때).

대학은 여행가이드북과 같아서 모두 잘 정해진 절차가 있다. 독자가 이걸 읽었으면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 한다. 오늘 이동해서 어디에 도착하고 다음날 이동해서 저기에 도착하고, 그래야 점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가이드북을 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면서 연(燕)나라에 가고 월(越)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면[22],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자수(自修)의 기록.

  •  14:14 大學是一箇腔子, 而今卻要去塡敎實著. 如他說格物, 自家是去格物後, 塡敎實著; 如他說誠意, 自家須是去誠意後, 亦塡敎實著. 節(64이후).

대학은 빈 뱃속이니 이제 (음식물을 가지고)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격물(格物)[23]을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격물을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성의(誠意)[24]를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성의를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절(節)의 기록.

  •  14:15 大學重處都在前面. 後面工夫漸漸輕了, 只是揩磨在. 士毅(미상).

대학의 무거운 부분은 모두 앞부분에 있다.[25] 뒷부분 공부는 점점 가벼워진다. 갈고 닦기만하면 된다.[26]

<廣錄云: “後面其失漸輕, 亦是下揩磨底工夫在.”>

<광록의 기록: 뒷부분은 공부[27]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역시 갈고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  14:16 看大學前面初起許多, 且見安排在這裏. 如今食次冊相似, 都且如此呈說後, 方是可喫處. 初間也要識許多模樣. 賀孫(62이후).

대학을 보면 앞부분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니 (책 전체의) 배치구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식사매뉴얼(食次冊)과 비슷하니 모두 우선 이렇게 개괄한 후에야 먹을 것들이 나온다. 초반에는 역시 전체적인 구도(模樣)를 알아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17 大學一字不胡亂下, 亦是古人見得這道理熟. 信口所說, 便都是這裏. 淳(61·70때).

대학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고대인은 역시 이 도리를 익숙하게 알았던 것이다. (편안하게) 나오는 대로 다 말해도[28] 모두 도리에 맞았다.

순(淳)의 기록.

  •  14:18 大學總說了, 又逐段更說許多道理. 聖賢怕有些子照管不到, 節節覺察將去, 到這裏有恁地病, 到那裏有恁地病. 節(64이후).

대학은 총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단락을 따라 한번 더 여러 도리를 설명한다. 성인과 현인들은 (단계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29] 이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절목마다 여기서는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고 저기서는 저런 병통이 있을 수 있다고 점검하고 드러낸 것이다.[30]

절(節)의 기록.

  •  14:19 明德, 如八窗玲瓏, 致知格物, 各從其所明處去.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慤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椿(59때).

명덕(明德)은 마치 팔방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 같고,[31]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명덕의 빛이 밝혀주는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학(小學)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학(大學)을 배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노력할 지점이 없다.[32] 지금 일단 지경(持敬)부터 시작해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를 만든 다음에야 치지격물을 할 수 있다.[33]

춘(椿)의 기록.

  •  14:20 而今無法. 嘗欲作一說, 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 看他如何是大人之學, 如何是小學, 如何是明明德, 如何是新民, 如何是止於至善. 日日如是讀, 月去日來, 自見所謂溫故而知新. 須是知新, 日日看得新方得. 卻不是道理解新, 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義剛(64이후).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다.[34] 전에 한번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단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시켜서 무엇이 어른의 학문인지, 무엇이 아이의 학문인지, 무엇이 명명덕(明明德)인지, 무엇이 신민(新民)인지, 무엇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는 것이[35]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새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36]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해가 항상[37] 새로워지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  14:21 才仲問大學.

재중이 대학에 관하여 질문.

曰: “人心有明處, 於其間得一二分, 卽節節推上去.”

대답: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곳이 있다. 그 속에서 한두 가지를 얻어 순서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又問: “小學·大學如何?”

재질문: 소학과 대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曰: “小學涵養此性, 大學則所以實其理也. 忠信孝弟之類, 須於小學中出. 然正心·誠意之類, 小學如何知得. 須其有識後, 以此實之. 大抵大學一節一節恢廓展布將去, 然必到於此而後進. 旣到而不進, 固不可; 未到而求進, 亦不可. 且如國旣治, 又卻絜矩, 則又欲其四方皆準之也. 此一卷書甚分明, 不是滾作一塊物事.” 可學(62때).

대답: 소학은 이 본성(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 이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다.[38] 충신(忠信), 효제(孝弟)와 같은 덕목은 소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심(正心), 성의(誠意)와 같은 것은 소학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반드시 (충신과 효제 등에 대하여 초보적인) 앎이 생긴 후에 (대학의 정심 성의와 같은) 이것을 활용해서 실제로 구현해야 합니다. 대체로 대학은 정해진 단계를 따라 확장되어 나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에 이른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원하는 것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라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도 다시 혈구(絜矩)[39]하는 것은 천하 사방이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단계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이리저리 불분명하게) 뒤섞인 한 덩어리가 아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22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 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正心·誠意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대학은 학문의 개요(綱目)[40]를 담고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전체적인 가이드라인(綱領)[41]을 정립하면 그 밖의 다른 경서들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이 안에 넣을 수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나서 다른 경서를 보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이고, 이것이 '정심성의(正心誠意)'의 일이며, 이것이 '수신(修身)'의 일이고, 이것이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23 問: “大學一書, 皆以修身爲本. 正心·誠意·致知·格物, 皆是修身內事.”

질문: 대학이라는 책은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은 모두 수신에 속한 일입니다.

曰: “此四者成就那修身. 修身推出, 做許多事.” 椿(59때).

대답: 이 네 가지로 수신을 성취하는 것이다. 수신에서 미루어나가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춘(椿)의 기록.

  •  14:24 致知·格物, 大學中所說, 不過“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之類. 古人小學時都曾理會來. 不成小學全不曾知得. 然而雖是“止於仁, 止於敬”, 其間卻有多少事. 如仁必有所以爲仁者, 敬必有所以爲敬者, 故又來大學致知·格物上窮究敎盡. 如入書院, 只到書院門裏, 亦是到來, 亦喚做格物·致知得. 然卻不曾到書院築底處, 終不是物格·知至. 㽦(59때).

치지(致知)[42]와 격물(格物)은 '대학'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임금이 되어 인(仁)에 멈추고, 신하가 되어 경(敬)에 멈춘다'[43]는 등등에 불과하다. 고대인들은 소학에서 이미 이것을 다루었다. 설마하니 소학의 단계에서 (다음에서 언급할 것들을) 전혀 안 배우지는 않겠지만, 비록 '인(仁)에 멈추고, 경(敬)에 멈춘다'고는 해도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인(仁)에는 반드시 인인 이유가 있고, 경(敬)에는 반드시 경인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대학에 와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통해 끝까지 남김없이 파고드는 것이다. 마치 서원(書院)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서원의 정문 안쪽에만 도달한 것도 도달한 것이니 역시 '사물에 나아가(格物) 앎을 추구했다(致知)'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서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사물에 나아갔고 앎이 지극해졌다(物格知至)'는 아닌 것이다.

순(㽦)의 기록.

  •  14:25 人多敎踐履, 皆是自立標置去敎人. 自有一般資質好底人, 便不須窮理·格物·致知. 此聖人作今[44]大學, 便要使人齊入於聖人之域. 榦(미상).

사람들이 많이들 실천을 가르치는데 모두다 자의적으로 목표를 세워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질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당연히 궁리(窮理), 격물(格物), 치지(致知)가 필요 없다. 성인이 '대학'을 만든 것은 (자질이 좋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함께 성인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서이다.[45]

간(榦)의 기록.

  •  14:26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賀孫(62이후).

'대학'이 담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가이드라인 뿐이다. 그러니 반드시 스스로 힘써 해나가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27 大學敎人, 先要理會得箇道理. 若不理會得, 見聖人許多言語都是硬將人制縛, 剩許多工夫. 若見得了, 見得許多道理, 都是天生自然鐵定底道理, 更移易分毫不得. 而今讀大學, 須是句句就自家身上看過. 少間自理會得, 不待解說. 如語孟六經, 亦須就自家身上看, 便如自家與人對說一般, 如何不長進! 聖賢便可得而至也. 賀孫(62이후).

'대학'은 사람들에게 먼저 도리를 이해하도록 가르친다.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인의 많은 말씀은 모두 억지로 사람을 제약하고 속박하는 것으로, 쓸데없이 애만 많이 쓰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도리를 이해하게 되면 그 많은 도리가 모두 하늘이 낳아 자연히 무쇠처럼 확정된(天生自然鐵定) 도리여서 조금도 바꾸거나 옮길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대학'을 읽을 때에 반드시 한 문장 한 문장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얼마 후 스스로 이해하게 되어 해설이 필요 없을 것이다. '논어', '맹자', '육경'도 역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마치 자신이 경서의 저자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아질 것이니 어찌 발전하지 않겠나! 성현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28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願爲今人之學乎? 敬仲.

요즘 사람들은 모두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대학'을 읽게 하는 이유는 우선 옛사람들의 배움은 어떠했는지, 무엇을 이해하려 했는지를 보게 하기 위함이다. 여러분은 옛사람의 학문을 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요즘 사람의 학문을 하고자 하는가?

경중(敬仲)의 기록.

  •  14:29 讀大學, 且逐段捱. 看這段時, 似得無後面底. 看第二段, 卻思量前段, 令文意聯屬, 卻不妨. 榦(미상).

'대학'을 읽을 때는 각 단락을 차례차례 파고들어야[46] 한다. 첫 단락을 볼 때는 뒷부분이 없는 것처럼 하고, 두 번째 단락을 볼 때는 앞 단락을 생각하여 글의 의미가 연결되도록 해야만 한다.

간(榦)의 기록.

  •  14:30 看大學, 固是著逐句看去. 也須先統讀傳文敎熟, 方好從頭仔細看. 若全不識傳文大意, 便看前頭亦難. 賀孫(62이후).

'대학'을 볼 때 물론 한 문장 한 문장씩 읽어 나가는 것도 좋지만, 먼저 전문(傳文)을 익숙하게 통독한 연후에 처음부터 경문(經文)을 자세히 읽어야 좋다. 만약 전문(傳文)의 대의를 전혀 알지 못하면 앞쪽의 경문(經文) 부분을 읽더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31 或問讀大學.

누군가가 대학(大學)을 읽는 것에 관하여 질문.

曰: “讀後去, 須更溫前面, 不可只恁地茫茫看. 須‘溫故而知新’. 須是溫故, 方能知新. 若不溫故, 便要求知新, 則新不可得而知, 亦不可得而求矣.” 賀孫(62이후).

뒷 부분을 읽은 후 다시 앞 부분을 익혀야(溫)지 그렇게 막연하게 읽어나가서는 안 된다. 반드시 '옛 것을 익혀 새것을 알(溫故而知新)'아야 한다. 옛 것을 익혀야만 비로소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옛 것을 익히지 않고 새로운 것을 알기를 바란다면, 새로운 것을 알 수 없고, 또한 구할 수도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32 讀大學, 初間也只如此讀, 後來也只如此讀. 只是初間讀得, 似不與自家相關; 後來看熟, 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 不如此做自不得. 賀孫(62이후).

'대학'을 읽을 때, 처음에도 그냥 이렇게 읽고, 나중에도 역시 그냥 이렇게 읽을 뿐이다. 단지 처음 읽을 때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 익숙해지면 책 속의 많은 말들을 반드시 그대로 실천해야 하며, 그렇게 실천하지 않으려 해도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33 謂任道弟讀大學, 云: “須逐段讀敎透, 黙自記得, 使心口相應. 古時無多書, 人只是專心暗誦. 且以竹簡寫之, 尋常人如何辦得竹簡如此多. 所以人皆暗誦而後已. 伏生亦只是口授尙書二十餘篇. 黃霸就獄, 夏侯勝受尙書於獄中, 又豈得本子. 只被他讀得透徹. 後來著述, 諸公皆以名聞. 漢之經學所以有用.” 賀孫(62이후).

나(섭하손)의 동생 임도(任道)에게 '대학'을 읽는 것에 대하여 말함: 반드시 각 단락을 철저히 읽어,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도록 묵묵히 암송해야 한다. 옛날에는 책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직 마음을 집중하여 암송했다. 또, 죽간에다 글을 적었으니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죽간을 마련할[47] 수 있었겠나? 그래서 다들 암송하고 말았던 것이다. 복생(伏生)도 단지 구두로 '상서(尙書)' 20여 편을 전수했을 뿐이다.[48] 황패(黃霸)는 투옥된 이후 옥중에서 하후승(夏侯勝)에게 '상서'를 배웠는데, 어찌 서책을 얻을 수 있었겠나? 단지 하후승을 따라 투철하게 암송했을 뿐이다.[49] 후대에는 책을 저술하여 여러 사람이 모두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漢)나라의 경학(經學)이 유용했던 이유이다.

  •  14:34 或問大學.

누군가가 대학에 대하여 질문.

曰: “大槪是如此. 只是更要熟讀, 熟時, 滋味自別. 且如喫果子, 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只是滋味別.” 胡泳(69때).

대답: 대체로 (자네가 말한 것처럼) 그러하다. 다만 독해가 더 익어야 한다. 익숙해지면 그 맛이 자연히 다르다. 마치 과일을 먹는 것과 같다. 덜 익었을 때 먹으면 그것도 과일을 먹는 것이고 잘 익었을 때 먹으면 그것도 과일을 먹는 것이지만, 맛이 다를 뿐이다.

호영(胡泳)의 기록.

  •  14:35 問賀孫: “讀大學如何?”

(선생이) 나(賀孫)에게 질문: '대학' 읽는 것은 어떻게 되어가는가?

曰: “稍通, 方要讀論語.”

나의 대답: 조금 이해가 됩니다. 이제 '논어'를 읽으려 합니다.

曰: “且未要讀論語. 大學稍通, 正好著心精讀. 前日讀時, 見得前未見得後面, 見得後未接得前面. 今識得大綱統體, 正好熟看. 如喫果實相似, 初只恁地硬咬嚼. 待嚼來嚼去, 得滋味, 如何便住卻! 讀此書, 功深則用博. 昔和靖見伊川, 半年方得大學西銘看. 今人半年要讀多少書, 某且要人讀此, 是如何? 緣此書卻不多, 而規模周備. 凡讀書, 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 第二項只費得九分工夫, 第三項便只費六七分工夫. 少刻讀漸多自貫通, 他書自不著得多工夫.” 賀孫(62이후).

선생의 대답: 일단 '논어'를 읽지 말게. '대학'을 조금 이해하였다 하니 이제 마음을 써서 정밀히 독해하기 딱 좋을 때이네. 이전에 읽을 때는 앞 부분을 이해하면 뒷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뒷 부분을 이해하면 앞 부분과 연결되지 않았다. 이제 전체적인 골격(大綱統體)을 파악했으니 자세히 읽기에 딱 좋을 때이다. 마치 과일을 먹는 것과 비슷해서, 처음에는 세게 씹어야 한다. 계속 씹다 보면 그 맛을 알게 되는데, 어찌 그만둘 수 있겠나! 이 책은 독해에 공을 들이면 들일 수록 쓰임이 넓어진다. 예전에 윤화정(和靖)[50]이 이천(伊川)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서 반년이 지나서야 겨우 '대학'과 '서명'을 읽을 수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반년이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읽으려 할까. 내가 사람들이 '대학'을 읽기를 원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 책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릇 독서할 적에는 처음에는 100% 힘을 다해 읽어야 하고, 두 번째 시도 때는 90%의 힘만 들이면 되고, 세 번째 시도 때는 그저 60~70%의 힘만 들이면 된다. 얼마 후 독서의 횟수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저절로 꿰뚫게 될 것이니 다른 책에는(他書)[51] 자연히 많은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36 諸生看大學未曉, 而輒欲看論語者, 責之曰: “公如喫飯一般, 未曾有顆粒到口, 如何又要喫這般, 喫那般! 這都是不曾好生去讀書. 某嘗謂人看文字曉不得, 只是未曾著心. 文字在眼前, 他心不曾著上面, 只是恁地略綽將過, 這心元不曾伏殺在這裏. 看他只自恁地豹跳, 不肯在這裏理會, 又自思量做別處去. 這事未了, 又要尋一事做, 這如何要理會得! 今之學者看文字, 且須壓這心在文字上. 逐字看了, 又逐句看; 逐句看了, 又逐段看, 未有曉不得者.” 賀孫(62이후).

제자들 가운데 '대학'을 충분히 깨치지 못하고 곧바로 '논어'를 읽고자 하는 이가 있어 선생이 꾸짖었다: 그대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입에 아직 밥알 한 톨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또 이것을 먹고 저것을 먹으려고 하는가! 이는 모두 책을 제대로[52]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일전에 남들에게 말하길 문자를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자가 눈앞에 있지만 거기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그저 대충(略綽) 지나쳐버린다. 그 마음이 애초에 거기에 착 붙어[53] 있지 않다. 그저 이렇게 표범처럼 날뛸 뿐 여기에 붙어서 이해하려(理會)[54]하지 않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가버릴 생각이나 한다. 이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시 다른 일을 찾아 하려고 하니, 이렇게 해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요즘 학자들이 문자를 읽을 때는, 우선 반드시 마음을 문자에 눌러 붙여야 한다. 한 글자 한 글자 따라가며 보고, 다시 한 구문씩 보고, 한 구문씩 본 후에 다시 한 단락씩 보고서도 (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37 子淵說大學.

자연(子淵)이 '대학'에 대해 설명했다.

曰: “公看文字, 不似味道只就本子上看, 看來看去, 久之浹洽, 自應有得. 公便要去上面生意, 只討頭不見. 某所成章句或問之書, 已是傷多了. 當初只怕人曉不得, 故說許多. 今人看, 反曉不得. 此一書之間, 要緊只在‘格物’兩字, 認得這裏看[55], 則許多說自是閑了. 初看須用這本子, 認得要害處, 本子自無可用. 某說十句在裏面, 看得了, 只做一句說了方好. 某或問中已說多了, 卻不說到這般處. 看這一書, 又自與看語孟不同. 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 如孟子說仁義處, 只就仁義上說道理; 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 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 若大學, 卻只統說. 論其功用之極, 至於平天下. 然天下所以平, 卻先須治國; 國之所以治, 卻先須齊家; 家之所以齊, 卻先須修身; 身之所以修, 卻先須正心; 心之所以正, 卻先須誠意; 意之所以誠, 卻先須致知; 知之所以至, 卻先須格物. 本領全只在這兩字上. 又須知如何是格物. 許多道理, 自家從來合有, 不合有. 定是合有. 定是人人都有. 人之心便具許多道理: 見之於身, 便見身上有許多道理; 行之於家, 便是一家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國, 便是一國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天下, 便是天下有許多道理. ‘格物’兩字, 只是指箇路頭, 須是自去格那物始得. 只就紙上說千千萬萬, 不濟事.” 賀孫(62이후).

대답: 그대가 글을 읽는 것은 섭미도(味道)가 그저 책(本子)[56]에 집중하여 읽는 것과 다르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그렇게 오래 보아 푹 젖어들면 자연히 얻는 것이 있다. 그대는 그저 문자의 표면에서 유별난 해석을 만들어 내니(上面生意) 단서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討頭不見).[57] 내가 쓴 대학장구(章句)나 대학혹문(或問) 같은 책들부터 이미 말이 많아서 잘못이다. 당초에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길게 썼는데 요즘 사람들은 역으로 (말이 많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대학(此一書)[58]의 핵심은 그저 '격물'이라는 두 글자에 있을 뿐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고 나면 그 모든 설명이 불필요해진다. 처음 읽을 때는 이 책을(本子)[59] 써야 하지만 요해처[60]를 이해하고 나면 이 책(本子)은 쓸모가 없어진다. 내가 책 속에 열 구절로 설명한 것을, 독자가 다 보고 나서, 단 한 구절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어야 된다. 내가 대학혹문에서 한 말이 이미 너무 많은데 이러한 부분은 미처 말하지 못했다. 이 책(這一書)[61]을 읽는 것은 '논어'와 '맹자'를 읽는 것과 자연히 다르다. '논어'와 '맹자'에서는 하나의 항목이 하나의 도리이다. 예를 들어, 맹자가 인의(仁義)를 말하는 부분에서는 그저 인의에 관해서만 도리를 설명한다.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설명할 대목에서는 '극기복례'에 관해서만 도리만 설명한다. 그러나 '대학'은 그저 체계를 전체적으로 설명한다. 그 효용의 최대치를 논하자면 천하를 평정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천하가 평정되려면 먼저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나라가 다스려지려면 먼저 집안을 다스려야 하며, 집안이 다스려지려면 먼저 몸을 닦아야 하고, 몸이 닦여지려면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야 하며, 마음이 바로잡히려면 먼저 뜻을 성실히 해야 하고, 뜻이 성실해지려면 먼저 앎을 지극히 해야 하며, 앎이 지극해지려면 먼저 사물과 사건에 나아가야 한다. 본령(本領)은 전적으로 이 두 글자[62]에 있다. 나아가 격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 많은 도리가 본래부터 내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없어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마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 많은 도리를 갖추고 있다. 자기 자신을 보면[63] 자기 자신에게서 많은 도리를 볼 수 있고, 가정에서 실천해보면 한 가정에 많은 도리가 있으며, 나라에 베풀어보면 나라에 많은 도리가 있고, 천하에 베풀어보면 천하에 많은 도리가 있다. '격물' 두 글자는 단지 길의 시작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스스로 가서 그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접해야만 한다. 그저 지면상에서 천 번 만 번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38 答林子淵說大學,

임자연이 대학을 해설한 것에 답함

曰: “聖人之書, 做一樣看不得. 有只說一箇下工夫規模, 有首尾只說道理. 如中庸之書, 劈初頭便說‘天命之謂性’. 若是這般書, 全著得思量義理. 如大學, 只說箇做工夫之節目, 自不消得大段思量, 纔看過, 便自曉得. 只是做工夫全在自家身心[64]上, 卻不在文字上. 文字已不著得思量. 說窮理, 只就自家身上求之, 都無別物事. 只有箇仁義禮智, 看如何千變萬化, 也離這四箇不得. 公且自看, 日用之間如何離得這四箇. 如信者, 只是有此四者, 故謂之信. 信, 實也, 實是有此. 論其體, 則實是有仁義禮智; 論其用, 則實是有惻隱·羞惡·恭敬·是非, 更假僞不得. 試看天下豈有假做得仁, 假做得義, 假做得禮, 假做得智! 所以說信者, 以言其實有而非僞也. 更自一身推之於家, 實是有父子, 有夫婦, 有兄弟; 推之天地之間, 實是有君臣, 有朋友. 都不是待後人旋安排, 是合下元有此. 又如一身之中, 裏面有五臟六腑, 外面有耳目口鼻四肢, 這是人人都如此. 存之爲仁義禮智, 發出來爲惻隱·羞惡·恭敬·是非. 人人都有此. 以至父子兄弟夫婦朋友君臣, 亦莫不皆然. 至於物, 亦莫不然. 但其拘於形, 拘於氣而不變. 然亦就他一角子有發見處: 看他也自有父子之親; 有牝牡, 便是有夫婦; 有大小, 便是有兄弟; 就他同類中各有群衆, 便是有朋友; 亦有主腦, 便是有君臣. 只緣本來都是天地所生, 共這根蔕, 所以大率多同. 聖賢出來撫臨萬物, 各因其性而導之. 如昆蟲草木, 未嘗不順其性, 如取之以時, 用之有節: 當春生時‘不殀夭, 不覆巢, 不殺胎; 草木零落, 然後入山林; 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 所以能使萬物各得其所者, 惟是先知得天地本來生生之意.” 賀孫(62이후).

대답: 성인의 책들을 다 똑같은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어떤 책은 그저 이 공부[65]의 체계만을 설명하고, 어떤 책은 시종일관 도리만 설명한다. 예를 들어 '중용'은 시작하자마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말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의리(義理)에 모든 생각을 기울여야(著得思量) 한다. 그러나 '대학'은 단지 공부의 단계와 절차를 말할 뿐이니 본래 많은 생각이 필요치 않다. 이는 읽어보면 저절로 알 수 있다. 공부는 전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하는 것이지 문자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의) 문자는 애초에 생각을 기울일(著得思量) 것이 없다. 이치를 파고드는(窮理) 것을 말한 것도 그저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라는 것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은 전혀 없다. 그저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있을 뿐이다.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변화해도 이 네 가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66] 그대가 한 번 보라. 매일 일상속에서 어떻게 이 네 가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나? 신(信)같은 경우는, 이 네 가지가 (정말로) 있으므로 신(信)이라고 한 것이다.[67] 신(信)은 '실제로(實)'이다. 실제로 이 네가지가 있다. 그 본체(體)로 말하자면 인의예지가 실제로 있고, 그 작용(用)으로 말하자며 측은지심,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이 실제로 있으며, 가짜일 수 없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어찌 세상에 가짜로 인을 성취하고(得仁), 가짜로 의를 성취하고, 가짜로 예를 성취하고, 가짜로 지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겠나![68] 그래서 '신(信)'이라고 하는 것은 인의예지가 실제로 있으며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다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가정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로 부자관계가 있고, 부부관계가 있고, 형제관계가 있다. 천지간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로 군신관계가 있고, 붕우관계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후대 사람들이 그때그때 안배해서 만든 것이 아니요, 애초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들이다. 마치 인간의 몸 속에 오장육부가 있고 외부에 이목구비와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사람마다 누구나 이러하다. 내면에 보존하면 인의예지가 되고, 겉으로 발현하면 측은지심,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이 된다. 사람마다 누구나 이것을 가지고 있다.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군신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동물(物)에게까지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단지 (타고난) 형체와 기에 구속되어 (기질이) 변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역시 그들 중 일부 발현된 지점에서 그들에게도 부자간의 친애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암수(牝牡)가 있으니 부부관계가 있는 것이다. 대소(大小)가 있으니 형제관계가 있는 것이다. 같은 종 안에서도 각자 무리가 있으니 붕우관계가 있는 것이다. (무리에) 우두머리도 있으니 군신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두 본래 천지가 낳은 것이요 (인간과) 뿌리가 같기 때문에 대동소이한 것이다. 성현들이 등장하면 만물을 어루만져 길러주며(撫臨), 각자의 본성에 따라 인도한다. 곤충과 초목에 대해서도 그 본성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다. 예컨대 '시기를 보아가며 취하고 사용하는 데 절도가 있다.'[69]라거나, 봄이 되어 생명이 시작될 시기에 '어린 개체를 죽이지 않고, 둥지를 뒤엎지 않으며, 새끼를 밴 것을 죽이지 않으며, 초목이 시들어 잎이 떨어진 후에야 산림에 들어가며, 수달이 물고기를 제사지낸 후에야 관리인이 연못(澤梁)에 들어가며[70]; 승냥이가 사냥한 짐승을 제사지내 후에 사냥을 간다.[71]'[72]라고 하였다. (성현이) 만물이 각자 본래의 자리를 얻도록 해줄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천지 본래의 무한히 낳고 낳으려는(生生) 의지를 앞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39 問大學.

대학에 관한 질문.

曰: “看聖賢說話, 所謂坦然若大路然. 緣後來人說得崎嶇, 所以聖賢意思難見.” 賀孫(62이후).

대답: 성현의 말씀을 보면, 옛 말처럼 '큰길처럼 평탄하다'.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하게[73] 설명했기 때문에 성현의 본래 뜻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40 聖賢形之於言, 所以發其意. 後人多因言而失其意, 又因注解而失其主. 凡觀書, 且先求其意, 有不可曉, 然後以注通之. 如看大學, 先看前後經亦自分明, 然後看傳. 可學(62때).

성현은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그 말에 집착하여 그 뜻을 잃어버리고, 다시 주석에 집착하여 그 주지(主)[74]를 잃어버렸다. 책을 읽을 때는 먼저 그 뜻을 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때 비로소 주석을 활용하여 뜻이 통하게 하라. 예를 들어 '대학'을 읽을 때는 먼저 앞뒤의 경문을 읽어 그 자체로 분명해진 다음에 전(傳)을 읽어야 한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41 大學諸傳, 有解經處, 有只引經傳贊揚處. 其意只是提起一事, 使人讀著常惺惺地. 道夫(60이후).

'대학'의 여러 전(傳)에는 경(經)을 해석하는 부분도 있고 다른 경전의 내용을 끌어다 (대학 경문의 내용을) 찬양하는 부분도 있다. 그 의도는 단지 (그때그때) 하나의 (구체적) 사안을 가져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늘 말똥말똥한 상태로 독해하도록 하려는 것이다.[75]

도부(道夫)의 기록.

  •  14:42 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 那時未有解說, 想也看得鶻突. 而今看注解, 覺大段分曉了, 只在子細去看. 賀孫(62이후).

과거에 이천(伊川)이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대학을 읽도록 지시했을 때에는 주석서가 없었으니 아마도 독해가 애매했을지 싶다. 요즘은 (다들) 주석들을 보니 매우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저 자세히 읽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43 “看大學, 且逐章理會. 須先讀本文, 念得, 次將章句來解本文, 又將或問來參章句. 須逐一令記得, 反覆尋究, 待他浹洽. 旣逐段曉得, 將來統看溫尋過, 這方始是. 須是靠他這心, 若一向靠寫底, 如何得.”

'대학'을 읽을 때는 우선 각 장을 순서대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본문을 읽고 소리내어 읽은 후(念得)[76], 장구(章句)를 가지고 본문을 해석하고, 혹문(或問)을 가지고 장구를 보충해야 한다. 단계마다 암기하고 반복적으로 탐구하여 (이해한 내용이 자신에게) 젖어들기를 기다려야 한다. 단계들을 순서대로 이해한 후에는 전체를 종합하여 보고(統看) 오래 되풀이하여 익혀야(溫尋) 비로소 제대로 공부가 된다. 이는 자신의 이 마음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적힌 것에만 의존한다면 이게 될 리가 있겠나.

又曰: “只要熟, 不要貪多.” 道夫(60이후).

다시 말함: 그저 익숙해지려고 해야지 많이 읽으려고 하지 말라.

  •  14:44 聖人不令人懸空窮理, 須要格物者, 是要人就那上見得道理破, 便實. 只如大學一書, 有正經, 有注解, 有或問. 看來看去, 不用或問, 只看注解便了; 久之, 又只看正經便了; 又久之, 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 而正經亦不用矣. 然不用某許多工夫, 亦看某底不出; 不用聖賢許多工夫, 亦看聖賢底不出. 大雅(49이후).

성인은 사람들에게 공중에 붕 떠서 이치를 탐구하게 하지 않는다. 반드시 격물(格物)을 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실제 사건과 사물 위에서 도리를 간파해야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학' 한 권에 원문(正經), 주석,[77] 그리고 혹문(或問)이 있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혹문은 필요하지 않게 되니 그저 주해만 보면 된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제 그저 원문만 보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자기 마음속에 '대학' 한 권이 자리 잡아 원문도 필요 없게 된다. 그러나 내가 (장구와 혹문에서) 말한 여러 공부처를 몸소 해보지 않으면 내가 말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고, 성현이 (대학 원문에서) 말한 여러 공부처를 몸소 해보지 않으면 성현이 말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78]

대아(大雅)의 기록.

  •  14:45 或問: “大學解已定否?”

누군가의 질문: '대학'의 해석은 이미 확정되었습니까?

曰: “據某而今自謂穩矣. 只恐數年後又見不穩, 這箇不由自家.”

대답: 내가 보기에 지금으로서는 확고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다시 불안정해 보일 것이다. 이는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問中庸解.

'중용'의 해석에 관한 질문.

曰: “此書難看. 大學本文未詳者, 某於或問則詳之. 此書在章句, 其或問中皆是辨諸家說理[79]未必是. 有疑處, 皆以‘蓋’言之.” 淳(61·70때).

대답: 이 책은 읽기 어렵다. '대학'의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은 부분은 내가 '대학혹문(或問)'에서 자세히 설명해 두었다. 중용은 중용장구에서 그렇게 해 두었다. 중용혹문에 담은 것은 모두 여러 학자들의 학설이 꼭 옳지는 않다고 논변한 것이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모두 '대개(蓋)~'로 시작하는 설명을 붙였다.

순(淳)의 기록.

  •  14:46 大學章句次第得皆明白易曉, 不必或問. 但致知·格物與誠意較難理會, 不得不明辨之耳. 人傑(51이후).

대학장구는 순서가 모두 명백하고 이해하기 쉬워서 혹문(或問)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치지(致知)'와 '격물(格物)' 그리고 '성의(誠意)'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므로 부득불 명확하게 논변해야 할 뿐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  14:47 子淵問大學或問.

자연(子淵)이 대학혹문(或問)에 관하여 질문.

曰: “且從頭逐句理會, 到不通處, 卻看章句. 或問乃注脚之注脚, 亦不必深理會.” 賀孫(62이후).

대답: 우선 처음부터 한 문장씩 차근차근 공부(理會)[80]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는 대학장구(章句)를 보라. 혹문은 각주의 각주일 뿐이니 깊이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48 “學者且去熟讀大學正文了, 又子細看章句. 或問未要看, 俟有疑處, 方可去看.”

배우는 이는 먼저 '대학'의 본문을 충분히 읽고 그 다음에 장구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 '혹문(或問)'의 경우 미리 볼 필요는 없고 의심이 생겼을 때에 보면 좋다.

又曰: “某解書不合太多. 又先准備學者, 爲他設疑說了. 他未曾疑到這上, 先與說了, 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了. 聖人云: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須是敎他疑三朝五日了, 方始與說他, 便通透. 更與從前所疑慮, 也會因此觸發, 工夫都在許多思慮不透處. 而今卻是看見成解底, 都無疑了. 吾儒與老莊學皆無傳, 惟有釋氏常有人. 蓋他一切辦得不說, 都待別人自去敲磕, 自有箇通透處. 只是吾儒又無這不說底, 若如此, 少間差異了.”

다시 말함: 내가 책을 해석할 때 너무 많이 설명하는 게 아니었다. 또, 배우는 이들을 미리 상정하여(准備)[81] 그들을 위해 의문점들을 설정한 뒤 설명했다. 그들이 아직 의문을 가진 적도 없는데도 선제적으로 설명해버려서 배우는 이들은 이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인은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답답해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나머지 세 귀퉁이를 가지고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설명해주지 않는다'고 했다.[82] 반드시 상대방이 3~5일 동안 의문을 품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설명해주어야 투철하게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이전에 의문을 품었던 것들까지도 이로 인해 생각이 촉발될 수 있다. 공부(工夫)는 모두 생각들이 투철하지 못한 지점에서 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기성의 해석을 보고서는 전혀 의문이 없게 된다. 우리 유학과 노장의 학문은 모두 (학문을) 전승하는 관습이 없지만 불교는 항상 사제간 전승이 있었다. 대개 그들은 일체 말하지 않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스스로 두드려보며 모색하다 이내 저절로 철저한 이해를 획득하기를 기다린다. 우리 유학은 이렇게 말해주지 않고 있는 것이 없다. 만약 이렇게 (불교처럼) 해버리면 머지 않아 잘못되게 된다.

又曰: “解文字, 下字最難. 某解書所以未定, 常常更改者, 只爲無那恰好底字子. 把來看, 又見不穩當, 又著改幾字. 所以橫渠說命辭爲難.” 賀孫(62이후).

다시 말함: "글자를 해석할 때, 글자를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내가 책을 해석할 때 확정하지 못하고 늘 개정하는 이유도 딱 맞는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전에 썼던 것을) 가져와 다시 보면 또 온당하지 않은 게 보여서 몇 글자를 바꾸게 된다. 그래서 횡거(橫渠)가 말하기를 '단어(命辭)를 쓰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83]

하손(賀孫)의 기록.

  •  14:49 某作或問, 恐人有疑, 所以設此, 要他通曉. 而今學者未有疑, 卻反被這箇生出疑! 賀孫(62이후).

내가 '혹문'을 만든 것은 사람들이 의문이 있을까 봐 (선제적으로) 의문을 설정하여 이해를 돕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학자들은 (본문을 보고)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오히려 대학혹문 때문에 의문을 가진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50 或問朱敬之: “有異聞乎?”

누군가가 주경지(朱敬之)[84]에게 '특별히 들은 것이 있는가?'라고 물었다.[85]

曰: “平常只是在外面聽朋友問答, 或時裏面亦只說某病痛處得. 一日, 敎看大學, 曰: '我平生精力盡在此書. 先須通此, 方可讀書.'"[86].” 賀孫(62이후).

대답: 평소에 그저 밖에서 친구분들과 묻고 답하시는 것을 듣고, 가끔 집안에서도 그저 나의(주경지의) 병통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루는 '대학'을 읽으라 하고는 말씀하시길 '나의 평생 정력은 이 책에 다 쏟았다. 먼저 이것을 통달해야만 비로소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다.'[87]고 하셨습니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51 某於大學用工甚多. 溫公作通鑑, 言: “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論孟中庸, 卻不費力. 友仁(69때).

나는 '대학'에 매우 깊이 공을 들였다. 온공(溫公)[88]이 '통감(通鑑)'[89]을 편찬하고서 '신의 평생의 정력을 이 책에 다 쏟았사옵니다'라고 말했듯이, 나도 '대학'에 대하여 그러했다. 논어, 맹자, 중용은 그렇게 힘이 들지 않았다.

우인(友仁)의 기록.

  •  14:52 大學一日只看二三段時, 便有許多修處. 若一向看去, 便少. 不是少, 只是看得草草.

'대학'을 하루에 두세 단락씩만 읽어도 수양할 지점이 매우 많다. 계속해서 읽으면 적어진다.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훌훌(草草)[90] 읽게 되는 것이다.

  •  14:53 某解注書, 不引後面說來證前說, 卻引前說去證後說. 蓋學者方看此, 有未曉處, 又引他處, 只見難曉. 大學都是如此. 僩(69이후).

나는 (경서를) 주해할 적에 뒷부분의 문장을 인용하여 앞부분을 입증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앞부분의 문장을 인용하여 뒷부분을 입증하는 데 사용한다. 배우는 이가 이것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나왔는데 다시 (아직 읽지 않은 뒤쪽의) 다른 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이해를 어렵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주해서는 모두 이렇게 했다.

한(僩)의 기록.

  •  14:54 說大學啓蒙畢, 因言: “某一生只看得這兩件文字透, 見得前賢所未到處. 若使天假之年, 庶幾將許多書逐件看得恁地, 煞有工夫.” 賀孫(62이후).

'대학'과 '역학계몽(啓蒙)'을 설명하고 나서 말함: 나는 일생토록 이 두 편의 글[91]을 철저히 이해하여 전현(前賢)이 도달하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었다. 만약 하늘이 나에게 시간을 조금 더 허락해준다면,[92] 많은 책을 하나하나 이렇게 읽어가며 한껏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    序

대학장구 서문(序)에 관한 조목들

  •  14:55 亞夫問: “大學序云: ‘旣與之以仁義禮智之性, 又有氣質之稟.’ 所謂氣質, 便是剛柔·强弱·明快·遲鈍等否?”

아부(亞夫)의 질문: 대학장구의 서문(序)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을 준 것에 더하여 다시 기질(氣質)을 부여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기질이란 바로 강유(剛柔), 강약(强弱), 명쾌(明快), 지둔(遲鈍) 등을 말하는 것입니까?

曰: “然.”

대답: 그렇다.

又云: “氣, 是那初稟底; 質, 是成這模樣了底. 如金之礦, 木之萌芽相似.”

다시 대답: 기(氣)는 최초에 받은 것, 질(質)은 형체를 이룬 것이다. 쇠와 철광석의 관계, 나무와 싹의 관계와 같다.[93]

又云: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 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 爲不肖.” 恪(64때).

다시 대답: 음, 양, 오행(陰陽五行)의 기가 천지 가운데 뒤섞여서 그 정수(精英)는 사람을 이루고 찌꺼기는 사물이 되는 것이다. 정수 중의 정수는 성인(聖)과 현인(賢)이 되고, 정수 중의 찌꺼기는 어리석고 불초한 자가 된다.

각(恪)의 기록.

  •  14:56 問: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何處見得天命處?”

누군가의 질문: 대학장구 서문에서 '총명예지(聰明睿智)를 가진 자가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실현하면 하늘은 반드시 그를 억조(億兆) 백성의 군사(君師)로 명한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명(天命)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曰: “此也如何知得. 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 定是爲億兆之君師, 便是天命之也. 他旣有許多氣魄才德, 決不但已, 必統御億兆之衆, 人亦自是歸他. 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 及至孔子, 方不然. 然雖不爲帝王, 也閑他不得, 也做出許多事來, 以敎天下後世, 是亦天命也.” 僩(69이후).

대답: 이것을 어찌 알 수 있겠나? 단지 이러이러한 사람이 태어나기만 하면 그는 반드시 억조 백성의 군사가 되니 이것이 천명(天命)이다. 그는 그렇게 많은 기백(氣魄)과 재덕(才德)을 가지고 결코 그만두지 않아서(決不但已)[94] 반드시 억조의 백성을 통치하게 되고 사람들도 자연히 그에게 귀부하게 된다. 삼대(三代) 이전의 성인들의 경우 모두 이와 같았다. 공자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렇지 않게 되었다. 비록 제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한가하게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95] 그는 많은 일을 하여 천하 후세에 가르침을 남겼으니 이 또한 천명이다.

한(僩)의 기록.

  •  14:57 問: “‘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天如何命之?”

질문: '하늘은 반드시 그를 억조(億兆) 백성의 군사(君師)로 명한다'고 했습니다. 하늘은 어떻게 명령합니까?

曰: “只人心歸之, 便是命.”

대답: 그저 사람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곧 명령이다.

問: “孔子如何不得命?”

질문: 공자는 어째서 명을 받지 못했습니까?

曰: “中庸云: ‘大德必得其位’, 孔子卻不得. 氣數之差至此極, 故不能反.” 可學(62때).

대답: '중용'에서 '대덕(大德)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는다'[96]고 했지만, 공자는 얻지 못했다. 기수(氣數)[97]의 차질이[98] 이렇게 극에 달해 돌이킬 수 없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58 問“繼天立極.”

하늘을 계승하여 표준을 세운다(繼天立極)[99]에 관한 질문.

曰: “天只生得許多人物, 與你許多道理. 然天卻自做不得, 所以生[100]得聖人爲之修道立敎, 以敎化百姓, 所謂‘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是也. 蓋天做不得底, 卻須聖人爲他做也.” 僩(69이후).

대답: 하늘은 수많은 사람과 사물을 낳고 그들에게 수많은 도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하늘도 스스로 (지상에서 백성 교화의 작업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을 낳아 도를 닦고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교화하게 한다. 이른바 '천지의 도를 재단(裁成)하고, 천지의 마땅함을 보조한다'[101]는 것이다. 대개 하늘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성인이 하늘을 대신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한(僩)의 기록.

  •  14:59 問: “‘各俛焉以盡其力.’ 下此‘俛’字何謂?”

질문: '각자 고개를 숙이고(俛) 자신의 힘을 다한다.'에서 '면(俛)'[102]자를 쓰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曰: “‘俛’字者, 乃是刺著頭, 只管做將去底意思.” 友仁(69때).

대답: 면(俛)자는 머리를 파묻고[103] 그저 열심히 해나간다는 뜻이다.

우인(友仁)의 기록.

  •  14:60 問: “外有以極其規模之大, 內有以盡其節目之詳.”

대학장구 서문의 '바깥으로는 그 규모[104]의 크기를(規模之大) 최대로 하고, 안으로는 세부 항목의 상세함을 남김없이 한다'에 관한 질문.

曰: “這个須先識得外面一个規模如此大了, 而內做工夫以實之. 所謂規模之大, 凡人爲學, 便當以‘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及‘明明德於天下’爲事, 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 須是志於天下, 所謂‘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也’. 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僩(69이후).

대답: 이것은 먼저 바깥쪽 규모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 안쪽에서의 노력을 통해 그 골조를 채워 넣어야 합니다. 이른바 '규모의 큼'이란, 사람이 학문을 할 때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하며,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추어 머무른다'는 것과 '천하에 명덕을 밝히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마하니[105] 그저 자기 자신만 선하게 하고(獨善其身) 그만두려는 것이겠나? 반드시 천하에 뜻을 두어야 하니, 이른바 '이윤(伊尹)이 지향한 바를 지향하고, 안자(顔子)가 배운 바를 배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의 두 번째 구절에서 '신민(新民)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한(僩)의 기록.

  •  14:61 明德, 新民, 便是節目; 止於至善, 便是規模之大. 道夫(60이후).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은 (대학장구의 서문에서 말한 바) '세부 항목(節目)의 상세함'에 해당하고, 지어지선(止於至善)은 (대학장구의 서문에서 말한 바) '그 규모의 크기(規模之大)'에 해당한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62 仁甫問: “釋氏之學, 何以說爲[106]‘高過於大學而無用?’ ”

인보(仁甫)의 질문: 대학장구 서문에서 어째서 석씨(釋氏)의 학문은 '대학보다 높으나 쓸모가 없다'[107]고 하셨습니까?

曰: “吾儒更著讀書, 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 他便都掃了這个, 他便恁地空空寂寂, 恁地便道事都了. 只是無用. 德行道藝, 藝是一介至末事, 然亦皆有用. 釋氏若將些子事付之, 便都沒奈何.”

대답: 우리 유학은 (그들에 비해) 더욱 책을 읽고, 구체적인 사건과 사물 하나하나에 나아가 도리를 이해한다. 그들은 이걸[108] 모두 일소해버리고는 이렇게 공허하고 고요하게(空空寂寂) 있으면서 이렇게 '일을 다 마쳤다(事都了)'고 말한다. 그저 쓸모가 없을 뿐이다(無用). 덕행(德行)과 도예(道藝)[109]의 경우, 육예(六藝)는 지극히 지엽적인 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역시 모두 쓸모가 있다. 가령 석씨(釋氏)에게 몇 가지 일들을 맡긴다해도 전혀 해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又曰: “古人志道, 據德, 而游於藝: 禮樂射御書數, 數尤爲最末事. 若而今行經界, 則算法亦甚有用. 若時文整篇整卷, 要作何用耶! 徒然壞了許多士子精神.” 賀孫(62이후).

다시 대답: 옛 사람들은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을 굳게 지키며 예(藝)에 노닐었다.[110]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가운데 수는 더욱이 가장 말단의 일이지만 이제 토지를 측량하려면(經界) 산법(算法)은 역시 매우 유용하다. 시문(時文)[111]을 전편 전권(整篇整卷) 모두 가져와도 어디다 쓸 수 있겠나? 아무 의미 없이 수많은 선비들의 정신을 망가뜨렸을 뿐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    經上

경(經)에 관한 조목들 상편(上)

  •  14:63 大學首三句說一箇體統, 用力處卻在致知·格物. 端蒙(50이후).

대학의 첫 세 구절은 하나의 체계(體統)를 설명해준다.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은 치지와 격물이다.

단몽(端蒙)의 기록.

  •  14:64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敬仲(62때).

하늘이 사람과 사물에 부여한 것을 명(命)이라 하고, 사람과 사물이 그렇게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하며,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을 심(心)이라 하고, 하늘로부터 얻어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것을 명덕(明德)이라 한다.[112]

경중(敬仲)의 기록.

<以下明明德.> 

<이 아래로 명명덕에 관한 조목들>

  •  14:65 或問: “明德便是仁義禮智之性否?”

누군가의 질문: 명덕은 곧 인의예지(仁義禮智) 같은 본성입니까?

曰: “便是.”

대답: 그렇다.

  •  14:66 或問: “所謂仁義禮智是性, 明德是主於心而言?”

누군가의 질문: 이른바 인의예지는 본성(性)이고, 명덕(明德)은 마음(心)에 주안점을 두고 말한 것입니까?

曰: “這个道理在心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대답: 이 도리는 마음(心)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투명하여(光明照徹) 조금도 밝지 않은 부분이 없다.

  •  14:67 明德是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명덕이란 전체(全體)의 오묘함(妙)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 이하 여러 세부 항목들은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  14:68 “明明德”, 明只是提撕也. 士毅(미상).

'명명덕(明明德)'에서 (제일 앞쪽의) '명(明)'은 단지 각성시킨다(提撕)[113]는 것이다.

사의(士毅)의 기록.

  •  14:69 學者須是爲己. 聖人敎人, 只在大學第一句“明明德”上. 以此立心, 則如今端己斂容, 亦爲己也; 讀書窮理, 亦爲己也; 做得一件事是實, 亦爲己也. 聖人敎人持敬, 只是須著從這裏說起. 其實若知爲己後, 卽自然著敬. 方子(59이후).

배우는 이는 반드시 자신을 위해(爲己) 배워야 한다. 성인의 가르침은 '대학'의 첫 구절 '명명덕'에 있을 뿐이다. 명명덕을 하겠노라 마음을 먹으면(立心) 지금 자신을 단정히 하고 자세를 가다듬고 있는 것도(端己斂容) 자신을 위한 것(爲己)이며, 책을 읽고 이치를 파고드는(讀書窮理) 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며, 어떤 사안 하나를 성실하게 처리하는 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성인이 경건함을 유지하라고(持敬) 가르친 것도 바로 이 지점[114]에서부터 해설해야만 한다. 사실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것을 알고 나면 자연히 경건해진다.[115]

방자(方子)의 기록. (59세 이후)

  •  14:70 “明明德”乃是爲己工夫. 那个事不是分內事? 明德在人, 非是從外面請入來底. 蓋卿(65때).

'명명덕'은 바로 자신을 위한 공부(爲己)이다. (명덕을 밝히는 것에 관한 한) 어떤 일이 자기 몫의 일(分內事)이 아니겠나? 명덕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다 부탁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다.

개경(蓋卿)의 기록. (65세)

  •  14:71 爲學只“在明明德”一句. 君子存之, 存此而已; 小人去之, 去此而已. 一念竦然, 自覺其非, 便是明之之端. 儒用(70때).

배움은 그저 '명명덕' 한 구절에 있을 뿐이다. '군자는 이를 보존한다'는 것도 명덕을 보존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소인은 이를 버린다'는 것도 명덕을 버린다는 것에 다름아니다.[116]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게 되어 모골이 송연(竦然)한 것이 바로 밝히는(明) 일의 시작이다.

유용(儒用)의 기록. (70세)

  •  14:72 大學“在明明德”一句, 當常常提撕. 能如此, 便有進步處. 蓋其原自此發見. 人只一心爲本. 存得此心, 於事物方知有脈絡貫通處. 季札(47·66때).

'대학'의 '명명덕에 있다'는 한 구절을 늘 유념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진보할 수 있다. 이는 대학의 공부가(其) 본래 마음(此)[117]에서부터 발현되기 때문이다.[118] 사람은 오직 이 한 마음이 뿌리이다(一心爲本). 이 마음을 보존해야(存得此心)[119] 비로소 사건과 사물들에 있어 연결되고 관통하는(脈絡貫通)[120] 지점들을 알 수 있다.

계찰(季札)의 기록. (47세 혹은 66세)

  •  14:73 “在明明德”, 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 常在目前, 始得. 如今都不曾見得. 須是勇猛著起精神, 拔出心肝與它看, 始得! 正如人跌落大水, 浩無津涯, 須是勇猛奮起這身, 要得出來, 始得! 而今都只汎汎聽他流將去.

'명명덕에 있다'에 관해서라면, 이 물건[121]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음을 스스로 목도하고 (그 물건을) 늘 눈 앞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한다[122]. 그런데 지금처럼 다들 (명덕을) 본 적조차 없다면 반드시 용맹하게 정신을 일으켜 (자신의) 심장과 간을 뽑아 들고 (그런 용기를 가지고 명덕을) 보아야 한다(拔出心肝與它看).[123] 마치 사람이 실족하여 큰 물에 빠졌는데 물이 너무 넓어 물가조차 보이지 않을 때 반드시 용맹하게 몸을 일으켜 탈출하려고 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 헌데 지금은 다들 그저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내려가고 있구나.

  •  14:74 或以“明明德”譬之磨鏡.

누군가가 '명명덕'을 거울을 갈고 닦는[124] 것에 비유했다.

曰: “鏡猶磨而後明. 若人之明德, 則未嘗不明. 雖其昏蔽之極, 而其善端之發, 終不可絶. 但當於其所發之端, 而接續光明之, 令其不昧, 則其全體大用可以盡明. 且如人知己德之不明而欲明之. 只這知其不明而欲明之者, 便是明德, 就這裏便明將去.” 僩(69이후).

대답: 거울은 오히려 갈고 닦은 뒤에야 밝아지지만 사람의 명덕은 처음부터 밝지 않았던 적이 없다. 어둡고 가리워짐이 극에 달했다(昏蔽之極)[125] 하더라도 그 마음의 선한 싹이 틔워나오(善端之發)는[126] 일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 그저 그 싹을 틔운 곳에 가서 그것을 이어받아 빛내어(接續光明) 어둡지 않게(不昧) 해주면 마음 본연의 완전한 본체와 위대한 작용(全體大用)을[127] 남김없이 밝힐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자신의 덕이 밝지 않음을 깨닫고 밝히고자 한다면, '밝지 않음을 깨닫고 밝히고자' 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명덕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밝혀 나가는 것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4:75 “明明德”, 如人自云, 天之所與我, 未嘗昏. 只知道不昏, 便不昏矣. 僩(69이후).

'명명덕'은, 예컨대 어떤 사람이 스스로 말하길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은 애초에 어두웠던 적이 없다.'라고 했다고 하자. 그저 어둡지 않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바로 어둡지 않게 된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4:76 “明明德”, 是明此明德, 只見一點明, 便於此明去. 正如人醉醒, 初間少醒, 至於大醒, 亦只是一醒. 學者貴復其初, 至於已到地位, 則不著个“復”字. 可學(62때).

'명명덕'은 이 명덕을 밝히는 것이다. 밝은 지점을 하나만 발견해도 바로 거기서부터 밝혀 나간다. 마치 사람이 술에 취했다가 깨어나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조금 깨고 나중에는 크게 깨지만, 처음이나 나중이나 '깼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배우는 이는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復其初)[128]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런 경지에 이미 도달했으면 '복(復)'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는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4:77 問“明明德”.

'명명덕'에 관한 질문.

曰: “人皆有个明處, 但爲物欲所蔽, 剔撥去了. 只就明處漸明將去. 然須致知·格物, 方有進步處, 識得本來是甚麽物.” 季札(47·66때).

대답: 사람마다 모두 밝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물욕에 가려져 있으므로 그것을 발라내야(剔撥) 한다. 그저 밝은 부분에서부터 점점 밝혀 나가는 것 뿐이다. 그러나 반드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해야만 진전이 있어 이것[129]이것이[130] 본래 어떤 물건[131](本來是甚麽物)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계찰(季札)의 기록. (47세 혹은 66세)

  •  14:78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非義而羞惡, 見孺子入井而惻隱, 見尊賢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如此推之, 極多. 但當因其所發而推廣之. 僩(69이후).

명덕(明德)은 멈췄던 적이 없으며 일상 속에서 무시로 발현한다. 예를 들어,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들고,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고, 존귀하고 현명한 사람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이 들고, 선한 일을 보고 감탄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모두 명덕의 발현이다. 이렇게 미루어 보면 (명덕이 발현한 곳이) 대단히 많다. 다만 이렇게 발현한 곳에서부터 명덕을 미루어 넓혀가야할 뿐이다.

  •  14:79 明德, 謂得之於己, 至明而不昧者也. 如父子則有親, 君臣則有義, 夫婦則有別, 長幼則有序, 朋友則有信, 初未嘗差也. 苟或差焉, 則其所得者昏, 而非固有之明矣. 履孫(65때).

명덕이란 (하늘로부터) 얻어서(得)[132]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는, 지극히 밝아 어둡지 않은 것을 말한다. 예컨대,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애함이 있고, 군신 사이에는 의리가 있으며,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으며, 친구 사이에는 신뢰가 있다.[133] (이런 것들은) 애초에 어그러졌던 적이 없다. 만약 어그러지면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 어두워져서 본연의 밝음이 아니게 될 것이다.[134]

리손(履孫)의 기록. (65세)

  •  14:80 人本來皆具此明德, 德內便有此仁義禮智四者. 只被外物汨沒了不明, 便都壞了. 所以大學之道, 必先明此明德. 若能學, 則能知覺此明德, 常自存得, 便去刮剔, 不爲物欲所蔽. 推而事父孝, 事君忠, 推而齊家·治國·平天下, 皆只此理. 大學一書, 若理會得這一句, 便可迎刃而解. 椿(59때).

사람은 본래 모두 이 명덕을 갖추고 있으며, 이 명덕 안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가 있다. 단, 명덕이 외물(外物)에 깊이 빠져서(汨沒) 밝지 않게 되면 모두 못쓰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대학'의 도는 반드시 이 명덕을 밝히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만약 (대학의 도를) 배울 수 있다면 이 명덕을 지각(知覺)할 수 있다. 이 명덕을 늘 간직할 수 있으면 (명덕에 달라붙어있는) 물욕을 깎아내버려서(刮剔)[135] 그것에 의해 가려지지 않게 된다. 이것을 미루어 부모를 효(孝)로 섬기고 임금을 충(忠)으로 섬기며, 또 미루어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단지 이 이치(理)일 뿐이다.[136] '대학' 한 권은 이 한 구절만 이해하면 포정(庖丁)의 칼에 닿은 소고기처럼 쉽게 풀린다(迎刃而解)[137].

춘(椿)의 기록. (59세)

  •  14:81 明德, 也且就切近易見處理會, 也且慢慢自見得. 如何一日便都要識得! 如"出必是告, 反必是面", "昏定晨省", 必是昏定晨省, 這易見. “徐行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者謂之不弟”, 這也易見, 有甚不分明. 如“九族旣睦”, 是堯一家之明德; “百姓昭明”, 是堯一國之明德; “黎民於變時雍”, 是堯天下之明德. 如“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是不孝; 到能"昏定晨省", "冬溫夏凊", 可以爲孝. 然而“從父之令”, 今看孔子說, 卻是不孝. 須是知父之命當從, 也有不可從處. 蓋“與其得罪於鄕黨州閭, 甯熟諫”. “諭父母於道”, 方是孝. 賀孫(62이후).

명덕은 우선 쉽게 알 수 있는(易見), 가깝고 익숙한(切近) 지점에서 이해하고, 천천히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어떻게 하루 아침에 모두 알 수 있겠나? '외출할 때 반드시 부모님께 알리고, 귀가하면 반드시 얼굴을 보여야 한다(出必是告, 反必是面)'[138], '저녁에는 부모님의 잠자리를 봐 드리고, 새벽에는 부모님의 안부를 살펴야 한다(昏定晨省)'[139] 같은 경우, 반드시 혼정신성(昏定晨省)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易見) 지점이다. '천천히 걸어 어른을 뒤따르는 것이 공손함(弟)이라하고, 빠르게 걸어 어른을 앞서는 것이 불손함(不弟)이라한다'[140]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는(易見) 지점이니, (이런 데서) 불분명할 것이 뭐가 있는가? '구족(九族)이 이미 화목하다(九族旣睦)'는 것은 요(堯) 임금 일가의 명덕이다. '백성이 밝게 빛났다(百姓昭明)'는 것은 요 임금 일국의 명덕이다. '만민이, 오! 변화하여 화평하였다'는 것은 요 임금 천하의 명덕이다.[141] '바둑과 주사위놀음을 하고 음주를 좋아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음'[142]은 불효이다. '저녁에는 부모님의 잠자리를 봐 드리고(昏定晨省)',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릴(冬溫夏凊)'[143] 수 있으면 효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을 따름'[144]은 지금 공자가 말한 것을 보면 오히려 불효이다. 아버지의 명령은 응당 따라야 하는 경우도 있고 따라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가 이웃과 마을(鄕黨州閭)에 죄를 짓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꾸준히 은근하게 간언하는(熟諫)[145] 편이 낫'고,[146] '부모를 타일러 도(道)로 이끌어야'[147] 효(孝)이기 때문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  14:82 曾興宗問: “如何是‘明明德’?”

증흥종(曾興宗)의 질문: '명명덕'이란 무엇입니까?

曰: “明德是自家心中具許多道理在這裏. 本是个明底物事, 初無暗昧, 人得之則爲德. 如惻隱·羞惡·辭讓·是非, 是從自家心裏出來, 觸著那物, 便是那个物出來, 何嘗不明. 緣爲物欲所蔽, 故其明易昏. 如鏡本明, 被外物點汙, 則不明了. 少間磨起, 則其明又能照物.”

대답: 명덕(明德)이란 자신의 여기 이 마음 속에 갖추고 있는 여러 도리이다. 본래 밝은 물건이어서 애초에 어두웠던 적이 없었으며, 사람이 그것을 (하늘로부터) 얻으면(得) 덕(德)이 된다.[148]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등은 마음 속에서 나온다. (마치 거울이 사물을 반사하는 것처럼) 어떤 물건이 (마음에) 접촉하면 (마음이) 그 물건을 내놓으니 (마음이) 언제 한 번이라도 밝지(明)[149] 않았었던가? 물욕에 가려져서 그 밝은 성질이 쉽게 어두워지는 것이다. 거울이 본래 밝지만 외부의 물질에 의해 더럽혀지면 밝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조금만 갈고 닦아내면(磨起)[150] 그 밝음이 다시 사물을 반사할 수 있다.

又云: “人心惟定則明. 所謂定者, 非是定於這裏, 全不修習, 待他自明. 惟是定後, 卻好去學. 看來看去, 久後自然徹.”

다시 대답: 사람의 마음은 안정되어야만 밝다(定則明)[151]. 이른바 '정(定)'이란, 전혀 수양하지도 학습하지도 않으면서 마음이 저 혼자 저절로 밝아질 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안정된 후에야 비로소 배우기에 적합해지니, 오래도록 이리저리 보다 보면(看來看去) 자연히 꿰뚫게 된다.

又有人問: “自覺胸中甚昧.”

또 다른 사람의 질문: 제 가슴 속이 매우 어두움을 느낍니다.

曰: “這明德亦不甚昧. 如適來說惻隱·羞惡·辭遜·是非等, 此是心中元有此等物. 發而爲惻隱, 這便是仁; 發而爲羞惡, 這便是義; 發而爲辭遜·是非, 便是禮·智. 看來這个亦不是甚昧, 但恐於義理差互處有似是而非者, 未能分別耳. 且如冬溫夏凊爲孝, 人能冬溫夏凊, 這便是孝. 至如子從父之令, 本似孝, 孔子卻以爲不孝. 與其得罪於鄕閭, 不若且諫父之過, 使不陷於不義, 這處方是孝. 恐似此處, 未能大故分別得出, 方昧. 且如齊宣王見牛之觳觫, 便有不忍之心, 欲以羊易之. 這便見惻隱處, 只是見不完全. 及到‘興甲兵, 危士臣’處, 便欲快意爲之. 是見不精確, 不能推愛牛之心而愛百姓. 只是心中所見所好如此, 且恁地做去. 又如胡侍郎讀史管見, 其爲文字與所見處甚好, 到他自做處全相反. 不知是如何, 卻似是兩人做事一般, 前日所見是一人, 今日所行又是一人. 是見不眞確, 致得如此.” 卓(미상).

대답: 역시 이 명덕은 그리 어둡지 않다. 방금(適來) 말한 것처럼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등은 우리 마음 속에 본래 있는 것들이다. 발현하여 측은지심이 되는 것이 인(仁)이고, 발현하여 수오지심이 되는 것이 의(義)이며, 발현하여 사양(辭遜)지심[152]과 시비지심이 되는 것이 예(禮)와 지(智)이다. 생각해보면(看來) 역시 이것들은 그리 어둡지 않다. 다만 의리가 섞여서 충돌하는(差互)[153] 지점에서는 옳은 듯하지만 사실은 잘못된 것들이 있는데 그런 걸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할까 걱정될 뿐이다. 예컨대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冬溫夏凊)'[154] 것이 효가 되는 것 같은 경우, 사람이 동온하청(冬溫夏凊)할 수 있으면 이는 효이다. 그러나 자식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일 같으면 본래 효인 것 같지만 공자는 반대로 불효라고 여겼다. '아버지가 이웃과 마을에 죄를 짓게 되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잘못을 간쟁하여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함이 나'으니, 이렇게 해야 효이다.[155] 이러한 경우들에서 제대로 분별해내지 못하여 어두워질까 걱정이다. 예를 들어 제선왕(齊宣王)은 소를 보고 불인지심(不忍之心)[156]이 들어 양으로 바꾸려 하였다. 여기가 (제선왕이 자신의) 측은지심을 본 곳이다. 다만 완전하게 보지 못했을 뿐이다. 제선왕이 '전쟁을 일으켜 병사와 신하를 위태롭게 하려(興甲兵, 危士臣)'[157]는 곳의 경우 그가 자기 마음에 통쾌하고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마음의 측은지심을) 본 것이 정밀하고 확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에 대한 사랑을 미루어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하지 못한 것이다. 그저 마음 속에서 본 것[158]과 좋아하는 것[159]이 이와 같기에 이런 식으로 행동한 것이다. 또 호시랑(胡侍郎)[160]이 지은 독사관규(讀史管見)같은 경우 그 문장력과 (의리를) 본 것이 매우 좋은데 그가 실제로 한 일들은 전혀 반대이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마치 서로 다른 두 사람인 것 같다. 어제 (의리를) 본(見) 사람이 하나 있고 오늘 행동한 사람이 별개로 하나 있는 꼴이다. 이는 (의리를) 본(見) 것이 참되고 확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탁(卓)의 기록. (시기 미상)

  •  14:83 或問: “‘明明德’, 是於靜中本心發見, 學者因其發見處從而窮究之否?”

누군가의 질문: '명명덕'이란 고요함(靜) 속에서 본래의 마음(本心)이 발현될 때 배우는 이가 그 발현된 곳에서부터 (이치를) 파고드는(窮究) 것 아닙니까?

曰: “不特是靜, 雖動中亦發見. 孟子將孺子將入井處來明這道理. 蓋赤子入井, 人所共見, 能於此發端處推明, 便是明.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理不具在這裏. 何緣有不明? 爲是氣稟之偏, 又爲物欲所亂. 如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 四肢之於安佚, 所以不明. 然而其德本是至明物事, 終是遮不得, 必有時發見. 便敎至惡之人, 亦時乎有善念之發. 學者便當因其明處下工夫, 一向明將去. 致知·格物, 皆是事也. 且如今人做得一件事不是, 有時都不知, 便是昏處; 然有時知得不是, 這个便是明處. 孟子發明赤子入井. 蓋赤子入井出於倉猝, 人都主張不得, 見之者莫不有怵惕惻隱之心.”

대답: 고요할(靜) 때 뿐만아니라 움직임(動) 속에서도 발현된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려는 상황을 가지고 이 도리를 밝혔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사람들 모두가 목격한 것이지만 (측은한 마음이) 싹을 틔운 바로 이 지점에서(於此發端處) 미루어 밝혀 나갈 수 있으면 그것이 곧 (명덕을) 밝히는 것(明)이다.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영묘(靈)하니 무슨 일인들 알지 못할 것이며, 무슨 일인들 깨치지 못할 것이며, 무슨 도리인들 이 안에 갖추고 있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밝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인가? 기질(氣稟)[161]이 치우쳤기 때문이고, 물욕에 의해 혼란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눈이 색을 보려하고, 귀가 소리를 들으려하고, 입이 맛을 보려하고, 코가 냄새를 맡으려하며, 사지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162] (명덕이) 밝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덕은 본래 지극히 밝은 물건인지라 끝내 가릴 수 없으므로 반드시 발현하는 때가 있다. 가령(便敎) 지극히 악한 사람이라도 역시 가끔은 선한 생각이 틔워나온다. 배우는 이는 바로 그 밝은 지점에 힘을 쏟아서 쭉 밝혀나가야 한다.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이 모두 이런 작업이다. 예를 들어 이제 어떤 사람이 일 하나를 잘못해 놓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 거기가 바로 어두운(昏) 지점이다. 하지만 그 잘못을 알아차리는 경우에는 거기가 바로 밝은(明) 지점이다. 맹자가 우물에 빠지려는 아기를 가지고 (도리를) 밝힌 까닭은, 아기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창졸간의 일이라서 그것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어쩔 수 없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怵惕惻隱之心)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又曰: “人心莫不有知, 所以不知者, 但氣稟有偏, 故知之有不能盡. 所謂致知者, 只是敎他展開使盡.”

다시 대답: (본래) 사람의 마음은 (도리에 대한) 앎(知)이 없는 경우가 없는데도 (현실에서 종종 도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기질(氣稟)의 치우침 때문이다. 그래서 앎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치지(致知)란 것은 단지 그 앎을(他) 활짝 펼쳐 남김없게 하는 것이다.

又曰: “看大學, 先將經文看敎貫通. 如看或問, 須全段相參酌, 看敎他貫通, 如看了隻手, 將起便有五指頭, 始得. 今看或問, 只逐些子看, 都不貫通, 如何得.” 子蒙(미상).

다시 대답: '대학'을 볼 때, 먼저 경문(經文)을 읽어 연결되게(貫通) 해야 한다. '대학혹문'을 볼 때에도 전체 단락들이 서로 상호참조가 되어 연결되게(貫通)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쪽 손을 볼 때 다섯 손가락이 모두 보여야 되는 것과 같다. 이제 '혹문'을 볼 때 그저 조목들을 순서대로 읽기만 하여(逐些子看) 전혀 연결되지(貫通) 않아서야 되겠는가?

자몽(子蒙)의 기록. (시기 미상)

  •  14:84 或問“明明德”云云.

누군가가'명명덕'은 이러이러하다고 말하며 질문.[163][164]

曰: “不消如此說, 他那注得自分曉了. 只要你實去體察, 行之於身. 須是眞个明得. 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 須是眞个不昧, 具得衆理, 應得萬事. 只恁地說, 不濟得事.”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그대가 말한) 그점은 내 주석을 보면 자연히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실제로 몸소 관찰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밝혀야 한다. 이 명덕은 어째서 밝은 것이냐느니, 어떻게 해야 그 허령불매(虛靈不昧)를 이해하는(了得) 것이냐느니 ... 모름지기 진정으로 어둡지 않아야(不昧) 여러 도리를 갖추어 만사에 대응할 수 있다. 그저 이렇게 말로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165]

又曰: “如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五者, 皆‘明明德’事. 格物·致知, 便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便是要行得分明. 若是格物·致知有所未盡, 便是知得這明德未分明; 意未盡誠, 便是這德有所未明; 心有不正, 則德有所未明; 身有不修, 則德有所未明. 須是意不可有頃刻之不誠, 心不可有頃刻之不正, 身不可有頃刻之不修, 這明德方常明.”

다시 대답: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다섯 가지 같은 경우 모두 '명명덕'의 일이다. 격물과 치지는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고, 성의, 정심, 수신은 분명하게 행하려는 것이다. 만약 격물과 치지에 미진한 점이 있다면 이는 명덕에 대한 앎이 아직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생각(意)이 완전히 진실하지 않으면 이 덕에 아직 밝히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마음(心)이 바르지 않으면 덕에 아직 밝히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몸이 닦이지 않았으면 덕에 아직 밝히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생각은 잠시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마음은 잠시라도 바르지 않으면 안 되며, 몸은 잠시라도 닦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만 이 명덕이 늘 밝다.

問: “所謂明德工夫, 也只在讀書上?”

질문: 이른바 명덕을 밝히는 노력은 그저 독서에만 있습니까?

曰: “固是在讀書上. 然亦不專是讀書, 事上也要理會. 書之所載者, 固要逐件理會. 也有書所不載, 而事上合當理會者; 也有古所未有底事, 而今之所有當理會者極多端.” 僩(69이후).

대답: 물론 독서에 있다. 그러나 역시 독서에만 국한되지는 않고, 현실의 사태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책에 실린 내용은 물론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책에 실리지 않았으나 실제 사태 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고대에는 없었던 일인데 지금은 있어서 응당 이해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이런 경우가 극히 다양하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燾錄別出.>

<도(燾)의 기록은 별개로 나온다.>[166]

  •  14:85 問: “或謂‘虛靈不昧’, 是精靈底物事; ‘具衆理’, 是精靈中有許多條理; ‘應萬事’, 是那條理發見出來底.”

질문: 누군가가 말하길 '허령불매(虛靈不昧)'는 정채롭고 영묘한(精靈) 물건이고, '구중리(具衆理)'는 그 정채롭고 영묘한 가운데 많은 법칙들(條理)이 있다는 것이며, '응만사(應萬事)'는 그 법칙들이 발현하여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曰: “不消如此解說. 但要識得這明德是甚物事, 便切身做工夫, 去其氣稟物欲之蔽. 能存得自家個虛靈不昧之心, 足以具衆理, 可以應萬事, 便是明得自家明德了. 若只是解說‘虛靈不昧’是如何, ‘具衆理’是如何, ‘應萬事’又是如何, 卻濟得甚事!”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핵심은 이 명덕이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자기 자신에게 밀접하게 관련지어(切身) 노력하여 기질(氣稟)과 물욕(物欲)이 가리고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자신의 허령불매(虛靈不昧)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충분히 여러 가지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대응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하면 바로 자신의 명덕을 밝힌 것이다. 만약 그저 '허령불매'는 이러이러하고, '구중리'는 이러이러하고, '응만사'는 또 이러이러하다고 해설하기만 한다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나?

又問: “明之之功, 莫須讀書爲要否?”

재질문: 명덕을 밝히는 노력으로는 혹시(莫須)[167] 독서가 핵심인 것 아닙니까?

曰: “固是要讀書. 然書上有底, 便可就書理會; 若書上無底, 便著就事上理會; 若古時無底, 便著就而今理會. 蓋所謂明德者, 只是一個光明底物事. 如人與我一把火, 將此火照物, 則無不燭. 自家若滅息著, 便是暗了明德; 能吹得著時, 又是明其明德. 所謂明之者,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 皆明之之事, 五者不可闕一. 若闕一, 則德有所不明. 蓋致知·格物, 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是要行得分明. 然旣明其明德, 又要功夫無間斷, 使無時而不明, 方得. 若知有一之不盡, 物有一之未窮, 意有頃刻之不誠, 心有頃刻之不正, 身有頃刻之不修, 則明德又暗了. 惟知無不盡, 物無不格, 意無不誠, 心無不正, 身無不修, 卽是盡明明德之功夫也.” 燾(70때).

대답: 물론 독서해야 한다. 그러나 책에 있는 것은 책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책에 없는 것은 실제 사태에 나아가 이해해야 하고,[168] 고대에 없었던 것은 지금의 상황에 나아가 이해해야 한다. 이른바 명덕이란 단지 하나의 밝은 물건이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횃불을 하나[169] 주었고, 내가 그 불을 가지고 사물을 비추면 비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 상황과 같다. 자기가 그 불을 꺼뜨리면 명덕이 어두워지고, 훅 불어 불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 때 이 명덕은 다시 밝아지는 것이다. 이른바 밝힌다는 것은 치지(致知), 격물(格物),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모두가 밝히는 일이다.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덕에 밝지 않은 곳이 남는다. 치지와 격물은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고, 성의, 정심, 수신은 분명하게 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힌 후에도 또 중단 없이 노력하여 그것이 영원히 어두워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김없이 다하지 못한 앎이 하나라도 있거나, 파고들지 못한 사태와 사물이 하나라도 있거나, 생각(意)이 잠시라도 진실하지 못하거나, 마음(心)이 잠시라도 바르지 않거나, 몸이 잠시라도 닦이지 않으면 명덕은 다시 어두워져버린다. 오로지 앎에 남김이 없고, 파고들지 못한 사태와 사물이 없고, 생각에 진실하지 못한 지점이 없고, 마음에 바르지 않음이 없으며, 몸이 닦이지 않은 때가 없을 때라야 바로 명명덕의 노력을 완수한 것이다.

도(燾)의 기록. (70세)

  •  14:86 問: “大學注言: ‘其體虛靈而不昧; 其用鑒照而不遺.’ 此二句是說心, 說德?”

질문: 대학의 주석에서[170] '그것의[171] 본체(體)는 텅 비고 영묘(虛靈)하여 어둡지 않다. 그것의 작용(用)은 (사물의 상을) 반사하여(鑒照)[172] 빠뜨림이 없다'[173]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은 마음(心)에 관한 설명입니까? (밝은) 덕(德)에 관한 설명입니까?

曰: “心, 德皆在其中, 更子細看.”

대답: 마음도 덕도 다 그 안에 있다. 더 자세히 보라.

又問: “德是心中之理否?”

재질문: 덕은 마음 속의 이치입니까?

曰: “便是心中許多道理, 光明鑒照, 毫髮不差.” 㝢(61이후).

대답: 마음 속의 여러 도리가 환하게 빛나고 (사물의 상을) 반사하여 털끝만큼의 오차도 없다는 것이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按: 注是舊本.

편자주(按)[174]: 여기서 말한 '대학의 주석'은 대학장구의 예전 판본이다.

  •  14:87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禪家則但以"虛靈不昧"者爲性, 而無"以具衆理"以下之事. 僩(69이후).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어 허령불매(虛靈不昧)하고 여러 도리를 갖추어 만사에 대응하는 것이다.'[175] 선종(禪宗)에서는 단지 '텅비고 영묘하여 어둡지 않다(虛靈不昧)'만을 본성(性)으로 여길 뿐, '여러 도리를 갖추어 만사에 대응'하는 부분이 없다.[176]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4:88 問: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是如何?”

질문: '배우는 이는 그것이[177] 발현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끝내 그것을[178] 밝혀야 한다'[179]는 것은 무엇입니까?

曰: “人固有理會得處, 如孝於親, 友於弟; 如水之必寒, 火之必熱, 不可謂他不知. 但須去致極其知, 因那理會得底, 推之於理會不得底, 自淺以至深, 自近以至遠.” 대답: 사람은 누구나 본래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고 물은 차갑고 불은 뜨겁다는 것 등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바로 그 앎을 지극히 해야 할 뿐이다. 이미 이해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해하지 못한 것까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밀고 나아가야 한다.

又曰: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廣(65이후).

다시 대답: 이미 아는 이치에서 시작하여 더 깊이 파고들어 그 극한까지 도달하기를 추구하라.

광(廣)의 기록. (65세 이후)

  •  14:89 問: “‘大學之道, 在明明德’. 此‘明德’, 莫是‘天生德於予’之‘德’?”

질문: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에서 이 '명덕'이 혹시 '하늘이 나에게 준 덕(天生德於予)'[180]의 그 '덕' 아닙니까?

曰: “莫如此問, 只理會明德是我身上甚麽物事. 某若理會不得, 便應公‘是“天生德於予”之“德”?’, 公便兩下都理會不得. 且只就身上理會, 莫又引一句來問. 如此, 只是紙上去討.”

대답: 그런 식으로 질문하지 말라. 다만 명덕이 자기 자신에게 있어 무슨 물건인지 이해하라. 만약 내가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그대의 '하늘이 나에게 준 덕의 그 덕 아닙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버렸다면 그대는 양쪽[181] 모두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선 자기 일신상에서 이해해보고, 더는 다른 문장을 끌고와서 질문하지 말라. 그런 식으로 질문하는 것은 단지 종이 위에서 (답을) 찾는 것일 뿐이다.

又曰: “此明德是天之予我者, 莫令汙穢, 當常常有以明之.” 驤(60·65때).

다시 대답: 이 명덕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므로 더럽히지 말고 항상 밝게 해야 한다.

양(驤)의 기록 (60세 혹은 65세)

  •  14:90 問: “‘明明德’意思, 以平旦驗之, 亦見得於天者未嘗不明.”

질문: '명명덕'의 의미를 새벽녘에[182] 실증해보면 역시 하늘로부터 온 것으로 밝지 않은 적이 없었음 알 수 있습니다.

曰: “不要如此看. 且就明德上說, 如何又引別意思證? 讀書最不要如此.”

대답: 그렇게 보아선 안 된다. 명덕만 가지고서 말할 것이지 왜 다른 의미를 끌어와 실증하는가? 독서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賀孫遂就明德上推說.

내가(賀孫) 마침내 명덕만 가지고서 미루어 나가며 설명했다

曰: “須是更仔細, 將心體驗. 不然, 皆是閑說.” 賀孫(62이후).

선생의 대답: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자기 마음을 가지고 실제로 검증해야 한다. 그렇게 검증하지 않으면 모두 한가한 소리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4:91 傅敬子說“明明德”.

부경자(傅敬子)가 '명명덕'을 해설했다.

曰: “大綱也是如此. 只是說得恁地孤單, 也不得. 且去子細看. 聖人說這三句, 也且大槪恁地說, 到下面方說平天下至格物八者, 便是明德新民底工夫. 就此八者理會得透徹, 明德·新民都在這裏. 而今且去子細看, 都未要把自家言語意思去攙他底. 公說胸中有箇分曉底, 少間捉摸不著, 私意便從這裏生, 便去穿鑿. 而今且去熟看那解, 看得細字分曉了, 便曉得大字, 便與道理相近. 道理在那無字處自然見得. 而今且說格物, 這箇事理[183], 當初甚處得來?如今如何安頓它?逐一只是虛心去看萬物之理, 看日用常行之理, 看聖賢所言之理.” 蘷.[184]

대답: 큰 줄기(大綱)는 그렇다. 단 그렇게 (구체성을 결여하고) 공허하게(孤單)[185] 말해서는 안 된다. 우선 더 자세히 보아라. 성인이 이 세 구절[186]을 가지고 우선 큰 줄기가 이러이러함을 설명하였다. 그 아래에 가서 설명한 '평천하'부터 '격물'까지 여덟 조목은 곧 '명덕'과 '신민'의 실천(工夫)이다. 이 여덟 조목을 투철하게 이해하면 명덕과 신민은 모두 그 안에 있다. 이제 한 번 자세히 보라. 아직은 조금도 자신의 말과 생각을 끌어와서 경전에다 섞지 말라. 그대는 가슴속에 분명해진 것이 있다고 하지만, 잠시라도 붙잡은(捉摸) 것을 놓쳐버리면 사사로운 생각이(私意) 바로 (분명해졌다고 생각한) 거기서부터 생겨나서 천착(穿鑿)하게 되어버린다. 이제 우선 주석[187]을 자세히 보라. 작은 글자가[188] 분명해지면 큰 글자가[189] 분명해지고 도리에 가까워진다. 도리는 저 글자 없는 곳에서[190] 자연히 알게 된다. 이제 격물을 가지고 말하자면[191] 이 사리(事理)는 애초에 어디서 얻었나? (얻었으면) 이제 어디다 두어야 하나? 하나하나 마음을 비우고 만물의 이치를 보라. 일상 속에서 늘 실천하고 있는 이치[192]를 보라. 성현이 말한 이치를 보라.

기손(蘷)의 기록. (68세 이후)

  •  14:92 明德, 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在新民”, 明德而後能新民. 德明(44이후).

'명덕'이란, (우리가) 본래 이 밝은 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193] 이 선량한 앎(良知)과 선량한 능력(良能)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요[194] 다만 사욕(私欲)에 가려졌기 때문에 어두워졌을 뿐이다. 이른바 '명명덕'은 그것을 (다시) 밝히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거울은 본래 밝은 것이지만[195] 먼지에 가려서 어두워졌기 때문에 비추지 못하는 것이다. 먼지와 때를 갈아내고 닦아낸 뒤에야 거울은 다시 밝아진다. (삼강령 가운데 두 번째인) '신민(新民)에 있다'란, 명덕을 밝힌 후에야 백성을 새롭게할 수 있는 것이다.

<以下明德新民.>

<이 아래로는 명덕과 신민에 관한 조목들>

  •  14:93 或問: “明德新民, 還須自家德十分明後, 方可去新民?”

누군가의 질문: 명덕과 신민의 경우, 반드시 자신의 덕을 완전히 밝힌 후에야 백성을 새롭게할 수 있는 것입니까?

曰: “不是自家德未明, 便都不管著別人, 又不是硬要去新他. 若大段新民, 須是德十分明, 方能如此. 若小小效驗, 自是自家這裏如此, 他人便自觀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是如此.” 子蒙(미상).

대답: 자신의 덕이 밝아지기 전에는 다른 사람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硬) 백성을 새롭게하라는 것도 아니다. 만약 대규모로 백성을 새롭게 하려면 반드시 덕이 100% 밝아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소소한 효험의 경우, 자신의 여기가 이러이러하면[196]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자연히 감화된다(觀感). '한 집안이 인하면 그 나라 전체에서 인이 흥하고, 한 집안이 겸양하면 그 나라 전체에서 겸양이 흥한다'[197]는 것은 원래 그러한 것이다.

자몽(子蒙)의 기록. (미상)

  •  14:94 問: “明德新民, 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 卻又在它?”

질문: 명덕과 신민의 경우, 나에게 달린 것이야 내가 새롭게 할 수 있겠지만 백성이 자기들의 명덕을 밝히는 것은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달린 것 아닙니까?

曰: “雖說是明己德, 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 可知.” 㝢(61이후). 

대답: 비록 자신의 덕을 밝히고 백성의 덕을 새롭게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뜻은 양자를 연결하여 보아야 한다.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明明德於天下)'[198]고 했고 '자신을 새롭게함으로써 백성을 새롭게한다'[199]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200]

  •  14:95 蜚卿問: “新民, 莫是‘修道之謂敎’, 有以新之否?”

비경의 질문: 신민(新民)이란, 혹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201]를 가지고 새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曰: “‘道之以德’, 是‘明明德’; ‘齊之以禮’, 是以禮新民, 也是‘修道之謂敎’. 有禮樂·法度·政刑, 使之去舊汙也.” 驤(60·65때).

대답: '덕으로 인도하는 것'[202]은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며, '예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203]은 예를 가지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악, 법도, 형정을 두어 백성들이 기왕의 오염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양(驤)의 기록. (60세 혹은 65세)

  •  14:96 至善, 只是十分是處. 賀孫(62이후).

지선(至善)은 100% 옳은 지점이다.

<以下止至善.>

<이 밑으로 지어지선에 관한 이야기>

  •  14:97 至善, 猶今人言極好. 方子(59이후).

지선(至善)은 요즘 말로 '최고로 좋다(極好)' 같은 것이다.

  •  14:98 凡曰善者, 固是好. 然方是好事, 未是極好處. 必到極處, 便是道理十分盡頭, 無一毫不盡, 故曰至善. 僩(69이후).

대개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 하지만 간신히 좋은 것[204]이지 아직 최고로 좋은 지점은 아니다. 반드시 최고로 좋은 지점에 도달해야 도리가 털끝만큼도 남김 없이 100% 완전해진다[205]. 그래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  14:99 至善是極好處. 且如孝: 冬溫夏凊, 昏定晨省, 雖然是孝底事, 然須是能‘聽於無聲, 視於無形’, 方始是盡得所謂孝. 履孫(65때).

지선(至善)은 최고로 좋은 지점이다. 예컨대 효(孝)같은 경우 '겨울에 따숩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살피고 문안하는 것'[206]이야 물론 효행이긴 하지만 반드시 '부모님 안계신 곳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일 지경(聽於無聲, 視於無形)'[207] 이어야 소위 효를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  14:100 至善是个最好處. 若十件事做得九件是, 一件不盡, 亦不是至善. 震(65때).

지선(至善)은 가장 좋은 지점이다.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잘 하고 한 건을 미진하게 하면 역시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다.

  •  14:101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德明(44이후).

(지어지선에는) '머물다(止)'라는 글자와 '지극하다(至)'라는 글자가 있으니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모든 경우 최선(極)을 다한다'[208]고 하였다.

  •  14:102 善, 須是至善始得. 如通書“純粹至善”, 亦是. 泳(66때).

선은 지선이어야만 한다. 통서(通書)의 '순수지선(純粹至善)'도 같은 뜻이다.[209]

  •  14:103 問: “‘必至於是而不遷’, 如何?”

질문: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210]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至其地, 則求其至; 旣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它也.” 德明(44이후).

대답: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지점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그 지점에 이른 뒤에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서는 안 된다.

  •  14:104 問: “‘止於至善’, 向承敎, 以爲君止於仁, 臣止於敬, 各止其所而行其所止之道. 知此而能定. 今日先生語竇文卿, 又云: ‘“坐如尸”, 坐時止也; “立如齊”, 立時止也.’ 豈以自君臣父子推之於萬事, 無不各有其止?”

질문: '지어지선'은 저번에 가르쳐주시기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 각각 (최선의) 자리에 머물러 그 머문 바 도리를 실천한다.이 것(머물 자리)을 알면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두문경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 "시동(尸童)[211]처럼 앉으라"는 것은 앉아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요 "제사 모시듯 서 있으라"[212]는 것은 서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세상 만사로 미루어 보면 각각의 사태에 최선의 머물 지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까?

曰: “固然.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子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君與臣, 是所止之處; 禮與忠, 是其所止之善. 又如‘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之屬, 無不皆然.” 德明(44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노나라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고 하였다.[213] '임금'과 '신하'는 멈춘 지점이다. '예'와 '충'은 머물러야 할 최선이다. 또 '볼 때는 밝게 보고자 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자 하고 낯빛은 부드럽게 하고자 하고 용모는 공손히 하고자 한다'는 등이 모두 그러하다.[214]


  •  14:105 問至善.

지선(至善)에 대하여 물었다.

先生云: “事理當然之極也.”

선생의 대답: 사리상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恐與伊川說‘艮其止, 止其所也’之義一同. 謂有物必有則, 如父止於慈, 子止於孝, 君止於仁, 臣止於敬, 萬物庶事莫不各有其所. 得其所則安, 失其所則悖. 所謂‘止其所’者, 卽止於至善之地也.”

이천이 말한 '간기지(艮其止)라 함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215]와 뜻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건/사물이 있으면 그 사건/사물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에 머물고 신하는 경에 머무는 등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자기가 머물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집니다. 이른바 '제자리에 머문다'라는 것은 최선의 자리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曰: “只是要如此.” 卓(미상).

대답: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

  •  14:106 或問: “何謂明德?”

누군가의 질문: 무엇을 명덕이라 합니까?

曰: “我之所得以生者, 有許多道理在裏, 其光明處, 乃所謂明德也. ‘明明德’者, 是直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대답: 우리가 그것을 얻어서 (그 덕분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수많은 도리가 그 안에 있어 밝게 빛나는 곳, 그것이 이른바 명덕이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전체(全體)의 묘(妙)를 직설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아래의 여러 절목들[216]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又問: “旣曰明德, 又曰至善, 何也?”

재질문: 이미 명덕이라고 했으면서 다시 지선(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明得一分, 便有一分; 明得十分, 便有十分; 明得二十分, 乃是極至處也.”

대답: 10퍼센트를 밝히면 10퍼센트를 얻고 100퍼센트를 밝히면 100퍼센트를 얻는다. 200퍼센트 밝힌 것이 바로 지극한 지점이다.

又曰: “明德是下手做, 至善是行到極處.”

다시 대답: 명덕은 착수한 것이고 지선은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又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於那極至處.” 銖(67이후).

다시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머물러야 한다.

<以下明德止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07 大學只前面三句是綱領. 如“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此良心也. 良心便是明德, 止是事事各有个止處. 如“坐如尸, 立如齊”, 坐立上須得如此, 方止得. 又如“視思明”以下, 皆“止於至善”之意. 大學須自格物入, 格物從敬入最好. 只敬, 便能格物. 敬是個瑩徹底物事. 今人卻塊坐了, 相似昏倦, 要須提撕著. 提撕便敬; 昏倦便是肆, 肆便不敬. 德明(44이후).

대학은 앞쪽 세 구문이 강령(綱領)이다. 예컨대 '어른 손 잡고 다닐 나이의 어린 아이 중에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자라고 나서는 자신의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217]는 것은 착한 마음(良心)이다. 착한 마음이 곧 명덕(明德)이고, 머무르다(止)는 것은 사사건건 머무를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재계(齊戒)한 것 처럼'[218]의 경우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만 머무를(止) 수 있다.[219] 또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이하(의 아홉 항목의 '생각하며')는 모두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220] 대학은 격물(格物)[221]로 들어가야 하고[222] 격물은 경(敬)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223] '경'하면 격물할 수 있다. 경은 형철(瑩徹: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뚱하니 앉아[224] 흐리멍텅(昏倦)하다. (그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깨어있어야(提撕) 한다. 깨어있는 것이 곧 경이다. 흐리멍텅하면 사(肆)[225]이다. 사(肆)는 경(敬)의 정반대이다.

  •  14:108 問: “明德·至善, 莫是一个否?”

질문: 명덕과 지선은 하나 아닙니까?

曰: “至善是明德中有此極至處. 如君止於仁, 臣止於敬, 父止於慈, 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此所謂‘在止於至善’. 只是又當知如何而爲止於仁, 如何而止於敬, 如何而止於慈孝, 與國人交之信. 這裏便用究竟一个下工夫處.”

대답: 지선은 명덕 안에 있는 지극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아비는 자(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은 신(信)에 머무는 등이 이른바 '지선에 머무는 데 있다'이다. 다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인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경(敬)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慈)나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신(信)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곳이 결국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이다.

景紹曰: “止, 莫是止於此而不過否?”

경소의 말: 지(止)는 그 지점에 멈추고 지나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曰: “固是. 過與不及, 皆不濟事. 但仁敬慈孝, 誰能到得這裏? 聞有不及者矣, 未聞有過於此者也. 如舜之命契, 不過是欲使‘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只是此五者. 至於後來聖賢千言萬語, 只是欲明此而已. 這个道理, 本是天之所以與我者, 不爲聖賢而有餘, 不爲愚不肖而不足. 但其間節目, 須當講學以明之, 此所以讀聖賢之書, 須當知他下工夫處. 今人只據他說一兩字, 便認以爲聖賢之所以爲聖賢者止此而已, 都不窮究著實, 殊不濟事. 且如論語相似: 讀‘學而時習之’, 須求其所謂學者如何?如何謂之時習?旣時習, 如何便能說?‘有朋自遠方來’, 朋友因甚而來自遠方? 我又何自而樂? 須著一一與他考究. 似此用工, 初間雖覺得生受費力, 久後讀書甚易爲工, 卻亦濟事.” 道夫(60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지나쳐 넘어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두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 경, 효, 자의 경우 누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나?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들어봤어도 지나쳐 넘어간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순임금이 사도 설에게 명한 것도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하게끔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226] 후대 성인과 현인의 수많은 말들의 경우도 이 다섯 가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 도리는 본래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성인과 현인이라고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리석은이라고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 도리 속의 구체적인 대목들은 반드시 강학하여 밝혀야 한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그들이 힘써 노력한 지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성인과 현인이 말한 한 두 글자 정도에 의거하여 성현이 성현인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전혀 착실하게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가 전혀 없다. 논어의 사례를 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구절을 읽었으면 그 이른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때로 익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때때로 익히고 나면 어째서 기쁜(說) 것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227] '친구가 멀리서 온다면'는 구절을 읽었으면 친구가 왜 멀리서 오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즐거운 것인지 반드시 하나하나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처음엔 비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하고 나면 독서 공부가 매우 쉬워지고 성취가 있게 된다.


  •  14:109 “明明德”是知, “止於至善”是守. 夫子曰: “知及之, 仁能守之.” 聖賢未嘗不爲兩頭底說話. 如中庸所謂“擇善固執”, 擇善, 便是理會知之事; 固執便是理會守之事. 至書論堯之德, 便說‘欽明’, 舜便說‘濬哲文明, 溫恭允塞’. 欽, 是欽敬以自守; 明, 是其德之聰明. ‘濬哲文明’, 便有知底道理; ‘溫恭允塞’, 便有守底道理. 道夫(60이후).

명명덕(明明德)은 앎(知)이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킴(守)이다. 부자께서 '지(知)가 미치고 인(仁)이 지킬 수 있다'[228]고 하셨다. 성현은 늘 두 갈래로 말한다. 예컨대 중용에서 이른바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擇善固執)'[229]의 경우 '선을 골라'는 앎에 주목한 것이요 '굳게 잡는다'는 지킴에 주목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 요(堯)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흠명(欽明)'이라고 하였고 순(舜)에 대해서는 '준철문명, 온공윤색(濬哲文明, 溫恭允塞)'[230]라고 하였다. '흠'은 경건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명'은 그의 덕의 총명함이다. '준철문명'에는 앎의 도리가 있고 '온공윤색'에는 지킴의 도리가 있다.

양도부 (60이후)

<此條所錄恐有誤.>

<이 조목에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231]

  •  14:110 問: “新民如何止於至善?”

질문: 신민(新民)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지어지선(止於至善)합니까?

曰: “事事皆有至善處.”

대답: 일마다 모두 지극히 선한(至善) 지점이 있다.

又曰: “‘善’字輕, ‘至’字重.” 節(64이후).

다시 대답: '선(善)'자는 가볍고 '지(至)'자는 무겁다.[232]

감절(64이후)

<以下新民止至善.>

<이 아래로 신민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1 問: “新民止於至善, 只是要民修身行己, 應事接物, 無不曲當?”

질문: 신민의 영역에서의 지어지선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갈고닦아 몸소 실천하게 하고, 사태에 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두루 마땅하게끔 하려는 것 정도인가요?

曰: “雖不可使知之, 亦當使由之, 不出規矩準繩之外.” 節(64이후).

대답: 비록 (백성들이 도리를) 알게끔 할 수는 없어도 (도리를) 따르고 실천하게 하여 [233][234]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  14:112 “止於至善”, 是包“在明明德, 在新民”. 己也要止於至善, 人也要止於至善. 蓋天下只是一个道理, 在他雖不能, 在我之所以望他者, 則不可不如是也. 道夫(60이후).

지어지선은 명명덕과 신민을 포함한다. 자기 자신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하고 다른사람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한다. 천하는 하나의 도리일 뿐이니 다른사람이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다른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도부(60이후)

<以下明德·新民·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3 明德·新民, 二者皆要至於極處. 明德, 不是只略略地明德便了; 新民, 不是只略略地新得便休. 須是要止於極至處. 賀孫(62이후).

명덕과 신민 둘 다 모두 지극한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명덕은 적당히 덕을 밝히고[235] 마는 게 아니다. 신민은 적당히 백성을 새롭게하고 마는 게 아니다.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도록 해야 한다.

섭하손(62이후)

  •  14:114 問: “至善, 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到極處便是否?”

질문: 지선(至善)은 명덕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덕 안에서 지극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曰: “是. 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 隨處皆有. 修身中也有至善, 必要到那盡處; 齊家中也有至善, 亦要到那盡處. 至善, 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 此於仁’, 固是一个仁, 然仁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事合當如此, 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 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如‘爲人臣, 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只道擎跽曲拳便是敬. 如盡忠不欺, 陳善閉邪, 納君無過之地, 皆是敬, 皆當理會. 若只執一, 亦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些子恰好處. 韓文公謂‘軻之死不得其傳’. 自秦漢以來豈無人! 亦只是無那至善, 見不到十分極好處, 做亦不做到十分極處.” 淳(61·70때). 寓同.

대답: 그렇다. 명덕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모두 그 지극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곳곳에 다 있다. 수신(修身)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반드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제가(齊家)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역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극단성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말 뿐이 아니라 역시 실제로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의 경우 물론 인(仁)의 하나이지만 인에도 여러 양상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달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 일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고 저 경우는 또 저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다. 만약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만 고집한다면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의 경우에도, 경 역시 여러 양상이 있다. 홀(笏)을 높이 들고 무릎 꿇고 앉고 몸을 굽히는 것(擎跽曲拳)만[236] 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충심을 다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고 선한 것을 말하여 (임금 마음 속의) 삿된 것을 막아서(陳善閉邪)[237] 임금을 잘못 없는 경지로 인도하는 것[238]이 모두 경(敬)이니 (이러한 여러 양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하나만 고집한다면 역시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그렇게 되면) 어찌 지선(至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지선(至善)은 꼭 맞는(恰好) 지점들일 뿐이다. 한문공(韓文公)[239]이 '맹가[240]가 죽은 후로 전승이 끊겼다'[241]고 하였는데, 진한(秦漢) 이래 어찌 인재가 없었겠는가? 역시 저 지선(至善)이 없어서[242]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순의 기록(61세, 70세 때). 서우의 기록도 이와 같음.


  •  14:115 明德, 是我得之於天, 而方寸中光明底物事. 統而言之, 仁義禮智. 以其發見而言之, 如惻隱·羞惡之類; 以其見於實用言之, 如事親·從兄是也. 如此等德, 本不待自家明之. 但從來爲氣稟所拘, 物欲所蔽, 一向昏昧, 更不光明. 而今卻在挑剔揩磨出來, 以復向來得之於天者, 此便是“明明德”. 我旣是明得个明德, 見他人爲氣稟物欲所昏, 自家豈不惻然欲有以新之, 使之亦如我挑剔揩磨, 以革其向來氣稟物欲之昏而復其得之於天者. 此便是“新民”. 然明德·新民, 初非是人力私意所爲, 本自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且以孝言之, 孝是明德, 然亦自有當然之則. 不及則固不是, 若是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要到當然之則田地而不遷, 此方是“止於至善”. 泳(66때).

명덕(明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마음(方寸) 속에 빛나고 있는 물건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그것이 발현된 것으로 말하자면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과 같은 것이고, 실제 작용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섬기거나 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본래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여지껏 타고난 기질(氣稟)[243]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져 한결같이 혼미하여 밝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도려내고 갈고 닦아서(挑剔揩磨) 과거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다. 내가 명덕을 밝히고 나면 다른 이가 기질과 물욕 때문에 혼미해진 것을 보았을 때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일신하여 그들 또한 나처럼 갈고 닦아 기질과 물욕의 혼미함을 벗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신민(新民)'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히는 일)과 신민은 애초에 인간의 힘이나 사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당연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어서 그것을 지나쳐도 안 되고 그보다 부족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孝)는 명덕이지만 여기에도 역시 당연한 법칙이 있다. 못 미치면 물론 안 되지만 그 법칙보다 지나치면 반드시 허벅지 살을 베는(刲股)[244] 일이 생긴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의 자리에 이른 뒤 옮겨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  14:116 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 不及於止, 則是未當止而止; 當止而不止, 則是過其所止; 能止而不久, 則是失其所止. 僩(69이후).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선의 지점(至善)에 이르러 멈춰야 한다. 멈출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는 멈춰서는 안 되는 지점에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않았다면 이는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멈추는 데 성공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면 이는 머무를 자리를 잃은 것이다.[245]

  •  14:117 “明德新民, 皆當止於極好處. 止之爲言, 未到此便住, 不可謂止; 到得此而不能守, 亦不可言止. 止者, 止於是而不遷之意.”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러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止)'라는 말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대로 머물러버리는(住)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고 이 지점에 이르렀는데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다. 머무른다(止)함은 이 자리에 그쳐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或問: “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누군가의 질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자기 일이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공의 여부가 새로워지는 쪽인) 남에게 달렸으니 어떻게 그들이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曰: “且敎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 自然解到極好處.” 銖(67이후).

대답: 우선 자신이 먼저 밝은 덕 밝히는 일을 완전하게 한 다음에 '백성들을 인으로 적셔주고 의로 연마해주'는 것이다.[246] 맹자에서 이른바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 (올 사람을) 불러오고 (삿된 자를) 바로잡아주고 (굽은 자를) 펴주고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주고 보조해서 걷게 해주고 다시 이어서 깨우쳐주는 은덕을 베풀어준다'는 것과 같다.[247] 이렇게 그들을 변화시키면 자연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다. [248]

  •  14:118 或問: “明德可以止於至善, 新民如何得他止於至善?”

누군가의 질문: 명덕(明德)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를 수 있는데, 신민(新民)은 어떻게 그들이 지어지선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249]

曰: “若是新民而未止於至善, 亦是自家有所未到. 若使聖人在上, 便自有个處置.”

대답: 만약 신민이 지어지선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명명덕 공부)에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윗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자연히 어떤 처치가 있었을 것이다.

又問: “夫子非不明德, 其歷諸國, 豈不欲春秋之民皆止於至善? 到他不從, 聖人也無可奈何.”

재질문: 공자께서 명덕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여러 나라를 다니시면서 어찌 춘추 시대의 백성들이 모두 지어지선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따르지 않으니 성인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若使聖人得位, 則必須綏來動和.”

대답: 만약 성인이 높은 자리를 얻어 재직했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멀리서도 찾아와 귀부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고무시켜 화합하게 만드셨을 것이다[250].

又云: “此是說理, 理必須是如此. 且如‘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然堯有九年之水, 想有多少不育之物. 大德必得名位祿壽, 也豈箇箇如此! 只是理必如此.” 胡泳(69때).

다시 대답함: 이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251]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과 같다.[252] 그러나 요(堯) 임금 때는 9년간의 홍수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만물이 얼마나 많았겠나[253]. 큰 덕은 반드시 명예, 지위, 녹봉과 긴 수명을 얻어야 하지만, 어찌 모든 경우 다 그럴 것인가! 다만 그래도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  14:119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止也. 德明(44이후).

명명덕(明明德)은 탕(湯)임금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한 것(日新)[254]처럼 해야 하고[255] 신민(新民)은 문왕(文王)의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256]처럼 해야 한다. 각각 최선(至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  14:120 欲新民, 而不止於至善, 是“不以堯之所以治民者治民”也. 明明德, 是欲去長安; 止於至善, 是已到長安也. 拱壽(65때).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서 최선의 지점에 도달하여 머무르려하지 않는 것은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하지 않는 것'이다.[257] 명덕을 밝히는 것은 장안에 가려하는 것이고 최선의 지점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장안에 도착한 것이다.[258]

  •  14:121 劉源問“知止而後有定”.

유원[259]이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질문했다.[260]

曰: “此一節, 只是說大槪效驗如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卻是做工夫處.” 雉(미상).

대답: 이 부분은 그저 체감되는 효과(效驗)가 대체로 이렇다는 말이다.[261] '(대학의 道는)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있다'가 바로 힘쓸 지점이다. -오치의 기록

<以下知止有定.>

<이 아래로는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관한 조목>

  •  14:122 “在止於至善”. 至者, 天理人心之極致. 蓋其本於天理, 驗於人心, 卽事卽物而無所不在. 吾能各知其止, 則事事物物莫不各有定理, 而分位·界限爲不差矣. 端蒙(50이후).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말에서 '지극한(至)'이란 하늘의 섭리(天理)와 사람의 마음(人心)의 극치(極致)이다. 대개 최선의 지점은 하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있어 없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그 각각의 최선의 지점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고[262] 각각의 직분의 구분도 틀리지 않게 될[263] 것이다.[264]

  •  14:123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砥(61때).

(각각의) 사물의 이치상 멈추어야/머물러야 마땅한 (최선의) 지점을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확정될 수 있다.[265]

  •  14:124 問: “‘知止而後有定’, 須是物格·知至以後, 方能如此. 若未能物格·知至, 只得且隨所知分量而守之否?”

질문: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 한(知至)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사건에 접근하여 앎을 지극하게 하지 못했다면 일단 아는 분량 만큼만 지켜낼 수 있을 뿐인 것입니까?

曰: “物格·知至也無頓斷.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 只這一事上知得盡, 則此一事便知得當止處. 無緣便要盡底都曉得了, 方知止有定. 不成知未到盡頭, 只恁地鶻突獃在這裏, 不知个做工夫處! 這箇各隨人淺深. 固是要知到盡處方好, 只是未能如此, 且隨你知得者, 只管定去. 如人行路, 今日行得這一條路, 則此一條路便知得熟了, 便有定了. 其它路皆要如此知得分明. 所以聖人之敎, 只要人只管理會將去.”

대답: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知至) 하는 일에는 중단(頓斷)이 없다.[266] 모든 앎이 완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267] 다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앎이 완전해지면 그 사건에 있어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지점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완전히 깨치고 나서야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無緣). 설마하니(不成) 앎이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이렇게 골돌(鶻突)히,[268] 멍하니(獃)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고 힘쓸(工夫) 지점은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사람마다 자신의 수준(淺深)에 따라야 한다. 모든 앎이 완전해져야만 된다는 자세는 물론 옳지만 이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우선은 자네가 아는 것에 한해서 (심지를) 확정하라. 사람이 길을 갈 적에 오늘 이 길을 가면 이 길에 대해서 앎이 익숙해지고 (그 결과로) 심지가 확정된다. 다른 길들 모두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뚜벅뚜벅 이해해 나가도록 할 뿐이다.

又曰: “這道理無它, 只怕人等待. 事到面前, 便理會得去做, 無有不得者. 只怕等待, 所以說: ‘需者, 事之賊也!’”

다시 대답: 이 도리는 다른 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사태가 면전에 도달했을 때 바로 가서 부딪쳐주면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저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좌전에서)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269]고 한 것이다.

又曰: “‘需者, 事之賊也! ’若是等待, 終誤事去.”

다시 대답: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끝내 일을 그르친다.

又曰: “事事要理會. 便是人說一句話, 也要思量他怎生如此說; 做一篇沒緊要文字, 也須思量他怎生如此做.” 僩(69이후).

다시 대답: 사태마다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누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말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별로 중요할 것 없는 글을 한 편 지었어도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썼을까' 생각해야 한다.

  •  14:125 “知止而後有定”, 須是事事物物都理會得盡, 而後有定. 若只理會得一事一物, 明日別有一件, 便理會不得. 這箇道理須是理會得五六分以上, 方見得這邊重, 那邊輕, 後面便也易了. 而今未理會到半截以上, 所以費力. 須是逐一理會, 少間多了, 漸會貫通, 兩箇合做一箇, 少間又七八箇合做一箇, 便都一齊通透了. 伊川說“貫通”字最妙. 若不是他自會如此, 如何說出這字! 賀孫(62이후).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에 대하여. 사사물물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나서야 (심지가) 확정된다. 만약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했는데 다음날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리는 50~60% 이상 이해해야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어서 그 뒷부분도 쉬워진다. 지금 50%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 머지 않아 그렇게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점차 (많은 것을) 관통하여 두 가지를 하나로 꿰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7~8개를 하나로 꿰어 마침내 모든 것에 완전히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천이 쓴 '관통'이라는 표현이 매우 훌륭하다. 만약 그가 몸소 이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겠나?

  •  14:126 “知止而後有定”, 必謂有定, 不謂能定, 故知是物有定說. 振(미상).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에 대하여. (경전에서) 꼭 '확정이 있다(有定)'고 하지 '확정할 수 있다(能定)'고는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270]

  •  14:127 未知止, 固用做工夫,[271] 但費把捉. 已知止, 則爲力也易. 僩(69이후).

머물 곳을 알기 전에도 물론 실천(工夫)은 하는데, 다만 계속 수고롭게 붙잡고 있어야 할 뿐이다. 머물 곳을 안 후에는 힘이 덜 든다.[272]

  •  14:128 定亦自有淺深: 如學者思慮凝定, 亦是定; 如道理都見得徹, 各止其所, 亦是定. 只此地位已高. 端蒙(50이후).

확정되는 데에도 당연히 깊이의 차이가 있다. 배우는 이의 생각이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확정'이다. 도리를 모두 투철하게 인식하여 각각의 경우 머물러야 할 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것 역시 '확정'이다. 단지 후자쪽의 수준이 높을 뿐이다.[273]

  •  14:129 問“定而後能靜”.

'(마음 속으로 사사물물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定, 是見得事事物物上千頭百緖皆有定理; 靜, 只就自家一箇心上說.” 賀孫(62이후).

대답: '확정'이란 온갖 사건과 사물에 모두 확정적인 이치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자신의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274]

<以下定靜.>

<이 아래로는 '확정되면 고요하다'에 관한 조목들>[275]

  •  14:130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義剛(64이후).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있을 유(有)자를 썼다.[276]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능(能)자를 썼다.[277]

  •  14:131 定是理, 靜在心. 旣定於理, 心便會靜. 若不定於理, 則此心只是東去西走. 泳(66때).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이치 쪽으로 (심지가) 확정되면 마음은 곧 고요해질 수 있다. 이치를 향하여 심지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동분서주할 뿐이다.[278]

  •  14:132 問: “章句云: ‘外物不能搖, 故靜.’ 舊說又有‘異端不能惑’之語. 竊謂將二句參看, 尤見得靜意.”

질문: 대학장구에서는 '외물이 흔들지 못하므로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예전 버전에서는 또 '이단의 학설이 현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구문을 다 참고해서 보면 고요함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79]

曰: “此皆外來意. 凡立說須寬, 方流轉, 不得局定.” 德明(44이후).

대답: 둘 다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온다는 뜻이다. 무릇 학설을 세울 때는 품이 넉넉해야 하니 그래야 유동적으로 통한다. 국한되고 픽스되어서는 안 된다.

  •  14:133 問: “大學之靜與伊川‘靜中有動’之‘靜’, 同否?”

질문: 대학에서 말한 고요함과 이천이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라고 할 때의 '고요함'이 같은 고요함입니까?

曰: “未須如此說. 如此等處, 未到那裏, 不要理會. 少頃都打亂了, 和理會得處, 也理會不得去.” 士毅(미상).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러한 부분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이해하려하지 말아라. (이해하려 하면) 머지않아 모두 혼란스럽게 되어 (기존에) 이해했던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  14:134 問“靜而後能安”.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安, 只是無臲卼之意. 才不紛擾, 便安.”

대답: 편안함은 동요[280]가 없다는 뜻이다. 동요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問: “如此, 則靜與安無分別.”

질문: 그렇다면 고요함과 편안함은 차이가 없습니다.

曰: “二字自有淺深.” 德明(44이후).

대답: 두 글자에 깊이의 차이가 있다.[281]

<以下靜安.>

<이 아래로 '고요하면 편안하다'에 관한 조목들>

  •  14:135 問: “‘安, 謂所處而安.’ 莫是把捉得定時, 處事自不爲事物所移否?”

질문: '편안함은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다'[282]는 것은, (도덕법칙을) 확정적으로(定) 꽉 붙잡았을 때 (내 면전에 도달한) 사태에 대한 (나의) 대처 역시 자연스럽게 외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曰: “這箇本是一意. 但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而今人心才不靜時, 雖有意去安頓那物事, 自是不安. 若是心靜, 方解去區處, 方解穩當.” 義剛(64이후).

대답: 이는 본래 같은 뜻이다.[283] 다만 고요함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고 편안함은 몸의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목전의 사사물물을 잘 안배(安頓)하려 해도 당연히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이 편안해야 (사사물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처리를) 온당하게 할 수 있다.

  •  14:136 旣靜, 則外物自然無以動其心; 旣安, 則所處而皆當. 看打[284]做那裏去, 都移易他不得. 道夫(60이후).

고요하면 자연히 외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편안하면 대처하는 바가 모두 합당하다. 비록 저쪽으로 들고 나르려[285] 해도 움직일 수 없다.[286]

  •  14:137 問: “‘靜而後能安’, 是在貧賤, 在患難皆安否?”

질문: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나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에나 모두 편안하다는 것입니까?

曰: “此心若不靜, 這裏坐也坐不得, 那裏坐也坐不得.” 㝢(61이후).

대답: 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여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저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다.

  •  14:138 能安者, 以地位言之也. 在此則此安, 在彼則彼安; 在富貴亦安, 在貧賤亦安.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경우와 상황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서는 이렇게 편안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편안하다. 부유하고 귀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고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도 편안하다.

  •  14:139 問: “知止章中所謂定·靜·安, 終未深瑩.”

질문: 머물 곳을 안다(지지 知止)장에서 이른바 '확정됨', '고요함', '편안함'은 끝내 잘 모르겠습니다.

曰: “知止, 只是識得一箇去處. 旣已識得, 卽心中便定, 更不他求. 如求之彼, 又求之此, 卽是未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亦相去不遠, 但有深淺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알았다는 정도이다. 목적지를 알면 마음이 확정되어 다시 달리 갈 곳을 찾지 않게 된다. 이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직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확정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간의 (개념상의) 거리가 멀지 않다.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말한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287]는 것과 (문세가) 비슷하니 (거론된 개념간의 거리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問: “先生於此段詞義, 望加詳數語, 使學者易曉.”

질문: 선생님께서 이 단락의 말 뜻에 몇 마디 첨언하시어 배우는 이들이 쉽게 깨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曰: “此處亦未是緊切處, 其他亦無可說.” 德明(44이후).

대답: 이 부분은 그다지 긴요한 곳이 아니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定·靜·安.>

<이 아래로 확정됨/고요함/편안함에 관한 조목들>

  •  14:140 定·靜·安頗相似. 定, 謂所止各有定理; 靜, 謂遇物來能不動; 安, 謂隨所寓而安, 蓋深於靜也. 去僞(46때).

정(定)과 정(靜)과 안(安)은 서로 꽤 비슷하다. 정(定)이란, 멈춘/머무른 지점에 각각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말한다. 정(靜)이란, 외부의 사물을 만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안(安)이란, 머무르는 곳[288]마다 편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정(靜)보다 깊은 경지이다.

  •  14:141 定·靜·安三字大略相類. 然定是心中知“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心下有箇定理, 便別無膠擾, 自然是靜. 如此, 則隨所處而安. 㽦(59때).

정(定), 정(靜), 안(安)이라는 세 글자는 서로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정(定)은 마음 속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확정된 이치가 있으면 더 이상 혼란이 없으니 자연히 정(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安)하다.[289]

  •  14:142 知止而後有定, 如行路一般. 若知得是從那一路去, 則心中自是定, 更無疑惑. 旣無疑惑, 則心便靜; 心旣靜, 便貼貼地, 便是安. 旣安, 則自然此心專一, 事至物來, 思慮自無不通透. 若心未能靜安, 則總是胡思亂想, 如何是能慮! 賀孫(62이후).

멈출 지점을 알고(知止) 나서야 비로소 확정됨(定)이 있게 된다. 이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되면 마음 속에 자연히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된다. 의혹이 없으니 마음이 정(靜)해지고, 마음이 정(靜)하니 안정되어(貼貼地)[290]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자연히 하나로 집중되어, 일이 닥치고 사물이 올 때 저절로 사려에(思慮)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정(靜)하고 안(安)하지 못하면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떠오르게 되니 어떻게 제대로 사려(慮)할 수 있겠나?

<知止·定·靜·安·慮.>

<지지(知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3 定, 對動而言. 初知所止, 是動底方定, 方不走作, 如水之初定. 靜則定得來久, 物不能撓, 處山林亦靜, 處廛市亦靜. 安, 則靜者廣, 無所適而不安. 靜固安, 動亦安, 看處甚事皆安然不撓. 安然後能慮.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慮者, 思之精審也. 人之處事, 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者, 非安不能. 聖人言雖不多, 推出來便有許多說話, 在人細看之耳. 僩(69이후).

정(定)은 동(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일단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움직이던(動) 것이 비로소 정(定)해져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이 막 안정되어 멈춘 것과 같다. 정(靜)은 정(定)이 오래 지속되어 외부의 사물이 흔들 수 없는 상태이다. 산림에 있든 시장에 있든 늘 정(靜)하다. 안(安)은 정(靜)이 넓어져서 가는 곳마다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고요(靜)하거나 움직(動)이거나 늘 편안하다. 어떤 일을 처리해도(看處)[291] 편안(安)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안(安)한 후에야 비로소 사려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사려(慮)'는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복잡하고(叢冗) 급박한 상황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안(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성인의 말씀이 비록 많지 않지만, 유추해서 확장해보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14:144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대한 질문

曰: “先是自家心安了, 有些事來, 方始思量區處得當. 今人先是自家這裏鶻突了, 到事來都區處不下. 旣欲爲此, 又欲若彼; 旣欲爲東, 又欲向西, 便是不能慮. 然這也從知止說下來. 若知其所止, 自然如此, 這卻不消得工夫. 若知所止, 如火之必熱, 如水之必深, 如食之必飽, 飮之必醉. 若知所止, 便見事事決定是如此, 決定著做到如此地位, 欠闕些子, 便自住不得. 如說‘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人多會說得. 只是不曾見得決定著竭其力處, 決定著致其身處. 若決定見得著如此, 看如何也須要到竭其力處, 須要到致其身處. 且如事君, 若不見得決定著致其身, 則在內親近, 必不能推忠竭誠, 有犯無隱; 在外任使, 必不能展布四體, 有殞無二.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這若不是見得到, 如何會恁地!” 賀孫(62이후).

대답: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安)해야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적절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또렷하지 못해서(鶻突) 일이 닥치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렇게도 하고 싶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면서 다시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니 제대로 사려하지(慮)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지지(知止)'에서부터 쭉 설명하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자연히 이렇게 되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멈출 지점을 알면 마치 불이 반드시 뜨겁고 물이 반드시 깊으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불러지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멈출 지점을 알면 각각의 사건들이 반드시 이와 같으며[292] 그 상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293]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자연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군주를 섬길 때 몸을 바친다'[294]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단지 정말로 힘을 다하는 지점이나 몸을 바치는 지점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이와 같아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295] 힘을 다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임금 섬기는 것을 예로 들자면 반드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임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推忠竭誠) '과감하게 간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게 한다(有犯無隱)'[296]는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온 몸을 다 바쳐(展布四體)[297]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有殞無二)[298] 것처럼 할 수 없다. '인(仁)을 해쳐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求生害仁)은 없고,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는 일(殺身成仁)은 있다.'[299] 이것[300]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렇게[301] 할 수 있겠나?


<知止·安·慮.>

<지지(知止),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5 李德之問: “‘安而後能慮.’ 旣首言知止矣, 如何於此復說能慮?”

이덕지(李德之)의 질문: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라고 했는데, 이미 처음에 '멈출 곳을 알았다(知止)'라고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다시 '사려할 수 있다(能慮)'라고 합니까?

曰: “旣知此理, 更須是審思而行. 且如知孝於事親, 須思所以爲事親之道.”

대답: 이미 이 이치를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되는 것인지[302] 생각해야 한다.

又問: “‘知至而後意誠’, 如何知旣盡後, 意便能實?”

재질문: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에서, 어째서 앎이 다한 후에야 생각(意)이 진실해질 수 있습니까?

先生指燈臺而言: “如以燈照物, 照見處所見便實; 照不見處便有私意, 非眞實.”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함: 등불로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비춘 지점에서 드러난 것들은 진실[303]하다. 비추지 않은 부분은 사사로운 생각(私意)이 있어 진실하지 않다."

又問: “持敬·居敬如何?”

재질문: 지경(持敬)과 거경(居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曰: “且如此做將去, 不須先安排下樣子, 後卻旋求來合.” 蓋卿(65때).

대답: 우선은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 먼저 형식[304]을 세우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146 子升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卻兼下‘極深硏幾’字, 覺未穩.”

'자승의 질문: '지지(知止)'와 '능려(能慮)'를 선생님께서 어제 주역(周易)의 '심(深)'과 '기(幾)'에 비유하셨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극심(極深)'과 '연기(硏幾)라는 글자를 겸하신 것은[305]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306]

曰: “當時下得也未仔細. 要之, 只著得‘硏幾’字.” 木之(68때).

대답: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에는) '연기(硏幾)'만 붙이면 된다."

  •  14:147 李約之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이약지(李約之)의 질문.

曰: “若知至了, 及臨時不能慮, 則安頓得不恰好. 且如知得事親當孝, 也知得恁地是孝. 及至事親時不思慮, 則孝或不行, 而非孝者反露矣.” 學蒙(65이후).

대답: 만약 앎이 지극해졌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사려하지 못한다면 적절히 안배(安頓)[307]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김에 응당 효도해야 함을 알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더라도 막상 부모를 섬길 때에 사려하지 않으면 효도는 못하고 역으로 불효가 드러날 수도 있다.

<安·慮.>

<안(安)과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8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질문

曰: “若不知此, 則自家先已紛擾, 安能慮!” 德明(44이후).

대답: 이것을 알지 못하면 [308] 자신이 이미 먼저 어지러울 것이니[309] 어찌 사려할 수 있겠는가?

  •  14:149 能安者, 隨所處而安, 無所擇地而安. 能慮, 是見於應事處能慮.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能安)'는 것은 가는 곳마다 편안한 것이요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한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사태에 대처하는 자리에서 사려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  14:150 慮, 是思之重復詳審者. 方子(59이후).

'사려(慮)'는 생각을 반복하여 자세하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  14:151 慮, 是硏幾. 閎祖(59이후).

'사려(慮)'는 기미를 갈고닦는 것(硏幾)에 해당한다.[310]

  •  14:152 問: “到能得處, 學之工夫盡否?”

질문: '얻을 수 있음(能得)'[311]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배움(學)[312]의 노력이 다 끝난 것입니까?

曰: “在己之功亦備矣. 又要‘明明德於天下’, 不止是要了自家一身.” 淳(61·70때).

대답: 자기자신의 성취로서는 또한 다 갖춘 것이지만 나아가 '천하에 명덕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일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得.>

<얻음(得)에 관한 조목>

  •  14:153 因說知止至能得: 上云“止於至善”矣, 此又提起來說. 言能知止, 則有所定; 有所定, 則知其理之確然如是. 一定, 則不可移易, 任是千動萬動, 也動搖他不得. 旣定, 則能靜; 靜, 則能安; 安, 則能慮; 慮, 則能得其所止之實矣. 卓(미상).

이와 관련하여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을 해설:[313] 위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314] 다시 (같은 내용을) 거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런 말이다. 멈출 지점을 알면 확정된(定) 바가 있게 된다. 확정된(定) 바가 있으면 이치가 확연히 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확고(定)해지고 나면 변하거나 바뀔 수 없으며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흔들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다. 확정되면(定) 고요(靜)할 수 있고, 고요(靜)하면 편안(安)할 수 있으며, 편안(安)하면 사려(慮)할 수 있고, 사려(慮)하면 실제로 머물러야(止)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315] 획득(得)할 수 있게 된다.

<知止至能得.>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조목>

  •  14:154 '知止至能得'. 蓋才知所止, 則志有定向; 才定, 則自能靜; 靜, 則自能安; 安, 則自能慮; 慮, 則自能得. 要緊在能字. 蓋滔滔而去, 自然如此者. 慮, 謂會思量事. 凡思天下之事, 莫不各得其當, 是也. 履孫(65때).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기까지.' 대개 멈출 지점을 알게 되면 뜻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316] 일단 (방향이) 확정되면 자연히 고요(靜)할 수 있게 된다. 고요(靜)하면 자연히 편안(安)할 수 있고, 편안(安)하면 자연히 사려(慮)할 수 있으며, 사려(慮)하면 자연히 얻을(得) 수 있다. 핵심은 '할 수 있고(能)'라는 글자에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도도히 흘러 가듯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려(慮)'는 사태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타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14:155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 能安, 及到事來, 乃能慮. 能字自有道理. 是事至物來之際, 思之審, 處之當, 斯得之矣. 蘷孫(68이후).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곧 (마음의 방향이) 확정(定)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에 사려(慮)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는 글자에는 자연히 이런 도리가 있다.[317] 이는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깊이 생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비로소 (마땅히 멈추어야 하는 지극한) 그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는 것이다.

  •  14:156 問: “據知止, 已是思慮了, 何故靜·安下復有箇‘慮’字?旣靜·安了, 復何所慮?”

질문: '지지(知止)'가 이미 사려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고요함(靜)과 편안함(安) 뒤에 다시 사려(慮)가 있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편안한데 무엇을 다시 사려합니까?

曰: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能安, 及到事至物來, 乃能慮. ‘能’字自有意思. 謂知之審而後能慮, 慮之審而後能得.” 賜(66이후).

대답: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마음의 방향이) 확정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사려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이라는 글자에 자연히 이런 뜻이 있다. 이는 앎이 깊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가 깊어져야 얻을(得) 수 있음을 말한다.[318]

  •  14:157 或問定靜安慮四節.

어떤 사람이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네 단계에 대해 질문했다.

曰: “物格·知至, 則天下事事物物皆知有箇定理. 定者, 如寒之必衣, 飢之必食, 更不用商量. 所見旣定, 則心不動搖走作, 所以能靜. 旣靜, 則隨所處而安. 看安頓在甚處, 如處富貴·貧賤·患難, 無往而不安. 靜者, 主心而言; 安者, 主身與事而言. 若人所見未定, 則心何緣得靜. 心若不靜, 則旣要如彼, 又要如此, 身何緣得安. 能慮, 則是前面所知之事到得, 會行得去. 如平時知得爲子當孝, 爲臣當忠, 到事親事君時, 則能思慮其曲折精微而得所止矣.” 胡泳(69때).


대답: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

  •  14:158 琮曰: “上面已自知止, 今慮而得者, 依舊是知底意思”云云.

종(琮)의 질문: 위에서 이미 멈출 바를 알았다(知止)고 했는데 지금 사려하여(慮) 얻는(得)다고 하니 여전히 앎에 관한 뜻입니다.

先生曰: “只上面是方知, 下面是實得耳.”

선생의 대답: 위쪽 구문은 이제 막 알게 된 것이고 아래쪽 구문은 실제로 얻은 것이다.

問: “如此, 何用更過定·靜·安三箇節目?”

질문: 그렇다면 왜 다시 '정(定)', '정(靜)', '안(安)'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까?

曰: “不如此, 不實得.”

대답: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曰: “如此, 上面知止處, 其實未有知也. 通此五句, 才做得‘致知在格物’一句.”

질문: 그렇다면 위에서 멈출 바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섯 단계[319]를 통과해야 비로소 '치지는 격물에 달려있다(致知在格物)'라는 한 구절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今人之學, 卻是敏底不如鈍底. 鈍底循循而進, 終有得處. 敏底只是從頭呼揚將去, 只務自家一時痛快, 終不見實理.” 琮(65때記見).

대답: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영민한 사람이 우둔한 사람만 못하다. 우둔한 사람은 차근차근 나아가서 마침내 얻는 지점이 있다. 영민한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큰소리치며 한순간의 통쾌한 자기만족만에만 힘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실제 이치를 보지 못한다.

  •  14:159 問: “定, 卽心有所向, 不至走作, 便靜; 靜, 便可以慮, 何必待安?”

질문: 확정되면(定) 마음에 방향이 있어서 달아나지 않으니 고요(靜)하다고 하셨습니다. 고요(靜)하면 바로 사려할 수 있을 텐데 왜 사려하기 전에 편안(安)해져야 합니까?

曰: “安主事而言, 不安便不能思. 譬如靜坐, 有件事來撓, 思便不得專一. 定·靜·安都相似. 未到安處, 思量未得. 知止, 是知箇慈, 知箇孝. 到得時, 方是得箇慈, 得箇孝底道理. 慮, 是慮箇如何是慈, 如何是孝.”

대답: 편안함(安)은 사태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편안(安)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정좌(靜坐)중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해 흔들어버리면 생각이 전일(專一)할 수 없다. 확정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은 모두 비슷하다.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지지(知止)'는 자애를 알고 효성을 아는 것이다. '얻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애와 효성의 도리를 얻는 것이다.[320] 사려(慮)는 어떤 것이 자애이고 어떤 것이 효성인지 사려하는 것이다.

又問: “至於安時, 無勉强意思否?”

재질문: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면 애써 하려는 생각(意思)이 없습니까?

曰: “在貧賤也安, 在富貴也安,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今人有在這裏不安了, 在那裏也不會安. 心下無理會, 如何會去思慮?”

대답: 빈천에서도 편안(安)하고, 부귀에서도 편안(安)하며, 여기에서도 편안(安)하고, 저기에서도 편안(安)하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서 편안(安)하지 않으니 저기서도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으로 (이 편안함의 도리에 대한) 이해 없이[321] 어떻게 사려할 수 있겠나?

問: “章句中‘慮謂思無不審’, 莫是思之熟否?”

재질문: 대학장구에서 '려(慮)는 생각이 언제나 자세한 것이다'고 하신 것은 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曰: “慮是思之周密處.” 芝(63때).

대답: '려(慮)'는 주밀(周密)한 생각이다.

  •  14:160 王子周問知止至能得.

왕자주(王子周)가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질문.

曰: “這數句, 只是要曉得知止. 不知止, 則不能得所止之地. 如‘定·靜·安’數字, 恰如今年二十一歲, 來年二十二歲, 自是節次如此來, 自不可遏. 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這三句, 卻緊要只是‘在止於至善’; 而不說知止, 則無下工夫處.” 震(65때).

대답: "이 몇 구절은 단지 '지지(知止)'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지 못하면 그 지점을 얻을 수 없다. '정(定)', '정(靜)', '안(安)' 등 몇 글자는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으며,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는 이 세 구절 중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가장 긴요하다. 하지만 (삼강령에 바로 이어서) '지지(知止)'를 말하지 않으면 노력을 기울일 곳이 없게 된다.

  •  14:161 游子蒙問: “知止, 得止, 莫稍有差別否?”

유자몽(游子蒙)[322]의 질문: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曰: “然.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 是已中其的.”

대답; 그렇다. 지지(知止)는 사수와 과녁의 관계와 같고, 득지(得止)는 이미 과녁에 명중한 것과 같다.

問: “定·靜·安矣, 如之何而復有慮?”

재질문: 정(定)·정(靜)·안(安)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사려합니까?

曰: “慮是事物之來, 略審一審.”

대답: 사려(慮)는 사태와 사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323]

劉淮叔通問: “慮與格物致知不相干.”

유회(劉淮)(그의 자(字)는 숙통(叔通)인데)의 질문: 사려(慮)와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닙니까?[324]

曰: “致知, 便是要知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慮, 便是審其如何而爲孝, 如何而爲慈. 至言仁則當如堯, 言孝則當如舜, 言敬則當如文王, 這方是得止.”

대답: '치지(致知)'는 '아버지는 자애에 멈추고, 자식은 효도에 멈춘다'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려(慮)는 어떻게 해야 효도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자애가 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인(仁)으로 말하자면 요(堯)와 같아야 하고, 효로 말하자면 순(舜)과 같아야 하고, 경(敬)으로 말하자면 문왕(文王)과 같아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멈출 지점을 얻었다(得止)'고 할 수 있다.

子蒙言: “開欲以‘明德’之‘明’爲如人之失其所有, 而一旦復得, 以喩之. 至‘慮’字, 則說不得.”

자몽(子蒙)의 말: 저는(開) '밝은 덕(明德)'의 밝힘(明)을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찾는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려(慮)'라는 글자는 설명이 안 됩니다.

曰: “知止而有定, 便如人撞著所失, 而不用終日營營以求之. 定而靜, 便如人旣不用求其所失, 自爾甯靜. 靜而安, 便如人旣知某物在甚處, 某物在甚處, 心下恬然無復不安. 安而慮, 便如自家金物都自在這裏, 及人來問自家討甚金物, 自家也須將上手審一審, 然後與之. 慮而得, 則稱停輕重, 皆相當矣.”

답하였다: 멈출 바를 알아서 (마음의 방향이) 확정된다(定)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온종일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 것과 같다. 확정(定)되면 고요(靜)하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 이상 자연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과 같다. 고요(靜)하면 편안(安)하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여기에 있고 저 물건은 저기에 있다고 이미 다 알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여 다시는 불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편안(安)하면 사려(慮)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금붙이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조금 사가려고(討)[325] 할 때, 자기 손에 (물건을) 올려두고 세심히 살펴본 다음에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려(慮)하면 얻는(得)다는 것은, (그렇게 내어준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모두 정확히 맞는 것과 같다.

或又問: “何故知止而定·靜·安了, 又復言慮?”

어떤 사람의 재질문: 왜 지지(知止)하여 정(定)·정(靜)·안(安)이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 사려(慮)를 언급합니까?

曰: “且如‘可以予, 可以無予; 可以取, 可以無取; 可以死, 可以無死’, 這上面有幾許商量在.” 道夫(60이후).

대답: 이를테면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주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취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취하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죽지 않는 게 맞는 경우'[326]와 같은 문제들에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327]

도부(道夫)의 기록

  •  14:162 問“知止而後有定”.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물었다.

曰: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대답: 사물의 이치상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지점(物理當止之處)을 분명히 알아야 마음이 저절로 굳게 확정된다.

又問: “上旣言知止了, 何更待慮而後能得?”

재질문: 이 윗부분에서 이미 머물 곳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사려한 뒤에야 (머물 곳을)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曰: “知止是知事事物物各有其理. 到慮而後能得處, 便是得所以處事之理. 知止, 如人之射, 必欲中的, 終不成要射做東去, 又要射做西去. 慮而後能得, 便是射而中的矣. 且如人早間知得這事理如此, 到晩間心裏定了, 便會處置得這事. 若是不先知得這道理, 到臨事時便脚忙手亂, 豈能慮而有得!”

대답: '머물 곳을 알았다'는 것은 사사물물에 각각 리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태를 처리하는 이치(理)[328]를 얻었다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활을 쏠 때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 설마하니[329] 동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서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쏘아서 과녁에 적중한 것이다.[330] 또 비유하자면 누군가 아침에 이 사태의 이치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이르러 마음이 굳게 정해지면 이 일을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서서 이 도리를 알지 못했다면 사태에 임하여 손발을 허둥거릴 것이다. 어찌 '사려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問: “未格物以前, 如何致力?”

질문: 격물(格物)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노력합니까?

曰: “古人這處, 已自有小學了.” 砥(61때). 寓同.

대답: 고대인은 이 단계에서 이미 소학(小學)으로 다져진 공부가 있었다.

  •  14:163 子升問知止·能慮之別.

자승이 '머물 곳을 안다'와 '사려할 수 있다'의 차이를 물었다.

曰: “知止, 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得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如易所謂‘惟深也故能通天下之志’, 此似知止; ‘惟幾也故能成天下之務’, 此便是能慮. 聖人言語自有不約而同處.”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응당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치(理)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 임하여서는 추가로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피고[331] 신중하게 대처(審處)해야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能得所止). 주역에서 이른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천하 모든 것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한다(通)'[332]는 것은 '머물 곳을 안다'와 비슷하다.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폈(幾)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다'[333]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에 해당한다. 성인들의 말에는 미리 맞춰보지 않고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334]

木之說: “如此則知止是先講明工夫, 能慮是臨事審處之功.”

목지의 말: 그렇다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일에) 앞서서 도리를 따지고 밝히는 노력이고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에 임해서 신중하게 대처한다는 (실질적) 효과로군요.

曰: “固是.”

대답: 정말로 그렇다.

再問: “‘知止而后有定’, 注謂‘知之則志有定向’. 或問謂‘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語似不同, 何也?”

재질문: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는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은 '알고 나면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입니다. 대학혹문에서는 '머물 곳을 알 수 있으면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모두 확정된 이치(理)가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335]

曰: “也只一般.” 木之(68때).

대답: 둘 다 같은 말이다.

  •  14:164 知止, 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得. 能慮卻是緊要. 知止, 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 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 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道夫(60이후).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또 반드시 머물 곳을 얻어야만(得) 된다. 머물 곳을 얻으려면 '사려할 수 있(能慮)'어야만 된다. '사려할 수 있(能慮)'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으로서 반드시 효도해야 함을 아는 것, 신하로서 반드시 충성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려하여) '얻음'은 몸소 충효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를 알기만 할 뿐이라면 어버이를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사욕에 사로잡혀 그 효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요 임금을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녹봉에 사로잡혀 그 충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닌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165 人本有此理, 但爲氣稟物欲所蔽. 若不格物·致知, 事至物來, 七顚八倒. 若知止, 則有定, 能慮, 得其所止. 節(64이후).

사람에겐 본래 이 이치가 있으나 타고난 기질(氣稟)과 물욕에 가로막힌다. 만약 (미리미리) 격물치지하지 않으면 사태와 사물이 다가왔을 적에 반드시 엉망진창 실패할[336] 것이다. 머물 곳을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사려할 줄 알게되고, 머물 지점을 얻게 된다.

  •  14:166 問知止至能得.

'머물 곳을 알면'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한 질문.

曰: “眞箇是知得到至善處, 便會到能得地位. 中間自是效驗次第如此. 學者工夫卻在‘明明德, 新民, 止於至善’上. 如何要去明明德, 如何要去新民, 如何要得止於至善, 正當理會. 知止·能得, 這處卻未甚要緊. 聖人但說箇知止·能得樣子在這裏.” 㝢(61이후).

대답: 진실로 지선(至善)한 지점을 알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의 것들은[337] 원래 체감되는 효과의 단계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학자가 힘 쓸 자리는 오히려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쪽이다. 다름아니라 어떻게 명덕을 밝힐 것인가, 어떻게 백성을 새롭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선한 지점에 머물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338] '머물 곳을 안다'나 '얻을 수 있다' 같은 곳들은 그리 긴요하지 않다. 성인이 여기서 단지 '머물 곳을 알'에서 '얻을 수 있음'까지 이어지는 과정[339]을 설명하신 것 뿐이다.

  •  14:167 陳子安問: “知止至能得, 其間有工夫否?”

진자안의 질문: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에 갈 때 까지 중간에 힘써 노력해야 합니까?

曰: “有次序, 無工夫. 才知止, 自然相因而見. 只知止處, 便是工夫.”

대답: 순서는 있지만 힘써 노력할 지점은 없다.[340]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서(相因) 드러난다. 오직 머물 곳을 안다는 부분만이 힘써 노력할 지점이다.

又問: “至善須是明德否?”

재질문: 지선(至善)은 명덕(明德)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341]

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那極至處.” 銖(67이후).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그런 경우)저 지극히 선한 지점에서 머물러야 한다.[342]

  •  14:168 眞知所止, 則必得所止, 雖若無甚間隔, 其間亦有少過度處. 健步勇往, 勢雖必至, 然移步亦須略有漸次也.

진정으로 머물 곳을 알았으면 필연적으로 머물 곳을 얻게 된다.[343] 비록 (앎과 얻음 사이에) 별 간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역시 거쳐가야 하는 단계들이 약간 존재한다. 굳건하고 용맹하게 앞으로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기세라고 하더라도 보행에는 역시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344]

  •  14:169 林子淵問知止至能得.

임자연이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하여 질문.

曰: “知與行, 工夫須著並到. 知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 所以大學先說致知, 中庸說知先於仁·勇, 而孔子先說‘知及之’. 然學問·愼思·明辨·力行, 皆不可闕一.” 賀孫(62이후).

앎과 실천은 둘 다 해내도록(並到) 노력해야 한다. 앎이 밝아지면 실천이 독실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지면 앎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쪽을 폐기할 수 없다. 예컨대, 걸을 때 사람의 두 다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345] 만약 어느 한쪽 다리라도 물러지면[346]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먼저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먼저 치지(致知)를 말했고[347] 중용에서는 인(仁)과 용(勇)보다 지(知)를 먼저 말했다.[348] 공자는 '앎이 충분해도...'[349]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고묻고(學問), 신중히 사려하고(愼思), 분명히 분별하고(明辨), 힘껏 실천하는(力行)[350] 것은 하나도 빼먹을 수 없다.

  •  14:170 問“知止能得”一段.

'머물 곳을 알고 얻을 수 있다' 단락에 대한 질문.

曰: “只是這箇物事, 滋長得頭面自各別. 今未要理會許多次第, 且要先理會箇知止. 待將來熟時, 便自見得.”

대답: 이 부분(지지~능득)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인데(滋長得) 단지 중간 단계들이(頭面) 서로 구별될 뿐이다(自各別)[351] 지금 여러 순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선 '머물 곳을 안다' 하나를 이해하도록 하라. 장차 익숙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論看文字, 只要虛心濯去舊聞, 以來新見. 時擧(64이후).

선생께서는 텍스트 독해를 논하실 적에 단지 마음을 비우고 예전에 들은 것을 씻어내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라고(濯去舊聞, 以來新見)[352] 하셨다.

  •  14:171 黃去私問知止至能得.

황거사(黃去私)[353]가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工夫全在知止. 若能知止, 則自能如此.”[354] 人傑(51이후).

힘쓸 곳은 오직 '머물 곳을 안다'이다.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다.

  •  14:172 知止至能得, 譬如喫飯, 只管喫去, 自會飽. 德明(44이후).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밥 먹는 것과 같다. 쭉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찬다.[355]

  •  14:173 問知止至能得.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해 질문함.

曰: “如人飮酒, 終日只是喫酒. 但酒力到時, 一杯深如一杯.” 儒用(70때).

대답: 음주와 비슷하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다 주량의 한계에 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한 잔에 한 잔 만큼 취기가 깊어진다.[356] [357]

  •  14:174 知止至能得, 是說知至·意誠中間事. 閎祖(59이후).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앎이 지극해진다(知至)와 생각이 순수해진다(意誠) 사이의 일이다.[358]

  •  14:175 大學章句說靜處, 若兼動, 卽便到“得”地位, 所以細分. 方(41때).

(이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해석은 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동적인 측면을 겸하면 곧장 '얻었다'의 단계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359]

  •  14:176 問: “知與得如何分別?”

질문: 머물 곳을 알았다(知)와 머물 곳을 얻었다(得)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曰: “知只是方知, 得便是在手.”

대답: 알았다는 것은 이제 막 안 것이고 얻었으면 손에 넣은 것이다.

問: “得莫是行所知了時?”

질문: 얻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을 실천하는 단계 아닙니까?

曰: “也是如此.”

대답: 그 또한 그렇다.

又曰: “只是分箇知與得. 知在外, 得便在我.” 士毅(미상).

다시 대답: 앎과 얻음을 구별하자면 앎은 바깥에 있고 얻었으면 나에게 있는 것이다.

<知·得>

<앎과 얻음에 관한 설명>

  1. 일역판은 '책 안에서 말한 실천내용이 치밀하다'라고 번역했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어떤 것에 투여하는 행위 및 그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중용이 독자에게 직접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수양의 방법과 내용, 이론적 근거 등이 매우 자세해서 일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인다.
  2. 스케일이 크다는 뜻이다.
  3. 일역판은 명료명백하다고 하였다.
  4. 미우라구니오는 '정신이 고양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본 조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고양'은 너무 얌전한 감이 있다. 맹자를 읽으면 고양된다기 보다는 흥분되는 경향이 있다.
  5. 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이다.
  6. '절기'란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 시대 상황, 국제 정세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종 친절유미(親切有味: 텍스트가 친근하고 절실하여 맛이 있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를 독자 자신과 무관한 모종의 객관적 사물로 취급하여 냉정하고 무심하게 다루는 것이다.
  7. 일역판은 여기서도 '실천'으로 풀이했다.
  8. 직역하자면 1. 책은 도리를 밝히고 2. 책은 독자에게 요구하기를 '책 속에서 말한 성현공부를 해내라'고 한다. 가 된다.
  9. 도학불명(道學不明)은 도학자들의 상투어이다. 주로 '도학이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것이 도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인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컨센서스의 문제), 혹은 도를 배우는 것을 표방한 일종의 학파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지(프로모션과 설득의 문제) 잘 모르겠다.
  10. 위쪽이란 고담준론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상'의 영역이다. 아래쪽은 일상적인 실천윤리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하'의 영역이다.
  11. 쇳물을 부어서 금속제품을 주조해내는 틀을 말한다.
  12. 맹자6A:19. 맹자는 훌륭한 오곡과 훌륭하지 않은 피를 구분한다. 오곡이 아무리 훌륭해도 익지 않으면 피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인(仁) 또한 익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13. 일역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 거다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다.
  14. 논어나 맹자를 생각해보라. 공자 일평생의 말을 여러 사람이 기록한 관계로 논어는 체계랄 게 없다.
  15. 서두부터 결말까지 체계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16. 직역하면 '거친'이다.
  17. 일역판에 의하면 做天下는 爲天下와 같으니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다.
  18. 일역판은 在這裏를 '확실하게' '명확하게' 정도의 의미로 풀었다. 하지만 이 구문이 주자어류에서 빈출하며 많은 경우 방향지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저렇게 의역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19. 임금의 옥좌는 전통적으로 정남향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면 왕으로 재위한다는 뜻.
  20. 行程은 네비 상에서 표시되는 '~까지 가는데 걸리는 거리'이다. 다만 여기서는 바로 아래 조목 13을 참조하여 그러한 거리들을 기록해 둔 가이드북으로 풀이했다.
  21. 가이드북은 가이딩만 하지 사람을 실제로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껍데기에 비유한 것이다.
  22. 연나라는 오늘날 북경(北京) 및 그 위쪽 지역으로 중화세계의 최북단이다. 반대로 월나라는 최남단이다.
  23. 대학 팔조목의 첫 번째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태에 직접 접촉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24. 팔조목 가운데 세 번째이다. 도덕실천에 있어서 의도의 순수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
  25. 앞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역판은 15:115 등을 근거로 성의까지가 앞부분 나머지가 뒷부분이라고 보았다. 고문해의는 수신까지를 앞부분, 제가 이하를 뒷부분으로 보았다.
  26. 해마(揩磨)는 목재나 석재 기물을 만든 뒤 표면을 갈고 닦는(=연마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문장 말미의 재(在)는 단정하는 어조를 나타낸다.
  27. 원문은 其失(그 잃음)이다. 현존하는 다른 판본에서도 其失이다. 하지만 일역판에서는 이 두 글자가 '工夫'의 오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맥상 타당하다고 보아 여기서는 일역판의 추정을 따랐다.
  28. 信口는 입에 맡겨두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중한 고려 없이 나오는대로 말하는 것이다.
  29. 照管不到의 照管은 유심히 잘 살펴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30. 覺察은 찾아내어 깨닫고 밝혀서 아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는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행위와 같다.
  31. 당나라 시인 노륜의 시 '부득팽조루송양종덕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宗德歸徐州幕)'을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의 각주를 참조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여덟 개의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이 밝은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해하는 명덕(明德)은 빛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의 이미지에 가깝다.
  32. 소학은 평상시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도덕률이 몸에 배도록 하는 일련의 훈육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훈육 프로그램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으로 각각의 도덕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전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어른이 된 현재 단계에서 격물치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33. 지경(持敬)은 일종의 명상법이다. 주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소학의 공부를 뒤늦게 벌충해주는 검정고시 같은 역할을 한다.
  34. 무법(無法)은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정공법 밖에 없으니 큰 길로 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적에 주희가 꺼내는 말이다.
  35. 논어 2:11
  36. 解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
  37. 장장지는 항상, 늘상 그렇다는 뜻이다.
  38. 실기리'實其理'는 번역하기 어렵다. 영역판은 substantiate the principles라고 하였다. 일역판은 '실천'으로 풀었다. 주자학대계판은 '충실하게 하다' 혹은 '채우다'로 풀었다. 56:38에서 주희는 여조겸의 말을 인용하며 실(實)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명실'의 '실'이다(有對名而言者, 謂名實之實). 이치와 짝이 되는 개념일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사실'의 '실'이다(有對理而言者, 謂事實之實). 꽃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화실'의 '실'이다(有對華而言者, 謂華實之實). 세 경우 모두 추상성에 대비되는 구체성과 현실성, 마지막으로 실용성의 의미가 있다.
  39. 대학 전10장에 나온다. '구'는 직각자, '혈'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일한 마음을 식별하는(혈) 것을 말한다. 자기 안에 있는 심성 속에서 만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 아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주희는 이런식으로 동일한 도덕적 인식과 실천이 확산되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12를 보라.
  40. Gardner(2022)는 'outline'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다.
  41. 영역판(2018)의 번역어 선택을 따랐다.
  42. 팔조목 가운데 두 번째이다. 이치의 인식을 확실하고 치밀하게 하는 단계를 말한다.
  43. 대학 전 3장.
  44. 9:34에서는 '个'자이다.
  45. 9:34에 사실상 동일한 기록이 있다. 今은 个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한 듯하다.
  46. 애(捱)는 순서대로 접근하다, 파고들다 등의 의미가 있다.
  47. 판(辦)은 갖추다, 구비하다는 뜻.
  48. 복생은 전한대에 분서갱유 이후 실전된 상서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암송하고 있던 텍스트를 제공한 사람이다.
  49. 한서 권 89 황패전을 보라. 10:67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50. 이정의 제자인 윤돈.
  51.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다른 책'을 문장의 앞쪽에 붙여서 읽으면 '저절로 꿰둟'는 것의 목적어가 '다른 책'이 된다. 대학을 계속 읽으면 다른 책을 관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중화서국판의 표점, 그리고 영역판(2018)이 이쪽 해석을 따랐다. 일역판과 주자학대계판은 '다른 책'을 뒤쪽에 붙였다. 여기서는 일역판 쪽을 따랐다.
  52. 호생(好生)의 호는 '잘'의 뜻, 생은 '怎生'의 경우처럼 말의 뒤에 붙는 어조사이다. 고문해의를 참조하라.
  53. 복살(伏殺)의 '복'은 엎드려 붙어있는 것, '살'은 강조의 뜻으로 단어의 뒤에 붙는 어조사이다.
  54. 일역판에서는 몰두하다, 씨름하다, 맞붙다(取り組む)로 풀었다.
  55. 일역판의 교감주에 의하면 看은 상당수 다른 판본에서 着으로 표기했다. 여기서도 着으로 보고 풀이하였다.
  56. 어떤 책인지 확실치 않으나 문맥상 대학 본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7. 이부분은 임자연의 본래 해설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어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일역판의 경우 섭미도는 본문에 집중하는 쪽, 임자연은 기이하고 특별한 해석을 개진하는 쪽으로 상정했다.
  58. 이 조목에는 이렇게 '책'에 해당하는 일반명사가 자주 쓰이는데 그때마다 그것이 대학 본문인지, 대학장구인지, 대학혹문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59. 대학장구나 대학혹문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0. 격물을 말한다.
  61. 대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2. 격물을 말한다.
  63. '見之於身'은 '견지어신'으로 읽으면 자기 자신에게서 보는 것이고 '현지어신'으로 읽으면 몸소 발현하고 구현한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전자의 뜻으로 읽었다. 일역판은 후자의 뜻으로 풀었다.
  64. 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일부 판본에서 心을 己로 썼다. 큰 차이는 없겠으나 일역판에서는 己 쪽으로 풀이했다. 여기서는 心으로 풀었다.
  65. 적혀있는 것을 몸소 구현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종종 '실천'으로 번역하지만 오늘날 한국어 '실천'은 자원봉사나 정치참여 같은 뉘앙스가 짙어서 이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협지에서 무공비급을 얻은 주인공이 읽은 내용을 실제로 자신의 몸에 적용하는, 그러니까, 성실히 수련하는 이미지에 가깝다.
  66. '看如何... 也'는 '제아무리...'이다.
  67. 유교의 핵심 덕목은 '인의예지' 네 가지를 거론할 때가 있고 '인의예지신' 다섯 가지를 거론할 때가 있다. 이 두 버전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희는 '신'의 지위를 나머지 넷과 다르게 해석한다. '신'은 일단 믿음인데,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거짓 없는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덕목은 '인의예지'라는 네 덕목이 거짓 없이 진실하며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신 하나가 인의예지 넷을 밑에서 지지하고 있는 이미지를 상상해보라.
  68. 물론 주희가 위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위의 수준에서의 위선이야 가능하겠지만 내면에서의 인(仁)의 성취 여부에는 배중률이 작동한다고 본 것 아닐까? 득인(得仁)했으면 득인(得仁)한 것이지 거기에 가짜로 득인하거나 3푼만 득인하거나 하는 따위는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득인(得仁)'이라는 표현에 관해서는 논어 7:14, 20:2 등을 보라.
  69. 신서(新書), 예(禮)
  70. 택량(澤梁)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못이다. 예기 왕제편을 보면 수달이 물고기를 잡은 뒤 돌 위에 널어놓는 행위를 음식을 진설하여 제사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71. 수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냥감을 널어놓은 것을 제사지내는 행위로 본 것이다.
  72. 예기 왕제.
  73. 일역판에서 기구(崎嶇)를 '어렵게'라고 풀이한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앞에서 성현의 말을 도로에 비유한 만큼 후대인의 말 역시 도로에 비유하고 있음을 번역에서도 살려주는 편이 더 좋다.
  74. 경서의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은 본문이고 하인노릇을 하는 것은 주석이다. 여기서 '주(主)'라고 한 것이 그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이야기한 것인지 아니면 경서의 주지(主旨)를 이야기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우선은 영역판(2018)을 따라 주지로 번역한다.
  75. 이 부분은 다소간 의역이 필요하다. '상성성(常惺惺)'은 이정의 제자 사량좌(謝良佐)가 '경(敬)' 공부를 해설할 때 사용했던 표현으로 늘 또랑또랑하게 깨어있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게 텍스트가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하는 모습을 형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역판의 경우는 텍스트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황들 덕분에 독자가 머리속에서 또렷한 이미지를 떠올려가며 독해한다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의역이 조금 과한 듯하여 채택하기 어렵지만 참고를 목적으로 기록해둔다. 이 부분에 대한 영역판의 번역은 더욱 이상하여 참고하기 어렵다.
  76. '념'은 오늘날 우리가 '염불한다'고 할 때의 '염'과 같다.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다는 뜻이다.
  77. 대학장구를 말한다.
  78. 격물이나 치지 같은 것들은 모두 실제로 이렇게 해보라는 지침들이다. 이런 종류의 지침은 군대에서 보게 되는 필드매뉴얼과 같아서 읽기만 해서는 온전히 알기 어려운데 실제로 해보면 그제서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79. 일역판의 교감기에 의하면 성화본, 조선고사본(구스모토본), 조선정판본에서는 리(理)가 공(恐)이라고 한다. 어느쪽으로 해석해도 그럭저럭 말은 통하지만 아무래도 '공'쪽이 조금 더 말이 순하다. 일역판의 교감에 따라 여기서도 '공'으로 해석하였다.
  80. 리회는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다. '붙잡고 씨름하다'나 '연구하다'정도의 의미를 담아 일단 '공부하다'라고 해두었다.
  81. 직역하면 '배우는 이들을 미리 준비했다'인데 일역판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미리 머리속으로 상정하였다는 뜻으로 의역하였다. 일역판을 따른다.
  82. 논어 7:8
  83. 경학리굴(經學理窟) 학대원하(學大原下).
  84. 주희의 삼남인 주재(朱在)이다.
  85. 논어 16:13 등에서 종종 보이는 패턴이다. 비혈연 제자들 입장에서 선생의 친자는 무언가 특이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묻는 것이다.
  86. 조선고사본에서는 書 앞에 他가 있다. 일역판은 이쪽을 따랐다.
  87. 다음 조목을 보라. 사마광의 발언을 패러디한 것이다.
  88.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이다.
  89.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말한다.
  90. 초초(草草)는 대략적으로, 간략하게 하는 모양이다. '주자어류사회연구' 하편 412쪽 참조.
  91. 대학과 주역.
  92. 논어 7:16.
  93. 싹과 철광석이 최초에 받은 '기', 나무와 쇠가 형체를 이룬 '질'에 해당한다. 기는 기체 같은 것, 질은 질감이 있는 유형의 물질들 같은 것이다.
  94. 본래 이 몇 구절의 구조는 '기왕에 이렇게 좋은 조건을 가진데다 그 의욕과 추진력이 '멈추지는 않는다(已)' 수준 정도에 그칠 뿐만이(但) 결코 아니라서(決不)'가 된다. 이처럼 본래의 구조를 살려서 번역하자면 '결부단이' 네 글자를 처리하는 데 너무 많은 설명이 소요되므로 여기서는 적당히 의역하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95. 대학장구상설(2019) 권1, 15쪽에서는 한(閑)을 '막다'로 보아 '또한 그를 막지 못했고'라고 풀었다.
  96. 중용 17
  97. 세계가 하나의 기계라고 치면 그 기계가 작동하는 법칙 가운데 숫자화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그 숫자가 바로 기수(氣數)이다. 천구가 1일 1회 회전하고 달의 운동은 28일이 1주기이고 계절의 수는 4이고 성질에 따른 기의 분류는 2(음/양)와 5(수/화/목/금/토)인 것 등이다. 1:45를 참조하라.
  98. 세계가 하나의 기계라고 치면 그 기계가 늘 설계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제대로 코드를 짰는데도 그것을 실행할 때마다 버그가 생겼다 말았다 하면서 개발자의 속을 태우는 프로젝트와 비슷하다. 공자처럼 총명예지를 가진 이라면 억조 백성의 군사가 되는 것이 정해진 운명인데 세계에 잡히지 않는 버그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공자는 왕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99. 대학장구 서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왕위에 오르는 사람은 천명을 받아 하늘이 해야 할 업무를 지상에서 이양받는 것이므로 '하늘을 이었다'라고 표현하였다. 극(極)은 가장 높은 지점이다. 가장 높이 있으므로 사방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누구나 보고 참조하므로 모두의 표준이나 모범이 된다. 그래서 서경 홍범편에서 임금이 왕위에 올라 하는 일을 두고 '임금이 표준을 세운다(皇建其有極)'고 하였다. 입극(立極)은 건극(建極)을 글자만 바꿔서 쓴 것으로, 결국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100. 이 글자는 판본에 따라 립(立)이나 필(必)로 쓰기도 한다. 자세한 교감사항은 일역판을 참조하라.
  101. 주역 태괘 상전에 나오는 표현이다. '재성'은 옷감을 가지고 옷을 지을 적에 필요에 따라 옷감을 잘라서 남는 부분을 버리는 행위이다. 보상(輔相)은 곁에서 보필하며 돕는 것이다. 천지의 도리가 지상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조금 지나치다 싶은 것은 임금이 중간에서 잘라내어 덜어내고, 딱 마땅한 정도보다 부족하다 싶은 것은 임금이 보태어 채워넣는 방식으로 천지가 만물을 낳아 기르는 작업을 서포트하는 것을 말한다.
  102. 이 글자는 열심히 노력한다는 의미로는 '면'이라고 읽고 고개를 숙인다는 의미로는 '부'라고 읽는다. 다만, 예기 표기에서 면언(俛焉)이라고 쓴 부분을 예기정의나 예기집해에서는 일괄적으로 '면'으로 읽으라고 주석했다. 성리대전본 대학장구에는 소리값을 '면(免)'이라고 표기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한학 전통에서는 대개 '면'으로 읽는다.
  103. 자두(刺頭)는 머리를 파묻었다, 몰두하다는 뜻.
  104. 규모는 구조, 스케일 등을 말한다. 대학의 경우 그 스케일이 평천하에 이르므로 크다고 한 것이다.
  105. 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
  106. 爲는 조선고사본에서는 其이다.
  107. 통행본 대학장구 서문에서는 무용(無用)이 아니라 무실(無實)이다.
  108. 이러한 구체성을 말한다.
  109. 주례(周禮) 지관(地官) 향대부(鄕大夫)에서 처음 나온 표현이다. 덕, 행, 도, 예의 네 가지 항목으로 끊어서 읽기도 하고 덕행, 도예 두 가지 항목으로 읽기도 한다. 주례주소(周禮注疏)에 따르면 덕행은 육덕(六德)과 육행(六行)을 말하며 도예는 육예(六藝)를 말한다. 다만 86:48을 보면 주희는 덕, 행, 도, 예 네 가지를 독립된 카테고리로 본 듯하다. 이 경우 덕은 내 안에 가지고 있는 품성, 행은 모범적인 행실, 예는 육예, 도는 도리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110. 논어 7:6
  111. 과거시험의 답안을 작성할 때 사용하는 산문 형식을 말한다.
  112. 5:44에서는 이와 흡사한 내용이 누군가의 질문으로 되어있고 주희는 여기에 대해 비판적인 톤으로 대답하고 있다. 해당 조목을 참조하라.
  113. 멍때리는 사람의 귀를 잡아 끌어 각성시키는 것이 제시(提撕)이다. 이정(二程) 등 여러 도학자들이 거경(居敬) 공부를 설명할 적에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주자어류사회연구 하편 431쪽을 참조하라.
  114. 위기(爲己)를 말한다.
  115. 일역판은 착경(著敬)의 '착'을 실사로 보아 '붙이다'라고 풀었다. 하지만 착경 같은 표현을 주희가 이곳 외에서 사용한 바가 없기도 하고, '경을 붙인다'가 어색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착'자가 주자어류 내에서 실사로 쓰인 경우보다 허사로 쓰인 경우가 훨씬 많으므로 일역판의 이러한 선택은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앞쪽의 '자연'에 붙여서 '自然著'로 보는 편이 낫다. '著'는 형용사의 뒤에 붙어서 그 정도를 강조해주는 허사로 쓰일 수 있다.
  116. 맹자 4B:19. 맹자 원문은 소인(小人)이 아니라 서민(庶民)이다.
  117. '명덕'이라고 해도 좋다.
  118. 이 문장은 지시대명사가 많아서 해석이 쉽지 않다. 기(其)의 경우 공부가 모두 명명덕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진해나간다는 기왕의 발언에 의지하여 '대학의 공부'라고 해석했고, 차(此)는 바로 다음 문장을 참고하여 해석했다.
  119. 주희에게 있어 존심(存心)은 오늘날 명상과 같이 의식이 강하게 활성화된 상태를 말한다.
  120. '맥락'은 본래 혈관 등이 서로 이어져 구성하는 체계를 말한다. 맥락을 관통한다는 것은 일견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망과 반복되는 패턴을 간파한다는 말이다. 다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맥락'은 영어 context의 번역어라는 인상이 무척 강하므로 독해에 주의를 요한다.
  121. 명덕을 말한다.
  122. 일역판은 상재목전(常在目前)을 '늘 명덕에 생각이 미치게 하라'고 풀었다.
  123. 심장과 간을 뽑는다(拔出心肝)는 표현은 용맹하게 필사적으로 몰두하는 자세를 말한다. 여타(與它)는 영어로 옮기자면 'with that'이다. 조금 전에 뽑아낸 자신의 심장과 간을 손에 들고 무언가를 해내는, 기괴하지만 결사적인 메타포로 보인다. 일역판에서는 '심장과 간을 뽑아내어 그것을 남에게 보이다'라고 해석했는데 만족스럽지 않다. '보이다' 보다는 '보다'라고 해야 문장의 흐름에 맞다. 8:60에 거의 흡사한 표현이 있는데 거기서는 여타(與它)의 문법적 역할이 보다 분명하게 보인다. '용맹히 분발하여 자신의 심장과 간을 뽑아 들고 실천해야 한다.(勇猛奮發, 拔出心肝與他去做)'
  124. 유리거울 보다는 청동거울이나 구리거울 같은 것을 떠올려야 적절하다. '마(磨)'는 오래되어 반사력이 퇴색한 금속제 거울을 사포 같은 연마재로 힘주어 갈고 닦는 행위를 말한다.
  125. 대학혹문
  126. 중용장구 제 23장.
  127. 대학장구 보망장.
  128. 대학장구 경1장에서 주희의 주석.
  129. 명덕을 말한다.
  130. 명덕을 말한다.
  131. 본연의 밝은 성질을 말한다.
  132. 소리값이 비슷한 다른 글자를 가져와서 뜻을 풀이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인(仁)은 인(人, 사람다움)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주희도 이러한 정의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덕(德)의 경우 득(得, 얻어서 보유하고 있음)자를 가지고 풀이한다. 덕을 득으로 풀이한 최초의 사례는 예기(禮記) 악기(樂記)이다.
  133. 명덕이 발현된 지점들이다.
  134. '애초에 어그러졌던 적이 없다(初未嘗差也)'는 것은 이 밝음의 필연성과 항상성을 주장한 것인데, 이러한 주장은 바로 뒤의 만약 '어그러지면(苟或差焉)'에서 즉시 부정된다. 이러한 불분명한 문장들은 다른 조목에서도 반복해서 보인다. 14:82 등을 보라.
  135. 14:77에 유사한 표현이 보인다.
  136. '이 이치'는 인의예지를 말한다.
  137. 장자 양생주(養生主)의 포정해우 고사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진서(晉書) 두예(杜預)전.
  138. 예기 곡례(曲禮) 상(上). 예기 쪽은 '出必告, 反必面'이다.
  139. 예기 곡례(曲禮) 상(上).
  140. 맹자 6B:2
  141. 이 일련의 인용구의 출전은 모두 서경 요전(堯典)이다.
  142. 맹자 4B:30
  143. 예기 곡례(曲禮) 상(上).
  144. 효경 간쟁(諫諍)
  145. 숙간(熟諫)은 물체를 약한 불로 익히듯이 지속적으로 간언하는 것이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가스라이팅'이 제일 가까울 듯하다.
  146. 예기 내칙(內則). 논어집주에도 인용된 바 있다.
  147. 예기 제의(祭義).
  148. 이 표현에 대해서는 14:79 참조.
  149. 여기서의 밝음은 발광체의 발광력이 아니라 거울의 반사능력 같은 성질을 말한다.
  150. 14:74의 주석을 참조하라.
  151. 정호(程顥)의 정성서(定性書)에 보인다.
  152. 원문이 사양이 아니라 '사손'인 이유는 북송(北宋) 영종(英宗, 1063-1067, 재위 1062-1067)의 친부인 조윤양(趙允讓)의 이름 마지막 글자를 피휘한 것이다. 일역판의 교감주를 보라.
  153. '차호'는 교착(交錯)이다. 이러한 의리와 저러한 의리가 섞이면서 충돌하는 경우를 말한다.
  154. 14:81 참조.
  155. 14:81 참조.
  156.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157. 맹자 1A:7
  158. 측은지심이다.
  159. 전쟁을 일으켜 마음에 통쾌하고자 하는 것이다.
  160. 호인(胡寅, 1098-1156).
  161. 14:115의 주석 참조.
  162. 맹자 7B:24
  163. 이 조목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바로 다음 조목(14:85)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므로 일단은 그쪽의 내용에 준해서 번역한다. 영역판(2018)과 일역판(2007)도 분전했지만 아주 큰 도움은 못 된다.
  164. 여기서 '운운'으로 처리한 질문자의 질문내용은 다음 조목을 참조하라.
  165. 14:85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 조목에서 주희는 허령불매한 명덕을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접근하여 다루려는 상대방의 태도가 불만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에 맞추어 번역하려면 이 문단의 한가운데 위치한 '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은 부정적인 어투로 풀이하되 그 앞뒤의 '須是...' 부분은 적극적인 주문으로 풀어야 한다. 긍정과 부정이 혼재된 이러한 상황을 부드럽게 처리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부분의 끝에 말줄임표를 삽입하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우선은 이렇게 해두고 훗날 능력있는 번역자가 다시 살펴보고 처리해주기를 기다려본다.
  166. 바로 다음 조목이다.
  167. 송사(宋史) 악비(岳飛)전에 나오는 문구이다. 남송의 명장 악비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려는 진회에게 한세충이 '죄상이 무엇이냐'고 따지자 진회가 대답하기를 '막수유(莫須有, 아마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하였다. 막수(莫須)는 혹시, 어쩌면, 아마도 정도로 번역하면 좋다.
  168. 便著는 便과 같다.
  169. 一把火에서 把는 수량사이다.
  170. 대학장구를 말한다.
  171. 명덕이다
  172. 감조(鑒照)는 대개 '비추다' 정도로 번역한다. 하지만 이는 발광체가 대상을 향해 빛을 조사(照射)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서면 거울이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비춤'이다.
  173. 현재의 통행본 대학장구에는 이런 구절이 없다.
  174. 현재 통용되는 주자어류를 편집한 여정덕의 코멘트이다.
  175. 대학장구에서 명덕을 정의한 말이다.
  176. 주희에 의하면 선종에서 주장하는 불성은 우리 의식(心)의 활동성이다. 이를 달마대사의 표현을 빌려 '작용시성(作用是性)'이라 한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나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운수반시(運水搬柴)' 등의 표현도 본성을 의식의 활동성으로 정의한 것이다. 한정길(2002) 참조.
  177. 명덕
  178. 명덕
  179. 대학장구
  180. 논어 7:22
  181. 대학의 명덕과 논어의 덕 양쪽을 말하는 듯하다. '고문해의' 참조 (나중에 보충할 것)
  182. 평단(平旦)은 맹자에서 이른바 야기(夜氣)이다. 낮동안 자신의 선한 본성을 억압하고 괴롭혀도 밤사이 쉬고나서 새벽을 맞이하면 희미하게 소생한다. 주희는 주석에서 '평단지기는 사물과 아직 접하지 않았을 적의 맑고 밝은 기운이다'라고 하였다. 맹자6A:8
  183. 理를 物로 적은 판본이 있다.
  184. 조선정판본에서는 이 뒤에 손(孫)자가 붙어있다.
  185. 일역판에서는 견식과 시야의 협소함을 의미한다고 풀었다. 하지만 주희는 종종 이 단어를 가지고 형이하의 질감을 결여한 개념놀이의 공허함을 지시하고 있다. 52:71에서 '도의는 텅 빈 (형이상의) 물건이라 본래 고단하다(道義是虛底物, 本自孤單)'고 하였고 117:44에서 '하학은 하지 않고 상달만 하면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어 고단하고 말라 비틀어질 것이다(不要理會下學, 只理會上達, 卽都無事可做, 恐孤單枯燥).'라고 하였다. 14:89에서 '지면상에서 찾는 것'이라고 한 것이나 직전 14:90에서 '한가한 소리'라고 한 것을 고려하면 여기서의 '고단' 역시 실제로 자신의 일신상에서 절실히 겪어가는 공부를 결여한 개념놀이의 공허함을 말한 듯하다.
  186. 대학의 삼강령인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을 말한다.
  187. 대학장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88. 주석을 말한다. 전통적인 목판인쇄본에서 경전의 본문은 큰 글자로, 주석은 작은 글자로 새긴다.
  189. 경전의 본문을 말한다.
  190. 주석도 본문도 아닌 실제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191. 격물은 가장 구체적인 곳에 몸소 접근하여 도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이 공부의 구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이다.
  192. 예컨대 부자간의 효(孝) 등이다.
  193. 맹자 7A:15
  194. 맹자 7A:15. 맹자는 사람이 후천적으로 배웠거나 혹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이미 알고 있는 도덕률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양지와 양능이라고 하였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부모를 향한 아이의 사랑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5. 발광체라는 뜻이 아니라 반사력이 있다는 뜻이다.
  196. 자신의 명덕이 밝다면
  197. 대학장구 전9장
  198. 명덕을 나 홀로 밝히는 게 아니라 천하에 밝힌다고 했으니 명덕과 신민을 연결하여 말한 것이다.
  199. 대학장구 전2장. 백성만 새롭게 하는 게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하니 역시 명덕과 신민을 연결하여 말한 것이다.
  200. 이 조목은 고문해의에서 지적한 것처럼 14:117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201. 중용 1장.
  202. 논어 2:3
  203. 위와 같음.
  204. 方是는 '겨우'나 '조금'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간신히 '좋음'의 합격선을 넘은 정도라는 뜻이다.
  205. 盡頭는 지극한 지점, 완전한 것의 의미이다. 18:94 참조.
  206. 예기 곡례상에서 효자의 태도를 형용하는 부분이다.
  207. 예기 곡례상
  208. 대학 본문에서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말이다
  209. 주돈이가 지은 통서의 성상(誠上)을 보라.
  210. 대학장구를 보라.
  211. 과거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를 받는 귀신이 빙의할 몸 역할을 맡은 어린아이를 말한다.
  212. 좌여시 입여제는 모두 예기 곡례상의 인용이다.
  213. 논어 팔일 19 (3.19)를 보라.
  214. 논어 계씨편 10 (16.10)을 보라.
  215. 주역 간(艮)괘에 대한 이천역전의 주석이다.
  216. 3강령 8조목 가운데 명명덕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말한다.
  217. 맹자 7A:15
  218. 예기 곡례상. 시동은 제사 때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앉혀두는 어린 아이이다. 조상신이 강림해야 하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
  219.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 있어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앉기'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20. 논어 계씨 10장을 언급한 것이다. 10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듣는 것은 또렷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며 ... 소득이 있으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태에서 최선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다.
  221. 격물에 관해서는 다음 권(15)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과 사태에 직접 나아가 경험한다' 정도로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222. 학문을 공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대학이라는 경서를 매개로 하는 학문연마는 '격물'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것.
  223. 앞서와 같은 공간유비이다. 경(敬)이란 의식이 또렷하게 각성된 상태, 수습된 상태,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번역자 본인은 이것이 명상상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나 주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224. 塊는 흙덩이처럼 티미하고 멍하니 내던져저 있는 모습이다
  225. 보통 '방사하다'고 풀이한다. 자기 단속 없이 축 풀어진 모습이다.
  226. 순임금은 설을 사도에 임명하는데, 사도는 백성의 교화를 담당한 직책이다. 오륜은 순이 설에게 기대한 백성 교화의 내용이다. 설은 상 땅에 봉해져 상나라의 시조가 된다.
  227. 논어 학이편 첫 구절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228. 논어 위령공 32(15:32)를 보라
  229. 중용 20장
  230. 채침의 서집전의 해석에 따르면 준은 깊음, 철은 지혜, 문은 우아함, 명은 밝음이다. 온은 순수하고 온화함, 공은 경건하고 공손함, 윤은 신실하고 정성스러움, 색은 충실함이다.
  231. 이러한 주석은 아마도 1270년판의 편집자인 여정덕이 달았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일역판의 주석을 보라.
  232. 주희가 경전구문을 풀이할 적에 종종 쓰는 말투이다. '지극히 선한'이라는 구문에서 선하다는 파트보다는 지극하다는 파트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233. 논어 태백 9(8:9)를 보라.
  234. 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모두 측량/제도기구이다. 지켜야 될 선을 그어주는 물건들이므로 자주 '법도' '준칙' 정도를 은유한다.
  235. 일역판은 다른 여러 판본을 참조하여 德을 得으로 고쳤다. 이렇게 교감하면 말이 더 부드럽고 뒤쪽 구문과도 통하여 좋아 보인다. 일단은 통행본 그대로(德) 번역하긴 했으나 참고를 위해 각주를 달아둔다.
  236. 장자 인간세 1장 참조
  237. 맹자 이루상 1장(4A:1)
  238. 춘추좌씨전 장공 19년
  239. 당나라의 한유
  240. 맹자
  241. 한유의 에세이 '원도'에 나오는 말이다.
  242. 문세만 보면 '無那至善' 네 글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번역해둔다.
  243. 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기인데, 이러한 기는 우리가 골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稟)자를 쓴다. 이것을 소리나는 그대로 '기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럴 경우 현대 한국어에서 해당 음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단어인 기품(氣品) 때문에 말이 순하지 않게 된다. 주희에게 있어 기(氣)와 질(質)은 서로 다른 개념이므로 기품을 한국어로 옮길 적에 '기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 본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기록해둔다.
  244. 전통적인 효자담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벤트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요리해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효행을 '선을 넘은 것'으로 단정하여 경계했지만 또 다른 조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17:47, 17:48, 59:58, 59:59 등을 보라. 일역판(2007)의 해당부분 각주도 자세하다.
  245. 止는 특정 스팟에 1)도달해서 2)멈추고 3)머무르는 일을 모두 지시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난처하다. 지어지선은 대체로 어떤 사태에 임하여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탠스/포지션, 곧 '최선'의 지점을 취하여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좋은데 이는 止를 2)머무르다로 풀이한 것이다. 이 조목에서는 불행히도 주희가 止의 여러 의미를 혼용해서, 특히 '멈추다'의 의미를 적극 가져와 말을 만들고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멈추다와 머무르다를 번갈아 써가며 번역하였다.
  246. 漸民以仁, 摩民以義는 한서 동중서전에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에 의하면 漸은 푹 적셔준다는 뜻이다.
  247. 맹자 3A:4(등문공상 4)를 보라. 주희의 집주에 맞추어 번역하였다.
  248. 解는 can의 뜻이다
  249. 직전 조목과 같은 내용이다.
  250. 논어 19:25 완(綏)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 래(來)는 그 편안함의 결과로 원방의 사람들이 귀부해옴을 말한다. 동(動)은 고무하고 진작하는 것, 화(和)는 그 고무진작의 결과로 백성들이 화평하게 변함을 말한다.
  251. 실제로는 변수가 많겠지만 이론상, 그리고 당위상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252. 중용 제 1장.
  253. 多少는 일역판(2007)과 왕샤오농의 영역판(2018)에서 공히 '多麽(얼마나)'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254. 대학 전2장에서 인용하는 고사이다. 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서 말하기를 '하루 새롭고자 하거든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하루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
  255. 사실 이 고사는 대학 본문에서 명명덕이 아니라 신민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256.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한 구절이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전2장에서 '신민'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대학장구의 풀이를 옮기자면 주나라가 비록 연혁이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의 대에 이르러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그 은택이 미친다면 천명을 새롭게 받아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257. 맹자 이루상을 참조하라.
  258. 장안의 비유에서 암시하듯 주희는 자주 지어지선이 도덕률 실천의 성공까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말한다.
  259. 일역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기 말고는 달리 언급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260. 대학 본문은 "머물 곳을 알면(=최선의 지점을 알면) 의지가 확정되고, 의지가 확정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각각의 단계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이 된다. 여기서부터 권14의 끝까지 이 여섯 글자를 반복해서 논할 것이므로 잘 기억해두자.
  261. 14:166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그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262. 이 부분은 대학혹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의 지점을 '아는' 행위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라고 주희가 주장하는 '사사물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객관도덕률에 대한 설명이다. 양자가 어째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구문을 임의로 넣어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관하여 14:166을 참조하라.
  263. 직분(分位)의 경계선(界限)을 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은 번역을 기다려본다.
  264. 이 조목은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함께 읽어야 이해가 쉽다(그럼 의미에서 해당 부분을 각주처리해둔 일역판의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임금이라는 사물에는 인(仁)이 그 확정불변의 이치요 지극히 선한 최선의 지점이다.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사태에 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仁)이라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라는 직분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확정불변의 이치이며 우리가 임금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곧 '극치'이다. 이 이치의 출처는 하늘의 섭리이고 또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겪고 경험하고 체험함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이란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인(仁)임을 알고 부모라는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자애(慈)임을 안다면 각각의 직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상호 구분되는지에 대해서도 틀리지 않게 될 것이다.
  265. 도덕률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고 명료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의 힘이 그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뜻이다.
  266. 사물에 접근하여 앎을 추구하는 일이 계단식으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267. 이 부분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주희의 대답의 논조는 질문자가 제기한 포인트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선은 아는 만큼만이라도 실천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라는 명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그렇게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부정사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앞부분의 '也無頓斷' 뿐이다. 따라서 뒷부분과의 일관성을 살려서 번역하기 위해서는 '也無頓斷'과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을 한 문장으로 합쳐서 해석하고 부정서 '무'는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사기(辭氣)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선은 사기의 흐름을 존중하여 번역해둔다. 頓斷에 대해서는 75:114를 보라. 8:21은 본 조목과 논조가 일치할 뿐더러 문장구조도 흡사한데, 여기서는 "배우는 이가 공부를 할 적에 한 '덩어리(頓段)' 큰 항목의 공부가 완성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장 직면한 자잘한 것들을 좇아 쌓아 나가야 한다. (學者做工夫, 莫說道是要待一箇頓段大項目工夫後方做得, 卽今逐些零碎積累將去.)"라고 하였다. 여기서 頓段과 본 조목의 頓斷은 현대 중국어에서 동음이의어(성조까지 같다)이며 Baxter와 Sagart가 재구성한 중세음으로도 동음이의어이다. 본 번역자는 주희의 서로 다른 제자들이 이 부분을 받아적으며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만약 頓斷이 頓段의 오기라고 한다면 이 조목의 번역은 8:21과 흡사한 방향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
  268. 바보같이 멍때리는 모습이다.
  269. 춘추좌씨전 애공 14년
  270. 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니 마음 속에서 도덕적 앎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도 인지, 후자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 번역자는 이러한 두 주석서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희가 대학장구식으로 해설하는 조목에서는 '심지가 확정된다'고 번역하고 대학혹문식으로 해설하는 듯하면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고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定說이 실은 定理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일역판의 역자들이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정설을 정리로 번역했다. 여기서도 일역판의 선택을 따랐다.
  271. 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이 다섯 글자는 다른 많은 이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272. 실천하려는 노력(工夫)이야 도덕법칙에 대한 앎이 익기 전에도 하는 거고 익은 후에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앎이 익으면 힘이 덜 든다는 것.
  273. 전자는 대학장구식 해석, 후자는 대학혹문식 해석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126과 14:163을 참조하라.
  274. 전자는 대상쪽에 이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앎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의 불안이 가셔서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해짐을 말한다. 17:34를 참조.
  275. 14:121을 참조하라.
  276. 대학에서의 워딩이 '有定'임을 기억하자. 14:126을 보라.
  277. 대학에서의 워딩이 '定而後能靜'임을 기억하자.
  278. 이 부분은 확정을 대학장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279. 고요함은 마음에 동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용된 대학장구의 두 구절은 현행본 대학장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280. 臲卼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역 곤괘를 보라.
  281. 당연하지만 편안함 쪽이 더 깊다는 말이다. 14:140을 보라.
  282. 대학장구에서 주희가 편안함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헌데 '所處而安'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소처'는 자리잡은 곳 혹은 처리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명사구인데 대학장구를 번역할 때에는 보통 '자리잡은 곳'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처리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283. 무엇과 무엇이 같은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역본에서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같은 뜻인 것으로 풀이했는데 일리가 있다.
  284. 성화9년본과 남본본(구스모토 마사쓰楠本正繼가 큐슈대학교에 기증한 조선고사본朝鮮古寫)에는 강(扛)이다. 들고 나른다는 뜻.
  285. 일역판에서 扛으로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다. 여기서도 따른다.
  286. '看~都'는 비록~이다
  287. 중용 23장을 말한다. 이곳에서처럼 중용23장에서도 동, 변, 화 등의 낱글자 개념이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288. 우(寓)는 '곳', '경우' 등의 의미이다. 다음 조목의 거의 같은 구문에서는 이 자리에 '처(處)'자를 쓰고 있다.
  289. 이 조목은 직전 조목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기록자가 다를 뿐이다.
  290. 후에 확인 필요.
  291. 여기서 간(看)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역판과 영역판에서도 이 글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처'자에 붙여서 '처리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우선 기록해둔다.
  292. 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것이다.
  293. 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떠야만 한다'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당위이다.
  294. 논어 1:7
  295. 看如何+동사+也는 '아무리 동사해도...'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생략되어있다.
  296. 예기 단궁상
  297. 좌전 양공 21년
  298. 좌전 희공 15년
  299. 논어 15:9
  300. 힘을 다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
  301. 살신성인
  302. 일역판에서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고 영역판에서는 '왜 사람은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다. 일역판은 이 부분을 당위의 실천으로 본 것이고 영역판은 원리의 탐구로 본 것이다. 바로 앞 구문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도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역판의 노선이 더 타당해 보인다.
  303. 일역판은 '확실하다'고 풀이했는데 적절하지 않다.
  304. 미우라 구니오(2012)는 모범, 형태, 샘플 등으로 번역했다. 영역판에서는 scheme.
  305. 대학혹문에서는 '능려(能慮)'를 설명하면서 극심연기(極深硏幾)라고 하였다. 자승이 어제 들은 설명에서 극심과 연기를 각각 지지와 능려에 배속한 것과 모순된다. 14:163 참조.
  306. '극심'과 '연기'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대학의 '지지'와 '능려'의 경우 '지지'쪽이 조금 더 학자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키우는 인상이 있고 '능려'쪽이 현상세계를 향한 관심의 표출 같은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극심과 연기를 나누어 배속하자면 극심을 지지에, 연기를 능려에 배속하는 쪽이 더 만족스럽다.
  307. 안돈은 안배이다.
  308. '앎이 지극해짐'의 단계를 말한다.
  309. 안(安)의 단계를 말한다.
  310. 앞의 14:146을 참조하라.
  311. 가장 이상적인 상태, 지선의 지점에 평안하게 머물게 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다. 이는 앎에서 시작하여 그 앎이 일신에 실현된, 즉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
  312. 이것이 '대학'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인지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일역판은 책제목으로 보았고 영역판은 학문 일반으로 보았다.
  313. 여기서 '인설(因說)'의 해석에 두 갈래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씀하신(설) 김에(인)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설지지지능득'까지 전체 구문을 받아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어서(인) 지지지능득에 관하여 해설(설)하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뒤에 받는 것이 없다. 미우라 구니오(2012, 302, 305)는 비록 다른 조목에서이긴 하지만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 일역판(2007)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영역판 역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314. '지지'에서 '능득'까지 일련의 시퀸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지어지선'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315. 일역판은 소지지실(所止之實)을 소지지지(所止之地)와 같다고 보고 그렇게 풀이하였다. 영역판의 경우 'attain substantially the point where to rest'라고 풀었는데 이는 '실'자를 부사로 처리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상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각각의 지점들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이렇게 해야 14:147과 잘 조응하게 된다.
  316. '확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14:163을 보라.
  317. 일역판에서는 '당연히 없을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했고 영역판에서는 'naturally reasonable'이라고 했다. 14:154를 참조하라.
  318. 154부터 156까지는 사실상 같은 구절이다.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해석은 어려울 것이 없다. 사소한 구문상의 차이는 기록자가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319. 정, 정, 안, 려, 득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
  320. 앞의 몇 개 조목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얻음(得)'은 '멈출 곳을 얻었다(得其所止)'의 '얻음'이다. 도리를 알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종단계, 즉 실천에까지 성공한 마지막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를 '터득했다'라든가 '체득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역판의 경우 자주 체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역판은 일관되게 attain을 쓰고 있다. 비록 모호한 맛은 있지만 그래도 attain쪽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321. 사려할 수 있게 해주는 선결조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하무리회'는 편안함에 대한 설명이어야만 한다. 영역판의 번역이 적절하여 취했다.
  322. 이름은 개(開)이다.
  323. 략(略)은 대강 하는 것이고 x일x(x一x) 같은 경우도 x를 한 번 해보다(대강 시도는 해보다) 정도의 의미이다. 무겁지 않게 툭 건드려 본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에 심(審)은 깊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는 느낌이 있어서 뉘앙스가 서로 어긋난다.
  324. 사려도 이성적 탐구행위이고 격물치지도 이성적 탐구행위이므로 양자의 차이를 질문한 것이다.
  325. 이 글자는 다른 모든 번역판에서 '구하다', '요구하다'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희의 마지막 발언을 고려할 때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형식이어야 말이 맞다. 이 글자가 '구매하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에 대해서는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 해당글자 항목의 9번째 뜻을 보라.
  326. 맹자 4B:23
  327. 문장 말미의 '재(在)'자는 단정적인 어조를 나타낸다.
  328. 뒤에 나오겠지만 여기서의 얻음(得)은 실제로 윤리적 실천을 해냈다는 뜻이다. 앞쪽에서 '사사물물의 리'를 알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처사의 리'를 '득'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얻어서 그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
  329. 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
  330. 다시 설명하자면 얻음(得)은 윤리의 인식과 실천이라는 한 사이클의 마침표이다. '터득하다'라고 해서는 실제로 화살을 쏘았다는 실천적 함의가 부족하다. '얻었다' '해냈다' 정도가 적합하다.
  331. 연기(硏幾)는 주역 계사상전의 '극심연기(깊이 파고들고 기미를 살핀다)'에서 나온 말이다. 눈 앞에서 진행중인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미묘한 변수들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말이다. 14:146 참조.
  332. 주역 계사상전
  333. 주역 계사상전
  334. 대학에서 말한 내용과 계사상전에서 말한 내용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동일하다는 뜻이다.
  335. 목지가 지적한 대로 두 텍스트는 확정(定)이라는 글자를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한 뒤에 그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력이 굳어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영역판(2018)에서는 이를 determination이라고 풀었는데 타당하다. 반면에 대학혹문에서는 각각의 마음 속으로 각각의 윤리적 당위가 확정적인 윤리적 당위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각각의 당위가 확정적이라고 믿게 되면 윤리적 실천을 향한 그 사람의 의지는 굳어질 것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쪽에서 주희가 '정'자의 훈고를 다르게 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336. 七顚八倒는 여러차례 넘어진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에 두 차례 나온다.
  337.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가운데 '심지의 확정'부터 '사려할 수 있음'까지를 말한다.
  338. 일역판에서는 '응당 씨름해야 할 문제다'라고 풀었다.
  339. 양자(樣子)는 모양새, 구조, 형태, 샘플 등으로 풀 만하다. 여기서는 지지에서 능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가리키므로 과정이라는 표현도 좋다.
  340. 앞선 몇 조목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이야기이다. 이 몇 가지는 자연스러운 진행순서이지 각 단계별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다.
  341. 각각의 상황과 사건에 있어서 각자가 처해야 할 최선의 스탠스,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포지션이 있다. 그런 포지션/스탠스가 '지선'이고 그런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함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사람이 눈 앞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상황/사건에서는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을 경우) 내 힘 닿는 한 도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지선)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 성공할 경우 '얻었다'고 한다. 명덕은 그런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내 내면의 밝은 빛(=명덕)이다. 무엇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인지에 대한 앎이 우리 내면에 본유한다고 보면 가장 훌륭한 스탠스란 사실 내 내면의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덕목과 남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전자는 객관도덕률 후자는 나의 도덕심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
  342. 이런 언급을 보면 주희는 확실히 실천 실패 현상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이다. 마음처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343. 취해 마땅한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진정으로 알았으면 실제로 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는 뜻이다.
  344. 일역판은 주희집 권57의 답진안경 2서와 5서, 그리고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여 주희의 이러한 밍밍한 태도에 대한 진순의 불만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진정한 앎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실천을 이어진다고 말한 순간 여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므로 양자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실패의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리스크를 자인하는 순간 맨 앞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실패할 수 있는 미션을 필연적으로 성공한다고 묘사할 수 있겠는가?
  345. 일역판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풀었다. 이는 '行得到'의 '到'를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강하게 풀이한 결과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v+得到은 단순히 '~해내다'정도의 의미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의 '進不得'이 '전진할 수 없다'인 것과 짝을 이룬다.
  346. 쉬지 않고 잘 걷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제대로 못 걷는 것을 '연하다'(軟)고 한다. 여기서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무르다로 번역했다.
  347. 8조목 가운데 언급 순서로 2위이다. 1위인 격물이 사실상 치지와 구분하기 어려운 단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동 1위라고 해도 좋겠다.
  348. 중용 제 20장에 '지인용'이라고 쓴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사소한 언급순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조금 과해 보인다.
  349. 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앎이 충분해도 인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 쪽의 의미는 앎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훌륭한 품성으로 그 앎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350. 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다섯 공부를 네 개로 압축하고 글자를 약간 바꿔서 인용한 것이다. 본래는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다.
  351. 이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다. 일역판은 '공부가 순숙해지면 서로 다른 면모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풀었다. '자장득'을 공부의 진전으로, '두면'을 면모로, '각별'을 서로 다르다로 풀이한 것. 왕효농의 영역본은 'this is the same thing-ev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different faces'라고 했는데 어쩐지 '자장득'은 누락된 듯하다. 여기서는 '지시저개물사'와 '자장득두면자각별' 사이에 찍힌 구두점을 빼고 해석하였다. 지/정/정/안/려/득으로 이어지는 시퀸스의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에 대해서는 14:160에서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라고 표현한 바 있다.
  352. 장재의 경학리굴에 나오는 표현이다. 근사록 권3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353. 황의강(黃義剛)의 형인 황의용(黃義勇)이다.
  354. 일역판의 교감기에 따르면 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15:47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조목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355. 14:168과 취지가 같다.
  356. 일역본의 각주에 의하면 '一AB如一A'는 A할 때마다 B가 된다는 뜻이다. 15:85와 61:43 참조.
  357. 직전 두 개 조목과 포인트가 같다. '앎' 부분에 힘을 쏟다 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될 거라는 낙관적 공부론이다.
  358. 앎이 지극해진다와 생각이 순수해진다는 팔조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이다.
  359. 이 부분을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앎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들을 추론하자면 대학장구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쇄작용의 전말을 하나씩 열거할 수 있다.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확정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이미 일어난 도덕실천을 사후에 돌이켜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도덕실천의 순간에 임해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여러 단계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단계별로 관측하고 숙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역판에서는 '대학장구에서 고요함(靜)을 해석한 부분은...'과 같이 풀었으나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