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노래 (生活譜) 편집

「짱 겐 보」

「짱 겐 돌」

「짱 겐 칼」

「옳지, 졌으니까 갔다 와야지.」

회관에서 돌아온 피곤한 몸을 등의자에 던지면서 주화가 명령하듯 이르니,

「로오자도 장에 가는 법 있나요?」

생끗 웃으며 주리야는 귀엽게 반박한다.

「로오자라고 장에 가지 말라는 법 있나?」

「싫어요—나는 무지한 암탉 되기는 싫어요.」

「그것이 소아병이란 거야.」

「카우츠키 부인이 행주치마를 입었다고 로오자가 크게 실 망하였다던 이야기 못 들었어요?」

「그 로오자가 나중에는 카우츠키의 집 부엌에 드나들며 그 자신 행주치마를 입고 요리를 배우지 않았나?」

「로오자가—부엌에서—암만해도 어색한 걸.」

「로오자가 별 사람이요. 필요에 따라서는 장에도 가고 밥 도 짓고 옷도 기워야지.」

「행주치마 입은 로오자.」

「참으로 장한 로오자는 부엌에서 나야 되지 않겠소?」

「나는 공설시장의 로오자인가요?—장에 가는 건 내게만 맽 기니.」

「암, 공설시장의 로오자요, 방안의 로오자요, 거리의 로오 자요.」

「아이구 수다스러운 로오자, 그런 로오자는 오늘부터 폐 업이여요.」

「땅속의 로오자가 슬퍼하게—어서 장에나 갔다 와요.」

「갔다 오지요. 그러나 반갑지 않은 비행기를 탄 바람이 아니고요, 생활을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으로요—저는 생활과 공설시장을 남달리 사랑하니까요.」

책상 위에 펴 놓은 로오자 전기의 읽던 페이지를 접어서 덮고 주리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공설시장을 자세히 관찰하신 일 없지요? 그곳은 정말 생 활의 자치 마당이예요. 가지각색 식료품의 렛텔, 싱싱한 야 채의 동산, 신선한 냄새—그 곳에 마님, 아씨, 늙은이, 젊은 이가 들섞여서 볶아치는 풍경—그같이 신성한 풍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또 공설시장의 철학인가? 그러면 야채를 배경으로 하고 바구니를 들고 섰는 주리야의 초상화가 예수를 안고 선 마 리아의 그림보다도 성스럽단 말이지?」

「그러믄요. 유물론의 철학은 공설시장의 철학에서 시작되 고 ××의 감격은 공설시장의 감격에서 시작되는 줄 모르세 요?—바구니에 나물을 그득히 사서 들고 저무는 햇빛을 등지 면서 공설시장 앞을 거닐기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기와 영채에 넘치는 두 눈에 재롱과 미소를 담뿍 띄우면 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주리야의 자태가 늘 보는 것이언만 피곤한 주화의 눈에는 오히려 찰란하게 비치어 나른한 머리 속을 현혹하게 하였다.

(나물 바구니—생활 바구니.)

노랫조로 흥얼거리면서 주리야는 붉은 버들로 결은 바구니 를 들고 부엌에서 올라왔다.

「새파란 나물 담아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구니—생 활과 문화와 혁명을 낳는 바구니—이 속에 시금치, 미나리, 파, 배추를 그득히 사가지고 올께요.」

하고 그는 책상 위의 벙어리를 집어들고 절렁절렁 흔들었다. 가느다란 병어리의 입에 칼끝을 넣고 흔드니 빼죽이 솟 는 돈 닢이 한 닢 두닢 좁은 입으로 새어나왔다. 날마다 푼 푼이 드는 잔 비용은 물론이요, 사진 구경가는 돈, 거리의 끽다점에 차 마시러 가는 돈푼까지도 이 벙어리가 그 좁은 입으로 일일이 변통하여 주는 터이었다. 그러나 이 벙어리 는 저절로 돈푼이 솟는 화수분도 아니요 그득그득 돈이 모 이는 저금통도 아니요 말하자면 순전히 소비의 항아리였다.

일정한 생산이 없는 r들은 단번에 저금하였던 돈을 틈틈이 찾아서는 이 벙어리 속에 넣고 날마다 한 닢 두 닢 흔들어 내서는 소비하여 버릴 뿐이었다. 저금이 어느 날까지나 갈 지는 그것 떨어지는 날이 곧 그들의 생활이 끊어지는 날이 아닐지—이것을 생각할 때에 벙어리의 절렁절렁 울리는 소리 가 주화에게는 마치 저주의 소리와도 같이 들릴 때가 있었다.

「그럼 갔다 올께—그동안에 풍로에 숯이나 피워 노세요.

네?」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애 모양으로 주리야는 별안간 주화에 게 덥석 전신을 의지하면서 이마에다 이마를 맞대고 짓문질 렀다. 그것은 물론 애정의 진한 표현이었으나 동시에 늘 하 는—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버릇이었다.

「능금 한 입 드릴까?」

장에 가는 길에 먹으려던 한 개의 능금을 바구니 속에서 집어내서 한 입 덥석 베어 물고 하아얀 입 자리를 주화의 입에 갖다 대었다.

「아서요. 한 입 이상은 안되요—행길에서 먹을게 없어지게.」

주화의 입 자리를 다시 버쩍 물면서 주리야는 주화의 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마루 밖으로 사뿐 나갔다.

아담을 영리하게 한 과일 나의 능금 누가 사노 역사 책에도 적혀 있지— 아담이 능금 따먹길래 새 낙원 내 앞에 열렸네.

「모로코」에서 디이트릿히가 부르던 능금의 노래를 콧소 리로 읊으면서 주리야의 자태가 대문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 주화는 그도 모르는 결에 알지 못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한숨—일에도 피곤하였지만 짙은 주리야의 애정에도 확실히 피곤하였다고 주화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주리야의 콧노래가 골목 밖에 은은히 사라졋을 때에 주화 에게는 두번 한숨이 새어나왔다. 휘덥덥한 느낌을 못이겨 그는 마침 등의자를 들고 서재(건넌방을 주리야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마루로 나갔다.

어느덧 뜰안에 봄이 가득 하였다. 따끈한 햇볕에 섬돌 아 래 흙이 봉곳이 솟아오르고 주춧돌 밑에 풀싹이 뾰족뾰족 움터 올랐다.

(벌써—봄.)

주리야와의 몇달 동안의 생활이 꿈결같이 지났다. 주화는 새삼스럽게 전신에 봄을 느꼈다. 석달 동안에 그는 주리야 에게서 무엇을 얻고 주리야에게는 무엇을 주었던가. 그것을 생각할 때에 이 봄이 그에게는 도리어 우울한 것이었다.

(로오자는 못되더라도—밋밋하게 바로나 자랐으면.)

가정과 성격의 탓이라면 그만이지마는 그러나 주화의 마음 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리다가 고양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끌 데까지는 이끌고 가야겠다는 주화 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행길에서 능금을 아귀아귀 먹고, 다 먹고 난 속심을 뾰족 한 구두 끝으로 툭 차버릴 주리야—공설시장의 야채의 감각 과 진열장의 미학에 취하여 가게 앞을 기웃기웃하고 있을 주리야—무엇보다도 즐기는 버터를 반 파운드를 살까 한 파 운드를 살까 망설이면서 남달리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를 두 눈 아래 길게 떨어뜨리며 가난한 지갑 속을 애틋하게 들 여다보고 섰을 주리야—가지가지의 주리야의 자태를 마음속 에 그려볼 때 주화에게는 석달전 주리야가 처음으로 상경하 였을 때의 기억이 솔솔 풀려나왔다— 저무는 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기 족하리만치 굵은 눈 송이가 함박같이 퍼부었다.

연말을 끼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주화는 종일 회관에서 일을 보다가 조그만 셋방으로 돌아오니 누운 채 깊은 잠이 폭 들었다. 깊은 잠속에 꿈이 새어들고 꿈속 에서 그는 의외에도 한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너무도 의외 의 인물의 방문에 의아하여 꿈속에서도 그는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고 두번째 만나는 그 아름다운 여성의 자 태에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두어 주일 전에 동무들 과 같이 고향인 관북 방면에 유물론 강연을 갔을 때 S항구 에서 만난 그 여자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적음을 탄식하던 끝에 S항구라 예측 이상의 활기에 기운을 얻은 그 는 강연을 마친 후에 여관에서 그의 강연에 공명한 한 나어 린 아름다운 여성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엥겔스 거얼이 라고 부를 정도가 채 못되느니만치 생각은 어렸으나 기개만 은 귀엽다고 생각하였다. 나어린 감격 끝에 그는 가정과 일 신상의 형편까지 일일이 주화에게 이야기하였다. 집안은 거 부는 못되나 어머니와 한 분의 오빠를 섬겨서 그리울 것이 없는 지주의 가정이라는 것, 근방의 여자 고보를 마친 후 근 일년 동안이나 가정에 묻혀 있다는 것, 그의 의사를 무 시한 혼담에 졸려 날마다 우울히 지낸다는 것 등등의 사정 을 기탄없이 이야기한 후, 그러한 완고한 가정을 배반하고 진보적 생각으로 세상을 알아볼 결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앞 으로 지도를 바란다는 뜻을 간곡히 다졌다. 그의 진보적 생 각이라는 것의 정도를 짧은 시간에 진맥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형편에 동정하고 기개를 귀히 여겨 청하는 대로 주화 는 서울의 주소까지 적어 주었던 것이다—비록 꿈속일지라도 이 생각지 않았던 처녀의 방문은 전연 뜻밖이었다. 처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쁨 인지 슬픔인지 목소리를 놓고 울었다. 울음소리는 점점 높 아갔다. 너무도 돌연한 변에 주화는 어쩔 줄 모르고 무죽거 리는 동안에 문득 꿈에서 깨었다. 스산한 느낌이 전신에 쭉 흘렀다. 어느맘 때인지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밖에서는 처마를 스치는 눈 소리가 설렁설렁 들렸다.

이 때 별안간 문밖에 인기척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이니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가는 여 자의 음성이 들렸다.

「선생님 계셔요?」

주화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에!」

문밖에는 지금 망간 사라진 꿈속의 여자—S항구의 처녀가 서 있지 않은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주화는 넋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말없이 물끄러미 밖을 내다 보았다.

「저를 모르시겠어요?—성진 사는 김영애요.」

「대체 웬일이요—들어오시오.」

「편지도 안 드리고 문뜩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하면서 손에 들었던 슈우트 케이스를 주화에게 주고 외투 를 벗어 눈을 후둑후둑 털었다.

「눈이 어떻게 퍼붓는지 첫길에 집을 잘 찾을 수가 있어야 지요.」

방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머리의 눈송이를 활활 털어내렸다.

공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색채가 초라한 방안에 바다같이 넘쳤다. 주화는 그러한 방에 그를 맞이하기가 괴로왔다.

그러나 영애는 가난한 방안의 정경은 생각도 안하는 듯이 천진스런 눈초리로 방안의 구석을 살펴본 후에 주화를 방긋 이 바라보면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예요—왜 그리 일찍 주무세 요?」

듣고보니 주화는 비로소 그런 줄 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크리스마스의 정서—그것을 이 먼 곳에서 온 처녀에게 서 비로소 들어 깨쳤던 것이다.

「그까짓 크리스마스고 무엇이고 우리에게 상관있소—그것 보다도 대체 이렇게 돌연히 웬일이요.」

「결혼이니 무엇이니 귀찮아서 집을 가만히 도망해 왔지요.」

「흠—대담한 용단이시군.」

「아무리 제가 무지하다 하더라도 머리속이 백지장같이 하 아얀 넌센스 뽀이와 어떻게 결혼하겠어요. 오빠들이 꾀한 정책 결혼의 희생이 되기 전에, 가엾은 노라가 되기 전에 집을 도망해 나온 것이예요—지금쯤은 집안이 발끈 뒤집혀서 야단일 걸요. 어떤 일이 있든지 집에는 다시는 안돌아갈 작 정이예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성산은 계신가?」

「구체적 성산이래야 별것 없지요—막연히 선생님을 믿고 올라왔으니까요.」

「나를 믿다니 내게 무슨 도리가 있겠소?」

「순전히 선생님 한 분을 믿고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올라왔지 선생님이 안계셨던들 이렇게 용감히 집을 떠나지 는 못했을 거예요. 시골서 처음 뵈었을 그때부터 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거의 결정적으로 마음속에 파고 들었어요— 이곳에 살면서 선생님께 배우며 공부나 하여볼까 하는 생각 이예요.」

「공부라니 집과 교섭이 없이......」

「경제 말씀이지요—당분간 살 만한 것만은 준비해 가지고 왔지요.」

하고 그는 슈우트 케이스를 열더니 꽤 두터운 지폐의 묶음 을 집어내서 주화의 앞에 놓았다. 주화는 놀라서 그를 똑바 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빠의 통장을 훔쳐다가 있는 대로 찾아냈지요. 얼마 되지는 않으나 애껴쓰면 한 일년 지탱해 갈는지요.」

이 당돌한 처녀의 행동을 용감하다 할는지 준비가 주밀하 다 할는지—주화는 어이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 었다.

이어서 그는 슈우트 케이스 속에서 화장품 등속과 몇권의 책을 집어냈다. 책이래야 두어 권의 소설책을 내 놓고는 자 본주의 개략, 유물론 초보, 경제학 ABC...... 등 얇다란 몇권 의 팜플렛이었다.

「폐롭지만은 불가불 선생님의 지도와 애호를 빌어야겠어요.」

하면서 그는 풀었던 짐을 다시 쌀 척은 하지 않고 책은 책 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화장품 그릇은 그 밑에—빈 가방은 그대로 쇠를 채워 방 한구석에 간수하였다.

주화는 그자리에서 든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단 두번 만나는 여자의, 그 위에 독단적으로 집 을 배반하고 나온 여자의 일신을 책임지고 맡기는 거북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의 요구하는 것이 지도의 정도를 넘 는 개인적 애정의 문제인 이상 비록 주화 자신의 사상의 경 계를 건너서 그 이상의 감정을 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느낀 다 하더라도 가닥길에 선 그의 일신의 조처를 임의로 처단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냉정히 생각한 후 주화는 그의 뜻을 단념시 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하여 보았다. 그는 실 망한 듯이 한참이나 말없이 눈을 내려 감고 앉았더니 별안 간 자세를 이지러뜨리고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앞에서 하는 모양으로 발버둥치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만류하여 도 듣지 아니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주화에게 대한 애정 의 절대적임을 언명하였다.

하는 수 없이 주화는 그의 지도적 방면에 전력을 다하기로 하고 마침 그의 마음을 굽혀 그의 희망을 듣기로 하였다.

영애는 뛸듯이 기뻐하며 다음날부터 즉시 지니고 왔던 돈을 풀어 두 사람의 살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조촐한 집 한 채를 삭월세로 빌려놓고 약 백원을 풀어서 세간을 장 만하고 따로 백원을 들여 몸을 치장하고—나머지의 삼백원을 생활비로 저금하여 두고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푼푼이 찾아 생활에 소비하는 것이었다. 「김영애」란 성명까지 버리고 주화의 성「주」를 따고 그의 좋아하는 작품 속의 인물「리 야」를 빌어다가 멋대로 「주리야」란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일정한 생산과 수입이 없는 주화는 약간의 마음이 괴롬 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이 그의 정 을 솔직하게 받아들여 도무지 예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정 경 밑에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애인이라고는 하였으면 좋을는지 아내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혹은 하우스 키이퍼(이렇게 부르기는 과 남하나)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명칭 모를 주리야와의 생활 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 펴지 않은 노랑빛의 아름다운 책에 대한 애착과 감흥 —주리야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그에게 느낀 첫 감흥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 장 두 장 펴가는 동안에 얼마나 아름다 운 이야기와 흥이 솟아나올까 하는 예감에 전신의 피가 수 물거렸다. 사실 신비로운 문을 열고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생활의 책장을 펴가는 동안에 가지가지의 매력과 기쁨이 줄 기차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이란 어디까지든지 노랑 빛 분홍빛의 찬란한 것이었다. 그칠바를 모르는 찬란한 색 채의 전개—책은 아직 반도 넘기기 않은 이제 주화는 주리야 의 열정에 현기증이 나고 두통이 났다. 겨우 석달이 되는 이제 마음과 몸의 피곤이 완전히 그를 정복하여 버린 듯도 하였다. 석 달동안 이 심신의 피곤 이외에 그가 주리야에게 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가 주리야에게서 준 것은 무 엇이던가를 생각할 때 주화의 심중은 괴롭고 우울하였다.

뜰 앞에 짙어가는 봄을 무심히 바라보며 등의자에 앉아 있 노라니 가지가지의 추억과 애상이 나른한 그의 머리속을 아 른아른하는 아지랑이같이 휩싸고 돌았다—

「아이구 무엇을 우두커니 생각만 하고 계셔요?」

생각에서 번쩍 놀라 깨니 어느결엔지 살짝 들어와 마루 앞 에 생긋 웃고 섰는 주리야. 바구니에는 푸른 나물이 수북 담겨 있었다.

「—입때 숯불도 안 피우셨군.」

부엌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주화를 쳐다보며,

「오늘 저녁은 벌로 빵과 카페(코오피를 그는 불란서 식으 로 이렇게 말하였다.)예요. 누가 혼자 귀찮게 불을 피우고 밥을 짓겠어요. 나물로는 생것 대로 샐러드나 맨들구요.」

하면서 나물 바구니를 마루 끝에 놓고,

「그대신 연유와 좋은 버터 한 통 사왔지요. 좋은 버터라 고 하꾸라이가 아니라요, 크로오바표 말예요. 나는 북해도 버터보다도 명치 버터보다도 이것이 제일 좋아요. 가난해서 더 좋은 것을 못먹어 본 탓인지.」

그러나 그 소위 가난한 것을 탄식하는 표정도 없이 갸름한 종이 갑에 든 크로오바 버터를 비롯하여 우유통, 계란, 나물...... 등 사온 것을 한 가지씩 집어 내서 마루 위에 늘어놓았다.

주리야가 제 비위에 맞도록 꾸며낸 독특한 생활양식—밥과 빵, 버터와 고추장, 김치와 샐러드, 카페와 숭늉—이 칵테일 식 생활양식에 주화도 이제는 어지간히 익어 왔다.

마치 그가 버터 냄새나는 주리야의 사랑에 단련되어 온 듯이. 그러기 때문에 주리야가 나물 바구니 속에 버터통을, 어 떤 때에는 햄이나 소시지 조각을 사넣고 와도 그것이 주화 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도리어 그의 식욕의 취미와 합치 되게까지 되었던 거다. 주리야가 어느 때인가 「버터 먹을 줄 모르는 사람같이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하고 탄식하였을 때 주화가 「버터 먹을 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요, 경제력이 허락치 않으니 먹지 않을 뿐이 지」하고 도리어 톡톡이 핀잔을 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시간이 바쁜데 얼른 저녁 지어요. 오늘밤에는 약속한 곳 에도 가야하지 않겠소?」

등의자에서 내려서면서 주화는 재촉하였다.

「바쁘니까 간단하게 빵으로 하겠어요—석달 동안이나 데리 고 간다고 벼르시더니 오늘이야 정말 데려다 주실 작정이군요. 대체 어떤 성스런 가족이고 훌륭한 집안이예요.」

「석달 동안이나 벼르고만 있은 것은 성스럽고 훌륭한 가 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리야에게 그 집안을 견학할 자격 이 아직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지.」

「자격이라니요? 저를 무시하는 말씀이지, 저도 시골 있을 때에는 여직공과도 친해보고 남편을 옥에 둔 가련한 부인을 사귀어 본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단 말요?」

「그런 말씀 왜 새삼스럽게 하셔요?」

「그럼 얼른 저녁 지어 먹고 일찌기 가봅시다.」

「네—제가 불피우는 동안에 미나리나 좀 다듬어 주셔요, 네?」

기뻐서 날뛰면서 주리야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뛰어들 어간다. 굽 높은 구두 뒤꿈치 위의 회색 양말이 한 점 빼꿈 이 뚫어져 뾰족이 내다보이는 하아얀 한 개의 별—석달 동안 이나 주화를 괴롭혀 온 그 살빛의 향기가 이제 다시 신선한 매력을 가지고 그의 시선을 끌었다.

성가족(聖家族) 편집

「대체 어데까지 끌고 가실 작정예요?」

「따라만 오구려.」

「지도에도 없는 세상 속으로 데리고 가실 셈이군.」

「지도에 없는 세상일는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지도에 없는 세상이라면 천당과 지옥인데 끌고 가시는 곳이 대체 어데예요?」

「지옥일는지도 모르지.」

「맙소사. 천당으로 못 데리고 가실지언정 지옥으로 끌고 가시겠어요?」

「그럼 천당으로—」

「성스러운 가족 사는 세상으로요.」

종종걸음으로 주화의 뒤를 따라가는 주리야는 이 한가하지 못한 경우에도 필요 이상의 재담으로 두 사람의 회화를 장 식하려 하였다.

수구문 안, 전차를 내려서 좁은 옆 골목으로 한 마장 가량 이나 걸어들어가도 길은 구불구불 구부러져 끝나는 곳이 없 었다. 전등 하나도 달리지 않은 골목 안은 유심히도 어둡다.

도희의 불빛이 밤하늘 위에 우렷이 흐려있을 뿐이요, 그것 이 이 동떨어진 어두운 골목 안까지 비취이지는 않았다. 서 울 온 지 석달에 아직 거리 거리의 지리가 밝지 못한 주리 야에게 이 궁벽한 지대는 생각지도 못한 딴 세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전등 하나도 없다니.」

길바닥이 어두워서 발밑이 허전허전하는 주리야는 주화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신히 길을 더듬으면서 게두덜거린다.

「아마도 지옥인가보오.」

껄껄 웃는 주화가 얄궂게 생각되었다.

「난 도로 갈테예요.」

「여기까지 왔다 도로 가다니...... 가만 있소. 다 왔나부오.」

하면서 주화는 무뜩 눈앞에 닥치는 대문 앞에 머물렀다.

「낙원에서 지옥까지가 아흐레 동안의 길이라더니 전찻길 에서 여기까지 아마 구븐은 걸렸나봐요.」

「농담은 그만 두고 따라 들어오오.」

대문 밑으로 손을 넣어 도래를 틀고 손 쉽게 문을 열더니 주리야를 안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지옥이고 천당이고 간에 다 왔으니 시원하군요.」

한 간의 조촐한 대문과는 딴판으로 뜰안은 침침한 어둠 속 에 넓직하게 퍼져 있고 그 네모에 마룻대를 달리한 여러 채 의 초라한 집이 들어섰음을 보아 그 안은 한집안이 아니라 채마다 다른 가호가 들어있음을 주리야는 짐작할 수 있었다. 뜰 복판에 지붕없는 우물이 있었다. 어둠속으로 보아도 돌 틈에 푸르칙칙하게 이끼 끼인 그 우물이 집안 전체에 우 중충한 느낌을 주었다. 가호마다의 생활의 자태를 첫눈에 엿볼 수는 없었으나 전체에서 받는 첫인상은 심히 우중충한 것이었다. 우물과 같은 칙칙한 생활의 그림자가 집안 구석 구석에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밑 조심해요.」

주화는 우물 옆을 돌아 구석으로 훨씬 들어박힌 서편 가호 의 뒤로 돌아갔다. 첫걸음의 발 설은 어둠길을 주리야는 위 태위태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른 가호와 동떨어져서 외딸리 아늑하게 서편으로 향한 그 집을 돌아 정면에 이르렀을 때에 좁은 뜰로 향한 두 간 의 방에서는 희미한 등불이 흘러나왔다. 인기척이 없고 고 요한 공기가 바닷속같이 주위에 잠겨 있다.

「바로 이 집이요.」

「성당같이 고요하군요.」

야트막한 툇마루에 오르더니 주화는 말도 없이 아랫방 문 을 열고 서슴지 않고 들어갔다.

「주선생님이시요?」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여인네의 얼굴이 밀장 사이에 어리 웠다.

「시스러워 여기지 말고 들어오.」

주화는 주저하는 주리야를 내다보고 다시 여인네를 향하였다.

「주리야를 데리고 왔는데.」

여인네는 벌떡 자리를 일어서더니 마루로 뛰어나왔다.

「들어오시오.」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초면의 따뜻한 손길에 끌려 주리야 는 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첫 인사는 아무 것도 없이 끔직이도 반가워하여 주는 따뜻 한 애정에 주리야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듯한 친밀한 느낌 을 받아 그 자리에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어지러운데 와주시노라구.」

여인네—주화에게서 늘 들어온 남죽은 방안에 어지럽게 널 려진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어 한구석에 뭉쳐 놓았다. 오 랫동안 고생에 폭 바스러진 까무잡잡한 남죽의 얼굴에 주리 야는 첫눈에 친밀한 「언니」를 느꼈다.

「진작 오려던 것이 생각만 앞서고 여의치 못했어요.」

「나야말로 늘 주선생께서 듣기만 하면서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남죽은 주리야를 진득이 바라보며,

「살림살이 바쁘시지.」

고향이 같은 관북의 이웃 고을이라는 생각이 도와서인지 즉석에 한집안 식구와 같이 피차의 감정과 의사가 유통되었다. 몇마디를 건너지 않아 벌써 두 사람의 마음은 긴밀히 접촉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땅속의 세상일 는지도 모르기는 하나 주리야가 오기 전에 생각하였던 것같 이 낯설고 서마서마한 곳은 아니요, 마음의 세상에는 땅 위 땅속이 없이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쉽게 합류되었던 것이다.

「오늘 면회하였소?」

주화는 남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돌렸다.

「면회는 못했어요. 요전에 면회한 지 몇날 안된다구 허가 를 해주어야지요. 겨우 헌 옷가지를 차하해 왔을 뿐이지요.」

「공연히 공장만 하루 때려눕혔군요.」

「그런데 요사이 건강이 퍽 부실한 모양이여요.」

「그 동무 말아니군—검거될 때부터 심장이 약하던 사람이 예심에 거의 일년이나 있게 되니 안그럴 리 있겠노.」

「요전에 면회할 때부터 신관이 몹시 축났기에 걱정은 했 지만—오늘 편지로 자세히 들으니 아주 심한 모양인데요.」

「편지로요?」

「차하해 내온 옷을 뜯었더니 저고리 솜 갈피 속에 이런 것이 나왔어요.」

하며 남죽은 치마띠 사이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한 장의 종 이 조각을 집어내서 주리야의 눈앞을 서슴지 아니하고 주화 에게 주었다.

「혈서이군.」

종이 조각을 펴 들자 주화의 양미간에는 볼 동안에 수심의 주름이 잡혔다.

「입술을 깨물고 피를 내서 간수의 눈을 숨겨 가며 차입해 준 코종이에 깨알 박듯 그렸겠지요—늘 하는 짓이니.」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서 주리야는 가벼운 몸서리를 치 면서 주화가 든 혈서의 조각을 무시무시 바라보았다. 내려 읽는 주화의 손이 약간 떨리는 듯하였다.

이 긴장된 침묵 속에서 주리야는 불시에 수군거리는 사람 의 음성을 들었다. 귓속말을 하는 것 같고 외국어의 단어를 외우는 것도 같은 가는 목소리는 확실히 웃방에서 흘러나오 는 것이었다. 주리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닫겨있는 웃방에 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주리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닫겨 있는 웃방 장지를 바라보았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들린 후 책 덮는 소리 가 나더니 웃방 장지가 가볍게 열렸다.

그칠 새 없이 들리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상스러워서 은 근히 그쪽만 바라보고 앉았던 주리야는 열린 장지로 나타난 그 인물에 적지아니 놀랐다.

「저이가......」

주리야는 집에 가끔 주화를 찾아오는 그 대학생을 이 낯설 은 곳에서 만날 줄은 전연 예측하지 못한 바였다.

「주동무요.」

가벼운 목례를 하면서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그는 주화들이 와 있는 줄을 번연히 알고 있으련만 의아한 눈초리로 주리 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주리야의 더욱 이상스 럽게 여긴 것은 뒤미처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낯설은 처녀였다. 어떤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그 처녀가 남죽의 동생 남희인 줄은 물론 첫눈에 집작할 수 있었으나 그와 이 대학 생이 한방에서 수군거리는 친밀한 사이에 있다는 것이 그러 한 장면을 처음 당하는 주리야에게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에스페란토 어려워서 못해 먹겠다.」

낯설은 주리야를 보고 문턱에서 주춤한 남희는 부끄러운 펴정을 이런 탄식으로 얼버무려 넘기면서 언니 옆에 사뿐 내려와 앉았다.

주리야는 여자다운 민첩한 신경으로 수줍어하는 남희의 태 도와 겸연쩍어서 잘 어울리지 않는 대학생과 남희 두 사람 의 서먹서먹한 이를 첫눈에 느꼈다.

「한달이나 두달로 그렇게 쉽게 깨치겠소?」

대학생인 민호는 딴전을 보면서 남희에게 말하고 주리야를 바라보며,

「주동무는 불란서말 공부하신다지요?」

주화를 부를 때 쓰는 「주동무」로 주리야를 부르는 것이 약간 귀에 거슬렸으나 그러나 그 속에는 은근한 친밀의 느 낌이 없지 않음을 깨달은 주리야는 그를 바라보며 솔직하 게,

「심심풀이로 강의록을 뒤적거릴 뿐이지 정성을 들여야 말 이지요.」

「남희 불란서말은 안 배우려우.」

「그렇게 한가한 것 배울 틈 있나요.」

민호의 농담에 남희는 가볍게 반박하며 주리야를 흘끗 바 라보았다.

웬일인지 이 한마디가 주리야에게 불현듯이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에스페란토를 공부하는 남희와 불란서말을 공부하 는 자기와의 의식의 정도, 피차의 생활양식의 차이—를 주리 야가 생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이 말에서 받는 불쾌한 느낌을 마지 못하였다. 남죽에게 「언니」를 느낀 그는 남희에게도 응당 친밀한 느낌을 받아야 할 것이나 웬 일인지 만나는 첫 순간부터 도리어 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몸이 대단히 불편한가 본데.」

편지에만 열중하였던 주화는 비로소 고개를 들면서 남죽을 바라보았다.

「이왕 들어가 있는 이상 고분고분히 일르는 대로 했으면 좋을 것을 공연히 쓸데 없는 반항을 하는 모양이예요.」

남죽의 뒤를 남희가 받아서,

「아재는 원래 피가 관 분이래서 쓸데없는 고생을 더 하시 게 되지.」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청대로 보석 운동을 해보시지.」

「보석 운동인들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보석이라면 저도 힘써 보지요.」

민호가 입을 열었다.

「본인의 희망도 있으니 우선 이변호사를 찾아서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나도 만나는 대로 말해 보지만.」

「이변호사에게 폐를 끼친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형무서에 서 여간해서 승낙하겠어요? 병이 쇠해 빠져서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출옥을 시키는 형편인데.」

한숨을 짓고 남죽은 계속하여,

「그러고 둘째로 보증금이 수백원은 들 터인데 그것을 또 어데서 어떻게 구하겠어요.」

「어떻든 유예할 경우가 아니니 내일이라도 곧 이변호사를 찾아보시도록 하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죽은 날쌔게 혈서를 접서어 치마 틈에 수습하고 널어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걷었다.

박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누구시라구요.」

긴장이 풀리며 남죽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직들 다 오지 않었소.」

박선생은 문득 주리야를 발견하고,

「주씨 웬일이요.」

의아한 눈을 던졌다. 늘 집으로 찾아오는 박선생 처소를 항상 변경하면서 돌아 다니는 그에게 가끔 저녁을 대접한 일까지 있는 박선생—그를 문득 이런 곳에서 만나니 친밀한 느낌이 났다.

「바람도 쏘일 겸 놀러 왔지요.」

「놀러......」

「올 때들이 되었는데 아직 안 오는군.」

주화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모임이 있나 부구나—주리야는 직각적으로 느꼈다. 놀 러왔다는 말을 듣고 박선생이 놀라는 것이며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도 주화는 모임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극히 신중히 해나가는 모임인 것같이 짐작되었다. 따라서 그가 참례할 바가 못 된다는 것도 느꼈다.

「나는 이만 실례할까요?」

하고 주화의 의견을 묻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글세...... 있으려면 있구.」

꼭 있으라고는 권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임에는 참석 시키지 말고 우선 집만 가리켜 줄 작정인 듯하였다.

「더 놀다 가시지, 이런 것 저런 것 보아 두세야지.」

박선생의 권고를 그러나 주리야는 사양하고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문밖의 아마도 「동무」들의 몰려오는 듯한 발소리 가 났다. 그것을 기회로 주리야는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오.」

하고 그를 보내는 주화에게 체면에 차마 달려들어 어리광 을 피우지는 못하고 점잖게 대답하면서 좌중에 목례를 남지 고 방을 나갔다.

「아리랑에 잠간 들렸다가 바로 집에 가 있을께요.」

야영 백화점에 들려 늘 하는 버릇으로 막연히 찬란한 층층 을 한 바퀴 돈 후 식당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다시 단골로 다니는 조촐한 차점 「아리랑」에 들려 진한 코오피를 청하 였다.

코오피 인이 꼭 박혀버린 주리야는 하루에도 여러 잔은 예 사로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그의 건강을 해롭히지 는 않았다. 코오피의 향기와 쓴 맛이 그의 비위에 꼭 맞았 던 것이다.

(발자크는 긔의 일생을 코오피 마시고 소설 쓰는데 바쳤다지. 나도 그이와 같이 자바보다도 브라질보다도 모카가 제일 좋아. 소설 쓸 재주는 없으니 평생 코오피나 실컷 마셔 볼까)하면서 그의 코오피의 습관을 발자크의 풍류에 비기는 주리야였다. 그러나 그 습관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어 색한 것이 아니고 그의 생활 감정에 꼭 들어맞는 극히 자연 스러운 것이었다.

「크림은 넣지 말까?」

「아무렴. 시커먼 진짬으로 한 잔.」

어느결엔지 벌써 퍽 친밀한 사이가 된 차점의 여주인 한라 에게 주리야는 손짓과 웃음을 던졌다.

「오늘 난 좋은 곳에 갔다 왔지.」

한라가 손수 코오피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손님이 없는 고요한 탁자에 주리야와 마주 앉았을 때에 주리야가 입을 열었다.

「좋은 데라니. 천당에?」

「천사들이 있는 대신 거츠런 장정들이 모이는 곳에.」

「장정들이 모여서 천국을 세우려고 애쓰는 곳에 말이지.」

「나는 거기서 이때까지 보지 못한 끔찍한 세상을 보았소— 피가 난 모둠 계획.......—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막연히나 마 짐작되는 것 같애.」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유쾌한 레코드나 한 장 걸가.

주리야 좋아하는 기타 솔로라도 한 장.」

하면서 일어서려는 한라를 그러나 주리야는 고개를 흔들며 붙들어 앉히고,

「오늘밤 만은 나의 기분을 깨뜨리지 말고 고요히 그대로 두어요......나는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랫동안 잊었 던 한 구절의 시가 가슴속에 솟아 오르겠지.」

「에구, 오늘밤에는 또 왜 이리 센티멘탈해졌어.」

「놀리지 말구 이것 좀 들어봐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리야는 한 구절의 시를 읊기 시작하 였다.

하아얀 횟돌의 조각이 있고 꽃향기 넘치고 햇볕이 창에 얼기설기 비치는 곳 이글이글 타는 난로와 음식장과 유리잔 있는 곳 거기에서 꿈을 꾸고 그대를 생각하기는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이지러진 한 개의 탁자가 있다.

쉬어빠진 한 잔의 술이 있다.

낡은 한 권의 성서가 있다.

끄슬러서 침침한 등불이 있다.

시들어버린 아스파라거스가 있다.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

유리창 밖에는 진눈깨비와 바람이 불고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에 떨지 않으면 안될 시절이니라.

「아니 어데서 그런 시를 외웠소?」

듣고 난 한라는 가벼운 미소를 띄우면서 주리야의 코를 끄 들었다.

「훌륭하지. 지금 현실을 그대로 읊은 아름다운 노래야.」

「가난한 줄 이제 알었나. 지금이야말로 너나 내나 세상 사람이 모두 싸움터로 나가야 할 시절이니라—고 고쳤으면 좋겠군—우리도 현재 이런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시가 아니라 소시민적 감정을 표현한 잠꼬대야.」

「이지러진 탁자. 쉬어빠진 술. 어두운 등불—시상으로 얼마 나 훌륭하우. 나는 여기에서 한 편의 푸로시를 발견한 듯한데.」

「푸로시에 아스파라거스는 다 무어야. 세상에는 아스파라 거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렁우. 진정한 푸로시 되려면 아직 구만리의 거리가 있어.」

사귄지는 오래지만 한라에게서 이러한 독특한 의견을 듣기 는 처음이었다. 마음속에 그 무엇이 있듯이 평소에 멍하고 있는 한라이지마는 그러나 그러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이러 한 소리를 하는 호늘밤의 그가 주리야에게는 이상스럽게 생 각되었다.

「그럼 결국 푸로시가 아니란 말이지?」

「주리야나 나같이 날마다 코오피나 먹고 지내는 한가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야.」

「나는 서걱서걱 푸른 능금을 씹고 있다. 써늘한 맛이 눈 송이같이 이에 배노라. 나는 동지섣달 굴같이 떨고 있다—이 싱싱한 실감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고 그럼 부르 조아의 것이란 말요.」

어느결엔지 모임에서 만났던 민호가 나타나 그의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주리야는 이렇게 항의하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고 계시오.」

「푸로시 시비예요.」

「어떤 푸로시요.」

「아니 그래 이런 것이 푸로시가 아니예요.」

하고 주리야는 다시 아까의 시를 읊었다.

마지막 구절까지 듣고 앉았던 민호는 신중한 목소리로,

「훌륭한 시가 듣고 싶으면 내 한 편 읊어 드리지—이런 것 이 정말 훌륭한 시란 것이요.」

고향 사정 말한 일 없고 자유로운 시간 가진 적 없이 제일 싫은 책임 도맡아 보던 그 동무 곤란이 막심해도 불평 한 마디 없던 그 동무 기계같이 일하고 칼날같이 과단성있고 ××의 그물 표범같이 뚫던 그 동무 밉살스러우리만치 대담하던 그 동무 아! 끝내 그는 붙잡히고야 말았다.

겁내는 내의 마음 늘 매질하여 준 것은 신념에 빛나는 그의 눈이었다.

풍진 세상의 행복을 사모하는 나의 마음 꾸짖어 준 것은 도깨비불 같은 그의 눈이었다.

나의 가슴 사소한 책무에 만족하고 있을 때 그는 묵묵히 백곱절의 일을 하였다.

모진 폭풍우가 휩쓸어오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던 그 동무 나의 마음 못 믿더라도 그만 믿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아! 그 동무 잡히고야 말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누나.

문밖은 진눈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콘크리트 천정을 노리고 있을까 지금의 그 동무 이틀 동안 굶은 배 한 그릇 국밥으로 채운 그와 나였다.

우박송이 퍼붓는 어둠 뚫고 전신을 폭 적시우며 모둠에 달려간 그와 나였다.

「우리」에서 돌아올 때 나는 늘 그의 꿋꿋한 손과 낭랑한 웃음이 그리웠다.

그 동무 그 동무 돌아오지 않는 그 동무 목숨 떨어지는 날까지 잡히운 몸의 그 동무 매맞고 박채우고 일어서지 못하게 된 그 동무 도깨비불 같은 그이 눈이 철망을 건너 나에게 광명을 보내지 않았던가.

아! 그 동무 돌아오지 않누나.

그러나 그가 주고간 열정 그가 보낸 광명 나의 가슴에 타고 수천 동지 가슴에 타서 세상을 살러버릴 횃불이 되리라.

아! 동무여 편히 쉬라 새벽은 가깝다!

「아 그 동무 그 동무—이것이야말로 참 훌륭하군. 아니 그 것이 대체 시요, 실제 경험이요?」

마지막 구걸까지 숨도 가라앉지 않고 듣고 있던 주리야는 감도에 넘치는 두 눈에 광채를 가득히 담았다.

「퍽이나 감동하신 모양이군.」

「그렇게 훌륭한 시는 오늘밤 처음 들엇어요. 문밖은 진눈 깨비. 밤은 이미 깊었다. 아! 돌아오지 않누나. 그 동무!」

감동된 두어 줄을 외우다가 주리야는 문득 한라를 보고 놀 라서 입을 다물었다. 구슬같이 둥근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고여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는가. 입술에는 웃 음을 띄우고 눈으로는 울고 있다.

「한라 왜 우우?」

「지금 그 시간 너무도 훌륭해서.」

손바닥으로 눈물을 씻으며,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는 병증이 있다우.」

그렇게 말하여도 주리야는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느꼈다. 아까의 그의 시에 대한 의견이라든지 지금의 눈물이라 든지 그 무슨 그 시와 관련되는 것이 그의 생활의 한구석에 있으려니 짐작 되었다.

하기사 주리야 자신도 그 시에서 받은 감동은 심히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무지를 개발하여 주는 횃불이요, 소시민 적 생활 위에 떨어진 위대한 폭탄덩이였다. 그 위에 한라의 눈물은 더한층 그를 매질하여 주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고 요하던 좌석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기가 아까워서 그는 한라 의 손을 잡으면서,

「울지 말우 한라—내 레코드 한 장 걸게.」

하고 일어나 가서 그가 좋아하는 렌·피리스의 하와이안 비 타를 걸었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양말이 흘러내린 것을 보고 놀라서,

「아리고 내 알말대님.」

하고 땅 위를 더듬어보는 동안에,

「별 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민호가 그의 발밑에서 그것을 주워서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주리야는 민호의 눈앞을 꺼리지도 않고 무릎 위까지 치마 를 걷고 양말을 걷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지금 민호가 그에게 준 한 마디가 웬일인지 이상스럽게도 가슴속에 들어 배는 듯하였다.—(별것을 다 떨어뜨리시는군.) 집에 돌아오니 주화는 어느덧 아랫목 이불 속에 드러누워 책을 펴 들고 있었다.

웃목에 친 검은 막 속에서 옷을 벗고 나오는 오늘밤의 주 리야의 자태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찰란한 나체에 포도 잎새 한 닢 붙이지 않고 칵 속에서 뛰어나와 주화의 앞에 나타나던 그가 오늘은 포도 잎새 아닌 한 권의 책으로 앞을 가리고 나타났다. 주화의 앞에 웬일인지 별안간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포도 잎새 대신으로 쓴 그 책은 자본 론의 한 권이었다. 이불 속에 뛰어들어가기가 바쁘게 주화 의 귀밑에,

「아리랑의 한라가 <그 동무>란 시의 낭독을 듣고 우니 웬 일예요.」

「그 시 그대로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울 때도 있겠지.」

「아니 한라의 친구가 들어가 있단 말예요?」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그 동무>의 처지에 있으니 까 말요.」

작자 부언(附言)—작 중 두 편의 시는 모(某)씨의 것을 빌려 다가 의역한 것임을 말하여 둔다.

마음의 안테나 편집

(대체 웬 녀석야.)

알지 못할 사나이의 시선을 등뒤에 받으면서 정동 골목으 로 들어갈 때에 주리야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일정 한 거리를 두고 여전히 뒤를 따라오는 사나이를 보고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방향을 갈아 길을 돌릴까도 생각하였으나 맡은 일의 관계 상 하는 수 없이 그는 그대로 정동 골목을 들어갔다.

(불량소년일까, 그렇지 않으면 탐정일까......)

알지 못할 작자였다. 종로 근처에서부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 M 백화점의 앞을 지나 좁은 골목을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았다. 단정한 양복 맵 시로 보더라도 탐정의 유가 아니면 흔히 있는 불량소년의 따위였다. 그러나 탐정에게 쫓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 정체 모를 사나이의 추격은 더한층 불안한 느낌 을 주었다.

(이녀석, 어데 따라 보아라.)

집 처마 밑으로 바싹 붙어 가다가 조그만 과자가게 앞에 왔을 때에 뒤를 돌아보고 사나이의 눈을 교묘하게 감춰 과 자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츄잉껌을 사서 쭐기쭐기 씹으면서 밖을 내다보노라니 헛물 켠 사나이는 길 옆을 기웃기웃 살피면서 과자점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흉칙한 녀석.)

주리야는 콧웃음을 치면서 가게 주인을 보고,

「저따위 녀석이 뒤를 쫓것나요.」

주인의 웃음을 들으면서 다시 가게를 나온 그는 사나이의 간 곳을 살핀 후 뒷골목으로 살짝 돌아섰다. 영사관 지대를 지나 넓은 고개 위에 나섰을 때에도 사나이의 그림자는 눈 에 띄지 않았다. 안심한 주리야는 통쾌한 웃음을 남기면서— 그러나 역시 치밀한 주의이ㅡ 눈을 던지면서 급한 걸음으로 민호의 숙소인 아파아트로 향하여 내려갔다.

고개 중턱에 외따로 서 있는 목조 이층집—문간에는 여러 가지 단체의 간판까지 걸린 그 한 채를 아파아트라고 부르 기는 부적당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방방을 개인 혹은 단체에 게 빌려주는 그 집을 아파아트라고 부르기에 주리야는 아무 런 부자연한 느낌을 느끼지 않았다.이층의 방 한 간을 민호 가 빌려 가지고 있었다.

급히 문간을 들어간 주리야는 그것이 첫걸음이었지만 이층 에 뛰어 올라가 손쉽게 민호의 방을 찾았다. 걸리지 않은 문을 노크하니 반갑게 안으로부터 열렸다. 불쑥 내밀었던 남희의 고개가 별안간 움츠러들었다. 순간 예상치 아니한 여주인고의 출현에 주리야의 눈썹이 볼 동안에 찌푸러졌으 나 그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민호는 없고 남희 혼자였다. 남희가 무료하여서 읽던 책이 침대 위에 편 채로 놓여 있었다. 무심히 뒹굴고 있던 남희 는 성에 맞지 않는 이 돌연하 침입자로 인하여 마치 엄한 선생의 앞에 나선 듯이 마음이 거북하고 몸이 굳어졌다.

「민호씨를 만나러 왔더니 안계신가부군.」

「입때껏 기다려도 안들어 오셔요.」

「웬일인가 시간이 넘었는데.」

하면서 주리야가 책상 앞으로 가까이 나갔다. 남희는 별안 간 그의 앞으로 달려가 책상 위에 놓인 한 자의 종이를 집 어서 날쌔게 꾸겨 버렸다. 처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우렷이 빛났다. 필연코 민호에게 대한 공상의 낙서를 그 위에 장난 쳤으려니 생각하고 주리야는 쓴웃음을 남희의 얼굴 위에 정 면으로 던졌다. 그 웃음의 그늘 속에는 그러나 독사의 그것 과 같은 매운 눈초리가 숨겨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앞 을 가로채고 나타나는 남희가 주리야에게는 귀찮고 어줍지 않은 존재였고, 그 남희에게 주리야는 독을 품은 수리같이 생각되었다. 한 사람은 불안한 겁을, 한 사람은 불 같은 질 투를 만나는 때마다 동시에 느꼈다. 주리야의 냉정한 이성 이 그의 이 부탕한 질투를 꾸짖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 러나 더 많이 그의 여자다운 본능이 과분의 열정을 북돋아 마지 않았다.

「이만 가볼까.」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면서 남희는 혼잣말로 중 얼거리고 주리야의 대답고 기다리지 않고 아파아트를 나갔다.

남희가 가버리고 혼자 주인 없는 방에 남아있으려니 주리 야는 도리어 스스러운 생각이 났다. 남의 권리를 뺏고 그 뒷자리에 들어서 그의 염치가 너무도 뻔질뻔질하게 생각되 엇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가 씹는 껌의 향기와 같이 사 라져버리고 민호에게 대한 생각만니 찐덕찐덕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그가 생각하여도 부당한 경쟁의 의식과 알지 못할 승부의 감정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그 자신 괴 이하게 여겼다.

창 밖에는 여학교가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서 공고 같이 뛰노는 처녀들의 아무 계교없는 순진한 자태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매질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연스럽게 시침을 떼고 주인없는 방의 여왕 이 되었다. 민호 안오는 시간의 무료를 못이겨 그는 알콜 풍로에 불을 달이고 물을 끓였다. 여러해 동안 살아오는 그 자신의 아파아트와도 같이 가장 손쉽게 장 속에서 크림과 사탕을 집어내서 코오피를 만들었다. 뜨거운 차를 불고 있 는 동안에 민호가 왔다.

「잠간 동안 이 방의 주인 노릇을 했어요—」

주리야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주인에게 자리를 사양하면서,

「—남희까지 쫓아버리고요.」

하고 이 한 마디가 민호에게 주는 효과를 살피려고 그의 얼굴을 진득이 노렸다.

「장하군요.」

슬푼 표정 대신에 민호는 미소로 이 어여쁜 「영웅」을 칭 찬하였다. 물론 그 미소와 칭찬이 진정인지 거짓인지는 알 바가 없었으나 주리야는 적어도 이 「사나이」—생각과 처지 와 양심과 순정을 빼내 버린 나머지의 이 사나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그의 헛된 자만심만은 아닌 듯하였다.

「주화가 단체 일로 시골 간 것 아시겠지?」

「동무에게서 들었지요.」

「주화의 부탁으로 왔는데요.」

하고 주리야는 핸드빽 속에서 한 장의 두터운 봉투를 집어 냈다.

「—이것을 즉시 전해 달라구요.」

「하하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던가.」

민호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봉투를 책상 속 깊이 간수하였다. 주리야 자신 실상은 봉투의 내용을 몰랐으나—구태여 알 려고 하지도 않았고 전갈의 임무를 마치니 곧 안심될 뿐이 었다.

「그리고—」

장난의 눈초리로 민호를 바라보며,

「즉시 뜯어보고 곧 시작해 달라구요.」

「영어면 곧 되겠지만 독일어면 좀 거북한데.」

늘 있는 구라파 한가운데에서 직수입하여 오는 직접 일에 관계있는 원물 팜플렛의 번역의 일인 것을 주리야는 여기에 서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처지를 생각하여 더 자세한 내용의 비밀을 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맡은 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야지.」

껌을 새로 집어내서 입에 넣고 곱게 자리를 일어섰다.

아파아트를 나와 고개를 걸어 내려가던 주리야는 고요한 행길에 인기척 소리를 듣고 또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알 지 못할 사나이가 그의 뒤를 또 쫓는 것이었다. 별안간 소 름이 끼쳤다.

(웬 벌레 같은 놈팽이야.)

그 추근추근한 사나이의 행동에 화가 버럭 나서 주리야는 문득 한 꾀를 내어 걸음을 멈추고 길 옆에 무뜩 서 버렸다—

(놈 좀 앞서 봐라.)

사나이는 터벅터벅 가까이 오더니 그의 옆에 머물렀다. 씹 던 껌을 그의 낯짝에 탁 뱉을까 생각하며 휙 돌아섰을 때 사나이는 알지 못할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공손히 목례를 하였다.

「실례지만 김영애씨지요?」

「웬 걱정이요?」

「이를 말이 있어서요—」

사나이는 모자를 쑥 올려 뒷덜이에 붙이고 두 손을 양복바 지 주머니 속에 푹 꼽더니,

「—공연히 서울바닥을 일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시골로 내 려가는 것이 어떻소?」

별안간의 충고에 마음이 짜릿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무례한 그의 낯짝에 숫제 껌을 뱉아버릴까 하다가 참고,

「아니, 댁이 무엇인데 그렇게 주제넘소?」

물론 그가 경박한 불량소년이 아님은 그의 충고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은......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나 당신의 처지가 딱해서 하는 말이요.」

「나의 자유 의지의 행동인데 무엇이 딱하단 말요.」

「시골서들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소.」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이 문득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보다 도 남의 사정을 여기까지 알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괴상하 여 주리야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요.」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다.」

하고 사나이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고 정색하더니,

「어떻든 잘 생각하여서 앞길을 그르치지 마시오.」

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는 이번에는 혼자 앞장을 서서 더끔더끔 걸어 내려갔다.

주리야는 의아하고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나 그자리에 우두 커니 서서 껌 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이상스런 사나이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의 말이 유난히도 뼈속에 사무쳐서 여러 가지 생 각을 가슴속에 자아내게 하였다. 움직이는 불안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주리야는 정처없이 거리를 헤매었다. 외로운 처 소에 돌아가서 혼자의 저녁을 짓기도 스산할 것 같아서 양 식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거리에 등불이 들어온후에 야 어슬어슬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 아래 두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필연코 주화의 동무들이 찾아 와 있으려니 생각하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간 주리야는 그들이 도무지 뜻하지 못하였던 의외의 인 물임에 깜짝 놀랐다. 될 수만 있다면 그 청년의 앞을 피하 여 되돌아서서 도망이라도 하고 싶은 정경이었다.

「어디를 가서 종일 쏘다닌단 말이냐?」

침착한 목소리가 넋을 잃고 서 있는 주리야의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약간 멸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우두 커니 서 있는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하고 주리야는 마음을 다지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오빠.」

고개를 수그린 누이동생의 자태에 오빠는 목소리를 부드럽 혔다.

「서울 온지는 벌써 여러날 되었으나 집을 찾을 수가 있단 말이야.」

「아니 그래 어떻게 찾으셨어요?」

「할 수 있니? 사립 탐정에게 부탁하여 사흘만에 겨우 찾 아냈다.」

「탐정에게요?」

이렇게 반문한 주리야는 아까의 아상스러운 거리의 사나이 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다. 추근추근하게 그의 뒤를 쫓던 것 도 결국 고마운 충고를 주려는 생각보다도 그의 거동을 살 피려는 직업적 심사였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집안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단 말이야?」

「저도 충분히 생각한 후에 취한 행동인데 걱정하실 필요 가 어디 있어요?」

「한 분밖에 안계시는 어머님께서 날마다 얼마나 근심하시 는 줄 아니. 불효막심한 자식.」

「어차피 불효막심은 생각한 끝에 일인데요. 어머님께 반 역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자유만은 배반할 수 없어요.」

「주제넘은 소리 그만두어.」

오빠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에 서울 와서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돈 한푼 없는 놈팽이와 붙어서 무엇을 했어?」

이 말은 듣고 주리야는 그의 기개높은 자존심으로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씀 마세요. 돈 한푼 없는 놈팽이라니 요? 어떻게 하시는 말씀예요? 돈은 없다 할지라도 돈 많은 도야지와는 뜻이 다르답니다.」

옆에 앉은 사나이—주리야가 배반하고 온 시골의 약혼자— 가 입맛이 쓴지 오빠와 주리야를 등분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서 마음을 돌려라.」

오빠의 이 한마디에 주리야는 그러나 구태여 반항하려 하 지 않고 그것이 도리어 괴로울 듯하여서 잠자코 고개를 숙 였다.

「.............」

허수아비같이 앉았던 약혼자는 기회를 잡은 듯이 오빠를, 다음에 주리야를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이번에는 확실한 대답 을 하여 주시오. 지금이라도 나에게는 결코 늦지 않으니 충 분히 생각해서 잘 조처하시오.」

주리야는 기가 막혀 속으로 픽 웃었다.

(확실한 대답을 한 지는 벌써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 리라고 말한 법도 없다. 추근추근한 사나이.)

이렇게 생각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말없이 침울하고 슬픈태도를 지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내일은 단연코 내려가자—나이는 차 가는데 언제까지든지 그 주제로 언제 사람 되겠니.」

비교적 온순한 오빠의 태도에 호감을 가진 주리야는 오빠 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공손히 듣는 체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유리함을 깨달았다.

「집안에 대한 체면도 체면이지만 이제는 박군을 대할 면 목이 없다.」

오빠는 사과하는 듯이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주리야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두 청 년은 그들의 권유가 효과를 이루었다고 은근히 기뻐하였으 나 주리야는 속마음으로는 웃고 있었다.

눈물—그것은 반드시 슬픔의 표현만이 아닌 것이다. 지금의 주리야에게 그 눈물이 일종의 기교(技巧)요, 일종의 수단이 었다. 눈물과는 딴판으로 마음속으로는 물론 다를 꾀를 궁 리하고 있었다.

—(오늘밤을 이곳에서 같이 새우다가는 불가불 붙들리고야 말 것이다. 밤이 새기 전에 이 두 마리의 이리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하겠다.) 그날밤 늦은 후 일찍 잠든 두 사람의 옆을 빠져 주리야는 일보러 가는 체 하고 방을 나왔다.

건넌방에 들어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여행에 넉 넉하리만큼 가방 속에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몰래 집을 나왔다. 들고 나온 「벙어리」를 돌에 부딪쳐 깨뜨리고 흐 트러진 돈을 가방 속에 걷어 넣었다.

(월미도에 가서 며칠 동안 바다를 보며 은신하여 있을 여 비는 되겠지.)

주체스런 가방을 들고 뒷골목을 걸음 빨리 걸어 나갔다.

(......그러나 동행을 승낙할까.)

혼자 가기가 수상하게 보일까봐 민호와 동행할 작정이었다. 이것이 민호를 차지할 안성마춤의 좋은 기회라고 은근 히 생각하였던 것이다.

(—안 가면 끌고 가지.)

아름다운 악마의 결심을 하고 주리야는 고요한 밤거리를 걸어 정동 아파아트로 향하였다.

벌써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운 민호를 잡아 일으키고 주 리야는 황급한 어조로 그의 신변의 위험을 고하였다. 물론 그것이 일종의 그의 기교였으나 그의 어조가 너무도 황급하 고 태도가 서먹서먹한 까달게 민호도 황급하게 뛰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었다. 마치 불이 났다!는 고함을 듣고 순간 뛰어나가 듯이 민호는 잠시 동안 아무 지각없이 들뜬 마음으로 날뛰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바 람에 전후의 판단과 냉정한 분별이 없이 마지막으로 모자를 집어 얹고 주리야의 손에 끌리다시피하여 허둥지둥 거리로 나갔다.

막차는 이미 끊어진 뒤었다. 주리야는 하는 수 없이 택시 를 세내 가지고 민호와 같이 탔다. 넓은 밤 가도를 자동차 는 전속력으로 달았다. 길 양편의 나뭇잎이 선명한 초록빛 으로 자동차의 등불 속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 신선한 밤 드라이브—그 속에서 차차 정신이 든 민호는 이 밤의 그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 몽유병자가 아닌가.)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몽롱한 의식에서 차차 현실로 돌아갔다.

(나의 행동은 바른 것이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오랫동안 그의 행동을 비판할 여가 가 없었다. 요동하는 차 안에 있을 때에 사람은 이유없이 취하는 법이다. 그 가벼운 도취와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주 리야의 육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체온이 그를 다시 꿈 세 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어데를 왔나.)

단 걸음에 섬 속까지 이르렀을 때에 민호는 부지식간의 그 의 행동이 엄청나게 생각되었다.

「이제 나는 겨우 살았어요. 범의 구에서 피해 나온 듯해요.」

주리야는 마음속으로 안도한 듯이 여관집 문앞까지 갖다 댄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주저하는 민호의 손을 끌었다.

「동행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나는 뒤로 가지요.」

동지인 주화의 생각이 퍼뜩 머리속을 스치자 정신을 깬 양 심의 조각이 민호의 가슴을 죄었다.

「동무의 위험을 보면서도 그의 옆을 피하다니 그런 비겁 한 사람이 어디 있소?」

주리야는 비웃는 듯이 우뚝 서서,

「미래의 투사 될 사람이 그만한 용기도 없이 어떻게 하우.」

「옆을 피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주리야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소.」

「나 혼자 보다도 당신이 옆에 같이 있는 것이 다른 눈에 도 수상치 아니하고 더욱 안전하단 말예요. 당신은 며칠 동 안 나의 허수아비가 되고 장식품이 되면 그만예요.」

얇은 양심은 부드럽게 거세를 당하고 민호는 끌려 들어갔다.

여관의 바다의 첫 시절이라 만원이었다. 이층의 방 한 간 이 비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리로 안내해 주시오.」

주리야는 하녀에게 분부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거동이 너무도 익숙하고 대담한 까닭에 민호는 도리 어 얼굴이 붉어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야)

그와 싸워 보자고 민호는 결심하였다. 양심과 애욕과 어느 것이 이길까 승패를 가려 보리라고 작정하고 닥쳐오는 현실 그대로를 순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름다운 밤이다.

창르 열고 민호는 밤 바다를 바라보았다. 섬 건너편에 잠 들고 있는 항구에는 등불이 둥실둥실 떠 있고 섬 밑에서부 터는 어두운 바다가 폭넓게 쭉 깔려 있다. 시원한 바람이 우거진 나뭇잎을 흔들면서 흘러와서는 가슴속을 헤치고 들 었다.

「바다가 아름답지요.」

민호의 등뒤에 주리야가 너무도 가까이 와 섰기 때문에 목 덜미가 간지러우리만큼 주리야의 따뜻한 입김이 가깝게 흘 러왔다.

「밤 바다는 어두운 데서 보아야 더 좋답니다.」

「어두우면 바다가 보이나요.」

「우렷이 보이는 곳에 운치가 있지요—내 불을 끄고 올게 보세요.」

「불은 그대로 두시지.」

민호가 말하는 동안에 벌써 주리야는 뒤로 가서 방 복판의 전기불을 껐다.

민호 옆에 와서 창을 마주 열고,

「어슴푸레한 것이 더 한층 아름답지요. 밝은 곳에서 추한 것도 어두운 곳에서는 모두 아름답게 보여요. 바다도 사람 의 죄악도—」

하면서 가슴을 헤치고 신선한 바람을 맞았다.

「아, 저 등대!」

등대를 발견하고 그는 어린아이같이 팔을 뻗쳐 반짝거리는 먼 곳의 등대를 가리켰다. 깜박거리는 등대 밑에는 신비로 운 바다가 짙은 빛으로 질펀하게 퍼져 있고 같은 바다 위에 하늘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초생달이 얕게 빗겼다.

「귀찮은 현실에 부닥기는 우리에게는 가끔 이와 같은 로 맨티시즘도 필요하겠지요.」

「로맨티시즘이라니요?—나에게는 이 밤이 괴롭소이다. 주 리야와 나와의 관계는 결코 로맨티시즘 속에 떠 놀 관계가 못되니까요.」

「잠시 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가상도 못해 요?」

별안간 뒤에서 문이 열리는 바람에 주리야는 죄진 것같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휙 돌아섰다. 그 바람에 민호의 양복 호크에 공교롭게 걸렸던 원피스의 치마 허리가 쭉 찢어졌다.

「아이구 어쩌나.」

찢어진 허리르 만지면서 주리야는 새삼스럽게 민호를 쳐다 보았다. 마치 민호의 탓인 듯이 그를 책하는 듯한 눈초리로.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문간에 선 하녀는 실례했습니다. 하고 주춤하면서 문을 빼꼼이 닫았다.

「쉬시기 전에 목욕들 안하세요?」

민호는 급스럽게 불을 켜고 수건을 얻어 가지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주리야가 가족탕에 들어간 동안에 민호는 혼자 넓은 남탕 에 들어가서 더운 조수 속에 몸을 담궜다.

전신의 피가 녹고 풀리는 동안에 주리야에게 대한 생각과 여러 가지 의심이 뒤를 이어 솟았다.

(주리야의 마음속은 대체 어떤한 것인고.)

그의 눈을 현혹케 하고 괴롭히는 것은 나 어리고 천진한 그의 무작위한 심사에서 나온 것일까. 찬란한 그의 천성에 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뼈 있는 말이요, 속 있는 거동이다. 그러면 의식적으로 그를 유혹하자는 처 음부터의 계속적 성심으로인가. 그러나 그의 주화에게 대한 사랑은 두텁고 깊고 한푼의 틈도 없는 것임을 민호는 잘 알 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의 지듭을 떠보자는 수작인가. 동 지의 마음을 시험해 보자는 가짜의 마음으로인가. 그렇다면 거동이 너무도 공들다. 아무리 신변의 위험이 있다 할지라 도 하필 즐겨하지 않는 그를 이 밤중에 끌어낸다는 것은 너 무도 공든 행동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다만 일시 의 장난일까. 심심풀이의 장난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민호는 다시 첫 끝에 돌아가 주리야의 본 심을 되생각하고 거듭 짐작하였다.

그동안에 주리야도 독탕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 던 것이다.

그는 갈래갈래의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도 그는 주화를 사랑하였다. 사상적 동감보다도 시각적(視覺 的) 애정으로 첫눈에 끌은 그를 주리야가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사랑은 차차 깊고 진하고 믿음직한 것으로 변하 였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주화의 동무인 민호를 싫어하 지 않았다. 시각적이고 호감을 느꼈다. 사람의 육체에 눈이 있고 심장이 있는 이상 이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감각의 안테나인 두 눈에 모양이 비칠 때 그것 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사람된 마음의 자유라 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함에 그는 하등의 양심의 꾸지 람을 받지 않았다. 감정의 명령을 잘 좇는 것이 도리어 양 심에 충실한 소이가 아닐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 에 불을 지른 것은 민호의 애인 남희였다. 그는 남희를 만 나는 첫 순간부터 이유 모를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마는 그 질투가 도와서 오늘밤의 행동을 인도한 것이었다. 오늘밤의 행동—그것은 그의 신변의 위험 을 피하는 한 수단인 동시에 남희에게 대한 일종의 자랑이 요, 시위운동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밤의 행동을 어느 끝 까지 전개시키겠다는 최우적 성산과 야심은 없었다. 그는 아직 민호에게 최후의 것까지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 만 주화에게 대하여 느끼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에게 대하 여 느끼는 시각적 호감—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호박넝쿨같이 갈래갈래로 뻗어 나가는 여자의 마음—어느 갈래가 진짬이요 어느 갈래가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모두 똑같이 진정의 갈래—그 방향 많은 갈래갈래의 마음에 주리 야는 그 자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방 가운데에는 두채의 이불 이 나란히 펴 있었다. 물론 부부려니 짐작하고 하녀가 펴 놓은 것이다.

(흠. 마치 두 부부의 잠자리 같군.)

뒤미처 들어온 민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한편 이불께 로 갔다.

「—밤이 퍽도 늦은가부다.」

「곧 자야지요.」

주리야는 나머지 한편의 이불 위로 가서,

「나는 밝으면 잠이 안 와요.」

「그러면 불을 끄지요.」

민호의 손이 뻗어 전기불이 꺼졌다.

어둠속에서 두 사람은 주섬주섬 잠자리 옷을 갈아입고 각 각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주리야는 무심한 자태를 지니고 민호는 하룻밤 동안 괴롭게 싸워 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그 뒤에 오는 것 편집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이불 속에서 황망히 속옷을 껴입은 주리야는 이불을 걷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였다.

엉겹결에 그의 두 손은 거의 기계적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 만졌다. 한 송이의 꽃이 하룻밤 서리에 시들어버리듯이 팽 팽하던 그의 얼굴이 하룻밤 도안 이지러지지나 않았을까를 본능적으로 염려하는 듯이. 다음에 그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한 오리 한 오리 어루만졌다. 만지는 동안에 그도 모르게 그의 손에 힘이 맺혔다. 손가락에 걸려 머리카락이 한오리 두오리 뚝뚝 뜯겼다. 나중에는 여러 오리씩 줌으로 뜯겼다.

머리를 뜯으면서 그의 시선은 이불 사이로 하아얗게 드러 난 다리 위로 떨어졌다. 보지 않을 것을 본 듯이 부끄러운 생각이 새삼스럽게 솟아올라 그는 이불로 다리를 푹 덮어 버렸다.

머리속이 아찔하여지며 별안간 눈앞이 캄캄하여졌다.

(아이구 어떻게 하나.)

눈이 팽팽 돌았다.

마치 처녀가 물동이를 떨어뜨려서 깨뜨린 첫 순간과도 같이.

무의식간에 쥐어뜯은 머리카락이 잠간 동안에 이불 위에 가락가락 흐트러졌다.

콧등이 띵하여지며 눈물이 빠지지 솟았다—목소리를 내서 막 울고 싶은 심중이다.

문득 생각난 듯이 가슴 밑으로 둥긋이 드러나 젖통을 만지 다가 황망히 옷깃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소 잃은 후에 외양 간 고치는 격이었으나. 찬란한 아침 해가 창으로 불쑥 솟아 들어왔다. 햇빛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주리야는 얼굴을 숙 여 버렸다. 너무도 밝은 빛을 꺼리고 사양하는 듯이.

「벌써 깨셨소?」

등위에서 들리는 민호의 목소리가 아제는 마치 그의 몸을 찌르는 황충이와 같아서 주리야는 그도 모르게 몸을 움칫하 였다.

「아니 어디 몸이 편치 않으시오?」

이불을 차고 일어나는 눈치였다.

다음 순간 건강한 체중이 그의 등뒤에 바싹 기어 옴을 주 리야는 느꼈다.

「골이 아프시오, 배가 아프시오?—별안간 웬일이시오?」

뜨거운 입이 목덜미에 닿으며 울음에 떨리는 주리야의 두 어깨가 육중한 힘 안에 폭 싸였다.

주리야는 순간 달팽이같이 움츠러들면 번개같이 몸을 흔들 어 빼쳤다. 몸서리를 치면서—민호의 육체가 지금에는 징그 러운 두꺼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몸을 빼치는 것과 동시에 좌향을 휙 돌리면서 바른손이 민 호의 볼 위에 날쌔게 날랐다.

「악마!」

또한번 손이 날았다.

「아니 무슨 짓이요?」

「저리 가요.」

「주리야.」

「동물!」

「미쳤소?」

「당신은 동지가 아니고 동물이요.」

「아니,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요?」

「시침을 떼는구료.」

「곡절을 모르겠으니.」

「간밤에 나를......」

주리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아니 그것이 그다지......」

「그것이 그다지라니.」

「그다지 노엽소?」

「어떻게 하는 말요?」

「대체 나 한 사람만의 의사였단 말요?」

「잠든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있단 말요?」

「그러면 그때까지 마음의 유혹을 한 것은 누구요?」

「아니 누가 유혹을 했단 말요?—코큰 소리 그만하오.」

「적어도 암시는 주지 않았소.」

「하룻동안 허수아비 노릇하랬지 누가 사람 노릇—아니 애 인 노릇을 하랬소.」

「그건 이유닷지 않는, 모욕에 지나지 못하는 말요.」

「버젓한 애인 노릇을 한 당신이 너무도 주제넘었소.」

「그렇게 말하면 당초에 아파아트에서 잠든 사람을 몰아낸 것은 무슨 까닭이었소?」

「당신은 그것을 이 결말을 가져오기 위하여서 한 꾀인 줄 아는구려.」

「적어도 결과는 그렇게 되잖았소. 당신이 원인을 지어 놓 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모욕이요. 바로 그때에 치든지 욕 을 주든지하지 지금 와서 이게 무슨 짓이요?」

「아니 변명이 무슨 변명이요?」

주리야는 기가 막히는 듯이 눈물 어린 얼굴로 민호를 노렸다.

「나는 다만 떨어진 물건을 집었을 뿐요—땅에 떨어진 양말 대님을 줍듯이.」

양말대님—주리야는 문득 언제인가 차점「아리랑」에서 그 가 떨어뜨린 양말대님을 민호가 집어주던 장면을 그리고 그 가 별 것 다 떨어뜨리시는군 하고 웃던 것을 생각하였다.

사나이라는 것은 극히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것임을 알고 그의 큰 실책을 깨달았다. 양말대님이라면 사실 그가 양말 대님을 떨어뜨린 것과 정조를 떨어뜨린 것과는 같은 정도의 부지식간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노여운 가운데에도 얼 굴이 붉어져서 할말을 찾지 못하였다.

(정말 별 것을 다 떨어뜨렸구나!)

이러한 속생각 뿐이다.

「손 닿는 곳에 있는 향기 높은 한 송이의 능금—동지고 원 수고 간에 발병신이 아닌 이상 그것을 따지 낳을 사나이는 세상에 없을거요. 결국 육체적 거리의 죄였소. 육체적 거리 가 너무도 가까웠든 거요. 그것이 모든 것을 낳았소.」

「뻔질뻔질하게—설교를 하는 셈인가.」

주리야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섰다.

「나가요. 어서 나가요—보기 싫으니.」

민호를 보지 않고 눈은 딴전을 향한 채 손은 문을 가리켰다.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노릇은 아니오. 그러나 이 한가 지만은 잘 알아주어야 하오—결코 주리야의 의지를 짓밟은 나 혼자의 의사로의 야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요. 문제 해결의 열쇠가 이 점에 있는 것이요.」

주리야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한참 무츰무츰하고 서 있다가,

「당신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가지요.」

하고 그 방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듯이 방을 뛰어나갔다.

아래층 문간방에서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나오는 여하인의 아침인사를 받은 체 만 체하고 문을 뛰어나간 주리야는 허 둥지둥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얼굴이 불을 끼얹은 듯이 화끈화끈 달았다. 굴이라도 있으 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허둥거리는 발이 대중없이 빨리 언덕을 휘둘러 내려갔다.

해가 활짝 솟아 가까운 바다를 일직선으로 찬란히 빛내었다. 움푹 줄어들어간 바다는 파도 한 조각 없이 호수와도 같이 잔잔하다. 하늘이 맑고 초목이 신선하고 공기가 차다.

불역에가지 내려간 주리야는 모래 위에 푹 주저앉았다.

(간밤에 무엇이 일어났던가.)

무의식간에 지난 밤 기억이 다시 소생되어 마음을 찧고 얼 굴을 달게 하였다. 더구나 아까의 민호의 마지감 마디가 가 슴속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더운 몸을 바닷물에 잠 그고도 싶은 생각이 났다.

(주화를 무슨 낯으로 대하누.)

생각할수록 엄청났다. 처녀가 물동이를 깨뜨린 느낌을 지 나 이제는 하늘을 뒤엎은 듯한 땅을 깨뜨려 놓은 듯도 한 느낌이었다.

주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나 현재 그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금단의 길이다. 그 금단의 과일 을 딴 것은 과시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허락하지 못할 장 난이요 죄악이다. 아무리 새로운 정조관이라도 이것은 허락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주리야는 그가 저지를 죄를, 잘못된 몸을 어떻게 처치하였으면 좋을지 나중에는 몸부림이 날 뿐 이었다.

(진작 그때에 왜 반항하지 못하였던가.)

이 생각이 더한층 그의 마음을 에우고 수치의 불을 끼얹었다. 붙잡을 수 없는 애욕의 힘을 이제는 오히려 저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 결과가 올 것을 처음에 전연 예측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결과가 있은 후의 이 후회 환멸 슬픔—이것이야말로 그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 예측 못한 것이었다. 불어나는 고무풍선을 그것이 터질 줄 을 번연히 알면서도 힘껏 불어 기어코 터뜨리고 그 후에 새 삼스럽게 뉘우치는—그 심사였다.

사랑—미움—후회. 이 갈래갈래의 마음의 줄기와 모순된 심 정—주리야는 이제 이것을 또한번 느꼈다.

수건을 바닷물에 축여 얼굴을 식히면서 그는 모래펄을 거 닐다가 바위 위에 올랐다. 바위 위에서 다시 행길로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 어수선한 감정은 차츰 정리되고 통일되어 이 제는 다시 마지막의 한 점인 주화에게로 향하였다. 한 점으 로 집중되니 그것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었다.

(주화를 어떻게 대하누—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옳겠지— 그러면 대체 주화는 무엇이라고 할까—나를 어떻게 조처할까......)

주화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항상 극히 순진하고 깨끗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화의 앞에 속일 수는 없 었다. 그만큼 주화에게 바친 그의 사랑은 깊은 것이었다. 그 의 양심—그것은 곧 주화에게 대한 사랑 그것이었다—은 이 제 그를 괴롬의 바퀴 속에 넣고 끝장이 되었다.

「아씨, 아씨, 어데까지 가세요.」

뒤에서 들리는 신발소리 역시 여관집 하녀의 것이었다.

「여기까지 바람 쏘이러 나왔소.」

수상한 것을 느낀 듯한 하녀의 태도를 살피고 주리야는 시 침을 떼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그러서요—이렇게 일찌기.」

하녀는 황망하던 그의 양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미소를 띄 우면서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제가 이 근처를 안내하여 드릴까요?」

「그만 거닐고 들어가겠소.」

섣불리 하다가 도리어 마음속을 들여다 보일까 두려워하여 주리야는 발을 돌렸다.

하녀와 나란히 서서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민호가 가버렸 을까, 아직도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층에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민호는 아직 있었다. 화로전을 끼고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주리야가 들어가도 즉시 고 개를 들지 않았다.

그를 보면 또다시 기억이 소생되는 까닭에 주리야는 딴전 을 보면서 한구석에 가서 주섬주섬 짐으 싸기 시작하였다.

「주리야.」

민호는 고개를 들고—무거운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과실이라는 것도 있지 않우. 이렇게 불쾌한 결 말을 맺은 채 섭섭하게 헤어질 거야 있소?」

「............」

「주리야의 생각대로 나의 과실로 돌려보내더라도 앞으로 나 틈 없이 지냅시다. 너무 태도를 선명히 해서 도리어 남 의 눈에라도 뜨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우.」

「모든 것을 숨기잔 말이지요.」

「어젯밤에 주리야가 말한 것같이 우리에게는 로맨티시즘 도 필요하다니 한 폭의 로맨틱한 기억으로 싸 두면 그만 아 니요.」

「나는 먼저 가요.」

짐을 다 싸고 손쉽게 단장한 주리야는 민호의 말을 한 귀 로 흘리면서 슈우트 케이스를 들고 문을 나갔다.

「주리야, 주리야.」

들은 체 만 체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의아해 하는 하녀에게 두어 마디 귓속말로 이르고 이른 아 침의 여관을 나갔다.

서울 가는 첫차를 탈 생각이었다. 오빠들의 그 뒷소식을 모르는 까닭에 집으로는 갈 수 없으므로 우선 당분간 「아 리랑」의 한라에게 몸을 둘 작정으로.

「아침부터 행장을 하고 오늘은 또 웬일이야.」

주리야가 인천서 오는 아침 차를 내린 길로 바로 아직 가 게도 열지 않은 「아리랑」의 문을 두드렸을 때 눈을 비비 며 나온 한라가 의아하여 문을 열었다.

「조금 일이 있어서.」

「어데를 가는 셈이야?」

「여기까지 왔지」

「여기에 오는데 가방까지 들어야 하나?」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주리야는 가방을 탁자 위에 놓고 풀썩 주저앉으며,

「—시골서 오빠들이 올라온 까닭에 집을 쫓겨 다니는 셈야.」

「진작 이리로 오지 왜—잡히면 경이겠지.」

「처음부터 오기도 미안해서—」

어름어름 그 자리를 미봉하는 주리야를 한라는 손을 끌어 뒷방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걱정 말고 방으로 들어와요.」

두터운 벽을 끼고 가게 뒷편에 붙은 넓직한 한 간의 방—한 라의 살림방이요 침실인 그 방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하루 를 앞둔 의롱 그릇과 잠자리 등으로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여기에만 숨어 있으면 거리가 뒤집혀도 몰라요.」

주섬주섬 잠자리를 걷고 한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당분간 있어 볼까?」

주리야는 천연스러운 자태를 지었다.

그러나 한라가 아침 준비로 밖에 나가 덜거덕덜거덕 하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에는 일단락의 침착이 오고 그 맑은 침착 속으로 모든 비밀과 고민이 새로 살아나왔다.

뒷골목으로 열린 창으로는 늦은 햇발이 흘러 들어와 창 기 슭에 놓인 화분의 「제라늄」을 짙은 분홍으로 물들였다.

그 맑고 신선한 분홍이 주리야의 흐린 마음에는 지나쳐 무 거운 짐이었다. 같은 붉은 빛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이나 「제라늄」의 신선한 분홍은 주리야의 붉은 마음에 는 도리어 눈부신 것이었다. 마치 맑은 태양의 빛이 어두운 눈에는 지나쳐 눈부신 것과도 같이. 그 눈부신 「제라늄」

과 동무하여 가는 한라의 순진한 열정—한 사람에게 줄기차 게 바치고 있는 한 조각의 붉은 마음—그것이 불현 듯이 부 럽게 생각되었다. 그 한라의 열정과 나의 마음과는 마치 달 라진 흙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주리야가 생 각할 때 한라의 그 단순한 살림이 주리야의 더럽힌 몸을 받 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제라늄」의 감격에서 눈을 돌린 쥘야에게 문득 책시렁에 끼인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주리야는 새삼스런 감동에 끌려 이미 졸업하여 버린 그 한권의 책—코론타이의 <붉은 사랑>을 시렁에서 뽑아냈다—의지할 곳을 찾는 그의 고독한 마음에 그것은 마치 기다만한 기둥같이도 생각되어서.

두터운 책을 군데군데 펴서 무의미 하게 구절구절을 읽어 가며 그의 마음의 동감되는 대문을 억지로 찾으려고 애썼으 나 그의 현재의 처지를 변호하여 줄 만한 대문이 쉽사리 눈 에 뜨이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펄펄 넘어가는 책장 틈 에서 한 장의 엽서가 나왔다. 푸른 검사의 도장이 찍힌 현 저동에서 온 편지—무심히 뒤를 번기니 연필로 박아 쓴 두어 줄의 글이 또렷이 눈에 띄었다.

—한라! 외로운 세상에 있으니 그 무슨 든든한 믿을 것을 찾는 마음 뿐이오. 쇠같이 굳은 한라의 마음이 지금의 나의 마음의 유일한 의지할 곳이오. 주의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 어서나 든든히 믿는 마음—이것 없이 사람은 살 수가 없는 것임을 이곳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오......

결코 감상적이 아닌 이 외로운 마음의 고백이 주리야의 가 슴을 에웠다. 영오에 있는 사람의 마음과 한라의 굳은 심지 가 주리야의 마음을 울렸다. 유리 그릇과도 같이 깨지기 쉬 운 그의 마음이야 드디어 한푼어치의 값도 없는 것임을 주 리야는 느꼈다.

신발 소리를 듣고 주리야는 엽서를 책 틈에 날쌔게 감추어 버렸다.

한라가 쟁반에 조반을 날라온 것이었다.

「대단히 설핀 것이지만 이것이 조반이야.」

그다지 미안하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면서 한라는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진한 코오피, 덩어리 채로의 빵, 통 째로의 버터—뜨거운 코오피의 피어오르는 김이 향기로왔다.

「그러나 이것도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오히려 사 치해—이 한 잔의 코오피의 향기가 목에 걸리는 때가 많은걸.」

회포를 말하면서 차를 권하다가 한라는 문득 주리야의 손 밑에 펴져 있는 책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붉은 사랑>은—」

하고 주리야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보고 싶어서.」

「한라는 코론타이즘을 어떻게 생각허우.」

「코론타이즘—성생활에 관한 자도요 이단이지 결코 새로운 성도덕의 수립이 아니야—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가령 왓시라사의 행동은—」

「음탕한 계집의 난잡한 행동에 지나지 못하지.」

「굳건한 투사적 공로는 어떻게 허구.」

「투사적 공로는 공로요 사랑은 사랑이지, 그와 이와는 아 무 관련도 없는 거야. 주의는 양심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은 감각에서 나온 것인데 그 사랑의 감각을 주의의 양심으로 카무프라즈하려고 한 곳에 왓시릿사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즉 문란한 애욕을 감추려고 주의를 내세웠단 말이지?」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주의의 그늘에 숨어서 애욕을 난용한 것은 어떨까 생각해. 애욕 생활이 어지러운 이상 그것은 동물적 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어젓한 주의 의 간판으로 둘러 가리우는 것은 약고 간사한 짓야—왓시릿 사는 결국 굳건한 투사였는지 모르나 반면에 음탕한 둥물이 지 무어야.」

「사람이 아니요, 동물!」

한라의 마치 재판관의 그것과도 같은 엄격한 자세에 주리 야는 그도 그렇게 이렇게 돌연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왓시릿사가 동물이면 나는 무엇인고.)

이명제가 가슴곳게 뱅 돌면서 주리야는 한라의 앞에서 의 젓이 고개조차 쳐들 수 없는 듯하였다.

(—왓시릿사에게는 굳건한 투사적 일면이나 있지. 나는 다 만 달뜬 불량소녀 밖에는—단순한 동물밖에는 못되는 셈이다.)

한라가 가게에 나가 손님을 맞으며 덜거덕덜거덕 일보고 있는 하룻동안 주리야에게는 이러한 반성이 마음을 죄이면 서 솟아올랐다.

한낮이 지나 손님이 잠간 비었을 때 한라가 과일 접시와 먹을 것을 가지고 뒷방으로 들어왔다.

한라가 쟁반을 책상 위에 놓기가 바쁘게 밖에서 별안간 귀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라 언니! 한라 언니!」

한라는 숨도 돌릴 새 없이 황망히 다시 나가 버렸다.

「아님 남희, 웬일이요.」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오는 길예요.」

듣고 보니 갈데없는 남희의 목소리였다.

한라의 의아하는 태도와 남희의 조급한 양이 그들의 목소 리 만으로도 주리야에게는 또렷이 짐작되었다.

「무슨 급한 일로—」

「저—」

남희는 말하기 거북한 듯이 한참 동안을 띄었다가,

「민호씨 혹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하고 급히 말을 이어 버렸다.

(—아니 민호를 왜?)

민호라는 한 마디가 마치 철퇴같이 머리를 내려친 듯이 주 리야는 순간 아찔하였으나 다시 숨을 죽이고 전신을 귀삼아 문밖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中略)......

반둥건둥 편집

짧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리야는 옆에 앉아 그를 지키 고 있는 주화를 발견한 순간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에 게 대하여 용솟음치는 가지가지의 생각을 정리하고 든든한 배짱을 장만하기 위함이다. 혼수상태에 빠질 첫 순간과 같 이 여전히 마음이 설레고 골이 띵하였다.

「정신 좀 차렸소—대체 웬일요. 별안간 혼몽상태에 빠졌으니.」

주화으 부드러운 목소리도 퍽이나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 같았다.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던 주화를 그렇게 정면 으로 순간에 대하여 버리니 도리어 옹졸이고 있던 마음이 턱 놓이며 그의 귀익은 목소리에 든든한 안도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리야의 일신이 안전하였으니 다행 이오.」

골을 짚었던 손을 떼고 수건에 새로 물을 축여 이마 위에 대면서 새삼스럽게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서 주리 야는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언제 올라 오셨어요?」

「시골 일이 웬만큼 정리된 것을 좋아라 하고 어젯밤에 뛰 어 올라왔더니 이번에는 이곳 일이 뒤틀려 있는구려. 박선 생 남죽네 민호 할 것 없이 전통이구려.」

민호마저 들어간 것을 그보다도 먼저 주화가 알고 있는 것 을 알고 주리야는 돌연히 무서운 생각이 났다. 민호가 들어 간 것조차 알고 있다면 그럼 그것까지—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주리야까지 한몫에 쓸리지 않았나 염려하였더니 이 런 다행은 없소—이곳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들 었소. 언제 별안간 바람이 휩쓸려 올는지 모르는 판이요.」

하고 이마의 수건을 잠간 떼고 낯색을 엿보면서 주화는 말 을 이었다.

「몸이 웬만하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이 집을 피해야 할 것이요.」

「아니, 그렇게까지 위급하게 되었어요?」

마음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 이제 또 새로운 커다란 일이 눈 앞에 닥쳐있음을 듣고 주리야는 마음이 옹송망송함을 깨 달았다.

「웬만하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구려. 나는 그동안 정리 할 것을 대개 정리하여야겠소.」

하고 주화는 새삼스럽게 조급하게 주리야의 옆을 떠나 책 상께로 갔다.

책시렁에서 책을 뽑아내 책장 사이를 샅샅이 뒤지기도 하 고 책상 빼닫이를 뽑아 편지와 종잇장을 갈피갈피 뒤지기도 하였다.

그 급스러운 거동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주리야의 마음 도 마치 부채로 부치는 듯이 차차 조급하게 설레기 시작하 였다—이 기회야말로 속히 허물을 고백하여야 할 알맞은 기 회인 것이다.

「이것 보세요.」

그러나 눈을 꼭 감고 이 한 마디를 말하고는 주화가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볼 것을 느끼고 주리야는 말도 잇지 못하고 이불을 푹 써버렸다.

「일어나지 못하겠단 말요.」

주화가 와서 이불을 벗기고 그를 들여다볼 때에 그는 황당 하게 딴소리를 할 수 밖에는 없었다.

「몸이 거북해서 저는 못 일어나겠어요. 어서 혼자나 몸을 피하여요. 저는 이곳에 누운 채 일을 당하겠어요—죄진 몸이 응당 벌을 받아야지요.」

마지막 마디를 쥘야는 뼈있는 말로 한 셈이었으나 그 풍자 를 깨닫지 못한 주화는 주리야의 자포적 태도를 도리어 위 험하다 생각하며 애써 그를 일으키려 하였다.

「어리석은 소리 그만두고 어서 기운을 내보아요. 정 맥이 없다면 차를 부르리다.」

「차는 무슨 차예요.」

주화의 말이 너무도 고마워서 그는 미안한 생각에 상반신 을 일으켰다.

「그럼 일어나지요—일어나기는 해도 몸을 피하기 전에 먼 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이 어느때라고 그렇게 유한 소리만 하오. 이야기도 할 때가 따로 있지 이 시급한 경우에—」

도리어 약간 화를 내며 주화는 다시 책상께로 가서 주섬주 섬 정리를 계속하였다.

그러고 보니 또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려서 주리야는 초조한 마음에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피신 문제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가 지금 눈앞에 가로놓여 있어요.」

밖에서 돌연히 바시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리야의 말은 들은 둥 만 둥 주화는 잠시 쫑그렸다가 문서를 주섬주섬 모 아 들고 뒷문으로 살며시 나가 버렸다.

아무 것도 오지는 않았다. 잠시 엉겼던 긴장이 풀어지자 주리야도 일어서서 날쌔게 옷을 갈아입었다.

주화는 부엌에서 들고나간 문서를 불사르는 눈치였다. 한 참 동안 부스럭거리더니 뒤로 돌아 안방으로 들어가 벽장 속을 들추었다.

주리야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에 주 화는 다시 뒤로 돌아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제가 진 죄를 고백하면 놀라지 않으실 테예요? 괴로워하 지 않으실 데예요—어떤 죄를 저었든지 같이 데리고 가시겠 어요? 죄—그렇지요. 저는 적어도 아직까지 큰 죄라고 생각 하여요.」

말은 평범하였으나 주리야로서는 있는 용기를 다 낸 것이 었다.

「아니 무슨 알지 못할 소리를 한단 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나갑시다—나는 어쩐지 커다란 위험이 일각일각 가까이 닥쳐오는 듯한 느낌이 나서 못 견디겠소.」

「저의 고백—그것이 커다란 위험일는지도 모르지요.」

「아, 웬일인지 몸이 떨리누나.」

사실 알 수 없는 몸을 떨면서 주화는 채 손대지 못한 책상 위 다른 문서를 대충대충 골라서 두 손에 나눠 쥐었다.

「자, 이 길로 바로 나갑시다. 내 뒤를 곧 쫓아 나오구려.」

하고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앞문을 열었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일 분만이라도 기다려 주세요—말할 것은 말해 버려야 시원하겠어요.」

주리야가 조바심하고 외칠 동안에 벌써 문밖에 나가 버린 주화는 웬일인지 별안간 소스라치며 소리쳤다.

「으흐ㅅ!」

다음 순간 부리나케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손에 든 문서 를 마저 불살러 버리려는 셈이겠지 생각하고 문을 홱 연 주 리야 자신도 깜짝 놀라 버렸다.

밖에는 어느새인지 주화의 직각대로 올 것이 와 선 것이었다.

몇분 해서 주화와 주리야는 조금의 거역도 없이 순순하게 관할 서원의 앞을 섰다.

위험이 올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일각일각 기다리고 있게 된 것이 모두 나의 죄이거니 하고 느낄 때 주리야는 주화의 일 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그것이 처음이라 저무는 거리를 남녀가 나란히 서 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걸어가기가 너무도 겸연쩍어서 주리야는 종시 고개를 쳐들지 못하였다.

사흘이 두 번 겹치고 세 번 겹쳐 열흘만에 주리야는 단독 서를 풀려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건에 직접 관계 가 엷고 죄가 가벼운 탓이지, 주화들의 풀릴 날은 바다같이 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를 여러 번 거듭하여야 할 것을 주 리야는 잘 짐작할 수 있었다.

옷고름을 줄기줄리 뜯기우고 옷 폭을 찢기운 너불너불한 주제로 거리에 나왔을 때 모든 것이 첫 경험인 주리야는 며 칠 동안에 겪은 변이 마치 여러 해 동안의 고생과도 같이 몹시도 길고 험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글자대로 지옥의 괴롬이었다. 그가 이전에 경솔한 달뜬 마음에 생각하였던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운동의 현실이란 지긋지긋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 길의 열정을 꾸준히 가짐이 범상한 사람의 능히 할바가 아님을 알았을 때 그런 괴롬을 거듭하여도 주저앉는 법 없는 주화들의 앙칼진 의지야말로 하늘 위의 태양과도 같이 높고 장함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모욕」—이라는 점잖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 이 하의 대접—그 속에서 정신도 정신이려니와 주리야의 육체는 완전히 피곤하고 쇠잔하였다.

그 뒤에 더한층 괴로운 것은 돌연히 처음 당하는 커다란 생리적 변화가 온 것이었다. 들어간 지 며칠 안되어서부터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이유로 돌연히 식욕이 줄고 구역질이 나고 간간이 복통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 증세는 날이 갈수 록에 더하여 갔다. 취조실에서 받는 괴롬보다도 어두운 우 리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 오는 이 생리적 괴롬이 그에게는 더한층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의 문을 풀려 나온 날, 불현 듯이 이 증세는 더욱 심한 듯하였다. 오래간만에 밝은 거리를 걸으려니 골이 뒤흔들리 고 현기증이 나며 느긋느긋 속이 뒤집혀 갔다.

넓은 거리를 걷다가 그는 몇번이나 머물러 서서 한참씩 구 역질을 하다가는 걷고 걷고 하였다. 평생에 처음 당하는 이 괴롬에 지쳐서 그는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꺼릴 여가조 차 없었다.

심상치 않은 육체적 변화를 불안히 여겨 집에도 들릴 새 없이 그는 그 길로 바로 한라를 찾았다. 한라의 권유로 내 친 걸음에 뒷골목의 조그만 부인과 병원을 찾아갔다.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맥박을 보고 청진기를 대고 일정한 진찰을 마친 의사는 주 리야의 오도깝스런 불안의 표정을 웃는 듯이 침착하게 말하 였다.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예요?」

「큰 변화야 큰 변화지요.」

의사는 천연스럽게 대답하고는 아직도 인생에 미흡한 순진 한 주리야의 태도를 귀엽게 여기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경사든 지 벌써 서너달째 되는 것 같소이다. 」

「네?」

철없는 주리야는 아직도 의사의 말의 뜻을 몰라서 알지 못 할 그의 선고에 놀라서 오도깝스럽게 눈을 떴다.

「—경사라니요?」

「짐작해 보시구려.」

하고 은근히 그의 배를 노려보는 의사의 시선에 살핀 순간 쥘야는 처음으로 그의 뜻을 깨닫고 홀연히 놀라며 그도 모 르게 배를 부둥켜안았다.

「아니 그럼—」

귓불을 별안간 빨갛게 물들이며 주리야는 의사의 선고에 요번에는 짜장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걱정하실 것은 없소이다. 달포쯤 지나면 그 런 증세는 다시 없어지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니까요.」

쫓기우는 듯이 급스럽게 병원을 나온 주리야는 거리의 찬 바람을 쏘이면서 걸어도 화끈 다는 얼굴이 쉽사리 식지 않 았다. 여러 가지의 변이 너무도 일시에 닥쳐온 까닭에 그는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혼란과 흥분과 부끄럼 사이로도 주리야는 은근 히 손꼽아 석달을 세어 올라가 석달 전의 주화와의 열정의 기억을 마음속에 되풀이하여 보았다. 물론 시일에 틀림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시일의 확실성을 얻으면 얻을수 록 더욱 부끄러운 생각에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그 인생의 큰 변화가 한결같이 거짓말 같이만 생각되었다.

......(中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