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정수(金正秀) 순후고풍(淳厚古風), 60여 세.

인식(仁植) 정수의 아들, 침착 성실, 27~8세.

이씨(李氏) 정수의 며느리, 28~9세.

가애(可愛) 정수의 손녀, 7~8세.

최태영(崔台永) 정수의 집주인, 40여 세.

여인(女人) 바느질 맡긴 집의 행랑어멈, 30여 세.

시대 현대

시간 섣달 그믐날 오후 6시경으로부터 동 12시까지 그 동안에 일어난 일.

장경(場景) 그리 깨끗하지 못한 조선 실내. 정면은 밖으로 통하는 미닫이, 좌편은 아랫목, 우편은 장지, 장지 밖은 윗방이다. 방 안에는 종이로 바른 헌 농짝, 헌 반짓그릇, 쪽 떨어진 화로, 아무튼 모두 변변치 못한 세간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직 자리 잡히지 못해 보이는 살림살이다. 창 밖에서는 바람이 몹시 분다. 아랫목에는 할아버지와 가애가 앉았고 윗목에서는 이씨가 바느질을 하고 있다.

이씨 (무슨 답답하고 슬픈 정조에 쌓였다가 새로금 화재를 돌리려는 듯) 날도 퍽은 쌀쌀해. 떡국 추윌 하시려나.

가애 (어리광으로) 할아버지 나 돈 한 푼만…….

이씨 (인두로 화로의 불을 돋우며) 그래도 그러거든, 금세 밥 잔뜩 먹고 무얼 또.

가애 (잠깐 몸부림을 하며) 싫―여, 나 돈 한 푼만 줘―.

이씨 참 망해 못 보겠네. 전에는 그러지 않더니 할아버님이 오시니까 버르장머리가 점점……. (눈을 흘긴다)

정수 (귀여운 듯이 가애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따 가만 두어. 그럼 어린것이 그렇지. 이 할아비나 있으니까……. (주머니 끈을 끄르며) 가마―ㄴ 있자. 내 주머니에도 더러 귀 떨어진 동전이 한 닢 있는지.

가애 (엉덩방아를 찧으며) 옳지. 수수돈. 난 쌀돈은 싫여. 커다란 수수돈이 나는 좋아.

이씨 (정수를 힐끗 보며) 그만 두시지 무얼……. (웃는 눈으로 가애를 보며) 망할 거, 그예 할아버님을.

정수 무얼 그래도.

가애 아이 좋아. 나는 수수돈.

정수 (귀여운 듯 가애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허허 고거 참.

이씨 (웃으며) 걔는 은전이나 백동(白銅) 돈을 싫고 일 전짜리 동전만 그렇게 커다래서 좋은 건 줄 안답니다.

가애 그럼 수수돈이 안 좋구. (돈을 가지고 손잡신을 하며) 이런 빨―간 수수돈 큰 것이.

정수 암 그렇지. 아무 거라도 크면은 좋지. (이 씨를 보며) 그러나 무어 그것이 욕심이 많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가애를 보며) 그럼 그것으로 너 무엇을 살래. 왜떡을 살까 팔뚝팔뚝 뛰어넘는 오뚝이를 살까.

가애 나 눈깔사탕 사.

정수 아따 사탕도 좋지. 그럼 시방 사 먹나.

가애 응 할아버지 나 업고 가.

이씨 (정수는 모르게 얼른 입을 악 물었다가) 아이 어린 애 염치도. 금세 할아버님께 돈까지 줍시사 해갖고 또 무어 업고 가자고. 이제 응석이 아주 막…….

정수 아따 아무려나 그것도 괜찮어. (가애를 업고 일어나려 하다가) 그러나 바깥이 너무 추워서 아가가 감기 안 들까.

가애 괜찮어.

정수 아따 그럼 아무러나 그렇게 하지. (일어서며) 그런데 얘 애비는 어째 입때 안 들어오누.

이씨 오늘이 그믐이고 또 무엇을 좀 얻어야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아마 늦는 게지요.

정수 저녁도 안 먹고 배는 고픈데 어디로 떨고 다니노. 무엇을 얻다니, 돈? 아따 장천 그 놈의 돈! 그럼 네 애비가 이걸 보면 또 사설한다. 애비 들어오기 전에 얼른 다녀오지. 그러나 가게가 그리 멀지나 않는가. (방문을 열고 나가려하다가) 옳지. 그 휘양을 좀 쓰고 가야지 머리가 시려서.

이씨 어린 애도 그―예 할아버님께……. (웃는 얼굴로 일어선다)

(정수, 가애 퇴장)

이씨 (앉으며 손끝을 모아 입에다 대고) 호―. 손끝이 시리구나. 아주 이제 어둡네. 바느질 한 가지로 오늘 해도 그만 지웠지―.

(성냥을 그어 석유등잔에 불을 켠다)

이씨 심지가 나쁜가. 석유가 다― 달었나. 어째 그리 침침해. (심지를 돋우고 다시 바느질을 하며) 어째 이때껏 안 찾으러 오나. 그렇게 급하다고 재촉을 하더니…….

창밖에서 아씨 계셔요.

이씨 누구요. (미닫이를 열고) 응 참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시방 막―.

여인 다 하셨어요.

이씨 네 시방 막―. (시치미를 뜨며) 그렇지 않아도 "찾으러 올 때가 됐는데 어째 아니 오나."하고 시방 막― 혼잣말을 하던 차야. (바느질을 때고 인두판을 찾으며) 추운데 잠깐 들어와요. 이제 인두질만 치면 고만이니 그 동안 좀…….

여인 (방으로 들어오며) 저녁을 벌써 다― 해 잡수셨어요? (앉으며 방바닥을 짚어 보고) 방도 퍽 써늘해―.

이씨 단촐한 식구에 옹솟골에만 불을 조금씩 지피니까……. (인두를 화로 전에 '툭' 부딪혀 떨어 입으로 '훅' 분다)

여인 (이 씨의 인두질 치는 걸 들여다보며) 아이 바느질도 퍽은 얌전하셔라. 어쩌면 깃달이도 이렇게 예뻐요. (웃는 듯) 우리 아씨가 이번 옷을 입으시면 퍽 좋아하시겠군.

이씨 무얼 급하게 하느라고……. 또 손끝이 곱아서. (손끝을 얼른 입에다 댄다)

여인 그래도 원체 솜씨가 퍽 얌전하시니까……. 우리 아씨 옷 성미가 매우 까다로우시지만 아마 이번 옷은 꼭 맘에 드실 거야.

이씨 그렇게 옷을 취택해 입는 이에게 만일 이 옷이 성미에 맞지 않으면 어떡 허우.

여인 무얼요. 이만하면 상관없어요. 하기는 요새의 옷 번새는 날마다 달라진다니까……. 무슨 붕어밸도 요새는 좁아지고 저고리 길이도 짧게 입는데―. 그 기생들 입은 옷 모양을 좀 보셔요.

이씨 기생? 나같이 이런 구석에만 꾸어 박혀 사는 신세가 그런 기생을 어떻게 보았겠소. 그런데 참 당신 아씨라는 그이는 무엇 하는 이오.

여인 보아하니 아마 그도 전에는 기생이었나 봐요. 시방은 그저 남의 소실이지.

이씨 소실? 그럼 아마 퍽 호강으론 지낼껄. 이런 바느질도 안 하고…….

여인 흥 호강이요? 그렇지. 호강은 호강이지. (한손을 들어 제 가슴을 얼른 가리키며) 이런 년들처럼 옷 밥 걱정도 그리 안 하고……. 남편 되는 나리만 한 번 와 주무시고 가면 아주 담박 심평이 피어 야단이랍니다.

이씨 왜?

여인 글쎄 말씀을 좀 들어보셔요. 접때 처음 그 집 행랑에 들었을 적에는 어찌도 모든 것이 변만스럽고 우습던지요……. 엊저녁에도 쥔 나리가 주무시고 간 덕분에 나도 세찬이라고 광목 열 자 고무신 한 컬레가 생겼답니다. 그래 아씨가 흥만 풀리면 좋은 수가 가끔 많지요. 이런 드난꾼에게도…….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나리가 체꿀 작은 첩한테 가 주무시리라나. 그래 시방쯤은 아씨가 한창 통통쯩이 나 야단이지요. 참 우스워 죽겠어. 그래 잘 먹고 잘 입고 호강은 하는 대신 장― 그 짓으로 세월을 보내…….

이씨 아이 참 변스러워라. 먹고 입을 것만 있으면 잘 살고 고만이지. 그 밖 또 무슨 걱정이야. 이렇게 바느질 품팔이를 해가며 먹고 사는 팔자도 있는데.

여인 왜요. 더러 군색한 때는 있겠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지어 입고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상팔자지요. 그렇게 잡스런 생각만하고 있을 까닭도 없고……. 더구나 바느질 솜씨도 저렇게 얌전하시겠다 아씨 같은 이야 무얼.

이씨 그까짓 것 바느질도 남의 옷만 밤낮 지어주는데 암만 잘한들 무얼 하오. 내 발등 가릴 것이 있어야지. 오늘이 섣달 그믐, 내일이 명일이라도 빨래 하나 못해 입고 솥에도 그리 변변히 끓일 것도 없으니……. 또 별안간 이사는 갓 해놓아서…….

여인 (방을 휘 둘러보며) 윗방도 한 간인가요. 참 저 위의 그 전 사시던 댁보다는 방이 두 간이나 되고 넓어서 퍽 좋으시겠어요.

이씨 방만 넓으면 무얼 하오. 그나마 저 윗간 냉돌 찬 곳이 내 차지라오.

여인 참 아까 아기 업고 나가시던 영감님은 누구셔요.

이씨 우리 시아버님이시라오.

여인 시골 계시다 오셨어요.

이씨 예― 시골 일가집에 계시다 오셨어요. 전에는 우리 집도 남부럽지 않게 꽤 괜찮이 살던 집안이더니 그만 작은 시동생이 난봉을 피워서 왜채(倭債)에 다― 털어 바치고 벌써 3년째나 아―니 이 설만 쇠면 4년째나 되지요. 온 집안이 모두 거산(擧産)을 해 이 지경이 되어서 이렇게 성명도 없이 세방 구석으로만 굴러다닌다오. 그래 시 아버님께서는 시골 일가집에 가 아이들 글 가르쳐 주시고 계시다가 그저께 바로 이 집으로 이사 오던 날 우리 바깥 양반이 맏아드님이니까 그래도 맏아드님을 찾아서 명일이라고 쇠려 오신 게지요.

여인 바깥양반께서는 무슨 생화를 하시는데요.

이씨 집안이 별안간 그렇게 되니까 별로 신통한 생화도 없지요. 그저 세상 모르고 고이 길러 글공부나 하던 책상물림이니 어디 별안간 만만한 생화―ㄴ들 어디 얻어 만나기가 그리 쉬웁소. 그래 하는 수없이 날마다 하루하루 그 날 그 날 벌어서 먹고 살지요. 어떤 때는 그나마 벌이도 없어서 버는 날은 먹고 못 버는 날은 굶고……. 굶는 것도 원체 많이 굶으니까 이제는 아주 시들하다 못해 진저리가 나―.

여인 아이 딱해라. 더구나 어린 아기하고……. 그래도 바깥양반이 학교 공불 하셨으면 월급이라도 좀 타먹지.

이씨 흥, 학교도 일본까지 다― 갔다 왔기는 왔지만 그것도 내 것이 있을 제 말이지. 시방은 아마 그리 월급짜리도 만만치 못한가 봅디다. 또 가―끔 돈 많이 줄 테니 오라고 하는 데도 더러 있기는 있나 봅디다마는 아마 그런데는 또 뜻이 아닌 게야. 그러기에 그런 때마다 "내가 아무리 죽게 되였기로"하며 연방 눈살을 찌푸리고 어떤 때는 시골 같은 곳으로 몸을 피해 가기도 하지요.

여인 참 사내 맘들은 이상도 해. 왜들 그런지……. 집에 아범도 가끔 그런답니다. 그냥 모꾼 서는 거나 막벌이 보담은 굴 뚫는 데 남포질꾼이 돈을 퍽 많이 몇 갑절씩 번대요. 그런데 그런 것은 해보래도 일부러 아니 합니다그려. 그것은 까딱 잘못하면 목숨이 가는 일이라나. 천한 목숨이 죽기는 그리 원통한지……. 온 남도 죽을 일이면 일부터 시킬라고요. 죽긴 왜 죽어. 괜―히들 하기 싫으니까 그런 핑계지……. 그래 그럴 제마다 이 어멈은 아범하고 노상 싸움이랍니다. 이 댁 바깥양반께도 아마 그런 남포질 판에서 오시란 게로군요 무얼, 그렇지.

이씨 글쎄 그런지…….

정수 (멀리서) 아가, 손이 시리냐. 그럼 얼른 들어가 엄마더라 호― 해달래지.

여인 아이 참 가야지. 너무 오래 있어서 또 통통대겠다.

이씨 무얼, 얼마 있었다고 고 동안을.

(정수, 가애 등장)

가애 엄마, 난 솜사탕 사 먹었어. (팔을 벌리며) 이만큼 많―이.

이씨 참 잘 사 먹었다. 그 추운데 할아버님을 모시고 가서…….

가애 아녀, 나만 안 먹었어.

정수 참 희한한 세상이야. 여전 솜뭉치 같은 그것이 사탕이겠지. 그래 동전 한 푼을 주고 샀더니 날더러도 그걸 좀 먹으래. 그 커다란 뭉치를 큰길 거리에서 이 늙은 할애비더러. 백죄 자꾸 먹어보라거든.

(가애의 얼굴을 기웃이 들여다 보며) 온 고거 참 신통하기라니 하하하.

가애 그래 "이런 걸 엄마가 알면 흉볼 테니 집에 가선 아무 말도 말자."고 할아버지가 그랬지?

정수 온 고거 참, 그런 말까지 어찌 다― 하하하.

(이씨는 바느질 인두를 다― 치워서 개여 보에 싼다)

여인 모두 얼마예요.

이씨 저고리 하나에 열 냥씩만 내구려. 거기는 처음이고 또 바느질도 좀 서툴렀으니.

여인 그럼 둘에 스무 냥?

이씨 그렇지.

여인 그럼 이걸 어떡하나……. (괴침에서 돈을 꺼내며) 가지고 온 것은 스물닷 냥 거린데.

이씨 글쎄― 바꿀 돈이 없는데요.

여인 그럼 아무튼 이걸 받어나 두슈.

이씨 (돈을 받으며) 받아나 두면?

여인 아따 그럼 내 이따가라도 아범 바지감을 하나 가지고 올 테니 그거나 좀 꼬매 주시구려. 댓냥은 너무 싸지만 좀 생색 좀 보아서.

이씨 아따 아무러면 대수요. 그렇게 하지요.

여인 (옷 보퉁이를 들고) 그럼 갑니다. (미닫이를 열며) 이제 벌써 낼이면 새해니 새해에 세배 나옵지요. 그럼 새해엔 부자 될 꿈이나 꾸십시오. 묵은 해의 모든 근심 걱정일랑 액맥이 연 띄우듯 다― 떠나 보내시고…….

이씨 왜 이따라도 또 올 테라면서…….

여인 (웃으며) 참 이따가 또 옵지요.

이씨 어둔데 조심하오.

여인 네―. (퇴장)

이씨 (미닫이를 닫고 앉으며) 여편네가 퍽 수다도스러웁다.

정수 행랑 것들도 이제는 시속이 달라져서 전에는 사부집 하인들이 상전의 전갈하는 말씨라니 참 제법이었는데……. 양반이면 남의 집에 가 "이리 오너라"하고 찾고 구실아치는 "별감 별감" 상놈은 "하님 하님"하던 것을 이제는 너나 할 것 없이 "합쇼" 공대를 또박또박 해야 한다. 참 고약한 세상도…….

이씨 시방이야 어디 양반 상하가 있는 세상입니까.

정수 하긴 그도 그렇지. 그런데 그 해가는 것은 설빔 옷인 게지?

이씨 아마 그런 게지요.

정수 하긴 우리 집만 이렇게 쓸쓸하지. 밖에는 그래도 설이라고 야단들이더라. 세찬 김이 오락가락 집집마다 떡 치는 소리를 철썩철썩.

이씨 아마 이 동네는 요전 살던 데보다는 퍽 부촌인가 보아요. 겉으로 보아도 모두 풍성풍성한 것이…….

정수 (담배를 담아 피우며) 그렇지 북장동 여기가 옛날부터 부명(富名) 하는 이가 많이 살던 곳이지. 그러나 우리네가 이런 부촌에서 사는 것은 좀 덜 좋아. 남부끄럽게 내 흉만 잡힐 뿐이지. 남들은 모두 드난꾼을 두고 매우 흥청거리고 사는데 나는 내 손으로 물 긷고 밥 짓고 해야지 또 거기다 봉지쌀 푼거리 장작 툭 하면 열 냥 스무 냥짜리 전당질 외상값 등쌀, 더구나 그악한 집주인이나 잘 못 만나면 온 동네가 떠달아나도록 거친 목소리로 눈깔을 부라리고 집세 내라고 재촉 조련질, 에― 창피해. 아무튼 우리네같이 어려운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만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좋아.

이씨 하긴 그래요. 남의 일 보고 내 꼴 보면 없던 심정만 저절로 나고……. 저런 어린 것을 기르는데도 남의 집 자식들은 호사스럽게 고운 옷을 입 히고 잘 멕여 잘 가꾸는데 내 자식은 이런 명일 때 도일 년의 한 번인 설이것만은 잘 멕이지도 못하고 입히지 못 하니…….

정수 그러니 어쩔 수 있나.

가애 엄마 나 설에 꼬까옷 해줘―. 때때댕기하고.

이씨 저것 보십시요. 어린 것이라도 무슨 말이든지 듣기가 무섭게 장― 저런답니다.

정수 그러니 그런 걸 해 주구는 싶지만 무어 돈이 어디 있나.

가애 그래도 난 몰라…… 때때댕기…… 목화댕기.

정수 목화댕기는 또 무어야. 왜 제비추리에다 면화 송이를 다나.

이씨 (웃으며) 시체(時體) 비단에 목하부다이란 게 있는데 그걸 걔는 목화란답니다. 아따 가만 있거라. 내 이따 때때댕기 하나 사줄게. 아까 바느질삯 받은 거 스물닷 냥 있으니 번쩍번쩍하고 좋은 넓다란 금박 댕기 내 사다 주마.

가애 아이 좋아. 때때댕기 나는 좋아.

정수 온 그렇게 좋담. 고거 참, 하하하.

가애 엄마 그럼 시방 사다 줘―. 때때댕기―.

이씨 온 아이도 참 글쎄, 시방이 무어야 내 이따가 설겆이나 다― 하고나서 나가 사다줄게.

가애 그럼 할아버지 이딴 꼭 사다 주?

정수 암― 사다 주고 말고.

가애 아이 좋아. 그럼 엄마 이따 얼른 사다 줘 ―.

이씨 그래 꼭 사다 줄게. 걱정 말고 거기 조신이 좀 앉았어. 할아버님 고단하신데 좀 누우시게. (일어선다) 내일 아침은 또 무얼 끓이누.

가애 왜 할아버지 눈썹 세시게.

이씨 (윗방으로 내려가며 웃는다)

정수 눈썹이 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씨 (윗방에서) 걔가 아까 오늘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세는 법이라고 그랬더니 그 말을 할아버님께다 옮겼습니다 그려.

정수 옳―아, 참 그도 그러렸다.

가애 그럼 어른들은 자도 눈썹이 안 세우.

정수 그렇지. 그런 법도 있지. (목침을 베고 눕는다)

가애 무얼 할아버지 눈썹이 저렇게 세였는데 할아버지도 잠은 퍽 많이 잤구려.

정수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잠만 자다 늙어서 이렇게 터럭이 허―옇게 세었단다.

가애 왜― 늙으면 털이 세우.

정수 암― 그렇지.

가애 그럼 할아버지 이제 자지 말어. 저 눈썹이 더 세면 보기 싫어 어떡해.

정수 벌써 잠자다 다― 세인 눈썹을 이제서 잠만 안자면 무얼 하나.

가애 그래도 보기 싫어. 자지 말고 일어나 얘기나 해……. (정수를 끌어 일으킨다)

정수 (억지로 일어나며) 온 고거 참, 얘기는 별안간 또 무슨 얘긴고.

가애 왜 옛날 얘기. 동아줄 타고 하늘에 올라가 해 되고 달 되고 그런 얘기.

정수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나.

가애 왜 아까도 썩 좋은 옛날 얘기 해주마고 그랬지.

정수 내가 언제 그랬던가…….

가애 그럼 안 그랬어?

정수 온 그거 참. 그럼 가마―ㄴ 있자. 온 무슨 얘기를 하노.

가애 아무 거라도 얼른.

이씨 온 얘기는 또 무슨 얘기야. 할아버님 편히 좀 누워 계시게 조신히 좀 앉았으라니까.

정수 아따 아무려면 대수……. 가마―ㄴ 있자. 그래 옛날에 한 사람이 있구나.

가애 할아버지 왜 옛날에는 똑 한 사람만 살우.

정수 응 글쎄 얘길 들어야지 무슨 얘기든지 옛날엔 첫 번에 다― 한 사람이란 다. 그래 옛날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임금님이야 임금님이란 너 무엇인지 아니?

가애 몰라.

정수 임금님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야.

가애 높은 사람? (한 팔을 높이 들며) 저― 하늘 꼭대기의.

정수 아니 하늘 위가 아니라 하늘 아래에서는 제일 높은 사람이야.

가애 (저 혼자 무엇이 신기하였는지 신이 나서) 할아버지 저―기 뒷산에 솔개미가 날라가다 앉은 맨꼭대기 산에서 벌써 그 때― 그 때― 어떤 사람이 총을 '탕' 하고 놓겠지.

정수 온 고거, 그런 게 아냐.

가애 아마 그 사람이 솔개미를 잡으려던 게지 할아버지.

정수 글쎄…….

가애 그 사람이 솔개미를 잡았을까 못 잡았을까.

정수 몰라― .

가애 할아버지도 그건 모르우.

정수 몰라―. 나는 그걸 어떻게 아나.

가애 그럼 할아버지도 총 놔 봤수.

정수 아니 나는 총두 놀 줄 모른단다.

가애 이런, 총두 놀 줄 모르고.

이씨 그거 참 버르장머리 없이 할아버님께 막…….

정수 글쎄, 이제 내 옛날 얘기나 들어야지.

가애 그래.

정수 그런데 그 임금님은 여왕이야. 너와 같이 계집애 임금.

가애 할아버지 나도 임금님이우?

정수 그렇단다. 너도 임금님이란다. 그래 그 임금님은 아주 착하고 영리하고 또 퍽 어여쁜 임금님인데 그 임금님은 늙은 할아버지도 있고 임금님을 귀여워해 줄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었단다. 신하도 많고 백성도 많고 갑옷 투구한 군사도 많고 나쁜 놈 잘 잡아가는 순검도 많고, 또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얻기도 어려운 온갖 좋은 보물도 그는 퍽 많이 가졌었더란다.

가애 때때댕기도 가졌었나.

정수 암― 그까짓 거야 얼마든지 많이 가졌지.

가애 나는 이따가 하나만 살 텐데…….

정수 그런데 그 임금님은 한 가지를 갖지 못했어.

가애 무엇 꼬까옷?

정수 아니 꼬까옷이 아니라 무엇이더라……. (무엇을 생각하는 듯) 옳―아, 참 그는 거짓말을 갖지 못했어. 거짓말을 들을 줄 몰랐단다.

가애 나도 몰라.

정수 그래 그 거짓말이 날마다 임금님에게로 도적질을 하러 가는데 그것이 무엇 같을고. 옳지 참, 그것이 가만히 똑 바람처럼 아주 저렇게 부는 바람이 되어서……. 그래 솨― 하는 그 얄궂은 바람이 한 번 임금님 대궐에 스르르 불 적마다 무엇이든지 영락없이 없어져 버리는구나. 솨― 하는 바람이 맨 첫 번 불 적에는 늙은 할아버지가 죽고 두 번째 솨― 하고 불 적에는 귀여워해주던 아버지가 죽고 세 번째 솨― 하고 불 때에는.

(창 밖에서 멀리 "여보시요" 부르는 소리)
무척 사랑하던 어머니가 죽고.

창밖에서 (남자 목소리) 여보 주인 계시오.

가애 할아버지 누가 찾아요.

정수 무어 누가 왔어?

가애 응.

정수 거기 누가 왔오?

창밖에서 (차차 가까이) 네 ― 주인 좀 봅시다.

정수 온 그 놈의 바람 소리 때문에 세상 무슨 소리가 들려야지 귀는 어둡고.

가애 아마 그 바람이 무얼 또 도적질하러 왔남.

정수 (가만히) 온 고거 아냐. 그런 것은 얘기에나 그렇지. (창을 열며) 누구를 찾으시오.

창밖에서 댁이 이 방에 주인이시오.

정수 네―, 그렇소.

창밖에서 뉘댁이시요.

정수 나는 김정수란 사람이오.

창밖에서 어떻게 쓰시오.

정수 (좀 거북하게) 바를 정자 빼어날 수자요.

창밖에서 예― 김정수 씨. 그럼 당신이 분명 이 방의 주인이시죠.

정수 그렇소. 그런데 당신이 그건 왜 물으시오.

창밖에서 아따 물을 만하니까 묻는 것이지요.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르시나 보구려.

정수 내가 알 수 있소. 당신도 아마 나를 모르는가 보기에 그렇게 이 늙은이를 별안간 어린 애 성명 묻듯 한 것이 아니요.

창밖에서 모르긴 왜 몰라. 그래 당신이 이 방에 든 주인이라면서……. 그러면 당신이 이 방에 왜 들었소?

정수 그게 무슨 말이요. 이 방에 왜 들다니. 왜 드는 것도 있소.

창밖에서 아따 이런 답답한 말 보았나. 이 방에는 어떻게 와 들었느냐 말이요.

정수 세 들었오.

창밖에서 세요? 누구한테.

정수 이 집 임자한테서요.

창밖에서 이 집 임자? 이 집 임자가 누구란 말이요.

정수 그건 모르지요.

창밖에서 그건 모르다니. 여보 그게 말이요 절이오. 그래 이 집에 와 살면서 이 집 임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단 말이오. 터럭이 허―연 노인네가 어째 그렇소.

정수 글쎄 터럭만 센 것이 죄일는지는 몰라도 그저 저절로 세인 이 터럭을 어찌하오. 이 집에서 이도(移徒)를 왔으면서 미처 주인도 찾아보지 못한 것이 내 실수일는지는 모르나 늙은 몸뚱이가 이로 찾아디니며 "이렇게 왔습니다" 하고 인사 여쭐 수도 없고 또 이 집을 내가 얻어 온 것이 아니라 내 아들 놈이 저희들 친구 발련으로 어떻게 얻어 온 것이니까…….

창밖에서 여보. 보아 하니 그래도 그렇지 않은 노인네가 어째 그렇소. 당신은 남의 정신에 살우. "아들이니 손자니" 점잖치 못하게 남에게 의거릴 하고 앉았으니. 아들 둔 이들 매우 팔자 좋구려. 툭하면 밀어버리기에. "나는 몰루. 아들이 알리." 하며…….

정수 그럼 당신은 남의 애비 자식 사이도 믿지 않는단 말이요.

창밖에서 당신네 민적등본을 내여가지고 오지 않는 바에야 당신의 부자간 어찌 된 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 까닭이 있소. 그 따위 덜 된 수작은 다― 고만 두고 내가 이 집 주인 최태영이니 바로 내가 이 집의 임자야. 그러니 어서 셋돈이나 내시오.

정수 이런 제―길 이를 어쩐담.

이씨 (장지를 방싯 열며) 여보셔요. 바깥 양반들 말씀하시는데 이런 여인이 참견하는 것은 매우 안 됐습니다만은……. 이도 와서 이때껏 셋돈을 내지 못한 것은 퍽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이 집으로 이사오기는 사랑에서 친구들 발련으로 알아 한 일인데 시방 마침 사랑에서…….

창밖에서 여보시요. 저 분이 노인의 부인이십니까.

정수 아니오. 내 며느리오.

가애 우리 할아버지야.

창밖에서 (온순하게) 그래 정말 너의 할아버지야.

가애 응.

창밖에서 그럼 다소간 노인께 실례가 되었습니다.

정수 천만에…….

창밖에서 그래 너 몇 살이냐.

가애 여덟 살.

창밖에서 (가애를 보고) 응…… 그래 (정수를 보고) 여보시오. 그럼 어서 셋돈을 주십시요. 몸도 떨리고 발도 몹시 시려서 이렇게 오래 서서 얘기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씨 글쎄 그러니 사정을 좀 보아주셔야 하겠습니다. 시방 마침 사랑에선 어디 출입하고 없으니까 들어올 동안까지만 댁에 가셔서 기다려주시면 이따는 기별해드리겠습니다.

창밖에서 그것은 될 수 없습니다. 이따는 이따 사정이고 시방은 시방 경웁니다.

이씨 그렇지만 잠깐만 기다려주셨으면…….

창밖에서 안 됩니다. 그렇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발도 시리고 얘기도 좀 길어질 모양 같으니까 잠깐 들어가 앉겠습니다.

(최태영은 방에 들어와 앉는다)

정수 잠깐만 기다려주우.

최태영 글쎄 그것은 못 되겠습니다.

정수 그러나 시방은 돈이 없으니 어떡허우.

최태영 천만에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설마 돈 없이야 세 드셨을라구……. 또 벌써 며칠째 드셨으니 시방 셋돈을 내신대야 그리 선금도 아닙니다만은……. 그것도 몇 달째 들어오던 끝이면 더러 몰라도 이렇게 처음부터는 선금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정수 그렇지만 세상 일이란 매양 사정이라는 것도 있지 않소. 더구나 이렇게 공교히 된 형편에는.

최태영 아니올시다. 사글세 선금 받는 데 사정이 무슨 사정입니까.

정수 아따 그야 옳거나 그르거나……. 아무리 경찰서 법이라 한들 이런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좀 보아주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 있겠소.

최태영 그러나 이것이 또 무슨 그런 경찰서 법률도 아닙니다. 그저 복덕방 규칙이지요.

정수 글쎄 나는 늙은 사람이 되어서 그런지 시체(時體)에 툭하면 "무슨 규칙 무슨 규칙" 하는 그런 훌륭한 규칙도 잘 모르오만은……. 그리고 또 이것이 어디 복덕방 가승에게 부탁해 얻은 것이오?

최태영 허― 이런 딱한 말씀 보았나. 그것이 노인장이 점점 오해의 말씀이지요. 가승(家僧)이고 집주릅이고 간에 이 세상에 선돈을 아니 받고 집세 놓는 사람은 어디 있으며 또 복덕방 소개가 아니란 말씀을 하니 말이지마는 이 집이 비어 있기는 이 겨울 접어들며 벌써 석 달째나 거저 비어 있기는 있었오. 그래 사글세나 또 좀 놓아 볼려고 벼르던 차에 일전에 누가 나없는 동안에 이 집 까닭으로 몇 번인지 찾아오기는 찾아왔더랍디다. 그러나 나에겐 이때껏 직접 대해 아무 말도 없었으니 댁에선 혹 그와 아무러한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 말 없이 집부터 들여놓은 그가 물론 큰 잘못이고…… 또 그가 나를 찾아왔다가 나는 만나 보지도 않고 그런 짓을 해놓았을 때는 아직 누군지는 모르나 필시 나와 매―우 친하기도 하던 사람일런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제 아무리 친한 친구이기로 쇠뿔도 각각이고 염주도 몫몫이라고……. 나도 그리 과히 빽빽한 벽창호는 아니올시다만은…….

이씨 (애교있게) 참 퍽 너그러웁고 착한 양반이시여.

최태영 (간사한 어조로) 아―니 내가 무어 그리 썩 착한 사람도 되지는 못 합니다마는 그저 이런 집이라고 몇 채 있으니까 그거나 가지고 선돈만 내는 자리면 어렵고 구차한 사람들에게 더러 빌리어 줄 뿐이오. 이때껏 그리 자선사업을 한 일은 없으나 돈만 얼른 내면은 그리 더 길게 차리고 앉아서 지긋지긋이 조르는 그런 못된 성미를 가진 놈은 아니올시다.

정수 (일부러 꾸미는 어조로) 아무튼 이 세상에서는 더 볼 수 없는 갸―륵한 친구요.

최태영 네― 무얼 그리 너무 칭찬만 해주실 것도 아닙니다. 어떻든 시방 셋돈은 내셔야 하니까요.

정수 글쎄 시방은 돈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오.

최태영 (목소리가 거칠어져서) 아―니 그럼 여보, 왜 셋돈도 없이 염치 좋게 남의 집에 와 들었습니까. 이건 누구에게 흑작질로 떼쓰러 다니우 늙은이가.

정수 글쎄 이 집을 내가 어디 얻어 들은 거요?

최태영 이이가 정신이 있나 없나. 그럼 시방 이 집에 누가 들어 있단 말이오.

정수 글쎄 내 아들이 친구 발련으로…….

최태영 여보 그런 쓸데없는 소린 말어요. 세상에 이런 흑작꾼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당신 말은 믿을 수도 없고 기다릴 수도 없소. 또…… 당신을 이도(移徒)시켜 주었다는 그 사람이 이때껏 나도 안 만나볼 때는…… 그만하면 다― 알조지 무어요. 온 이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딨어서. 당신도 그만 나이나 잡쉈으니 세상 풍정도 다― 겪어 알 만하겠구려. 여태껏 조선 사람들은 남만 의뢰하다 망했다는데 당신도 터럭이 저렇게 허―연 노인이 아직껏 누구를 좀 의뢰 해가지고 더 살아 보랴드우?

정수 (한숨을 쉬며) 나는 이때껏 아무 죄도 없이 늙은 사람이오. 또 누구에게 의뢰라는 것도 그리해 본 일은 없겠지만 그만 작은 자식 하나 잘못 둔 탓으로 그 놈이 난봉을 피워서 이 지경이 되었소.

최태영 (정수의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아―니 이건 또 자기의 잘못을 마저 작은아들에게다 의뢰를 하려드우.

정수 (떨리고 슬픈 어조로 가만히) 아가 너는 저 엄마한테로 가…….

가애 싫어.

이씨 그래라. 이리 내려온.

가애 (몸짓을 하며) 싫어. 나는 할아버지한테 얘기 들을껄.

정수 얘기가 무슨 얘기야.

가애 왜 옛날 얘기.

정수 옛날 얘기도 그렇게 하나.

가애 그럼.

정수 이제 이따 아가가 잘 적에 할아버지가 천―천―히 생각해 가며 하지.

가애 싫어. 이따가 안 잘걸. 눈썹 센다며…….

정수 온 이걸 어떻게 하노.

이씨 그래도 그러거든 이리 내려오라니까.

가애 나는 좀 싫어……. 그래 할아버지 그 임금님 어머니마저 죽었는데?

이씨 (힘없이) 어린 애도 참…….

정수 아따 가만 둬―. (잠깐 있다가 떨리는 어조로) 그래서 그 임금님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그 몹쓸 거짓말 바람이 자꾸자꾸 솨― 하고 불 적마다 모든 보물도 죄―다 없어지고 나중에는 커―다란 대궐 집마저 없어져서 집도 없이 거지가 된 임금님이 길거리로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게 되었단……다……. (힘없이 가슴에 무엇이 복받치는 듯)

가애 (입에 침이 없이) 아이 참―.

정수 그래서.

최태영 (분노한 음성으로 크게) 여보.

가애 (소스라쳐 놀라서) 엄마― 응……. (정수의 무릎으로 엎어질 듯 덤빈다)

정수 왜 그래 응? 아가 놀랬니?

이씨 그러기에 내가 진작 이리 내려오라고 그랬지.

최태영 (잠깐 자기의 태도가 좀 무색함을 느끼면서) 아―니 여보. 오늘이 섣달 그믐이고 나도 바쁜 사람이요. 그래 남은 셋돈 달라고 옆에 앉았는데 당신은 어린 애 재롱 보고 앉았소. 배포 유하게.

정수 아니 무슨 내가 배포가 유한 것이 아니라 셋돈 졸리는데 이 어린 것이야 무슨 죄란 말이요. 이 지긋지긋한 꼴을 이 철모르는 어린 것의 눈에는 보여주고 싶지 않구요.

최태영 그러니 어여 셋돈을 내요.

이씨 여보셔요.

정수 (기운 없이) 글쎄 없는 돈을 어떻게 냅니까.

최태영 (추근추근하게) 그럼 왜 멀쩡하게 남의 집을 들었어요.

정수 온 이를 어쩐담. 잠깐만 기다려주오.

최태영 (얼른) 안 돼요.

정수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최태영 돈을 내시우.

정수 온 이걸 어째. 목을 베면 피나 나지 마른 나물 꺾으면 무슨 수야…….

최태영 (어근목을 써서) 아―니 그래, 당신 아들을 정말 기다리면 또 무슨 수요.

정수 (힘없이) 돈을 가지고 올 터이니까…….

최태영 (비꼬는 어조로) 흥 돈! 돈을 가지고 와요? 그럼 왜 입때 아니 들어오―. 아직도 시간이 못돼서 그러우? 시방은 밤이라 은행문도 닫혔어요. (혼잣말로) 담구멍을 뚫으러 다니나, 무슨 돈을 밤에 구하러 갔담. 이거 정말 흑작질 판이로군.

정수 (애걸하는 어조로) 아니 잠깐만 더 기다려주구려. 이제 곧 들어올 것이니까…….

최태영 (고개를 돌리며) 안 돼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다시 와서 말 하더라도 할 수 없소. 어여 내슈.

이씨 여보셔요.

최태영 (새삼스럽게 딴전을 피우는 듯한 간사한 어조로) 네― 무슨 말씀 계셔요.

이씨 네― 사랑에서 들어올 동안까지만 잠깐 더 기다려주셔요.

최태영 댁에서 무슨 사랑 쓰셔요. 이 곁방살이가…….

이씨 (엄숙하고도 흥분된 어조로) 아―니 여보셔요. 살인죄수도 죽을 때에는 소원도 묻고 말미도 준다는데 그래 다― 같이 인정 쓰고 서로 사는 이 인간에서 그만 사정이야. 더구나 잠깐만 기다리면 돈을 곧 드린다는 걸. 그거야 아무리 도척이 같은 이 세상 인심이기로 못 듣겠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최태영 법이요? 내가 무슨 법률로 잘못한 것이 있어요?

이씨 (열에 뛰여) 내가 법이랬소. 법률이랬지. (용기가 차하여) 아니 참 법이랬지.

최태영 (픽 웃으며) 여보 법이 법률이지 무어요. (거칠고 크게) 그래 내가 무슨 법률 저촉된 일이 있습디까. 무엇을 잘못했기에……. 강도질을 했소, 사기취재를 했소, 응. 내가 법률 저촉된 것이 무엇이야.

이씨 (독기 있는 어조로) 이건 너무 심하구려. 괜히 생트집을 해 가지고.

최태영 (크게) 내가 무슨 트집을 했소.

이씨 (분노에 띤 거친 음성) 여보 여편네에게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최태영 (마저 크게) 왜 아낙네가 사내들 얘기하는데 참견은 무슨 참견이야.

이씨 (더 크게) 내 집안 일이니까 그렇지.

정수 (허둥지둥) 얘― 아따 너는 가만히 좀 있거라. 여편네가 이런 데 참견하는 것이 아니야. 온 이게 무슨 모양……, (최태영의 손을 잡으며) 여보 우리 사내끼리는…… 이런 늙은이하고 얘기하는 것이 좋지.

최태영 참 나중엔 별 도깨비 같은 꼴을 다― 보겠네. (정수를 보고) 당신은 어떡할 테요.

정수 (어리둥절해) 어떡하다니 무엇을 말이요.

최태영 무엇을? 돈 말이요 셋돈.

정수 글쎄 잠깐만…….

최태영 안 돼요. 시방으로 셋돈을 내고 곧 이 방도 내 놓으오. 이제 이 따위 꼴은 더 보기도 싫고……. (한 팔을 걷어 올린다. 무슨 시비나 하려는 것처럼)

정수 또 방을 내노라?

최태영 네―. 시방으로 얼른 내놓아요. 그리고…… 당신네가 이 집엘 온지 며칠 됐소.

정수 아마 오늘까지 사흘째지.

최태영 사흘째. 그러면 셋돈은 얼마로 정하고 왔소.

정수 그건 모르지…….

최태영 여보 그건 모르다니. 정말 당신은 바지 저고리로만 사는구려. 그래 자기가 세든 집의 셋돈이 얼만 줄도 몰라?

정수 글쎄 그것은 그렇게 된 것이라니까…….

최태영 (어이가 없는 듯이) 그렇게 된 것이라니? 아무튼 당신하고 밤새도록 떠들어야 그 소리가 그 소리고 또 나도 덩달아 미친 놈만 되는 셈이니까. 이제 그까짓 수작은 고만 둡시다.

정수 네― . 그러게 잠깐만 더 기다려주오.

최태영 아무튼 이 집을 전에 한 달에 오 원씩 세를 놓았으니까. 가만 있자…… 한 달 30일을 하고 오륙 삼십이라. 엿새 동안에 일 원씩이니까 일원을 반을 때리면 50전. 그러면 50전이 그동안 사흘치 세전(貰錢)이요. 무어 이런 때라고 내가 무슨 흑심을 써서 한 푼인들 에누리 해 없는 사람에게 더 받는 것은 아니요. 노랑돈 한 푼 더 붙이지 않고 내가 꼭 받을 돈만 또박또박 받는 것이니까 어서 50전만 내고 나가시요. 그 동안 일은 당신네가 좀 잘못 됐지만 아무튼 50전만 내고…… 또 아무리 없기로서니 설마 그거야 없겠소.

정수 그러나 아직은 그것도 없구려.

최태영 (큰 목소리로) 무엇, 그것도 없어. 아―니 그래 돈 한 푼도 없이 정말 도적놈의 배짱 먹고 여기 왔구려.

정수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도적놈의 배짱이라니. 돈만 주면 고만이지.

최태영 그럼 돈을 어서 내요.

정수 글쎄 이따가 주어요.

최태영 무어 이따가 주어요? 여보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이따가 주어? 무얼 이따가 주어.

정수 돈을 이따가 주어요.

최태영 돈을 이따가 주어? 왜 시방은 못주고 이따가 주어. 참 괴상한 뱃장이로군. 뻔뻔스럽게 이따가 준다.

정수 글쎄 내가 그까짓 것을 떼먹을 사람은 아니오. 이따가 줄 터인데 무얼……. 이 늙은 놈이 설마 거짓말 하겠소.

최태영 흥, 말은 좋지. 아무리 속 검은 놈이라도 말로야 아니 낸다는 수가 있나.

정수 사람을 너무 괄시를 마시오. 우리가 몹시 빈한은 하오마는 근본이 그리 상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또 하다 못해 덮고 자는 이부자리를.

최태영 (영리하게) 아―니 내가 무어 그런 것을 집세로 차마 터 갈 사람도 아니요.

정수 글쎄, 무엇으로든지 고까진 50전쯤이야 설마 못되겠소.

최태영 그럼 어서 돈을 내요. 고까진 50전이니.

정수 글쎄, 조금만 있으면 돼요.

최태영 흥, 조금만 있으면 돼? 그러면 돈은 아무 때 되더라도 좋으니…… 이따든지 내일이든지 생기거든 갚고 또 정―히 못생기거든 영영 고만 두더라도 시방으로 이 집이나 내어 놓으시요. 그것도 못 하시겠소?

정수 ………….

최태영 왜 대답이 없으시우. 집세 놓아먹는 영업자로서는 이 집 까닭에 대관계가 있으니까. 나도 당신네의 돈 없는 사정을 보아주는 것이니 당신네도 나의 사정을 좀 보아주어야지요. 안 그렇소? 이것은 내가 한 몫 늦구어 드리는 너그럽고 넉넉한 경우요. 안 그렇소.

정수 ………….

최태영 어서 좀 그 경우를 대답하시요. 그렇게 하면 내가 무어 그르게 하는 것도 아니지요. 또 아무더러 물어보더라도 내가 섭섭치 않게 한 것이라 할 것이고…….

정수 글쎄 당신의 그 관대하고 고마운 처분은 감사하오만은 그러나 나도 또 당신의 돈을 떼여 먹고 가려는 사람은 아니니까 만일에 나가더라도 당신의 그 돈 50전은 갚고야 나가겠소.

최태영 (펄쩍 뛸 듯) 그건 또 무슨 어림없는 경우야. 왜 나는 당신네에게 자선 사업만 해주는 사람일 줄 아오? 돈도 안 내고 집도 안 내놓는다. 여보 그런 뱃심이 어디 있소. 돈은 그만 두더라도 집이나 어서 내어놓으라니까 그것마저…….

이씨 (공손하게) 여보셔요, 그럼 시방이라도 돈을 드리면 받기는 받으시겠어요.

최태영 (간사하게) 암― 그야 주시기만 하면.

이씨 그럼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최태영 아따 우선 한 달치 5원만 주십시오 그려. 워낙은 두 달씩 선세를 받는 것이지만은…….

이씨 아니 시방 급한 형편으로 말씀하면.

최태영 아따 그럼 일 원만 주십시오 그려. 아주 엿새치로 잘라서…….

이씨 아니지요. 시방 서로 다투던 얘기는 50전 까닭이 아닙니까.

최태영 네― 그럼 50전이라도 주시면……. 이씨 네― 그럼 있습니다. (50전 은화를 방바닥에 밀어놓는다)

최태영 (돈을 얼른 집으며) 네―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이 자리의 경우는 이만 하면 끝이 났습니다. 괜―히 서로 얼굴만 붉혀서……. (일어나다가 방바닥을 만져 보며) 방에 불이나 잘 들이는지요. 이리 더운 데로 내려 앉으십시요. 그럼 갑니다. 이렇게 돈만 받으면 싹싹하게 가는 성미이니까요. (미닫이를 연다)

이씨 이제는 곧 나가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최태영 아무렴 별 말씀을 다―. 안녕히 계십시요. (미닫이를 닫고 간다)

정수 온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나…….

최태영 (미닫이를 열고)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온 정신머리가…… 수대(手袋)를 거기 놓고 나왔어요. 좀 이리 집어 주십시요. 장― 집에서 하던 버릇으로……. (수대를 받아 옆에 끼며) 또 그리고 아무튼 올해는 이 집에서 보내셨습니다. 오늘이 섣달 그믐, 자정까지는 오늘이니까 조금 이따 자정까지 집에 가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기별해 주십시요.

정수 네― 편히 가시요.

(최 퇴장, 이씨 아랫방으로 내려와 앉으며 길게 한숨을 쉰다.)

정수 이런 제―길 전에는 그믐날이면 묵은 세배꾼들이 득시글 득시글 들이 미었더니 이제는 외상 사글세 방에서 빚쟁이 치르기에 늙은 뼉다귀가 다― 녹아. 에―이그 되지 못한 부자놈들 보기 싫어 보기 싫어.

가애 할아버지, 부자가 나쁜 사람? 바람?

정수 그렇단다. 부자도 나쁜 사람이고 가난뱅이도 나쁜 사람이고 그리고 또 바람이지.

가애 그럼 할아버지도 나쁜 사람?

정수 아마 그렇지. 할아버지도 필연 나쁜 사람이던 게지.

가애 그럼 순사가 잡아가게 나쁜 사람은.

정수 응 그러나 아니지. 할아버지는 순검이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마 얼마 안 있으면 염라국 사자가 와서 잡아가거나 그 몹쓸 거짓말 바람이 솨― 하고 와서 무섭게 잡아가거나 할 터이지.

가애 할아버지 아까 그 옛날 얘기 마저 해.

이씨 (무엇을 귀 여겨 들으며) 가만 있거라. 발자취 소리가 나는구나. 누가 또 아마 오나보다. 이제는 밖에서 무슨 소리가 자칫만 해도 가슴이 덜렁해서.

(김인식 등장)

이씨 어디 가 있다 이제 오― 밤중까지.

인식 밤중은 무슨 밤중 아직 일곱 시 치고 네 시간밖에 안 됐는데.

이씨 이때껏 그렇게만 됐을까? 나는 그래도 열 점은 지났을 줄 알았지. 그 지겹게 조련질 당하던 동안에 한 시가 십 년만 같아서…… 조금만 좀 더 일찍 오지요.

인식 왜.

이씨 왜가 다― 무엇이요. 그 집주인인가 하는 것이 와서 어찌 야료를 하고 갔는지.

인식 옳지 참. 오늘 그 사람을 만났는데 집 임자를 일곱 번이나 그 동안 찾아 갔다가도 못 만났다나. 주인이 없어서 온 일도 공교롭게만 되니까……. 아마 그 동안에 왔던 게로군. 그래 어떻게 됐어.

이씨 그 동안 봉변만 당한 얘기는 이루 다― 말할 수도 없고…… 간신히 그 동안 사흘치로 50전을 변통해 주었으니까 아마 오늘 밤 자정까지는 이대로 사는 셈이지. 그래 저의 집에 가서 자정까지만 더 기다릴 테니 다시 기별을 해달라고 참 기가 막혀……. (애교 있게 호소하는 듯이) 나하고 다 쌈을 했다우.

인식 (빙긋 웃으며) 흥 여편네가 쌈은―. (일어서며) 그럼 내가 지금 곧 그 사람을 다시 좀 가보아야겠군. 그 사람도 이때까지 나 돈 1원 얻어 주느라고 같이 돌아니다가 시방 막― 저녁 먹으러 집으로 갔는데.

이씨 저녁은 안 잡수?

인식 아따 저녁은……. (일어선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는 아니 되니까 그 사람하고 얼른 집주인한테 다녀와서 먹지. 그럼 그 동안에 (손에 쥐었던 돈을 보이며) 이 돈 1원 가지고 나가서 흰떡 50전 어치만 하고 고기 50전 어치만 사다 놓우. 그래도 그렇지 않어 노인 계신데. (돈을 이씨에게 준다)

정수 얘― 나 그 떡국 싫다.

인식 그래도 섭섭하니까 그렇지요.

이씨 그런데 낼 아침 땔 나무도 한 알갱이 없이 똑 떨어졌으니 어떡하면 좋소. 그럼 고기는 30전 어치만 사고 나무를 20전 어칠 살까.

인식 아따 그것은 좋도록 하구려.

창밖에서 여보― 김인식 씨, 김인식 씨.

이씨 저를 어쩌우. 벌써 자정이 되었나.

창밖에서 김인식 씨―.

이씨 저게 아까 그 집주인의 목소리야.

창밖에서 김인식 씨 계시오.

인식 (크게) 네― 나가오. (이씨를 보고) 응 저게 집주인이면 우선 봉변은 톡톡이 당했는데…….

이씨 아이 또 그 지긋지긋한 소릴……. 차라리 까마귀 소릴 듣는 것이 낫지……. 아무거나 우선 이거라도 주어 보냅시다 응.

인식 떡 사올 것은 어떻게 하고.

정수 얘― 나 그 떡국 싫다. 떡국이 아니라 욕(辱) 국이지. 원수의 나이만 더럭더럭 먹는 것.

인식 그럼 이렇게 하지 아까 50전은 주었다니까 시방 나가 아주 1원 머리로 50전만 더 주고 50전은 거슬러서 흰떡 30전 어치, 고기 10전 어치, 나무 10전 어치 그렇게만 삽시다.

이씨 아무려나 좋도록 합시다 그려.

인식 (나가면서 크게) 50전 거스를 돈 있소?

창밖에서 있소.

(인식 퇴장)

정수 하루 두 끼 밥도 얻어 먹기가 어려운 사람이 꼴에 또 이면 치레를 한다.

이씨 그러믄요. 아무튼 이런 곳에 살면은 내가 굶으면서도 저절로 배부른 척 해야 됩니다그려.

(인식 등장)

인식 (입맛을 다시며) 응 그거 참 1원 한 장을 온통으로 그만 올려 발렸지.

이씨 (놀라며) 무어요.

인식 (고소(苦笑)를 하며) 참 고나마 부지를 못할라니까 별 일이 다― 많어……. 아이고 집주인 놈인 줄만 알고 나갔더니 가가쟁이야 저 위 그 전 살던 데의.

이씨 저런.

인식 그래 외상값이 꼭 4원50전인데 아마 5원짜릴 가지고 거스를 돈을 물은 줄 알았다나. 그러니 돈 뵈고 아니 줄 수 있어야지. 온 그거 참 집 쥔 놈에게 실컷 분풀이나 하고 50전쯤 내던져 줄려고 나간 노릇이 그만…… 음.

이씨 저런…… 그가 쥔 같으면 아직 안 갚아도 괜찮은 걸……. 접때 이도(移徒) 오던 날 내가 사정 말을 했더니 아무튼 그럼 세(歲) 안으로 집이나 알러 한 번 가마고 그랬던 걸 그랬지.

인식 그래 "그것을 주어서 매우 고맙다고" 그러며 얼른 가던 걸.

정수 흥 사람이 서로 그 돈이라는 쇠 끝을 개도 아니 먹는 그 돈을 주고 받고 하는데 우스운 일 슬픈 일이 쏟아져 나온다. 참 괴이한 세상이야 아무튼 내가 그 지겨운 욕국을 안 먹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로군. 그러나 어떻든 이런 어려운 사람은 암만 무슨 분한 일에 알아도 돈을 가지고 어떻게 그 분풀이를 좀 해보려고 한대야 그건들 그리 만만하게 마음대로 썩 잘되는 것도 아닌 게야.

인식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딴 힘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부자가 든든한 복이 있는 건너편에는 가난한 사람의 앙세인 힘도 있으니까. 한 놈은 덤비고 한 놈은 뻗설 때에 뚱뚱한 놈이 질른지 말라꽁이가 질른지 아무튼 부자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 하는 이도 가난뱅이들이니까요.

정수 아무튼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끼리만 모여 사는 것이 좋―지. (눈물을 지은다)

가애 할아버지 울우.

정수 아―니.

가애 그럼 왜 저렇게 눈물이 나우.

정수 (눈물을 씻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구슬프게) 응 이런 것은 이 할아비는 늙은이가 되어서 날만 조금 추워도 그저 눈물이 나지. 아니 그 거짓말 바람이 솨― 하고 불 적마다 이 늙은이의 눈물마저 뺏아서 가려고…….

가애 할아버지 참 그 옛날 얘기 마저 해.

정수 (한숨을 쉬고 가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응 하지. 하지 말고. 이제 다― 해주지. 우리 아가를 신통한 아가를……. (우는 듯이 목이 메인다)

(잠깐 고요하다)

이씨 참 대문이나 잘 걸지요.

인식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응, 걸기는 단단히 걸어놓았어…….

정수 그런데 그 얘기를 무엇이라고 하다가 말았더라.

가애 왜 임금님이 거지가 되어 댕긴다고 그랬지.

정수 옳지 참. 그런 말까지 했지……. 그래서 아가, 그 모진 바람이 또 한 번 솨― 하고 불 적에 그만 그 임금님마저 귀여운 임금님마저 잃어버렸단다.

가애 저런 그럼 그 고운 때때댕기는?

정수 그것도 마저 하는 수 없이……. 그만―. (목이 메인다)

가애 참 엄마 이제 나가 때때댕기 사 와.

정수 아니 아니 그것도 마저 우리 아가 때때댕기도 그만 그 몹쓸 바람이지 겹게 지겹게 잡어먹어 버렸단다. (운다)

가애 (몸부림을 하며) 안 돼. 난 몰라 난 몰라. 어서 가 찾아 와…….

인식 (큰 소리로) 가만 있어. (이씨를 보고) 그럼 어떡하나 밤도 늦었는데…….

이씨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힘없이) 글쎄요…….

인식 (부시시 일어나 정수에게 공손히 절을 한다)

이씨 (정수에게 절하고 나서) 아버님 새해는…….

정수 글쎄 새해에는 어서 죽을 꿈이나 꾸었으면.

이씨 가애야 너도 이제 이런 것 해 버릇해야지. 어서 일어나 절 해라. 묵은 세배로 할아버님께.

정수 (손을 저으며) 아니 아서라. 그 따위의 짓은 지각없는 어른들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착한 아가야. 그까짓 쓸데없는 짓을 무엇 하러…….

(밖에서 멀리 최태영의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

이씨 (놀라며) 저게 정말 집주인이야 벌써 자정이 됐는 게지?

인식 (가만한 목소리로 또 급히) 가 가 가만히 있어…….

(인식과 이씨는 허둥지둥 부산히 서로 눈짓 손짓으로 반짓그릇 화로 기타 방에 늘어 놓인 기구를 되는대로 윗방으로 옮기어 놓는다. 무슨 폭풍우를 상징하는 듯한 광경, 정수와 가애는 물끄럼이 그것을 볼 뿐, 인식은 방안을 한 번 휘휘 둘러보고 등잔불을 입으로 불어 끈다. 무대 암흑 밖에서는 어지러운 바람 소리에 섞이여 거칠게 부르는 집주인의 목소리는 매우 분노에 띠인 듯 발구르는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나다가 그친다)

정수 (어둡고 고요한 속에서) 이것이 우리집의 섣달 그믐이다…….

(방 안에서는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우렁차게 또 무섭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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