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필/벨리니의 비련

고금 악성들의 비련 이야기는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베토벤 • 바그너 • 베를리오즈 등등─.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탈리아의 대가극 작곡가 벨리니의 청년시대의 연애 이야기의 한 편입니다.

악성 쇼팽은 벨리니의 작품 〈노르마와 퓨리터니〉중의 영탄조를 들으면서 가끔 너무도 감격한 끝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쇼팽과 벨리니는 오랫동안 친교를 계속해 왔고, 사후 영원까지도 친근한 동무가 되어 있으니 그 이유는 쇼팽의 관이 페르 라쉐즈(Pére la chaise) 공동묘지 벨리니의 관에 함께 매장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쇼팽을 이렇게 감격시킨 벨리니도 그의 청춘 시절에는 결코 행운만이 찾아오지는 않았던 것이니, 젊은 벨리니는 나폴리의 한 법관의 딸과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서로 연모하던 중에, 이것이 법관에게 눈치채어지게 되자 법관은 일개 무명의 청년 음악가를 한 푼의 가치조차 인정해 주지 않고서 일언지하에 그를 물리쳐 버렸습니다.

그래 그까짓 놈이 대체 무엇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피아노를 치고 작곡을 하고 그것이 무엇에 소용된단 말인가? 이같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시절의 벨리니에게는 명예도 없고, 지위도 없고, 재산이라고는 더구나 없었던 것입니다. 법관은 젊은 벨리니의 열원(熱願)과 사랑하는 딸의 간망(懇望)을 단연 거절하여 두 남녀 사이에 깊으나 깊은 낙망의 심연(深淵)을 파고, 높으나 높은 수탄(愁嘆)의 산을 쌓게 했던 것입니다.

청춘의 피가 약동하는 벨리니의 수탄을 구태여 말하면 무엇합니까? 그는 쓰리고 아프고 원통하고 억울한 가슴을 억지로 누르고서, 종일종야 오직 망막(茫漠)한 가운데서 세월을 허송해 가며 옛날의 애달픈 추억만을 심중에 그려보던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애인의 환영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자기 방안에 홀로 엎드려서 쓸쓸하고 적적한 날을 보내기에 애를 태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그 고통과 비탄은 그에게 발분의 정열을 폭발시켰으니, 이 젊은 음악가는 비로소 비탄과 실의의 심연에서 몸을 일으켜 새로운 천지에서 호흡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생각한 바 있어서 나폴리를 떠나 밀라노로 갔습니다. 쓰라린 옛 기억을 청산하기에 이 여행은 실로 크나큰 효과를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밀라노로 간 청년 음악가는 그의 전 정력을 오직 작곡에 기울였습니다. 이제 그의 가슴에는 애인의 환영도 없고 사랑의 속삭임이나 심연의 수탄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술을 향하여 타오르는 정열, 그것만이 그의 심중의 전체였던 것입니다.

음악!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의 전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밀라노에 체재하는 동안에 다수의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쇼팽으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한 그의 걸작 〈노르마〉를 품에 안고 고국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금의환향한 때는, 그가 나폴리를 떠난 지 겨우 2년밖에 안 되었던 것입니다.

나폴리에서는 무위무관(無位無官)하고 성명조차 없던 한 음악가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의 한 큰 자랑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서 유럽 전토에까지 그 광채를 발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년에는 그의 간절한 소청을 일언으로 거절했던 법관도 벨리니의 명성이 이같이 높아진 데 감심이 되어 이번에는 자신이 자진하여 그를 찾아가서 혼담을 건네었습니다만, 그러나 벨리니의 마음은 2년 전에 그가 가졌던 마음과는 전연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연애도, 향락도 추호만한 가치를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전 생활이 오직 음악 중에서 자라나갔던 것입니다.

법관은 거절을 당하고는 크게 낙담했지만, 그보다도 애인의 실망과 비탄이야말로 구하고 위로해줄 만한 아무 방도가 없었습니다. 완고한 아버지의 엄명 아래 희생이 되어 2년 동안 은인수탄(隱忍愁歎)하던 딸이 이제 겨우 부친의 양해를 얻게 된 때에는 믿고 있었던 정남(情男)의 마음이 철문같이 닫히고 말았으니 근심스런 기색이 사라지기도 전에 최후 한 가닥의 생명선까지도 끊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벨리니! 그의 명성이 높아가면 갈수록 그 여자의 오뇌와 수탄은 깊고 커갈 뿐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여자는 자기 아버지가 완고했던 것을 원망하며 애인의 박정함을 한탄하면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혜성과 같이 이탈리아 악단에 광휘를 발사하던 벨리니도 풍부 무진장한 그의 천재를 품은 채로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때에 그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 벨리니(Vincenzo Bellini)는 1801년 11월에 이탈리아 시실리에서 출생하여, 1835년 9월 23일에 파리 근방인 푸토에서 사망한 이탈리아 가극 작가.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