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필/베토벤과 불후의 총자

음악의 세계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존재인 대악성 베에토벤의 이름을 듣게 되거나, 또는 그의 초상(肖像)을 대하게 될 때에는, 어느 누구나 경건한 생각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한 편으로는 그윽히 동정의 눈물을 금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 그 까닭은 우리가 음악사를 읽을 때에, 베에토벤이란 이는 세상에 나던 날부터 죽는 날까지, 간난(艱難)과 곤궁과 우울과 고독 속에 얽매여서, 부모의 애정이나 가정의 행복이란 것을 모르고 쓸쓸히 살아 왔을 뿐만 아니라, 중년에 이르러서는 듣기에도 놀라운 귀머거리란 병신까지 되었으며, 또 일생을 통하여 그는 독신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망 롤랑이란 음악 비평가는 일찌기 베에토벤의 일생을 “폭풍우의 하루와 같다.”고 말한 일도 있읍니다마는, 고뇌를 이기고 환희를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악전고투해 온 그의 생애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커다란 힘이 용솟음쳐 올라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과 장애를 당하면서도, 자기의 힘이 미치는 한의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아서, 인류라는 그 이름 위에 찬연한 광채를 비추게 한 여러 사람들이, 내 자신과 같이 불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에, 나로서는 스스로 위안을 받게 된다.” 고 말한 베에토벤의 고백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한 큰 교훈이 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만고에 썩지 않을 위대한 예술로써 인류의 머리 위에 영관(榮冠)을 가져오게 한 영웅 베에토벤이, 실의와 병고에 쫓기면서 죽음의 길로 들어가려고 할 제, 런던에 있는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천 원의 위로금이 오게 되자, 그는 마치 어린애와 같이 기뻐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생선 요리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을 들을 때에, 우리는 눈물 없이는 이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읍니다. 동시에 베에토벤과 같이 위대한 영웅도 일개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역시 일개의 인자(人子)로 세상 만민을 죄 중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일신을 희생하여 십자가 상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세상이 그를 추앙한다면 베에토벤과 같은 초인적 영웅이 보낸 비참한 일생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다음 갈 만한, 인류의 행복을 위한 희생적 생애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여러분이 아마 잘 아는 바 베에토벤의 전기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철두철미 불행한 일생을 보낸 이 초인적 영웅의 사생활 속에는, 얼마나한 따뜻한 사랑의 정열이 숨어 있었는지,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엿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속삭이던 청춘 시대의 베에토벤의 로맨스’에 대하여는, 음악의 역사나 음악가의 전기를 들추어 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동시에 음악사에 정통한 사람들도, 이러한 방면의 소위 ‘악성의 사생활’에 대하여는, 보통 음악사에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음악사에나 혹은 음악가의 전기를 뒤질 때에, 베에토벤이 일개의 귀머거리요, 성질이 완강하여 고집불통이요, 성내기를 잘하며, 세상사에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가끔 세상을 멸시하기까지 하는 반광(半狂)의 천재라고 함을 알 수가 있으며, 또 비평가들의 말을 주워 모은다면 “황망한 무인도에서 혼자 나고 혼자 자라다가 갑자기 문명한 사회로 뛰어 들어온 자가 베에토벤이라”고 비웃어 말한 이도 있고, 체르니라는 음악가는 베에토벤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선생을 평하여, “이 사람은 유럽 제일의 음악가라 함보다는 차라리 로빈슨 크루소라고 함이 더 적당하다.”고까지 말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읍니다.

물론 베에토벤의 외양만을 본다면 누구나 이같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는 솜 조각에다 황색의 무슨 약을 발라서 귀에 틀어막았고 더부룩한 그의 수염은 언제나 반 인치 이상은 되어 있었으며, 그의 머리는 생후에 한 번도 빗이나 솔의 혜택을 입어 본 일이 없는 것 같았으며, 허리는 꾸부정한 데다가 키는 몹시 작아서 5척 4 촌이란 에스키모와 같았고, 얼굴은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검붉은 데다가 코는 대단히 크고, 손가락은 짧고도 뭉뚝해서 다섯 개가 똑같은 길이였으며, 그 위에 검은 털이 산등성이에 애솔나무 모부어 놓은 듯이 덮였으며, 어깨는 정도에 지나치게 넓어서 그의 체격만으로도 아프리카의 야만 인종을 연상하게 할 뿐 아니라, 비 오는 날 비를 줄줄 맞아가며 뒷짐을 짚고, 작곡할 곡상(曲想)을 생각하느라고 거리를 거닐 때나 바람 부는 날 모자도 없이 그 장한 모발을 흩날리며, 어슬렁거릴 때는, 틀림없는 악마와도 같았고 광인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 데다가 성질이 몹시 괴벽해서 조석 식사 때 스프 맛이 입에 안 맞는다고 주인 마누라에게 국그릇을 뒤집어 씌우기가 일쑤요, 양초 심지 자르는 가위로 이를 쑤시는 버릇이 있고, 대낮에 오고 가는 사람이 즐비한 큰 길거리로 대고, 문을 열어 젖히고는 잠옷 바람으로 면도를 하는 것쯤은 예사로 알았으며, 성이 날 때에는 잉크 병을 피아노 건반 위에 메다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때는 자기가 손수 음식을 만드느라고 야단법석을 했다가, 어떤 때는 가구를 짓부스러뜨리기도 했다가, 또는 악보를 갈갈이 찢어 버리기도 했다가 주인 마누라와 말다툼을 하고서는 금시로 집을 옮겨 버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어떤 때 그의 친구인 귀족 한 분이 그를 편안히 지내게 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와서 있으라고 권한 일도 있었건마는, 베에토벤은 귀족의 훌륭한 저택보다는 살풍경인 하숙집이 더 좋다고, 모처럼 보여 준 귀족의 호의를 여지없이 거절해 버린 적도 있었읍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사람이 쓴 그의 전기에 적혀 있는 만큼, 결코 과장한 것도 아니요, 또 거짓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1년 365일을 언제나 이렇게만 지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끔찍이 충실한 사람으로서 백절불굴하는 그의 성격과 천하를 우습게 보는 그의 자존심은 온갖 물질상의 곤궁이나 정신상의 고통까지도 용이히 물리쳐 버리고, 영원불멸의 자기 예술을 위하여, 죽는 날까지 헌신적으로 노력해 온 그의 공적에는, 한 나라의 제왕으로도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위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에토벤의 일생이 비록 곤궁과 고뇌의 역사라고 하더라도 그의 청춘 시절에는 또한 남과 같이 훌륭한 단꿈으로 장식된 시절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 그가 26세의 청년으로 처음으로 인국(隣國)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나타났을 때에는, 그는 자기 나라의 궁정 악사의 차림대로, 초록빛 연미복에 흰 조끼를 입고 비단 버선에 흰 넥타이에, 허리에는 조그만 칼을 차고, 머리는 굽슬굽슬하게 지지고 신은 훌륭한 장화를 신었으며 모자를 벗어서 옆에 끼고 다닐 때에 그 위풍이야말로 과연 당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차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고 그의 천재가 성숙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의복이나 거처 같은 것에 구속을 받음이 없게 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그의 온갖 정력을 오로지 자기의 예술을 위하여 기울였음에도 말미암았겠지마는, 그보다는 그의 나이가 30 내외가 되자마자 두려운 귀머거리라는 병마에 걸리게 된 데서부터 그의 성격까지도 돌변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야기하려는 그의 로맨스에 비추어서 생각한다면 그가 30 세 내외에 귀머거리가 되기는 했으나 처음 몇 해 동안은 그다지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니, 그가 42세 때에 바덴 시의 화재로 인하여 수많은 이재민을 내었을 때 그 구제 음악회에 그가 피아노 독주를 했다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음악 연주도 이것이 마지막이었으며 또 그의 로맨스도 역시 이때에는 종말을 내리어서, 그의 42세 이후에는 아무런 정열적 기록도 남기지 않았음을 볼진대, 음악의 영웅 베에토벤이 세상의 모든 집념을 끊어 버리고, 오로지 자기의 심령에 비치어,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에만 헌신한 것도 또한 이 때부터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음악가로서 귀머거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읍니까? 더구나 이 불행을 대천재 베에토벤 자신이 깨닫게 된 때에 그의 실망과 낙담은 과연 얼마나 컸을 것입니까 ? 그가 30 세가 되어서 이 비참한 사실을 발견하였을 때 그는 남몰래 혼자서 이같이 부르짖었읍니다.

“아아, 비참한 나의 여생이여 ! 가장 사랑하는 것과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이 운명은, 이 무슨 두려운 천벌일까 ? 완전한 청각만 가질 수 있다면 나의 행복은 이 이상 더 클 것이 없다.” 고. 그리고 그의 일기에는,

“너 불쌍한 베에토벤이여, 너를 위하여 밖으로부터 올 만한 좋은 운명은 벌써 다 없어지고 말았도다. 너는 다른 것을 네 스스로 창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오직 이상(理想)의 세계에서만 환희를 구할 수 있으리라.”

고 씌어 있읍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기가 죽은 후에 비로소 개봉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자기 형제들에게 남긴 편지에 이렇게 말했읍니다.

“그대들은 내가 악의를 가진 사람, 몰인정한 사람으로 인정해서는 큰 잘못이다. 내가 만일 그대들 눈에 이렇게 보였다면,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숨어 있는 까닭일 것이다. 나의 마음이나 정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항상 인자하고 친절한 사랑 속에 불타 있었다. 그러나 기억하라. 6년 전에 나는 불치의 고질에 걸리게 된 것을. 그러나 의사의 서투른 수술은 병세를 더욱 악화시켜서, 처음에는 완치될 희망이 없지도 않았던 것을 이제는 끝없는 고통과 희생의 깊은 못 속으로 쓸어 넣고 말았다.”고.

일생의 대비극은 여기서 그 막을 연 것이 틀림 없읍니다. 베에토벤이 자기의 일생을 평하여 항상 ‘불후의 총자(寵者)’라는 이상적 애인을 찾았으며, 또 어떤 때는 몇 사람의 아름다운 이성을 연모한 일까지 있지마는, 끝끝내 동정을 깨뜨리지 않은 채로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게 된 것은 그 이유가 물론 다른 데에도 있겠지마는 이 일생의 비극이야말로 또한 한 큰 이유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건만도 귀머거리 베에토벤은 자진해서 사랑을 구했고 연인을 가졌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귀머거리가 아니고 거기에 따르는 불건강이나 우울증이나 또는 곤궁이란 것이 없었던들 그는 자기의 미천한 신분보다는 훨씬 고귀한 사람과 결혼을 했으리라고도 생각됩니다. 그가 병신이 되기 전에는 무던히 이성에 대한 애착심이 강했으며 병신이 된 후에도 이 관능만은 제어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견딜 수 없이 불타는 눈으로 아리따운 촌색시들을 유심히 보는 일이 가끔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제자의 한 사람인 페디난드 리스는 어떤 날 자기 선생에게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어떤 부분을 보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훌륭해 보였던 까닭에, 그는 자기의 일기에 나의 선생은 필연 호색남이라고 적어 두었더라는 일화도 있읍니다마는 또 어떤 때 리스는 이같이 말한 적도 있읍니다. “베에토벤은 부인들이 모이는 곳에 참석하기를 좋아하며, 만일 어여쁜 여자만 본다면 곧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서는, 그 여자의 앞뒤 모양을 뚫어지게 살펴본다. 그러다가 내게 들킬 때에는 싱긋 웃으며 아무 까닭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또 리스는 이같이 말한 적도 있읍니다. “그 시절에 그는 어느 누구에게나 사랑을 주고 받기에 애를 태우고 지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오랫동안 계속되지는 않았다. 어떤 때 그가 한 아리따운 여자를 자기 손에 넣었을 때, 내가 놀려 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이 여자만큼 오랫동안 사랑을 계속해 본 일은 없다. 그는 반년 동안이나 나를 위로해 주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진실하게 나에게 대해 주었다.’고 대답했다. 그뿐 아니라 내(리스)가 3 형제나 되는 젊고 어여쁜 딸들이 있는 집에 하숙하고 있을 적처럼 베에토벤이 나를 자주 찾아와 준 적은 없었다.”고.

이 말을 종합해 보더라도 이 위대한 작곡가는 비록 결혼을 하기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절망과 비탄이 그의 몸과 마음을 엄습해 오기 전까지는 이성 중에도 가장 아리따운 것을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애써 왔던 것입니다. 그는 부르짖었읍니다.

“사랑이여, 오직 사랑만이 나를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오오 하느님이시여 정결하고 , 정당한 길에서 나에게 보호자를 보내 주소서. 내 것이라고 드러내 놓고 부를 수 있는 한 사람을 보내 주소서.”하고, 이렇듯 애타는 사랑의 불길은 얼마 동안 그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읍니다. 그가 크라이헨슈타인이라는 남작 부인에게 써 보낸 연문의 한 귀절을 보더라도 그는 아리따운 이성, 자기의 위로자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혼자서 속 마음으로 애타고 지냈는지 족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당신께서 만일 아름다운 여자를 찾을 수가 있다고 하실진대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나의 예술의 길에 다소간 지장이 생긴다 하더라도 차라리 이것은 참을 수가 있읍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여자란 반드시 아름다우신 그대 자신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아름답지 않은 사람을 나는 사랑할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만일 내 소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나의 마음과 정성을 바쳐 사랑하겠읍니다.”

베에토벤의 정열이 가장 맹열하게 불타던 때는 그의 나이 30 전후였읍니다. 그는‘불후의 총자(寵者)’라는 이상적 애인을 찾기 위하여 교미기에 있는 수류(獸類)와도 같이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에게로 사랑의 정염(情炎)을 옮겼던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했을 뿐만 아니라, 이성을 끄는 힘이나 수단도 상당했던 모양으로, 여러 미남자들과 귀공자들이 애를 태우고 있는 여자라도, 그는 용이하게 자기 수중에 넣을 수가 있었읍니다. 그뿐 아니라 베에토벤은 그의 신분이나 가문이 보잘 것 없었음에 비해서는, 대부분의 애인은 자기보다 훨씬 고귀한 사람들이었던 것도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가 17세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동네에 사는 어떤 과부가 그의 계모로 들어왔는데, 계모에게는 에레오노레라는 딸이 있어서, 의붓오빠되는 베에토벤에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읍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그로 하여금 이성에 대한 애정을 깨닫게 한 동기가 되어서, 에레오노레가 손수 만들어 준 조끼나 혹은 의복에 붙이는 장식물들이 그의 마음 속에 이상한 충동을 주어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을 더 한층 태워주던 것은 파베트라고 하는 어떤 음식점의 아름다운 소녀였읍니다. 그래서 베에토벤은 언제나 이 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것을 유일의 행복으로 알았으며 그가 이 동네를 떠난 후에도 일년에 2, 3차씩은 반드시 이 소녀에게 편지를 했읍니다마는 이 소녀는 그 때 어떤 백작의 집에 가정 교사로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필경은 백작의 부인이 되고 말았읍니다.

블론드의 머리와 바다같이 새파란 눈을 가진 아리따운 소녀의 자네트가 베에토벤의 마음을 교란한 것도 이 때였읍니다. 그는 선생의 옆에 앉아서 열심으로 피아노를 칠 때면, 나이 젊은 선생 베에토벤은 그만 그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앞날에 올 행복을 꿈꾸면서 소녀가 치는 음악 소리에 정신을 잃고 지냈지마는 그가 꿈꾸던 행복은 역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소녀에게는 뜻밖에도 경쟁자가 있어서, 그 대적이 너무도 불량한 사람이었던 까닭에, 베에토벤은 구태여 그자와 싸우지 않고 깨끗이 단념해 버리고 말았읍니다.

이 시절의 베에토벤에게는 꽤 많은 로맨스가 있었으니, 베스테르홀드나 윌만이나 베링 같은 여자들은, 모두 한때는 열렬한 사랑을 속삭였으나, 필경은 딴 남자들에게 출가해 버렸으며, 마르파치 양이나 로에켈 양이나 자나다지오 양이나 뮬러 양들도, 고독하고 불운한 환경에 처해 있는 천재를 위하여 한때는 크나큰 위안을 주었으며, 그 중에서도 마르파치는 베에토벤과 결혼을 하기로 약정한 일까지 있었지마는, 역시 나중에는 그를 걷어차 버리고 말아서, 베에토벤의 가슴 속에는 부질없이 잊어버릴 수 없는 상처만을 남겨 놓았읍니다.

그 외에 마리 피트라는 귀부인이 있어서, 그는 어떤 귀족의 집 도서관원으로 있는 비고트 씨와 결혼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는데, 그 부인과 베에토벤과는 무던히 오랜 세월 두고 서로 사모하며 지냈으며, 또 그 부인이 베에토벤의 악곡을 연주할 때면, 언제나 작곡자는 희열과 감사의 정에 넘쳐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사이는 끝까지 서로 이해하는 우정의 관계 이외에는 더 나가지 않았읍니다. 어떤 때 비고트 씨는 이 두 사람의 교제에 대하여 질투를 한 일까지도 있었읍니다마는, 거기 대해서는 베에토벤이 비고트 씨에게 보낸 편지의 한 귀절을 읽어 본다면, 그 때의 베에토벤의 심경이나 또는 비고트 부인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가 있읍니다.

“남의 부인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우정 관계 이상으로 더 나가지 않는 것이 나의 제일 원칙이다. 그대가 추측함과 같은 그러한 관계로써, 나의 심중을 그 여자에게 대한 불신으로 충만시키는 것은, 나로서는 참고 견딜 수 없는 모욕이다. 언제거나 나에게는 나와 꼭 같은 운명을 쌍견(雙肩)에 지고 나갈 여인이 따로 있을 것이다. 또 내 자신에 대해서도,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생명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귀절의 편지 속에는 베에토벤은 자기가 동경하는 이상적 애인이 언제거나 발견될 것을 믿고 있었으며, 또 이상적 애인을 위하여 자기의 순결한 생명을 함부로 더럽히지 않겠다는 것을 그는 말한 것입니다.

이 같은 편지를 써 보낸 지 5년 후인 1810년에 페치나 브렌다노와의 사이에 새로운 연애 사건이 발생했읍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과연 베에토벤의 완전한 소유물이 되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페치나는 그 당시에 도이칠란트 문예계에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여자로, 오래 전부터 괴테와 연애를 해 오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하여간 이 여자는 베에토벤을 대단히 존경해 온 것만은 사실이며, 베에토벤 역시 이 여자를 몹시 사랑한 것은 그의 편지의 한 토막을 읽음으로써 족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만일 괴테와 같이 가끔 가끔 그대들의 회합에 참석한다면 나는 괴테보다도 더 위대한 저작을 할지도 모른다. 음악가는 본시 일개의 시인이다. 한 쌍의 눈의 매력은 연주자를 초월한 미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위대한 심령의 힘은 장대한 사업을 성취할 수 있다.” 하였고, 또,

“내가 처음으로 그대를 만나던 날의 기념으로 나는, ‘그대여 저 나라를 아는가’라는 한 마디 말을 보내노라. 그리고 또 한 가지 선물은 내가 그대와 작별하고 나서 지은 한 개의 악곡이다. 가장 친애하는 가장 아름다운 연인이여, 하느님이 만일 나에게 2, 3년 동안의 생명이라도 더 허락하신다면 나는 두 번 다시 그대와 반갑게 만날 날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의 사랑하는 페치나여, 나의 간절한 말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한 개의 교훈이다. 사상(思想)부터 이미 서로 사랑하지 않는가. 나는 어떠한 순간일지라도 그대의 사랑을 구하여 마지 않는다. 그대가 만일 이것을 허락한다면, 온 세계의 무엇보다도 나는 기쁠 것이다.” 라고 씌어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아름다운 연인’도 필경은 남의 아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때에 베에토벤은 마음 속에서 솟아나오는 눈물을 억제하고 용기를 내어서 그 여자의 앞날의 행복을 빌기 위하여 다시 붓을 들었읍니다. “그대의 귀여운 이마에 슬픈 키스를 보내노라. 나는 눈물로써 이 글을 쓰노라.”하는 실연자의 상투적 문구를 잊어버리지 않고서.

그러나 이것이 결코 최후의 영별(永別)은 아니었으니, 그는 그 후에도 가끔 전일의 연인을 생각하고서는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편지에는 언제나 “영혼은 어느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대의 사랑을 희구한다.” 하는 말을 빼어 놓지 않았으며 “평안할지어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자여, 그대의 최근의 편지는 밤새껏 내 가슴 위에 누워서 나를 위무해 주었노라. 그대여, 내가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대는 아는가?” 하고.

베에토벤의 전기자(傳記者)로 유명한 테이어 씨는 페치나가 그의 미와 매력과 영(靈)을 가지고 이 악성에게 친근히 접해 준 것은, 이 악성을 위하여 지극히 행복스런 일이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이 여자는 베에토벤의 일생을 통하여 없어서는 안 되었을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7년이 지나서 베에토벤은 다시 다른 여성과 사랑을 하게 되었읍니다. 이 여성이란 아마리에 세발트라고 하여 1812년에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인데 이 때에 베에토벤은 바로 그의 제8 교향곡을 쓰던 때로 이 여자와의 사랑이 그의 작품 제작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듣더라도 짐작할 수 있지마는 사실상 그 때의 베에토벤은 건강이 몹시 쇠퇴해져서 노년의 고독과 우울을 위로해 줄 만한 무엇이 필요했던 만큼 아마리에와의 교제는 또한 그의 일생에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조차 필경은 남의 아내가 되어 버렸으니 베에토벤 자신이 언제나 항상 말하던 바 ‘결혼은 인생의 환희’라고 한 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한갓 빈 말에 지나지 않았고 그는 끝끝내 그것을 실현시킬 만한 행운을 가져 보지 못한 채로 고적한 일생을 마쳤읍니다. 그렇건만도 그는 오히려 “나의 사랑의 힘은 아직도 전과 같이 강하다.”고 말하였으며, 또 전일의 제자인 리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불행한 운명은 나로 하여금 오늘까지도 독신을 면치 못하게 한다. 나는 오직 한 사람인 애인을 얻었으나 그는 나의 완전한 소유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여성을 미워하지는 않는다.”하고 말한 것을 볼 때에 그 소위 ‘오직 한 사람인 애인’이 누구였는지 알 수는 없지마는, 그는 이같이 끊임없이 계속된 연애 사건 중에서도 언제나 자기가 이상(理想)하는 소위 ‘불후의 총자’를 찾기 위하여 애써 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도이칠란트의 대악성의 일생애를 통하여 맺어진 사랑의 로맨스는 대강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이외에 그의 생명을 불사르듯한 정열에 넘치는 큰 사랑의 이야기가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책상 서랍으로부터 튀어나온 세 통의 유명한 연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세 통의 유명한 연문이란 수신인의 성명도 쓰여 있지 않고, 그 글을 쓴 연대도 없고, 오직 모월 모요일이라는 것만이 기입되어 있으므로, 여러 학자들은 이것을 구명해 내기에 열심이었읍니다. 그리하여 7월 6일 월요일이라고 쓰인 것을 유일의 자료로 하여 만세력을 펼쳐 놓고 조사해 본 결과, 1801년 7월 6일이 월요일에 해당한 것을 발견했읍니다. 그리하여 이 편지의 주인공은 갈렌베르그 백작 부인 기리에타라고 추정하게 되었으니 그의 유명한 <월광의 곡>이야말로 이 부인에게 선물로 지어 보낸 것입니다. 그 여자가 17세 때에 34세 된 베에토벤에게 음악을 공부하게 된 것이 동기가 되어, 본시 그 여자는 귀족의 딸로서 베에토벤과 같은 미천한 음악가와는 사랑을 속삭일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따운 기리에타는 청춘의 정열이 불타듯하는 자기 선생의 사랑의 정염에 부채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로 세평이 많았지마는 하여간 청년 작곡가는 너무나 연모하던 나머지 그 소녀에게 손을 벌리게 되었고 그 소녀 역시 여러 가지로 번민을 해가면서도, 필경은 그 팔에 안기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소녀의 부모에게 눈치채어지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엄중하게 항의를 제출하여 무명 청년의 불근신한 태도를 몹시 질책했읍니다. 그리고는 얼마 되지 않아서 1803년에 기리에타는 갈렌베르그 백작에게로 출가를 시켜 버렸읍니다. 그 때의 베에토벤의 심경은 신들러와의 대화 중에 잘 드러나 있읍니다.

“그 여자는 나를 몹시 사랑했다. 아마 그의 남편이라도 이렇 듯한 사랑은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여자의 남편 되는 자가 나보다는 그 여자의 마음에 더 들었던 모양이다. 하느님이시여, 그 여자를 허물치 마소서. 그는 자기의 행할 바 길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갈렌베르그 백작은 어떤 무도장의 소유자로, 변변치 않은 무도곡을 많이 작곡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베에토벤은 이런 저급한 경쟁자에게 참패를 당한 만큼, 여간 통분해 한 것이 아니었읍니다.“기리에타에게서 들었는데, 그 남자는 돈 한 푼 없는 가난뱅이라데그려. 위자료라는 명목으로 돈 5백원을 내게 보낸 것을 보더라도 불문가지란 말이지. 이 따위 녀석이건만도 나에게는 언제까지나 원수인 만큼,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결심일세.”하고, 자기 친구에게 말했다는 것을 보아서나, 또 그가 리스에게 보낸 편지에 ‘아마 내 소유는 되기 어려울 듯한 유일의 여성’이란 말을 쓴 것을 보거나, 베에토벤의 이상적 애인인 ‘불후의 총자’는 틀림없이 기리에타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3통의 연문으로 인하여 이 ‘불후의 총자’란 관사가 과연 어느 누구에게 붙여진 것인지 여기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구구불일하니, 첫째로 백작 부인 테레자 브론스윅도 역시 그 후보자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테레자는 공교롭게도 기리에타의 종매(從妹)였읍니다. 이 여자도 역시 베에토벤에게 음악의 가정 교수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집안은 귀족 치고도 가법(家法)이 너무 엄혹하여 테레자가 선생에게 강(講)을 받을 때엔, 반드시 방문을 열어 놓고 그의 어머니가 멀리서 감독을 해 오던 터인 만큼 좀처럼 단 두 사람만이 서로 담소할 기회는 없었읍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부지중에 자기 선생을 연모하게 되었으니, 어떤 몹시 추운 겨울 날, 테레자는 강(講)을 받다가 너무도 여러 군데 잘못하므로 베에토벤은 그만 성이 나서, 외투와 목도리를 내버린 채로 길 밖으로 뛰어나간 일이 있었읍니다. 테레자는 일편 미안하기도 하려니와, 그보다도 심중에 사모하는 그이가 혹시 감기나 들면 어찌할까 염려가 되어 그의 외투와 목도리를 집어가지고 곧 그 뒤를 좇아나갔읍니다. 이 꼴을 보던 그의 어머니의 놀라움은 또한 굉장했을 것이니, 귀족의 집 처녀로서 기껏해야 피아노 선생 밖에 될 것이 없는 남자의 뒤를 좇아서 큰 길거리까지 나갔다는 데 대해서 적지 않은 질책을 받았을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읍니다. 가련한 소녀 테레자는 속마음으로 반성도 해 보았지마는 그러나 이 불행한 청년 악가를 잊어버릴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입니다.

이 두 남녀 간에는 불타듯하는 사랑이 부모의 눈을 피해 가며 서로 왕래했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비밀히 약혼을 하고 생활에 충분한 수입을 얻게 될 때에는 곧 결혼하기로 굳게 약속했읍니다마는, 베에토벤은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크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4년이 지나도 충분한 수입을 얻을 만한 지위에는 달하지 못했으므로 성급한 그는 이 이상 더 참고 견딜 수 없어서 하루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곧 그날로라도 결혼을 하자고 맹렬하게 졸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리어 그가 헤어지게 된 원인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겠지마는, 하여간 테레자는 베에토벤의 맹렬한 육박에 겁을 집어먹고서, 그와 결혼할 것은 영영 단념하고 말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테레자는, 이 때에 베에토벤과 헤어진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으니 “만일 내가 언제까지나 그의 수중에 쥐어 지냈더라면 우리들의 사랑은 무엇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더구나 그의 천재도 어떻게 변해졌을지 모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두 사람의 이별은 두 사람의 장래를 위하여 오히려 다행했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고 또 그 여자의 이같은 생각이 사실에 있어서 정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밖에도‘불후의 총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또 한 통이 있었으나, 7월 8일 오후라고 쓴 일자와, 편지 서두에 ‘그대에게 글을 보내던 바로 어젯날’이란 귀절을 가지고 미루어 생각할 때에 이 편지 역시 꼭 같은 한 사람에게 보내기 위하여 썼던 것임을 알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여러 학자들의 추측은 베에토벤의 이상적 애인‘불후의 총자’는 필경 기리에타 백작 부인이거나 테레자 백작 부인일 것이리라는 데에 일치되어 있읍니다.

어떤 날 베에토벤의 한 친구가 그를 찾아갔을 때에, 그는 한 장의 사진 위에 엎드리어 흑흑 느껴 울고 있다가, 불의의 방문객에 깜짝 놀라서, 대단히 황급스럽게 그 사진을 감추더라고 말했읍니다. 그 사진이란 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본 시(市)의 악성이 탄생하던 집에 걸려 있는 테레자 부론스윅의 사진입니다. 그 사진 뒤쪽에는 그 여자의 필적으로 “희세의 천재, 위대한 예술가, 선량한 분에게 보냄. T.B.”라고 씌어 있다고 합니다.

불행한 운명 속에서 비참한 일생을 보낸 ‘불후의 악성’의 청춘 시절에, 그나마 지금까지 이야기한 로맨스마저 없었던들 그 얼마나 참혹했겠읍니까? 이것을 생각하며 그의 서간집을 읽을 때에,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으며, 동시에 비록 그의 완전한 소유물은 되지 못했을망정, 그의 일생을 통하여 항상 이상(理想)하고 동경하고 희구하던 그의 ‘불후의 총자’인 기리에타 부인과 테레자 부인에게, 끝없는 감사의 뜻을 올리지 않을 수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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