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필/리스트의 국제적 연애

헝가리가 낳은 세계적 악성 리스트가 6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임종의 머리맡에 자기의 어린 아들을 불러놓고, 최후의 유언으로, “여자는 너의 생애를 전복시키며 너의 생애를 지배하리라”고 말했다 합니다. 자식을 아는데 아버지만한 이가 없다는 속담과 같이, 그의 아버지는 아직 나이 어린 리스트였건만 그에게 이러한 경고를 한 것을 볼진대, 그는 천재와 함께 미모를 타고났던 것이 사실입니다.

철학자 니이체는 일찌기 리스트에게 대하여 한 개의 공식을 만들었으니 그것은 곧, ‘Liszt, or the Art of Running after Women’리스트란 바꾸어 말하면 여성의 뒤를 좇는 예술이란 것입니다. 이 한 말로 보더라도 그는 이 방면에 있어서 특수한 조건과 함께 큰 약점을 가졌던 것입니다. 또 러시아의 대 작곡가 보로딘이 일찌기 그를 찾아 갔을 때에, 그는 십여 명이나 되는 젊은 여생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만일 여생도가 피아노를 잘 탈 때에는, 그는 으례 자기 제자의 이미에 키스를 해 주었고, 제자는 선생의 손에 또한 키스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로딘은 “이것은 리스트가 그의 여학생에게 하는 버릇으로, 그는 확실히 아름다운 이성에 대하여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간파했읍니다.

여기 대해서는 에밀 리브링도 역시 말한 일이 있으니, 곧 리스트와 샤만과 비스마르크는 모두 아름다운 처녀에게 키스하는 것을 몹시 좋아 하였으며, 이 취미를 만족시킬 만한 목적물은 결코 적지 않았다. 리스트 역시 미추를 분간하지 못한 정도의 남자가 아니었던 만큼, 만일 중년 이상의 늙은 부인이 그의 앞에 나올 때에는, 그 여자는 “자기의 손등에 키스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리스트 자신이 이런 방면에 남다른 취미를 가졌다는 그 사실보다도, 오히려 그의 타고난 미모와 천재와 정열이, 여러 젊은 부녀자의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고 말았으나, 그가 22세 되던 해에 프라텔이란 폴란드의 백작부인이,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 쇼팽을 보고서, “내가 만일 젊고 어여뻤다면, 쇼팽 씨, 나는 당신을 나의 남편으로 가지고, 힐러 씨를 동무로, 그리고 리스트 씨를 연인으로 가졌겠지요.” 하고 말했다는 것을 듣더라도, 그 당시 낭만시대의 여인들에게 있어서는 리스트야말로 실로 연인으로서의 가장 높은 이상적 인물이었을 것은 용이하게 짐작할 수 있읍니다.

우리가 만일 낭만시대의 정화(精華)를 알고자 할진대, 우리는 먼저 리스트와 그 시대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니, 가령 조르쥬 산드든지 다그르 백작부인 같은 사교계의 스타 여성들을 중심으로 하여 젊은 시인, 화가, 음악가, 문학자들이 모여서 놀던 살롱을 상상해 봄이 가장 가까운 방법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산드라는 여류 문인과 쇼팽과의 관계라든지 다그르 부인과 리스트의 관계는, 너무도 유명한 것이니, 우리가 만일, 단하우제르란 화가가 그린 ‘피아노 앞의 리스트’라고 제(題)한 한 폭의 그림을 본다면, 리스트가 얼마나한 영감을 가지고 피아노를 연주하는지, 다그르 부인이 연인과 음악 속에 얼마나 심취되어 앉았는지, 산드라가 그 영리한 이지적 눈을 반짝이며 딴 세계의 단꿈을 꾸는 그 옆에는, 듀마가 앉아 있고 유고, 롯시니, 파가니니 등의 일류 문인과 음악가들이 둘러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볼 때, 이 그림이야말로 낭만시대의 심볼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이미 로맨틱한데 우리는 황홀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 시대의 예술가 생활은 소위 ‘로맨틱한 에피소드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연애야말로 그네들의 양식이어서, 그 당시 파리에 모였던 젊은 예술가들로는, 위에 말한 여러 사람 이외에도 시인으로 드 뮤세, 하이네가 있고, 음악가에 베를리오즈, 슈만이 있으며, 화가에 드라크로아가 있어서, 누구나 연애와 인연이 먼 사람은 없었지마는, 그 중에도 리스트가 가장 출중하여, 독일 마라 부인이 저작한 책에 의할진대, 리스트와 사랑을 속삭인 여성을 실로 26인이란 끔찍한 수효에 달한다고 합니다.

가프 박사는 말하기를, 리스트는 여자가 없이는 단 일 분을 지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에게만 충실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지마는, 사실 그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아름다운 이성과 접할 때에는 반드시 그의 약점을 발휘하였으니, 어떤 때 미국의 한 숙녀가 그를 보고서, “당신이 만일 대서양을 횡당하신다면 막대한 부를 이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친절히 권고했을 때에도, 리스트는 곧 자기 버릇을 발휘하여, “숙녀시여, 그대가 만일 나의 지귀(至貴)한 보배가 되어 주신다면, 나는 어디나 기뻐서 가오리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리시트는 미모와 천재와 정열을 갖추어 가진 사람임은 이미 말했읍니다마는, 하여간 그는 어떠한 여자를 대할 때거나, 그 여자에게 억제할 수 없는 일종의 황홀한 느낌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까닭에 어떤 스타 여가수는 그의 앞에 나갈 때에는, 언제나 남장을 하여, 그의 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 왔다고 하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읍니다. 또 러시아의 어떤 백작부인은 리스트의 무례한 행동에 분개하여, 피스톨을 들고 그의 방에 좇아 들어가서, 그를 쏘려고 했을 때, 그 부인은 그만 총을 떨어뜨리고 문 밖으로 뛰어 나가서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이 반드시 리스트의 불근신과 불품행(不品行)에서만 나왔다고는 할 수 없으니, 가령 어떤 부인은 고민과 번뇌에 싸여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 리스트가 나를 사랑만 해 준다면 나는 생명을 잃어도 원통치 않겠다.”고 부르짖었다는 것을 듣거나, 또 어떤 때는 그가 러시아의 페터르스부르그에 갔을 때에, 귀부인의 한 무리가 그의 호텔로 몰려와서, 그의 머리 위에 화관을 강제로 씌워 주었다는 사실을 보거나, 또는 폴란드의 어떤 백작부인은 장미꽃이 발목을 덮을 만치 흩어놓은 자기 침실로 리스트를 청했다는 것이나, 그가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에 어떤 가정에서는 그를 초대하여, 높은 자리에 앉히우고, 7, 8명의 부인들이 그의 반신상을 상아에 새겼다는 것이나, 또 어떤 때는 로마의 예배당에 갔다가, 예배가 끝난 후에 피아노를 친 일이 있는데, 그때에 수녀들의 한 떼가 그의 앞에 가까이 와서, 가장 열렬한 어조로 사랑의 뜻을 표한 것으로, 인하여, 한바탕 풍파를 일으켰던 것을 생각한 때에, 수없이 많은 그의 연애사건도, 그 책임의 대부분은 여자에게 있었다는 것을 족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반드시 그의 미모에만 원인되어 생긴 것은 아니요, 한 편으로는 그의 특출한 천재와 열정적 연주에 영향을 받았음도 물론 적지는 않았으니, 하여간 그 시절에는 어떠한 계급의 부녀자를 막론하고 리스트의 인물이나 그의 예술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논쟁하고 담화하는 것을 다시 없는 자랑으로 생각했으며, 또는 그가 쓰다 버린 종이조작이나 태우다 남은 담배 꽁초에까지도, 부녀자의 예리한 눈은 떠날 새가 없었으며, 금전과 경우가 허락하는 한에서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그의 뒤를 따르던 여자도 결코 적지는 않았읍니다.

그러면 그의 26인이나 된다는 다수의 여인과의 연애사를 여기에 다 쓸 필요는 물론 없읍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나 혹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가장 많이 그의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것 몇 개를 추려서 여기에 소개하려 하거니와, 본시 이 글을 쓰는 나의 본의가, 그의 불명예스러운 일면을 폭로시키려는 것은 결코 아니요, 오직 이 글을 통하여 지난 날의 대악성의 면모를 좀더 절실하게 깨닫고 동시에 그 시대의 공기를 호흡함으로써, 그의 위대한 예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글을 초(抄)하는 것입니다.

1827년 그의 나이 16세 되던 때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편모 슬하에서 피아노를 교수하여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게 되었읍니다. 그때 그의 제자 중에는 백작의 영양 카로리느가 있었는데, 그 소녀는 키가 호리호리하고 아리따운, 말하자면 미(美)와 현세와 종교 같은 데 끌리기 쉬운 여자였읍니다. 리스트는 그를 형용하여, “순결무구한 처녀로서 마치 성배의 상(像)과 같다.”고 칭찬했던 만큼, 두 사람의 청춘 남녀는 서로서로 마음을 끌리우며, 사랑을 주고받게까지 되었으니, 이것이 리스트의 첫사랑으로 그의 나이는 17세요, 카로리느의 나이는 한 살 아래인 16세였읍니다. 그러나 소녀의 아버지되는 백작은, 아비도 없는 청년 음악가에게 자기 딸을 함부로 내어 맡겼을 리는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리스트는 시몬 교회에 심취되어, 한 때는 수도원에 들어갈 생각까지 가졌으리만큼 열심이었으며, 한 편으로 카로리느의 어머니는 중병으로 인하여 생명이 위급할 즈음에, 리스트의 종교심에 감동도 되고, 또 그의 타고난 미모에도 호감을 갖게 되어, 이 두 남녀의 연애에 대하여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자기 남편에게서 받았읍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기 아내를 위로하기 위한 일시의 거짓말에 불과했던 것이요, 사실인즉 백작의 위인이 몹시도 오만하고 엄격하여, 그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는 곧 가엾은 어린 딸의 첫사랑의 로맨스에 방망이를 들기 시작하였읍니다.

어느날 리스트는 밤 늦게까지 카로리느와 사랑을 속삭이다가, 이윽고 집으로 돌아가려 한즉, 문이 굳게 잠겨 있음으로 문지기를 깨어 일으킨 일이 있었읍니다. 그 때 문지기는 늦은 밤중에 잠을 깨운 분풀이와, 또 행하(行下) 한 푼도 주지 않았다는 미운 생각에서, 그 이튿날 이 사실을 백작에게 밀고했읍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후부터 리스트는 카로리느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엄금했읍니다. 리스트는 너무도 고민하던 끝에, 백작을 찾아 보고 직접 담판을 해보았읍니다마는 “네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는 백작의 질문에 청년 음악가는 용기를 꺾이어 버리고 말았읍니다.

이 쓰라린 첫사랑의 상처를 받은 그는 사랑의 정열과 종교심의 중간에서 무한히 고민하던 나머지, 필경은 중병에 걸리게까지 되어, 파리의 신문은 그의 사망을 보도한 일조차 있었읍니다마는, 그의 두터운 신앙의 힘은 이것을 이기고 말았으니, 그가 그 후 10년이나 지나서 쓴 일기에, “이 정결 무구한 소녀는 내가 눈물을 흘려가며 하느님께 바친 희생의 제물이다.”라고 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읍니다. 일방 카로리느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너무도 쓰리고 아픈 상처가 되어, 이것이 그녀의 첫사랑의 상처인 만큼, 그녀의 비통한 마음은 무엇에 비할 데가 없었읍니다. 그 후 그 여자는 어떤 시골 귀족에게로 출가했는데, 그 귀족은 소작인의 일이나 가축의 일에만 흥미를 가지고 지냈으므로 카롤리느는 일생을 통하여 행복스런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서는 불행했던 그 여자라도, 한때는 이 만고 불후의 악성에게, 부인으로서의 전형을 보여 준 것만은 영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리스트에게 있어서도 카로리느의 감화 실로 커서, 그의 분방하고 호탕한 감정을 이 여자의 감화로 많이 제어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첫사랑의 애달픈 추억이라 하더라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는 자연히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리스트에게 있어서만 그 예외를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카로리느에 대한 실연의 비애는 1830년에 일어난 불란서 혁명 때에 프로리 공작부인과 서로 알게 된 데서, 그 상처를 씻을 수가 있었으니, 늙은 공작은 꽃과 같이 어여쁘고 젊은 부인을 동반하여 즐겁고 단란한 겨울의 몇 밤을 보내기 위하여 시골에 있는 별장으로 가서, 몇 날 동안 지내게 될 제, 그때에 정열과 미모의 청년 음악가 리스트를 데리고 가는 데는, 조그마한 위험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몇 날 지내지 않은 별장의 생활은 의외로 중대한 결과를 빚어 내었으니, 그것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려니와, 하여간 파리의 사교계에서는 그네들의 여행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고 한참 동안 흥미있는 화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귀족적 생활에 염증이 난 리스트는, 몇 날 후에 파리로 돌아 와서, 프라텔 백작부인에게 편지로 “프로리 공작과의 교제는 단지 고상한 프랑스의 풍속을 배운데 불과하다”고, 써 보냈더랍니다.

프로리 공작 부인과의 관계는, 그 후로는 일체 들을 수 없게 된 대신에 그 다음 번에는 다그르 백작부인과의 로맨스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거기서 또다시 자연의 형세로 유명한 조르쥬 산드와의 연애사건이 일어났고, 그 뒤를 이어서 러시아의 위트겐슈타인 공작 부인과의 동서 생활과 결혼 쟁의는 가장 유명한 사실이므로 이 몇 가지 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렵니다.

백작부인 다그르는 ‘사람을 뇌살하는 미인’이라고까지 평판이 높던 여자입니다. 리스트와 그 여자가 손을 맞잡고 파리를 떠나서, 스위스의 쥬네브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 것은 1835년이었으니, 그때 리스트의 나이는 24세요, 그 여자는 6년 더한 30세였읍니다. 다그르는 남의 아내요, 또 어머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나이 적은 청년 예술가를 한번 보자, 그는 곧 자기 남편을 폐리(廢履) 같이 차버리고는, 단걸음에 리스트의 품에 안겨버리고 말았으니, 어느 누구보다도 이 여자야말로 그로 하여금 관능을 마비시킬 대로 마비시키고, 그의 사랑의 정열을 불탈 대로 타게 한 여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사이에는 사랑의 열매로 3남매를 가졌던 바, 맏아들은 요사(夭死)하고, 둘째 딸은 불란서의 정치가에게 출가하여, 나폴레옹 3세의 조정의 스타가 되었으며, 막내 딸 코지마는 처음에는 뷰로라는 음악가의 아내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유명한 바그너의 아내가 되었읍니다. 이러한 3명의 부정당한 저당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남편인 늙은 가엾은 백작은 그 후 어떤 이를 보고서, “리스트는 언제나 명예 있는 사람같이 행동한다.”고, 말했다 하니, 이 얼마나 관후한 인격의 소유자입니까?

그러나 언제나 이같은 불의의 연애관계가 행복스런 종국을 가져오는 일은 극히 희귀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도 파탄과 결렬은 마침내 찾아오고야 말았으니, 그 중요한 원인은 리스트가 작곡가로 자처하며 창작에 힘쓸 때에 다그르 부인은 옆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고 자기의 의견을 말하며, 또 어떤 때는 자기의 의견을 채용하기를 요구까지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날 다그르는 그의 작곡을 즐겨하지 않는다고 명언하자, 이 말을 들은 리스트는 크게 노하여 드디어 언쟁까지 하기에 이르렀읍니다.

이러한 의견의 충돌로 인하여 그 후에도 가끔가끔 두 사람 사이에는 논쟁이 끊이지 않게 되자, 하루는 그의 친구인 프랑스 시인이 중간에 들어서 화해를 시키려고 경고해 본 일이 있읍니다. “여보게,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일을 생각해 보게. 그 시인이 자기 애인의 말을 얼마나 감사하게 듣고 생각했는가? 자네도 단테와 같이 되어 보게나그려. 그리고 부이께서도 베아트리체가 되어 보십시오그려.”하고 말할 때에, 리스트는 “흥, 단테는 무엇이고 베아트리체는 다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단테 자신이 베아트리체를 창조해 가지 않으면 안될 것일세.”하고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다그르 부인과의 연정은 그 불꽃이 꺼지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리스트의 정열은 결코 다한 것이 아니었으니, 다그르 부인은 그 당시 일류 작가로 이름이 높은 조르쥬 산드와 친근히 지내던 관계로 이 내외는 산드의 집에서 두류(逗留)한 일도 가끔 있었읍니다. 그 때에 산드에게는 쇼팽이라는 애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끔가끔 리스트에게 육박해 오므로 리스트는 몸을 피해 달아난 적도 있다고 하며, 또 다그르 부인과 산드의 사이도 자연히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두 여자 사이의 질투에 불과했고, 리스트와 쇼팽 양인의 천재 음악가 사이에는 끝가지 이해와 동정이 계속되었으니, 여기 대해서는 후일에 리스트가 그의 유창한 붓으로 쇼팽의 전기를 쓸 때에 쇼팽이나 산드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깊은 사랑과 동정으로써 쓴 것을 보더라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산드에 대하여는 다음에 쇼팽의 이야기를 할 때에 자세히 쓰겠거니와, 그는 일처다부주의자로 결혼의 근본 원리를 배격하고, 자유 결혼의 새 종교를 만들려고 열렬히 주장해 오던 여자로, 처음에는 쇼팽 한 사람만으로 만족했지마는, 그의 건강 상태가 시원치 못하게 되자, 그는 리스트와 알프레드 드 뮤세 같은 시인과도 친교를 맺어 오다가, 리스트가 완전히 자기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은 안 다음에는 드 뮤세에게로 달아나 버린 여자입니다.

그 시절에 리스트는 당시 듀마의 〈춘희〉로 유명한 마아그리트와 재미있는 로맨스를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는 로라 몬테와 사랑을 속삭인 일도 있다고 하지마는, 여기 대해서는 별로 전해 오는 것이 없는 것 같으며, 그보다는 폴란드의 숙녀가 리스트를 몹시 동경하여 그를 스승으로 섬기다가 필경은 사랑의 정열렬을 토하기 시작하여, 도이칠란트, 이탈리아, 항가리 등 여러 나라로 쫓아다니던 끝에, 나중에는 리스트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독약을 먹이려다가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에피소드가 있읍니다마는, 자세한 이야기는 할애하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글을 그치려 합니다.

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폴란드의 귀족 이바노브스카 공작의 딸 카로리 유네입니다. 그 여자는 물론 상냥스럽고 아름다왔지마는, 한편으로 조르쥬 산드의 성격과 공통되는 점도 적지 않아서 사나운 말을 어거해서 달리기를 좋아 했으며, 엽권연(葉卷煙)의 독한 향기를 즐겨했읍니다. 그 여자의 어머니가 대단히 음악을 좋아하여 한 때는 롯시니의 제자가 된 일까지 있었던 만큼, 그 딸 되는 카로리유네도 음악에 깊은 이해와 취미를 가졌으며, 또 풍부한 학식의 소유자였읍니다. 그는 17세 때 러시아의 청년 사관 위트겐슈타인 공작에게 출가한 바, 이 공작은 미남이기는 했으나, 극히 평범한 인물로서 자기의 딸에게 흥미를 가지는 것 이외에는 가정에 있어서 아무런 취미나 행복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공작과의 결혼은 그 여자에게 있어서 이미 불행의 원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에 1847년에 리스트가 러시아에 연주 여행을 가게 되고, 거기서 위트겐슈타인 부인을 알게 되자, 그 여자는 비로소 자기의 이상적 애인을 발견했다는 듯이 기뻐하여 그는 자기 남편을 배반하고, 황제 폐하의 명령조차 거역하고, 리스트의 뒤를 좇아서 바이마르로 달아났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읍니다. 그는 리스트가 요구했음도 아니건마는 자기의 재산을 기울여서 그에게 제공했고, 다음에는 자기의 몸까지 바쳤다는 것입니다.

리스트의 연주는 사실상 그 여자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은 바 되어, 이 때로부터 40년 후에, 그 여자가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손에는 그가 처음으로 출석했던 리스트의 독주회 프로그램이 쥐어 있었다고 합니다.

리스트는 바이마르 공가(公家)의 극장의 지휘자로, 작곡가로, 교수로, 또는 작가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자, 일찌기 괴테와 쉴러에 의하여 빛나던 이 땅, 다시 바하의 이름에 의하여 기억이 아직까지도 새롭던 이 도시에서는 그가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유럽 각국의 유명한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그의 집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복스런 생활 속에서 12년 동안 동서(同棲) 생활을 해온 두 사람은, 비록 법률상으로는 부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부부 이상의 연인 동지로서, 꿀 같은 밀월의 생활이 빈틈없이 계속되어 왔읍니다마는, 카로리유네에게 있어서 오직 한 가지 유감된 일은 언제까지나 떳떳하지 못한 불의의 생활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 법왕의 앞에 나가서 참회를 하고 용서를 받은 후에, 리스트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 이르러 1861년 10월 21일, 바로 리스트의 50회 탄생일 전야에 결혼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던 것입니다.

리스트의 명성이 원체 굉장했던 만큼 두 사람의 결혼식에 대해서도 소문이 굉장하여 이 몇 날 동안은 어디를 가든지 이 소문만이 사교계의 화제가 되어 있었읍니다. 그러나 남편을 배반하고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그 여자가, 연인인 음악가와 결혼식을 거행한다는 소문이 그 여자의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자, 폴란드의 늙은 귀족은 잠자코 있었을 리가 만무했을 것입니다. 결혼식을 거행하기로 한 당일 아침에 로마 법왕은 갑자기 식의 거행을 금지하게 되었읍니다.

리스트로 말하면 이 결혼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그의 딸 코지마는 그 어머니를 몹시 미워했읍니다. 그러나 그 여자와의 동서생활을 하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라, 그 여자의 간절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었읍니다. 그러던 끝에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자, 위트겐슈타인 부인은 로마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떤 조그만 셋방에 리스트의 흉상을 열네 개나 장식해 놓고는, 오로지 종교 생활에 몸을 바치고 지냈읍니다. 리스트는 바이마르에서 로마로, 또는 고향인 부다페스트로 부단히 여행을 하며 지내는 동안에, 위트겐슈타인 공작이 별세하자, 세상에서는 이제야말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겠지 하고 기대하였으나, 그네들 끝끝내 결혼식은 거행하지 않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죽는 날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동안에 두 사람 사이에 왕래된 편지는 600여 통이나 되어서, 지금까지 세인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읍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해 오고 본즉, 그의 유약하고 불륜한 사생활에 대하여는 비록 청교도가 아닌 어느 누구라도, 다같이 비난하고 욕함을 면할 길이 없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반드시 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방하고 호탕한 여성을 산출하고, 또 이러한 존재를 용인하는 유럽의 문명이 더 많은 책임을 지지 않아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악성의 사생활을 통하여 그의 생애와 그의 예술을 보다 더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요, 또 리스트의 한 생애에 생겨났던 로맨스의 가지가지는 동시에 쇼팽이나 바그너 같은 대악성과도 크나큰 관련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 글이 결코 무의미한 악취미의 붓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리스트는 친우로서 가장 친절하고 동정이 많았으며, 스승으로서 또한 인자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에 남을 말할 때는 악평을 해본 일이 없었고, 또 선천적으로 질투라는 것을 모르던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비록 그의 품행 문제로 인하여 남의 구설에 오르내리기는 했을망정, 그의 타고난 품성은 하늘같이 높고도 맑았으며, 또 남의 일을 자신의 일 이상으로 생각하고, 남의 성공을 자기의 성공같이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산은 언제나 남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가지고 있었으니 바그너가 그를 평하여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와 같이, 그는 자기 자신보다도 남을 구제하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어째 거짓말이겠읍니까? 그의 자비와 그의 선행에 관한 기록은 그의 습관적 도덕에 대한 모든 악행을 속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음을 우리는 믿고 기뻐하는 바이려니와, 그는 1865년에 이르러서, 로마교의 의식대로 삭발위승(削髮爲僧)한 일까지 있으니, 여기 대해서는 프랑스 셀바이스란 사람의 설명이 가장 잘 그의 심경을 말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곧, “위트겐슈타인 부인과의 동서생활을 하게 된 것이 세상의 비난을 초래하게 되자, 그는 세상에 대하여 사죄하는 의미로 승려라는 거룩한 직분에 나아가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의 손을 쥐어 보려고 열망하는 부녀자들의 마수를 벗어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이 길을 취한 것이다.”고 말햇읍니다.

리스트의 전기를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의 관대하고도 자비로운 품성을 기억하리라고 믿거니와, 그가 남을 사랑하는 그 진실된 정성은 도저히 한 입으로 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니, 이것은 오로지 그의 교양이 훌륭했던 까닭인 동시에, 그의 품성의 미덕은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유감 없이 발로되어, 그에게 대한 여러 사람의 애정은, 찬미와 존경의 범궤(範軌)를 초월하여,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 그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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