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을 낱낱이 생각하면 오날 하로는 몰라도 내일부터는 내남할 것 없이 살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웨그러냐하면 다아올날보다는 누구나 지나간 날에 자랑이 더 많었든 까닭이다. 그것도 물질로는 바꾸지 못할 깨끗한 자랑이였다면 그럴수록 오날의 악착한 잡념이 머리속에 떠돌때마다 저도 모르게 슲어지는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말하자면 내 나이가 칠, 팔세쯤 되었을때 여름이 되면 낮으로 어느날이나 오전 열시쯤이나 열한시경엔 집안 소년들과 함게 모혀서 글을 짓는 것이 일과이였다. 물론 글을 짓는다해도 그것이 제법 경국문학도 아니고 오언고풍이나 줌도듬을 해보는 것이였지마는 그래도 그때는 그것만 잘하면 하는 생각에 당당히 열심을 갖었든 모양이였다.

그래서 글을 지으면 오후 세시쯤 되어서 어룬들이 모혀노시는 정자 나무밑이나 공청에 가서 골이고 거기서 장원을 얻어하면 요즘 시한 편이냐 소설한편을 써서 발표한뒤에 비평가의 월평등류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과는 달러서 그곳에서 좌상에 모인 분들이 불언중모다 비평위원들이 되는 것이고 글을 등분을 따러서 급수를 맥이는 것인데 거기 특출한 것이 있으면 가상지상이란 급이 있고 거기도 벌서 철이 난 사람들이 칠언대고풍을 지어 골이는데 점수를 그다지 후하게 주는 것이 아니라, 이상(二上), 삼상(三上), 이하(二下), 삼하(三下)란 가혹(苛酷)한 등급을 맥여내는 것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가상지상이란 것이였다. 이 등급을 얻어 한사람은 장원을 했는만큼 장원례를 한턱 내는 것이였다.

장원례란 것은 내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사람에 딸어서는술한동우에 북어한떼도 좋고 참외 한접에 담배한발쯤을 사오면 담배는 어룬들이 갈러피우고 참외는 아해들의 차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장원을 하면 백지한 권의 상품을 받는수도 있었다. 그것은 유명조선의 유산의 일부를 장학기금으로 한 자원이 있는 것이였다. 이것이 우리네가 받은 학교교육이전의 조선의 교육사의 일부였기도 했다.

그러나 한여름동안 글을 짓는데도 오언, 칠언을 짓고 그것이 능하면 제법 음을 달어서 과문을 짓고 그 지경이 넘으면 논문을 짓고 하는데 이 여름한철동안은 경서는 읽지 않고 주장 외집을 보는 것이다. 그 중에도 [고문진보]나 [팔대가]를 읽는 사람도 있고 [동인]이나 [사초]를외이기도 했다. 그런데 글을 짓고 골이고 장원례를 내고하면 강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석양에는 말을 타고 달리고 해서 요즘같이 [스포-츠]란 이름이 없을 뿐이였지 체육에도 절대로 등한히 한 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저녁 먹은 뒤예는 거리로 단이며 고시같은 것을 고성낭송을 해도 풍속에 괴이할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명랑한 목소리로 잘만 외이면 큰 사랑마루에서 손들과 바둑이나 두시든 할아버지께선 [저놈은 맹랑한 놈이야]하시면서 좋아하시는 눈치였다.

그리고 밤이 으슥하고 깨끗이 개인 날이면 할아버지게서는 우리들을 불러 앉히고 별들의 이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였다. 저별은 문청성이고 저 별은 남극노인성이고 또 저별은 삼태성이고 이렇게 가르치시는데 삼태성이 우리 화단의 동편 옥해화 나무우에 비칠때는 여름밤이 뜻이없어 첫닭이 울고 별의 전설에 대한 강의도 끝이 나는 것이였다.

그런데 한게없이 넓은 창공에 어느 별이 어떻다해도 처음에는 어느 별이 무슨 별인지 짐작할수 없기에 항상 은하수를 중심으로 이편의 몇재별은 무슨별이고 저편의 몇재별은 무슨별이란 말슴을 하섰다. 그런데 그때도 신기하게 들은 것은 남강으로 가루질려 있는 은하수가 유월 유두절을 지나면 차츰차츰 머리를 돌려서 팔월 추석을 지나고 나면 완전히 동서로 위치를 바꾸는 것이였다.

이때가 되면 어느 사이에 들에는 오곡이 익고 동리집 지붕마다, 고지박이 드렁드렁 굴거가는 사이로 늦게 핀 박꽃이 한결 더 히게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면 우리들은 오언고풍을 짓든 것을 파접을 한다고 왼동리가모혀서 잔치를 하며 야단법석을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칠월 칠석에는 겨우성과 직녀성이 일년에 한번 만나는 날인데 은하수가 가루막혀서 만날수가 없기에 옥황상제가 인간세상에 있는 가마귀와 까치를 불러서 다리를 놓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만나는 견우직녀는 서루 붓잡고 가진 소회를 다하기도 전에 첫닭소리를 들으면 울고잡은 소매를 놓고 갈려서야만 한다는 것 까마귀와 까치들은 다리를 놓기 위하야 돌을 이고 은하수를 올러갔기에 칠석을 지나고나면 모다 머리가 빨갓케버서진다는 것 이러한 얘기를 듣는 것은 잊혀지지안는 자미였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지상에는 낙동강이 제일 좋은 강이였고 창공에는 아름다운 은하수가 있거니하면 형상할 수 없는 한 개의 자랑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숲사이로 무수한 유성같이 흘러다니든 그 고흔 반딧불이 차츰 없어질때에 가을벌레의 찬소리가 뜰로 하나 가득차고 우리의 일과도 달러지는 것이였다. 여태까지 읽든 외집을 덮어치우고 등잔불밑헤서 또다시 경서를 읽기 시작하는 것이였고 그 경서는 읽는대로 연송을 해야만 시월 중순부터 매월 초하루 보름으로 있는 講을 낙제치 안는 것이였다. 그런데 이 강이란 것도 벌서 경서를 읽는 처지면 중용이나 대학이면 단권책이니까 그다지 힘드지 않으나마 논어나 맹자나 시전 서전을 읽는 선비라면 어느 권에 무슨 장이 날는지 모르니까, 전질을 다 외우지 않으면 안됨으로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십여세 남즛했을 때 이런 고역을 하느라고 장장추석에 책과 씨름을 하고 밤이 한시나 넘게되야 영창을 열고 보면 하늘에는 무서리가 나리고 삼태성이 은하수를 막 건너선때 먼데 닭 우는 소리가 어즈러히 들이곤 했다. 이렇게 나의 소년시절에 정드린 그 은하수였마는 오늘날 내 슲음만이 엇되히 장성하는 동안에 나는 그만 그 사랑하는 나의 은하수를 일허바렸다. 딴이야 내일허바린게 어찌 은하수 뿐이리요 東敗於楚하고 西敗於齊하고 西喪地於秦七百里를 할 처지는 본래에 아니였든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나 할가? 그러나 영원한 내 마음의 녹야! 이것만은 어데로 찾을수가 없는 것같고 누구에게도 말할 곳조차 없다 그래서 요즘은 때때로 고요해 잠못이루는 밤 호을로 허른 성엽우를 걸으면서 말게 개인날이면 혹 은하수를 처다보기도 하고 그 은하수를 중심으로 한 성좌의 명칭이라든지 그 별 한 개한개에 대한 전설들을 동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지나간 날을 회상해보나 그다지 선명치는 못한 것이며 오늘날 내 자신 아무런 성취한바 없으나 옛날 어룬들의 너무나 엄한 교육방법예도 천문에 대한 초보의 기초지식이라든지 그나마 별의 전설같은 것으로서 정서방면을 매우 소중히 역이신 것을 생각하면 나의 동년은 너무나 행복스러웠든 만큼 지금의 나의 은하수는 왕발(王勃)의 슬왕각시(膝王閣詩)의 일련인 {특환성이도기추(特換星移度幾秋)}오 하는 명문으로도 넉넉히는 해설되는 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누가 있어 나를 고이하다하리요.(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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