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앙도
대동강에 봄물이 났네. 부벽루 아래 날리나니 낙화요, 능라도 가에 흐르나니 녹빈이라. 비단 같은 물결에 둥둥 떠 있는 저 원앙아, 네가 둘 중에 하나이 새가 아니되고 짐승이더면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이 하지 아닐 것이요, 네가 둘이 다 새가 되고라도 하나이 가치나 까마귀더면 쌍으로 가고 쌍으로 오지 아니할 터이라. 모양도 같고 성미도 같아 조금 기울임 없어 한 곳에 깃들임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조화로다.
"여보 마누라,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하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 앉았는 사람은 평안도 양덕 군 수라. 그 부인 임씨가 대경소괴(大驚小怪)를 하여,
(부인) "왜 무신 걱정되는 일이 있소?"
(군수) "걱정도 여간 걱정이 아니오. 내일이라도 우리 치행차려 올라갈 밖에 수가 없소."
(부) "이 동안에 도목[1]이 되었다더니 원을 갈리셨소?"
(군) "원이나 갈렸으면 걱정할 것 무엇 있소? 의례히 올라갈 터이지."
(부)그러면 무슨 결처하기 어려운 송사가 들었소?"
(군) "아니오, 공교한 일이 있어 굽도 젓도 할 수가 없어 그리하오."
(부) "갑갑한데, 혼자 걱정만 말으시고, 무슨 일인지 말씀이나 하시구려."
(군) "우리가 이 변변치 아닌 양덕 군수나마 얻어하려고 근고(勤苦)하던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아니하오? 형세도 없고 세력도 없어, 초사(初仕)한 지 삼십여 년에 각능관으로 쫓겨 다니며 재실잠을 자다가 적사구근[2]이라는 공론으로 간신히 원이라고 얻어왔으니, 백성이나 사랑하고 탐장[3]이나 없으면, 설혹 과만[4]이 되더라도 공떨어지지는 아니할 것인데 불선불후(不先不後)에 본도(本道) 감사를 전동 조판서가 해서 왔다오."
(부) "조판서가 누구요? 그 양반이 감사를 했기로 우리게 상관이 무엇 있소? 바로 양덕 군수나 하여 온다면 걱정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닌 바에 연명[5]도 남보다 먼저 하고 감결도 거역치 말면 우리라 미운 털이 박혔다고 포폄에 하등 쓸라구오?"
(군) "조판서가 누구인 줄 알고 그리하오? 그 사람의 오대조(五代祖)가 척신(戚臣)의 세력을 믿고 잘못하는 일이 있으므로 우리 고조 응교공이 그때 대간[6]으로 계셔서 논핵상소(論劾上疏)를 하여 절도정배(絶島定配)까지 가게 한 그 까닭으로 우리 집에서는 그 집을 혐의 볼 것 없지만 그 집에서는 우리 집을 혐의를 보아 사오대 격면(隔面)으로 지내는 터에 내가 연명갈 낯도 없으려니와 그 사람인들 나의 연명을 받겠소?"
(부) "연명 아니하면 원 노릇을 할 수 없소?"
(군) "상하관(上下官)이 되어 연명을 못하면 사무도 처리할 수 없거니와, 제일 창피하여 어찌 지낸단 말이요?"
부인이 그 말을 듣더니 낙담이 되어 신세타령이 나온다.
"어찌면 집안 운수가 이렇게 비색(否塞)할까? 책력(冊曆)을 보아가며 밥맛을 보고 원 하나 하시기를 주야 축수하였더니, 도임한 지 불과 칠팔 삭에 이런 일이 났으니 인저는 두수없이 굶어죽겠지. 차리리 능령(陵令)으로 그대로 계셨더면 후항전과 삭시는 그저 있을걸."
하며 두 눈에 눈물을 핑 돌아 하던 말을 못다 하는데, 군수는 윗목 바람벽을 건너다보고 앉아서 담배만 펄썩 펄썩 태우다가 창밖에서 춘섬이와 말불이가 다투는 마을 들으니까,
(춘) "도령님은 무엇이 그리 좋아 겅둥대오? 나으리마님 이야기하시는 것을 번연히 듣고서도 철이 언제나 나오?"
(말) "왜, 내가 철이 아니 났어? 이애, 네가 철이 없다. 아버지 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너는 큰 걱정이나 있는 줄 아는구나."
(춘) "그러면 걱정이 아니야? 원도 내어놓고 올라가시겠다 하시던데."
(말) "우리 아버지가 감사에게 쫓겨가셔, 감사는 못 쫓아보고?"
하면서 세상이나 만난 듯이 겅동겅동 뛰어가는지라, 군수가 늦게야 말불이를 두어 남다르게 사랑하는데, 저 하는 말이 동서(東西)를 몰라 지각은 없으나 남에게 지지 아니하려는 기벽은 기특하여,
(군) "춘섬아, 거기 있느냐? 춘섬아 춘섬아!"
(춘) "녜, 여기 있습니다."
(군) "오, 너 나아가서 되련님 불러라."
(춘) "녜."
하고 나아가더니,
(춘) "도령님, 나으리마님께서 냉큼 불러오라고 하시오. 잘되었소, 꾸지람 좀 들어보오."
(말) "내가 꾸지람을 들어? 꾸지람을 듣거던 내 손톱에 장을 지져라."
하며 들어와 군수 앞에 와 서며,
(말) "아버지, 나 부르셨습니까?"
(군) "오냐, 불렀다. 너는 나이 열한 살이나 된 자식이 아비의 근심 있는 것도 모르고 좋아 날뛰느냐? 에그, 자식도!"
(말) "그 일을 왜 근심을 하셔요, 감사를 쫓아 보내지 못하시고?"
군수가 깔깔 웃으며,
(군) "지각없는 놈도 보겠다. 하관이 상관도 쫓더냐?"
(말) "쫓으려면 쫓지, 왜 못 쫓아요?"
소리를 응석같이 하더니, 저의 아버지 귀에다 입을 대고 무엇이라고 가만가만히 말을 하는데, 군수의 눈살이 점점 퍼지며,
"오냐, 그래서? 오냐, 그래서?"
고개를 연해 끄덕끄덕하더니, 입이 떡 벌어져 말불이 등을 툭툭 두다리며,
"자식도! 의사가 나보다 낫고나. 네 말대로 해보자."
하며 연명갈 치행을 하는데, 마누라의 푼푼 전전이 모아두었던 돈까지 주워 모아 몇 천 냥을 짐에 넣아가지고, 그날로 떠나 영문으로 향하더라. 요새 세월 같으면 국가(國家)나 사가(私家)나 큰 혐의, 적은 혐의를 교계(較計)할 것 없이 평화하기로만 주장을 삼겠지마는, 그 때는 갑오경장 하기 전이라, 조판서의 완고한 사상에 티끌만 한 혐의가 있는 사람도 부쇠쌈지 속에 적어 넣어두고 역력히 잊지 아니하는 터이러니, 양덕 군수가 연명 왔다는 말을 듣고,
"뻔뻔한 자식도 있군! 무슨 낯을 들고 연명을 왔노, 번연히 내가 감사로 내려온 줄 알고? 그만 지각이 없는 위인이 백성을 어찌 다스리노? 내가 서울서부터 네놈의 원을 떼어먹으러 들었는데, 원은 내어놓기 원통하여 연명을 와? 적이 소견이 있는 자식 같으면 진작 인둥이를 끌러놓고 갈 것이지."
조감사가 이와 같이 말을 하며 혀를 연해 툭툭 차고 있는데, 통인놈이 명첩 하나를 드리며 양덕 군수의 연명옴을 거래하니, 조판서가 명첩을 뜰아래다 탁 던지며 천둥같이 호령을 한다.
"이놈, 너더러 그런 거래하라더냐? 다시 양덕 군수의 말을 내 앞에 와 했다는 이놈, 죽고 남지 못하리라."
이 소문이 민양덕의 귀에 전화를 댄 듯이 들어오는지라, 민양덕이 분함을 억지로 참고 영주인의 집에서 묵으며 날마다 기생만 불러 배반이 낭자하게 놀면서, 행하를 후히 하여 그 여러 기생이 친숙치 아니한 것이 없는데, 그 중에 산월이와 매화는 감사의 수청이라 교만한 마음이 잔뜩 차서, 처음에 양덕이 부른다니까 코웃음을 하며,
"양덕이 누구를 불러?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이애, 선화당[7]에 들어갔더라고 하여라. 몸이 편치 않아 못 간다고 하여라."
이 모양으로 한 손 넘겨다보는 대답을 하고 아니 가보더니, 민양덕의 돈 잘 쓰는 소문을 듣고 귀가 솔깃하여 한 번 가보고 두 번 가보더니, 정의가 어떻게 친밀하여졌던지, 감사가 부르면 아니 들어가도 양덕이 부른다면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할 만하더라.
(군) "이애, 산월아!"
(산) "녜."
(군) "이애, 매화야!"
(매) "녜."
(군) "내가 너희를 이렇게 데리고 놀면서 그대로 있기 섭섭지 아니하냐? 이것이 약소하나마 정표로 알고 받아라."
하며 돈 수천 냥을 짐에서 내어 똑같이 노놔주니, 산월과 매화가 관곡하고 감사히 여겨 민양덕의 말이라면 죽고 살지 못할 모의라도 같이 하게 되었는데,
(군) "너희더러야 무슨 말을 못하겠니? 내가 여기 온 지가 벌써 수십 일이 되었건만 필경 연명도 못하고 속절없이 갈 모양이니, 이런 창피할 데가 어데 또 있겠니?"
(산) "글쎄올시다. 말씀 아니하시기로 저희는 모릅니까?"
(매) "사또의 눈치를 보니까, 십만 날이라도 나으리 연명은 아니 받으실 모양이시던걸요."
(군) "연명은 하든지 못하든지 내가 소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천사람 만사람 다 쓸데없고 너희 둘이 힘만 쓰면 그 소원성취가 되겠다마는."
매화, 산월이가 여출일구로 대답을 하되,
"무슨 일인지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저희들 힘자라는 데까지야 주선하여 보지요."
군수가 부실한 어음 다지듯,
"정녕히 주선하겠다 하였지, 응? 정녕히 주선하겠다고 했것다, 응?"
하더니 나직나직하게 무엇이라고 한참 이야기를 한 후에 다시 당부를 한다.
"이 일이 되고 아니되기는 너희 둘 수중에 있다. 송구영신하는 너희들 처지에 내가 너희 본관이나 감사도 아니오, 역려과차같이 왔던 나에게 특별한 정이 있기를 바랄 수 없으나 나같은 사람 친하기가 불찰이지, 허허허. 이리 오너라, 술 좀 가져오너라. 자, 술이나 한잔 더 먹자, 허허허."
하며 웃는 소리 겸 부탁 겸 지재지삼 하더라. 원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든가 여럿이 모여 술을 먹든가 하는 밤은, 가는 줄 모르게 변으로 속하게 가는 것 같은 법이라, 벽상에 걸린 괘종의 각침 소리가 세월을 재촉하느라고 잠시도 쉬지 않고 똑딱똑딱하더니 별안간에 다르르하며 두 귀가 딱 맞히게 땅땅 열두 번을 치니,
(매) "에그, 벌써 자정을 치네. 산월, 고만 가세. 나으리 곤하시겠네."
(산) "네, 갑시다. 밤이 쉽게도 갔지."
하며 일시에 둘이 다 일어서며,
"밤도 이슥하고, 저희들은 가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매화가 저희 집으로 아니 가고 가까운 산월이 집으로 같이 들어가, 민군수의 부탁하던 일을 의논한다.
(매) "오늘은 우리가 병탈을 했으니까 사또가 찾지를 아니했지, 내일은 개동군령[8]에 부르실걸."
(산) "그렇고 말고! 이좌님, 양덕 나으리 소청을 어떻게 하면 옳단 말이요?"
(매) "여보게, 걱정 말게. 우리가 들면 사또 창자는 빼오지 못할라구? 두말 말고 행랑아범 보내서 서문안장과부의 집 전국 감홍로를 큰 주전자로 하나만 사다가 두게. 안주는 내일 모레 우리 어머니 생신에 쓰려고 고깃근 가리짝이나 얻어둔 것 있으니 내가 장만하지."
(산) "염려 말으시오. 그 집 술은 사온 것도 우리 집에 있는걸"
하며 벽장을 열고 술병을 내려 서로 맛을 보더라. 조감사가 본시 주량이 크지 못하여 이삼 배만 먹으면 취하는 터이언마는, 종일 공사하느라 골몰하다가 마침 종용한 밤이 되자, 산월이, 매화의 은근히 권하는 데 못 이겨 한 잔 두 잔 하다가 십여 배를 지나게 먹으니, 그 술이 심상한 매주(賣酒)라도 견디지 못하려든 하물며 일부러 지독한 술을 택한 것이리요! 전신이 불덩이 같이 활활 달며 두통, 현기가 나서 세상을 모르고 늘어졌는데, 산월이는 이마를 짚고 매화는 다리를 주무르고 앉았다가, 통인 불러 퇴등을 시키고 각각 제 집에 나아가는 체하고 그 길로 영주인의 집으로 가서 무엇을 넌지시 민양덕의 손에 쥐어주니, 양덕이 반색하여 반기며 얼른 받아 염낭에다 단단히 넣고, 둘의 손목을 이 손 저 손에 각각 쥐고, 일변 감사한 말도 하며 일변 잘 있으라 당부도 하더니, 인하여 작별을 하고 그 이튿날 새벽에 길을 떠나 본 고을로 내려가니라.
뜻이 고명하고 마음이 충성된 사람이, 인군의 근심을 나누어 일도(一道) 방백이 되었으면 위로 상의(上議)를 대량하랴, 아래로 민정을 주찰하랴 잠도 편히 오지 아니할 것이요, 밥도 달게 먹지 못할 터이나, 그런 사람은 백에 하나 천에 하나이오, 항다반 조석 대취타 개폐문(開閉門) 소리에 두 어깨가 으쓱해지고, 관하 각군(各郡)을 주먹에다 넣고 쥐었다 폈다 하는 바람에 속이 편할 대로 편하여, 배가 앞 남산같이 불러지고 볼이 밀둘레[9] 모양으로 살이 찌는 법이라.
더구나 평양이라는 데는 물색과 경치도 팔도 중 제일이요, 기구와 위풍도 남의 밑에 들 것이 없으니, 조판서의 기운이 뻗칠 대로 뻗쳐, 장비(張飛)야 내 배 다칠라 하고 거드름을 부리더니, 별안간에 얼굴이 초주검이 다 되어, 비장관속더러도 말을 못하고 다만 자기 속에만 넣고 지지고 끓이는 근심 한 가지가 생겼는데, 세상에 아모 경황이 없어 선화당에 앉았는 것이 거지 움 속에 있느니만 못한 생각이 난다.
"이것이 웬일인고? 사람의 장난도 아니오, 귀신의 조화도 아니오, 오니 가니도 없이 이것이 어디로 갔노? 이런 변이 있을 줄 알았더면, 감사 제수(除授)하시던 날로 사직상소를 했지, 어느 때던지 발각만 되면 군문 효시(梟示)는 면치 못하겠으니 차라리 굶어서라도 진작 죽어 끔찍스러운 일을 당치 아니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고 머리를 싸고 누워 부연 물 한 술을 아니 먹으니, 부인 김씨 모녀는 곡절도 모르고 애가 씌워 조바심을 하며 묻는다.
"대감, 왜 이리하시오? 어디가 편치 아니하시오? 술을 과히 잡수셔 입이 깔깔하시오? 아니 잡수셔도 분수가 있지, 벌써 몇 끼를 아니 잡수시오? 이것이 미음이요, 싫어도 조금 마시셔야 정신이 나오. 에그, 심상치 아니한 일일세. 전에는 어데가 조금 편치 않으시면 의원을 불러라, 약을 가져오너라 하시며 입맛 없는 진지도 억지로 잡수시더니, 왜 말씀조차 아니하시오? 속이 타 못 견디겠소. 매화인지 산월인지 이년들은 다 어데로 갔노? 아양 부리며 술은 잘 권해도 이렇게 편치 않으신데 진지 한 번 잡수시란 말은 못하나?"
이 모양으로 그 남편의 문병도 하고, 음식도 권하고, 별러오던 강짜까지 하여가면서 성화를 하는데, 조감사가 눈을 떠 자기 딸을 돌아보더니,
"금쥐야, 너를 아들 삼아 길러 재미를 보자 하였더니 할 수 없이 내가 죽을 터이다. 침선과 음식범절을 아무쪼록 부지런히 배워 시집살이 잘하여라. 여보 부인, 나 죽은 후에 우리 금쥐를 잘 가르쳐 재미보시오. 지금 열 살이니까 몇 해 아니면 장성할 터이오."
하여 당장 운명하는 사람 유언하듯 하니 부인의 얼굴이 노래지며,
(부) "돌아가실 제 돌아가신대도 속이나 시원하고 한이 없게 곡절을 일러주시구려. 돌아가시는 양반은 이렇게 박정하오?"
(조) "허, 부인이 그처럼 애를 쓰니 말을 할 터이오. 이월아, 삼월아, 너희들 모두 밖으로 나아가거라."
하더니 허리도리에서 병부 끈을 끌러 보이며,
"이것이 간 곳이 없으니 내가 살고 싶으나 살 수 있소? 병부라 하는 것은 두 쪽을 맨들어 한 쪽은 인군이 가지시고 한 쪽은 장군을 주어 성문 밖 일을 맡기신 것인데, 감영은 병마절도영인 고로 병부를 주신 바이라. 소중히 자별하여 잃는 지경이 있으면 군법시행을 의례히 하는 것이어늘, 내가 살기를 어찌 바라오."
부인은 아무말도 못하고 다만 눈물만 옷깃을 적시고 금쥐는 눈만 깜작깜작하고 듣다가,
(금) "아버지, 평안도 안에 우리와 그중 원수척 지은 수령이 있습니까?"
(조) "그것은 왜 묻느냐? 별로 그런 사람은 없지마는... 네게는 육대조가 되신다, 내게 오대조가 되시니까. 그 할아버지를 몰아 상소하던 민응교의 현손 놈이 지금 양덕 군수로 있나니라."
(금) "그러면 걱정 말으시고 일어나 진지 잡수시오."
하더니 저의 모친은 방장 남편의 임종하듯 눈이 똥똥히 붓도록 울며 앉았는데, 금쥐는 상글상글 웃으며 부친 귀에 입을 대고 엎드려서 한참을 소곤소곤하니까, 조감사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무엇이야? 다시 좀 듣자"
하며 금쥐 앞으로 고개를 숙이고, 금쥐 말을 또 한 번을 듣더니,
"허허, 어린아이 의사가 기특도 하다. 나는 그 의사를 내지 못하고 공연히 죽으려고 작정하였지."
곁에 놓인 미음 그릇을 집어 한숨에 마시고 선화당으로 나아가 책방[10]을 부르더니,
"여보게, 근래에 화적도 횡행하고 잡기(雜技)가 성풍해서 민정이 말이 못된다니 전례신칙으로는 아니 되겠고, 비밀히 의논을 불가불 하여야 하겠은즉, 위선 성천, 의주, 맹산, 양덕 몇 고을 수명을 불일내로 올라오라고 청하게. 어서 나아가서 공문으로 할 것 없이 나의 사찰로 쓰되, 다른 데는 전에 하던 사연과 같이 하려니와 양덕에게는 공사가 경중(輕重)이 있어 파혐하는 뜻으로 설명을 하게."
각처에 서간을 보낸 후에, 주과를 성비하고 각 군수 오기를 기다리더라.
이 때 양덕 군수는 병부를 깊이 간수하고 영문 소식 듣기를 날마다 고대하니, 이는 정분이 두터워 궁금히 여기는 일도 아니오, 연명을 못해서 미안하여 그러는 것도 아니라. 조감사가 물색도 아주 모르고 천지 모양으로 감영에 그저 있나? 상혼낙담(喪魂落膽)이 되어 서울로 자현(自現)을 하러 올라갔나? 이리로 생각 저리로 생각 하는 즈음에, 통인놈이 서간 한 장을 들이거늘, 무심히 받아 떼어보니 영문에서 온 것이라. 첫 사연에 파혐하는 말을 간절히 하였으되,
「옹색한 사상으로 선세의 사혐만 생각하고 공식(公式)의 연명을 거절하였으니 나의 용렬함은 시로 부끄럽거니와, 일체 봉공하는 도리에 사소한 일을 어찌 개의하리요? 민사(民事)의 긴급히 의논할 일이 있기로 사람을 전위하여 보내노니 불일내로 길에 오르기를 바라노라.」
하였거늘, 양덕이 재삼 보며 별궁리를 다 하다가 나는 아무래도 그 뜻을 모르겠구 하며 말불이를 부르더니,
"말불아, 너 이 편지 좀 보아라. 조감사가 나더라 올라오라고 만지장서(滿紙長書)를 했구나. 하관되어 상관이 청하는데 아니 갈 수도 없고 가기는 불가불 갈터인데, 그 오라는 의미를 모르겠다. 네가 먼젓번에도 의사를 잘냈지? 이번 일도 의사로 알아내겠니?"
말불이가 편지를 찬찬히 보더니 속에 예비하여 두었던 말같이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을 한다.
(말) "감사가 병부 없는 것을 벌써 알았습니다."
(군) "그 일을 알았으면 무슨 경황에 누구를 청하고 말고 한단 말이냐? 서울로 시각을 지체치 못하고 올라가 죽지 아니할 주선을 할 터이지."
(말) "엊그제까지 세혐(世嫌)을 보아 연명도 아니 받던 사람이 별안간에 우리와 무슨 정이 두터워져서 이렇게 복복사과를 하여가며 오시라고 청할 리가 있습니까?"
(군) "글쎄 말이다. 그 일이 의심스럽지 아니하냐?"
(말) "이번에 청한 일은 결단코 악한 뜻이지 좋은 일은 아니올시다."
(군) "그러면 구태여 가잘 것 없구나."
(말) "불가불 가셔야지, 아니 가시면 큰 화가 더구나 급할 터이니까 병부는 가지고 가셨다가 사기(事機)를 보아 임시처변(臨時處辨)을 하십시오."
(군) "네 말이 근리(近理)하다."
하고 그 길로 발행하여 영문에를 당도하니, 감사가 예리(禮吏)를 내보내어 영리의 집으로 갈 것 없이 바로 선화당으로 들어오라 하더니, 어찌 정이 그렇게 물 퍼붓듯 하던지, 죽마고교(竹馬故交)나 맞는 듯이 인사부터 반가이 하며, 일변 약주를 가져오너라, 장국을 차려라 하는데 민양덕이 좌중을 살펴본즉, 성천, 의주, 맹산 여러 군수가 느런히 앉았거늘, 차례로 인사를 한 후에 눈치만 보고 있는데, 조감사가 성천, 의주, 맹산 세 군수를 돌아보며,
(조) "오날 이 모꼬지가 우연치 아니한 일이 있소. 영감들은 다 아는 바어니와 민양덕 저 노형의 집과 내 집이 세혐이 있어 여러 대 절교된 일이 있지 아니하오?"
(성천) "녜, 그 일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의주) "그 일은 선댓적 지난 일이지, 사또와 양덕 사이에야 무슨 흑백이 있습니까?"
(조) "옳소, 의주 영감의 말이 내 뜻과 똑 같소. 그러길래 파혐을 서로 하자고 오늘 청하였소."
(양덕) "황송하오이다. 사또께서 하관에게 그처럼 처분하시니."
(조) "허허, 우리가 상하관이란 것은 다를지언정, 군명을 받들어 지방에 내려오기야 일반이 아니오? 그러한 터에 사혐으로 공무에 방해가 되면 피차에 불온당한 일이기로 오랜 혐의도 풀겸, 향자(向者)에 실례한 일도 사과할 겸 하여 이번에 오시라고 한 일이요."
하며 미닫이를 드르륵 열면서,
"이리 오너라, 연광정에 포진(鋪陳)을 설비하였느냐?"
하더니 여러 수령을 대하여,
"공사는 장차 의논하려니와 여러 노형도 반가이 만나고, 양덕 노형과 화의도 하였으니, 내가 술 한턱 아니 할 수 있소? 자, 연광정으로 나아가봅시다."
차일을 구름같이 치고 화문등매를 즐비하게 깔았는데, 삼현육각이 자지러지며 수십 명 기생이 떼를 지어 가사도 부르고 춤도 추어 호탕한 흥치를 자아내고, 누 아래 맑은 강에 모란봉 그림자가 거꾸로 잠겨 있는데, 고기 낚는 일엽편주에 에그엇차 닻을 감아 아름다운 경매를 그려내더라.
감사가 주석(主席)이 되어, 여러 수령에게 번차례로 술을 권하여 관곡한 정분과 소탈한 운치가 비할 데 없어 한량없이 즐기는 차에 별안간에,
"불이야!"
소리가 나면서 왼성중이 물 끓 듯하더니, 통인 급장이배가 숨이 턱에 닿아 뛰어오며,
"내동헌에 불이 났습니다."
감사가 먹던 술잔을 그대로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서며,
"무엇이야, 불이 났어? 불이라니!"
한 마디를 하고서 자기가 물동이나 날라서 불을 끄려는 듯이 웃옷을 훌훌 벗어 양덕의 앞에다 턱 놓으며,
"노형, 이 옷 좀 보시오."
하더니 다시 말대답할 새도 없이 허둥지둥 가는 서슬에, 양덕이 영문도 모르고 그 옷을 받아보니 병부주머니까지 함께 있는지라, 가만히 생각한즉 큰 탈거리가 생겼는데,
(성인의 말씀에 출호이자 반호이자라더니, 오늘 내가 당한 일 경계가 아닌가? 만일 감사가 나와 옷을 입을 때에 병부를 당장 잃은 듯이 찾게 되면 까마귀 날아가자 배 떨어지지 같이 내가 그 옷 맡자 병부가 없어진 모양이 되겠지. 그 지경이 되면 발명 한 마디 할 수 없이 벼락 맞을 사람은 나 하나 뿐이 아닌가? 임시처변이라는 것은 이런 때 불가불 있을 것이니, 말불이 놈의 의견은 참 나보다 얼마쯤 낫다.)
하고 염낭을 슬며시 그르더니 병부 주머니에 병부를 감쪽같이 도로 넣고 천연스럽게 앉았더라.
화재가 부지불각 중에 일어났을 것 같으면, 선화당 한 모퉁이가 착실히 탔을 것이요, 그 모양으로 급히 덤비는 조감사의 수염도 넉넉히 그슬렸을 터이로되, 이번에 난 불은 아궁이나 굴뚝에서 저절로 난 것이라든지, 이웃집에서 일어나서 바람결에 붙어 넘어온 것이 아니라, 열 살 먹은 계집아이가 저의 부친을 살려내려고 일부러 싸놓은 불인 고로, 호통은 대단했어도 실상은 얼마 아니되어 감사가 들어오기 전에 벌써 불은 다 잡았더라.
갈 때는 버선바닥으로 발톱 빠진 걸음을 하던 조감사가, 올 때는 거드름을 여전히 피워 엎드러지면 코닿을 연광정에를 사인교에 앞뒤 순노를 늘어세우고 나오더니,
(조) "허허, 여러 노형에게 실례를 대단히 했소. 과히 허물이나 마시오."
(의주)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화재라 하는 것이 제일 무서운 재앙인데, 그만하기가 불행 중 다행이올시다. "
(성천) "이동안 일기가 심히 가물던 끝이고 풍세(風勢)도 사나워서 염려가 대단히 되옵더니 너무나 큰 복력이올시다. "
(맹산) " 하관은 불이라면 겁부터 납니다. 월전에 보고한 것을 보셨으니 말씀이지. 협군에서 물도 가까이 없고, 소방기계도 별로 없는데, 불이 한 번 일어나더니 걷잡을 새 없이 수십 호가 몰소 하지 아니했습니까? 그런 일을 생각하면 오늘 일은 잠시 놀라시기는 하셨으되, 도리어 경사올시다."
새 고을 수령이 이와 같이 위문 겸 치하 겸 제가끔 말을 하건마는 양덕은 감사의 눈치만 보며 전례로 두어 마디 인사를 하는데 감사가 그중 반가이 대답하며,
"허허, 급한 바람에 옷을 벗어 드리고 가서 미안하기가 짝이 없소. 용렬한 위인이라 할 수 없이, 그만 일에 그렇게 두서없이 덤벙여서 실례를 적지 아니 했소 그려. 아무려나 용서하시오."
조감사가 외면으로는 물 흘러가듯 좋은 수작을 하여도 내심에는 의주, 성천, 맹산 세고을 수령을 증인으로 앉히고 당장에 양덕을 천인강참에 몰아넣을 작정을 하고 맡겼던 옷을 찾아 입으며 슬며시 병부주머니부터 주물러 보더니 깜짝 놀라며 속마음으로,
(이런 조화도 또 어데 있나, 이 병부를 양덕이 도적하여 갔더란 말인가? 소위는 가통하구면, 무엇이라고 흔단을 잡을 수 없고 차라리 모르는 체하는 일이 옳지. 아무려나 인저는 병부를 찾았으니 다시 걱정할 것은 없다.)
하고서 생시치미를 뚝 떼고 희소(喜笑)를 자약(自若)히 하다가 석양이 가까워 오니까 각처 수령이 물러감을 고하는데 별안간에 통인놈이 편지 한 봉을 들이거늘, 조감사가 떼어보고 얼른 척척 접어 소매에다 넣더니,
"양덕, 노형은 천천히 가시오. 우리 하룻밤 이야기나 더 합시다."
양덕이 고집하기 어려워 홀로 떠나지 못하고, 선화당으로 다시 들어가 밤이 이윽하도록 담화하다가 영리의 집에 나오니, 산월과 매화가 먼저 와서 주안을 갖추어 놓고 등대하는지라, 당초에 호색(好色)을 하여 저희를 사귄 바는 아니로되, 정도 깊다 할만치 들었고, 힘도 적지 아니하게 본 터이라, 반가이 인사를 한 연후에, 일변 술도 마시며 이야기도 하는데,
(양덕) "너희들, 이 밤에 어떻게 왔느냐? 그 동안 잘 지내고 재미있는 일이나 많으냐?"
(산월) "염려하신 덕분으로 저희들이 몸 성히 있습니다."
매화가 창을 열고 내어다보더니,
(매화) "밖에 누구나 없나? 에그, 말 무서워, 그런데 나으리 그것은 어찌하셨어요?"
(양덕) "실없는 자식, 이름도 성도 없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매화) "자식은, 내가 나으리 자식입니까? 그것을 모르셔요?"
(산월) "에그 참말, 그것을 얻다 두셨습니까? 저희들 생각에는 사또께서 그것을 찾느라고 법석을 하실 뿐더러 저희게께지도 의심이 돌아올 줄 알았더니, 지금껏 모르시는지, 알고도 모르는 체하시는지 알 수 없어요."
(매) "나으리를 원수 같이 미워서 연명도 아니 받고, 열스무 길 뛰시던 양반이 졸지에 정분이 어쩌면 그렇게 좋았습니까? 그게 웬 조화야, 하하."
(양덕) "모르는 너희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쉬우니라. 네 내 말 좀 들어보아라, 기가 막히지."
하며 사세가 어찌할 수 없어 병부를 도로 넣은 형편을 대강 말하니, 산월이는 입이 딱 벌리고 혀를 홰홰 내두르며,
"에그나, 저런 말 보아! 나으리가 가지고 계신 줄을 아셨던 것이지. 우리가 훔쳐온 줄도 짐작하시겠네, 저를 어찌해?"
이 모양으로 흔들갑[11]을 피우고, 매화는 눈웃음을 쌍긋하고 고갯짓을 살살 하며,
"아시기는 무엇을 아셔? 옹이에 마디라고 사또는 영문도 모르고 계신 것을 나으리께서 자겁이 나셔서 집어 넣으셨지."
이 모양으로 다라진 수작을 하여가며 술을 번차례로 권하는 바람에, 어떻게 취하였던지 산월, 매화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다가 어느 때인지 술을 깨니, 물지게 소리가 뻐걱뻐걱하며 오고가는 사람의 자취가 사면서 들리는데, 눈을 떠 창 밖을 보니 백일이 중천에 이르렀는지라, 하인을 재촉하여 자기 고을로 내려와, 그 동안에 적체한 문부를 처리하는데, 인(印)뒤웅이를 열고 보니 인이 간 곳이 없는지라, 양덕이 수각이 황망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다만 얼굴이 사생중에 들어 우두커니 앉았다가 형리를 도로 물린 후, 내아(內衙)로 들어가 임씨 부인더러,
"인저는 정말 내 원이 갈리게 되었소. 원이나 갈리고 말았으면 좋겠소마는 신세까지 마칠 모양이요."
부인이 감사와 화의한 말을 듣고, 자기 남편이 도로 원하니나 다름없이 좋아하다 뜻밖에 이 말을 듣더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부인) "또 무슨 걱정이 났길래 그렇게 말씀을 하신단 말이요? 못하게 되었던 연명도 하고 여러 대(代)된 세혐도 풀었으니 아모 근심이 없을 터인데, 원도 갈리고 신세까지 마칠 일이 무엇이요?"
(양덕) "가만히 있소. 자식이 하도 의사스러우니 말불이더러나 이야기를 해봅시다. 춘섬아, 도령님 어디 있느냐? 나아가 불러 오너라."
말불이가 저의 부친의 말을 듣더니 그 길로 동헌으로 뛰어 나아가 무엇을 종이에 싸서 들고 들어와 앞에다 놓으며,
(말) "아바지, 걱정하시지 말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양) "그게 무어이란 말이냐?"
하고 곁에 싼 종이를 헤치고 보다 눈이 동그래지며,
(양) "너 이것을 어데서 찾아왔느냐? 알 수 없는 일도 있다."
(말) "네가 동헌 다락 속에 두었다 가져왔어요."
양덕이 잃었던 인(印)을 찾앗으니 마음에 기껍기도 하고 아달이 기특도 할 터인데, 화를 더럭 내며 꾸짖었다.
(양) "이 자식, 아모리 지각이 없기로 무슨 장난을 못해서, 막중안 인을 집어내어 아비의 가슴을 놀랜단 말이냐? 의사가 멀건 자식이 그만 생각을 못해? 그래, 언제 꺼내었느냐, 오늘 꺼내었느냐?"
(말) "아바지 영문에 가시는 날 꺼냈어요."
(양) "무론 어느 날이든지 무엇하려고 꺼내었어?"
(말) "동헌 벽장에 있던 글자 없는 인을 바꾸어 넣고 이 인을 꺼내오 두었었습니다."
(양) "그것은 왜 바꿔? 그러면 그 인이라도 뒤웅이에 있을 터인데, 마자 어데로 갔단 말이냐?"
(말) "쓸데없는 것 없으면 관계 있습니까? 필경 감사에게 있을 터이지요."
양덕이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아서 껄걸 웃으며,
"옳지, 옳다. 네 말대로 그 인은 감사가 가졌나 보다. 별로 할 말도 없이 나를 하로 더 묵어가게 한 것이 수상하더라. 네가 무슨 의사로 미리 바꾸어 넣었더냐?"
말불이가 인을 아니 잃어버리지 못할 사세형편을 뚫고 본 듯이 말을 하는데, 삼사십된 노성한 어른이 따르지 못하겠더라.
본래 양덕 고을에 글자 없는 민패[12]인 하나이 있으니, 이것은 전정 등내 때에 간휼한 아전놈이 있어, 관령을 허전하여 협잡으로 돈을 먹으려고 인을 위조하려다 탄로가 되어 인 모양만 흡사히 만들고, 글자는 미처 새기지 못한 것을 빼앗아 들인 것인데, 후일을 징계 하느라고 없애지 아니하고 동헌 벽장에 두었던 것이니, 말불이가 저의 부친이 영문에 가느라고 길 차릴 때에 미리 생각하기를, 감사가 병부 잃었던 보복을 기어이 할 터이요, 그 보복을 하자면 정녕 저의 부친의 인을 도적하여 가려니 싶어 아무도 모르게 바꾸었던 것이라.
그때 감사는 연광정에서 무심히 여러 수령을 작별하는데, 금쥐에게서 한 쪽 편지를 보고 양덕더러 하루 더 묵어가라 만류한 즉, 병부는 매화, 산월 두 기생의 소위니 저희를 은근히 수죄하시고 양덕의 인을 수단껏 훔쳐오라 하시면, 제 죄를 제가 생각하기로 거역치 못하리니, 그리고 보면 선대(先代)원소도 가히 갚게 되겠고, 이번 설치도 시원케 하겠다 하는 금쥐의 모계로 양덕의 인을 도적하여 가지고, 백만 금 보물이나 얻은 듯이 심심 장지[13]하여, 인 잃었다는 탄로만 되면 시각을 머무르지 않고 장계를 시퍼렇게 할 작정으로 심상한 일도 연해 감결(勘決)을 하여 보고하라 재촉하더니, 여전히 양덕의 보고가 오는데 인발이 두렷이 찍히었는지라 감사가 의혹이 버썩 나서, 다락을 열고 싸고 싸 감추어 두었던 인을 내어 자세 본즉, 형용은 방불하나 글자는 하나도 없는 한낱 쇠뭉치라. 감사가 어이가 없어,
"이놈이 나를 또 속였구나. 속은 것은 분하다마는 인 잃을 줄 미리 알고 이것을 가지고 오기는 뜻밖인걸. 네 아무리 애를 써도 무슨 수를 하던지 내 손으로 결딴 한 번은 내고 말겠다."
금쥐가 곁에 섰다가,
(금) "아바지, 분해 말으십시오. 민양덕 장파[14]할 일이 정말 있습니다."
(조) "무슨 일? 또 그 모양으로 내가 되속지나 아니하겠니?"
(금) "요사이 가산서 살옥(殺獄)났지요?"
(조) "그래, 살옥났지."
(금) "검시관을 양덕으로 매기시면, 아무리 여간 지혜가 있어도 오결(誤決)하기 쉬우니, 그 때 가서는 장파하기로 무엇이라고 한가할까요?"
(조) "이애, 그것 참 되었다. 그 살옥은 내가 검시관이라도 득정하기 어렵겠던걸."
(금) "아버지께서 검시관 되시면 내가 가르쳐드리지."
(조) "네가 능히 그 살옥실정을 알아낸단 말이냐?"
(금) "그것이 무에 어려워서요?"
하며 감사의 귀에다 가만가만 말을 하니까, 감사가 금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남자가 되었더면, 내가 아무 근심이 없을 뻔했다. 그 옥사를 내가 며칠을 두고 생각하여도 까닭을 못 알았으니 열 살 된 여자 너만 못하다. 오냐, 너 하자는 대로 하여보자."
하고 선화당으로 나아가 공문을 기초하여 양덕으로 보내더라.
양덜이 검관 맡긴 공문을 보고 가산으로 갈 터인데, 예사 살옥 같으면<무원록>[15]이나 뒤져보고, 절인이나 잡아 문초를 하여 전례대로 보할 터인데, 이 살옥은 무원록으로도 밀어볼 수 없고, 절인도 별로 없어 아무 궁리가 아니나니, 이맛전에서 땀이 나고 혀가 턱턱 갈라지도록 애를 쓰는데, 말불이가 동헌으로 나아오더니,
(말) "아바지, 그 살옥이 어디서 났어요?"
(양) "가산 새별령에서 났단다."
(말) "어떤 사람이 어떠허게 죽었대요?"
(양) "시신(屍身)은 가산, 안주, 박천 세 고을 사람이라는데, 죽은 모양이 괴상스러워 아모려도 알 수가 없고나."
(말) "한 사람이 그 여러 곳에 살았어요?"
(양) "새별령이라는 고개가 우리 고을 소고산보다 크고 유벽하여, 고개 이편에서 저편 가기가 삼십 리 무인지경인데, 안주사람 하나는 고개 이 편 중턱에서 목에 칼을 꽂고 죽었고, 박천 사람 하나는 고개 저편 중턱에서 또한 목에 칼을 꽂고 죽었고, 고개 마루에는 가산사람 둘이 죽었는데, 곁에 돈 한 견대와 빈 술병과 술간 하나이 놓여 있더란다."
(양) "시신이 하나라도 득정하기 극난한 것은 의옥(疑獄)인데 사람이 넷이나 죽고 또 증거할 만한 일도 별로 없으니, 오결하기가 첩경 쉽겠고나. 오결 곧 하고 보면, 그러지 않아도 음해만 하려는 감사가 털끝만치나 안사[16]를 두겠느냐? 시각을 머물지 아니하고 장계를 할 터이지."
말불이가 종이에 고개 형용과 네 사람 죽은 모양을 이리저리 그려 들고, 한 시간은 들여다보며 생각을 하더니,
(말) "그 곳에 술파는 집이 어느 편에 가까이 있습니까?"
(양) "이 편은 주막이 가까이 있고, 저편은 주막이 멀리 있다 하더라."
(말) "그러면 저편에 죽은 사람은 무죄 양민이요, 이 편과 산마루에 있는 사람은 모다 도적놈이올시다."
말불이가 종이에 그린 것을 저의 부친 앞에다 펴놓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 "이 사람은 양민인데 돈을 가지고 고개를 향하여 이리로 오는데요."
(양) "그래, 이리로 오는데."
(말) "도적놈 셋이 칼로 찔러죽이고 돈을 뺏았습니다."
(양) "그래, 돈을 빼앗았는데?"
(말) "도적놈들이 그 돈을 나누어 가지려고 고개 마루로 올라갔습니다."
(양) "그래, 고개 마루로 올라가서 죽이기는 왜 죽였나?"
(말) "그놈들이 고개 마루에 앉아서, 한 놈더러 술을 사오라고 보내고, 그 두 놈이 공론을 하고, 한 식구라도 없애고 많이씩 나우어 가지려고 술 사가지고 오는 이 놈을 저곳에서 또 칼로 찔러 죽인 후, 술병을 가지고 산마루로 올라온 것이올시다."
(양) "그러면 그 두 놈은 살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모다 죽었나?"
(말) "술 사러 갔던 놈도 마음이 불측하여 그 돈을 몰수히 가지고 싶은 욕심이 나서, 술에 독약을 탄 것을 모르고 두 놈이 먹은 곡절로, 일시에 다 죽었습니다."
(양) "옳다, 세 놈과 한 사람의 죽은 까닭은 그럴시 분명하다마는, 고개 이 편 저편에 있는 시신 중에서 어떤 것이 양민인지 도적인지 무엇으로 안단 말이냐?"
(말) "그것은 알기 쉽습니다. 그 놈이 술을 사려면 필경 가까운 곳으로 갔을 터인즉 주막 가까이 잇는 편에서 죽은 자가 도적놈이 분명하지 아니합니까?"
양덕이 임씨 부인을 돌아보며,
"우리 말불은 문필이나 잘 가르쳤으면 응교공 계척(繼蹟)을 넉넉히 하겠소. 그 할아버지께서 용강 현령으로 계실 때에 살옥 결처하신 일이 어지 신기하던지 지금 까지 유명하지 아니하오?"
무론 어느 부인이든지 자애는 모두 많은 법이라. 자기 남편이 말불이 칭찬하는 양을 보고 기꺼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말불을 부르며,
"이애 말불아, 공부 잘해라. 아버지 말씀 듣지 못하니? 아무쪼록 응고 할아버지 같이 선치(善治) 명관으로 이름이 세상에 자자하여야지."
이와 같이 내외(內外) 서로 말불이 칭찬도 하고 훈계도 하다가, 양덕이 길을 차려 가산으로 가서, 네 시신을 차례로 검사한 후에, 고개 이 편과 고개 마루에 있는 시친을 불문곡직하고 잡아들여 엄치 문초하니 불하 일장(不下 一杖)에 개개 승복하는데, 말불의 하던 말과 여합부절이라. 즉시 그 공초로 발미[17]를 잡아 영문에 보아니, 감사가 그 발미의 일호도 차착이 없음을 보고 스스로 탄복하되,
"양덕은 참 자목지재[18]로구. 내가 만일 사혐을 인하여 이 같은 수령을 구축하면, 이는 일도(一道)를 관찰케 하신 성의를 저버릴 뿐 아니라 현명한 자를 포양(?揚)하는 본의가 아니라."
하고 그 길로 양덕 환관하는 길에, 영문으로 오기를 청하여 한 점 온의(?意)를 두지 아니하고 소경력을 서로 말할 새,
(감) "노형의 지혜는 가히 백리지재(百里之才)가 아니시오, 피차 조금도 간격을 두지 말고 이야기를 합시다. 나의 병부를 가져가 나로 하여금 연명 아니 받지 못하게 함과 나의 계교를 미리 알고 인을 바꾸어 가지고 온 일도 사람마다 의사부도처(意思不到處)어니와, 이번 살옥일도 오결 아니할 사람이 백에 하나가 되지 못할 터인데, 그같이 용이케 득정함은 실로 뜻하던바 아니오."
(양) "사또께서 이처럼 간담을 노출하여 말씀하시는데, 조금이나 기정(欺情)을 하오리까, 이는 모다 하관(下官)의 소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식놈의 의사로 우중(偶中)한 일이올시다."
(감) "자제가 금년에 연기가 얼마나 되었소?"
(양) "아직 유치(幼稚)의 것이올시다. 인제 십일세가 되었지요."
감사가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며 자기 딸의 자랑까지 겸해 한다.
(감) "허, 자제 잘 두었소 그려. 어쩌면 십일세된 어린 아해로 의사가 그처럼 융통하오? 근데 아해들은 어른이 미처 생각지 못할 의사가 많던걸. 나도 연광정 놀이를 차려 병부 찾은 일이 십 세된 여식의 의사로 한 일이요?"
(양) "자식놈은 일 세라도 더 되었고 남자인 고로 어른의 처사하는 것을 구경하여 약간 문견(聞見)이라도 있었은 즉 그런 의사 있기도 용혹무괴어니와, 영애로 말씀하오면 지금 겨우 십 세로 규중에 깊이 감추어 있어 바깥일을 별로 아지 못할 터인데, 지모(智謀)가 어쩌면 그러하오니까? 과연 말씀이지 희한한 일이올시다."
감사가 양덕의 손목을 탁 잡더니,
(감) "섞이면 친밀할 장본이라는 격담같이, 우리 두 집이 여러 대 서로 소원히 지냈으니, 종금 이후로는 다시 친밀히 지내야 이치에 적당치 아니하오? 나의 여식과 형의 자제는 그 재덕의 방불함이 가히 진진(秦晉)의 아름다운 배필이 될 만하니 나를 더럽다 말으시고 언약 맺기를 원하오."
(양) "자식의 용렬함을 불고하시고 이처럼 말씀하시니 감사함을 비할 데 없나이다."
감사가 지필을 가져오라 하더니,
"예(禮)는 간단함이 좋으니, 번거이 하인 왕래할 것 없이 자제의 사주를 노형이 지금 아주 써주시오."
양덕이 붓을 들어 말불의 생년월시(生年月時)를 기록하더라. 이 같이 혼인을 뇌정한 후 새로이 정의가 더 두터워져 밤이 맟도록 담화하다가, 밝는 날 양덕이 자기 고을로 돌아가니라. 이상은 재자(才子)와 기녀(奇女)의 아름다운 바탕과 영민한 소견이 막상막하하여, 사람을 놀래고 귀신도 측량치 못할 행동으로 선세의 숙혐(宿嫌)을 춘설같이 풀고, 백년의 가약을 금석같이 정하여 만고에 기이한 일이 됨을 기록하였거니와, 이하에는 그 인연을 성취하던 사적을 말하고자 하노라.
일월이 명랑하다가 홀연히 사나운 바람과 급한 비가 지척을 불변케 함은 추측치 못할 하늘의 조화요, 복록이 구비하다가 뜻밖에 무쌍한 화환과 지극한 곤란으로 신세가 표령(飄零)함은 떳떳치 못한 사람의 일이로다. 갑오경장하기 이전에는 외국을 교통하거나 정치에 유의한 자면 열에 아홉은 국사범으로 몰리는데, 지금 법률같이 육범 죄인이라도 상당한 형벌이 당자 일신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한 사람의 조에 일문(一門)을 함몰하고 삼족까지 멸하는 혹독한 법을 쓰던 세월인데, 조감사의 아우 조참판이 국가의 쇠약함을 분히 여겨 정부를 개혁코자 하다가, 동모자가 비기를 누설하여 흉한 죽음을 당할 뿐 아니라, 그 연좌로 조감사까지 구격나래[19]하라는 영이 내리니, 이때 조감사의 부인 김씨는 신병으로 이미 작고하였고 산월을 들어 앉혀 별실(別室)을 삼아 데리고 있다가 이 일이 났으니, 정실부인 같으면 위노위비(爲奴爲婢)의 참혹한 욕을 당한대도 모진 목숨 끊어지기 전에는 가만히 앉아 중대한 체모로 구애할 것이 있으리요?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달아나려 하는데, 감사가 그 지경이 되어 수각이 황망한 중에도, 금쥐의 신세를 생각하고 눈물을 더벅더벅 떨어뜨리며,
"이 애 산월아, 나는 이 길에 생사를 모르겠다. 한 가지 일을 부탁하노니, 구정을 생각하여 우리 금쥐를 어디로 가던지 데리고 있다가 양덕의 아달과 성혼을 하던가, 데리고 있을 사세가 못되거던 진작 양덕으로 보내주고 만일 양덕이 내 집이 이 지경이 됨을 혐의하여 전(前)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거던, 다른 곳이라도 가합한 낭자가 있거던 성례하여 주기를 바라고 믿는다."
또 금쥐를 돌아보고,
"울지 말고 너의 서모를 따라 몸을 피하여라. 이곳서 잠시라도 지체함이 불가하다. 우리 집 혈속은 너 하나뿐이니 아무쪼록 네 몸을 네가 보중하여 죽는 아비의 원혼을 위로하여라."
그 말 겨우 하자, 금부도사가 어서 나오라는 재촉에 다시 말 한 마디도 더 못하고 정신없이 나아가는데, 금쥐가 처음에는 어쩐 영문인지 모르고 덤덤히 있다가 그 부친의 이르는 말을 듣더니,
"에그, 아버지!"
한 마디를 지르고 땅에 가 폭 엎드러지며 기색을 하여 그 부친 가는 것도 모르고 뻣뻣하게 늘어졌는데, 산월이는 그 중에도 돈냥 싼 경보는 모두 싸가지고, 부탁한 보람 없이 금쥐는 돌아볼 겨를 없이 몸을 피하여 나아가는데, 천진의 이월이는 저의 작은아씨 손발을 주무르다가,
(이) "마마님, 어데로 가시렵니까? 작은아씨도 모시고 가야지오."
(산) "정신 모르고 죽어 넘어진 사람 위하고 잇다가, 성한 사람조차 붙들려 갈까? 이 애, 고만 내버려 두고 너도 진작 피해라."
하며 꼬리가 빠지게 달아나니, 이월이가 할 일 없이 저의 작은 아씨의 입에 뺨을 대어 숨기가 아주 끊어지지 아니하였나, 가슴을 손으로 만져 온기가 남아 있나, 이 모양으로 애를 쓰다가 힐끗 돌아보니, 나장이 하나이 곁에 와 서서 목소리를 나직이 하여,
"여보게, 자네 조판서댁 한님인가? 기색하신 이가 아마 그 댁 작은아씨지! 내가 악형 구실을 다니는 탓으로 이런 광경을 많이 보았네마는, 당자 양반을 잡았으면 고만이지 철모르는 자손이야 무슨 죄 있나? 더구나 남자도 아니고, 벼락치는 하늘을 속일라고 나만 알고 있을 것이니 예서 지체하지 말고 그대로 업고 으슥한 곳으로 나아가서 구완을 하게."
이월이가 뻣뻣이 죽은 금쥐를 그대로 업고, 넘어지며 쓰러지며 내아 뒷문으로 나서니 갈 곳이 바이없는지라, 우선 아무데로나 가서 백비탕이라도 끓여, 입에 흘려 넣어볼 작정으로 그 중 발씨에 익고 가까운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산월의 오래비집이라. 산월이가 제 집으로 가자니 겁이 나고 잠시 몸을 피하려고 그 집에 와 있다가 이월이가 금쥐를 업고 오는 양을 보더니 얼굴이 발개지며,
(산) "어쩌자고 이리로 몰방을 쳐오니? 성내성외(城內城外)에 이 집 하나뿐이란 말이냐? 일껀 잘 와 있는 남까지 못살게 하려고?"
(이) "에그 마마님, 다른 데로 가더라도 작은아씨가 피어나시기나 하셔야 아니 갑니까?"
(산) "왜 이 모양으로 고집을 하고 있어? 세상 일이 다 저부터 살고서 말이지. 지체말고 어서 나아가거라."
(이) "마마님, 대감께서 부탁하시던 말씀을 생각하시기로 잠시 지체야 못하게 하십니까?"
(산) "마마님이 누구냐? 인저는 마마님 소리도 듣기 싫다. 어서 가라면 갈 것이지."
하면서 등을 밀어내어 쫓고 대문을 딱딱 닫아 걸으니, 이월이가 분하고 절통한 생각을 하면 달려들어 산월의 뺨이라도 치고 욕설이라도 하겠지마는, 작은아씨 구완할 일이 급해서 다시 대답도 아니하고 다른 집으로 들어가려다 혼자 생각컨데,
(우리 대감 귀염도 많이 받고 신세도 적지 아니 입은 이년의 집에서도 이 모양으로 내어 쫓는데, 아모 놈의 집에를 가기로 망신만 하지 받자할라구? 땅거미가 되어 먼데 사람 알아보지 못할 만하니 아무데나 인가 없고 으슥한 데 가서 아씨가 피어나시거던 어데로 가던지 좌우간 하지.)
하고서 모란봉 비탈로 개, 닭소리 아니 들릴 만치 올라가 그 중 편편하고 유벽한 곳에 가 금쥐를 내려놓고, 손바닥, 발바닥을 번차례로 문지르면서,
"아씨, 정신 차리셔요."
이 모양으로 소리를 크게도 못하고 가만가만 부르며 애를 더럭더럭 쓰는데, 금쥐의 사지가 차차 부드러워지며 뜨뜻하여 오더니, 긴 한숨을 휘이 쉬고 돌아눕더니 눈을 떠 이월이를 치어다보고,
(금) "예가 어데냐, 이월아?"
(이) "예가 선화당 뒤 모란봉 밑이올시다. 정신 좀 차리십시오."
(금) "내가 어쩐 곡절로 여기 와 있니? 대감께서는 어데 계시냐?"
(이) "대감께서는 벌써 서울로 떠나가시고 아씨는 쇤네가 업어 이리로 업어 이리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 말을 겨우 하고 소리 없이 울기만 하는데, 금쥐는 부친 떠나갔다는 말을 듣더니 기가 턱턱 막히게 통곡을 하다가 자조 혼도 불성하니 이월이 겁이 나고 애가 씌워,
"아씨, 왜 이리하십니까, 누가 듣고 쫓아오라고? 대감 하시던 말씀 생각도 못하십니까? 대감 혈속은 아씨 한 분이신데 아무쪼록 살아 계셔야 대감 설원도 해드릴 것이요, 또 대감께서 으레 돌아가시라는 데 어데 있습니까? 다행히 아니 돌아가시게 되면 아씨가 계셔야지 누가 봉양합니까?"
금쥐가 눈물이 비 오듯 하며,
(금) "그래, 벌써 멀리 가셨겠구나. 가시면 정녕 살으시지를 못할 터인데 마지막 얼굴이나 다시 뵈옵게 나를 깨워주지."
(이) "지날 곁에 쇤네가 대감 모시러 온 금부나장이 하는 말을 들은즉, 대감께서 지으신 죄는 아니시니까 어쩌면 정배는 가시기 쉬워도 돌아가실 듯은 아니히다고 하던걸이요."
(금) "에라, 네 말은 듣기 싫다. 나를 속이려고 꾸며대는고나. 여간 일일세 말이지, 참판영감께서 역모를 몰리어서 그 연좌로 잡혀가신 터이신데, 사시기를 어지 바란단 말이냐?"
하며 종과 상전이 서로 붙들고 어우러져 우는데, 멀리서 조그마한 등불 하나이 번쩍번쩍 보이더니 점점 가까이 오며, 어떠한 사람이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양 같으니 이월이 겁이 더럭 나서,
(이) "아씨, 저기 사람 옵니다. 울음소리 내시지 말으십시오. 저 너머는 보이지 아니하겠습니다. 그리로 가십시다. 어서 가셔요."
금쥐가 이월을 따라 조그마한 언덕 밑에 가 숨도 크게 못 쉬고 푹 엎드려 있으려니까, 얼마 아니되어 덜미에 모래가 우수수 흘러내리며 누가 언덕 위로 버썩 올라 등불을 들고 휘휘 둘러보더니, 얼핏 물러가 멀찌가니 앉으며,
"여보게, 아씨께 놀라지 말으시게 여쭙고 자네 이리 잠깐 오게."
이월이는 듣고도 못 들은 체하고 가만히 있는데 그 사람이 재우쳐,
"놀라지 말고 이리 와서 내 말 좀 듣게, 나는 해주 사는 안선달일세."
겁결에 덜덜 떨기만 하던 이월이가 모기소리만치,
(이) "아씨, 안선달이 누구오니까?"
(금) "글쎄다......."
아무리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느라고 했지마는, 안선달은 귀를 그 편으로 기울이고 있는 터이라 벌써 알아듣고,
(안) "올 봄에 빚 송사하던 안경지라고 여쭙게. 자네도 내 얼굴은 자세히 몰라도 이름은 아마 익숙히 들었으리."
(이) "..................."
(안) "내가 삼화따라 장사차로 왔다가 이 변난 소식을 듣고 대감 떠나시기 전에 뵈옵자고 왔더니....... 두어 시간만 일찍 당도했더라면 떠나가시는 것이나......."
하고는 말을 다시 못하고 한참을 있더니,
(안) "이 밤중에 여기 계시면 어찌하시자는 말씀인가? 위선 아무데로나 모시고 내려가 미음이라도 좀 잡수시게 하여야 할 터이니, 그러시지 말고 저리로 가시자고 아씨께 여쭙게."
하며 지성스럽게 권하니 이월이 생각에 처음에는, 저놈이 웬놈인데 일부러 등불을 가지고 솔밭 틈틈이 뒤져 여기를 찾아왔노? 아마 우리 아씨를 잡아가려고 뒤를 밟아 온 것이어니 싶어 간이 팥잎 만하여지도록 놀라더니 나중에는,
"옳지, 저 사람이 맞받이 정소를 만나 여러 달 갇혔다가 대감께서 놓아주신 안경지구나. 그때 정소 만난 일로 보아도 무던한 사람이요, 지금 여기 저렇게 와서 말하는 것을 보아도 의리 있는 사람인걸. 넘어지는 나무를 아주 쓰러 누이려는 지는 세상에 말만 들어도 고맙지."
이월이가 이같이 말을 하고 그제야 슬며시 일어나, 두 눈만 언덕 너머로 내어놓고 자세자세 보더니,
(이) "아씨, 저 사람이 안선달이라고 합니다. 겁낼 것 없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아씨, 안선달 모르십니까? 왜 아시지요?"
안선달이 송사를 어찌 여러 달을 두고 했던지, 성명 삼자를 모를 자가 없는 중, 금쥐는 그 송사에 고문관이나 다름없이 자기 부친께 훈수하여 안경지를 무죄백방한 후로, 안경지는 한 달에 한 번이고 두 달에 한 번이고 신을 끊지 아니하고 조감사 문안을 종종 하던 터이라.
금쥐가 친정일가나 만난 듯이 든든한 마음은 있으되 평생에 마주 보고 말 한 마디 않던 사람을 어찌 따라가리 싶어,
(금) "이애, 안선달이라니까 생무지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지마는 구차히 살면 무엇하니? 나는 아무데도 가기 싫으니 내 걱정은 말고 네나 따라가 보아라."
(이) "아씨께서 아니 가시는데, 쇤네 혼자 죽기가 원통해서 어실렁어실렁 가겠습니까? 그리시지 말고 잠시 피신하셨다가, 서울 소문을 차차 들어가며 돌아가신대도 늦지 아니합니다."
하나는 가자거니 하나는 가기 싫다거니 이와 같이 다투는 것을 안선달이 듣다 못하여, 먼저는 이월을 사이에 넣고 전갈같이 말을 하더니 지금은 직접적으로 말을 한다.
(안) "아모 흉허물 없습니다. 저는 댁 사람이나 다름없을 뿐 아니라 나이 육십이 불원한 늙은이올시다. 제가 댁 대감 혜택을 태산같이 입사와 죽는 날까지라도 못 잊을 터인데, 오날 작은아씨께서 이 지경에 계심을 뵈옵고 그대로 내려갈 가망이 있습니까? 예서 진남포만 가서 배를 타면 재녕 당탄포에 가 닿습니다. 당탄서는 저 있는 해주감영이 머지 아니하니, 누추하나마 제 집에 가셔서 얼마간 계시다 차차 좋으실 대로 제가 거행하여 드리올 터이니, 아모 염려 말으시고 밤이 더 늦어 가기 전에 칠성문 밖 종용한 집 한 곳을 치우고 주무신 후 내일 곧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안선달이 오장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어떻게 간절히 말을 하였던지 아주 죽기로 자처하던 금쥐가 이월을 데리고 따라가더라.
해주는 관서 대도회처라, 평양보다 별로 못할 것 없이 가옥도 즐비하고 물색도 번화하여 순후하고 온근할 상은 오히려 평양보다 낫다고라도 할 만한 곳인데, 안경지는 본래 서울사람으로 어느 때 그리로 이사를 왔던지, 가세가 불빈(不貧)하고 남의 괄시 아니 받을 만하니 이는 경지의 선대로부터 전하던 재산이 아니오, 다만 소시때부터 장사하기로 위업하여 자수기가(自手起家)한 터이라. 알뜰한 규모가 술 한 잔 헛되이 먹어 내어버리지 아니하는 성미언마는, 금쥐에게 대하여는 아까울 것 없이 잘 먹도록 잘 입도록 하여, 이왕 진 신세를 갚을 작정으로 금쥐 일행을 데리고 집에 오던 날, 첫대 그 노파를 부르더니 금쥐를 가리키며,
"여보 마누라, 이 아씨는 평양감사로 계시던 조판서 대감 따님이시고,"
또 이월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그 아씨 부리시는 하님이요. 당초에 우리가 조판서대감 명찰하신 은덕이 아니더며 적지 아니한 최가의 돈도 물어주었을 것이요, 돈만 물어줄 뿐 아니라 도적의 누명은 벗어보았겠소? 그 대감께서는 그제씨영감의 연좌로 참혹한 지경을 당하셨는데, 슬하에 자제는 한 분 없고 한갓 지금 모시고 온 따님 한 분뿐이시니, 우리가 모르면이어니와 알고서야 어디까지든지 구완해 드리지 아니할 수 있소? 우리 별당채를 정히 수리하여 데리고 오신 하님더러 한방에 모시고 지내게 한 후, 거처범절이라든지 음식지공을 정성껏 조심하여 조금도 태만히 하지 맙시다. 그 대감이 천행을 살아나시든가, 그 때 모시어 보내면 우리가 그 댁 은혜를 만분지일이라도 갚을 것이요, 또 만이 그 대감이 필경 불행하시거나 찾으시는 일가댁도 없거던 우리가 어느 때까지는 모시고 있다가, 힘써 주선을 하여 문벌 신랑을 골라 혼인까지라도 지내드렸으면, 외손(外孫)봉사나마 그 대감 향화는 받들지 아니할 것이요?"
금쥐는 원래 영리한 아해라, 안선달의 이 같이 하는 양을 보고 속마음으로,
(아무리 우리 신세를 입은 일이 있다 하기로 지금 인심에 그 생각하는 사람이 몇몇이 못될 터인데, 더구나 다시 볼 것 없게 된 우리 집을 잊지 아니하고 이처럼 나를 구제하니 감사하기가 한이 없지! 내가 이 집에 있지 아니하려면 모르거니와 아직 얼마간 지내자면 피차에 불편치 아나하도록 하여야 옳겠다.)
하고 선뜻 일어나 안선달의 내외 앞으로 가더니 공손히,
(금) "옛말에, 「나를 낳으신 이도 부모요, 나를 살리신 이도 부모라」하였으니, 괴로움을 잊으시고 죽게 된 몸을 구제하심은, 실로 골육의 은정이나 다름이 없사오니, 오늘부터 부녀의 의를 정하심을 바라나이다."
경지가 그 말을 듣더니 황망히 금쥐 앞에 와 꿇어앉으며,
"이게 무슨 분부시오니까? 소인은 향곡 천한 사람으로, 오늘날까지 잔명 보존하온 것이 모다 대감 덕택이오니, 저기 섰는 댁 하님이라도 소인이 감히 가볍게 여기지 못할 터이온데, 더구나 아씨 전에 거만하올 가망이 있습니까? 지금 하시던 분부는 곧 죄를 주셔 죽이신대도 봉행할 수 없나이다. 잠깐이라도 누추한 집으로 모시게 하온 일을 방자하다 꾸짖지 아니하시는 것만 해도 소인 내외에게는 다시없는 큰 영광이올시다."
금쥐는 할 일없이 그대 말을 다시 못하고 다만 재삼 칭사(稱辭)할 뿐인데, 경지는 집안 식구더러 이르기를,
"저 아씨는 조판서댁 작은아씨니, 너희들도 그리 알고 무슨 말쌈을 할 일이 있거던 작은 아씨라고 여쭈어라. 여보, 마누라도 늙었다고 버릇없이 하지 마오. 우리가 그 댁 종노릇을 하여도 신세를 못다 갚소."
노파의 성행이 본래 새암바르고 악착스러워, 집안에 더부살이를 두어도 한 달에 두세 번씩은 갈아들이기로 동리 조명이 있건마는, 안선달의 심덕으로 사람들이 여간 붙어 있는 터이라. 노파가 금쥐의 의녀(義女)가 되겠다는 말에 속마음으로,
(내가 자식이 없어 일상 외롭고 적적하더니 너무나 다행하다. 인물도 똑똑하고 재질도 있어 보이니, 내 속으로 낳으나 다름없이 슬하에 두고 바느질가지를 시키더라도 관계치 아니하겠다. 제가 그렇게 말을 아니한 대도 나는 첫대 그 생각이 있었으니까 영감더러 의논을 해보쟀더니."
하며 영감의 대답 나오기만 기다리고 좋아하는 차에, 안선달의 하는 양을 보니 일껀 경륜하였던 바가 비거석양풍이 되어 십분이나 불쾌하지마는 기왕 영감이 하는 일을 어찌할 수 없어 외면으로 좋은 체하고,
(노) "영감 말씀이 옳으시오. 우리가 그 댁 일에 범연할 수 있소? 염려하시지 마오. 내 정성껏이야 못하리이까?"
(안) "그렇고 말고! 정성껏 해야지. 여보게 이월이, 자네는 집안에 다른 일은 아예 간섭치 말고 아씨 곁에나 떠나지 말고 심부름 잘해 드리게. 잡수시는 것이나 의복 마전하는 것은 우리 마누라가 다 해드릴 터일세."
경지가 집에 들면 이 모양으로 말을 해가며, 조석때 반찬 등물이며, 식전, 저녁때 외라도 닙으 맞을 것으로 종종 공궤를 하고, 장사를 나아가면 좋은 필목이든지 좋은 비단을 보면 기어이 사서 집으로 보내며, 작은아씨 의복 지어드리라고 노파에게 당부하고 집에를 돌아오면 먼저 작은 아씨의 안부부터 물으니, 노파의 마음의 점점 불평하여 경지가 집에 있을 때면 조석공궤를 극진히 하는 체하다가, 만일 장사를 나아가고 집에 없으면 갖은 학대를 모두 하는데,
"늙은 사람이 저희 같은 아이를 보고 하소할 것 무엇있나?"
하고 제 종 부르듯 이월을 불러낸다.
(노) "이애 이월아, 밤낮 방구석에서 무엇하니? 이리 좀 나오너라."
하여 물을 길어라, 쌀을 쓸어라, 빨래를 해라 가지각색으로 사환을 시키며, 금쥐에게는 바느질이라는 것은 머슴놈의 버선꾸러미까지 지어내라 시키니, 이월이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저의 아씨를 들어가 보고,
(이) "아씨, 쇤네는 안선달 들어오거던 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죄다 하겠습니다. 쇤네는 고생을 하거니 말거니, 댁에 계실 때도 아니해 보시던 아씨더러 못할 바느질이 없이 시켜요. 에그, 경을 칠 마누라, 저의 영감이 알고만 보면 단단히 부대낄라."
(금) "너도 생각도 못한다. 우리가 팔자가 얼마나 좋으면 이 지경이 되었겠니? 그저 온갖 일을 참는 것이 상책이니라."
고삐가 길면 디딘다는 것 같이, 세상일이 아무리 눈을 기이고 모르게 하려도 부지불각 중 탄로가 절로 되는 것은 소소한 이치에 면키 어려운 것이라. 전에는 안선달이 어데로 장사를 나아가든지, 집에 돌아올 기한을 영락없이 미리 통기하므로, 노파가 그 승시하여는 금쥐에게 없던 정도 있는 듯이 얼렁거리고, 이월도 물심부름 한 번 아니 시키는 체하니, 어느 누가 남의 내외간에 고해바쳐 알도록 할 이치는 만무하고, 감쪽같이 속느니 안경지요, 알뜰히 볶이느니 금쥐 종, 상전이러니, 하루는 귀신이 인도를 했는지, 안경지가 집에를 별안간에 오고 싶어 미리 기별할 여부없이 보던 일을 대강대강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안마당에를 썩 들어서니, 그때 마침 이월이가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부엌에서 나오는데, 오른손에 밥 한 사발 왼손에 풋나물 한 접시를 들고 저의 아씨 처소로 들어가는지라, 안경지가 그 광경을 보고 분심이 탱중하여 마누라를 벼락같이 부르더니,
(안) "내가 무엇이라고 열 번 백 번 부탁을 했길래, 부탁한 본의 없이 조판서댁 작은아씨 진지를 고기 한 점 없이 저 모양으로 대접하니 그게 무슨 인사요? 응? 그게 무슨 도리요, 응? 또 이월이는 아예 불러내지 말고 그 아씨 앞에 모시고 지내게 하랬더니, 얼마나 몹시 굴었길래 눈물을 떨어뜨리고 부엌에서 나오니 어찌 한 곡절이요?"
(노) "먹고 싶으면 갖다 먹겠지, 늙은 년더러 갖다까지 바치지 아니한다고 걱정이요? 팔자 없는 종질하기도 시틋한데 그에서 더 어떻게 하라고? 더구나 이월이는 무슨 년이길래 한 집에 두고 심부름 한 번 못 시키게 웬 야단이요, 이 야단이?"
(안) "야단은 내가 야단이야? 우리가 그 댁 아씨께야 종질인들 못할 것이 무엇 있나? 내가 집에 있는데 이 모양일 제는, 나 없을 때야 더구나 말할 것 없겠지."
(노) "누가 조판서집 딸인지, 김판서집 딸인지 아나? 얼굴이 반주그레하니까 데려다 두고, 늙은 영감이 흉측한 뜻으로 횡설수설 떠대어 나를 속여, 잘 먹이고 잘 입히게 하다가 계집이나 삼아보게."
경지가 분이 상투 끝까지 올라서 주먹을 불끈 쥐고 돼지도록 때려주려다가 생각하기를,
(내가 매질곧 하면, 저년 하나는 죽이고 말 터인데, 그러느라니 왁자지껄하게 되면 그 아씨께서 자연 들으시고 좀 불안하실라고. 또 내가 집에 없을 때가 많은데 매맞은 분풀이를 그 아씨에게 모두 다 할 터이니,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오 더러워 피하는 것이니 차라리 내가 참는 것이 옳다.)
하고 소리를 나직나직하여 준절히 꾸짖기를,
(안) "나를 오십이나 어데로 먹었길래 말이라면 다할 줄 알고 나오는대로 함부로 하니, 어찌하자는 지각이요? 열 번 참고 참는 것이니 이다음에 또 한 번 그렇게 되면 아무리 사십 년 동거 의는 있더라도, 맹세코 다시 대면을 아니할 터이니 그리하지 마오."
이와 같이 타이른 후에, 다시는 장사를 나아가지 아니하고 집에 있어 대소사를 손수 총찰하여, 매일 육종과 채소의 입에 맞을 만한 것을 사들여 지성껏 공궤하는데, 금쥐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어 어느덧 사오 년이 되었더라.
노파가 안경지에게 눌리어 다시는 꿈적하지 못하고 도리어 얼렁거리니, 예나 지금이나 어수룩한 것은 사나이라. 노파의 화순하여짐을 보고 안경지는 진정으로만 알고 만분 다행히 여기던 차 청국 남경 지방의 약재료를 무역하여 오면 불소(不少)한 이익이 있을지라, 이에 자본을 판비(辦備)하여 가지고 길을 떠날새, 간절히 노파에게 좋은 말로 당부하고, 또 하인을 불러 각별 조심하여 나 있을 때와 같이 조금도 거만히 하지 말고, 그 아씨께서 하루 열 번 무슨 일을 시키신대도 괴로운 사색을 나타내지 말고, 각근히 거행하라 재삼 이른 후 길을 떠나가니라.
노파가 저의 영감이 집에 있어 한결같이 조소저와 이월이 위대하는 양을 보고 입으로는 비록 말을 아니하나, 심중에는 항상 미워하더니, 영감 떠난 후로는 빨랫줄 같은 텃세가 나오는데, 조석밥이 조금 늦든가 물을 얼른 떠오지 아니하더라도 더부살이더러 바로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노파가 건넌산 꾸짖기로,
"왜 이 모양이냐? 너까지 내 상전 노릇 하여보려는 것이로구나. 팔자가 사나우니까 별꼴을 다 보겠지, 영감께서 집에 계실 때는 큰소리 나는 것이 귀치않아서 참고 참았거니와, 지금 아니 계실 때도 내 집 규모를 내 마음대로 못해 볼까? 나 내놓고 네 상전이 또 누구길래 밥해 바치고 마전해 바치고. 그렇게 갖게 지내려 거던 제 집구석에 있지, 남의 집에를 왜 와 있어? 밤 낮 그 드난하느라고 나는 정작 시킬 일도 못 시켜보지."
하며 한 차례 야단을 치니 이월은 상전 욕먹는 일이 분하지마는 아씨의 말에 못 이겨 꿀떡꿀떡 참고 있고, 금쥐는 그리할수록 노파에게 공순하기로 주장을 삼아 말 한마디 불평히 아니하고 소금에 밥이라도 사색 없이 먹고 지내건마는, 노파는 어떻게 된 심사인지 그리할수록 미워하여 소리 아니 나는 총이 있으면 놓아서라도 죽이고 싶어하더니, 하루는 이월이가 작은아씨 세숫물을 뜨러 부엌에 내려갔다가 제가 데운 물을 누가 다 퍼 없앴는지라, 대수롭지 아니하게 두어 마디 하였는데, 노파가 마침 듣고 큰 생애거리나 만난 듯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버럭 질러 이월이를 부르더니 앞에다 세우고,
(노) "이 집안이 네 세상이란 말이냐? 기세가 어찌 그리 등등하고 아니꼬우냐? 삼 년 전에 먹은 오례송편이 다 올라오네. 너마저 아씨 바치고 들어 앉았으렴, 물도 다시 데우지 아니하게. 너 데운 물 한 바가지 쓴 것이 그리 대단한 죄냐? 이 모양으로 군말을 하게."
(이) "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물이 없길래 없다고 한마디 밖에 아무 말도 아니했읍니다."
(노) "내 귀로 분명히 듣고 말하는데, 아무 소리도 아니 했다고? 그러면 내가 네 모함을 잡는구나? 세가 당당한 네 모함을 잡다가 큰 봉변이나 하자고?"
(이) "에그, 이런 호소를 누구더러 하나? 번연히 아니 한 마을 했다고 저러시니."
(노) "호소, 호소? 왜 호소할 데가 없어 걱정이냐? 마음 알고 뜻 알고 위해주고 아껴주는 영감님 오시거던 고해바치려무나. 말리지 않는다."
금쥐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머리를 빗다가 땋을 겨를 없이 그대로 걷어쥐고 황망히 나와 노파를 보고 모두 다 자기의 잘못한 죄오니 용서하여 달라고 무수히 비는 양을 이월이가 보더니,
"아씨께서 무슨 죄라고 하셔요? 쇤네가 원통히 애매한 소리를 죽으나 사나 발명하고 말자 하였더니, 아씨 낯을 보아 다시 말을 아니하겠으니 어서 들어가십시오."
노파가 더욱 분이 나서,
(노) "이년아, 뉘 낯을 보아 고만두어? 아씨는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아씨, 아씨는 무엇이냐? 아씨 같으면 내 집 구석에 와 이 짓을 아니했을 터이지. 나는 본래 상년이니까 무엇 마른 것이 아씨인지 알지 못하겠다."
금쥐가 노파의 말이 그 지경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눈물만 비 오듯 떨어뜨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니, 노파가 집안 상하 식구더러 모두 분부하기를,
"너희들, 오날부터 금쥐더러 아씨라고 하는 년이 있으면, 내 손에 박살을 당할 것이니 찾을 일이 있거던 이름을 막 불러라."
하고 또 이월을 불러,
"너도 인제는 물지고 불 때는 일을 다 맡아 해라. 그만치 놀고 먹었으면 무던하지, 그것도 역시 하기 싫거든 우리 집에 있지 말고 편히 있을 집을 찾아가거라. 붙들지 아니한다."
하더니 이월의 덮고 자는 이불을 가져오라 하여 제 방 웃목에다 두고, 금쥐 처소에는 들어가 자지도 못하게 하니, 금쥐는 다만 방문을 적적히 닫고 외로이 잠을 자며 며칠을 지내는데, 노파가 금쥐를 불러내고 그 방문을 턱턱 잠그니, 금쥐가 있을 처소가 없어 해가 넘어가도록 밖에서 방황하다가 하릴없이 이월의 자는 안방 윗목에서 같이 거처하더니, 노파가 이것을 가져오라, 저것을 치워놓으라 하여 잔심부름이라고는 아니 시키는 것 없으나, 금쥐는 어찌하는 도리가 없어 오직 하라는 대로 할 뿐이니, 노파가 제 손아귀에 들어옴을 보고 그제는 금쥐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의개그릇을 뒤져, 경지가 연부년(年復年) 동안에 의복차로 보내준 주속 단속을 한 자 유루없이 끄내어다 제 의장에 집어넣고, 금침제구까지 모다 걷어치우는 양을 보고, 금쥐 생각이 여러 가지로 난다.
(주인의 박대가 이같이 자심하니 몇 걸음을 못 나아가 엎드러져 죽더라도 이 집에 있기 싫지마는, 첫째는 자기 부친이 옥중에서 돌아간 철천지원의 소식을 풍설로만 들었는데 진가를 아직도 모르고, 또 그 말이 적실하고 보면 내가 아무쪼록 살아 있어 양지바른 데에 장사를 지내드린 후, 죽어도 죽어야 할 터이요, 둘째는 나이 어린 터도 아니오, 십팔 세나 된 처녀 몸이 대문 밖에만 나서는 날이면 무슨 욕을 아니 볼지 모르겠고, 셋째는 안선달의 오륙 년 공궤한던 본의 없이, 집에도 없는 동안에 그 모양으로 나아가면 후대하던 뜻을 저버림이라.)
하여 하루 몇 번씩 견디지 못할 일과, 지향 없는 설움을 참고 또 참아 어떠한 고생을 하던지 말없이 지내기로만 주장을 삼더라.
금쥐를 위하는 좋은 뜻이 도리어 고생을 재촉하게 되느라고 한루는 경지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각색 좋은 물품을 많이 보내며 노파에게 당부하는 말이,
「보내는 물품을 조판서댁 작은아씨 전에 드리고, 아무쪼록 편히 계시도록 모시고 지내며, 나도 오래지 아니하여 집으로 돌아가겠노라」
하였거늘, 노파가 그 물품을 모두 제 방으로 갖다두고 혼자 생각에,
(내가 지금 조가의 집 계집아이들을 이 지경으로 괄대하였는데, 영감 곧 돌아오면 그 심술에 나를 그대로 둘리가 없으니, 차라리 진작 처지를 하여 저희가 배반하고 간 모양으로 하는 것이 제일 상책이다.)
하고 장과부집으로 분주히 찾아가니, 장과부는 본부 퇴기(退妓)로 행년 오십에 한갓 생애가 남보다 다른 것이 있으니, 그 생애 자본은 별것이 아니라 다만 세치 혀 하나뿐인데, 그 근처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나 누가 종을 팔고 사는 일에 장과부 아니 드는 곳이 별로 없고 장과부가 들어 아니되는 법도 없어, 사람 거간군으로 유명한 마누라러라. 안선달의 마누라 오는 것을 보더니, 벌써 입맛을 쩍 붙게 수작을 건네는데,
"에그,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러지 아니하여도 뵈옵고 의론할 일이 있어 가쟀더니 너무나 잘도 오셨지. 아마 내가 술이나 석 잔 얻어먹을 일이 생기려나보다."
안선달의 노파가 껄껄 웃으며,
(노) "도섭스러운 마누라도 있지. 술 석 잔 먹으려다 뺨 세 번을 맞으면 어떻게 하려누?"
(장) "술을 먹든지 뺨을 맞든지, 그 말은 고만두고, 여쭈어볼 일이 있소. 댁에 말만큼씩한 처녀는 다 두었다 무엇하시려오? 중매나 조 해봅시다 그려."
(노) "그리지 않아도 그런 의논 좀 하자고 내가 왔소."
하고 무엇이라고 했던지 장과부의 늙은 입이 귀밑까지 벌어지며,
(장) "못 거느릴 것은 남의 자식이라오. 나종에 애쓴 공이나 안답더니까? 그런 생각이 있으면 진작 나더러 말쌈하시지. 염려말고 계시오. 차차 사면으로 수소문하리다."
(노) "차차가 무엇이요? 하로가 새론데."
(장) "급하다고 바늘을 허리 매어 쓰리까? 알아볼 곳이 두어 군데가 멀지 아니 있으니, 이따라도 좌우간 가리다."
노파가 집으로 돌아와 장과부 회보를 고대하더니, 거미구에 장과부가 어떠한 여인 둘을 데리고 와 노파와 수군거리더니, 노파가 금쥐와 이월을 차례로 불러 장과부와 인사를 시키고 각각 내어보낸 후 두 여인을 가리키며,
(노) "이 댁은 누구시고 저 댁은 누구시오?"
(장) "저이는 본관 사또댁 차집으로 계신이요, 이 사람은 나의 먼 촌 조카뻘 되는 이라오."
(차) "별로 말할 것 무엇 있소? 사람은 더 볼 것 없이 극가하니까 나는 그대로 가서 여쭙겠소."
장과부가 또 자기 조카라 하는 여인더러,
"자네는 마음에 어떠한가? 내 말이 과히 틀리지 아니하지?"
그 여인이 기꺼운 낯빛으로,
"아무렴 아주머니께서 범연하시겠소? 그 사람도 매우 얌전하여 내 마음에 드는 걸이요."
두 여인이 동행은 하여왔으되, 배포는 다 각각 있어 금쥐와 이월의 선을 본 것이라. 둘이 다 가합히 여기는 양을 보고 노파가 큰 소원이 성취나 된 듯이 한없이 좋아하며 예없던 금쥐와 이월의 칭찬을 대중없이 나온다.
"금쥐는 인물도 묘하고 재질도 좋아, 아무 일을 시켜도 막힐 곳 없이 잘하지요. 이월이는 진일 마른일이 몸에 배어서 세간 살림에는 아조 째였습니다. 내게 있는 아해들이라고 자랑이 아니라, 잘들 데려가시지요. 그러나 금쥐 몸값은 오백 냥은 주셔야 제게 들인 밑천을 건질 것이요, 이월만 하여도 사백 냥은 받아야 보내겠소."
(장) "그 걱정은 다시 말으시오. 오백 냥이 무엇이 많고 삼백 냥이 얼마나 되오? 그렇지만 이월은 내 며느리나 다름없이 되어 가는 것이니 내 낯을 보아 돈백이나 감합시다. 에그, 우리는 어서 가야 내일 일을 준비하겠소. 더 의논할 일은 다시없지요?"
하며 인사 한 마디를 한 후 두 여인과 동행하여 가더라.
이때에 해주 본관이 십칠 세된 딸이 있어, 경성 민승지의 아들과 혼인을 정하여 길례를 행할 날이 시월 보름날인데, 그때는 구월이라 교전비로 보내려 하고 가합한 아해 종을 사려 하던 차, 장과부가 그 소문을 듣고 와서 의론하고, 차집을 보내어 금쥐의 선을 보고 간 것이라. 본관이 차집의 금쥐 칭찬하는 말을 듣더니 얼마쯤 다행히 여겨 교마를 차려 보내니, 노파가 교마 오는 것을 보고 금쥐를 불러내어 보내려 할 때에, 금쥐는 아무 곡절 모르고 있다 불의지변을 당하여 눈물이 비 오듯 하며,
(금) "어데로 가라 하시는지 곡절이나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오며, 또 부득이 갈 일이 있더라도 얼마 아니 되어 바깥주인께서 오시겠다 하니 그때까지나 있다가 좌우간 가는 것이 좋을까 하나이다."
(노) "바깥주인이 누구야? 우리 영감 말이로구나. 영감은 기다려 무엇하게? 너 이렇게 가도록 주선한 일이 모다 영감의 지휘로 된 일인데 내 주장으로 하는 줄 아는구나? 네가 아무리 보고 가려 하여도 너 가기 전에는 영감께서 아니 오신다. 너 가는 데가 별 곳이 아니라, 지금 본관사또가 애기 딸을 두시고 내일 모레 혼인하실 터인데, 그 작은아씨 혼자 보낼 수가 없어 너를 동모 삼아 보내려고 데려가신 단다. 너무 좋아. 우리 집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아무려나 너는 잘 되어 간다. 우지말고 어서 나서라. 가기 싫어 고집하여도 인저는 쓸데없다."
하며 불 볶듯 재촉을 하니, 금쥐가 그 말을 듣고 천지가 아득하고 사지가 절로 떨려 다시 말을 못하고 묵묵히 섰는데, 노파다 달려들어 금쥐의 팔죽지를 와락 잡아다려 교군 안으로 들어 앉히며, 교군 문을 턱 닫아 매더니,
"잘 가 있거라. 영감이 오시면 나하고 같이 가보겠다."
한 마디가 뚝 떨어지자 사자 놈 같은 교군이 오구랑벙거지를 숙여 쓰고, 앞뒤 채를 갈라 메더니 나는 듯이 떠나가니, 이때에 이월이가 그 집에 있는 것 같으면 저의 아씨를 붙들고 통곡도 했을 것이요, 같이 가겠다고 떼도 썼으련마는, 그 날 식전에 장과부가 건장한 교군 군을 마침 등대 하였다가 물 길러 나간 것을 산협 무지한 놈들 과부 동여가듯 하여 저의 아씨의 이 모양 당한 것을 알지도 못하더라.
금쥐가 눈물이 앞을 턱 가려 동인지 서인지 방향도 아지 못하고 교군에 담겨 가더니 한 곳에다 교군을 내려놓으면 장과부가 곁에서,
"이리 나와 문안드리어라."
하며 금쥐의 손목을 잡아 끌어내는데, 허허, 그것 참 외양이 절묘하거던! 너 올에 몇 살이냐?"
금쥐는 그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정신이 아득하여 기둥만 의지하고 섰는데,
(장) "왜 여쭙지 아니 하느냐? 사또께서 네 나를 물으신다."
(금) ".................."
(장) "이애 보게, 대답해라, 어서 어서."
두어 마디를 재촉하더니 제가 대신으로 대답한다.
(장) "이것이 나는 열여덟 살이랍니다. 제가 촌가(村家)에서 자라나서 어데 존전(尊前)에를 와보았습니까? 겁도 나고 부끄러워 말을 못합니다."
(본관) "아무렴, 그렇지 아니하겠소? 여보 부인, 저만만 하면 쓰지 별수 있소? 나 보기에는 극가극가하오."
그 부인이 곁에 앉았다가 그 딸을 부르며,
"효순아. 네가 보아라. 차지할 사람 네 마음에 들어야지, 내 마음에는 가합하다마는 쓸데 있니?"
효순이는 혼인 날이 불원(不遠)하니, 집안사람과 당치 아니한 말하기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지내던 차에, 더구나 자기 시집갈 때에 교전비로 다리고 갈 하인을 사왔다 하니까, 아무리 모친이 묻는 말씀이기로 무슨 대답을 하리요? 한갓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더라. 그날부터 금쥐더러 효순의 침실에서 같이 자게 하였는데, 누가 보는 데는 말 한 마디 못하였거니와 하루 이틀 지나 낯도 익을뿐더러 아무도 아니 보고 단둘이 있어서야 궁금한들 그대로 있을 리가 있으리요?
(효) "이애, 너 왜 그렇게 울기만 하니? 내 드난하기가 싫어 그리하니? 몸을 자매하지 않으려면 모르거니와 이왕 그렇게 된 일에 울 것이 무엇 있니? 너의 부모가 다 있으며 올에 몇 살이냐?"
(금) "............."
효순이는 금쥐가 대답에 없을수록 더구나 갑갑해서 성화같이 묻는데, 세상에 모질어 죽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목숨이라, 금쥐가 이 욕을 당하면서도 살아 있어 혼자 생각에,
(고생을 하기로 안선달의 집에 있는 것보다 더 못할 것 무엇 있으며, 죽지 못하고 생명이 붙어 있는 지경에 아무려면 어떠하리? 종에서 더한 종질을 하더라도 가 잇을 민승지집이 서울이라니, 부친의 생사간 진적한 기별을 듣기 쉽겠은즉, 욕을 참고 있어 보리라.)
하여 슬픔을 억제하고 묻는 말도 대답하고 시키는 일도 거행하더라.
본관의 성(姓)은 윤(尹)씨라, 위인이 인자하고 도량이 넉넉하여, 조야에 명예가 자자한 까닭에, 남북촌 공천으로 해주 판관(判官)을 하여 도임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 정사를 어찌 잘했던지, 목비(木碑)가 거리거리 섰으며, 송성(頌聲)은 사람 사람이 떠드는 터인데, 아무라도 돈주고 종 사온 터에 거간한 사람에게 별로 상줄 것이 없으련마는 특별히 행하를 후히 주어 보내고 금쥐를 불러 이름을 물으니, 금쥐가 은휘할 것 없다 하여 성은 조가요, 이름은 금쥐라고 한데,
(윤) "금쥐라 하는 이름이 해롭지 아니하니 다시 고칠 필요가 없다. 이애 금쥐야, 작은아씨 모시고 새댁에 가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말고 심부름을 잘해 드리어라."
금쥐가 마음을 맺어 먹고, 그날부터 쓰레질도 하고 세숫물도 놓아 드난을 착실히 하더니, 하루는 마루에 걸레질을 하다가 본관이 안으로 들어오며 신광사 뒷산에서 사람 죽인 도적을 잡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더니, 별안간에 눈물이 비 오듯 하거늘 본관이 이상히 여겨서,
(본) "금쥐야."
(금) "네"
(본) "너 도적 잡았다는 말을 듣고 왜 그렇게 우니?"
(금) ".............."
본관이 금쥐의 대답 아니하는 것을 보더니 더구나 의혹하여 처음에는 지날결에 묻다가 나중에는 단단히 채근을 하러 든다.
(본) "너 우는 양이 심상치 아니한 일인데 어찌하여 물어도 대답을 아니하느냐? 조금도 겁내지 말고 바른대로 말을 하여라."
하며 금쥐가 잡혔다는 도적놈의 친척이나 되어 그리하는 듯이 지목을 하여 물으니, 금쥐가 사세부득이하여 저의 부친이 평양감사로 있을 때에 가산 새별령에서 살인이 났는데, 그 살옥으로 무한 신고하다가 필경 도적놈의 소위를 알아내던 자초지종의 그때 근경을 역력히 이야기하며, 다만 양덕 군수로 검관 맡기던 일은 혐의쩍고 부끄러워 은휘하더라. 본관이 깜짝 놀라 와락 달려들어 금쥐의 손목을 턱 잡더니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며 조판서의 별호를 부르면서,
(본) "네가 만송이 딸이란 말이냐? 어데로 어떻게 되어서 이곳에 와 있더냐? 너의 집에 그 지경이 된 후에 필경 일 점 혈육이 업고, 설혹 있더래도 생명을 부지 못하였을 줄 알았더니 너를 보니 너의 부친 생각이 더욱 난다. 여보 부인, 만송 조판서 왜 모르오? 저 애가 그 양반의 딸이라오."
(부) "우리 집에 가끔 오던 키가 후리후리하구 신수좋은 조판서 말씀이요?"
(본) "옳소, 바로 알았소."
(부) "그러니까 금쥐가 그 양반의 딸이야요?"
본관이 금쥐를 다시 여겨보다가,
"금쥐야, 우지 말고 자세한 이야기 좀 해라. 네 어떻게 되어서 이곳에 와 있었더냐?"
금쥐가 샘솟듯 눈물이 쏟아지며 느끼는 말로,
(금) "저의 부친 구나(拘拿)하시던 날, 하늘을 부르짖어 울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부리던 하인 이월이가 없고 모란봉 밑에 가 숨어, 손을 주무른다 발을 주무른다 하여 간신히 피어났는데, 안선달 경지라 하는 사람이 구제하므로 생명이 부지하여 있었습니다."
(부) "안선달이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냐?"
(금) "해주 부하에 있는 장사하는 사람인데, 비리(非理)의 송사를 만나 평양 옥중에 갇혀 있는 것을 저의 부친께서 공결(公決)하여 백방하신 일이 있더니, 그 일을 잊지 아니하고 집안사람도 도망하는 때에, 일부러 찾아왔다가 모란봉 밑에서 죽으려 하는 양을 보고 지성으로 만류하여 자기 집으로 다리고 와서 이때까지 극진히 후대 입었더니, 안선달은 오륙 삭 전에 장사를 나아가고 그 노파만 집에 있는데, 제가 용렬, 미거하므로 노파의 눈 밖에 나서 일신을 용납지 못하였나이다."
본관이 듣기를 다하더니, 천연히 눈물을 내리며 한숨 한 번 길게 쉬고,
(본) "천도(天道)도 무심하다! 너의 부친같이 청덕하신터에 근 십년 감옥소 구류가 되어, 혈혈히 약한 딸로 동서표박(東西漂泊)케 하니, 어찌 공변된 이치가 있다 하겠느냐? 이애, 걸레질 고만두고 저리로 가자."
본관이 금쥐를 앞세우고 방으로 들어오더니 부인더러 말하기를,
"내가 조판서와 누대세교(屢代世交)는 고사하고, 앞뒷집에서 자라나며 동문수학(同門受學)을 하여 지내던 정의가 친형제보다 못할 것 없었는데, 지금 그 친구의 딸을 애휼(愛恤)하지 않으면 비단 의리에 차마 못할 뿐 아니라, 이 다음 그 친구가 부견천일하는 날이면 무슨 낯으로 서로 대하겠소? 오날부터는 금쥐를 우리 효순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불쌍히 여깁시다."
또 효순을 부르더니,
"효순아, 금쥐가 조판서 어른의 딸이란다. 전에는 모르고 하대(下待)를 하였거니와, 지금부터는 형으로 대접하여라. 너보다 나이 손위가 된다."
부인이 금쥐의 고생 겪던 정경을 듣고, 자기의 친척이 그 지경이 되나지지 않게 가슴에 사무치게 가엾은 생각이 나서 자취없는 눈물을 흘리며,
"에그, 불쌍한 일도 세상에 있다. 우리도 십여 세 때를 지내보았지만 그때 무슨 철을 알아, 부모 곁에서 응석이나 할 시절인데? 팔면부지 모르는 강산에서 칠팔년을 지내느라니, 그 고생이 오작하였을까! 영감, 금쥐를 아조 우리 딸로 정합시다, 저도 시스럽게 아니하게."
(본) "부인, 그 말쌈이 매우 좋소. 고인의 자식이 곧 나의 자식이라는 옛말도 있으니, 조판서의 딸이 우리 딸이나 다름 있소? 금쥐야, 인저는 우리 내외더러 호부호모(呼父呼母)를 하고 효순이는 네 아오로 알아라."
이 때 금쥐는 윤판관 내외의 이르는 말을 들으니 자기 친부모를 만난 듯이 일변 반갑고 일변 설워 잠잠히 앉아 울기만 하는데, 영리하고 인정많은 효순이는 그 부모의 뜻을 순종하려 할 뿐 아니라, 동무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형님 형님하며 금쥐를 동기(同氣)같이 대우하더라.
흐르는 물같이 쉬운 것이 세월이라. 바위 위의 단풍은 고운 빛을 물들이고, 뜰 아래 국화는 새 향기를 머금어 어느덧 구월 상순이 되어 효순의 혼인날이 점점 격일하여 오는지라, 본관이 그 부인과 의론하되,
(본) "효순의 혼인을 물리자고 새 집에 편지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 비단 데리고 갈 교전비도 아직 얻지 못하였을 뿐 외라, 일 년이나 손위되는 금쥐를 먼저 출가치 아니하고 효순의 혼인을 하면 우리의 의리에 합당치 아니한 일이니, 아무쪼록 금쥐의 혼인을 지낸 후에 우리 효순은 출가합시다."
(부) "그러시고 보면, 새 집에 편지도 하려니와, 하루 바삐 금쥐의 혼처를 구하여 보시구려."
(본) "나도 그 생각이요마는, 그 일이 대단히 어렵소 그려. 문벌이든지 가세든지 가히 통혼할 만한 집안들은 만송의 저 지경된 것을 큰 흠점으로 여기고 허혼치 아니할 것이요, 문호가 상당치 못한 곳에는 내가 통혼하기 싫으니 그아니 양난한 일이요? 아무려나 새 집에 기별부터 하여놓고 서서히 주선합시다."
하고 서찰 한 장을 즉시 써 아놈 시켜 서울로 보낸 후 답장 오기를 기다리는데, 윤판관은 천성이 찬찬하여 무슨 일을 당하면 별 생각을 모다 하여보는 터이라, 민승지가 자기 편지를 보고 무엇이라 답장할 일까지 미리 생각하여 보다가 별안간에 입맛을 연해 다시며,
"허허, 내가 편지를 잘못했구! 이런 정신도 세상에 있나? 그렇게 까맣게 잊었더란 말인가? 민승지가 나를 오죽 미거한 사람으로 알까? 응, 그거 아니되었다."
부인이 괴상히 여겨 본관더러 묻되,
(부)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오? 편지에 사연을 잘못하셨나요? 여간 잘못된 사연이 있기로 친한 사이에 눌러 보겠지. 대수롭지 아니한 일로 미거히 여길 리 있을까요?"
(본) "편지사연 좀 잘못되었기로 그것이야 큰 걱정될 것 있소마는, 민씨집에 선세 혐의로 조씨집을 여러 대 내려오며 절교를 한 터인데, 이것을 까마니 잊어버리고 편지에 조판서가 무죄하고 그 집의 직신(直臣) 자손이요, 금쥐가 불쌍하다, 이런 말을 모다 하여가며 혼일(婚日)을 퇴정하자 하였으니 민승지가 그 편지를 보고 나더러 정신있는 사람이라 하겠소?"
이 같이 심려하며 좌우간 하인 돌아오기만 고대하더라. 민승지 집에서는 혼인날이 불원하여 오니까 치행을 차리느라고 분주불가한 차에 새댁에서 하인이 왔다 하니까 무슨 기별이 있는지 궁금하여, 민승지가 말 한 마디 물어볼 겨를 없이 편지부터 떼어보니, 그 사연이 간곡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동하겠더라. 하였으되,
"남자 장가들이고 여자 시집보냄에 부모의 마음이 비록 간절하나 내 일보다 남의 일을 먼저 함은 고명한 자의 힘쓸 바라. 근자에 천식(賤息)의 출가하기 위하여 교전비를 사왔더니, 그 용모와 행동이 극히 안상하기로 심중에 이상히 여겨 자세히 내력을 물은즉, 곧 전 평양감사 조공의 딸이라. 조공의 집에 화난이 있은 후로 도로에 유리(琉離)하다가 한문(寒門)에 팔린 바 되었으니 슬프다! 고구(故舊)의 딸은 나의 딸과 일반이라. 이 여자의 연기가 이미 당혼하여 천식보다 오히려 수년 위가 되었으니 비단 하인으로 부리지 못할 뿐 외라, 천식보다 먼저 출가함이 의리에 온당한지라, 복이 방장 조가녀자(趙家女子)를 위하여 가랑(佳郞)을 구하는 중이오니 가랑을 구하는 대로 천식의 혼수로 먼저 이여자를 출가코자 하여 이같이 간구하오니 혼인을 얼마간 물려 다시 책정하심을 바라나이다.
민승지가 보던 편지를 척척 접어 손에 들고 분주히 웃옷을 입더니, 맞은 대문 낸 집으로 건너가 안마당에 가딱 서며,
(민승지) "춘섬아, 너 나아가 나으리마님 어서 들어오시라고 여쭈어라.'
(춘) "녜."
춘섬이가 대답 한 마디를 영리하게 하고 사랑 중문 앞에 가,
(춘) "나으리마님, 작은댁 영감께서 여쭈십니다."
(나으리) "작은댁 영감이 어디서 부르시더란 말이냐?"
(춘) "지금 댁 아낙에 오셨어요."
(나으리) "오냐, 들어간다."
하더니 춘섬의 뒤미처 그 집 주인영감이 들어오며,
"왜 개불이 혼행에 의논할 일이 무엇이 있나?"
민승지가 손에 들었던 편지를 보이며,
"형님, 이것 보시오. 조판서집 규수가 해주에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랄듯이 반기어,
"응, 무엇이야? 조판서의 딸이 어데가 있어?"
하며 편지를 받아보는 자는 그 집 주인이자 민승지의 백씨자 갈려온 양덕군수라. 민양덕이 조판서 그 지경된 후에 몰린 집과 혼인할 필요가 없다 하여 다른 집 규수와 통혼하려 한즉 말불이가 저사하고 조씨의 집이 아니면 장가들지 아니하겠다고 고집하여 때려도 무가내하오, 달래도 듣지 아니하니, 하릴없이 인륜이나 폐치 말자고 조씨집 규수의 종적을 사면 탐지하나 생사존망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조씨의 집과 결혼하려던 혐의로 군수까지 갈려 서울집에 와 한가히 있는데, 그 아우 민승지와 연상약(年相若)하여 같이 늙어가는 터이라. 우애가 남다르게 있어 손아래 아우라 할 것 없이 호소를 하여가며 대소사를 모두 의논하는 고로, 말불의 혼인 일을 형제 모여 앉으면 걱정을 하던 차에 이 기별을 듣고 천신 만희하여,
(양) "세상에 희한한 일도 있네. 나는 그 규수가 죽었거나, 요행 아니 죽었더래도 무슨 꼴이 되었을지 몰랐더니 해주로 가 있자기도 뜻밖이요, 윤판관이 친녀(親女)같이 여기자기도 뜻밖일세."
(승) "글쎄올시다. 그 규수가 아무리 해주로 가고 윤판관이 아무리 친녀같이 여기기로, 또 우리와 사돈을 정한 터이 아니면 이런 편지를 보냈으리까? 그 규수는 말불이와 천생연분인가 보이다. 형님, 해주에게 답장을 어떻게 하랍니까?"
(양) "나더러 물을 것 있나? 내 마음에는 구태여 그 집과 혼인할 것 없거니 하였더니, 그놈이 일향 고집을 하니 부씩 우기자기도 딱하고, 또 제 말도 과히 그르지 아니하니 자네 생각에는 어떠한지? 내 소견에는 기왕 정하였던 혼인이니 그 규수와 성례시키는 것이 무방할 듯하이."
(승) "네, 형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한 번 정한 혼인을 그 집이 불행한 일이 있다고 개론을 하면 원래 정당치 못한 일이오니 말불의 주의대로 하십시다. 이것저것 볼 것 있습니까? 규수 하나이 제일이지. 규수 범절은 형님도 일상 자랑하셨지요? 그러면 그대로 답서하겠습니다."
하고 자기 집으로 건너오더니 편지를 그 길로 써 해주서 온 하인을 불러내어 주더라.
이때 윤판관은 민승지가 무엇이라고 회답을 할지 몰라 정히 궁금하던 중에 서울 갔던 아오놈이 뜰 아래 와서 문안을 드리며 서간을 올리거늘, 윤판관이 편지를 받아 들고 여러 가지로 사념을 하며 떼어보니 깔깔 웃으며,
"우리 사돈은 가위 인후 장자로구! 금쥐를 불쌍히 아는 품이 나보다도 한층 더한걸."
하며 안으로 들어가 부인을 보고,
(윤) "이런 갸륵한 일도 있소? 민승지의 답장이 왔는데, 전일 혐의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도리어 금쥐와 혼인을 하자고 하였으니 이 편지를 좀 보시오."
(부) "우리나라 글도 아니고 청국(淸國)글로 쓴 편지를 내가 어찌 볼 수 있나? 새겨보아 들리시구려."
윤판관이 편지를 다시 접어 활활 펴들더니 내리 읽는데,
"혼인은 인륜의 큰일이라 그 기약을 진퇴키 어렵고, 환난은 인생의 뜻 못할 바라, 그 구제함을 등한치 못하나니, 사돈은 친구의 딸을 딸로 아는데 복은 어찌 사돈의 맘으로 맘치 아니하리요? 높으신 편지를 두세 번 볼수록 사람으로 하여금 슬픈 생각이 사모치게 하는 도다. 복의 불초한 조카가 연기 장성하오니 그 여자의 아름다운 배필을 타문에 구치 말으시고, 정한 기약을 변통할 것 없이 일일의 쌍경(?慶)을 이루기를 축수하나이다."
부인이 듣기를 다 하더니,
(부) "에그, 세상에 고마운 양반도 보았소. 그대로 하고 보면 하로에 두 혼인을 하여, 저희 형제가 시집에 가서는 사촌동서가 되겠지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요. 그와 같이 하자 답장하시고 혼인 지낼 제구나 차리십시다."
(윤) "아무렴, 나도 그리하자 하오마는, 대관절 금쥐를 불러 한 마디 이르기나 하고서 답장을 하겠소."
하고 금쥐를 오라 하여 앞에 앉히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애 금쥐야, 네가 이미 과년하여 불가불 출가를 하여야 할 터인데 네 아오 효순의 시아버지될 민승지가 그 조카가 있다고 너와 혼인을 정하자 하였으니 네 뜻에는 어떠하냐? 네 말을 듣고 답장코자 한다. 친정에서 너희들이 친형제같이 지내다 시집에 가서도 동서가 되겠어니 여북 좋으냐?"
금쥐가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고개를 수그리더니, 무릎 위에 눈물이 자취 없이 떨어지거늘, 윤판관이 바라다보며 한숨을 쉬더니 이세(理勢)를 따져 이르는데, 정작 금쥐의 뜻이 있는 말은 한 마디도 못하더라.
"이애, 네 마음은 내가 다 안다. 너의 부친이 아니 계신데 혼인언론을 하니까 그리하는구나. 권도라 하는 것이 이런 때 쓰느니라. 너의 부친께서 내일 나오신대도 아즉은 기한이 없고, 네 나은 과년하였으니 한 해 두 해 하다 손을 넘기면 인륜의 큰 낭패가 아니냐? 내가 너를 낳지만 아니하였다 할 뿐이지 너의 부친이나 다를 것이 무엇 있니? 오늘 네 혼인에 내가 주장하는 것이 곧 너의 부친의 몸받아 하는 일이나 일반이다. 민씨집이 문벌도 좋고 신랑도 잘 두었단다. 혼인에 가세(家勢) 의론하는 일이 오랑캐의 풍속이라 하지마는, 그는 남 집이 근래는 수령낱도 지내서 간구 하게 지내지도 아니한다더라."
금쥐가 곰곰 생각한즉 부끄럼을 인하여 저렇게 지성스럽게 이르는데 속의 말을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면 인사 도리가 아니거니 싶어,
(금) "아버님, 다른 말씀은 다 거역지 아니할지라도 이 일은 봉행치 못하겠습니다. 첫째는 어버이께서 하늘을 다시 보신 후에 의론할 일이요, 둘째는........."
(윤) "첫째라는 말도 기특은 하다마는, 내가 아까 한 말과 같이 권도를 불가불 써야 하겠고, 또 둘째는 무엇이냐? 마저 들어보자."
금쥐의 낯빛이 붉어지며 수삽한 목소리로,
(금) "이 다음에 어버이께 들으시면 아시려니와 이미 혼인을 언약하신 곳이 있는 듯하온즉, 처녀로 늙을지언정 타문에는 자기 못하겠사오니 다시는 말씀 마옵소서."
(윤) "나는 그런 줄은 몰랐구나. 정혼한 데가 누구의 집이라더냐?"
(윤) "그는 차차 알아도 늦지 아니하다. 위선 이 사연을 민승지에게 통기를 하여야 하겠다."
하고 금쥐 하던 말대로 서울로 기별하였더니, 민승지가 그 백씨더러,
(승) "형님, 그 규수의 집심(執心)이 무던합니다. 필경 형님께서 양덕 군수로 계시던 것을 모르는 것이올시다."
(양) "당초에 자네가 편지부터 모호히 했지. 이왕 정혼하였던 실정은 아니 말하고 새로 통혼하는 것같이 하였으니, 그 영롱한 여자가 어쩌니 청종(聽從)할 리가 있나? 내가 양덕으로 있을 때에 저의 부친과 서로 만나, 혼인언론하던 자초지종을 자세히 다시 기별하게."
민승지가 대답을 하고, 그 자리에서 만지장서를 써서 해주 하인을 주어 보냈더니, 윤판관 내외가 희한히 알뿐더러 더구나 효순이는 금쥐와 한 집으로 가는 것이 어찌 좋던지 밤낮 웃음빛이러라. 금쥐가 민승지의 조카는 곧 말불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다시 이론(異論)은 아니하고 있으나 그렁성하느라니 그 부친의 생각이 더구나 나서 남의 집이 아니오, 내 집 구석 같으면 시시로 땅을 두다리고 방성대곡이라도 할 지경이러라. 남의 말 전파 잘하기는 예제할 것 없이 시골이라, 금쥐가 종으로 팔려왔다 서울로 시집가는 소문을 모를 사람 없이 떠들어서, 혹 윤판관같이 후덕한 양반은 세상에 다시 없겠다고도 하며, 혹 고생이 지나면 낙이 온다더니 조소저를 두고 이른 말이라고도 하면서, 다른 일은 못 볼지라도 그 잔채 구경은 하여야 하겠다고 제각기 벼르는데, 용당포 안마을 있는 여인 하나이 그 소문을 듣더니, 엊그제 시집온 계집으로 잔부끄럼 한 점 없이 제 서방더러 서울로 살러 가자고 부득부득 조르며, 밥도 아니 먹고 울기만 하는 여인은 별사람이 아니오, 금쥐 수하에 잠시 아니 떠나던 이월이라. 이월이가 물 길러 나아가다가 영문도 모르고 끄들려 그 집으로 와서 억지 혼인을 하였는데, 제 생각에 속아 왔든가 알고 왔든가, 잘 왔든지 못 왔든지, 이 왕 서방을 한 번 얻은 터에 싫다고 야단을 친대도 제 망신만 되지 소용이 없거니 하여 불평한 사색은 조금도 아니 뵈고, 은근히 제 서방에게 사정도 하고 달래기도 하여 저의 작은아씨의 소식을 탐지하다가, 해주 본관의 주선으로 민양덕 집을 찾아 서울로 시집보낸다는 사실을 낱낱이 들은 후로 제 서방더러,
"여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고 데려왔소? 조판서댁 하인인지 아마 알터이지요? 안선달의 마누라가 불량한 뜻으로 우리 댁 작은아씨와 나를 각각 팔아먹더니 천우신조하여 본관사또가 작은 아씨를 의녀(義女)로 삼아 민양덕댁을 찾아 혼인을 지낸다 하니, 내가 몰랐으면 할 일 없거니와 우리 아씨 계신 곳을 알고서는 아니할 말로 종노릇을 하신대도 어데까지던지 찾아가 모시고 지내려고 심중에 작정한 터이오. 생각하요 보오, 상하는 고만두고 한 반하끼리라도 손목을 맞잡고 그 고초를 겪다가 어데로 간다 말 한마디 못하고 자취도 없이 이 모양으로 와 있으니, 내 마음이 이러할 제야 은의가 세상에 다시없는 우리 아씨께서 오작하시겠소? 내일이 잔채날이라니 나는 바로 읍내로 들어가 혼행을 따라 올라갈 터이니, 그 동안 우리 집도 서울로 이사를 하시오. 아무리 나같이 천한 몸이기로 그만 경계를 모르고 남편의 지휘를 좇지 아니하리까마는, 이 일에 당해서는 내 뜻대로 아니하여주면 앞 강물에라도 눈 한 번 딱 감고 뛰어들어가면 세상을 그만 잊어버린 귀신이 될터이요."
이월의 서방이 나의 삼십이 불원하도록 계집을 못 얻고 홀아비로 지내다가 천행으로 이월을 데려온 후, 일동일 정을 하자는대로 시행하는 처지라, 그 죽기로써 결심하는 양을 보더니 겁이 더럭 나서, 일변 이월은 읍내로 치행하여 보내고 일변 세간짐을 동여 서울로 반이를 한다.
이월이가 관사에를 당도하니 너르나 너른 마당에 차일을 구름같이 치고, 남녀노소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백두산이 되었는데, 신랑 둘이 쌍으로 은안(銀鞍)준총을 타고 들어오더니 신부도 둘이 쌍으로 나와 각각 서로 교배하는 거동을 보고 사람마다 희한하니 신통하니, 신부들도 어여쁘거니와 신랑들도 준수하다거니, 윤판관 인품도 거룩하거니와 조판서집 의리도 장하다고 한두 마디씩 칭도(稱道)치 아니하는 자이 없더라.
사람이 세상에 나서 그 중 제일 좋은 일이 무엇이냐,
하면 동서양을 물론하고 남자되어 장가들고, 여자되어 시집가는 날이라. 여간 걱정근심이 있더라도 그날은 모두 봄눈 슬 듯 없어져 남 보기에 드러내 놓고 웃지는 못하되, 속마음으로는 은근히 기뻐 얼굴에 자연 나타날 터이나, 지원극통한 설움이 뼈끝마다 맺혀 좋아도 좋은 줄 모르고 기뻐도 기쁜지 모르는 사람은 금쥐라. 교배하는 자리에 나와서 볼품 사납게 쪽쪽 울지는 아니하나 도화(桃花)같이 곱게 성적한 얻굴에 이따금 진주 같은 눈물 흔적 있으니, 그 많은 사람이 누가 가엾은 생각이야 없으리요마는, 이월이는 저의 아씨 하는 양을 보고 구곡간장이 녹는 듯하여, 남이 흉을 보는지 욕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고 한 편 구석에서 느껴가며 우는데, 윤판관이 술이 반취하여 두 딸 두 사위의 교배하는 것을 보려고 얼굴 화평한 기색이 뚝뚝 듣게 빙그레 웃으며 들어오다가 이월의 거동을 보고,
"이게 웬 계집사람이 남의 경사에 와서 울고 섰서? 어, 괴상스러워라! 설움이 있으면 제 집에서 울든지 마든지 할 것이지. 이애, 바위 거기 있느냐? 이 계집사람 더러 바삐 나가라고 일러라."
바위는 본래 천진의 놈이라. 상전의 분부라면 소금섬을 물로 끌래도 시각을 머무르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터이라, 대답 한 마디를 예비하고 있던 것처럼,
"예의."
하더니 와락 달려들어 눈을 불량스럽게 지리떠 이월을 흘겨보니,
"여보, 어데서 온 아지먼네요? 거기 서 있지 말고 나아가오. 그래고 가지 아니하고 왜 그저 있소? 나으리 마님께서 꾸지람하시오. 정 아니 가면 끌어낼 터이야."
이 모양으로 불쾌스러운 목소리로 딱딱거리니, 이월이가 울음끝이 쑥 들어가 벙벙이 있다가 윤판관의 앞으로 가 고개를 다소곳하고,
(이) "쇤네는 조판서댁 하인이올시다."
(윤) "조판서댁이라니, 어떤 조판서댁?"
(이) "평양감사로 계시던 조판서대감댁이올시다. 쇤네가 댁 작은아씨를 모시고 안선달집에 있었읍니다."
(윤) "오, 그러면 네 이름이 이월이냐?"
(이) "녜, 쇤네가 이월이올시다."
(윤) "네가 이월이면 온다 간다 말 없이 어데 가 있었길레, 종적을 알 수 없다고 너의 아씨가 애를 그렇게 쓰게 하였느냐?"
하면서 바위를 다시 부르더니,
"이애, 가만두어라. 조판서댁 하인이란다. 이월아, 거기 있다가 작은아씨 초례 다하거든 들어가 보아라."
금쥐가 이월을 뜻밖에 만나 반가운 마음이 한량이 없어 어데로 가 있었더냐, 어찌 알고 찾아왔느냐, 차례로 묻는데 이월은 무슨 죄가 그리 있는지 말끝마다 살기르 바랄 수 없으니, 죽고도 남느니 하며 소경력 일이 모두 제 죄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 "쇤네가 천하에 못된 년이올시다. 아씨께서 번연히 고생을 당하실 줄 알며 아무리 제 마음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앙탈 한마디 할 새 없이 붙들려갔지 요마는, 죽기가 그리 어려운지 아씨께서 어떻게 계신지 도무지 모르고도 모진 목숨을 끊지를 못하였읍니다."
(금) "나는 아모 고생한 일 없이 잘 있었다마는 너는 어느 때 어느 곳으로 가 있다 어떻게 나 여기 있는 줄을 알고 찾아왔느냐?"
하며 금쥐는 자기 소경사를 말하고, 이월은 저의 소경사를 말하니, 만일 소설 잘 짓는 대방가(大方家)이 곁에 있어 듣게 되면 무한 처량하고 무한 통분하고 무한 재미있는 소설 한 권이 넉넉히 될러라.
삼일신방을 지낸 후, 신행을 차려 서울로 갈새, 윤판관이 수유(須臾)를 얻어 후행으로 영솔하고, 이월은 제 색리 안동하여 교전비 모양으로 따르더라. 남녀 물론하고 인심만 잃으면 없는 흉도 절로 나되, 그 흉보는 말을 남편의 귀에는 좀처럼 아니하나니, 이는 모두 지조가 있고 무던한 사람의 말이지, 그중에 일 좋아하고 말 헤푼 자는 자는 동리마다 의례히 한 두 사람씩 있어, 입에 좀이 쑤시어 참지 못하고, 바로 대하여 이야기를 하든지 빗대두고 흉귀덕을 보든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일을 하나 아니 남기고 기어이 그 남편이 알도록 하는 법이다. 안선달이 장사하던 일을 대강대강 다 보고 몸에 맞을 만한 필목과 입에 맞을 만한 물품을 돈을 아끼지 아니하고 갖가지로 장만하여 조판서댁 작은아씨에게 드리려는 정성으로 부담바리에 툭 터지게 넣어 배에 싣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다가 용당포 어귀에 막 당도하여 동리 친구를 만나는데로 자기 집 안부를 묻는데 아무라도 의례히,
"여보, 우리 집에서 별고나 없읍더니이까? 언제 들르셨읍더니이까?"
할 터인데, 경지는 오장에서 우러나오는대로 조금 변사없이,
"여보, 우리 집에 계신 조판서 댁 작은아씨 안녕하시답더니이까? 우리 마누라가 동리사람과 싸움이나 또 아니해요?"
이 모양으로 물으니 사람마다 좋은 말로 아무 일 없다고 할 뿐인데, 그 중 몇몇은 어름어름 귀에 거쳐 들리도록 대답을 하니, 경지가 의심이 버썩 나서 그자를 어르고 달래어, 금쥐의 종, 상전을 팔아먹던 일로, 금쥐가 윤판관의 의녀가 되어 서울로 시집간 일을 역력히 듣고서, 분이 상투끝까지 나서 물푸레 작대기 하나를 튼튼한 것으로 골라가지고, 자기 집에 들어가는 길로 마누라년을 대매에 쳐죽이려고 서둘다가, 다시 한 번 생각을 한다.
(그 년의 죄가 열 번 죽어 싸고 죽이기도 어려울 것은 없지마는 개 같거니 돝 같거니, 인명을 살해하며 조판서대감 덕택은 갚기도 전에 내가 위선 무사치 못할 것이요, 그리하느라니 왁자지껄하여 그 댁 아씨 들으시기에 괴란하기만 하실 터이니, 그까짓년 논두렁을 베든지 밭두렁을 베든지 도무지 상관할 것 없이 이 길로 내쫓고 서울로 올라가 조판서대감 옥바라지나 해들려 내 도리를 다해 보겠다.)
하고 노파더러 수죄한 후, 친가로 쫓아보내고 세간즙물을 공박 (公拍)하듯 손쉽게 팔아, 노자쓸 돈 외에는 모다 경환(京換)을 얻어 부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올라가 감옥 근처에 사처를 정하고서, 정리(廷吏) 이하 압뢰(狎牢)까지 돈도 주고 술도 먹여 정분이 썩 두텁게 친숙하여, 재판장이나 판사, 검사의 분부는 거역할지언정 경지의 소청은 여율령 시행할만치 되어, 물부에 샐 틈 없이 잡인을 엄금하건마는, 경시는 무상출입을 하며 조판서의 공궤(供饋)를 하는데, 그리하느라니 경지가 민양덕의 집에도 찾아다니고, 말불이가 경지의 처소에도 가끔가 밤낮 공론이 조판서 감옥서에서 나오게 할 운동이라.
(말) "나는 안선달 보기에 부끄럽소. 안선달은 남이언만 우리 장인을 위하여 이같이 하는데, 나???ㄴ 그 양반의 반자(半子)가 되어서 아무 변통도 못하고 있으니."
(안) "별말씀을 다 하시지요. 세상에 남의 사위가 모다 서방님 같으시면 딸 낳았다고 섭섭할 것 무엇 있습니까? 저야 아무리 남이기로 그 대감 신세가 골육보다 더하와 죽기 한하고 저버릴 수 없는 터이올시다."
(말) "그 말 저 말 할 것 없이 우리 장인을 세상에 다시 나오시게 할 의론이나 합시다."
(안) "밤낮 바라고 축수하는 일이 그 일이지마는, 사삿힘으로야 하는 도리가 있습니까?"
(말) "내 말 들으오. 하는 도리가 있소. 지금 정부 대관이 다 한모양이지마는 그 중 법부(法部)대신은 연전(年前) 경장(更張)하기 전에 다년(多年) 형조판서로 있어 죄가 있고 없고 걸려만 들면 반찬단지나 만난 듯이 그 사람의 가산이 있는대로 빨아먹기로 유명하던 분이라, 제 버릇 개 주었겠소? 나의 장인 대감이 아시고 보면 열, 스무 길 뛰겠지마는 영감이나 나 되어서야 반계 곡경(盤溪 曲徑)을 얻어서라도 하루바삐 나오시게 하는 것이 옳지 않소?"
하고 귓속말을 한참 동안이나 하니까 경지가 무릎을 탁 치며,
(경) "옳소, 서방님 말이 꼭 되었소. 연소한 양반이 의사도 스럽지. 늙은 나는 애만 쓰면서 그대 생각도 못했소 그려. 걱정 말으시오, 내 힘 자라는대로 해볼 것이니, 그 뒷일은 서방님이 두 번 마시오."
(말) "내 부탁은 두 번 마시오."
하더니 집으로 돌아와 자기 부친에게 그 사실을 고하니, 민양덕이 덤덤히 앉았다가 입맛 한 번을 다시고,
"오냐, 네 말이 근리(近理)하다. 세상 되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그 생각이 없지 아니하였다. 안선달더러 기왕 운동을 하려거든, 어서 진작 하여달라고 부탁하지. 좀 있으면 그도 저도 못해 보게 될 터이다. 그 뒷일은 네말대로 다 하여주마."
말불이가 자기 부친의 허락을 듣더니, 희색이 만면하여 그 아낙 금쥐더러 안선달 운동하는 일과 그 일 성사한 후에 자기들이 어떻게 하자는 공론을 모두 하고 좋은 소식을 날마다 고대하더라. 웃사람이 재물에 욕심이 있으면 아랫사람은 차포오졸 더한 법이라. 경지가 어떻게 조하를 부렸던지 법부대신댁 아금니로 손꼽아가는 긴객하더니, 며칠 안되어 처교주본(處絞奏本)을 드리려고 잔뜩 작정하였던 법대의 마음이 별안간에 어쩌면 그렇게 선심이 났는지, 경장 이후에는 연좌가 없으니 불가불 짐작을 하여야 가하니, 충절이 특이한 명류의 후예를 심상한 무리와 같은 율(律)을 쓰기 어려우니 하여 일변으로 정부 각 대신의 공론을 돌리고, 일변으로 천폐에 상주하여 조아무를 무죄백방하라고 선고가 되었는데, 조판서가 근십년 구류가 되어, 오늘 죽이느니 내일 죽이느니 하다가 방면이 되어 세상구경을 다시 하였으니, 아무리 자기 집은 터무니없이 되었지만 안선달의 집에 사처를 정하고라도 며칠 몸조리도 할 것이요, 친척 붕우의 위문과 치하도 받을 것이어늘, 어쩐 곡절인지 조판서 종적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말불이 내외와 안선달까지 다 도망을 하였더라. 그 때 듣고 보는 사람들이 누가 아니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리요? 사랑 사랑이 모여 수군수군하며 날마다 묻는 말대답하기에 민양덕 입에 불이 날 지경이라. 그 다음부터는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자가 진이 나도록 됩떠 물어, 친소(親疏)간에 다시는 그대 말을 감히 하지 못하게 여기지름을 하더라. 몇 달 아니되어 정부대관의 교의(交椅)가 또 한 번바뀌었는데, 가령 악한 정부가 바뀌어 착한 정부가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다만 세력다툼으로 이 패가 들어오면 저 패가 물러가고, 저 패가 들어오면 이 패가 물러가서, 속담에 얻은 도끼나 잃은 도끼나 일반쯤 되었는지라. 새 정부가 들어오더니 하는 사업은, 국세가 어떤지 민정이 어떤지 모도 다 꿈밖에 잊어버리고, 첫 문제가 조판서 구나주본(拘拿奏本)을 다시 들이는 것이라. 별순검이 벌 겯듯 늘어서서 이구석 저구석 수탐한들 벌써 태평양바다 건너가 있는 조판서를 어데가 구경이나 하리요. 말불의 궁통한 의사는 어려서부터 유명한 터이라, 안선달과 의론하고 조판서 나오게 운동할 때에 벌써 어람 아니되어 도 무슨 번복이 있을 줄 짐작하고, 나오는 길로 포아로 건너가게 한 일인데, 자기 내외가 같이 간 것은 두 가지 사정이 있으니, 첫째는 서양 문명한 학문을 하루바삐 공부하여 졸업하는 날, 내 나라에 돌아와 자기는 남자사회를 개도(開導)하고 자기 아낙은 여자사회를 고동(鼓動)하여, 국가 기초를 공고케 하고 인민행복을 증진케 하여, 위로 황상 성덕을 보답하고, 아래로 부모 희망을 성취하려는 큰 뜻이요, 둘째는 조판서가 슬하에 다른 자식 없이 한낱 딸 하나뿐인데, 육십 당년에 고국을 떠나 외로이 이역 풍설을 겪을 일을 인정에 차마 모르는 체할 수 없어, 얼마동안 같이 가 있어 처량한 마음을 위로하자는 사정이라. 포아로 건너온 후 십오 년을 작정하고 말불이는 남자학교에서 공부하고 금쥐는 여자학교에서 공부하더라.
註
- ↑ 都目 - 해마다 두 번씩 벼슬아치의 성적에 따라서 승진, 해임시키던 일.
- ↑ 積仕久勤 - 여러 해를 두고 벼슬살이함.
- ↑ 貪贓 - 관리가 나쁜 짓을 하여 재물을 탐함.
- ↑ 瓜滿 - 벼슬의 任期가 다 됨.
- ↑ 延命 - 監司, 守令이 부임할 때에 闕牌 앞에서 왕명을傳布하던 의식.
- ↑ 臺諫 - 司惠府 司諫院의 벼슬의 총칭
- ↑ 宣化堂 - 各道의 觀察使가 執務하던 正堂
- ↑ 開東軍令 - 동틀 무렵에 내리는 군령.
- ↑ 밀둘레 - 밀뚤레. 둥글넓적하게 뭉쳐놓은 밀 덩이.
- ↑ 冊房 - 고을 원의 秘書 사무에 종사하던 사람
- ↑ 흔들갑 - 「호들갑」인 듯.
- ↑ 민패 - 아무 꾸밈새나 드러난 것의 없이 된 것.
- ↑ 深深葬地 - 깊이 감추어둠.
- ↑ 狀罷 - 범죄한 守令을 監司가 징계하여 罷職시킴
- ↑ 無寃錄 - 중국 宋나라 때 지은 法學書
- ↑ 顔松 - 안면이 익숙하여서 생기는 사사 정리
- ↑ 跋尾 - 檢屍官이 살인사건을 조사하여 기록하는 의견서
- ↑ 字牧之材 - 字牧之材. 守令의 딴 이름
- ↑ 具格拿來 - 重罪人을 수갑 지르고 칼 씌워 잡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