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왕자를 만나다

톰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처 없이 집을 나섰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면서도 지난 밤의 그 화려한 꿈을 찾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꿈을 쫒기에 골몰한 나머지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 템플 바(런던 시 서쪽 끝에 있었던 문)로구나!'

퍼뜩 정신이 들어 바라보니 템플 바라는 곳이었습니다. 톰이 이 때까지 다녀 본 곳 중에서 제일 먼 곳이었습니다.

톰은 잠깐 서서 생각하다가 다시 어젯밤에 꿈꾼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습니다.

조금 후에는 큰 저택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에 이르고, 굉장히 큰 궁전 앞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앗, 궁전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톰은 큼직한 석조 건물의 다락과 멋진 창문을 쳐다보았습니다. 금물을 입힌 철책이 끝없이 계속되어 있었습니다.

'진짜 궁전이로구나....... 그렇다면, 진짜 왕자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문 양쪽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문지기가 차려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시골에서 온 듯한 구경꾼들과 시민들이 한 번만이라도 왕족을 보겠다고 밀려들었습니다. 거지 차림의 톰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문지기 옆을 지나가려 했습니다.

톰은 이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아름다운 옷에 반짝이는 보석을 가득 단 잘생긴 소년이 안쪽에 보였던 것입니다. 그 소년은 보석이 박힌 칼을 허리에 차고, 뒤축이 빨간 아름다운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깃을 단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몇 명의 부하들이 그 옆을 따랐습니다.

'아! 진짜 왕자님이다. 틀림없이 왕자님일 거야!'

톰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거지 아이의 평생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진 셈입니다.

톰은 진짜 왕자님을 좀더 가까니서 보고 싶어, 정신 없이 창살에 얼굴을 바싹갖다 댔습니다.

그 순간 문지기의 손이 톰의 뒷덜미를 거머잡았습니다. 톰은 어느 새 구경꾼들이 서 있는 곳에 내던져졌습니다.

"거지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문지기가 톰을 발길로 걷어찰 때, 구경꾼들은 아구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이 때입니다. 왕자가 문 안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얼굴을 붉히며 달려오더니. 문지기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이봐, 왜 그 불쌍한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느냐!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임금님의 백성일 텐데, 그래서야 되겠느냐? 어서 문을 열고 저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구경꾼들은 이 말을 듣고 일제히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목청을 높여 '황태자 만세'를 외쳤습니다.

문지기들은 창을 높이 들어 경례하고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누더기를 걸친 톰이 들어서자, 그들은 또 정중히 경례를 했습니다.

톰은 진짜 왕자와 손을 잡았습니다.

에드워드 왕자는 톰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너는 피곤하고 시장한 모양이구나, 몹시 얻어맞았으니....... 자, 나와 같이 가자."

놀란 5.6명의 신하가 앞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왕자가 손을 들어 보였으므로, 신하들은 그 자리에 동상처럼 멈칫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왕자는 톰을 궁전 앞의 호화로운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왕자의 명령으로 곧 맛있는 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좋은 음식은 책에서나 보던 것이었습니다.

왕자는 신하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톰이 마음놓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톰이 식사하는 동안, 왕자는 옆자리에 앉아서 여러 가지 일을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지?"

"예, 톰 캔티입니다."

"별난 이름이구나. 어디서 살고 있지?"

"시내에서 삽니다. 푸딩 거리에서 좀 떨어진 더러운 골목이지요."

"더러운 골목? 그것도 별난 이름이군. 부모님은 계시니?"

"예, 다 계십니다. 게다가 할머니가 한 분-그다지 착한 분은 아니에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실례가 되겠지만, 그 밖에도 낸과 배트라는 쌍둥이 누나가 있습니다."

"그래? 할머니가 좋게 대해 주시지 않는 모양이구나."

"저뿐 아니라 누나에게도 좋게 대해 주는 일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마음이 나쁜 분이라 늘 나쁜 일만 하고 계세요."

"네게도 지독한 짓을 하더냐?"

"잠들었을 때나 술 취해 있을 때는 몰라도, 그렇지 않은 때는 마구 때립니다."

왕자는 눈을 번득이며 소리쳤습니다.

"너같이 약한 아이를 때린다고? 좋아, 그런 사람은 곧 런던 탑의 감옥에다 집어 넣어야 해."

"왕자님은 저의 할머니가 신분이 낮은 천한 사람이란 걸 모르십니까? 런던 탑은 높은 분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 아닙니까?"

"정말 그렇군, 깜빡 잊었구나. 그렇다면 벌주는 건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지. 아버지는 친절하시냐?"

"예, 아버지도 할머니와 똑같은 분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구걸해 온 돈을 몽땅 빼앗아요. 돈이 적으면 호통을 치고, 많이 때리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어느 집에서나 엄한 법이다. 나의 아버님도 여간 엄하시지 않은 분이지. 때로는 내게 엄한 말씀도 하시고, 신하들에게 야단을 치시는 일도 있지. 내가 공부를 게을리할 때에는 매로 때리시기도 해. 그럼 어머니는 어떠니?"

"어머니는 상냥하십니다. 저를 괴롭히거나 슬프게 하지 않는 분이에요. 낸과 배트도 어머니와 마찬가지입니다."

"두 누나의 나이는?"

"둘 다 열다섯 살, 쌍둥이입니다."

"나의 누님 엘리자베스 공주는 열네 살, 또 사촌 누이 제인 그레이는 나와 동갑인데, 매우 아름다울 뿐 아니라 퍽 다정한 사람이야. 그러나 제일 맏누님인 메리 공주는 언제나 불쾌한 얼굴을 하고 계시지. 너의 누나들도 신하들에게 웃는 건 죄라고 하여 못 웃게 하느냐?"

"누나 말씀인가요? 저의 누나에게 신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왕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톰을 바라보다가 또 물었습니다.

"그럼 신하가 없단 말이냐? 그렇다면 밤에 누나들이 옷을 벗을 때 누가 도와 주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누가 옷을 입혀 주고......?"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옷을 벗긴다면 발가숭이로 잘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럼 옷이 한 벌밖에 없단 말이냐?"

"많이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합니까? 두 누나가 몸이 둘씩 있는 것도 아닌데요."

"하긴 그렇군. 좋은 생각이다. 하하하. 용서해라. 웃으려고 그랫던 것은 아니었으니....... 낸과 배트에게는 곧 많은 옷과 시녀를 보내 주기로 하겠다. 고마워할 것은 없다. 대단치 않은 일이니까. 너는 말을 참 잘하고 점잖은데, 교육은 받았느냐?"

"교육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앤드루 신부님께서 책 읽는 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라틴 어를 배웠느냐?"

"예, 그러나 아주 조금 배웠을 뿐입니다."

왕자는 거지 소년 톰이 라틴 어를 안다는 데 그만 탄복했습니다.

"라틴 어는 배워 두면 좋은 것이다. 처음엔 힘이 들지만 나중에는 쉬워지지. 그건 그렇고, 네가 사는 동네 얘기를 좀 들려 다오. 너희들의 생활은 즐거우냐?"

"예,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배만 고프지 않다면 재미있다고 하겠습니다. 인형극과 원숭이 연극이 있습니다. 원숭이들이 잘 차려 입고 무대에 나와 연극을 하는데, 그러다가 나중에는 모조리 죽는 시늉을 하지요."

"좀더 얘기해 다오."

톰은 또 지저분한 골목 어린이들이 칼싸움놀이도 하고, 시냇물에서 헤엄을 치기도 하며, 매일매일 신나게 논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 거지 동네 아이들은 가끔 막대기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기도 합니다."

왕자는 눈을 빛냈습니다.

"그거 참 재미있겠다.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어지는데....... 얘기를 계속해라."

"저희들은 달음박질 경주도 합니다."

"그것도 좋겠다. 그리고 또 어떤 놀이를 하느냐?"

"여름에는 강에 뛰어들어 물장난도 합니다. 동무들과 물 속에서 무자맥질도 하고, 씨름도 하고, 물을 끼얹기도 합니다. 또 높은 곳에서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기도 하고요. 그리고......."

"아, 차라리 너희들이 부럽구나!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런 일을 해 보고 싶구나. 또 얘기하여라."

"모래톱에다 동무들을 파묻기도 하고, 진흙으로 떡을 만들기도 합니다. 흙장난만큼 재미있는 놀이는 없습니다. 저희들은 정말 흙탕 속을 뒹굴기도 하지요."

"더 얘기할 것 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너와 같은 옷을 입고 맨발로 진흙 속에서 마음껏 뒹굴어 보았으면 좋겠구나. 그럴 수만 있다면 왕관을 내던지더라도 아깝지 않겠다."

"저 역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습니다. 왕자님이 입고 계신 그런 옷을 입어 볼 수 있었으면......."

"뭐? 그런 것이 소원이냐? 응 입게 해 주마. 자, 그 헌 옷을 벗고, 이 번쩍이는 옷을 입어라. 잠깐 동안이지만 재미 있을 거야. 그리고 남들이 귀찮게 굴기 전에 다시 바꿔 입기로 하자."

잠시 후, 왕자와 톰은 서로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왕자는 톰의 누더기 옷을 걸치고, 톰은 호화 찬란한 왕자의 옷을 입었습니다.

두 사람은 커다란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도데체 누가 누구인지, 서로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둘은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왕자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이것 참 신기한 일이구나. 머리카락에서부터 눈이나 목소리까지 꼭 닮았으니, 어느 것이 너고 어느 것이 난지 알 수 없구나. 야, 이젠 남에게 들킨 염려는 조금도 없다. 이렇게 네 옷을 입고 보니 아까 문지기에게 얻어맞은 네 기분을 알 것 같다."

"아니오, 대단치 않습니다."

"정말 나쁜 짓이었다! 아버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혼이 날 거다. 좋아, 내가 나갔다 올 때까지 넌 여기서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 움직이면 안 돼, 명령이다!"

왕자는 맨발을 구르며 소리쳤습니다.

누더기를 걸친 에드워드 왕자는 방에서 나가려다가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을 집어 얼른 감추었습니다. 그것은 영국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중요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방을 나가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입은 채 궁전 뜰로 달려갔습니다.

톰은 그것이 뭔지 눈여겨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저 왕자의 멋진 옷으로 바꿔 입은 제 모습을 보고 황홀한 기분에 젖어 있었습니다.

정문 앞에 이르자 왕자는 쇠울타리를 붙잡고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여봐라, 명령이다. 어서 이 문을 열어라!"

아까 톰을 때린 문지기가 누구인지 보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화가 나서,

"명령이라니, 이 꼬마 녀석이 왕자님에게 대접을 받고 나오더니 정신이 돌았군. 어서 꺼져."

하면서 뛰쳐나가는 왕자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습니다. 그 바람에 왕자는 길바닥에 나가 떨어졌습니다.

"꼬마 거지 놈아! 맛 좀 봐라. 아까 왕자한테 꾸중 들은 분풀이다!"

대궐 문 앞에 모여선 구경꾼들이 '와와'하고 웃었습니다.

왕자는 흙바닥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당당한 자세로 문지기에게 대들었습니다.

"나는 왕자다! 네가 지금 내게 보여 준 무례한 행동은 용서 할 수 없다. 마땅히 교수형을 받아야 해!"

그러나 문지기는 창을 바로잡고 위엄을 부리며 놀려 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문지기는 옷을 바꿔 입은 진짜 왕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왕자님께 경례를 올리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썩 물러가거라, 이 미친 거지 놈아!"

구경꾼들은 가엾은 왕자를 둘러싸고는 마구 떼밀며 놀려 댔습니다.

"여봐라, 길을 비켜라! 왕자님께서 나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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