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뇌의 무도/구르몽의 시
가을, 나뭇잎이 비가 오아라, 혼의 비가 내려라,
사랑에 몸이 죽은 혼의 비가 내려라.
―구르몽
다사로운 오랜 우의(友誼)를 위하여
이 시를 모아서 맘 가득히
유방(惟邦) 김군(金君)에게 보내노라.
가을의 따님
편집추억(追憶) 많은 외마대 길을 걸으며,
가을의 따님은 낙엽(落葉)을 밟고 있어라,
생각하면 그때 일은 이곳인 듯하여라……
아아 그러나 지금(只今) 바람은 나뭇잎과 나의 희망(希望)을 불어 날리어라.
아아 바람이여, 내 맘까지 불러가거라, 내 맘은 이리도 무거워라!
햇볕 없는 흐릿한 동산에
가을의 따님 국화(菊花)를 꺾고 있어라
생각하면 내가 사랑하던 흰 장미꽃이 피었던 곳은 저곳인 듯하여라……
아아 화심(花心)은 새빨간 흰 장미의,
아아 태양(太陽)이여, 너는 두 번 나의 장미를 꽃피게 하지 않으려는가?
떠도는 황혼(黃昏)의 공기에
가을의 따님은 새와 같이 떨고 있어라,
생각하면 그때 일은 이곳인 듯하여라, 하늘빛도 푸르러라……
우리들의 눈은 희망(希望)이 가득하였어라.
아아 하늘이여, 너는 지금(只今)도 별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가을의 거칠어진 산(山)을 버리고
가을의 따님은 갔어라,
생각하면 그때 일은 이곳인 듯하여라…… 우리들의 맘이 만나던 순간(瞬間)은……
그러나 지금(只今) 바람은 불어 내 몸이 떨리어라……
아아 부는 바람이여, 내 맘까지 불러가거라, 내 맘은 이리도 무거워라.
황혼(黃昏)
편집황혼(黃昏)의 때는 가이없어라, 아아 설어라,
장미꽃은 조심(操心)스러운 듯이 미소(微笑)를 띄우고,
맑은 향훈(香薰)을 우리의 맘속에 부어 넣으며
달콤한 말을 하여주어라.
버리운 여자(女子)와 같이 핼끔한 스러져 가는 햇볕에는
오려는 밤에 지금(只今) 생기는 사랑의 다사로움이 있으며
사주(四周)의 공기(空氣)는 몽환(夢幻)에 가득하였어라.
맑은 목장(牧場)의 풀에 누워, 피로(疲勞)를 고치는 ‘인생(人生)’은
샛말간 눈을 뜨며, 그 입술을 고요한 키스에 바치고 있어라.
황혼(黃昏)의 때는 가이없어라, 아아 설어라,
저녁 안개는 신생(新生)의 별을 박사(薄紗)로 싸고 어리우며,
두 나래는 사모(思慕)하는 듯이도 탄모(歎慕)하는 듯이도
봉래향(蓬萊鄕)의 피안(彼岸)까지 바람에 따라 불리어 흘러라.
종루(鐘樓)의 십자가(十字架)를 비추이며,
이별을 싫어하는 여영(餘映)은
파리한 포플라의 높은 가지에 불같이 붉어라.
스러져 가는 햇볕은 희멀금하여
창(窓)에 기대어, 하염없이도 머리를 빗는 버리운 여인(女人)과 같아라.
황혼(黃昏)의 때는 가이없어라, 아아 설어라,
피었다가는 스러져 가는 너의 화향(花香)의
청량(淸凉)과 습음(濕陰)이 지상에 떠도는 동안에
때는 죽어가며, 밤은 오아라.
햇볕은 무디어, 공간(空間)으로 가고 말아라.
그윽한 전율(戰慄)은 지구(地球)의 흙 위에 내리며,
수목(樹木)들은 저녁 기도(祈禱)의 천사(天使)인 듯하여라
오오 잠깐 머물러라, 가는 때여! 생(生)의 꽃이여! 잠깐 머물러라!
빨리도 한 절반(折半) 잠든 너의 곱고도 푸른 눈을 열어라……
황혼(黃昏)의 때는 가이없어라, 아아 설어라,
여인(女人)은 눈가에 가슴의 생각을 그윽히 띄우며,
지금(只今) 박명(薄明)에 생기는 사랑의 살뜰함이 보여라
오오 세상(世上)의 사랑이여, 빛도 흰 ‘부재(不在)’의 따님이여,
황혼(黃昏)의 때를 사랑하여라,
그 눈에는 하느님이 낡고, 그 손에는
우리가 명일(明日)에 맛들 향료(香料)가 가득한
황혼(黃昏)의 때를 사랑하여라
죽음이 떠돌며 아득히는 희미한 황혼(黃昏)의 때를 사랑하여라,
인생(人生)길의 하루에 피곤(疲困)한 ‘생(生)’의 정적(靜寂) 속에서
몽환(夢幻)의 노래를 듣는 시간(時間), 황혼(黃昏)의 때를 사랑하여라,
전원사계(田園四季)
편집봄, 떨어지기 쉬운 청색(靑色)의 아네모네여,
너의 밝은 눈의 핼금한 고뇌(苦惱)의 속에
사랑은 가이없는 혼(魂)을 감추어 두었으나,
너는 지금(只今) 부는 바람에 떨고 있어라.
여름, 언덕의 갈대는 나를 보라 하는 듯이,
바다로 흘러가는 물에 그림자를 비추어 있을 때,
애닯게도 저녁 물속에 누워 있는 그림자는
한가하게 소리 없이 물 마시러 가는 암소의 무리러라.
가을, 나뭇잎의 비가 내려라, 넋이 ‘혼(魂)’의 비가 내려라,
사랑에 몸이 죽은 넋이 ‘혼(魂)’의 비가 내려라,
아낙네들은 적막(寂寞)하게도 서방(西方)을 바라보나
수목(樹木)은 공간(空間)에 망각(忘却)의 비(碑)를 나타내어라.
겨울, 눈 이불을 덥고 누었는 녹안(綠眼)의 아낙네여!
너의 두발(頭髮)은 서리와 고통(苦痛)과 소금에 쌓이었어라,
너의 미이라 ‘목내이(木乃伊)’여, 또는 저주(咀呪)를 무서워하지 않는 취잔(取殘)의 맘이여,
설은 홍수정(紅水晶)이여, 자거라, 너의 불사(不死)의 육체(肉體) 속에서.
가을의 노래
편집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只今)은 가을이다.
적막(寂寞)도 하고 습기(濕氣)도 있는 가을의 때다,
그러나 아직 앵두와 단풍(丹楓)과
다 익은 들장미의 과실(果實)은
키스와 같이 빛이 빨갛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只今)은 가을이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지금(只今) 애달픈 가을은
그 외투(外套)의 앞깃을 가득히 하고 떨고 있다마는
태양(太陽)은 아직도 더우며,
네 맘과 같이 가벼운 공기(空氣) 안에서
안개는 우리의 우울(憂鬱)을 흔들며 위로해 준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只今)은 가을이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갈바람은 사람과 같이 흐득이며 운다,
성글은 수풀 밭 속에,
딸기나무는 피곤(疲困)한 팔을 흐트러치고 있다
마는 떡갈나무는 오히려 새파랗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只今)은 가을이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갈바람은 몹쓸게 짖으며 우리를 꾸짖는다,
작은 길에는 바람의 말소리가 들리며,
무성(茂盛)한 수풀 밭에는
들비둘기의 고운 나래 소리가 아직도 들린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只今)은 가을이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지금(只今) 애달픈 가을은
겨울의 팔목에 몸을 맡기려한다,
마는 여름의 풀은 나오려하며,
핀 지초(芝草)꽃은 아름답게도
마지막의 안개에 싸이어
꽃핀 고사리와도 같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은 가을이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은 가을이다,
옷을 벗은 포플라 나무들은 몸을 떨고 있으나
그 잎들은 아직 죽지 아니하고
황금색(黃金色)의 옷을 날리면서
춤을 춘다, 춤을 춘다, 그 잎은 아직도 춤을 춘다,
가까이 오렴,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只今)은 가을이다.
메테르링크의 연극(演劇)
편집어디인지도 모르나 안개 속에 섬이 있다.
섬에는 성(城)이 있다,
성(城)에는 작은 등(燈)불이 빛나는 넓은 방(房)안이 있다,
이 방(房) 안에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기다리나?
그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들은 누구가 와서 문(門)을 두드리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등(燈)불이 꺼지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공포(恐怖)를 기다린다.
그들은 죽음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말을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잠간(暫間) 동안의 침묵(沈默)을 말로 깨친다,
하던 말을 중지(中止)하고 그대로
그들은 무엇을 듣고 있다,
그들은 들으면서
그들은 기다린다.
죽음이 오겠나?
아아 죽음이 오겠나,
어느 길로 죽음이 오겠나,
벌써 밤은 깊었다,
어찌되면 죽음이 내일(來日)까지 아니 올지도 모르겠다.
넓은 방(房)안의 작은 등(燈)불 아래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윽히 미소(微笑)하며 안심(安心)하라고 한다.
그때 누군지 문을 두드린다,
이 뿐이다,
이것이 일생(一生)이다,
이것이 인생(人生)이다.
폭풍우(暴風雨)의 장미꽃
편집폭풍우(暴風雨)의 뒤설레는 거칠음에
흰 장미꽃은 부딪겼어라,
그리도 많이 받은 괴로움에
그 꽃의 향훈(香薰)만은 더욱 많아졌어라.
이 장미를 띠 속에 감추어 두어라,
그리하고 이 상처(傷處)를 가슴에 넣어 두어라,
폭풍우(暴風雨)의 장미꽃과도 너는 같아라,
수함(手函)에 이 장미를 넣어 두어라,
그리하고 폭풍우(暴風雨)에 부닥친
장미의 내력(來歷)을 생각하여라,
폭풍우(暴風雨)는 그 비밀(祕密)을 지켜주리라,
이 상처(傷處)를 가슴에 품고 있어라.
흰 눈
편집시몬아, 너의 목은 흰 눈 같이 희다,
시몬아, 너의 무릎은 흰 눈 같이 희다,
시몬아, 네 손은 눈과 같이 차다,
시몬아, 네 맘은 눈과 같이 차다,
이 눈을 녹이려면 불길의 키스,
네 맘을 녹이려면 이별(離別)의 키스.
눈은 적막(寂寞)하게도 소나무 가지에 쌓였다,
네 이마는 적막(寂寞)하게도 흑발(黑髮)의 아래에 있다.
시몬아, 너의 누이 되는 흰 눈이 뜰에서 잔다,
시몬아, 너의 나의 흰 눈, 그리하고 내 애인(愛人)이다.
낙엽(落葉)
편집시몬아, 나뭇잎 떨어진 수림(樹林)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소로(小路)를 덮었다.
시몬아, 낙엽(落葉)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낙엽(落葉)의 빛깔은 좋으나, 모양이 적막(寂寞)하다,
낙엽(落葉)은 가이없이 버린 땅 위에 흩어졌다.
시몬아, 낙엽(落葉)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황혼(黃昏)의 때면 낙엽(落葉)의 모양은 적막(寂寞)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落葉)은 소곤거린다.
시몬아, 낙엽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가까이 오렴, 언제 한 번(番)은 우리도 불쌍한 낙엽(落葉)이 되겠다,
가까이 오렴, 벌써 밤이 되어 바람이 몸에 스며든다.
시몬아, 낙엽(落葉)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과수원(果樹園)
편집시몬,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버들함(函)을 가지고.
과수원(果樹園)에 들어가면서
임금(林檎)나무에게 말하자,
‘지금은 임금(林檎)의 시절(時節),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시몬,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임금(林檎)나무에는 벌이 가득하다,
임금(林檎)이 잘 익어서.
임금(林檎)나무 주위(周圍)에는
붕붕 우는 소리가 난다.
임금(林檎)나무에는 임금(林檎)이 가득하다,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시몬,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둘이 함께 붉은 임금(林檎)을 따자,
구임금(鳩林檎)도 청임금(靑林檎)도 따자,
과육(果肉)이 조금 익은
임금(林檎)주 만들 임금(林檎)도 따자,
지금은 임금(林檎)의 시절,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시몬,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네 손과 옷에는
임금(林檎)의 냄새가 가득하다,
그리하고 너의 두발(頭髮)에도 가득히
곱다란 가을 냄새가 찼다,
임금(林檎)나무에는 임금(林檎)이 가득하다,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시몬,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시몬, 너는 나의 과수원(果樹園),
그리하고 나의 임금(林檎)나무가 되어다오,
시몬, 벌을 죽여다오,
너의 맘에 있는 벌, 그리하고 내 과수원(果樹園)의 벌을,
지금(只今)은 임금(林檎)의 시절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시몬
과수원(果樹園)으로 가자.
물방아
편집시몬, 물방아는 대단히 낡았다,
바퀴는 돋는 이끼에 푸르다, 바퀴는 돈다 큰 구멍 속을
멋 없이도 바퀴는 돈다, 바퀴는 돌아간다.
끝없는 고역(苦役)이나 받은 듯이
사위(四圍)의 담벽(壁)은 흔들린다,
마치 밤에 바다 위를 기선(汽船)이 지나가는 듯하다,
멋 없이도 바퀴는 돈다, 바퀴는 돌아간다.
끝없는 고역(苦役)이나 받은 듯이.
사위(四圍)는 어둡고 무거운 석구(石臼)의 우는 소리가 들린다,
석구(石臼)는 조모(祖母)보다도 착하고 조모(祖母)보다도 늙었다,
멋 없이도 바퀴는 돈다, 바퀴는 돌아간다.
끝없는 고역(苦役)이나 받은 듯이.
석구(石臼)는 착한 나만한 조모(祖母)님,
아이의 힘으로도 멈추고, 적은 물도 그것을 움직인다,
멋 없이도 바퀴는 돈다, 바퀴는 돌아간다.
끝없는 고역(苦役)이나 받은 듯이.
석구(石臼)는 중[僧]같이 착하다,
석구(石臼)는 우리를 살리며 도와주는 땅을 만든다,
멋 없이도 바퀴는 돈다, 바퀴는 돌아간다.
끝없는 고역(苦役)이나 받은 듯이.
석구(石臼)는 사람을 양육(養育)한다,
사람을 따르며 사람을 위하여 죽는 종순(從順)한 짐승을 양육(養育)한다,
멋 없이도 바퀴는 돈다, 바퀴는 돌아간다.
끝없는 고역(苦役)이나 받은 듯이.
석구(石臼)는 일한다, 운다, 돌아간다, 주저린다,
옛적의 옛적부터, 이 세상(世上)의 처음부터.
멋 없이도 바퀴는 돈다, 바퀴는 돌아간다.
끝없는 고역(苦役)이나 받은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