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여! 그대의 글월은 받아 보았다. 그리고 그 말단에 "혼자서 적막하여 못 견딜 지경"운운한 것도 그것이 어느 의미에서든지 그 의미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C여! "진정한 동무란 모두 고독한 사람들"이란 것을 우리는 알베르 보나아르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몸으로써 겪은 바가 아닌가? 거대한 궁륭을 세워 올리는 데 두어 개의 기둥이 있으면 족한 것과 같이 우리들이 인간에 대해서 우리들의 생각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두어 사람의 동무가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괜히 마음의 한옆이 헛헛하고 더구나 나그네가 되었을 때 한층 더 절절한 바가 있는 것이지마는 이러할 때면 나는 힘써 지나간 일들을 생각키로 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는 바와 같이 내 나이가 열 살쯤 되었을 때는 그 환경이 그대와는 달랐다는 것은 그대는 쓸쓸할 때면 할머니께서 무명을 잣는 물레 마루 끝 장독대를 혼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봉선화 송이를 되는대로 똑똑 따서는 슬슬 비벼 던지고, 즐포플라가 선 신작로를 달음질치면 우선 마차가 지나가고, 소 구루마가 지나가고, 기차가 지나가고, 봇짐 장수가 지나가고, 미역 뜯어 가는 할머니가 지나가고, 멸치 덤장이 지나가고, 채전 밭가에 널린 그물이 지나가고, 솔밭이 지나가고, 포도밭이 지나가고, 산모퉁이가 지나가고, 모랫벌이 지나가고, 소금 냄새 나는 바람이 지나가고, 그러면 너는 들숨도 날숨도 막혀서 바닷가에 매여 있는 배에 가 누워서 하늘 위에 유유히 떠가는 흰구름 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나? 그러다가 팔에 힘이 돌면 목숨 한정껏 배를 저어 거친 물결을 넘어가지 않았나? 그렇지마는 나는 그 풋된 시절을 너와는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지금 생각하면 남양 토인들이 고도의 문명인들과 사귀는 폭도 됨직하리라,. 물론 그때도 나 혼자 지나는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대부분 독서나 습자의 시간이었고 그 외의 하루의 태반은 어른 밑에서 거처, 음식, 기거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잠자는 동안을 빼놓고는 거의는 이야기를 듣는 데 허비되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란 것이 채장 없이 긴 것이라 지금쯤 뚜렷한 기억은 남지 않았으나 말씀을 해주신 어른분들의 연세에 따라서는 내용이 모두 다른 것이었다. 대개 예를 들면 오인들은 제례(祭禮)는 이러이러한 것이라 하셨고, 중년 어른들은 접빈객(接賓客)하는 절차는 어떻다든지, 또 그보다 매우 젊은 어른들은 청년 예기(銳氣)로써 나는 어떠한 곤란을 당했을 때 어떻게 처사를 했다든지, 무서운 일을 보고도 눈 한 번 깜짝한 일이 없다거나, 아무리 슬픈 일에도 눈물은 사내 자식이 흘리는 법이 아니라는 등등이었다.

C여! 나는 그것을 처음 들을 때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몰랐고 예사 어린 아이들은 누구나 저런 말을 듣는 것인가 보다 하고 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멀지 않아 나 자신이 예외없이 당해 보는 것이 아니겠나? 그 무서운, 또 맵고 짜고 쓰고 졸도라도 할 수 있는 광경들을! 그래서 나는 내 아우나 조카들에게라도 될 수 있으면 내가 지나온 이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하였더란다. 그랬더니만 그것이 버릇이 되어서인지 집안에 들면 말썽이 적어지고, 그렇게 되니 어머니께서도 "왜 어릴 때는 재미있고 그렇던 애가 저다지 말이 없느냐"고 걱정을 하시는 것이며, 나 자신도 다소는 말이 좀 둔해진 편인데, 옛날 성현이 말하기를 "민어행이눌어언(敏於行而訥於言)"하라고 하였지마는 지금 나와 같아서는 민어행도 못 하고 눌어언만 한댔자 군자가 될 성싶지도 않고, 또 군자를 원치도 않는만큼 그것은 당분간 걱정이 없으나 결국 내 몸을 둘 곳이 어디이랴. 그래서 나는 요즘 '생각한다'는 데 머물러 보기로 한다. 생각도 그야 여러 가지겠지마는 이것은 나로서 공리적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말썽이 많은 때문이다. 그러니 잠깐 책장을 덮어 두고 현재를 생각하는 것도 너무 속되다는 것은 원래 연륜이 묵지 않은 것은 신비성이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만만한 것이 과거(過去)인데, C여! 나는 또 어째서 그 아픈 상처를 낱낱이 휘집어내지 않으면 안되겠느냐.

차라리 말썽 없는 산수에 뜻을 붙여 표연히 갔던 길에 뜻밖에도 만고의 명승을 얻은 내력을 들어나 보라. 가을밤, 가는 빗발이 바늘 끝같이 찬 날씨였다. 열 한 시에 서울을 떠나는 동해 북부선을 탄 지 일곱 시간 만에 사냥을 간다는 L과 K를 안변에서 작별하고 K와 H와 나는 T읍에 있는 K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연선(沿線)의 새벽에 눈을 뜨는 호수! 또 호수! 쟁반에 물을 담은 듯한 내해(內海)에 아침 천렵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범(漁帆)들, 이것이 모두 지방이 달라지면 풍속도 다르게 시시각각에 형형색색으로 처음 가는 손님을 홀리는 것이 아니겠나? 때로는 산을 돌고 때로는 평원을 지나 솔밭 속을 지나는데, 푸른 솔가지 사이로 보이는 양관(洋館)들이 모모의 별장이라 하고 해수욕장이 있다 하나 너무나 대중 문화적이고 그곳에서 얼마 안 가면 T읍, K의 집에서 조반을 마치고 난 나는 K의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아 자동차로 해안선을 십리 남짓 달렸다. 천연으로 된 방파제를 돌아서 바다 속으로 돌진한 육지의 마지막이 거의는 충암절벽(層岩絶壁)으로 된 데다가 동편은 석주들이 죽 늘어선 것이 마치 아테네의 폐허를 그 해상에 옮겨 세운 듯하며,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서편의 만(灣)은 이오니아의 바다와 같이 맑고 푸르고 깨끗하고 조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한번 불면 파도는 동편 석주를 마주쳐 부서지는 강한 음향과 서편 백사(白砂)의 만을 쓸어 오는 부드럽고 고운 음향들이 산 위의 솔바람과 한데 합치면 그는 내가 이때까지 들은 어떠한 대교향악도 그에 미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다시 눈을 들어 멀리 안계(眼界)가 자라는 데까지 사방을 살피면 금란도(金蘭島)니 무슨 도(島)니 하는 섬들이 저마다 성격을 갖추어 있으면서도 이쪽을 싸주는 풍경이란 그럴 듯한 것이지만 그 많은 물새들의 깃 치는 소리도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그러나 끊일 새 없이 들려 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C가 몇 해 전부터 이 고적한 지방에 혼자 와서 살고 있었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 외면으로 고적한 것이지 정신상으로는 몇 배나 행복한 것이었을까 하고 생각할 때 해안의 조그만 뒷집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았다. 그만하면 나에게는 베네치아의 궁전에도 비할 수 있는 것이며, 로마의 흥망사라도 그곳이면 조용히 볼 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C여! 이곳이 바로 내가 Q고 온 해금강 총석정(叢石亭)의 꿈이었지마는 꿈은 꿈으로 두고라도 고적(孤寂)을 한할 바 무엇이랴? 여기에 모든 사람들을 떠날 수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대를 찾아낼 것이고, 그대는 나에게 용기를 주겠지. 그러면 고독은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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