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 (김동인)

서문에 대신하여

편집

△ 이것은 1929년부터 약 2개년, 〈별건곤〉과 및 그 후신인 <혜성>에 연재한, 여(余)의 자전(自傳)의 일부다. 자전 가운데서도, 삼십 세를 축으로 한 그 전기(前期)의 ‘여인(女人)’에 관한 부분이다.

△ 자전― 그 가운데도, 여인에 관한 부분을 쓰기는 힘든다. 머―ㄴ 과거의 일은 그다지 어색치도 않지만, 가까운 과거의 일이 되자, 붓은 움직이지를 않았다. 여는 그것을 쓰는 동안, 몇 번을 붓을 내어 던지려 하였다. 그러나, 삼십을 일기(一期)로 한 과거를 청산하려고 쓰기 시작한 붓인지라, 좀체 내어 던질 수가 없었다.

△ 연령의 변화, 환경의 변화, 성격의 변화, 여기서 생겨나는 사상의 변화― 이 때문에 여인에 대한 태도며 관념도 점점 변하였다. 돌아보건대 그 변화도 여에게는 자미있다.

△ 여를 알고자 하는 이, 혹은 여를 사랑하는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여의 이 솔직한 고백은, 여의 자람을 그대에게 알게 할 것이요 여의 자람은 여의 사상, 혹은 작품의 변화를 알게 할 것이니까. 이 소책자와 그 새의 여의 소설과를 대조하며 볼진대, 여라는 인물은 자연히 그대의 마음에 솟아오를 것이다.

△ 말하자면, 이것은 여의 한 초상화다.

著者 議

나의 삼십 년의 일생을 통하여 길에서, 기차, 전차에서, 혹은 어떤 집회장에서 ‘노방(路傍)의 사람’이라는 글자 그대로 한 끝으로 만나서 한끝으로(어떤 인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 여인의 수효는 만(萬)으로서 헤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많은 여인 가운데, 나의 생활에, 나의 감정에, 한때에 한 점의 컴마를 찍어 놓은 여인도 백(百)으로서 헤지 못할 것이다.

그 많은 여인을, 다시 한번 체 위에 올려 놓아가지고 흔들 때에, 그냥 그래도 체에 걸리어서, 내려지지 않는 여인은 몇 명이나 되나.

당시에는, 극히 평범한 여인이라 하여, 한 눈발조차 주지 않았던 사람 가운데, 몇 해를 지낸 지금까지도, 아련히 나의 머리에서 그 인상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의 곁에 앉기까지 싫어서, 자리를 피하던 사람 가운데도, 이제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당시에는, 나의 꿈에 나타나 주지 않는 그를 원망하느니만치 그리던 여인으로도, 지금은 얼굴의 인상조차 잊어버린 사람도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나의 체질에 그냥 걸려서 떨어지지 않는 여인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되나. 나는 차례로 그것을 한 번 적어 보려 한다.


메리

편집

1915년 가을이었다.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이학년생, 열어섯 살 되는 소년 김동인은, 동경 지구 백금대정(東京 芝區 白金臺町) 어떤 하숙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때의 나는, 열여섯이라 하나 몹시 작은 편으로서, 그 전 해 열다섯 살에 동경 갈 때에, 기차 반액권으로 아무 말 없이 간 것만으로도, 내가 어찌 작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메구로(めぐろ) 가는 전차를 백금대정에서 내려서, 오른손 쪽으로 성심여학원(聖心女學院)으로 가는 언덕길을 한 절반이나 내려가서, 오른편 짝에 있는 다락집이, 내가 새로 잡은 하숙이었었다.

당시의 백금대정 일대는 아직 신개지(新開地)로서, 나의 새 집의 동쪽과 북쪽은, 인가와 접속되었지만, 남쪽으로는 길을 건너서 몇천 평의 빈터가 있고, 서쪽 역시 삼사백 평의 빈터를 건너서야 집이 있었다.

그 하숙에 같이 있게 된 R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에, 이사 온 집 근처의 지리를 연구키 위하여 산보를 나가자는 R의 말을 거절한 뒤에, 나는, 혼자서 이층으로 올라왔다. 교과서를 폈으나 복습할 것도 없으므로, 나의 방에서 복도 하나를 건너서 서쪽으로 있는 ‘빨래 말리는 곳’으로 나섰다.

달 없는 어두운 밤이었었다. 그러나, 내가 그 빨래 말리는 곳으로 나설 때에는, 그 어두운 밤을 무시하는 듯이 밝게 빛나는 곳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내가 서 있는 곳과 한 이십여 간 상거가 되는 어떤 집 이층의 문이었었다. 일본식 이층집에 장지문을 떼어 버리고 그 대신 유리문을 단 뒤에, 페인트칠을 한, 말하자면 양식 도금을 한 일본집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그때였었다. 유리창 안에는 (짐작컨대) 백 촉쯤 되는 전등이 밝아 있었고, 센터 테이블을 가운데로, 부처(夫妻) 두 사람과 두 아들과 한 딸인 듯한 서양인의 한 가족 다섯 사람이 둘러앉아서, 무엇을 지껄이며 웃고 있었다.

소년 시대의 호기심은 크다. 나는 내 방에 들어와서 망원경을 가지고 나와서, 숨어 서서 다시 보았다. 내 망원경의 부리는, (나에게는) 측면으로 앉아있는 블론드의 계집애게로만 항하였다.

열 서너 살 났을까. 타원형의 얼굴에 웃을 때마다 뺨에 우물이 들어가며, 하반신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장난꾸러기같이 발을 올려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몸짓으로 넉넉히 알 수가 있었다.

시인에게 말하라면, 그런 경치는 봄이라야만 적당하다고 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감상적 소년에게는 가을이라도 관계가 없었다. 어두운 밤과, 밟은 문창과, 단란한 가정, 블론드의 계집애. 밀레가 보았으면 한 폭의 그림이 되었을는지 모르나, ― 괴테가 보았더면, 몇 줄의 시를 읊었을는지 모르나, 소년 김동인에게는 다른 것은 아무 쓸데도 없었다. 한편 쪽의 머리채와, 한편 쪽의 뺨과, 아직 살이 올라붙지 않은 어깨와, 장난꾸러기 소녀다이 웃음을 흘리고 있는 한편 눈뿐이 환등(幻燈)과 같은 그 경치의 유일의 존재였었다.

이틀 뒤에, 나는 그의 얼굴 전면을 처음으로 보았다. 하학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어서 바삐 밤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이층 내 방에서 정신없이 길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에, 시야 한편 끝에 양장을 한 계집애의 모양이 나타났다. 나는 펄덕 놀라서, 장지를 닫고 뛰어들어 와서 책상을 지고 섰다가, 다시 뛰어가서, 문틈으로 내어다보았다. 두 손을 치마 앞주머니에 넣고 길에 있는 적은 돌을, 이리 차고 저리 차면서, 언덕길을 내려가는 계집애는 이틀 전의 환등과 같은 경치의 그 소녀에 다름없었다.

봄에는 꽃을, 여름에는 녹음을, 가을에는 낙엽을, 겨울에는 눈을,― 그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사랑할 줄 모르던, 말없고 음울한 소년의 마음에도 마침내 큐피트의 살이 들어박혔다.

나는 그 뒤부터는, 밤에는 잠자기 전에 심호흡을 핑계삼아 가지고 빨래 말리는 곳에 나가서, 그의 집 아마도(あまど―덧문)가 닫히기까지 그의 집 이층을 바라보고 서 있었으며, 아침 깨면은, 세수도 하기 전에 아령을 들고 그곳에 나가서, 그에게 마음의 아침 인사를 드리고 하였다.

우리 하숙에서 길을 하나 건너서 남쪽으로 있는 몇천 평의 빈터를 우리(R과 나와 그 밖 이삼 인)는 베이스볼의 연습 마당으로 쓰고 있었다.

어떤 날, ‘그’의 집을 등지고 볼을 주고받던 나는 맹렬히 오는 볼 하나를 그만 놓쳐 버렸다. 그 볼은 길을 건너서 또 빈 터를 건너서 ‘그’의 집 담장 밑에 까지 가서 맞았다. 나는 허망지망, 머리를 아래로 숙인 채로 그곳으로 볼을 잡으러 뛰어 올라갔다.

“아더(Arthur)”

그것은 담장 안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찾는 목소리였었다. 동시에 부드러운 대답 소리도 들렸다.

나는 볼을 집어서 힘껏 저편으로 던진 뒤에, 내 방으로 뛰어 올라 갔다.

아더, 무론 잊어버릴 이름은 아니었었다. 그때의 우리는 아더 왕의 이야기를 배우고 있었는지라, 결코 잊을 근심은 없는 이름이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이름이 한 번 잊어버리면 다시 생각나지 않을 이름과 같아서, 곧 메모에 Arthur라는 이름을 썼다.

아더라는 이름은 나에게는 즐겁고도 또한 꿈과 같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보였다. 아더왕의 전기의 몇 종류가 내 책장을 장식하였다. 아더왕의 기사 모양의 그림이 담벽에 장식되었다. 나의 교과서며 노트의 페이지마다 아더라는 글자는 수없이 씌어졌다. 정신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하늘 한편 끝에 Arthur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으리만치 나는 그 이름에 내 정신을 박았다. 아더라는 이름은 과연 그 당시에는 나에게는 없지 못할 양식이었었다.

어떤 날, 역시 베이스볼을 연습하고 있던 나는, 등 뒤에서 나는 소녀의 영어 소리를 들었다. 거기 정신이 팔린 순간, 날아오는 볼을 그만 놓쳐 버렸다. 히끈 돌아서니, ‘그’가 그 볼을 받아가지고 어디로 보낼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앞으로 항하였지만, 눈이 아득하여 져 버렸다. 조그만 까께고에(かけごえ―부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볼을 던지는 것은 의식하였지만, 눈이 아득하여진 내게는 볼이 어느 편으로 오는지를 볼 수가 없었다. 볼은 내 얼굴에 맞고 내려졌다. 그럽을 벗어 버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매, 꺼븐꺼븐한 코피가 손바닥에 고였다.

“아라. 고멘나사이.(あら.ご免なさい―어머나. 용서하세요)”

뛰어오는 발소리와 함께 내 귀에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유 없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나의 이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눈물! 그와 같이 많은 눈물을 나는 아직 흘려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종류의 눈물?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감격? 기쁨? 설움? 부끄러움? 그것 가운데 아무 종류에도 속하지 않는 눈물인 동시에, 그 몇 가지를 다 합한 감정의 북받침이라도고 할 수 있다. 소년에게는 어른이 능히 해석치 못할 미묘한 감정이 있다. 어느 어른이 한때 소년 시대를 밟지 않고 자란 사람이 있으랴만 소년이라 하는 ‘감정의 천국’은 일단 장성한 뒤에는 다시 들어가기를 허락치 않는 꿈의 시절인 동시에, 잊음의 베일로써 감춘 화려한 꽃동산이다.

아아, 그때의 나의 꿈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소년 시대에 머리에 그리는 미래는, 청년 시대의 그것과는 딴판 다르다. 거기는, 단락한 가정이라든가 귀여운 자식이라든가 하는 실제 문제는 온전히 없으며, 노년이라든가 중년이라든가 하는 시기는, 온전히 무시하여 버린다. 그때에, 나는 다른 학과는 버려두고 영어를 얼마나 열심으로 배웠던가. 아름다운 금발의 처녀와 함께 (내가 동경 올 때에 타고 온 고려환(高麗丸)보다도 몇 곱이나 큰) 배를 타고 태서양을 건너는 꿈은 얼마나 나의 마음을 끄을었으랴. 철럭거리는 물결 소리와 무연한 바다, 달밤, 기관의 돌아가는 소리! 아아, 이렇듯 아름다운 음악이 어디 있으랴. 아메리카? 그런 역사가 없는 나라는 저주받아라. 로마의 교외 혹은 유서 많은 영국의 시골길을 그와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그 아름다운 꿈! 헬멧에 흰 수건을 뒤로 늘이고 여행복을 맵시 나게 차린 뒤에, 한 손에는 사진기, 또 한 손에는 그의 손을 잡고, 에집트의 고적을 찾아다니는 환상을 공중에 그려보고, 혼자 얼굴을 붉혀 본 적이 그 몇 번이었던가.

어떤 날 (똑똑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요일인가 제일인가, 좌우간 학교는 쉬는 날) 나는 이층 문턱에 걸터앉아 역시 그러한 꿈을 꾸고 있을 때에, 문득 (이즈음 생시에나 꿈에나 늘 들리는) 환성이, 이번은 사람의 육성으로 들렸다―.

“아더(Arthur).”

나는 펄덕 놀라서 머리를 그리로 돌이켰다.

?

길을 지나가는 사람은 ‘그’의 오빠와 ‘그’의 어머니, 두 사람뿐이었었다. ‘아더’라 한 것은 아들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였었다.

그렇다, 아더라는 것은 무론 사내의 이름일 것이었었다. 내가 아직껏 ‘그’의 이름으로만 알고 혼자 기뻐하며 세상에 다시 없는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던 ‘아더’는 얼토당토않은 다른 사람,― ‘그’의 오빠의 이름이었었다.

어린이에게는 어린이의 감정과 공상이 따로 있는 것과 같이 또한 어른이 짐작도 못하는 어린이의 자존심이 있다. 신성함을 유린당한 노여움은 맹렬히 나의 마음속에 불타 올랐다.

이튿날 학교에 갈 때는 벌써 나의 교과서는 어젯밤에 새로 산 책뿐이었었다. 낡은 책은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렇듯 자존심을 밟힌 ‘아더’라는 이름이 페이지마자 씌어 있는 교과서를 차마 가지고 다닐 수가 없었던 때문이었었다.

그 뒤에, 여러 방면으로― 그러나 소년의 자존심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알아본 결과, 그의 아버지는 일본 사내와 서양 여자의 새에 난 혼혈인이며, 그의 어머니는 영국 사람이라는 점과 그의 오라비는 하나는 아더(Arthur)요 하나는 토미(Tommy)로서, 그 일본 발음 아사(アサ)와 톰미(トンミ)는, 마치 아사(淺)와 또미(富)에 통하므로, 일본 이름으로는 형은 아사따라우(あさたらう: 淺太陽)이요 아우는 또미지라우(とみぢらう: 富次郞)라는 점과, ‘그’의 이름은 메리(Mary)라는 것까지 알았다.

그 뒤에 나는 새로운 교과서의 페이지 페이지마다, Mary라는 글자가 이전의 Arthur보다도 더 많은 수효로 쓰인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Mkairmy라는, 어떤 옥편을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는 스펠은, 책 앞뒤 뚜껑에 화형문자로 장식되었다. M자와 K자를 얽어서 만든 여러 가지의 도안이 복안되었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었다. M, A, R, Y의 넉 자는, 그 넉 자가 합하여 된 한 단어로뿐 아니라, 그 단자(單字) 개개로도 내게는 뜻깊은 글자와 같이 보였다. 옥편을 뒤적이면서 M자의 부에서 혹은 A자, 혹은 R, 혹은 Y자의 부에서 불유쾌한 단어라도 발견하면 나는 그러한 신성한 글자의 부에 그런 불유쾌한 단어를 잡아넣은 영국말을 저주하도록 그 글자 개개를 신성시하였다. 겨울이 이르면서, 우리의 베이스볼 연습은 중지되었다. 그 대신 나의 심호흡과 아령 운동은 그 도수가 늘었다.

그리하여 X마스가 가까운 어떤 날 아침 아령 운동을 나갔던 나는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열렸을) 그의 집 이층 아마도가 아직 안 열린 것을 보았다. 심호흡, 다시 아령, 다시 심호흡, 몇 번을 거푸 하였으나 굳게 닫힌 그의 문은 열리지를 않았다.

조반도 대충 먹고, 다시 올라와 보았지만, 덧문은 그냥 닫겨 있었다. 학교의 시험도 어찌 치렀는지 정신없이 치르고, 빨리 집으로 돌아와 보았으나 문은 그냥 닫겨 있었다.

덧문은 이튿날도 안 열렸다,

저녁때에, 무심히(라고 생각하는 하나, 과연 얼굴빛도 변치 않고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주인 노파에게 그 집 덧문이 안 열린 것이 이상하다 하매, 노파는 곧 대답하였다.

“아마, 피한이라도 간 게지요.”

간단한 결론이었었다. 그러나 또한 그럴듯한 결론이었었다. 나는 어찌하여, 그만치 간단한 결론을 발견 못하였던가.

겨울방학과, 새해, 학비의 증액 등으로써 모든 유학생들이 기쁘게 날뛸 때에도 사랑하는 이의 거처를 잃어버린 외로운 소년은 더욱 음울한 얼굴로 그들과 떨어져 홀로이 놀았다.

제3학기! 나는 얼마나 그것을 기다렸으랴. 그것은 결코 공부에 취미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메리의 몇 형제도 모두 학생인지라, 새학기에는 돌아오리라 하는 바람으로 였었다.

그러나, 신학기에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좀 늦었나 하고 스스로 위로를 하여보았지만, 2월 중순까지 안 돌아오는 것을 볼 때에 마침내 단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결심하였지만 단념은 못 하였던지, 그 뒤 삼학년 교과서에도 온갖 곳에 메리의 이름이 적히어 있다. 한문 교과서에 적힌 ‘따치메야우까(斷めやうか― 단념해야 할까)’의 한 마디는 사랑하는 이의 거처를 잃어버린 소년의 쓰라린 마음을 나타내기에 넉넉하였다. 한 시간의 지각을 부끄러운 일이라 하던 얌전한 학생의 ‘무고결석’의 수효가 엉뚱히 많아진 것도 이를 말함이다.

‘사랑은 괴물이라’ 하였다. 누가 발명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 괴물에게 유린당한 소년의 마음은, 확실히 쓰라리었다. 어른의 사랑에는 보수를 요구한다는 교환적 조건이 있으되, 이 소년에게는 그러한 마음은 없었다. 자기가 사랑하고 싶으니 사랑함이지, 저쪽의 마음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가령 메리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의 어린 마음에도 미상불 시기의 보기 흉한 불길이 타올랐겠지만, 그때의 순되고 어린 마음에는 ‘외쪽 사랑’에 대하여서는 조그만 불만도 없었다. 때때로 보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살기만 한다면 그 이상의 바람이 없었다. 서로 말을 한다든가 사괸다든가 할 생각은 하여본 일도 없었다. 뿐만아니라 오히려, 그럴 기회가 있다 할지라도 부끄러움은 나로 하여금 그런 일에서 몸을 피하여 감추게 하고, 다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리라.

나는 그 뒤에 다시 그를 보지를 못하였다. 그의 소식조차 들을 길이 없었다.

그해 가을, 인제는 벌써 삼학년생이노라고, 목을 넘겨서 메던 책가방을 왼편 어깨에 걸친 뒤에, 학교에서 돌아오던 나는 저편에서 오는 (양장한 소녀의 탄) 인력거를 보았다.

내가 정신을 잃으렷다 생각한 순간은 벌써 눈이 아득하여 시각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인력거가 내 앞까지 오기 전에 시각을 회복한 나는 그 소녀가 메리가 아닌 것을 알고, (오히려) 숨을 내어 쉬었다. 이것이 나와 그(?)의 표면적 사굄과 마지막이었다.

꿈과 같은 사랑이었다.

메리―. (그가 아직 살아 있다 하면, 벌써 스물 일여덟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론 자기의 어린 시절에, 어떤 조선 소년이 자기에게 그다지도 사랑 바쳤다 하는 것은 꿈에도 모를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때의 꿈의 그다지도 아름답고 애처로웠음이여. 그리고, 그 꿈을 잃어버린 뒤의 상처의 아팠음이여.

소년의 꿈은 무참히도 깨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받은 상처는 컸다. 이래 십수 년, 많은 여인을 보고, 많은 연애할 기회를 가졌었지만, (다만 한 번의 예외를 제하고는) 유희 기분이 안 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는 일이 없는 것은 모두가 그때의 그 영향의 지속이었었다. 말없고 음울하던 소년이, 죽을 힘을 다하여 자기의 성격을 쾌활하고 논끼(のんき―만사 태평)한 청년으로 변케 한 것도 그때의 그 상처의 아픔을 재현할 기회를 없이하기 위하여서였었다.

이렇듯, 나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빛나는 금발과 투명되는 피부의 소유자 메리는 나의 생애에는 영구히 잊지 못할 꿈과 같은 심볼이다.


中島芳江(나까지마 요시에)

편집

나는 그가 미인인지 아닌지를 모른다. 내가 그에게 손톱눈만치라도 사랑을 가졌었는지 이것조차 의문이다.

나는 그의 얼굴도 잊었다. 자태도 잊었다. 목소리도 잊었다. 다만 나의 기억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주홍빛 바탕에 붉은빛과 초록빛으로 당초(唐草) 모양으로 무늬 놓은 그의 하오리(はおり―일본 옷의 위에 입는 짧은 겉옷)와 창백하던 얼굴빛과, 동글납작하던 윤곽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6년 7월 16일에 백금대정 전차 정류장에서 본 그의 두 눈알이었다.

소년의 물과 같이 맑은 마음에 메리라는 블론드의 아름다운 컴마가 찍히기 비롯할 때부터, 나의 동거자 R은 우리 하숙 곁에 있는 어떤 일본 계집애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나는 열여섯 살이요, R은 나보다 한두 해 위였었다.

그 계집애― 고바야시 끼미꼬(小林君子)는 아직 심상소학교에 다니는 열서넛에 난, 천민 가운데 흔히 있는 가련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계집애였었다. 입술이 보이지 않도록 얇았으며, 웃을 때에는 눈이 반원형의 선이 되어 버리며 웃음소리조차 갈린 듯한 소프라노로서, 더러운 개울창 가에 몰래 조그맣게 피었다가 져 버리는 꽃과 같은 인상을 주는 계집애였었다.

“긴상, 이뻐. 그렇지?”

끼미꼬(君子)가 제 벗들과 함께 우리 집 앞에서 공을 받으며 혹은 조악질을 하며 노는 것을 문틈으로 내다보면서, R은 몸을 고민하듯이 떨면서, 때때로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메리라는 아름다운 대상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그러한 말이 아무 뜻도 없는 말이었었다. 응, 이뻐, 이러한 입술엣 대답을 할 뿐 그 뒤에는 눈앞에 메리의 그림자를 그려보고는 혼자서 빙그레 웃고 하였다.

사랑하는 소년은 소담하였다. 그 계집애들이 우리 집 앞에서 놀고 있을 때는, R은 볼 일이 있을지라도, 문밖에를 나가지를 못하였다. 부득이 나갈 일이 생길 때면, 그는, 문안에서 한참 허든허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다가 문을 열고는 달음박질하여 뛰어나가고 하였다.

그러나, 그 계집애며 그 계집애의 동무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는 다만 한낱 길옆에 풀 떨기에 지나지 못하였다. 더구나 메리라 하는 둘도 없는 귀한 보배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다른 계집애들은 모두 다만 ‘사람’이지, ‘이성’이라는 명칭으로서 생각하여 본 적도 없었다.

“끼미쨩, 오햐요오(君ちゃん, お早う―끼미 양, 잘 잤어요?).”

“끼미쨩 곤니찌와(君ちゃん, 今日は―끼미 양, 안녕).”

서슴지 않고 쾌활한 인사가 끼미꼬를 만날 때마다 나의 입에서 솟았다. 이러한 모든 일이 R에게는 불쾌한 듯하였다. 내가 끼미꼬며 그의 동무들과 함께 까루타(カルタ―화투)를 하며 혹은 그림책을 구경하며 놀 때에도 소담한 R은 멀리 떨어져서 읽지도 않는 책을 뒤적이며 있고 하였다.

그러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을 어둡게 하는 동시에 또한 그 ‘길’에는 뜻밖에 지혜가 생기게 하는 것이었었다.

끼미꼬에게는 미쯔꼬(みつこ: 滿子)라 하는 팔구 살 난 어린 동생이있었다. R은 어떤 날 색연필 한 더즌을 사다가 그 미쯔꼬에게 주었다. 삼사일 뒤에는 공책 몇 권을 사 주었다. 그날 저녁, 끼미꼬는 정식으로 그 색연필이며 공책에 대한 사례를 R에게 하였다. 이리하여 R과 끼미꼬의 새에 첫 말은 사괴어졌다.

그날 밤, R은 흥분으로 잠을 못드는 모양이었었다. 우두커니 누워있다가는 헛소리같이 긴상, 끼미꼬가 아까 여사여사하는데 참 이쁘거든 하고는 가슴을 두드리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름다운 세계의 그림이었었다. 아직 사랑이라 하는 것을 모르는 소녀와 사랑은커녕 성에 대하여서도 얼마간 눈이 뜬 소년 R과의 교제는 세상에 기묘한 아름다운 비극이었었다. 게다가 그 사회를 온전히 초월한 듯이 중립하여 있는 소년 김동인이가 있었다. 메리에게 대한 애끓는 사랑을 가슴 속에 깊이 감추고, 눈을 감고는 메리를 생각하고 눈을 뜨고는 R과 끼미꼬의 사랑(?)을 냉시하는 나도, 그 아름다운 비극을 국외로 장식하는 한 광대이었었다.

사실, 그때의 R의 번민은 컸었다. 아직 사랑이라는 것에 눈이 뜨지 못한 끼미꼬의 R에 대한 태도는 R로써 더욱더 번민케 하였다. R이 무엇을 선물로 사다 주면 끼미꼬는 가느다란 눈을 올려뜨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만― 혹은, 자기의 마음이 돌아지면 R과도 희희히 놀지만 부러 R을 찾아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으며 더구나 자기가 동무들과 즐겁게 놀 때에는 R이 그 곁을 지날지라도 무시하여 버리기는커녕, 냉대하는 태도도 보였다. 이러한 모든 일이, R에게는 번민의 재료이었다. 때때로 계집애들이 길에서 조악질을 하는 것을 R은 문틈으로 내다보다가는 번듯 자빠지며 가슴을 두드리고 하였다. 긴상, 일본 마누라를 얻으면 남들이 욕 안 할까 이런 근심까지 하였다. 이런 태도를 보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나 나는 속으로 메리를 생각하며 혹은 내가 메리에게 대한 사랑이 R이 끼미꼬에게 대한 사랑보다 적지나 않은가 부러워하며 혼자 분해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었다.

그 끼미꼬와 만날 같이 노는 동무 가운데 나까지마 요시에(中島芳江)가 있었다. 주홍 바탕에 당초 무늬 모양의 하오리(はおり) 겨드랑이 구녕에 늘 손을 찌르고 있는 창백하고 동글납작한 얼굴의 주인으로서 학교가 하학한 뒤에는 늘 끼미꼬와 함께 우리 집 앞길에서 놀고 하였다.

어떤 날, R은 문득

“긴상, 요시쨩을 긴상 애인으로 정하지.”

하고 발의를 하였다. 나는 그래 둘까 하여 버리고는 또한 속으로 메리를 생각한 뒤에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랬더니, R은 그 뒤부터는 요시에(芳江)를 나의 애인으로 정하여 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겨울이 이르면서, 메리의 종적이 없어지고 말았다. 잠못 드는 밤마다, 남몰래 이불 속에서 쉬는 어린 동인의 한숨은 얼마나 컸던가. 나까지마 요시에? 그 따윗 계집애 백만을 모을지라도, 메리의 머리 터럭 한 올에도 비기지 못할 것이었다. 밤마다, 낮마다, 메리의 있던 집을 바라보고는, 열릴 길이 없는 덧문의 열리는 날을 기다리면서 애타 하던 나는 마침내 병석에 넘어지게 되었다.

긴상 애인이 이 앞에 노는데, 내 데리고 올라올까? R은 나를 위로하느라고, 때때로 이런 말을 하였다. 차를 따라서 요시에의 손으로 나의 방에 보내어 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일어난 불길을 조금이라도 꺼 줄 수는 없었다. 요시에의 노란 머리털(그는 머리털이 꽤 노랬다)을 바라보면서 네가 메리였다면 얼마나 이 마음이 기쁘겠느냐, 혼자서 한숨을 쉬고 하였다.

한 달이 넘은 뒤에, 나의 병도 나았다.

늦은 봄 어떤 날, 나는 메리의 있던 집 근처로 혼자서 산보를 나섰다. 그리하여, 굳게 닫긴 덧문에 원망의 눈을 던진 뒤에, 성심여학원 쪽으로 좀더 갔을 때에, 어떤 줄행랑 달린 커단 집 대문간에서 그 집에서 뛰어나오는 요시에와 마주쳤다.

당신 집이 여기냐고 물으니까,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며 숨을 허덕이며 그러하노라고 하면서, 집에 들어가서 놀자고 나를 끄을었다. 문패를 쳐다보니, 커다란 대리석에 ‘中島 ×××’이라 한 문패가 걸려 있었다. 나는 아리가도오(有難ふ―고맙다)한 뿐, 그냥 산보를 계속하였다. 그의 적적한 눈이 나의 등을 따라오는 것을 똑똑히 의식하면서….

그 뒤 어떤 날, R과 함께 야시 구경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었다. 돌아오는 길에 방정(芳町)이라는 조그만 골목이 있었는데, 그 골목으로 오면 얼마간 지름길이 되므로, 나는 그 방정을 꿰어서 가기를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R은 정색을 하면서,

“긴상은 요시에(芳江)가 애인이니까 방정(芳町)으로 가구료. 군자(君子)는 대로행(大路行)이야, 난 큰길로 갈 테야.”

하고, 돌림길을 하여서 돌아왔다. 그 뒤부터, 나는 끼미꼬를 다이로꼬오(だいろこう)라고 불렀다.

“다이로꼬오상(大路行さん).”

“이야요!(いやよ―아니에요)”

“다이로꼬오! 다이로꼬오!(大路行! 大路行!)”

“아따시 조센노 가와쟈 나이와(あたし, 朝鮮の川ぢゃないわ―저는 조선의 강이 아니예요).”

미상불, 끼미꼬는 다이로꼬오(だいろこう)를 다이도꼬오(だいどこう―大同江)로, 그릇 듣고 자기를 대동강이라고 부르는 줄 안 모양이었다. 내가 끼미꼬를 대로행이라 부를 때마다, R도 같이 그렇게 부르면서, 불쾌한 듯이 낯을 찡그리고 하였다.

봄도 다 가고, 여름방학이 가까운 학기시험 때였었다.

그 날, R은 머리가 아프다고 학교는 그만두고 누워 있었다. 내가 학교를 끝내고 막 돌아오려는데, 주인 노파가 씩씩거리며 나를 맞으러 왔다.

“큰일났읍니다. 야기상(やぎさん‧주인은 R을 이렇게 불렀다)이 목을 맸읍니다.”

무얼? 집으로 달려와서 보니까, R은 충혈된 눈을 미친 사람같이 휘번득거리며 누워 있었다.

어린 마음에 과한 사랑은, 그로써 정신에 이상이 생기게 한 것이었다. R은 그 날로 조도전(早稻田)에 있는 자기 형에게로 갔다.

학기시험도 끝나고, 오래 기다리던 귀국하는 날이 이르렀다. 1916년 7월 16일.

짐을 다 꾸려서 구루마로 정거장으로 보내고, 나는 주인과 작별을 하고, 전차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좀 가다가,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다보니까, 여름 옷을 살핏이 입은 요시에가 할딱거리며 쫓아온다.

“오늘 귀국합니다.”

“이제 들었세요.”

이 말뿐 말없이 전차 정류장까지 이르렀다.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는 나의 뒤에 꼭 붙어 서 있었다. 전차가 이르렀다. ‘귀국’이라 하는 즐거운 일을 앞에 놓은 소년은 사요오나라(さようなら―작별인사) 한 마디로 쾌활히 전차에 뛰어올랐다.

“아끼니네(秋にね―가을에요).”

겨우 한 마디의 조그만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흐를 뿐이었었다. 땡땡 소리와 함께 전차는 떠났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떠나는 전차를 바로 보았다. 약간 눈물이 고인 듯한 그의 눈은, 마치 진주와 같이 우아하였다. 거리의 멀어짐을 따라, 차차 그의 그림자는 작아 가지만, 그의 그 두 눈알 뿐은, 마치 암야의 바다의 등대와 같이 뚜렷이 그의 몸을 벗어나서, 전차의 뒤를 따라왔다.

그로부터 십수 개년, 많은 눈을 보고, 많은 이별을 보았지만, 그러나 아직껏 그렇듯 맑고 아름답고 근심으로 찬 눈을 본 일이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한 일이 없었다. 그가 내 곁에 있는 것이 유쾌하다고 생각하여 본 일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의 그 두 눈알 뿐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나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의 하나이다.


萬造寺 あき子(만조사 아끼꼬)

편집

1918년,― 그때는, 나는 아버지를 잃는다는 일과, 결혼이란 인생의 커다란 두 사건을 겪은 다음이었었다. 그해 가을, 나는 다시 동경으로 갔다.

열아홉 살,― 소년기에서 겨우 청년기에 들어선, 이 숫젊은이는, 마음속에 예술에 대한 동경과 문학욕을 채워가지고, 다시 학창엣 자기를 발견하려고 각 학교의 규칙서를 책상 위에 벌여 놓고 고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학원서를 천단화학교(川端畵學校)에 들어뜨렸다.

그러나, 학교에는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F 화백에게 미학에 대한 강술을 들으러 다녔다. 일본 양화단(洋畵壇)의 중진 F 화백은, 후진을 인도키 위하여, 몇 사람의 문제(門弟)를 두고, 자기의 가지고 있는 온갖 지식을, 그 문제들에게 물려주려 하였다. 나도 그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목적한 바는 결코 그림을 배우고자 함이 아니었었다. 미학에 대한 기초 지식과, 그림에 대한 개념을 얻는 것, 이것이 나의 목적이었었다. 그런지라, 이 갸륵한 문제(門弟)는, 석고상 한 번을 모사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 F 화백의 문제 가운데 아끼꼬(あき子)가 있었다. 눈이 크고 광채가 있으며, 뺨에 살이 풍부하고, 유난히 끝이 뾰족한 손가락 끝에는, 몹시 반짝거리는 연분홍빛 손톱이 박혀있고, 언제든 즐겨 붉은빛이 많이 도는 옷과, 붉은 리본과, 붉은 신을 신었다.

그러나, 성격상 비교적 여자에게 냉담한 나는 그에게도 그다지 별한 느낌을 가져 보지를 못하였다. 길가의 풀 떨기, 처음의 나의 눈에 비친 그는, 역시 여기 지나지 못하였다.

그는 다혈질의 여자였었다. 그리고 철학자와 같이 이론을 캐기를 좋아하였고, 참새와 같이 지절거리기를 좋아하였다. F 화백이 한참 미학을 강술할 때에, 흔히 아끼꼬의 기상천외의 질문은, 문제들로 하여금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어떤 날 화백이 ‘단순미’와 ‘구성미’에 대하여 강술을 할 때였었다. 아끼꼬가 문득 얼굴이 벌겋게 상기가 되면서 선생을 찾았다―.

“선생님, 모두들 저를 미인이라 합니다. 치만, 제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것이 없어져도 저는 그냥 미인이겠읍니까, 어떻겠읍니까. 감정해 주세요.”

화백도, 이 뜻밖엣 질문에, 그만 고소(苦笑)하여 버렸다―.

“말괄량이, 조용 해라.”

“감정해 주세요.”

“가만 있어!”

“싫어요. 감정해 주세요.”

억지 쓰려는 아이와 같이 그의 눈은 별하게 쫑그러지며,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졌다.

“표정이 있어도, 너는 미인이 아니다.”

화백은 그만 웃으면서 이렇게 단언을 내려 버렸다. 아끼꼬도 이 대답을 듣고야, 만족한 듯이 하하하하 웃어 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러한 사람이었었다.

그러나, 강술이 다 끝나고 각기 돌아가렬 때였었다.

“흥! 선생님은 나를 미인이 아니라고 그랬겄다.”

보를 싸고 있던 그는 화백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화백에게까지 들리게 이렇게 나무람하였다. 들어가려던 화백은 발을 멈추고 돌아보고 웃었다. 아끼꼬도 픽 하니 웃어 버렸다.

아직껏, 그에게 대하여 아무런 호기심도 가지고 있지 않던 나는, 왜 그런지, 이날의 이 한 막뿐은, 마음속에 깊이 들어박혔다.

“말괄량이.”

그날 밤, 나는 몇 번을 혼자서 뇌어 보고는, 빙그레 웃고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 십여 일 뒤였었다. 장래에 문학자가 되려는 커다란 야망을 품고 있는 이 젊은이는 어떤 날 저녁 신전(神田)의 낡은 책방에서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네, 네(ね, ね).”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누구를 찾았다. 나는 책방의 마누라가 제 그 지아비를 찾는 소리로 알고, 그냥 책을 뒤지고 있었다.

“네(ね).”

향내가 물컥 나며, 누가 내 옷소매를 잡아 다니므로 돌아보매 거기 아끼꼬가 있었다.

“당신, 조선인이지요?”

이 계집애가 무슨 소릴 하나, 나는 갑자기 반항적 마음상이 되어서, 그렇소 한 뿐 또다시 다른 책을 뽑아내었다.

“헨네(變ね―이상하네요).”

“?”

“헨요(變よ―이상해요).”

“난가데스까?(何がですか? ―무엇이 말입니까?)”

“아나따와 죠센진데세우? 헨쟈나이노?(あなたは朝鮮人でせう? 變ぢゃないの―당신은 조선인이죠? 이상하지 않아요?)”

“소오데스까?(そうですか―그렇습니까)”

“헨찌꾸린노, 다이헨찌꾸린. ―사아 오오끼마세우(へんちくりんの, 大へんちくりん.―さあ往きませう― 이상해 매우 이상해 ―자, 오세요)”

그는, 내가 당연히 자기를 따라오리라는 굳은 신념을 가진 듯이, 휙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나도 바삐 보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 버리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와 나의 첫 교제는 이리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차차 전개된 그와 나의 교제는 이상하고도 기괴한 교제로 되어버렸다.

서로 악의로서 찬 눈으로 마주 바라보다가는, 뜻하지 않고, 서로 탁 달려들어서는 제각기 비상한 열정으로 상대자의 입술을 찾는다. 이러다가 겨우 서로 만난 입술은, 마치 몇 해를 서로 떨어져 있던 사람들과 같이 맹렬히 서로 빨고 빨리운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의 순간에도, 그다음 순간에 생겨날 불유쾌한 마음 상을 서로 잊지 않고 있다. 누구든(나 혹은 그)가, 먼저 탁 상대자를 밀쳐 버리고, 더럽다는 듯이 침을 탁 배앝는다.

“뚱뚱보! 돼지!”

“전선대!”

“스베따!(すべた―호박)”

“후누께!(ふぬけ―얼간이)”

“입 또 한 번 맞출까?”

“싫여! 더러워!”

“네가 더럽다.”

이러한 욕설을 서로 퍼부은 뒤에, 몹시 불유쾌하여져서 사요오나라(さようなら)의 한마디도 없이 작별을 한다.

대단한 피곤― 그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온 때마다, 그것은 마치 아편의 꿈과 같이 간지럽고도 녹는 듯한 피곤에 잠겨서 아끼꼬의 일을 생각하며, 다시는 어떤 일이 있든 그와 만나지 않으려 굳은 결심을 몇 번이나 하였던가. 그러나, 밝는 날 화백의 집에서 다시 그를 만나고, 그곳서 헤어질 때에, 그가 내 곁으로 지나가면서, 작은 소리로, “따라와요”하고 가면은 나의 몸은 온갖 나의 이성에 반하여 그의 뒤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전개되는 것은 역시 기괴하고도 숨막히는 찰나― 그다음에 계속되는 것은 권태와 증오의 시간.

화백의 집에서는 그는 나를 아는 체 안 하였다. 하, 아, 아, 아, 마치 칠면조의 소리와 같은 센티멘탈한 그의 웃음소리가 돌발적으로 방 안을 울리어서, F 화백이며 문제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나에게는 곁눈질을 하여 보는 때조차 없었다. 간간, 오일을 부러 나 있는 쪽으로 뿌린 다음에는, 몹시, 정녕히, “실례했읍니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 그와 나와의, 화실에서의 가장 가까운 교제였었다. 그런 때마다, 나도 정녕히 “천만엣 말씀”이라고 대꾸를 한 뒤에는, 속으로 흐흐 웃고 하였다.

모든 문제들은 아끼꼬의 환심을 사려 하였다. 그리고 아끼꼬는 아끼꼬로서, 그들의 마음을 또한 다 만족시켰다.

“당신 얼굴은 참 좋아요. 한 번 그려 보고 싶어.”

“당신이 나를 미인이라고 그랬지요. 언제 그 은혜를 갚나?”

“어떤 행복스런 계집애가 당신의 마누라가 될까.”

“나는 당신 집 한 번 가보고 싶어.”

이러한 말로써, 온 문제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런 일을 보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귀한 보배를 혼자 가졌다는 자랑과 거기 따르는 괴상한 시기를 느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아끼꼬와 만날 때는, 아끼꼬를 핀잔주고 하였다.

“××란 녀석하구 연애를 해 보구료.”

“해봐? 벌써 하는 건 어찌 하구.”

“에익, 음탕한 것!”

“하, 아, 아, 아, 아.”

그 뒤에는 또한 증오에 불붙는 눈과 눈. 다시 전개되면서는, 열정에 불타오르는 입술, 숨막히는 긴장. 다시 떨어지면서, 증오, 욕설, 분, 작별. 그날 밤의 불유쾌한 기분.― 이것이 그와 나와의 교제였었다.

이러한, 기괴한 연애의 석 달이 지나갔다.

그것은 동경 유학생의 새에도, 몹시 이상한 기분이 충일된, 1919년 2월 그믐께 어떤 날이었었다. 당시에 일고(一高)에 다니던 주요한과 같이, 청년회관에서 어떤 일로 밤을 새운 뒤에, 우리 하숙 앞에서 요한과 작별하고, 나는 곧 F 화백의 집으로 갔다.

그 날은, 인체 묘사의 둘째 날이었었다. 그런데, 모델로 말해 두었던 계집애가 고뿔이 들려서,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욱적하고들 있었다.

“걱정일세.”

“어쩌나.”

“망할 놈의 고뿔.”

이러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한창 이럴 때에, 뜻밖에 아끼꼬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선생님 내 모델이 되리까, 하더니, 대답도 나기 전에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모델대 위로 올라갔다.

모두들 벙벙하여졌다. 붓을 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F 화백도 어망처망한지, 아무말도 못하고 모델대를 바라볼 뿐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을 잘 아는 나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뜻밖엣 일도 아니었었다. 아끼꼬의 성격으로는 넉넉히 할 일이었었다. 그래서 곁에 있는 친구에게,

“좋은 돼지야. 햄을 만들면 맛있겠지.”

하였더니, 그 친구는 신성함을 모욕당한 것같이 눈으로 무섭게 나를 꾸짖고 얼른 머리를 돌이키고 말았다.

그러나 그 말의 결과는 의외로 나타났다. 모델대 위에서 포즈를 하느라고 몸을 비꼬고 있던 아끼꼬가 쪽 발가벗은 채로 뛰어 내려와서 내 앞에 딱 버티고 섰다.

“당신이 나보고 무슨 이야길 했지요?”

그의 기가 너무 승승하므로 나는 미처 대답을 못 하였다. 그리고 그의 진의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조센진(朝鮮人)! 야마자루(やま猿―촌놈).”

“나니?(なに―뭐)”

나도 또한 벌떡 일어섰다. 이때의 나의 분노는 나로 하여금 눈이 어두워지게 하였다. 성적 충동에 못 이겨서 서로 주고받던 온갖 욕설은 아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민족적 차별이 낳은 욕설이 그에게서 나올 때에,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온갖 교양과 예의와 도덕을 잊어버리고 주먹을 들어서 벌거벗은 그의 젖가슴을 쥐어박았다. 그리고 미친 사람같이 허든허든 모자를 뒤집어쓰고 야만인, 조선인, 때려라, 두들겨라 하는 온갖 소리를 뒤로 남기고 그 집을 나섰다.

그 뒤에는 다시 F 화백의 집을 갈 기회가 없었다. 이리하여 삼월 초닷샛날, 급한 집의 전보로 귀국하였던 나는 삼월 스무엿샛날 마침내 출판법 위반이라는 명목 아래 경찰의 손에 붙들렸다.

경찰서에서 감옥으로,― 이러한 석 달 동안 나의 마음은 괴상히도 서로 싸우고 헤어진 그의 위에 헤매었다. 그의 풍부하던 살과 빛나던 눈, 몹시도 기괴스럽던 그의 웃음소리, 육감적이던 그의 숨소리, 끝이 빠르던 그의 손가락, 이런 것을 생각하고는 성적 충동 때문에 몸을 소스라치고 한때가 몇 번이었는지 알 수 없다. 풍만하던 그의 젖가슴을 꿈에 보고는 숨을 허덕이며 깨어서 긴 한숨을 쉰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유난스러이 끝이 뾰족하던 손가락과 반짝거리던 분홍빛 손톱 끝은 때를 가리지 않고 나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러다가 유월 스무엿샛날, ‘육개월 징역, 이개년 집행유예’라는 판결 아래 감옥에서 나온 나는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고를 물리치고 칠월 중순에 다시 동경으로 떠났다. 나의 유일의 목적은 다시 한번 아끼꼬를 보고 싶은 것뿐이었었다.

그러나 다시 동경에 이른 나는 거기서 실망하였다. 아끼꼬의 집은 이사를 하였으며 F 화백에게도 인젠 다니지 않는다 한다. 그러면 이 너른 동경 바닥에서 그의 집을 어찌 찾아내나.

그러나 하늘에서 타고난 무서운 자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어찌하여서든 그를 찾아내려 하였다. 나의 마음은 극도로 주렸다. 양식을 요구하였다. 풍만한 육체― 얼마나 그때의 나의 마음을 끄으는 말이었으랴. 그래서 만조사(萬造寺)라는 성이 드문 것을 유일의 바람으로 각 우편국과 순사 파출소를 순례를 하기를 결심하였다. 그때 태령도(太靈道)에 적을 둔 나는 아침에 잠깐 국정(麴町)에 있는 태령도 본원에 몸을 나타내었다가는 낮부터 밤까지는 각 파출소와 우편국을 돌기에 시간을 보냈다.

여드레째 되는 날, 하삽곡(下澁谷) 어떤 곳에서 마침 그의 집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찾기는 찾았으나 찾지 못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신은 조선 사람이지요. 나는 일본 사람이에요.”

쌀쌀한 이 한 마디뿐이었었다.

나는 그날 밤차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그와 나와의 관계는 온전히 끊어졌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을 나는 때때로 그의 풍만하던 몸집을 꿈에 보고는 성적 흥분으로서 몸을 소스라치고 하였다. 그리고 길에서 때때로 풍부한 뺨을 가진 여인을 볼 때에는 언제든 아끼꼬를 생각하고는 다시 한번 만나면 하였다.

그리하여 육년이 지나서 1925년 여름, 그때에 두 번째 방탕을 시작하여 술과 계집의 하루를 보내고는 다시 새로운 술과 계집의 날을 맞는 것으로써 그날그날을 보내던 나는 어떤 날 어젯밤의 술이 아직 깨이지 않은 상태로서 신시가 어떤 귀금속점에 볼 일이 있어서 내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일을 다 보고 다시 올라올 때였었다. 나는 맞은편으로부터 오는 어떤 풍부한 뺨을 가진 일본 여인을 보았다.

“아끼꼬로구나?”

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마음으로서, 이렇게 놀랄 때에 그도 내 맞은편에 와서 딱 섰다.

“아라!(あら―어머나)”

“시바라꾸(しばらく―잠깐).”

그는 아끼꼬였었다. 그와 동반하여 오던 어떤 일본 사내는 한 번 나를 유심히 본 뒤에 지나가 버렸다.

“어떻게 예까지 오셋어요?”

“참, 긴상 고향이 평양이지요.”

“네.”

“나는―.”

그는 숨을 허덕이며 벌써 저편으로 지나간 아까의 동반자를 몰래 손가락질하였다―.

“여행 왔세요.”

“신혼?”

그는 얼굴을 붉히고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아노네(あのね―저 말이예요).”

“네?”

“놀러 오세요.”

“가지요.”

“유옥(柳屋) 호텔이요. 저녁때 혼자서 기다릴 때 꼭 오세요.”

“나는 이제 낮차로 안동현(安東縣)을 갑니다. 그러니깐 호텔로는 놀러 못가겠읍니다.”

나는 자기로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여 버렸다.

“안동현? 안동현 어느 여관에 묵으세요?”

“안동 호텔.”

“우리도 오늘 밤차로 안동으로 가는데 그럼 거기 먼저 가서 기다려 주세요. 꼭요. 꼭 이야기할 게 있세요. 꼭! 꼭! 네!”

“그러지요.”

이리하여 그와 작별한 나는 그 날의 나머지를 어떻게 지냈는지 자기로도 알지를 못하였다. 내가 정신을 차린 때는 벌써 황혼이 지났으며 나는 대동교(大同橋) 위에 가서 정신없이 패수(浿水)의 흐름을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었었다.

그 뒤에는 그를 보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 풍만스럽던 육체와 괴상스럽던 웃음소리는 지금도 때때로 나의 숨을 막히게 하며, 나로 하여금 성적 흥분을 느끼게 한다.

그도 또한 나의 생애에는 잊지 못할 여인의 하나이다.


나는 M의 일을 쓰려는 붓을 던져 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의 꿈과 같은 그와 나와의 교제는 영구히 우리 두 사람의 마음속에 비밀로 장사하여 버리고 마는 것이 그를 위하여 온당한 일이라 생각되므로 잡았던 붓을 다시 놓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금도 때때로 그를 거리에서 본다. 그러나 단란한 가정의 어진 지어미로서 이름 높은 그는 나를 만날지라도 모른 체하였다. 나도 또한 아는 체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사람 없는 좁은 길에서 그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때에 그는 얼굴빛이 변하며 머리를 수그리고 빨리 지나가 버렸다. 나도 걸음을 빨리하여 지나갔다.

이런 일로 미루어서 그의 일을 세상에 발표하는 것을 나는 꺼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와 나의 두 사람 밖에는 아무도 모르는 어린 시절의 짧고도 아름다운 꿈은 영구히 우리 두 사람의 마음 깊은 데 감추어 두고 우리뿐이 때때로 회상하여 보고는 아름다운 그의 꿈에 마음을 잠글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金玉葉(김옥엽)과 黃瓊玉(황경옥)

편집

1921년 봄,― 그때에 스물두 살 난 나는, 어떤 회사의 발기인회에 참석키 위하여 상경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처음으로 기생을 보았으며, 기생의 취미를 맛보았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 전에도 못 본 바는 아니었었다. 예수교식의 교육과, 도학적 교훈 아래서 길러난 나는, 아직껏 받은 교양의 결과로서, 기생이라 하는 인생을 더럽게 여기고, 기생과 노는 젊은이를 경멸하는 제이 천성은 가졌을망정,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호탕한 천성과 내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지은 방분스런 성격과는, 그 제이 천성을 누르기에 넉넉하였다. 그리하여, 그 전해 겨울에도 몰래 서너 번 요리집서 기생이라는 인생을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그 몰래 몇 번 본 것은, 나로 하여금 그 방면에 대하여 더욱 호기심을 일으키게 한 데 지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생을 데리고 노는 젊은이들을 패자라 경멸하면서도, 가까운 장래에 얼굴을 감추지 않고 요리집에 드나들 나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극히 사소한 일이 남쪽 끝에서 생길지라도, 두 시간 이내에 그 소문이 북쪽 끝까지 퍼지느니만치 작은 평양서는, 한 번 마음 놓고 놀 기회가 없었다. 예수교의 신앙은 잃었을망정, 얌전한 젊은이― 교양있는 신사― 깨끗한 청년, 이러한 부름을 받고 있는 나로서는, 마음속에 화류계에 대한 비상한 호기심을 가지고도, 내놓고 그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었었다. 그때의 나의 성격에는, 아직 남의 말썽을 꺼리는 순된 점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발기인회의 일이 끝나고, 그 이튿날로 평양으로 내려온 나는, 다시 서울을 가고 싶은 생각에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조조한 며칠을 지낸 뒤에, 나는 핑계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또 서울로 올라갔다. 핑계로는, 그때 9호를 내고 정간 상태에 있던 〈창조〉의 장래 방책 강구였었다.

내가 올라간 날 밤으로, 질탕한 놀이는, 명월관에 열렸다. 그리고 그 때에 첫 번 김옥엽(金玉葉)을 만났다. 그때에 사내로서는, 김억(金億) 김환(金煥) 김찬영(金瓚永) 고경상(高敬相) 군 등이 있었고, 기생으로는 죽은 강명화(康明花)와 안금향(安錦香)과 김옥엽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사내로 생겨서는 술을 먹을 줄 알아얀다는 이상야릇한 주의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술을 먹을 줄을 모르는 나는, 몇 잔 못한 술에 취하여, 상에서 좀 물러나고 말았다. 그때에 맞은편에 앉았던 기생 하나이 이편으로 돌아와서 친절히 간호하여 주었다. 그것이 옥엽이었었다.

그날 밤, 김환의 소개로써 나는 옥엽의 집에서 묵었다. 한잠을 못 이루고 날이 밝기까지 속살거림으로써 보낸 그 밤,― 그 밤은, 나의 생애를 통하여 잊지 못할 저녁의 하나이었었다.

어제 낮까지는 서로 알지도 못하던 사람, 어젯저녁에 처음으로 안 여인, 그는 벌써 이 젊은이의 온 마음을 그러쥐었다. 이상하다면 이상하달 수도 있고, 기괴하다면 기괴하달 수도 있는, 사람의 마음이었었다.

쏠리기 시작하면 그 그칠 바를 모르고 쏠리고야 마는 이 열정의 젊은이는, 이튿날 저녁도, 불붙는 정열을 가슴에 간직하고, 몇 사람의 벗과 작반하여 청송관(靑松館)으로 놀러 갔다.

왔소, 나 여기 왔소,
천리타향 나 여기 왔소,
바람에 불려를 왔나,
구름길에 싸여를 왔나.
아마도 나 여기 온 것은
시어딤 (· · ·) 보러.

위층에서 들리는 이 노랫가락의 소리에 나의 얼굴빛은 변하여졌다. 그때는, 무론 목소리 뿐으로는 그것이 옥엽의 소리라 함을 분간 못 할 때였었다. 그러나, 이 너른 세상에, ‘시어딤 보러’라고 노래를 부를 사람은, 옥엽이 한 사람밖에는 없을 것이었었다. 보이를 불러서 옥엽의 온 것을 알아보고, 개평 떼어 오기를 부탁할 때는, 나의 마음은 무거운 바위 아래 깔린 듯이 괴로웠다.

이리하여, 그에게 대한 나의 사랑의 불길은 더욱 맹렬히 일어섰다.

나흘이 지난 뒤에, 나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압착된 정열, 펴지 못하는 긴장, 발표할 수 없는 사랑,― 이러한 달고도 괴로운 감정 때문에, 그것은 마치 순교자와 같은 비창한 마음으로서, 나는 쓸쓸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쓸쓸한 새날을 맞았다. 그가 나의 귀에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부르던 노랫가락의 몇 구절은, 내 귀에 그냥 남아서 늘 쟁쟁히 울리었다. 나의 생애에 처음 맡아 본 동백기름의 내음새는, 이상히도 그냥 코에 남아서 그를 생각하는 재료가 되게 하였다.

평양으로 내려온 지 며칠 뒤에, 나는 그에게 알렉산델을 박은 반지를 하나 사서 보냈다. 반지라도 하나 사서 보내려고 어떤 귀금속점에를 갔다가, 우연히 조선서는 구하기 쉽지 않은 좋은 진품 알렉산델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서 보내기로 한 것이었었다. 보석상의 점두(店頭)에 흔히 장식되어 있는― 불빛에서와 햇빛에서의 광채가 그리 다르지 않은 그런 것이 아니고, 햇빛에서는 거짓말과 같이 농록색(濃錄色)으로 빛나며, 불빛에서는 루비와 같이 새빨갛게 빛나는, 구하기 힘든 품질 좋은 돌이었었다.

때를 따라서 빛은 변하나, 보석인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는 이 돌로써 너에게 부치노니, 빛에는 변함이 있을지라도, 마음 하나는 이 돌과 같이 변함없기를 바란다.

이러한 글이 그 반지와 함께 그에게 갔다.

편지와 편지,― 삼전 짜리 우표 한 장씩이, 매일 없어졌다. 그에게서도, 매일 편지가 왔다. 이렇게 서로 하고 싶은 말을 겨우 몇 글자의 편지로써 주고받던 한 달이 지난 뒤에, 그가 후덕덕 평양으로 뛰쳐 내려 왔다. 그의 본집은 진남포(鎭南浦)였었다.

좁고 작은 평양에서, 그가 숨어 있는 집을 남모르게 다니느라고 쓴 그 애는, 여간이 아니었었다. 더구나 밤에 외출이라고는, 특별한 경우 밖에는 하여보지 못한 이 참한 젊은이가, 외출할 핑계를 제 안해에게 대느라고 고심하던 그 고심은,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우스운 일이었었다.

이러한 며칠이 지난 뒤에, 나는 마침내 그를 진남포 제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한 주일에 두 번씩 진남포로 그를 만나러 갔다. 옥천대(玉泉臺)로 보림사(寶林寺)로, 진남포의 시가도 꺼리어서, 우리 둘은 늘 조용한 곳으로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발각 안 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정열로써 들뜬 나의 태도는, 그런 방면에 몹시 신경이 예민한 안해에게 발각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를 진남포에 데려다 둔 지 한 달쯤 된 어떤 여름날이었었다. 그 전날을 보림사에서 묵고, 날이 어두운 뒤에 자동차로 진남포에 돌아온 우리는, 평양행 막차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마주 앉아 화투를 하고 있었다. 그때에, 웬 여인이 쑥 그의 집 대문 안에 들어서면서, 돈 좀 바꿔 주 하면서 왔다.

나는 그 여인의 정체를 알아보고, 얼굴빛이 변하였다. 간이 조막만 하여진 나는, 창황히 일어서서 옥엽에게 눈짓을 한 뒤에, 안해를 모시고, 그 집을 나와서 어떤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날 밤, 나는 별말을 다하여 사죄를 하였다. 본시, 그다지 능변이 되지 못하는 나는, 땀을 벌벌 흘리면서 사죄를 하였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서, 그와 나와의 새에는 아래와 같은 타협이 성립되었다. ―사내 된 자, 이제부터 옥엽과의 관계를 끊을 것. 그 대신에 마음의 상처를 위로키 위하여 한두 달 동안 여행을 하는 것은, 그의 자유에 맡길 것. 여인 된 자는, 장래 영구히, 이번의 이 불유쾌한 사건을 입 밖에 내지 않아서, 장래의 공연한 충돌을 피할 것. 등, 등.

사랑이라 하는 것은, 과연 괴물이었었다. 본시 자기의 마음이나 몸을 구속하는 일이 있을 것에는, 어떤 일에든 맹서라는 것을 피해 오던, 이 순진하고 정직한 젊은이로 하여금 이렇듯 실행할 수 없는 맹서를 천연히 하게 하는 ‘사랑’이라 하는 것은 과연 괴물이었었다. 나는 옥엽이와 갑자기 떨어지지는 못할 줄을 번히 알았다. 그러나, 위에와 같은 맹서를, 안해에게 한 것이었었다. 그리고, 이튿날 안해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올 때는, 벌써 우리 부처 새에 성립된 조건을 옥엽에게 알리고, 사흘 뒤 밤 열두 시 부산행 열차에서 만나자는 약속까지 되어 있었다.

사흘 뒤에, 나는 기차 안에서 옥엽을 만나가지고 그 길로 상경하였다. 그리고 청진동(淸進洞) 어떠한 으슥한 집에 숨어서, 낮에는 나와서 친구들과 만나고, 밤에는 그 집으로 종적을 감추고 하였다.

그때의 친구들 새에는, 그것이 한 문제거리였었다. 밤에는 어디로 없어지느냐. 낮에 만나서 묻는 친구, 혹은 뒤를 밟는 친구까지 있었다. 이러한, 변변치 않은 일도, 그 당시에는 몹시도 유쾌하고 신비스러웠다. 값 모를 보배를 감추어 두고, 남몰래 간간 꺼내어 보는 것과 같은 괴상스럽고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그들을 대하였다.

경주에서 불국사(佛國寺)로, 또는 석굴암(石窟庵), 냉천(冷泉)들로 돌아다니며 놀던 생활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시적인 한 막이었었다. 실개천에서 마주 앉아 빨래를 하며, 혹은 재넘엣 마을에 가서 닭을 사다가 잡아먹으며, 아무 구애 없이 그의 손을 잡고 희희히 돌아다니던 그 한 달.

경주의 벌판은 그림이었었다. 아무 진기가 없는 평범한 벌판이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기는 이천 년 전 고도의 풍모와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그 아름다운 벌판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옛날의 우리의 조상의 위업을 생각하면서, 곁에 있는 옥엽의 존재까지 잊었다.

더구나, 불국사에 묵어 있던 얼마 동안은, 지금 생각하여도 나의 마음을 뛰놀게 하는 것이었었다. 밝기도 전에 본당에서 외는 노승의 경소리, 이끼로 덮인 옥탑(玉塔), 기울어져 가는 층계,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의 생활을 비상한 호기심으로 때때로 엿보는 젊은 중은 더욱 정취를 돋구는 것이었었다. 더구나, 불국사에 손으로 와 있던 어떤 젊은 중 하나는, 노골 이상의 노골로서, 옥엽의 뒤를 밟으며, 우리가 불국사를 떠날 때는, 멀리 떨어져서 뒤를 밟아서, 우리가 이튿날 기차를 탈 때에야 겨우 돌아갔다.

경주서 우리는 사진을 찍혔다. 옥엽은 그때에 그것을 몹시 꺼리었다.

“사진을 찍히면 새가 떨어진대요.”

이런 말을 하였다.

사실, 그때에 그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하였다. 나이 벌써 스물을 지나서, 자기의 장래라 하는 것을 때때로 바라볼 만한 철이 든 그는 겨우 붙든 이 순진한 젊은이를 결코 잃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때때로 가정에 대한 제 지식을 자랑하였다. 바느질의 곱게 함을 암시하였다. 음식 만들 줄 아는 것도 자랑하였다. 그리고, 그 여행을 다니는 동안, 그는 남에게 할 수 있는 대로 기생인 제 본적을 감추려 하였다. 이전에 흔히 내 귀에 대고 부르던 노랫가락도, 다시 들을 수 없었다. 얼굴에 화장도 안 하였다. 몸맵시도 할 수 있는 대로 여학생의 투를 흉내 내었다.

이런 일을 보며 생각할 때마다, 나의 그에게 대한 애착이 더욱 커지는 동시에, 거기 따르는 번민도 컸었다. 도저히 떨어지지 못할, 그러면서도 집안의 사정과 사위의 정태는, 또한 영구히 함께 지냄을 허락치 않는 그였었다. 기생과 접근한다 하는 것은, 나의 집안뿐 아니라, 온 평양에 절대로 비밀히 하지 않으면 안 될 만치, 우리 집안은 교회에 자리잡은 집안이었었다. 잔디밭에 누워서, 곁에서 바느질을 하는 그의 양을 번―히 바라보면서, 가까운 장래에 그와 헤어질 일을 생각하고는, 몰래 한숨을 쉬고 하였다.

한 달 뒤에,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가지고 떠났던 돈이 다 없어졌으므로였었다.

그때에, 광익서관(廣益書館)에 내게 와 있는 편지 가운데, 안해에게서 온 것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보고, 처음에는 놀라고 그 뒤에 성을 내었다. 그 편지에는, 내가 기생과 같이 길을 떠났다는 것은 온 평양에 소문났으며, 그 때문에 어머니와 형이 몹시 나의 태도를 밉게 여긴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여자로서 마땅치 않은 불유쾌한 언구가 씌어 있었다.

과도한 질투는, 그로 하여금 여자로서의 단아함과 행실을 잊게 한 것이었었다.

나는 전후를 불구하고 평양으로 내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순간에 냉정함을 회복한 나는 이제 얼굴을 들고, 차마 평양의 거리를 다니지 못하겠음을 깨달았다.

‘되는 대로 되어라.’

그리하여 나는 경성에 그냥 묵어 있기로 하였다.

옥엽은 다시 한성 권번(漢城 券番)에 적(籍)을 두었다. 그리고 어떤 친구 기생의 집에 기류하면서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 한여름, 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심각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돈은 다 떨어졌다. 이제 집에 청구할 면목도 없었다. 잘 곳도 없고, 먹을 곳도 없는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거리를 헤맬 뿐이었었다.

처음 며칠은 이일(李一)의 집에서 묵었다. 그때 이일은, 신혼여행으로 금강산으로 가고, 그 빈 집을 김환이 맡아 있었다. 그러나, 밤에 들어가고 아침에 나오는 시간이 일정치 않은 그였으며, 술에 취하여, 들어가서는 쇠를 잠그고 자 버리며, 아침 나와서는 밖으로 쇠를 잠가 버리는 그 집은, 대문간에서 시간 맞추어 김환을 만나지 못하면, 도저히 들어가 잘 수 없는 집이었었다. 밤낮으로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일정치 못한 그를 천 년 세월하고 대문간에서 기다리고 있기에는 이 젊은이는 아직 너무 자존심이 많았다.

며칠 동안의 불유쾌한 ‘고대(苦待)’에 역정이 난 나는, 그 다음부터는 안서(岸曙)의 하숙집을 숙소로 정하였다. 안서는 역시 술꾼으로서, 그의 출입은 일정치 못하였지만, 집이 하숙집인지라, 언제든 들어가서 잘 수 가 있었다. 낮에는 거리거리 헤매며, 혹은 옥엽의 기류하고 있는 집에도 가 놀고 하다가, 밤이 되면 비슬비슬 안서의 하숙으로 찾아가고 하였다.

벗들도 싫었다. 나의 주머니에 돈이 떨어진 뒤부터는, 그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그들이 나를 업수이 여기는 것 같아서, 나는 그들을 꺼리고 피하였다.

옥엽도 그때는 영업이 잘 안되는 모양이었었다. 화장을 한 뒤에는 눈이 멀진멀진 밤이 깊도록 구루마의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때가 흔히 있었다. 그리고, 그 잘 되지 않는 영업으로써 번 돈으로 그와 나 두 사람의 용처를 쓰던 것이었었다.

어떤 날 낮, 나는 L이라는 벗과 함께 거리에서 거리로 일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몹시 내려 쪼이는 볕에, 종로의 거리는 기운 빠진 듯이 고요히 누워있었다.

“배가 꽤 고픈데.”

L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배가 안 고픈 바는 아니었었다. 그러나 주머니에 이십 전밖에는 없는 것을 어찌하랴.

“이십 전으로 둘이서 먹을 게 뭘 없을까.”

“글쎄 호떡이나.”

벗은 적적히 웃었다. 나도 웃었다.

종로 네거리에 이르렀다. 그때, 나는 발 아래 무엇이 번쩍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허리를 굽혔다가 펴는 순간, 나의 손에는 이십전짜리 은전 한 닢이 집히었다.

“가세!”

“어디를?”

“점심 먹으러.”

“호떡?”

벗은 풀 없이 이렇게 반문하였다.

“왜! 비빔밥 먹지. 이것 보게.”

나는 장한 듯이 인제 얻은 그 이십 전을, 앞으로 높이 쳐들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 날의 점심을 맛있게 먹은 것이었었다.

지금도, 종로를 지날 때마다 뜻하지 않고 그 날의 그 자리를 본다. 보도 장치가 되고, 길에는 아스팔트를 펴서, 옛날의 그 형태는 없어졌지만, 그 날의 그 이십 전의 그다지도 고마웠음은 지금도 나로 하여금 뜻하지 않고 그곳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었다.

어떤 날 밤, 이날도 하루종일의 방황에 뇌곤한 몸을 쉬러, 비슬비슬 안서의 하숙을 찾아갔다. 예에 의지하여 안서는 하숙에 없었다. 나는 빈방에 들어가서 몸을 커다랗게 내어 던졌다. 그리고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곤한 잠은 조금 뒤에 다시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둥둥둥둥 무슨 사람의 소리를, 처음에는 꿈결같이 듣다가, 마침내 정신이 들면서 들으니까, 그것은 안서의 목소리였었다. 밤이 깊어서 술이 취하여 돌아온 그는, 자기 방에 침입하여 정신 모르고 자는 나에게 자리가 좁다고 무슨 나무람을 하는 모양이었었다.

나는 몸을 떨었다. 사소한 일에라도 몹시 신경질이 된 나는, 그때 폭발하려는 성을 삭히기 위하여, 숨소리까지 죽였다. 그리고, 그냥 자는 체하였다.

안서는 몇 마디 웅얼웅얼 나무람을 하다가, 그만 쓰러져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자존심을 상한 노여움으로 흥분된 나는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이것을, 이것을, 나는 몇 번을 주먹을 부르쥐며 성을 내다가, 종내 참지 못하여, 몰래 저고리를 뒤집어쓰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갈 곳은 어디? 깊은 밤, 주머니에 한 푼의 돈도 없는 이 젊은이는 몸을 쉴 곳을 발견할 도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나는, 마지막에 하릴없이 남산공원으로 갔다.

달 밝은 밤이었었다. 거리는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대지까지 고스란히 잠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나는 노여움과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등으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벤취에 걸어앉아서, 잠든 시가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나의 집의 넓고 많은 빈방도 생각 안 났다. 옥엽의 일도 생각 안 났다. 안서에게 대한 커다란 노여움은 나로 하여금 온갖 다른 일을 잊어버리게 한 것이었다.

여름 밤이 그다지도 길었는지. 그 긴 밤이 밝기를 기다려서, 나는 청진동으로 향하여 직행하였다. 밤에는 다만 흥분과 노여움으로 다른 생각은 못 하였지만, 날이 밝는 것을 볼 때에, 나는 겨우 내 정신을 수습한 것이었었다. 그리고, 안서와 어떻게든 결말을 내려 한 것이었었다. 나의 생애에 처음 받은 모욕의 앞에, 나의 프라우드한 성격은 마침내 본성을 드러낸 것이었었다.

그의 하숙 대문간에서, 나는 안서를 보았다.

“아, 자네 어젯밤, 어디 갔었나? 깨 보니까 없데그려. 자, 들어가세.”

안서는, 두 팔을 벌리며, 나를 맞았다. 그 안서를 나는 증오로 불붙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자식, 생각해 봐라.”

“글쎄 말일세. 나는 취한 김에 무슨 나무람은 한 것 같은데, 소레데오 쯔따까네? 마아마, 사께노세이다요.(それで怒つたかね? まあま, 酒のせいだよ―그 때문에 화났나? 뭐, 술 탓일세). 조반 먹었나? 들어가세.”

그, 안서의 우정에 넘치는 솔직한 말에, 나는 고소로써 그의 말을 거절하고, 다시 발을 돌이켰다.

사실, 그때에 나의 신경은 여간 날카롭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라도 역정을 내었다. 친구들의 예사로이 하는 일도 모두 내게는 뜻있게 보였다.

“점심 먹었나?”

이러한 평범한 인사조차, 내게는, 그것이 모욕으로 들렸다. 그리고, 여기서 생겨나는 불유쾌와 모욕감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벗을 피하였다.

동시에 옥엽에게 대한 나의 감정도, 차차 야릇하게 되어 갔다. 기괴한 시기, 기괴한 시험감, 기괴한 증오,― 여기서 생겨나는 불유쾌, 반감, 이런 감정이 어느덧 나의 마음에 엄 돋아서 자라났다. 그가 어찌하여 객석에라도 불리는 때는 나는 몹시 괴로웠다. 그것은, 자존심을 유린받은 것과 같은 괴로움이었다.

“잘 놀다 오게.”

인력거를 타고 떠나는 그에게, 듣기 좋게 이런 말로 보내기는 하지만, 나의 마음은, 여간 괴롭고 쓰리지 않았다. 그가 만약 인력거에서 뛰어내려서, 나는 불리기 싫소, 하면서 내게로 뛰어온다 하면, 나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 더구나, 이제 그가 요정에 가서, (주머니에 돈을 드북이 넣은) 사내들하고 놀 일을 생각하면, 나의 온몸의 피는 한꺼번에 얼굴로 모여드는 것이었었다. 그리고, 그런 장소에 기뻐서 가는 그를 밉게 여겼다.

어떤 날, 우리(친구 몇 사람과 나)는 어떤 기회로 문밖 노름으로 청량리(淸凉里)를 가게 되었다. 그때, 나의 맡은 책임으로서는, 옥엽을 데리고 M 자동차부까지로 오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옥엽에게 가서 그 뜻을 전하매, 그는 매우 기뻐서 곧 화장을 시작하였다. 그 화장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화장이 끝나는 즉시로 M 자동차부로 오라고 부탁을 한 뒤에, 그 집을 나섰다.

그 집을 나선 나는, 자동차부로 갈까 하였으나, 이상한 충동으로, 곧 방침을 바꾸고, 압박골 약물터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금 느끼는 순교자와 같은 비창한 마음으로 별별 일을 생각하여 보았다. 오래간만에, 나와 유흥을 같이할 기회를 즐기려 달려 갔던 옥엽이가, 급기야 거기서 나를 발견치 못할 때에 그는 과연 실망할까. 혹은 역시 기쁜 낯으로 그들(나의 벗)과 놀까. 나는, 여기서 외로이 혼자서 뒹굴 동안, 그는 청량리서 한창 자미있게 놀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가 없는 것을 불만히 생각하여, 도로 들어오지나 않았을까. 지금쯤은, 나를 찾느라고 돌아다니지나 않을까. 시기에도 가깝고 통쾌감에도 가까운 괴롭고도 무거운 망상은 나의 머리를 덮고, 나의 가슴을 눌렀다.

이러한 기괴한 감정에 지배되는 두 시간을 보낸 뒤에, 나는 옥엽의 집으로 가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벌써 돌아온 옥엽이를 발견할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뛰놀았다.

“벌써 다 놀았어?”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묻는 나의 말에, 작다란 그의 눈은, 한층 더 쫑긋하였다.

“난 먼저 왔지.”

“왜.”

“재미도 없구….”

세상의 모든 일이 ‘이론’대로만 진행되는 것이라면, 나는 그때에 두 팔을 벌리고, 그를 쓸어 안았어야만 될 것이었었다. 그러나, 이상히도 비꼬아진 나의 마음은 옥엽의 그 대답의 앞에 문득 반항하였다.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찼다. 그러나,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반대엣 것이었었다. 나는 그를 나무랐다. 옥엽의 행동은 나의 친구를 무시함이라 하였다. 따라서 내 면목까지 더럽힘이라 하였다. 아아, 그러면서도 나는 그 때에 옥엽의 입에서 한 가지의 대답을 얼마나 바라고 기다렸으랴.

“온전히 모르는 손님이면이어이와, 당신의 친구들의 노는 좌석에, 당신 혼자만 빠졌으니 내가 어떻게 그 좌석에서 유쾌히 놀겠읍니까?”

이 한 마디의 대답을 나는 얼마나 기다렸으랴. 그러한 한 마디의 인정 깊은 말은, 그때의 쓸쓸코 외로운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양식에 다름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러한 귀한 양식을 가정에서 구할 수 없고, 친척에게서 구할 수 없는 경우에 있던 그때의 나에게는, 다만 옥엽에게서 그것을 구하여 보려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취한 행동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옥엽에게서는, 내가 원하는 바의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는 변명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수긍하지도 않았다. 나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여, 대적치 않는 것으로, 그는 유일의 대항책을 삼은 것이었었다.

이러한 논란의 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는 마침 부르러 온 인력거를 다행히 여기고, 인력거에 몸을 실으러 나갔다.

나는 듣고자 하던 한 마디의 말을 종내 듣지 못하고 그 집에서 나섰다.

그때는, 여름날은 벌써 어두운 때였었다. 나는 광익서관으로 갔다. 그리고, 가가에 걸어앉아서, 야시에서 흐느적거리는 사람의 물결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여간 어지럽지 않았다. 천만 사람이 왕래하는 야시 앞에서도 나는 심산에 홀로 앉아있는 것같이 적적함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마침내 일어났다. 그리고, 광익서관의 주인 고군(高君)에게, 돈 십 원만 취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나의 이십여 년 생애에 처음 입밖에 내어 본 부끄러운 말이었었다. 나는 아직껏 일 원의 돈을 남에게 취하여 본 적이 없었다. 아무러한 곤궁에 빠졌을지라도, 내 몸에 지니고 있는 값가는 장신구의 한 가지를 전당국에 가지고 가본 일조차 없느니만치 프라우드한 나였었다.

이 뜻밖엣 청구를 받은 고군은, 몹시 미안한 듯이, 자기에게도 돈이 없음을 고백하였다. 나는 두 번째의 청구를 하였다. 즉, 소절수(小切手) (설혹 예금이 없는 것이라도)도 좋으니 두 시간만 취해 달라는 것이었었다.

고군은,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절수를 찢어 주며, 예금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을 당부하였다. 나는 고군에게 사례를 한 뒤에, 그것을 받아가지고, 광익서관을 나서서, 그 길로 옥엽이 불려 간 식도원(食道園)으로 갔다. 그리고, 보이를 불러서, 옥엽이를 잠깐 현관까지 불러 주기를 부탁하였다.

이윽고, 그가 나왔다. 나는 그를 데리고 현관문 밖 어둑신한 데로 갔다.

“나하고 산보 가세.”

이 나의 청구에, 그는 한참 뒤에야 대답하였다―.

“여보, 당신은 내 처질 아시겠구료.”

“글세, 잠깐만―. 이야기할 게 있어서 말야.”

“나는 여기 불린 몸이 아니요?”

나는 고즈너기 그리고 가장 극적 태도로 아까의 소절수를 꺼내었다.

“돈 말이냐? 엣다, 돈은 내게도 있다. 기생과 산보를 가려 온 이상에야 나도 돈은 준비했겠지.”

그는 내가 주는 소절수를 받아서, 등불에 비추어 본 뒤에 한 번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그것을 쪽쪽 찢어버렸다.

“갑시다. 갑시다.”

“그럼, 사무실에 들어가서 말해야지?”

“말하면 보내 줄 것 같소? 몰래 가야지.”

하고는, 그는 나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총총걸음으로 앞서서 갔다. 나는 머리를 수그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청목당(靑木堂) 앞에까지 간 그는, 돌아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올라가서 맥주라도 먹기를 청하였다.

“난 돈이 없다.”

“내게 있어요.”

우리는 청목당에 올라갔다.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 나는 안주만 몇 가지 시켜서 먹으면서, 그의 양을 보았다. 그는 단숨에 맥주 세 병을 먹었다. 그리고, 숨을 길게 내어 쉬면서, 제 지갑을 꺼내어 내게 맡겼다. 우리는 한마디의 말도 사괴지 않았다. 그리고, 셈을 치른 뒤에, 청목당을 나와서, 남산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남산 꼭대기의 어떤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나란히 하여 앉았다.몹시 어두운 밤이었었다. 시간은 벌써 열한 시가 지난 때였었다. 남산 꼭대기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우리는 역시 아무 말도 사괴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문득, 저편 아래서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요이꼬라쇼오(よ―いこ―らしょう― 영차 하는 소리).”

한 사람이 이렇게 부르면, 그 뒤를 따라서, 여러 사람이 같은 소리를 합창하고 한다. 그 뒤에는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편으로 머리를 돌려 보았다. 저편 아래, 소나무를 넘어서, 몹시도 밝게 빛나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무슨 집을 새로 건축하는 모양으로서, 밤을 새워 가면서 일을 하며, 노래는 그 일꾼들의 지나라시(地ならし―땅 고루기)를 할 때에 부르는 소리였었다.

요이꼬라쇼오(よ―いこ―らしょう―).

먼저 한 사람이 부르면, 여러 일꾼들이 같이 따라서 부르고, 그 뒤에는, 쿵 하는 소리가 울리고 하였다. 일꾼들의 모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부르는 노랫소리로써, 끊임없이 일을 하는 그들의 모양을, 넉넉히 머리로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나의 머리에는 차차 센티멘탈한 기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소리가, 차차 처량한 빛을 띠기 시작하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문득 죽음을 생각하였다. 우리의 앉아 있는 곳은 낭떠러지의 곧 위로서, 세 걸음만 나가면 여남은 길이 넘는 벼랑이었었다. 일어서서 눈을 감고 세 걸음만 나가면, 그다음 순간은 저편 아래 벌써 송장으로 되어 내려갈 것이었었다. 나는 힐긋 옥엽이를 보았다. 그때에 옥엽이로서 나를 죽음의 길로 인도할 무스 조그만 암시라도 있었을 것 같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눈을 감고 세 걸음을 앞으로 나갔을 것이었었다.

옥엽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은 왜 그렇게 날 이지메루(いじめる―구박하다) 합니까?”

나는 대답치 않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왜 너를 이지메루하고 싶겠느냐. 내가 네게 향하여 하는 자미없는 언사는 모두 내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기 때문이구나.’

이러한 반목과 질시, 그 가운데 숨어있는 기괴한 애착으로 날을 보내고 날을 맞는 동안 나의 마음은 여간 피곤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서든 그 피곤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때때로 나게 되었다. 그러나 옥엽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꺾어져서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집에서도 마침내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었다.

어떤 날, 나의 동생 동평(東平)이가 어머니의 명령으로 상경하였다. 그리고 곧 내려오라는 어머니의 전갈을 하였다.

이튿날로 나는 평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나의 집으로는 가지 않고 어머니의 집으로 직행하였다. 어머니와 나의 새에는 마침내 타협이 되었다.

1. 평양 있을 것.
2. 안해와 소생을 버리지 않을 것.
3. 옥엽을 가정 안에 들이지 않을 것.

이러한 조건 아래서 첩을 삼아도 괜찮다는 허락이 났다. 그리고 그 밤으로 다시 상경할 때에 나의 마음은 터질 듯이 기뻤다.

옥엽도 올라 뛰면서 기뻐하였다. 얼마의 준비금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고 나는 그 밤으로 옥엽이를 이틀 뒤에 평양으로 내려오기를 작정한 뒤에 청송관에서 오래간만에 마주 앉아서 저녁을 같이할 때 우리들의 얼굴은 희망을 빛났다.

그 밤으로 평양에 돌아온 나는 이틀 뒤 새벽차에 그를 맞으러 정거장에 나갔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찾지 못하였다. 낮차에도 나가 보았다. 이튿날 새벽차에도 또 나가 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의 그림자는 찾지 못하였다.

그는 무얼 하나? 왜 안 내려오나? 나의 마음에는 무서운 의혹이 일어났다.

그다음 날 나는 서울 유지영(柳志永)에게서 이런 통지를 받았다―.

―자네가 내려간 날 밤 열두 시쯤 우연히 옥엽의 집에를 갔더니, 그 집 대청에 웬 모를 사람이 앉아있데. 운운―.

모반함을 받은 노여움과 자존심을 꺾인 불유쾌함은 나의 마음에 맹렬히 불타 올랐다. 나는 그 말의 진부를 알아볼 마음의 여유도 잃었다. 다시 한번 그 말을 음미하여 볼 냉정조차 잃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옥엽’이라는 뿌리를 칼로 잘라 버렸다.

오륙일 뒤에야 옥엽이 왔다. 그리고 사환 애를 집으로 보냈다. 마침 그 사환을 응대한 것은 나였었다.

“김동인 씨 계십니까.”

사환 애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안 계시다. 어데서 왔냐?”

“아래서 왔는데 몇 시쯤이나 돌아오실까요?”

“모르겠다. 왜 찾냐?”

그는 똑똑히 대답치 않고 돌아갔다. 그 날 사환 애는 여섯 번인가 왔다. 그 매번을 내가 나가서 김동인 씨는 없다고 도로 보냈다. 이튿날도 같은 일이 또한 거듭되었다. 이렇게 사오일이 지난 뒤에는 옥엽도 하릴없이 평양을 떠났는지, 다시 사환 애가 오지 않았다.

이렇게 옥엽을 보내기는 하였지만 마음의 아프고 쓰리고 분함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머―ㄴ 산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앉았다가 안해에게 비웃기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밤에도 이리 뒤채고 저리 뒤채고 잠을 들지를 못하였다.

번민과 고통, 게다가 아직 끊을 수 없는 옥엽에게 대한 미련 등으로 나의 몸과 마음은 극도로 쇠약하여졌다. 안해는 하릴이 없던지 나에게 어떤 온정(溫井)이라도 좀 가 있기를 권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용강(龍岡) 온정으로 가려고 몇 달 만에 진남포(鎭南浦)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날 밤 흥분된 나는 한잠을 못 이루었다. 이 땅, 이 진남포는 더욱 나에게 아직 기억에 새로운 옥엽의 일을 생각나게 하였다. 옥천대(玉泉臺), 보림사, 오산 과원(五山果園), 옥엽의 집, 따마야(たまや—祠堂) 등, 여름의 한때를 옥엽과 같이 보내던 즐거운 몇 곳의 장소가 나의 머리에 왔다 갔다 하였다. 그리고 그 각 곳에서 그가 내 귀에 대고 부르던 노랫가락의 한 구절이 귀에 쟁쟁 울리었다—.

용산 삼개 공덕치허에 늙는 돌이 있답디다.
아희야, 거짓말 말아 늙은 돌이 어데 있다.
옛 노인 하시는 말씀, 노돌이라 하옵디다.

나는, 몇 번을 속으로 그 노랫가락을 읊어 보았다.

이튿날, K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는 나의 용강행을 막고, 자기와 같이 오룡배(五龍背) 온정을 가자고 권하였다.

“아무 곳이라도.”

특별히 용강에 마음이 있던 바가 아닌 나는 그 말을 좇아서 오룡배로 가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그날 저녁 K와 나는 진남포서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기차가 막 떠날 때에 우리가 탄 차의 문이 덜컥 열리며 거기 옥엽이 나타났다. 그는 숨을 씩씩거리며 달려와서,

“여보, 좀 내립시다.”

하면서 나를 끄을어 당겼다.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뛰었다. 그러나 나는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거만한 눈을 잠깐 옥엽의 위에 부었다가 천천히 머리를 들렸다.

차창의 호각 소리가 들렸다.

“여보, 어디 가시는지 하루만 연기해요.”

그는 안타까운 듯이 몸을 떨면서 나를 끄을었다. 나는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기차 소리가 났다. 그는 종알종알하면서 기차를 내렸다. 머리를 창밖으로 향하매 그는 원망스러운 듯이 울음 머금은 얼굴로 기차를 보내고 있었다.

이튿날, K와 나는 안동현서 내렸다. 그날 밤으로 마루꼬(まるこ)에서 질팡한 놀이는 열렸다. 이튿날은 유라노스께(ゆらのすけ)에서 놀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오룡배까지 가려던 우리의 본래의 목적은 잊어버리고 오늘은 마루꼬 내일은 유라노스께로 호탕한 놀이로써 날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 술맛을 알았다. 모든 괴로움과 번민도 술이 들어만 가면,— 혹은 사라지거나 그러지 않으면 녹는 듯한 센티멘탈한 기분을 일으켜 주지 결코 아프고 쓰린 고통 그대로는 남아 있지 않았다. 술에서 술로, 옥엽에게 대한 끝없는 미련과 애착과 분노를 그냥 마음에 품은 채로 나는 취한 가운데서 날을 보냈다.

한 달이 지났다. 인젠 안동현의 놀이에도 염증이 생겼다. 어떤 날, 나는 갑자기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평양은 들르지 않고 후덕덕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패밀리 호텔에 투숙을 하였다. 패밀리 호텔에는 김찬영이 묵어 있었다.

나의 놀이는 안동현을 떠나서 다시 서울서 시작되었다. 죽은 남궁벽(南宮壁), 김찬영, 유지영, 나 이러한 네 사람의 한패는 내가 상경한 이튿날부터 식도원(食道園)에 몸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며칠을 질탕히 놀 동안에 우리는 어떤 날 갑자기 소요산(逍遙山) 단풍 구경을 가자는 의논이 생겼다. 그리고 갈 때에는 기생을 하나씩 데리고 가자는 의논이 생겼다.

그러나 내게는 기생이 없었다. 술에서 술로, 마음의 아픔을 속이기 위하여 질탕한 놀이는 즐겨 하지만 옥엽 밖에 다른 기생이 아직껏 내 눈에 기생으로 띄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의견에 적적히 웃을 뿐이었다. 그랬더니 K가 그때의 그의 애인이었던 김삼주(金三珠)와 의논한 결과 비교적 마음이 순진하고 어린 기생으로서 나에게 추천한 것이 황경옥(黃瓊玉)이었었다. 이리하여 나와 황경옥의 인연이 맺어졌다.

황경옥은 그때 열여섯 살 난 아직 어린 기생이었었다. 코 위에 두어 군데 얽은 자리가 있으며 눈초리며 몸맵시며 어디로 뜯어 보아도 아직 순진한 내음새가 풍부한 어린 기생이었었다.

그날 밤 우리는 다 패밀리 호텔에서 묵었다. 그리고 이튿날 청량리까지 나가서 거기서 기차를 타고 소요산으로 단풍을 따러 갔다.

소요산에서 이틀을 묵어 있는 동안 나는 아직껏 마음속에 ‘기생의 타입’이라고 정의하여 두었던 그런 종류의 여자와는 온전히 다른 새 타입의 기생을 황경옥에게 발견하였다. 그것은 무론 아직 나이가 어렸던 까닭이었겠지만 경옥이는 나를 보기를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밤에는 자리를 같이 하지만, 날만 밝으면 그는 후덕덕 뛰어나가서 나를 피하였다. 내가 자기의 곁에라도 가 앉으면 그는 얼굴이 버—ㄹ겋게 되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고 하였다. 아직껏 배운 기생의 교육은 그로 하여금 나의 친구들과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놀게 하였지만 남이 보는 곳에서는 나를 몹시 피하였다. 무슨 말을 하여도 말대답조차 못하였다.

경옥이의 이런 태도는 나로 하여금 곧 옥엽이를 생각나게 하였다. 단둘이서 있을 때는 오히려 점잖았지만, 옥엽이는 곁에 나의 친구들이라도 있으면 견디지 못하도록 나에게 매달려서 시달리는 종류의 사람이었었다.

“이것은 내 사람.”

그는 몹시도 이런 것을 남에게 보이려는 종류의 사람이었었다. 체모 없이 달려들어서 쓸어안으며, 어떻게 하여 나의 친구들이 그의 몸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시원시원히 그곳을 털어 버리며 야단하곤 하였었다.

그러나 경옥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나의 친구들과는 손목을 잡고 놀았지만 내가 곁에 가기만 하여도 얼굴이 버—ㄹ겋게 되며 몸을 슬쩍 피하는 것이었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불만하였다. 그리고 그 불만은 불쾌조차 낳았다. 유쾌히 트럼프를 하며 노는 그들을 원망스러이 바라보며, 나는 홀로 나와서 불당 뒤 혹은 외딴 바위에 가서 쓸쓸히 걸터앉아서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었다. 그러면서도 혹은 경옥이 나를 찾으러 나오지나 않나? 설혹 그가 부끄러워서 못 나온다 할지라도 눈치 빠른 삼주나 누구가 내 심사를 헤아리고 경옥이를 나를 찾으러 보내 주지나 않나? 아아, 옥엽아, 옥엽아, 너는 지금 어디 있니? 너만 있었더면 나는 이렇게 쓸쓸치는 않겠구나. —이리하여 옥엽에게 대한 생각은 경옥이의 태도 때문에 더욱 나의 마음에 강렬히 일어났다.

이틀 뒤에 우리는 소요산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전과 같이 우리는 매일 밤 식도원에서 놀이를 열었다. 그러나 황경옥은 부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K와 삼주가 혹은 남궁벽과 경패가, 마치 이전의 나와 옥엽이같이 농밀하게 서로 주고받는 사랑을 볼 때에, 나는 차디찬 경옥이를 부를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었다. 나는 언제든 외로히 혼자서 앉아서 그들의 재미있게 노는 모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옥엽이만 있었다면 하였다.

이러한 쓸쓸한 가운데서도 내게는 역시 한 가지의 위안이 있었다. 그것은 역시 황경옥이었었다. 식도원에서 밤늦게 패밀리 호텔로 돌아가서 곤한 몸을 침대 위에 내어 던지고 있노라면 새벽 한 시나 두 시쯤 하여서는 꼭 내게 전화가 오고 하였다. 그런 뒤 이삼십 분만 지나면 경옥이가 남모르게 호텔로 찾아오는 것이었었다. 그리고 올 때는 꼭 무슨 프레젠트를 가지고 오는 것이었었다. 혹은 포도, 혹은 과자, 어떤 대는 손수건— 무엇이든 한 가지는 가지고 오는 것이었었다.

이러한 한 달이 지났다.

어떤 날 밤, 그 밤도 경옥이가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기다리고 침대 위에 딩굴고 있을 때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 나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뜻밖에 김옥엽이가 서 있는 것이었었다.

경악과 희열과 분노— 그때의 나의 마음을 어떻게 형용하였으면 좋을는지, 나는 똑똑히 모르겠다. 나는 눈이 멀거니 이게 꿈이 아닌가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그는 가지고 온 핸드백과 목도리를 침대 위에 휙 내어 던지고, 딱 버티고 섰다. 나도 문을 닫은 뒤에 그 문을 등지고 마주 버티고 섰다.

조금 뒤에 그는 와락 내게 달려와서 매달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내 팔에 매달려서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잠자코 그의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뿌리치지도 않았다. 끄을어 당기지도 않았다. 이리하여 옥엽이와의 두 번째 인연은 맺어졌다.

경옥이는 새벽 아직 어두워서 늘 제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옥엽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튿날 해가 중천에 오른 뒤에야 겨우 침대에서 나왔다. 그리고 보이를 불러서 두 사람의 조반을 명한 뒤에 저편 방에 있는 K와 삼주를 만나러 건너갔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제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부터는 이상한 살림이 차차 전개되었다. 옥엽과 경옥이는 어느덧 서로 경쟁자의 지위에 섰다. 아직껏 수저워하던 경옥이도 차차로 제 태도를 선명히 하였다. 낮에는 일절 오는 일이 없던 경옥이가 낮에도 흔히 호텔로 찾아오게 되었다. 밤에 호텔에서 경옥이와 옥엽이가 마주칠 때도 흔히 있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경쟁의 틈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든 일을 다만 되는 대로 버려둘 뿐이었었다. 모란꽃과 같은 농후한 옥엽이의 사랑은 무론 나의 좋아하는 바였었다. 그러나 개나리꽃과 같은 청초한 경옥이의 사랑도 또한 버리지 못할 정취가 있었다.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취하여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괴로운 자리에서 나는 옥엽이를 만나면 그에게 좋게,— 경옥이를 만나면 또한 그에게 좋게,— 소위 팔방미인 주의를 썼다.

“당신은 기생을 옳게 취급할 자격이 없세요.”

옥엽이는 흔히 나를 비웃었다. 나도 거기는 대답을 못 하였다. 역시 좌우편에 다 명료치 못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경옥이는 아직 순진한 어린애였었다. 옥엽이는 노장이었었다. 나에게서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한 옥엽이는 수단의 뿌리를 경옥이에게 향하였다. 그리고 그 첫 착수로써, 옥엽이는 경옥이를 만나면 언제든 내 칭찬을 하였다. 그러나 그 칭찬 속에는 경옥이로 하여금 저절로 떨어져 나갈 독을 부웃기를 잊지 않았다. 그런 뒤에는 자기는 나의 어머니에게까지 허락을 받은 나의 안해라 선언하였다.

이러한 앞에서 어린 경옥이는 어찌하여야 할지 자기의 마음을 작정할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었다. 옥엽이는 내 앞에서 늘 경옥이의 칭찬을 하는 데 반하여, 경옥이는 내게 옥엽이에게 대한 시기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기를 주저치 않았다. 그리고 내가 옥엽이와 떠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나의 비위에 거슬리고 나의 감정을 더 사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나의 마음은 차차 옥엽에게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옥엽의 발의(發議)로서 나와 옥엽이가 잠시 안동현을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것은 잊히지도 않는 고경상(高敬相)의 엄친(嚴親)의 회갑연의 전날이었었다. 우리들은 역시 식도원에서 밤이 새도록 놀았다. 그날 남궁벽(南宮璧)은 몹시 몸이 불쾌하다 하며, 그러면서도 배가 주렸던지 음식을 많이 먹었다.

이튿날 어떤 요정에서 고경상의 엄친의 회갑 축연에 남궁은 몸이 불편하다고 참석치 못하였다. 그 연석에서 몰래 빠져나온 나와 옥엽은 잠깐 호텔에 들렀다가 그 밤차로 안동현으로 떠났다.

안동현에 도착한 이튿날 우리는 유지영에게서 남궁이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와 편지를 동시에 받았다.

그것은 청천에 벽력이었었다. 나는 옥엽의 얼굴을 바라볼 따름이었었다. 옥엽은 나의 얼굴을 바라본 따름이었었다. 그런 뒤에 둘은 한숨을 쉬었다.

“어, 훍.”

남달리 괴상한 소리로 깇던 남궁의 기침 소리가 때때로 뜻하지 않고 귀에 들렸다. 이야기를 대개 일본말로 하며, 소레데(それで—그래서)라는 것을 “으—ㅁ, 소레데—”라고 유난히 점잖게 발음하던 남궁의 이야기 버릇까지 때때로 뜻하지 않고 귀에 들렸다. 칼날 같은 콧마루며, 무슨 꿈을 꾸는 듯한 눈은 언제든 나의 정신을 산란케 하였다.

“남궁이 죽었다. 친구 하나 잃었구나.”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옥엽과 나는 두 번째 다시 단단히 결합되었다. 본시부터 그림자가 엷던 경옥이는 나의 머리에서 차차 없어지고 말았다. 서울로 올라올 때에 친구들을 위하여서는 몇 가지의 프레젠트를 사 가지고 왔지마는 경옥에게는 너절한 담배(그는 담배는 못 먹었으나) 한 갑조차 사 오지 않았다. 조금 생각 안 난 바는 아니었었지만, 옥엽에게 어려워서 중지한 것이었었다.

한 십여 일을 안동현서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옥엽이만 서울로 직행시키고 나는 평양서 내려서 나의 아들 일환(日煥)이의 무사히 자라는 것을 본 뒤에 이튿날 서울로 올라갔다. 그날 밤 식도원 칠호실에서는 또한 놀이가 열렸다.

이날이 경옥이와 나와의 마지막 결말을 지은 날이었었다. 나는 무론 경옥이를 부르려고는 생각도 안 하였다. 옥엽이가 내 앞에 두번째 나타난 뒤로부터는 경옥이는 요리집에서는 본 일이 없었던 것이었었다. 그런데 옥엽이가 유지영과 의논을 한 뒤에 내 명함에다가 오라는 편지를 써서 열한 시가 지나서야 부른 것이었었다. 미상불, 이때는 옥엽이는 넉넉한 자신으로 경옥이에게 대하여 취하는 나의 행동을 보려던 모양이었었다.

결과는 옥엽의 상상하였던 바와 같았다. 나는 뜻밖에 나타난 경옥이에게 한 마디의 반가운 인사조차 아니하였다. 열흘 동안의 안동현 여행은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완전히 옥엽에게로 향하게 한 것이었었다.

한편 모퉁이에 앉아서 억지로 웃으며 노래하며 하던 경옥이는 어느 틈에 몰래 나가서 제집으로 가 버렸다. 이리하여 이 날을 기회로 경옥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진 것이었었다.

그 뒤,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없던 나는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나서 어떤 여름날 유지영과 함께 멱을 감으러 한강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차에서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나를 모른 체하였다. 그리고 유지영과만 몇 마디의 말을 사괴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그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그는 끝끝내 내게로는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종로까지 이르러서 전차를 버리고 내렸다. 전차를 버린 뒤에도 전차 쪽으로는 머리를 돌리지 않고 재판소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그때에 그가 양산을 펼 것도 잊어버리고 머리를 앞가슴에 묻은 뒤에 총총걸음으로 간 것을 보면, 그의 마음에도 커다란 격동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그가 애처로이도 난산으로 죽었다는 것을 나는 풍편으로 들었다. 그의 죽음을 알기 전부터 웬 까닭인지 그때에 그렇게도 무심히 내버린 경옥이에게 대하여 일종의 엷은 그리움을 느끼고 있던 나는 그의 죽음을 들을 때에 가슴이 섬뜩하였다.

그 뒤부터 나는 때때로 그를 생각하였다. 소요산에서 내가 곁에 가기만 해도 얼굴이 버—ㄹ겋게 되며 자리를 피하던 그, 밤마다 남모르게 찾아 왔다는 새벽 밝기도 전에 돌아가던 그, 내 귀에 옥엽의 험구를 불어 넣던 그, 내가 옥엽과 함께 안동현을 다녀온 뒤에 만난 날 밤, 딴 데만 보면서 억지의 웃음을 웃고 있던 그,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느 해 여름 양산을 옆에 낀 채로 펴기도 잊고 머리를 수그리고 총총걸음으로 제집으로 돌아가던 그. —이러한 여러가지의 그의 모양이 때때로 나의 기억에 살아나서 나로 하여금 한숨짓게 한다.

그도 한 박명한 인생이었다.

안동현서 돌아온 뒤부터는 옥엽이는 거의 패밀리 호텔에서 살았다. 저녁때 화장하러 잠시 집에 돌아갈 뿐, 밤에서 이튿날까지는 호텔에서 살았다.

그때의 나의 살림은 진실로 허탕하였다. 아침(?) 깬다는 것은 대개가 열두 시를 지나서였었다. 그리고 해가 서편으로 기울어지기만 하면, 식도원으로 갔다. 식도원에서 돌아오는 것은 대개 세 시나 네 시쯤이었었다. 식도원에서 우리를 위하여(그때의) 칠호실 한 방뿐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지 않았다. 같이 술을 먹으러 다니는 벗들은 대개가 문우였었지만 글에 대하여는 한마디의 이야기를 하여본 적이 없었다.

때때로 나는 조용한 기회를 타서 빅터를 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정교한 기계 속에서 울려 나오는 카르조의 웅장한 소리며, 캘리 쿨치의 아름다운 소리에, 혹은 패데류스키의 영혼을 움직이는 피아노며, 하이페츠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비을롱에, 나의 예술적 양심과 예술적 혼을 뛰놀리는 것이었었다. 이런 생활을 버리자. 그리고 다시 예술의 길에 발을 들여놓자. 나의 천분, 나의 양심을, 이 심신을 피곤케 하는 술과 놀이에서 구원하자. 황막한 조선의 벌에 예술의 아름다운 씨를 뿌리는 것이 내가 하늘에서 받은 명령이 아니냐. 조선의 거친 벌은 얼마나 이 예술의 씨를 기다리는가. 나의 할 일은 태산과 같이 많다. 이렇게 번번이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의 천직으로! 나의 천직으로! 눈물겨운 이런 생각에 머리를 수그리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었다. 저녁대만 되면, 어느덧 다시 식도원에 나타났다. 옥엽이가 얼른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었었다.

그때에 노춘성(盧春城)(당시에는 한 순진한 문학청년)이 ‘문인들의 연애서간집을 발행하려는데, 선생도 한 편 써 보내 주시면 고맙겠다’는 편지를 내게도 하였다. 그러나 원고지를 잡을 생각조차 안하였다. 그리고 ‘연인을 하나 구하여 주면 그 사람에게 편지를 할 테니, 그것을 얻어 쓰라’는 회답을 한 뿐이었었다. 남궁벽의 추도문을 쓴다 쓴다 하면서도 그것조차 못한 나였었다. 그리고 놀이에서 놀이로, 가따가나 피곤한 심신을 더욱 피곤케 하는 것이었었다.

옥엽에게 대한 나의 마음과 태도는 첫번엣 것과는 달랐다. 첫번에는 살림이라는 것을 앞에 그려 놓고 장래에 나의 마누라가 될 옥엽이를 늘 연상한 데 반하여, 두 번째는 한 노리개로서 옥엽이를 사랑한 데 지나지 못하였다. 살림? 누가 그런 기생과 살림을 하랴. 나의 마음이 옥엽에게서 떠날 때까지 그를 한 마음의 위안품으로 이용할 따름이었었다.

이 나의 마음은 차차 옥엽이도 깨달은 모양이었었다. 처음에는 암시로서 은근히 살림을 채근하던 그가 차차 노골적으로 살림을 채근하기 시작하였다.

“여보, 언제 살림을 할 테요.”

그는 때때로 이렇게 물었다.

“살림? 곧 하지. 그러나 좀 더 놀고….”

나는 언제든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오히려 이렇게 대답하였다―.

‘살림이 다 뭐냐. 평양에 한 주군을 두고 그것을 둔 것조차 귀찮은데 기생을 또한 모셔다가 주군을 삼아? 당찮은 소리다.’

옥엽은 영리한 기생이었었다. 그는 어느덧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나를 더 성화시켰다―.

“여보, 당신은 살림을 하기가 싫은 모양이외다그려. 싫으면 싫다고 그래 줘요. 그러면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깐…. 당신이 나하고 살림을 하기가 싫다면 나는 당신을 떠나겠어요.”

그는 이런 협박조차 해보았다. 그러나 거기도 나는 대척치 않고 웃어 버렸다―.

“떠나고 싶으면 떠날 게지 선언까지 할 게 뭐야. 네가 떠나면 나는 마음 놓고 다른 기생을 모셔오겠다.”

하고는 천장을 쳐다보고는 웃을 따름이었었다.

나의 이 태도는 옥엽이로 하여금 낙망케 한 모양이었었다. 야―ㅇ양, 만날 살림을 어서 차리기만 조르던 그는 그해 섣달을 지나서 이듬해 정월이 되었을 때는 차차 내게서 떠나기 시작하였다. 호텔로 찾아오는 도수도 차차 줄었다. 그리고 요리집에서조차 다른 방에 질러서 개평을 떼우고 하였다. 이전에는 설혹 자기가 먼저 다른 요리집에 불렸을지라도 식도원에서 내가 오라기만 하면 어떻게 하여서든 삼십 분 이내로 달려오던 그가 차차 요리 핑계 조리 핑계 안 오는 일이 흔히 있게 되었다.

설혹 살림하려는 생각은 포기하였을망정, 내 마음에서 옥엽의 그림자가 사라진 바는 아니었었다. 옥엽의 차차 차게 되어 가는 태도는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 그 가운데는 다분의 사내로서의 자존심이 섞이어 있었음도 감추지 못할 사실이었었다. 겉으로는 나도 심상히 내버려 두는체하면서도 속은 차차 안타까와함이 심하여 갔다.

이렇게 서로 어석버석 기괴한 감정으로 지내는 동안에 옥엽과 나의 마지막 파탄(破綻)이 마침내 이르렀다. 그것은 어떤 날 밤이었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옥엽이를 분노가 섞인 희열로써 맞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나는 옥엽의 몸에서 수상한 편지를 한 장 발견하였다. 그것은 어떤 사내에게서 옥엽에게로 한 편지였었다.

나는 그것을 읽었다. 옥엽은 눈이 말뚱말뚱 나의 하는 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읽기를 끝낸 뒤에 나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이게 뉘 편지야.”

“손님의 편지지.”

“보통 손님?”

“그럼.”

나는 문득 손을 들어서 옥엽이의 따귀를 때렸다. 이것은 이십 평생에 처음으로 하여본 나의 손질이었었다.

그는 울지도 않았다. 그리고 독을 품은 눈초리로 한참 나를 흘겨보다가 휠 제 외투를 들고 나가 버렸다.

이리하여 그와 나와의 인연은 끊어진 것이었었다. 그날 밤 분노로써 나는 잠을 못 이루었다.

“이년을! 이년을!”

나는 침대 위에서 혼자 딩굴면서 몇 번을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속으로 얼마나 바랐을까. 이제라도 옥엽이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내 앞에 와서 사죄하기를….

그러나 이튿날의 나의 태도는 천연하였다. 저녁때, 식도원에 가서 지영이가 옥엽이를 부르자 할 때에도 나는 웃으면서 거절한 뿐이었었다. 나의 프라우드한 성격은 비록 사랑의 앞에서도 머리를 수그림을 결코 허락치 않았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쓸쓸키가 짝이 없었다. 그의 그 요염히 굴던 온갖 자태는 늘 눈앞에 어릿거렸다. 식도원에서도 내 곁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늘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미운 옥엽이를 생각하였다. 한 번은 술에 취하여 부끄럼도 잊고 울기까지 한 일도 있었다.

열흘쯤 지난 뒤, 나는 평양으로 내려왔다. 옥엽이가 없는 서울의 놀이는 인젠 아무 흥미도 없었던 것이었었다.

평양서도 쓸쓸히 술과 놀이로써 날을 보내던 나는 얼마 뒤에 평화박람회(平和博覽會)가 동경에 열린 것을 보기 위하여 동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서울에 잠시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내가 서울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옥엽이가 찾아 왔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로서 두어 시간 친밀히 이야기를 한 뒤에 헤어진 뿐이었었다.

동경서 돌아와서 나는 옥엽이가 평북 어디 살림을 갔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그 뒤 얼마 안 하여 그가 계룡산(鷄龍山)에 갔단 말을 들었다.

그 뒤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절 소식이 없었던 그에게서 그로부터 이태 뒤 어떤 늦은 봄날, 편지 한 장이 이르렀다. 그 편지에는 자기는 인젠 세상의 온갖 일을 잊고, 오로지 학업에 힘쓰며, 지금 자기의 아명 김××라는 이름으로 배화학당(培花學堂)에 다닌다는 이야기며, 언제 서울로 올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옛날의 친구로서 찾아 달란 말이 있었다.

그때 마침 미술전람회를 보러 서울로 가려던 나는 그 전람회를 며칠 앞하여 상경하여 체부동(體府洞) 어떤 하숙에 있는 그를 찾았다.

그는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같이 산보를 나섰다. 그때에 그는 자기의 몸을 보호하려는 뜻이었는지 어떤 자기의 친구 하나를 억지로 같이 데리고 나섰다. 산보를 끝내고 그와 작별을 한 뒤에 나의 머리에 남은 그의 인상은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인상을 남긴 채로 나는 다시 그를 만나지 않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얼마 하지 않아서 홀연히 그의 자취는 이 너른 천하에서 없어졌다.

그때부터 나의 꿈은 시작된 것이었었다. 죽었나. 살았나. 살았으면 어디로 갔나. 무얼 하나. 동경 있다. 계룡산에 들어갔다. 강원도 어떤 촌에 있다. 중이 되었다. 남의 첩이 되었다. 무슨 연구를 한다. 그의 살림에 대한 여러 가지의 풍설이 끊임없이 내 귀에 들어온다. 그러나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은 없었다. 이 여러 가지의 풍설의 앞에 이상히도 그에게 대한 나의 인상은 나날이 더 아름다워 갔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일을 생각하며 꿈꾸듯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약한 한숨도 흔히 입에서 새었다.

여전히 화류계의 길을 밟아 나아가면서도 나는 왜 그런지 그 뒤에는 많은 기생을 보고 많은 놀이를 하였지만 한 번도 옥엽이가 아닌 기생과 육체적의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화류계에서의 제일 첫 번 사람인 김옥엽은 내게는 다른 모든 기생들과는 다르게만 보였다. 더구나 자기의 길을 화류계 이외에서 개척하려던 용감스러운 그를 생각할 때에는 일종의 존경의 염조차 일어나는 것이었었다.

“김동인이는 병신.”

“김동인이는 고자.”

이러한 소문조차 평양 화류계에서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런지라 그로부터 오륙 년 뒤에 노산홍(盧山紅)과 내가 가깝게 되었을 때에는 평양의 뭇 기생들은 거의 경이의 눈을 던진 것이었었다.

대단한 애상의 염이 섞인 회고로서 늘 생각하며 눈물짓던 김옥엽, 그 종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던 수수께끼 같은 여인인 김옥엽,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도 귀엽게 내 머리에 깊이 인상 박혀 있는 김옥엽,― 그가 어떤 해 겨울 갑자기 평양에 나타났다.

“김옥엽이가 평양 왔대요.”

나는 어떤 기생에게서 이 소식을 들은 것이었었다.

나는 그날 저녁으로 옥엽이를 찾아갔다. 떨리는 마음과 괴상히도 긴장된 심사를 억누르고 그의 집 문간에서 그를 찾을 때는 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다.

그러나 급기 들어가서 거기서 나는 무엇을 발견하였다.

인생이라 하는 커다란 물결에 닦이고 또 닦이어서 다 거칠고 더럽게 된 한 ‘인생의 껍질’을 발견하였다. 거기는 전형적 ‘기생의 말로’의 표본이 있었다. 인생이 마땅히 가져야 할 아무러한 ‘감정’도 다 잃어버린 한 허수아비를 발견하였다. 입 하나만 살아 있고 다른 온갖 양심이며 아름다움이며 흥분을 잊어버린 한 ‘사―ㄴ송장’을 발견하였다.

그 집에서 나올 때에 나는 기―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갔던 것을 후회하였다. 환멸의 비애를 그렇듯 통절히 느껴 본 적이 나의 일생에 아직껏 없었다.

나는 그 뒤에 그와 만날 기회를 할 수 있는 대로 피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만나게 되면 만날수록 그 불쾌한 인상은 더 늘어 갔다. 이리하여 피할 수 없는 연회에서 몇 번 그를 볼 동안 아직껏 그렇듯 아름답게 박혀있던 그의 인상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사라져 없어지고 지금은 그에게 대한 불쾌한 인상만 남아 있다.

지금, 그는 어떤 사람의 정실이 되어 가지고 자미있는 생활을 한다 한다. 아무리 지금은 불쾌한 인상이 남아 있다 하나, 그래도 내 생애의 중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의 장래를 나는 진심으로 축복하여 마지않는다.


연도(年度)조차 잊었다.

어떤 해 봄 그때 모란봉에 새벽 산보를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던 나는 역시 전례에 의지하여 어떤 날 새벽에 산보를 갔다.

나는 언제든지 산보를 다닐 때에 남들이 다니지 않는 곳을 즐겨서 다녔다. 길 없는 골짜기 혹은 가다란 벼랑― 이런 곳을 즐겨서 다니던 나는 그 날도 모란봉 뒤를 썩 지나서 간간 초부들이나 다니지 보통 산보객은 다니지 않는 곳까지 찾아가서 피곤한 다리를 기다랗게 내어 던지고 앉았다.

좋은 봄날이었었다. 벌에는 안개가 꼈다. 넓은 벌 하늘 끝닿는 곳에는 검은 산과 자줏빛 산이 겹겹이 둘러 있었다. 그리고 그 산 위에는 벌건 놀 틈으로 커다란 해가 절반만치 모양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는 곳은 땅에서 백삼십 도쯤의 각도로 되어 있는 뫼 중턱이었었다. 청류벽에서 모란봉까지는 영에서 거의 직각으로 서 있는 바위들이 모란봉을 지나서부터는 차차 엇비슷이 경사가 되어 내가 있는 곳은 산 아래서 마루까지가 백삼십 도쯤 되는 평면의 잔디밭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산 아래는 두 간쯤 되는 길이 있고 그 길을 건너서는 곧 대동강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지라 어떤 대담한 사람이 호기심으로서 다만 두세 걸음이라도 산마루에서 아래로 향하여 뛰어 내려오기 시작만 하면 도저히 중도에서는 어찌 못할 것이며 산 아래까지를 뛰어내려만 가면 그 타력으로서 대동강 물에까지 텀벙 뛰어들어가고야 말 것이었었다.

앉았다고도 할 수 없고 누웠다고도 할 수 없고 섰다고도 할 수 없는 백삼십 도의 이상한 모양으로 등을 땅에 대고 반짝반짝 차차 커져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꿈 아닌 꿈을 꾸면서 여러가지의 공상에 잠겨있던 나는 뒤에서 나는 괴상한 소리에 펄덕 정신을 차리며 본능적으로 벌덕 일어나 앉았다. 동시에 무슨 몹시 가볍고도 무겁고 부드러운 물건이 내 무릎 위에 덜컥 와 앉았다. 그것은 웬 여자였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껏 해를 바라보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내게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허옇고 똑똑치 않은 안개 속에 ‘여자의 얼굴’이라고밖에는 형용할 수가 없는 어떤 창백한 윤곽이 있을 따름이었었다. 그는 손으로 나의 어깨를 잡고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나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도 아무말도 못하였다. 사오 초가 지났다.

“얼른 올라와요.”

산마루에서 아래로 향하여 이렇게 고함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듯이 머리를 한 번 저어서 머리털들을 뒤로 젖히고 내 무릎에서 내렸다. 그런 뒤에 벌벌 기어서 산마루로 향하여 올라갔다.

산마루에서 자기의 친구를 만난 그는 무엇이 어떻다고 큰소리로 천박스럽다고 형용하고 싶을 만치 웃었다. 그리고는 저편으로 그림자같이 사라졌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정신없이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름도 모른다. 고향도 모른다. 그의 얼굴조차 보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왜 그런지 그의 그림자뿐은 그 뒤 오랫동안 나의 머리에 남아서 사라지지 않았다.

“처녈까, 색시―ㄹ까.”

나는 때때로 혼자서 이렇게 스스로 물어본 뒤에는 귀한 보배를 잃은 것 같은 적적함을 느끼고 하였다.

산을 기어 올라갈 때에 본 바 커다란 엉덩이와 그 큰 엉덩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비교적 가느다란 다리가 내게 남아 있는 그에게 대한 기억의 전부였었다.

그러나 그 뒤 때때로 길에서 혹은 어떤 집회장에서 커다란 엉덩이와 가는 다리를 가진 여자를 보면 그 사람이 혹은 전에 모란봉에서 내 어깨를 잡고 숨을 허덕이고 있던 그가 아닌가고 혼자서 인생의 쓸쓸한 인연에 한숨을 쉬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조차 똑똑히 본 적이 없는지라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 사람이 혹은 그때의 그가 아닌가 하고 엉덩이와 다리를 보는 것이 나의 한 가지의 습관으로까지 되어 있다.

짐작컨대 지금 그의 나이는 스물하나 혹은 둘쯤― 그는 지금도 살아 있나, 살아 있으면 무얼 하고 지내나, 처녀―ㄴ가 색시―ㄴ가. 판단을 허락치 않는 이러한 모든 문제 앞에 나는 늘 인생의 만나고 헤어지는 쓸쓸한 인연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한다. 인생은 외롭다.


蟬丸(세미마루)

편집

1921년, 옥엽이 때문에 생겨난 가슴의 아픔을 품은 채로 평양으로 돌아와서, 마음의 고적함을 그날그날의 술로써 모호히 하던 나는, 어떤 연회에서, 세미마루(せみまる: 蟬丸)라는 일본 기생을 볼 기회를 얻었다.

그때,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몇 해 전에 나의 앞에서 홀연히 종적이 사라져 없어진 메리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갸름한 얼굴과, 좀 꼬리가 위로 향한 듯한 눈과, 웃음을 흘리려는 듯한 입에서, 메리의 모습을 발견하였다기보다, 그의 몸놀리는 모양이며 손짓이며 머리를 늘 좀 갸웃하고 있는 태도에서, 메리와 흡사하게 생긴 세미마루는, 이상히도 나의 피곤하고 외로운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나의 방탕의 발은, 이때부터 조선 요리집을 떠나서, 일본 요정(料亭)으로 향하였다.

그는 아직 천진스런 어린애였었다. 동경서 고등여학을 다니다가, 가정의 사정으로 기생이 되었다 하는 그는, 아직 학생의 때가 벗지 않은 천진스런 어린애였었다. 샤미셍(しゃみせん―삼현금)을 뜯으며, 도도이츠(どどいつ―일본 속요의 하나) 같은 것을 작은 소리로 읊어 본 뒤에는, “마다 나라이다께데, 우마꾸이까나이와.(まだ習ひだてで, うまく往かないわ―갓 배운 솜씨여서 잘 안 되네요)”

한 뒤에는, 얼굴을 약간 붉히고 하는 그였었다.

몇 해 동안을 꺼졌던 메리에게 대한 어린애의 아름다운 꿈은, 이 일본 처녀의 앞에 다시 차차 불붙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옥엽에게 대한 쓰린 기억을 잊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여럿에서 요리집에 가서 덤비기를 즐겨 하던 나는, 세미마루를 발견한 뒤부터는, 차차 그들을 피하여 하였다. 그리고 혼자서 몰래 일본 요리집으로 가서, 조용히 그를 부르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그에게 대한 마음은, 아직껏 화류계의 계집들에게 가졌던 바와는 달랐다.

나는 그의 앞에서는 농을 못 하였다. 마음대로 덤비지를 못하였다. 눈을 들어 정시조차 못 하였다. 먹먹히 마주 앉아서, 화려한 그의 옷 무늬를 곁눈으로 간간 보며, 그것으로 만족한 것이었었다.

내가 그에게 취한 태도는, 마치 연애하는 바보였었다. 외로움을 띤 미소와, 한숨과 때때로 발하는 외마디의 헛소리 비슷한 말― 이것이, 내가 그에게 대하여 취한 태도의 전부였었다.

표연히 요정에 뛰어들어가서, 그를 불러 놓은 뒤에, 그가 오기까지의 짧은 시간을 안절부절 보내는 나의 모양을 누가 볼 것 같으면, 급기 만난 때에는 많은 이야기가 나에게서 나오고, 많은 속살거림이 당연히 있을 것을 예기할 것이었었다. 사실 말하자면, 나도 그를 부를 때마다, 이번부터는 좀 이야기해 보려고 결심을 하고 하였다. 그러나, 급기 그가 들어 오기만 하면, 나는 말 한마디를 똑똑히 못하고, 빙그레 웃으며 얼굴을 붉히고 하였다.

그는 연회에서 간간 볼 때는, (일본 기생의 풍속대로) 대판(大阪) 말을 썼지만, 단둘이 만날 때는 언제든 순 동경말을 썼다. 역시 말이 그다지 많지 않은 그가, 때때로 (오래간만에 듣는) 순 동경 여학생 투의 말로써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게는 듣기 향그러운 일이었었다.

“네, 죠이또(ね, ちょいと―저, 이봐요).”

그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 ‘긴상’이라지도 않고 ‘아나따(あなた―당신)’라지도 않고 이렇게 부른 뒤에, 샤미셍으로 고요히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일본 노래를 딩동댕동 뜯은 뒤에는,

“도오?(どう―어때요)”

하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도 못 하고, 얼굴을 붉히며 빙긋이 웃을 뿐이었었다.

나의 눈에 비친 그는 기생이 아니었었다. 몇 해 전 어린 시절에, 많고 많은 아름다운 꿈을 내게 주고, 홀연히 자취가 사라진 메리의 화신― 나는 그를 이렇게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대한 나의 태도도 전혀 이러한 관념 아래서 출발되었다. 역시 다른 일본 기생에게 대하여는, 아무 기탄 없이, ‘오마에(お前―자네)’라 부르고, ‘기사마(きさま: 貴樣―너)’라 부르던 나는, 그에게 대하여뿐은, ‘요오상(葉さん)’이라 불렀다. 그의 본 이름은 기무라 요오꼬(木林葉子)였다.

그해 봄, 나는 평화박람회를 보러 동경으로 갔다. 보름을 예산하고 떠났던 나는, 열해(熱海) 온천에서 몹쓸 병에 걸려서 넘어져서, 평양을 떠난 지 한 달 만에야 겨우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온 날, 나는 기차에 피곤한 몸을 잠시 누워서 쉰 뒤에 환천(丸天)이라는 귀금속점으로 내려갔다. 그 집은 나의 단골집으로서, 평양 있을 때에는, 언제든 하루의 몇 시간씩을 그 집에서 보내면서, 온갖 귀금속이며 보석들을 뒤적이면서, 거기 대한 취미를 만족시키는 것이 나의 한 버릇으로까지 되어 있던 것이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집에 늘 다니는 것을 안 뒤부터는, 세미마루도 그 집에 와서, 내게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 그 집 노파와 한담을 하는 일이 흔하게 되어 있던 집이었었다.

노파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길에서 돌아온 인사가 몇 마디 사괴어진 뒤에, 노파는 이런 말을 하였다―.

“긴상. 아노꼬(あの子―그 애) 만났어요? 그 새 몇 번을 우리 집을 들여다보고는, ‘아노 히또, 까엣떼?(あの人 歸って―그 사람 돌아왔어요)’하고 하더니―. 가와이이고네.(可愛い子ね―귀여운 애죠)”

아노꼬(あの子)라 함은 무론 세미마루를 가리킴이었었다. 그 소위 아노꼬가 나를 부르기를 ‘긴상(金樣)’이라 하지 않고 ‘아노히또(あの人)’라 하였다는 것은 이상히도 나의 마음을 뛰놀게 하였다.

“나니오―바까나…(何お―馬鹿な―누구를― 어처구니 없는)”

나는 그 노파에게 어떤 대답을 하였는지 똑똑히 기억치 못하나, 좌우간 이 비슷한 대답을 한 듯하다.

그 날, 나는 몇 번을 속으로 아노히또 하고는 빙긋이 웃고 하였다.

그날 밤, 그와 어떤 요정에서 만날 때는, 그도 아무말을 못 하였다. 나도 아무말도 못 하였다. 다만, 무심히 뜯고 있는 샤미셍의 소리를, 나도 무심히 듣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오야쯔레니 낫따노네(おやつれになったのね―야위셨네요).”

말없이 몇 시간을 앉아 있다가, 내가 셈을 명할 때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을 못 보기 때문에.’

그때, 나는, 왜 이런 능청스런 거짓말을 못 하였는지. 나는 정직히, 그새 병을 앓았다는 것을 변명 비슷이 대답하였다.

나의 바보의 연애는 다시 시작되었다. 때때로는, 말 한마디 사괴지 않고, 밤까지 샌 일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대하여, 별다른 욕망이 없었다. 다만 그가 나의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얼굴 한 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 한마디를 사괴지 못하는 그라도, 곁에 있기만 하면, 천하가 내 앞에서 사라져 없어진다 할지라도, 내게는 근심 되지 않았다. ‘그’는, 즉 ‘천하’였었다. 적어도 내게는 천하 이상이었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나는 때때로 메리를 생각하였다. 세미마루와는 이렇게 서로 마주 앉을 기회라도 있다 하나 앉아 본 일조차 없는 메리에 대한 이상히도 애끓는 정열은 세미마루에게 대한 비상한 애착과 함께 때때로 가슴에 무럭무럭 일어나서, 나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하였다.

남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바보의 연애는 그냥 계속되었다. 그동안에 여름과 가을도 가고, 겨울도 지났다. 무거운 압박감― 그와 마주 앉았을 동안에 받는 것은, 이것뿐이었었다. 그는, 때때로 생각난 듯이 샤미셍을 뜯었다. 나는 눈을 감고 앉아서 곡조 없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뒤에는, 밤이 깊으면 작별하였다.

이러한 일일지라도, 그도 또한 나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었다. 내가 부르기 전에, 그가 먼저 다른 좌석에 불렸으면, 무론 ‘모라이를 가께루(貰ひ를 かける―딴 손님에게 불려간 기생을 달라고 요청함)하여까지라도, 그를 오도록 하지만, ’모라이도메(貰ひ止め―달라고 요청해도 허락하지 않고 잡아둠)‘라 되는 경우에는, 그는 어떻게 수단을 써서든, 그 좌석에서 빠져나오도록 노력하였다. 권번에 부탁을 하여 권번의 힘으로써 빠져나오는 때까지 있었다.

어떤 날, 그는 자기 손에 박힌 ‘바찌다꼬(撥だこ―장구채를 잡아서 손에 생긴 굳은살)’를 보라고 내 앞에 손을 내어민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손을 차마 잡지를 못하고, 허리를 굽혀서 그의 손을 내려다본 뿐이었었다. 나는 그의 손조차 감히 잡아 보지를 못하였다.

내 외투를 입히느라고 그의 숨결이 내 목덜미를 스칠 때는, 나는 몸까지 떨고 하였다. 어떤 날 밤, 길로 지나가는 다시(だし : 花車―축제 때 끌고 다니는 수레)를 구경하느라고 그와 내가 나란히 하여 서서 길을 내려다볼 때에, 나는 내 옆구리로써 그의 체온을 감각하고, 취한 사람같이 비츨비츨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그를 놀라게 한 일까지 있었다. 남의 눈에는 바보로 보였을지도 모르나, 내게는 꿈과 같이 아름답고 즐거운 연애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벙어리가 마주 앉았다가는 헤어지고, 또 같은 일을 거푸 하고, ―그것뿐이었었다. 손 한번을 잡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늘 기뻤다. 무슨 알지 못할 커다란 보배를 잡은 듯이 나의 마음은 늘 맑았다. 세상조차 유난히 밝고 즐거워 보였다.

일 년 반이라는 날짜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나는 그 일 년 반을 역시 싱겁기 짝이 없는 연애로 보냈다. 그러나, 남보기에는 싱겁다 할지라도, 내게뿐은 무엇에 비길 수 없이 유쾌하고 긴장된 생활이었었다. 딩딩댕댕, 고요한 밤에 고요한 방에서 하녀까지 물리치고, 역시 고여히 뜯는 샤미셍의 소리에 나의 온 젊은 마음과 온 젊은 넋을 잠그고, 먹을 줄 모르는 한 잔 술에 얼근히 취하여 가지고, 꾜우소꾸(脇息―사방침)에 기대고, 눈을 감고 앉아있는 재미는 무엇에 비길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밝고 부드러운 꿈에 잠겨 들어가는 듯하였다.

“네, 죠이또 나니까우따히마세우까?(ね, ちょいと. 何か唄ひませうか―저, 이봐요. 무슨 노랠 부를까요)”

꼬리가 좀 위로 향한 듯한 기다란 눈을 고즈너기 치뜨며, 이렇게 말하는 그를, 탁 집어삼켜 버리고 싶은 괴상한 충동 때문에, 나의 마음의 줄〔絃〕은 때때로 해적였다.

“요오상(葉さん).”

뜻없이 이렇게 그를 불러 놓은 뒤에, 할 말이 없어서 싱겁게 웃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할 말이 없어? 나는 분명히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과연 할 말이 없었을까. 수없는 많은 말이 나의 가슴 속에서 기름 끓듯 끓는 내게, 왜 할 말이 없었을까. 그러나 나는 한 마디도 나의 마음을 그의 앞에 피력할 수가 없었다. 싱겁게 웃는 한 토막의 미소는 그때의 나의 마음의 전부를 대표하는 바였었다.

내가 그와 처음 만난 해 봄에, 모란봉에 일본 예기 원유회가 있었다. 그것을 구경을 오라는 부탁을 단단히 받은 나는, 그 날 그것을 구경하러― 아니, 오히려 세미마루를 보러 모란봉으로 갔다.

아직 사꾸라가 지지 않은 늦은 봄이었었다. 일인이 하나노꾸모리(花の曇り―꽃구름)라고 형용하는 사꾸라의 동산은, 꿈과 같았다. 그윽한 꽃 아래는, 가지각색으로 장식한 일본 계집애들과, 그것을 따라온 오입장이의 무리의 바다가 전개되어 있었다.

그 꿈과 같은 꽃의 그림자를, 역시 꿈과 같은 마음으로 빙빙 돌며, 세미마루의 그림자를 찾아내려고 곁눈질을 하며 돌아다니던 나는, 종내 그를 발견치 못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득월루(得月樓) 아래 가서, 사꾸라 나무를 기대고 서서 몸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꿈과 같은 앞 경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 곧 코앞으로 양장한 일본 계집애들이, 무엇이 어떻다고 웃으며 지나갔다.

“!”

나는 갑자기 몸을 바로 하였다. 그 가운데 한 계집애는 분명히 세미마루였었다.

“아―(あ)”

몸을 바로한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반벙어리같이 이런 신음을 하며, 한 걸음 나서려 할 때에, 그들은 나를 주의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

세미마루―ㄹ까. 나는 문득 이렇게 의심하였다. 기생의 옷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세미마루를 늘 보던 내게는, 양장을 하고,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서 양 가슴 위로 늘이운 그 소녀를 세미마루로 보기가 힘들었다. 나이에도 차이가 있었다. 양장을 한 그 소녀는 열 두세 살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늘 보던 눈썹과 연지를 찍지 않은 그 소녀는 한 개의 여학생으로는 볼 수가 있을망정, 기생 세미마루와는 틀리는 점이 많았다. 그의 소녀다운 활발스런 몸가짐도 통상시에 보던 세미마루와는 매우 달랐다.

‘세미마루―ㄹ까.’

나는 저편 꽃 아래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머리를 기울였다. 키도 늘 보던 세미마루보다 적었다.

그러나 그 꼬리가 좀 위로 향한 듯한 눈과, 걸어 다닐 때에도 좀 한편으로 갸웃하고 다니는 머리에서, 세미마루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무시하고라도, 그를 세미마루로 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세미마루는 오늘 모란봉에 오지 않았다고 결론을 할 수 있을 만치, 나는 아까, 깨깨 모란봉 일대를 다 살핀 것이었었다.

좀 뒤에, 그 양장한 소녀는 또 내 앞으로 지나갔다. 또 좀 뒤에 그는 또 지나갔다. 그 뒤에도 연하여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내 편으로는 머리를 돌리지를 않고 매우 바쁜 듯이 총총걸음으로 지나갈 뿐이었었다.

필요 이상 내 앞으로 번번히 지나다니는 그 수수께끼의 소녀의 앞에, 나의 의혹의 불은 고요히 그러나 차차 더 크게 불붙었다.

아직껏 그 얼굴과 몸가짐의 윤곽만 머리에 사진 찍어 둔 뿐, 한번도 얼굴을 자세히 정시하여 본 일이 없는 나는, 그 수수께끼의 소녀를 세미마루로 단정할 만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용기를 가지지 못하였다. 더구나 내 앞으로 그렇게도 빈번히 다니면서, 당연히 나를 보았을 그로서, 만약 세미마루라 할진대, 한 번의 목례(目禮)도 없이 지나갈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를 세미마루가 아니라 하면, 세미마루는 어디 있나. 그리고, 그 소녀의 여러 가지의 점에서 세미마루와 흡사한 인상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

내가 그곳에서 자리를 옮겨서, 부벽루의 앞에 가서 쉴 때에도, 그 소녀는 몇 번을 내 앞으로 지나갔다.

뒤에 알아보니깐, 그 양장한 소녀는 역시 세미마루였었다.

그때에 왜 나를 못 본 체하였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닷떼…(だって―하지만).”

할 뿐, 또 샤미셍을 들어서 곡조 없이 손으로 뚱뚱 뜯었다.

여름에, 유지영이 평양을 내려왔다. 그는 여관을 잡지 않고 H라는 친구의 집에 묵었다. 그 H의 집은, 우리가 늘 구락부로 쓰고, 진일을 그 집에서, 보내던 집이었었다.

그러나, 지영이 온 뒤부터는, 낮뿐 아니라, 밤에도 그 집에서 모여서 놀고 하였다.

세미마루에게 대한 내 마음을 비밀히 해두었던 나는, 지영이 평양 온 뒤부터는 밤에 그 구락부로 모이지 않을 핑계가 없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그곳에 가고 하였다. 따라서 세미마루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어떤 날 낮, 지영과 K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산보를 나갔다가 잠깐 쉬러 수정(壽町) K의 집으로 향하였다.

우리가 K의 집을 향하여 해락관(偕樂館)의 앞까지 이르렀을 때에, 우리의 뒤에서 우리의 곁을 빠져서 달음박질하여 우리보다 앞선 웬 일본 계집애가 있었다. 그는 우리보다 여남은 걸음쯤 더 앞서서 휠 돌아다보았다.

그것은 세미마루였었다. 세미마루는 한 번 휙 돌아보고, 누구에게 향하여서인지 분간키 힘들게,

“곤니찌와(今日は―안녕).”

한 뒤에, 도로 바로 서서, 그곳서 한 이십여 보쯤 더 가서 있는 꼬또부끼(ことぶき―壽)라는 일본 요리집으로 들어갔다.

꼬또부끼는 K의 집 대문의 꼭 맞은편에 있었다. 우리가 K의 집으로 들어갈 때에, 얼른 곁눈으로 보니까, 그는 현관에 서서, 주인 노파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몸을 비스듬히 안으로도 아니요 길로도 아닌 측면으로 서서….

K의 집에 들어가서 좀 앉았다가 나올 때에, 대문 밖에서 맞은편을 바라보니까, 세미마루는 길로 향한 방 안에 팔을 영창 밖으로 걸치고 앉아서, 우두커니 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지영이가 그 꼴을 보고 이런 말을 하였다―.

“저 계집애, 우리 가운데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아. 부러 주우이오 히꼬오 히꼬오또 아세루(注意お引かう引かうとあせる―주의를 끌려고 안달하다)하는 게 아리아리또 미에루(ありありと見える―여실히 보인다)하는데, K, 자넨가?”

“난 알지도 못하네.”

“동인이 자넨가.”

“바가!(ばか―바보)”

나는 내어 던지듯이 이렇게 말하여 버렸다.

가을에 낚시질을 시작하였다. 여름 한 철을 지영이 때문에 세미마루를 만나는 습관을 깨뜨려 버린 나는, 세미마루에게 대한 정열이 식은 바는 아니었지만, 전에와 같이 하루를 못 보면 이튿날은 입맛이 없어지도록 등이 달지는 않았다. 그런 때에 낚시질을 시작한 것이었었다.

대동강의 낚시질은 자미있다. 열기, 잔뙈기에서 붕어와 피라미 뙈기, 내지는 챌낚이며 소가리 뙈기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의 경험이 낳은 바의 가장 정밀하고 발달된 대동강의 낚시질은 재미있다. 극도고 발달된 낚시질 때문에, 비록 물속의 고기의 수효는 다른 강에 비교하여 거의 없다고 하여도 좋을 만치 적미난, 적으면 적으니만치, 낚아 올리는 그 재미는 도저히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고기가 미끼를 문 때에 약동하는 쫑대의 허리며, 얼레를 통하여 감각하는 고기의 비약이며, 거의 끄을어 올린 뒤에, 맑은 물속에서 이리 버낏, 저리 벌낏, ―죽은 목숨을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퍼덕거리는, 낚시 끝에 달린 고기며, 그런 때마다 혹은 꺼부러져 들어가며, 혹은 실이 돨돨 풀려 나가는 얼레의 손맛, 종내 마상이까지 끄을려 올라와서 낚시를 떼일 때에, 손으로 감각하는 미끄러운 맛과 생명의 약동들은, 낚시질에 손을 대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짐작도 못 할 통쾌와 희열이 있다.

그동안, 나는 세미마루를 잊었다. ―아니, 잊었다면 말에 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잊었다는 것보다, 물 가운데 세미마루의 그림자를 그려 놓은 뒤에, 그 그림자에, 나의 온 정열을 부읏고, 멀거니 앉아 있는 자미에, 실물 세미마루를 보고 싶은 안타까움을 잊은 것이었다. 내 마음속에 꿈을 잠겨있던 세미마루는, 여기서, 명실이 갖은 ‘꿈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었다.

이 가을을 낚시질로 보내는 동안, 세미마루는 실재성을 잃고, 나의 마음속에서 한 우상으로 화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미마루가 내 마음에서 우상화하는 동시에, 몇 해 전 어린 시절에 홀연히 종적이 없어지면서부터 나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우상으로 화하여 버린 메리와 합일하였다.

그 해도 거진 다 간 섣달 그믐게 어떤 날, 김환이 북경으로 가는 길에 집에 들렀다. 그날 밤 환을 보내는 뜻으로, 어떤 일본 요정에서 소연을 열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세미마루를 만났다.

그 날을 기회로 나의 마음의 정열은 다시 폭발되었다. 나의 발길은 저녁만 되면 또다시 따마야(たまや―祠堂)며 칠성관으로 가게 되었다. 또다시 침묵의 연애는 시작되어 계속되었다.

이듬해 이른 봄, 무슨 일로 한 달쯤 평양을 떠났던 나는, 평양으로 돌아온 날 밤으로 세미마루의 종적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나의 수저운 마음은, 요정 여장(女將)에게 세미마루의 간 곳에 대하여 똑똑히 묻지도 못하고, 이튿날 환천(丸天) 주인 노파에게 다시 물어서, 겨우 서울 이세옥(伊勢屋)이라는 집주인 영감의 소실로 팔려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 애가 떠나는 날, 집에 왔더니….”

노파는 이런 말을 하였다.

“가아이소네(可哀想ね―슬프군요). 울먹울먹하면서 떠나더니…. 긴상 돌아오시거든 요로시꾸(よろしく―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해달라고 신신이 부탁을 하면서….”

이런 말도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의 말 앞에, 나는 말도 못하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리고, 몇 해 전에 내 앞에서 홀연히 종적이 없어져 버린 금발의 소녀 메리와 같은 자취를 밟아서, 여기서 또한 나의 앞에서 홀연히 자취가 사라져 없어진 흑발의 소녀와 나의 새에 얽히었던 쓸쓸하고 애연한 인연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며칠 뒤에, 서울로 올라가서 전화부를 뒤적여서 이세옥을 찾아본 결과, 전당국, 요리집, 술장사, 오복점(吳服店), 이렇게 네 가지의 이세옥을 찾아낸 나는, 어느 곳에 세미마루가 가 있는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이, 전화부를 내어던졌다. 일일이 그 네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가 있는 곳을 집어내기에는 나는 너무도 소담하였다. 설혹 가 있는 곳을 안다 할지라도, 그 뒤에 행할 조처도 없었다.

그 뒤에 나는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보다 썩 뒤에 대련(大連)에서 다시 히따리쯔마(ひたりつま―왼쪽 옷단)를 잡고 나섰다는 풍문은 들었으되,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어린 시절에 한때 몹시도 나의 마음을 떨리게 한 뒤, 홀연히 종적이 없어진 메리와, 청년기에 들어서, 또한 나로 하여금 바보같이 만들어 놓은 뒤에, 또한 종적이 없어져 버린 세미마루, 하나는 혼혈아, 하나는 일본 소녀― 이 두 소녀는, 나의 머리에 가장 아름다운 우상으로 남아서, 나로 하여금, 늘 즐겁고도 애연한 회상에 잠기게 한다.

기무라 요오꼬(木林葉子)―. 기무라 요오꼬(木林葉子)―. 그는, 지금도 건재한지. 그의 생사며 행방을 알 수가 없는지라, 나의 마음은 더욱 그 애연한 인연 때문에 눈물겨워진다.


盧山紅(노산홍)

편집

년의 봄과 여름은, 나의 젊은 과거를 통하여 가장 심신이 피곤하여 본 시기였었다. 정오부터 그 이튿날의 새벽 너덧 시까지는 대개 요리 집에서 보냈다. 짧은 잠을 집에서 잔 뒤에는, 다시 술벗을 찾아 가지고, 요리집으로 갔다.

그해에는, 나도 술을 먹는 척하였다. 비록 술맛은 모른다 하나 못 먹는 것이 수치같이 생각되어, 쓴 술을 쓴 체 아니하고 먹었다. 김산월(金山月), 원산월(元山月), 소금련화(小金蓮花) 등, 등, 몇 개의 미기(美妓)는 마치 나의 전속물과 같이, 하루도 나의 곁에서 발견 안 되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옥엽에게 대하여 아직 많은 미련과, 부지거처가 된 그에게 대한 신비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나는, 다른 기생들과 육체적으로까지 결합되기를 꺼리었다. 한 개의 노리개, 한 개의 완상품, ―나는 그들을 이렇게 보고 사랑하였다.

만조사 아끼꼬(萬造寺 あき子)를 거리에서 만난 것도, 그 여름이었었다.

그해 여름이 절반이나 지나서, 나는 후덕덕 평양을 떠나서 석왕사로 갔다. 비록, 모진 술과 거친 놀이에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하나,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나의 경건한 양심은, 끊임없이 나의 심령을 채찍질하였다. 마지막에 정 할 수 없이 되어 나는 그 술에서 피하기 위하여, 석왕사로 달아난 것이었었다.

서울서 이촌동(二村洞)의 탕수를 구경하고, 석왕사로 혹은 명사십리로 호탕한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본시 여행을 즐겨 하는 나는 평양의 술을 잊었다. 눈만 뜨면 한없이 그립던 유흥 정취를 잊었다. 칠야의 대동강의 뱃놀이를 잊었다. 녹발의 미기들을 잊었다. 한 달의 여행을 끝내고 평양으로 돌아올 때는, 그 새의 술과 놀이에 피곤하였던 나의 심신은 다시 상쾌한 기분을 회복하였다. 젊음과 행복감으로 충일된 나의 심령은, 세상의 온갖 곳에 흩어져 있는 젊음과 행복을 한없이 축복하면서, 고요히 고요히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평양에 돌아와서, 또다시 건전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 가을 춘원 부처(春園 夫妻)가 평양을 왔다. 병으로 인하여 강서 약수(江西藥水)에서 여름을 보내고 귀경하던 길에 평양에 들른 것이었었다.

그날 저녁, 춘원 부인은 부인 자기의 친구와 함께 놀러 나가고, 춘원은 K와 나의 인도로써 하루 저녁을 평양의 놀이를 즐기려, 장춘관(長春館)으로 갔다, 그날 저녁에 부른 기생 가운데 노산홍(盧山紅)이 있었다.

산홍은 비교적 어린 기생이었었다. 그의 얼굴은 이쁘다기보다 엇구수하였고, 늘씬하게 자란 키는 마치 옥토에서 잘 자란 화초와 같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며 몸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인이었었다.

“간지노요로시이온나다라우?(感じの宜い女だらう―분위기가 좋은 여자지)”

아직껏 여름의 놀이에, 큰 기생만 데리고 놀아서, 어린 기생을 모르는 나에게 노산홍을 소개하며, K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 말에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고, 겹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때 잠시 첫 대면을 한 뿐, 그 뒤에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동안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이르렀다. 여름과 가을을 보내는 동안, 다시 요리집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를 못 가진 나는, 산홍에게 대하여 ‘간지노요로시이온나(感じの宜い女―분위기가 좋은 여자)’라는 인상을 가진 뿐,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해 첫겨울 어떤 날, 우연히 길에서 옛날의 술벗을 만난 나는, 오래간만에 저녁을 같이 하려, 어떤 요정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기생을 부를 때에, 나는 노산홍을 선택하였다.

“산홍이가 누구―ㄴ가?”

벗들이 이렇게 물을 때에,

“아직 어린 기생.”

이라고 대답한 나는, 미상불 얼굴을 약간 붉혔을 것이었었다. ‘어린 기생’ ‘오입장이에게 이름조차 알리지 못한 기생’―이런 기생을 지명하였다 하는 것은, 그때의 나의 노는 방식을 알던 그들에게는 의외인 만치, 나역 또한 속으로 얼굴을 붉힌 것이었었다.

“노산월이 동생 말이야. 언제 보니깐, 아주 서잰 것이 활발하구 재미 있두먼.”

이러한 변명을 붙이기조차 나는 잊지 않았다.

그 저녁, 산홍이는 몹시 말괄량이를 부렸다. 마치 어린애가 어버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그는 내게 매달려서 가진 어리광을 다 부렸다.

“엉야.”

억지 쓰는 어린애와 같이, 내 팔죽지에 매달리며, 몸을 비꼬면서, 이런 어리광까지 부렸다.

“배고프면 냉면이라두 시키련?”

“싫구나.”

“그럼 뭘?”

“나 왜떡.”

그것은 커다란 어린애였었다. 그리고, 이러한 어리광이 그에게는 능글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럴 듯이 보였다. 그의 태도며 행동에서, 극적 분자라는 것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놀이를 끝낸 뒤에, 우리는 모두 산홍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벗들은 산홍과 화투를 하기 시작하였다. 몇 잔 술에 얼근히 취한 나는, 처음에는 같이 화투를 하려 섞이어 보았으나, 화투장이 두 장 석 장으로 보여서, 도저히 할 수가 없으므로, 화투장을 내어던지고, 그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술에 노곤히 취한 나는, 어느덧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문소리가 나는 바람에, 번쩍 깨었다. 깨어 보니, 방 안에는 산홍이 혼자 밖에는 없고, 벗들의 돌아가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어디들 갔어?”

“돌아들 갔세요.”

“지금? 나두 가야겠군.”

나는 벌덕 일어나서, 외투와 모자를 움켜쥐고, 문을 열었다. 벗들의 소리는, 벌써 대문 밖에서 들렸다. 나는 내 신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신이 보이지 않았다.

“내 신 못 봤니?”

“거기 없어요?”

산홍이도 나와서 신을 찾아 보았다.

“아이구머니, 없다. 그이들이 가지구 가신 모양이군.”

벗들은 갈 때에, ‘밤참을 먹고 다시 올 테니, 올 때까지 붙들어 두라’고 산홍에게 단단히 부탁을 하였다 한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 그곳에 있기가 싫었다. 더구나, 벗들이 갔다는 것은, 밤참을 먹으러 간 것이라고는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는 나는, 산홍을 채근하여 곧 따라가서 신을 찾아오기를 부탁하였다.

산홍이는 신을 끄을면서 뛰어서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문 밖에서 또한 저편으로 사라지는 산홍이 발소리를 들은 뒤에,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서, 산홍의 오기를 기다리던 나는, 한참을 혼자서 기다리다 못하여, 나도 또한 버선발로 대문 밖까지 나섰다. 대문 밖까지 나선 나는 그들을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면서 저척저척 큰거리까지 나왔다. 큰거리에 나와서는 버선발로 큰거리를 건너섰다. 큰거리까지 건너 보았으나, 산홍의 그림자도 벗들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전차길을 건너선 나는, 또 그들을 찾으면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예까지 온 이상에는.”

이리하여, 나는 좁은 길로 골라서 버선발로 집까지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옷을 끄르고, 방금 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에, 행랑 사람이 들어와서, 누가 찾아온 것을 알게 하였다. 나의 대신으로 나갔던 안해가, 눈에 칼을 세워 가지고 들어왔다.

“웬 기생이 당신을 만나잡디다.”

“혼자서?”

“C인지 하는 사람하구.”

“그럼, 나가서 내 구두나 찾아 오. 필시 구두를 가져왔을 테니….”

“구둔 웬 구두?”

“글쎄, 나가 찾아만 오지.”

그리고, 나갔던 안해가 구두를 찾아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노산홍이라는 기생이야.”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변명하며, 나는 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 이삼일 지나서다. 어떤 상가에 밤경을 갔던 나는, 거기서 또다시 술벗들을 만났다. 새벽 두 시쯤 그들이 나를 끄을었다―.

“화투해서 돈 땄네. 밤참이나 먹세.”

그 날은 행운의 날로서, 술벗들과 내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화투에 승리를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딴 돈을 죄 C에게 맡긴 뒤에, 밤참을 먹으러 상가를 나섰다. 우리의 의논은 장국집에서 양식점으로, 양식점에서 카페로, 카페에서 요리집으로 올라갔다. 같이 술을 먹는다 할지라도, 카페나 다른 음식점에서 먹는 것을, 우리는 옳다 여길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불로관(不老館)으로 갔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산홍이를 보았다. 시간이 넘어서 정식으로 기생을 부를 수가 없는 우리들은, 각각 친한 기생을 명함을 보내서 데려오기로 하였다. 나는 기연가 미연가 하면서 산홍에게 명함을 보냈다. 산홍은 내 이름을 알지 모를지 이것부터가 의문이었다. 설사 안다 할지라도, 명함을 보내서 올지 안 올지는 도저히 판단을 허락치 않는 문제였었다. 그러나 산홍이를 안 이상에는 다른 기생은 부르고 싶지 않았다.

산홍이가 제일순으로 도착되었다.

“산홍이 일등! 어찌나 바쁜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냥 왔구나. 동인이 한 턱 하게.”

이렇게 놀려 대는 말을 귓등으로 넘기면서, 그는 번번 누워 있는 내 곁으로 와서, 내게 몸을 기대어 앉았다.

“너한테 보낸 게 뉘 명함인지 아니?”

“알잖구요.”

“그래 뉘 명함?”

“듣기 싫어. 엉야, 일어나라우.”

그 날 나는 몹시 취하였다. 공복에 독한 소주를 먹은 나는 정신이 아뜩아뜩 하였다. 때때로 깜박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누웠다가는, 남한테 흔들리워서 일어나고 하였다. 세상은 혹은 꺼꾸로, 혹은 바로, 순서 없이 뒤집혔다.

나는 어떻게 산홍의 집까지 갔는지 알 수 없다. 산홍의 집에서 나를 두고 돌아가려는 친구들을 향하여,

“오늘은 마음대로 내 신을 가지고 가라.”

고 고함을 치는 자기를 나는 발견하였다.

이리하여 산홍과 인연이 맺어졌다.

이튿날, 친구들은 나더러 한턱을 하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산홍과의 관계를 절대로 부인하였다. 한턱 하라면 하기는 하지만, 산홍과 관계는 없노라 하였다. 그리고 그 말은 친구들의 신용을 사기에 넉넉하였다. 몇 해를 연하여 그만치 맹렬히 놀았지만, 기생과의 육체적 관계를 피하여 오던 나는 어젯밤 비록 산홍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하나, 그만 신용은 사기에 넉넉하였다.

그날 밤, 우춘관(又春館)에서 놀이는 또 열렸다. 그러나, 나는 산홍이를 피하고 김산월을 불렀다.

그 날같이 섭섭한 놀이를 한 것이 내 기억에 다시 없다. 비록 육체적 관계까지는 없었다 하나, 여름에는 하루를 보지를 못하면 견디기 힘들도록 생각나던 김산월이, 이때에는 조금도 나의 마음을 위로하지를 못하였다.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그의 갸름한 얼굴과 기다란 눈을 쳐다보면서, 나는 속으로 산홍아, 산홍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미루어서 (언제 움돋았는지 모르는) 산홍에 대한 나의 사랑이 작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느끼고 오히려 의외로 생각하였다.

나는 몰래 빠져나가서 보이에게, 산홍이 어느 요리집에 불렸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산홍이 아직 불리지 못하고 제집에 있다는 것을 들을 때에, 그런 (가련한) 산홍을 부르지를 않고 딴 기생을 불러 가지고 노는 자기가 미안스럽기까지 하였다.

우춘관에서 그들과 작별을 한 뒤에, 혼자서 몰래 좁은 골로 들어선 나는 또다시 산홍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한때 요정에서 발을 끊었던 나는, 산홍이를 안 뒤부터 다시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기생이라기보다 오히려 한 커단 계집애라고 하고 싶은 산홍이는 이상히도 나의 마음을 끄을었다. 그와 사괸 지 얼마 지나지 못하여, 어느덧 나의 심신은 그에게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 겨울, 나는 산홍이를 위하여 별일을 다 하여주었다. 편도선 때문에 감기를 잘 걸리고 목소리가 늘 갈린 듯한 그를 고쳐 주기 위하여, 편도선적출 수술을 한 것도 그 겨울이었었다. 불리지를 잘 못 하는 그를 어떻게든 좀 잘 불리게 하느라고 매일 요리집을 갈아서 그를 부르고, 기회만 있는 연회마다 그를 불러서, 엇구수한 그의 맛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 준 것도 그 겨울이었었다. 미처 주우(酒友)들을 만나지를 못하여 요리집에 갈 기회가 없으면, 따로이 그의 표지를 내어다가 그를 주어서, 그로 하여금 영업에 그다지 축박히지 않도록 노력하여 준 것도 그 겨울이었었다. 나는 산홍이를 어떻게 하여서든 다른 기생들보다 그리 지지 않는 기생이 되도록 하여보려고 별 애를 다 썼다. 심지어 화장에까지 간섭하였다. 그때 벌써 재산 상태에 현저히 흔들림을 보기 시작한 나는, 마음대로 그의 뒤를 돌아보아 주지는 못하였을망정, 권번에 전화를 걸어서 저녁 아홉 시까지도 그가 불리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알면, 곧 요리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그를 위하여 오륙 시간의 시간을 잡아 주고 하였다.

“아이구 어린 기생하구…….”

여름에 같이 놀던 큰 기생들은, 나를 보면 꼭 이렇게 놀려 대었다. 나는 이 소리가 가장 듣기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여서든 산홍이를 큰 기생을 만들려 힘쓴 것이다.

안해(惠仁)는, 이런 방면에는 특별히 신경이 날카로웠다. 여름에 김산월, 원산월 등과 그렇게 모지게 놀 때에 무관심히 지낸 그였었지만, 일찍이 구두를 가지고 왔을 때에 내 입에서 나온 ‘노산홍’이라는 이름뿐은, 아무리 하여도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그는 나와 산홍이의 새를 알아내었다.

그는 어떤 날 저녁, 갑자기 나에게 노산홍의 일을 캐어묻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그의 얼굴에 나타난 기괴한 표정을 본 나는, 인제 그 일을 그냥 감추려는 것이 결코 득책이 아님을 직각하고, 솔직히 다 이야기해 버렸다. 그랬더니, 본시 말괄량이의 성질이 있는 그는, 노산홍과 한 번 만나서 이야기라도 할 기회를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우리 첩을 좀 보아야지.”

그는 기괴한 웃음을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리하여 음력 정월 초승께 어떤 날, 어떤 일본 요정에서 소연(小宴)을 열게 되었다.

그것은 기괴한 장면이었었다. 나는 멍멍히 앉아있었다. 일찍이 김옥엽과 황경옥의 틈에 끼여서, 갈피를 차리지 못하고 쩔쩔맨 나는, 그로부터 사오 년 뒤에 또다시 여기서 안해와 기생의 틈에 앉아서 쩔쩔매는 자기를 발견치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싱겁게 웃고 있는 혜인(惠仁)을 보았다. 그리고, 싱겁에 웃고 산홍을 보았다. 그런 뒤에는 유난히 점잖이, 음식에 대한 비평도 시험하며, 음력 양력에 대한 강화도 하였다.

그 자리의 혜인은, 연전의 김옥엽이었다. 노산홍은 연전의 황경옥이었었다. 산홍이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머리를 수그리고 음식조차 마음대로 못 먹었다. 혜인에게 권고를 받고 한두 젓가락씩 떠보는 뿐이었었다.

혜인의 말괄량이는 거기서도 충분히 발휘되었다. 가장 자기의 소유권을 자랑하듯이 그는 내 곁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산홍에게 대하여는 별별 내 흉을 다 이야기하며 웃었다. 본시 눕기를 즐겨 하는 내가 드러누울 때는 자기의 무릎까지 내게 제공하였다.

“이이는 성질이 강짜가 세니까, 딴 서방을 했다가는 큰일난다.”

이런 소리까지 하며 웃었다.

연을 파하고 문밖에 나와서 어떻더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촌년.”

그는 간단히 이렇게 결론하여 버렸다. 그리고 그것뿐으로는 시원치 않은지,

“퍼러둥둥한 게.”

하고 한 마디 더 보태었다. 나는 힐끗 그를 보았다.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그의 눈자위가 곱지 못함을 보고,

“아직 어린애거든.”

이렇게 변명 비슷이 말하였다.

며칠 뒤에 산홍이는 그 날의 사례로서, 혜인에게서 빈사 저고리를 한 채 받았노라고 내게 보여 주었다. 그것을 보고 집에 돌아오니까, 혜인이는 무슨 비단으로 속옷을 짓고 있었다. 본시 그런 데 무관심한 나는 본 체 안하고 무슨 책을 읽고 있노라니깐, 혜인이는 몇 번을 나의 주의를 끄을려 하다가 하릴없던지, 마침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생년 저고리 해주는 걸로, 내 속옷은 못 지어 입을까.”

나는 그 말에 대답치 않았다. 그는 또 말을 계속하였다―.

“이건 아깝디요? 수태 아까울걸…….”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도 웃었다. 가장 천진스런 웃음을…….

나는 아직껏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머리를 기울인다. 그때의 나의 눈에 비친 바의 웃음에는 털끝만치도 사적(邪的) 분자가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그렇듯 호호히 웃게 하였을까. 그의 마음에는 쓰린 그림자가 없었을까?

이리하여 혜인이는 표면적으로나마 산홍이에게 대한 호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상식으로 판단하든 이치로 생각하든, 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여인 가운데도 특별히 시기가 센 그가, 결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어떤 괴상한 마음으로서 한 번 산홍에게 호의는 보였지만, 그 뒤부터의 나에게 대한 감시가 매우 엄하였다. 무시로 행랑 사람을 산홍의 집으로 보내서, 거기 내 신발이 있는지 없는지를 엿보았다. 요리집으로도 하인을 때때로 보냈다. 전화도 흔히 걸었다.

“누구요?”

“누구요?”

“당신 누구요?”

“당신 김동인 씨요?”

“아 C인가?”

“여보, 정신을 좀 차려요, 내가 누구야요?”

수화기를 통하여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서 전화통을 내던진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마침내 다른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엄중한 감시 아래서도, 산홍이를 만나고 싶은 나의 정열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거기 대한 대착을 산홍이와 토의하였다. 그 뒤부터는 우리는 요리집을 피하였다. 동승루나 동화루 같은 청요리집에 가서, 시간을 잡아가지고 둘에서는 산홍의 집 건너편에 있는 그의 동무 기생의 집을 밀회 장소로 하였다. 때때로 우리는, 건너편 산홍의 집 대문에서 들리는 산홍이를 찾는 손님의 소리를 들었다.

“손님 왔다.”

“×××로군.”

“너의 새서방이지?”

“듣기 싫여.”

“가보렴.”

“싫구나. 엉야, 그런 소린 이젠 하디 말라우요.”

요리집을 피하고 산홍의 집을 피하여, 이리저리 밀려 다니면서 만나는 것이, 내게는 더 자미스럽고 신비스러웠다. 더구나, 어떤 때는 갈 곳이 없어서 어두운 골목골목을 해여 이 집이나 행여 이 집이나 하고 산홍의 안내로써 헤매는 재미도 여간이 아니었었다.

산홍에게는 나보다 먼저 관계된 H라는 사내가 있었다. H는 첫 번부터도 보기가 싫었으며, 나와 접근된 뒤부터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노라는 것이 산홍의 변명이었었다. 그리고, 한 번은 나를 방 안에 앉히어 둔 채 대문에서 찾는 H에게 향하여, ‘왜 기신기신 찾아다니느냐’고 발악까지 하였다. 그러나 H는 그냥 끊임없이 산홍의 뒤를 따라다녔다. 산홍과 같이 건너편 집에 있노라면, 어떤 때는 등이 달아서 네다섯 번씩 찾아다니는 일도 있었다.

“산홍이, 산홍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산홍이를, 등이 달아서 찾아다니면서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산홍의 대문에서 부르고 하는 H의 소리는 고요한 밤공기를 흔들어서, 비통하다고 형용하고 싶게까지 들렸다.

“산홍이, 산홍이.”

그것은, 마치 고기에 주린 이리의 부르짖음이었었다. 등이 달아서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역 가정을 내어버리고 처자를 내어 버리고 이곳에 산홍이와 마주 앉아있는 처지였지만, 인생의 추악한 한 면과 직면한 느낌을 받고, 뜻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하였다.

“아이구, 저더러 누구 찾아다니라나.”

내게 듣기 좋게 이런 소리를 하는 산홍이를,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바라보는 내 얼굴에는, 어떤 때는 증오의 표정도 있었을 것이었었다.

그해 겨울이 거의 가서, 나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불유쾌하고 창피한 사건이 생겼다. 어떤 날 대성관(大成館)에서 논 나는, 놀이를 파한 뒤에 사소한 일로 곁방 취객들과 충돌이 되었다. 한 마디가 가고 한 마디가 오는 동안에, 충돌은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큰 격투가 일어났다.

저편은 팔구인, 이편은 나 한 사람,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농을 할 때라도 손질은 못 하도록 엄하게 길러난 나는, 싸움에는 완전한 무능자였었다. 나는 무수히 두들겨 맞았다. 이가 모두 부러지고, 사면이 터지고 찢어지고 하였다. 이튿날은 나는 병석에 넘어갔다. 미리부터 있던 폐첨가다아(肺尖加多兒―폐첨 카다르)의 기미에 겸하여 그간 얼마 동안의 폭음의 결과와 이날의 격동은 나로 하여금 병석에 넘어지게 하였다. 혈압이 놀랍게 낮아졌다. 폐에서는 잡음이 들렸다. 각혈까지 하였다. 게다가 이번에 당한 창피 때문에 생겨난 심적 고통은 더욱 나를 괴롭게 하였다.

그 일을 기회로 나의 발은 다시 조선 요리집에서 끊어졌다. 한 반 삭 뒤에 병석에서는 일어났지만, 다시 요정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나 산홍에게 대한 집착은 그 일 때문에도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 요리집에는 발을 끊었다 하나 다른 곳에서라도 산홍이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를 따라서 장소를 바꾸면서, 나는 산홍이와 밀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봄에 나는 토지관개 사업(土地灌漑事業)을 시작하였다. 기울어져 가는 재산 상태를 바로잡아 보기 위하여, 무엇이든 시작하려던 나는, 어떤 사람의 권고를 들어서, 토지관개 사업을 시작하였다. 본시 이런 방면에 아무 지식도 없는 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두고 때때로 심심하면 현장에 나가 보고 하였다. 장소는 나의 집에서 자전차로 이십 분쯤 걸리는 평양부 외, 전력으로 보통강(普通江) 물을 끄을어 올려 풀 수 있는 백여 정보쯤 되는 땅이었었다.

이 공사가 거의 끝난 어떤 날 서울서 안서와 그 밖 이삼의 벗이 평양을 왔다. 그들은 신의주로 놀러 가는 길에 평양에 들른 것이었었다. 그들과 산보를 나갔던 나는, 그 길로 집에는 아무 말도 없이 함께 신의주로 떠났다. 신의주서 안동현의 아편굴이며 서관 등의 탐험에 여념이 없다가, 한 주일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서는 그 새 나의 거처를 찾느라고 욱적하였다.

떠날 때는 본시 이틀의 예산으로 떠났으며, 그런지라, 곧 돌아올 예산으로 그때 관개 사업에 필요한 전기회사와의 계약금으로 준비하였던 천원의 돈뭉치를 아무 말 없이 책 틈에 끼워 둔 채 떠났으매, 집에서는 그것 때문에 큰 야단을 한 모양이었었다. 시기는 절박하였는데 계약은 내어버리고 돈까지 가지고 (집에서는 내가 그 돈을 가지고 나간 줄 알았다) 나간 나를 찾느라고 큰 야단을 하였다.

그때, 마침 진남포에 군함이 와서 정박하였다. 평양서도 그것을 구경하러 많이들 갔다. 내가 없어진 뒤에, 그의 의혹을 산홍이에게 밖에는 부을 수 없는 혜인이는, 산홍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산홍이는 진남포 군함 구경을 갔다는 말을 들은 혜인이는 눈이 벌겋게 되어 곧 진남포로 달려갔다. 그는 산홍이가 진남포에 간 것은 정녕코 나와 동반하여서 갔음이라 하였다. 시기와 분노로 불타오른 그는, 진남포로 달려가서 각 여관을 찾았다. 그리하여 대정 여관(大正旅館) 숙박기에서 노산월이와 노산홍이는 발견하였지만, 김동인이는 발견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그 노산홍이조차 군함을 구경하러 가서 여관에는 없었다.

저녁때 다시 여관으로 갔을 때는 노산홍이는 벌써 평양으로 돌아온 때였었다. 여기서 그의 의혹은 더욱 커졌다. 여관 사환에게 물은 결과, 사오 인의 손님과 같이 왔더란 것은 알았으나, 그 손님 가운데 김동인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극도로 결이 오른 혜인이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서, 그 길로 산홍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산홍이는 아직 제집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한바탕의 싸움을 하였다. 극도의 시기와 억분함은 그로 하여금 제 이성을 잃게까지 하였다. 김동인이를 내어놓으라고 서로 악구를 퍼부으며 싸운 뒤에, 거기서 받은 모욕 때문에 더욱 흥분이 된 그는, 반미치광이와 같이 되어서 그 집에서 달려나오는 길로 하인들을 시켜서 각 요리집을 찾았다.

따마야에서 노산홍이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김동인이는 그곳에도 없었다.

“없지 않아. 있어, 있어. 숨었디.”

따마야에서 헛손으로 돌라온 하이엔게, 이렇게 야단을 하며, 자기가 직접 가서 보겠노라고 야단을 할 적에, 안동현서 돌아온 내가 집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었다.

시기와 흥분으로 미칠 듯이 된 그에게는 이성이며 양심이 없었다. 그는 내가 안동현서 사 온 바의 몇 가지의 물건을 눈으로 보면서도, 나의 안동현 행을 부인하였다. 그런 것은 진남포서도 돈만 주면 넉넉히 사 올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안동현 세관을 통과한 도장을 보고도, 그냥 제 말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울며 불며 야단하였다. 여인의 히스테리의 어(御)키 힘듦을 나는 여기서 통절히 느꼈다.

이 사건은 가따가나 새가 좋지 못하던 혜인이와 나와의 새를 더욱 벌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산홍이와도 한동안 만나지 않게 하였다.

왜? 첫째로는 혜인이에게 그렇게 대접한 산홍이의 집안을 괘씸히 본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그 사건 때문에 산홍이와 만나기가 열적게 된 때문이었었다. 세째로는 나에게 한 마디의 의논도 없이 진남포를 갔던 산홍이의 태도를 좋지 못하게 본 때문이었었다. 이 세 가지가 다 극히 박약한 이유였었다. 그리고, 안동현서 산홍이를 위하여 사 온 몇 가지의 프레젠트를 다른 기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귀에는 때때로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그것은 나의 친구 K라는 사람과 산홍과의 새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는 것이었었다.

“?”

반신반의로써 나는 그 말을 들어 두었다. 거기 대하여 산홍에게 캐어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지어 먹었던 마음이 차차 사라짐을 따라서, 산홍이와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그 뒤부터는 만난다 할지라도 어석버석 서로 새가 이상하여졌다.

그때에 또 한 가지의 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어떤 첫여름이었었다. 집안 누구를 보내려 정거장에 나갈 일이 생긴 나는, 방금 따마야에 불리어가는 산홍에게 열두 시쯤 동승루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짐 꾸리는 것을 보고 정거장까지 전송을 하고 그 길로 돌아서서 동승루로 갔다. 그러나 뜻밖에 동승루 보이의 대답은, 산홍이가 거기 없다는 것이었었다. 나는 보이에게 다시 물었다. 이런 일을 약속한 뒤에 어기어 본 일이 없는 산홍인지라, 나는 보이의 말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보이의 대답은 여일하였다. 나는 다른 보이를 불러서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그 보이의 대답은, 다른 손님과 자동차를 타고 나갔는데 곧 들어올 테니 내가 오거든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다. 이 대답에 불유쾌하게 된 나는 보이에게 이렇다 저렇다 캐어서 물을 때에, 이층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나면서 산홍이가 내려왔다.

“자, 올라가십시다.”

그는 마치 나를 기다리듯이 나를 끄을었다.

“자동차 타고 어디 나갔다더니?”

“아니, 보이가 모르고 그랬디.”

“보이가 모르단?”

“자, 어서 올라나 가요. K씨도 와 계세요.”

K? 나의 의혹은 여기서 와락 일어났다. 올라가 보니, K와 산홍 단둘이서 술을 먹고 있었다.

“자네가 온다기에, 기다리고 있었네.”

이것이 K가 나를 볼 때의 인사였었다.

“그런가.”

나는 불유쾌함을 감추고 이렇게 대답하여 두었다.

잠시 더 앉았던 K는, 잘 놀다 가라는 인사로써 먼저 일어나서 갔다.

K와는 왜 같이 들어왔느냐. 왜 나를 따려 했느냐. K가 돌아간 뒤에, 산홍이와 나 사이에 이런 논란이 생겼다. 그는 꾸준히 한가지로 대답하였다. 따마야에서 인력거로 동승루로 오는 길에 K를 만나서, 밤참이라도 같이 먹자기에 동승루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었다. 그리고, 왜 나를 따려 했느냐는 질문에 ‘따려 했으면 땄을 게지 자기가 왜 나와서 나를 맞았겠느냐’는 이론으로서 나의 말을 막았다.

산홍의 말은 이론이 서기는 섰다. 그러나 산홍과 K의 새가 수상하다는 일을 미리부터 듣고 있던 내게는, 그만 말로써 온전히 의심이 풀릴 리가 없었다. 헤어질 때마다 나를 억지로라도 자기의 집까지 끄을고 가던 그였었지만, 이날은 나를 끄을지도 않았다.

이리하여, 그와 불유쾌하게 헤어진 뒤에 나는 그 뒤부터는 나의 사업에 취미를 붙여 보려 하였다. 처음에는 몹시 몰취미하던 그 사업이었었지만, 차차 겪고 나면서부터는, 나는 어느덧 그 사업에 취미를 느꼈다. 놀라운 전기의 힘으로 빨리어 올라온 보통강 물이 아래로 퍼진 백여 정보의 땅을 적셔서, 겨울까지는 밭〔田〕이던 그 일대가 어느덧 논으로 화하여 버린 것은 시원한 노릇이었었다. 한 번 취미를 느낀 뒤에는 끝이 없는 나의 성미는, 여기서도 충분히 발휘되었다. 나는 나날이 아침에 자행거를 타고는 관개 장소에 나갔다. 그리고 저녁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매일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씩 동리 구역 내를 편답하면서 동이 무너진 데며 물이 잘 가지 않는 데를 검분하였다.

벼는 나날이 자랐다. 물을 충분히 받은 벼는 눈에 보이게 컸다. 그 무연한 벼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나는 때때로 만족의 웃음을 웃었다. 백여평의 땅을 잡아서 나는 자농(自農)까지 하였다. 더럽다고 곁에도 가지 않던 거름을 손으로 만지면서 스스로 지은 농사가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도 유쾌한 노릇이었었다. 농립모에 삽이나 호미를 들고 논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자기를 스스로 보고는 나는 때때로 빙그레 웃었다.

농촌에는 놀이가 많았다. 복놀이라 무슨 놀이라, 우리로서는 이름조차 기억키 힘든 놀이가 많았다. 그런 날마다 농민들은 술과 송아지 고기를 받아가지고 찾아왔다. 소박한 농민들과 마주 앉아서, 술추렴을 하는 취미도 나는 어느덧 배웠다.

그 여름 동안, 나는 온갖 세상의 다른 군잡스런 문제를 잊었다. 그리고, 분망한 틈에도 한가한 여가가 있는 농촌 생활에 온 정력과 흥미를 부었다.

그러나, 이 사업에도 종언(終焉)의 날이 이르렀다. 이 관개 사업을 조사하러 나왔던 어떤 소관리(小官吏)와 변변치 않은 일로 언쟁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 사업도 실패에 돌아갔다.

나는 관개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 경유를 상세히 쓸 자유가 없다. 여기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모지(某紙)에 기고하였더니 그 전문(全文)이 당국의 뜻에 맞지 않아 삭제를 당하였다.

관개 사업이 실패에 돌아간 뒤의 나의 생활은 순전한 자포적 생활이었었다. 어제는 군산, 오늘은 대구, 내일은 신의주, 이와같이 방향 없이 지향 없이 헤매었다. 파산― 눈앞에 당도한 이런 무서운 그림자에 위협되어, 잠시도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아아, 나는 그때 아편이 얼마나 그리웠으랴, 이전에 병고(病苦) 시대에 경험하여 본 아편의 꿈,― 그것은 이 세상의 온갖 괴롭고 쓰린 자취를 잊어버리는 거짓말 같은 도취경이었었다. 불안과 공포에 얼뜬 나의 마음은 그것을 속이기 위하여 아편으로 아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방면의 길을 모르는 나는, 아편을 구할 길이 없었다. 둘째 방책으로 나는 그 괴로운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기회를 할 수 있는 껏 적게 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으로 낯선 땅을 방황하였다.

이런 때에 받는 공포와 불안을, 무인고도에 혼자 버리움을 받은 사람의 느끼는 공포와 불안에 비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그때의 공포와 불안은 그따위에는 비길 종류가 아니었었다. 자활책(自活策)과 처세술이라는 것을 아직 배우지 못한 내가, 당연한 결과로서 그때에 나의 앞에서 발견한 커다란 두 가지의 그림자는 ‘죽음이냐’ ‘거렁뱅이냐’ 하는 것이었었다. 이런 때에 당연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구직(求職)’이겠거늘, 나는 그때 그런 것을 생각하여 본 적이 없었다. 재산이 없으면 거렁뱅이거니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앞길이 답답하고 막막하였다. 인제 삼십 년이 될지 사십 년이 될지 모르는 장래라는 것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답하였다. 정신없이 그 생각을 하고 앉아있다가, 안타까움을 참지 못하여 혀를 깨물었던 그 자리도 아직 남아 있다. 길에서 때때로 여남은 살쯤 난 걸아(乞兒)라도 보면, 문득 집에 남긴 나의 어린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아직 쓴 것을 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가까운 장래에 저 꼴을 하고 나서려니 하면, 그 꼴을 보기 전에 미리 칵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나고 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대구서 본 일이라고 기억한다. 저녁때 좁은 골목을 헤매던 나는, 어떤 골목에서 길로 향한 문을 열어놓은 어떤 방 안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행랑인지 셋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초라한 단간방이었었다. 그 안에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젊은 부부(사내는 노동자)는 등불 아래서 마주 앉아서 밥을 나누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극히 평범한 광경이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순간 나의 온 신경은 흠칫하였다.

‘그대에게는 밥이 있다. 가까운 장래에, 그대보다도 더 아래층으로 떨어질 것이 나의 운명이다.’

그날 밤, 나는 한잠을 못 이루었다. 행랑살이를 하면서라도 밥을 달게 먹고 있는 그들이 내게는 부러웠다.

한 달을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거의 단식하다시피 하였다. 한 가지도 입에 들어오라는 것이 없었다. 의리로 할 수 없이 맛없는 여관 밥에 젓가락을 대어 보는 뿐, 목구멍을 넘겨 보지를 않았다. 벌컥벌컥 냉수만 먹었다. 온갖 것이 쓰고 시고 떫고 역하기만 하였다.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와서, 나는 거울을 보고 놀랐다. 그때에 나의 나이가 스물일곱이라 하나, 아직껏 아무도 스물 두셋으로 보던 새파란 젊은이가, 한 달 동안에 삼십이 넘은 중년으로 변하였다. 혜인이도 나의 얼굴을 보고 탄식하였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혜인이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다시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남아 있는 부동산을 죄 팔아서 관개 사업의 자금으로 차입하였던 돈을 갚을 것, 부동산을 아무리 헐가로 팔지라도, 빚을 갚은 뒤에도 수삼천 원은 남을 테니, 이것은 잘 보관하였다가 장래의 생활의 기초를 세울 것,― 이것이 혜인에게 대한 부탁이었었다. 나는 내 손으로 차마 이 정리를 할 수가 없었다.

서울서 나는 마작(麻雀)을 시작하였다. 지금은 놀랍게도 온 조선에 유행하는 마작도 그때는 그다지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작의 꾼을 모으기에 늘 고심하였다.

아편과 함께 중국의 이대 병근(二大 病根)의 하나이라는 일컬음을 듣는 마작은, 과연 사람의 마음을 고혹하였다. 거기는 바둑이나 장기와 같이 골치를 쏘게 하는 깊은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트럼프 같은 ‘건조미’도 없었다. 단순하고도 비교적 복잡한 마작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가장 편리한 유희였었다.

펑(碰)과 츠(吃) 가운데서 1926년도 갔다. 27년의 이른 봄도 갔다. 그동안에도, 여러 가지의 희비극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 또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기는 약(略)하여 버리고, 봄날도 얼마만치 무르익은 어떤 날 나는 혜인이에게서 편지를 받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관개 사업인허에 대하여 마지막 운동을 하여보려 함이었었다.

나는 마지막 노력을 하였다. 어떻게 하여서든지 인허를 얻어 보려고 온갖 애를 다 썼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헛된 노력이었었다. 이미 넘어진 것을 다시 세울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마침내 파산을 하였다.

나는, 그 마지막 운동을 하느라고 숱한 사람과 숱한 요정 출입을 하였다. 아직껏 처세술이라는 것을 모르고 요정이라는 곳은 개인 유흥소거니 하고 있던 나는 어떤 친구에게 요정이란 곳은 교제― 그 가운데서도 더욱 어떤 운동을 위한 교제에 없지 못할 곳이라는 것을 듣고, 그 뒤부터 처음으로 ‘교제를 위한 요정 출입’을 하여본 것이었었다. 따라서 교제에 능한 기생이 필요한 그 좌석인지라, 말괄량이와 같은 노산홍이를 부를 기회가 없었다. 있다 할지라도 내가 피하였다. 산홍이는 나의 좋아하는 타입의 여인― 인제 다시 접근하였다가는 안 되겠다는 일종의 방비책으로 보지를 않은 것이었다.

그 산홍이를 오래간만에 오월 단오날 제이차회에서 만났다. 그 날도 낮에는 다른 기생을 데리고 뱃놀이를 하였지만, 제이차회로 대성관에서 놀 때에 뒷간에 갔다 오는 길에 복도에서 산홍이를 보고 취한 김에 끄을어 온 것이었었다.

“우리 집에 잠깐 들렀다 가소 고레.”

이차회가 끝난 뒤에 산홍이가 이렇게 말하였다. 꽤 취한 나는 머리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대성관을 나섰다.

좀 가다가, 우리는 한떼의 사람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산홍이의 손을 놓고 그리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장구(長軀)를 이용하여 발 뒤축을 들고 넘겨다보았다. 가운데는 웬 거지가 하나 앉아서 작은 소리로 육자배기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었다. 한 번 둘러보아서 그 밖에 다른 것은 발견치를 못한 나는 그냥 발을 돌이키려 하였다. 그때에 내 귀에는 결코 그저 넘기지 못할 말이 구경꾼들의 수근거림의 새에서 들렸다. 그것은, 즉 이 거지는 P라 하는 사람으로서 오륙 년 전까지도 오입장이로 소문났던 사람이라 하는 것이었었다. 그것을 변모(邊某)라는 기생에게 홀작 부어 넣고, 지금은 아편장이가 되어서 이렇게 빌어먹고 다닌다는 것이었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이 P가 그의 재산을 홀작 부어 넣었다는 변모는, 아까 우리가 뱃놀이를 갈 때에 같이 나갔던 기생의 하나이었었다. 산홍이에게 끄을리어서 그 자리에서 발을 뗀 뒤에도 나는 머리를 푹 가슴에 묻은 채 들지를 못하였다.

“내가 만약 이다―ㅁ에 거지가 되면 어떡헐 테냐.”

하고 물을 때에, 산홍이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변××이 같이 당신 곁으로 인력걸 타고 지나가지.”

나는 탄식하였다. 그리고 자기 집에 잠깐 들렀다 가라는 산홍이를 거절하고, 창황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늦은 여름, 산홍이는 서울로 이사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초겨울에 내가 낚시질을 나다니는 동안 혜인이가 종적이 없어졌다. 남겨두었던 현금 전부 및 팔 수 있는 물건 전부를 팔아가지고…….

이리하여, 나는 두뇌와 견문(見聞)과 몇 권의 저작물과 서적과 및 두 아이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겨울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서울을 갔던 나는, 오래간만에 만난 어떤 친구에게서 노산홍이라는 기생네 집에 놀러 가보자는 말을 듣고, 모른체하고 같이 갔다. 그리고 거기서 나올 때는 저번 단오날 저녁 대성관 문 앞에서 본 바의 거지 P씨의 모양을 서연히 눈앞에 그려 보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때에 내 얼굴에 떠오른 고소(苦笑)를 미소로 본 벗은 내게 왜 웃느냐 물었다. 그때에 나는,

“온나와 부가요이(女は分が宜い―여자는 유리해).”

자기로도 뜻을 똑똑히 알 수 없는 이런 대답을 하고, 또 한 번 고소를 하였다.


金白玉(김백옥)

편집

백옥(白玉)이라 쓰고, 배옥이라 부르는 것이 그의 이름이었었다. 일인도 하꾸교꾸(はくぎょく―白玉)라 하지 않고 바이교꾸(ばいぎょく―梅玉)라 하였다.

1927년의 겨울부터 1928년의 겨울까지― 만 일개년을 나는 두문불출하였다. 파산, 실퍼, 거기 따르는 불편, 빈곤, 고통,― 이런 현실고에 부대끼어, 할 수 없는 그날그날을 보내는 동안, 나는 막연하나마 이대로 지낸다는 나의 귀한 혼까지 타락을 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자포적(自暴的) 타락경에 빠져들어 가려는 혼을 붙잡기에 온 힘을 다 썼다. 만약, 그때에 나로서 한 걸음만 길을 헛디디어서 그 출발을 그릇하였다 하면, 지금쯤은 소위 세상에서 이르는 바의 한 개의 부랑자― 그렇지 않으면 헌놈이 되어 버렸을 것이었다. 멋은 알고 돈 없고 직업 없고 생활 방책도 모르는 한 전형적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을 것이다.

각각으로 자포적 타락경으로 빠져들어 가려는 자기의 마음과 맹렬한 싸움을 한 지 일 년 뒤 나는 마침내 자기를 이겼다.

그렇다. 이기기는 이겼다. 그러나 이 전쟁 뒤의 나는 전쟁 전의 나와는 전연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혈기와 용기와 행복감으로 찼던 나는, 쓰고 쓴 세태를 겪고 나 피곤한 늙은이로 변하였다. 세상을 즐겁게 보려던 한 쾌할한 청년은 ‘되는 대로’를 표방하는 중년 사나이로 변하였다.

나의 동생 동평(東平)이가 ‘춘희(椿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것을 평양서 흥행할 때에, 잠시 엿본 나는 문득 흥행이라는 데 대하여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흥행 그것보다도 흥행을 위하여 돌아다니는 그 여행의 취미에 더욱 흥미를 느낀 것이었었다.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양행을 경영하던 K를 찾아가서 영화를 하나 빌려가지고 진남포로 내려가, 항좌(港座)에서 첫 여행을 하였다. 미나미 도시오(南敏夫)라는 일본 변사를 평양서 데리고….

그 초일(初日)이었었다. 그 날의 ‘첨물(添物)’도 끝나고 ‘도리(とり― 흥행에서 마지막에 하는 인기 프로)’도 벌써 시작된 때쯤이었었다. 나는 들어오는 손님을 보느라고 문간에 앉아 있었다. 그때에 하녀가 장내로 들어가더니,

“긴바이교꾸상, 오덴와.(きんばいぎょくさん,お電話―김매옥 양 전화요)”

하고 도로 나왔다. 그 뒤를 따라서 웬 기생 하나이 나와서 사무실로 갔다. 전화를 받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러더니, 그 기생이 제 신발을 들고 와서 홱 하니 문밖으로 내어 던졌다. 그리고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나가서 그 신을 신는다.

나는 그 기생이 짜증을 부리는 것이 우스워서 미소하였다. 그 기생도 나를 보고 그만 픽 하니 웃어 버렸다.

그 기생이 짜증을 내며 돌아간 뒤에, 나는 하녀를 불러서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 하녀에게서 긴바이교꾸(きんばいぎょく)라는 기생임을 알았다.

“오덴바다네(お轉婆だね―말괄량이로군).”

“에에, 시까시 나까나까 우렛꼬데스요(ええ,倂し,中中賣っ子ですよ―네, 하지만 제법 인기가 있어요).”

이리하여 나는 배옥이를 처음 보았다.

사흘 동안을 일본인 측 흥행을 한 뒤에 나흘째 되는 날은 평양서 방모(方某)라는 변사를 불러다가 조선 측 흥행을 하기로 하였다.

그날 밤 흥행이 시작된 뒤에, 사무실에 앉아 항좌 주인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사흘 전에 짜증을 부리며 돌아가던 기생이 또 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았고 저편 객석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양을 가리키면서 주인에게 물었다―.

“긴바이교꾸(きんばいぎょく)라지요?”

“네”

“오소로시이 간샤꾸모찌데스네.(恐しいかんしゃく持ちですね―대단 한 불뚱이군요)”

“하야루기세이데스요.(流行る妓生ですよ―인기있는 기생이에요)”

며칠 전에는 하녀에게서, 오늘은 주인에게서, 잘 불리는 기생이란 찬사를 들은 긴바이교꾸에 대하여 나의 호기심은 약간 일어났다.

흥행이 끝난 뒤에, 나는 방 변사를 데리고 어떤 중화 요리집으로 갔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무슨 술을 마시며 기생을 누구를 부르겠느냐는 보이에게, 음식을 지시한 뒤에, 곧 김매옥(金梅玉)이라는 기생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매옥이? 매옥이 없어요.”

보이는 애교 없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없어? 방금 흥행이 끝난 뒤에 돌아가는 그를 보면서 항좌를 나섰는지라, 벌써 다른 데 불렸을 리가 없었다.

“잘 알아 봐!”

“없어요. 매월(梅月)이라고밖에는….”

“아니, 그럼 매옥이라는 이름 가진 기생이 없단 말이야?”

“네, 없어요.”

나는 머리를 기울였다. 매월이면 바이게쯔(ばいげつ)지, 바이교꾸(ばいぎょく)가 아닐 게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한 번도 아니요 두 번을, 바이교꾸라 들었다.

“어디 명부 가져와.”

그리고, 가져온 명부를 뒤져 보았지만 매(梅)자를 가진 기생은, 김가 가운데는 매월이 하나밖에는 없었다. 나는 다시 명부를 보았다. 이번은 옥(玉)자를 표준 삼아 가지고. 그리고, 거기서 김산옥(金山玉)이와 김백옥(金白玉)이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발견한 두 가지가 다 하나는 긴상교꾸(きんさんぎょく)요, 하나는 긴하꾸교꾸(きんはくきょく)로서 바이교꾸(ばいぎょく)와는 비슷도 안 하였다.

나는 다시 보이에게 물었다―.

“이전에도 매옥이라는 기생이 없었어?”

“전에― 삼년 째는 없어요.”

“동기에는?”

“동기에도 없어요.”

“아니, 그 키는 중키나 되고, 몸이 간얇고, 눈 크고, 웃을 때는 입에 각이 없어지고, 뾰롱뾰롱하고―.”

내 기억을 따라서 그 기생의 모습을 설명하여 보려고 이만치 말할 때에, 보이가 탁 제 손을 마주쳤다―.

“네. 김배옥이 아니오?”

“그래, 김매옥이.”

“아니, 매옥이가 아니요, 배옥이.”

“배옥이?”

나는 다시 명부를 보았다. 내가 명부를 들여다보는 뜻은 안 보이가, 먼저 손가락으로 어떤 이름을 가리켰다. 그것은 김백옥이었었다.

“이게야 백옥이지.”

“배옥이라고 해요.”

“일본말로는?”

“긴바이교꾸(きんばいぎょく).”

“그래 그래, 불러라.”

이리하여 부른 기생이 들어오는 것을 보매, 그것은 항좌에서 본 그 기생이 틀림이 없었다.

“기생 왔읍니다.”

이런 외침과 함께 보이가 여는 문으로 들어온 배옥이는, 먼저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그런 뒤에 인사도 하지 않고 상 맞은편에 덥석 와 앉았다.

“항좌에서 바로 오섯쉐까?”

이렇게 묻는 그에게 그렇다고 대답을 한 뒤에, 이름을 몰라서 부르기에 고심한 그 이야기를 하니깐 그도 웃었다.

“왜 항좌에서 같이 가자구 그러시디요.”

“글쎄, 그랬더면 좋을껄, 하마터면 김매월이를 부를 뻔했네.”

활동사진을 즐겨 하고 연극을 즐겨 한다는 배옥이는, 또한 이야기를 즐겨 하는 기생이었었다. 대수롭지 않은 사건을 가지고도, 그는 한 토막의 이야기를 만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다가 고기를 붙이고 뼈를 넣어서, 재미있는 듯한 일석화(一席話)를 만들고 하였다. 본시 눕기를 좋아하는 나는 퇴침을 베고 누워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라고 나르럭이 노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면서, 그가 며칠 전에 항좌 문밖에 제 신을 내어 던지며 짜증을 부리던 일을 생각하고, 뜻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재미있는 기생이다. 게다가 저만치 이야기를 즐겨 하고 이야기를 만들 줄을 알고 그 만든 이야기를 순서 있게 토로(吐露)할 줄 아는 이 기생이, 만약 계통적 교육만 받았더면 소설 작가는 되지 못하였을까고. 그리고 만약 그로서 소설 작가가 될 소질을 가졌다 하면 그 아까운 소질이 못된 환경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헛되이 썩어지지 않을 수 없는 그의 운명을 탄식하였다.

헤어질 때에 그는 부러 우리를 데리고 자기 집 앞에까지 가서 자기 집을 알려 주고 내일부터 놀러 오라는 부탁을 하였다. 거기 대하여 놀러 가마고 단단히 약속한 나는, 이튿날은 오래 못 만났던 친구 R을 만나서 반가운 회구담에 그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그날 밤으로 남포의 흥행을 끝내고 또 그 이튿날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를 그의 집으로 찾아 가마 하였던 약속은 종내 실행하지를 못하였다.

양력 정월의 첫 여행을 평양 금천대좌(金千代座)와 계약을 하고 ‘2번 흥행’을 항좌에 계약하기 위하여, 나는 양력 연말이 다 된 어느 날 진남포로 갔다.

항좌와의 계약은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저녁차까지의 시간을 배옥이의 집에라도 찾아가 볼까 생각하였다.

그때의 내 나이 스물여덟, 배옥이는 열일곱, 십여 년이라는 나이의 차를 가지고 있는 나는 내가 배옥이에게 가지고 있는 이상한 애착을 스스로 시인하기가 부끄러웠다. 문학자로서의 자기의 감정과 행동에 대한 비판안을 끊임없이 부웃고 있는 나는, 자기가 배옥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상한 애정의 위에도, 엄정한 비판을 부웃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내가 그에게 가진 바는, 어버이가 자식에게, 맏동생이 아랫동생에게, 또는 어른이 어린 사람에게 가지는 그런 종류의 애정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이성이 이성에게 대하여만 가지는 이상한 가정을 또한 스스로 묵살할 수 없는 나는, 그 때문에 선뜻 배옥이의 집으로 발을 떼지를 못한 것이었었다.

‘괜찮지 않으냐. 놀러 간단들….’

스스로 이렇게 격려는 하여보았지만 일어설 용기는 없었다. ‘조금 더 있다가’ ‘조금 더 있다가’ 나는 스스로 변명을 하면서 뜨뜻한 여관 아랫목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배옥이의 집으로 가기를 결심은 하고도, 그냥 번번히 앉아서 그날 신문의 일면 이면으로 하여 심지어 경제란이며 광고들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자세히 검분하고 있을 때에 문득 뜰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껏 나는 목소리 뿐으로는 배옥인 줄을 알지 못할 때였지만) 분명한 배옥이의 목소리라 감정하였다. 동시에 내 감정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기 위하여 벌떡 일어나면서 방싯이 문에 틈을 내었다.

방싯이 틈을 내고 몰래 내다보려던 나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여관 문이 필요 이상 넓게 열리는 때문에, 그 여인과 얼굴을 딱 마주쳤다. 그리고 그것은 배옥이었었다.

“아이구, 언제 오셋나요?”

“오늘. 어떻게 여길 오나?”

나는 그만 할 말 없이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와서, 이 집 주인 마누라의 동생(역시 기생)을 만나러 오노라는 그의 대답에 머리를 끄덕이며 필요도 없는 변소로 갔다.

변소에서 돌아와서 또 다시 신문을 펴고 몇 번씩 본 데를 또 보고 또 보고 할 때에 안에서 배옥이가 주인 기생과 작별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는 그의 발소리는 나의 문밖에서 멎었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런 뒤에 성큼 마루 위로 올라서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두 괜찮디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응, 들어오너라.”

그는 들어왔다. 들어서자마자 서슴지 않고 아랫목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추운 듯이 어깨를 웅그리며, 양손을 내 무릎 아래로 넣었다.

“아까 내 소리인 줄 알구 문을 열어 보셨디요?”

그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나는 하릴없이 정직하게 그랬노라고 대답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왜 변소루 가셌어요?”

나는 여기서 그만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몰래 볼려던 노릇이 들켜 놓으니깐 부끄럽두나.”

이야기를 즐겨 하는 그는, 여기서도 나브럭이 그의 입술을 놀리면서, 연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였다. 자기 집안의 복잡한 사정을 들어서 호소하였다. 자기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뭇 사내들을 그 이름을 들어가면서 따라다니는 모양을 설명하고 일일이 그 인물에 비평을 가하면서 이런 가운데서도 자기의 자랑을 말하였다. 진남포 화류계의 내막을 폭로시켰다.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진남포 지명인(知名人)들의 비화를 말하였다.

그는 전등불이 온 뒤에야 돌아갔다.

“또 노리개 노릇 하러 가자, 속상해. 그럼 내년에나 다시 오시갔디요.”

이렇게 인사를 하면서 돌아가는 그에게,

“응. 그동안 아들이나 하나 벌어라.”

하니깐, 일단 돌아섰던 그가, 다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놀랍게 커다란 눈으로 나를 흘겼다.

나는 그 흘기는 눈에서 무서운 매력을 보고, 뜻하지 않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어버이가 자식에게, 혹은 윗동생이 아랫동생에게 가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애정을 그에게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내가, 그 매력에 취하여, 그의 그림자가 저편으로 사라지기까지, 마치 얼빠진 사람과 같이 문지방을 붙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정월의 금천대좌 흥행이 끝난 뒤에, 나는 L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즉시 진남포로 갔다. 배옥이는 첫날로 구경왔다.

첫날 흥행을 끝낸 뒤에, L과 함께 어떤 중화 요리집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배옥이와 및 L이 잘 안다는 다른 기생 하나를 불렀다.

며칠 동안의 평양 흥행 때문에 지극히 몸이 곤하게 된 나는 깜빡 하면 그곳서 잠이 들고 하였다. 배옥이는 역시 입술을 나브럭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깜빡 잠이 들면, 흔들어서 깨우고 하였다. 잠과 깸의 중간에서 지낸 나는 그때 배옥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꿈결같이 들은 가운데, 밤의 비발도와 그 근처의 해안의 무시무시하도고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말과, 이 밤에 비발도 구경을 가자던 제의를 하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극도로 몸이 피곤한 나는, 그가 흔들어 깨울 때마다, “응, 응”의 잠소리로 응대한 뿐, 다시 잠의 나라로 빠져들어 가고 하였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한 번, 굉장히 흔들면서 꼬집는 바람에, 펄덕 일어나 앉았다.

“예?”

“응? 무얼?”

나는 눈을 부볐다.

“올해 몇 살이시야요?”

몽롱한 잠에서 아직 완전히 깨지 못한 나는, 연하여 눈을 부볐다―.

“올해, 스물― 스물― 새해에 스물아홉.”

“그러기에 말이야요.”

“그러기에 어떻단 말이야.”

“속상해. 그 새 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안 들으셨군.”

“아니, 듣기는 들었는데 잊었어. 무슨 말이더라?”

“글쎄 말이야요. 스물아홉이면 아직 청년이신데, 왜 그렇게 노인 같애요?”

나는 힐긋 그를 보았다. 그리고 탄식하였다―.

“벌써 반 회갑이 아니냐. 너도 내 나이가 돼 봐라.”

나를 쳐다보는 그의 커다란 눈을 피하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다시 곤한 몸을 벽에 기대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뒤에, 나는 잠들기 전에 몇 번을,

“내가 벌써 그렇게 늙었던가.”

하고는 탄식하고 하였다.

연장자가 어린이에게 가지는 애정과 비슷하면서도, 그 가운데 또한 다른 감정을 부인할 수 없는 배옥이에게 대한 나의 이상야릇한 마음은 나날이 자랐다.

음력 세말이 가까왔다. 음력 정월 흥행을 나는 또한 항좌에서 하려고 그 교섭차로 진남포로 갔다. 그러나 흥행 그것보다도 배옥이를 만나고 그의 나브럭이 노는 입술을 바라보고자 하는 욕망이 더욱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때 배옥이는 이 정월은 제 언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놀겠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적적히 웃었다.

“그럼 정월에는 너를 못 보겠구나.”

“곧 당겨 오디오.”

그만한 말로써 그때는 작별하고, 마침내 정월 흥행이 열렸다.

초하루, 이틀, 사흘은, 배옥이를 볼 생각도 안하였다. 그는 물론 서울가 있을 것이다. 나흗날이 되었다.

인젠 돌아왔을까. 나의 마음은 차차 흥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괴상하게도 마음이 수저운 나는, 몇 번을 배옥이의 집에 가서, 그가 돌아왔는지를 알아보려 하면서도, 선뜻 발을 내어놓지를 못하였다. 그날 저녁의 흥행 시간을 나는 얼마나 기다렸을까. 배옥이로서 만약 진남포에 돌아오기만 하였으면, 그 밤으로 항좌에 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으므로…. 그러나, 그는 항좌에 오지 않았다. 구력 명절이라 요리집이 모두 쉬므로 간단히 알아볼 길도 없었다.

닷샛날도 헛되이 지냈다. 엿샛날(요리집이 흥정을 시작하는 날) 밤, 흥행을 끝낸 뒤에, 요리집으로 달려갔던 나는, 쓸쓸한 중로(中老)의 그림자를 헛되이 다시 여관으로 돌이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옥이는 아직 안 돌아온 것이었었다.

쓸쓸한 정월의 흥행이었다. 배옥이가 진남포에 없다 하는 것이, 나의 위에 이렇듯 커단 영향을 줄 줄은 뜻도 안 하였다. 밤마다, 밤마다, 쓸쓸한 흥행을 끝내고 (따뜻한 제 가정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의 뒷등을 바라보면서)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독신의 중로는 통곡하고 싶은 고적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괴상한 애착이었다. 나는 배옥이를 만나면 언제든 농담으로써 나의 마음을 감추고 하였다. 그도 거기 적응한 농담으로 대하고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서, 이 어린애에게 대한 나의 괴상한 애착은 나날이 커 간 것이었었다.

그 뒤에도 진남포의 흥행은 연하여 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때든, 흥행 그것에보다 배옥이라 하는 어린애에게 관심이 더 컸던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진남포의 흥행도 드디어 종언의 날이 이르렀다.

그것은 양력 4월 초승이었었다. 그때 나는 다섯 프로를 짜 가지고 진남포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직껏 하여오던 분흥행(分興行―수입을 관주<館主>와 분배하는 흥행 방식)을 그만두고, 단연히 ‘데우찌(てうち―관을 세 얻어 자신이 흥행하는 것)’로 하기로 하였다. 흥행에 대하여, 인제는 꽤 대담하게 된 셈이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사진은 모두 특선의 명화이었는데, 웬일인지 손님은 오지를 않았다. 이런 흥행에는 늘 그 수입이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그날그날의 집세도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매일의 집세를 어쩌나. 그날그날의 비용을 어쩌나. 사진세를 어쩌나. 수입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거기 걸리는 비용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거의 자포적 기미가 된 나는, 매일 요리집에서 배옥이를 보았다. 그리고, 배옥이를 보는 것으로, 흥행의 실패 때문에 산란하게 된 마음을 얼마라도 위로코자 하였다. 이때의 흥행의 실패로써 몇몇 친구에게 개인적으로 폐를 끼친 것은, 아직껏 나의 마음에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진남포서는, 좋은 사진을 알아보지 못해요.”

배옥이는 나의 마음을 위로코자 이런 말을 하였다. 그리고, 나의 수입에 조금이라도 더 보태게 하려고 매일 손님을 몇이씩 몰고 구경을 오고 하였다. 손님이 구경을 응하지 않을 때는 자기가 동무 기생 몇을 데리고 자기의 비용을 써 가면서 오고 하였다. 선전도 꾸준히 하였다.

나는 이 마음을 감사하게 여겼다. 그러나 배옥이의 조그만 노력이 큰 도움이 될 수가 없었다. 흥행은 나날이 안 되어 갔다. 이리하여, 나는 항좌와 여관에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커다란 빚을 지고, 예정하였던 날짜에서 며칠 앞하여 도망하듯이 진남포를 나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진남포서 나온 나는, 얼마간의 회복이라도 하고자 그길로 정주(定州)로 갔다. 그러나, 정주서도 실패하였다. 정주서는 선천(宣川)으로 갔다. 그러나 선천서도 역시 실패하였다. 신천서는 다시 해주(海州)로 갔다가 거기서도 역시 실패하고 그만 신이 없이 평양 집으로 돌아와서 넘어졌다. 그 새의 실패에 연한 또 실패에 마음과 몸은 여지 없이 피곤하였다.

간 곳마다 실패하였다. 그러나 다른 곳의 실패는 그다지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지만, 진남포의 실패 뿐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마음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항좌와 여관(나, 나의 아우, 변사, 세 사람의 반달 숙박비 기타)의 빚은 내게는 좀 과한 집이었다. 이제 다시 진남포에서 흥행을 하여 그 흥행이 파천황(破天荒)으로 굉장히 된다 하여도 그 빚은 도저히 갚을 수가 없었다. 그런지라, 진남포의 흥행은 단념치 않을 수가 없었다. 뿐더러 지극히 소심한 나는 당분간 다시 진남포에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면 배옥이는 다시 못 보나. 그 나브럭이 놀던 입술, 이상한 매력을 띠고 흘기고 하던 눈, 이런 것을 생각할 때는 나의 마음은 진남포로 진남포로 달아나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진남포에 발을 못 들여놓을 사정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 때문에 마음이 무겁기가 짝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진남포에 발을 못 들여놓을 나이면서도, 언제 다시 권토중래할 계획을 늘 속으로 세우고 있었다.

그해 여름이었다.

어떤 날, 어떤 친구의 병원에 놀러 갔던 나는, 그곳서 일문(日文) 지방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어떤 기사에 눈을 딱 멈추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놀랄 만한 기사였다. 그 신문은, 배옥이의 죽음을 보도하였다. 그 전날 밤도 항좌에 구경을 갔던 배옥이는, 돌아와서 갑자기 병이 나서 이튿날로 죽었다 하는 것이었다.

나의 가슴은 쾅 하는 소리를 내었다.

‘죽었구나.’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다시 한번 본단들 무엇하랴마는, 살았을 적에 다시 한번 만나서, 나브럭이 노는 그의 입술과 흘기는 눈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에게 대하여 괴상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 나의 마음을 아무에게도(배옥이 자신에게까지도) 알리어 보지 못하고 영원히 그를 잃어버렸다. 신문의 의외의 기사에 부읏고 있는 이 외로운 중년 사나이의 눈에는 엷게 눈물이 어리었다.

―어린 혼아. 평안히 고요히 잠자거라.

그 이듬해 봄이었다.

파산 실처 등으로 말미암아 생겼던 마음의 커다란 상처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힘에 씻기어서 거의 나았다. 나는 다시 붓을 잡았다. 붓으로써 병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때 마침 동아일보의 장편의 부탁을 받은 나는 그것을 쓰기 겸하여 손상된 건강도 회복할 겸, 용강 온정으로 향하였다. 그 도중 진남포서 이삼일 묵었다.

그때 어떤 친구의 사랑하는 딸이 불행히 타계하였으므로 그 장식(葬 式)을 따라서 진남포 공동묘지에 가게 되었다. 일행에는 안서도 있엇고 한정동(韓晶東) 군도 있었다.

진남포 공동묘지에는, 안서의 어떤 어린 혈속이 묻혀 있다. 공동묘지에 간 안서는, 그 자기의 혈족의 무덤을 찾아 보겠다고 저편 아래로 묘패를 일일이 검분하면서 내려갔다. 나와 일반으로 진남포 공동묘지에 첫길인 안서는, 자기의 혈족의 무덤이 어디 붙었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나도 조력해서 찾세.”

나는 머리를 커다랗게 끄덕이고, 안서와 같이 일일이 묘패를 검분하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나의 목적은 결코 안서의 혈족의 무덤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었었다. 십중팔구는 이곳에 묻혀 있을 배옥이의 무덤― 이것이 나의 찾으려는 목적물이었었다.

무덤을 찾아서 무얼 하랴. 벌써 저세상으로 간지 거의 일 년이 되는 그의 무덤― 찾는대야 한 더미의 흙밖에 볼 것이 없을 것이되, 어린 배옥이의 몸을 덮은 그 흙더미를 한번 보고 싶었다. 나브럭이 놀던 그의 입술과 이상한 매력을 띠고 흘기던 그의 눈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가리어 버린 그 흙더미나마 한번 보고 싶었다.

나는 천이 넘는 많은 새로운 무덤을, 일일이 검분하고 묘패를 들여다보았다. 해토(解土) 때로서 겨울에 묻은 새로운 무덤은 모두 흙이 무너져서 거의 관곽이 나타날 만한 참혹한 형태였다. 이런 것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던 나였지만 배옥이의 무덤을 보려는 오로지 한 길의 마음은, 그런 모든 것을 잊고 (한 발을 옮겨 짚을 때마다 오륙 촌씩 쑥쑥 빠지는) 많은 끔찍한 무덤을 밟으면서 공동묘지를 동서남북으로 헤매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길이었다. 내 힘이 및는껏, 내 주의가 자라는껏 찾아보았지만 그 넓은 공동묘지에서 한 개의 조그만 흙더미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안서도 헛길을 걷고 돌아왔다.

“못 찾았나?”

“못 찾았네.”

적적한 문답은 사괴어졌다. 그러나, 내 적적함의 의의는 안서는 알 리가 없었다.

공동묘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비록 무덤은 못 보았지만 그의 어린 혼이 땅속에서 평안히 잠자기를 한없이 한없이 빌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외로운 중년 사나이의 축복은 끊임없이 그의 어린 혼 위에 부어진다.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