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이효석)

1 편집

미레이유 바랑의 얼굴을 나는 대여섯 장 째나 그리고 있었다. 결국 한 장도 만족스럽지 않아서 새로운 목탄지를 내서는 또다시 그의 얼굴의 뎃상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내일부터 봉절될 영화 「망향」의 석간 신문지 속에 넣을 조그만 광고지의 도안이었다.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바랑과 갸방의 얼굴을 그리고 그 속에 출연자의 스태프와 자극적인 광고문을 넣자는 고안이었으나 광고문은커녕 나는 바랑의 얼굴에서 그만 막혀 버린 것이 좀체 운필이 뜻대로 되지는 않아 마음이 초조하고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여배우 얼굴 하나 가지구 벌써 몇 시간을 잡아먹나. 얼른 끝을 내야 인쇄소에 넘겨 저녁때까지에 박아내지 않겠나.”

맞은편에 책상을 마주대고 앉은 동료는 나의 궁싯거리는 양이 보기 민망해서 기어코 자리를 일어선다.

“웬일인지 모르겠네. 그리다 그리다 이렇게 막힐 법은 없어. 고 눈과 코가 종시 말을 들어야 말이지.”

동료는 등뒤로 돌아오더니 어깨너머로 내 그림을 바라보며,

“자넨 벌써 바랑과 연앤가.”

“연애라니.”

“암, 연애구 말구. 그렇게 망설이는 자네 마음이 심상치 않어.”

쓸데없는 말을 걸어온 까닭에 결국 망쳐 버리고야 말았다.

“연애!”

스스로 비웃으면서 나는 붓을 던지고 그림을 두 조각으로 찢어 버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깊은 눈과 불룩한 콧망울이 내 마음을 한꺼번에 잡으면서도 붓끝으로는 종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연애인지도 모른다.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영화의 뭇 남녀를 그려 왔어도 이번같이 마음이 뜨고 설레는 때는 없었다. 대체로 영화관 사무실에서 장구한 세월을 두고 그런 업에 종사해 나가노라면 그 많은 자태 없는 화상에다가 그때 그때 일종의 정을 느끼게 됨은 자연스런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보다도 그림들을 상대로 꿈의 교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바랑의 경우와 같이 내 마음을 잡은 때는 드물었고 가령 디이트리히를 그릴 때나 가르보를 그릴 때나 다류를 그릴 때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뛰고 설렌다. 어제 낮에 본 「망향」의 시사의 구절구절─망명의 도적 페페 르 모코와 파리 여자 갸비이와의 위험한 연애의 장면 장면이 가슴을 흔들면서 갸비이로 분장한 바랑의 자태가 땅 위에 둘도 없는 염염한 꽃송이같이 무시로 눈앞에 어리운다.

“연애. 바랑과의 연애! 어차피 우리는 그런 환상의 연애 밖에는 하지 말라는 팔잔가 부다. 허수아비인 사진쪽지와 연애니 무어니─다 귀찮다.”

나머지 뎃상을 마저 찢어 버리려 할 때 동료의 손이 와서 그것을 뺏어들면서,

“잔소리 말구 어서 여기다 광고문이나 적어 넣게, 별수 있나. 시간두 없는데 이대로 인쇄소에 돌릴 수밖에─.”

시계를 바라보니 오후도 늦은 때이다. 석간이 돌 때까지는 광고지의 체재를 갖추어야 신문지 속에 끼어 배달이 될 것이다. 불과 몇 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붓을 들어 불만스런 대로 이왕 그린 얼굴에다 색을 칠하고는 붓을 갈아 굵은 획으로 광고문을 쓰기 시작했다.


─남쪽 고을 알제리아에 전개되는 모코와 갸비이의 숙명적 연애! 세기의 경이 바랑의 출현, 새 시대의 다이트리히 바랑을 보라! 이국정서의 결정인 바랑─그는 오늘의 별이다─


여기까지 적어 내려갔을 때 문득 사무실 옆 문간이 요란스러우면서 귀설은 목소리가 흘러왔다. 창밖으로 흘긋 눈을 돌리니 셀비안ㆍ쇼오의 한패들이었다. 내일부터 「망향」과 함께 막 사이에 출연하기로 계약이 된 외국인 애트럭슌의 일단이었다. 거리에 나갔다가 무대 준비를 하러 들어옴인지 찬란한 한 남녀의 복색이 문간에 환하게 어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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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비안 쇼오는 노래와 춤을 밑천삼아 이곳으로 흘러든 가무단으로 반드시 셀비아 사람들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십여 명 단원이 백계 노인을 주로 하여 폴란드, 유태, 헝가리, 체코 등 각기 국적을 달리하고 가운데에는 유라시안도 끼어 있는─마치 조그만 인종의 전람회를 이룬 혼잡한 단체였다. 그들의 노래와 춤이 그다지 놀라운 것은 못되었으나 그들의 색다른 자태가 낯설은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족했고 우리의 관주가 상당히 비싼 조건으로 그들과 선뜻 계약을 맺은 것도 그 점을 노려서였다.

한 시간 가량씩 하루 두 번씩 출연에 대한 사례가 오백 원, 엿새 동안에 삼천 원이라는 것이 그들을 맞이하는 거의 최고의 대접이었으며 생각컨대 만주 등지에서 일없이 뒹굴던 동호자들이 가지고 있는 재주들을 모아 일거에 탐탁한 벌이나 해보려고 멀리 외지로 원정을 나온 그들로서도 역시 재주보다는 자기들의 그 이국적 풍모를 미끼삼아 보겠다는 심리가 없지도 않을 듯하다. 조선을 한 바퀴 돌고 나서는 또 어디로 가려는지 그것은 알 바 없으나 어떻든 그들의 풋날리는 이국정서는 거리에서는 진귀한 것이어서 그들을 계약한 관주의 수완과 야심을 우리들 사무원도 절대로 찬성하는 바였다. 실상인즉 그들의 걸음은 벌써 두 번째여서 지난 가을에 왔을 때에도 우리와 계약이 되어 의외의 호평으로 예상 이상으로 배를 불리운 일이 있어서 이번에 관주의 마음이 두 번째 혹한 것이나 그들로서도 전번보다는 더욱 충실을 기하기 위해 여덟 사람밖에 안되던 단원이 네 사람을 더해 열두 사람의 상당히 홍성한 일단을 이루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처녀 마리이와 이리이나 소년 소녀 미이샤와 안나의 네 사람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 거창한 한식구들을 바라볼 때 각각 얼마나 숨은 재주들을 감추고 있나 싶어서 출연이 기대되었다. 무시로 외국 영화를 바라보고 그들 남녀의 사진을 그리던 내게는 눈앞에 직접으로 노란 고수머리와 푸른 눈을 보게 된 것이 한 가지 기쁨이었고 일상 품고 있던 이국정서에 대한 갈증을 얼마간 축일 수도 있었다. 그들을 바로 어제 차로 내려서 무대 뒤에 여장을 풀었을 뿐이나 새로 더 한 네 사람 외에는 모두 내게는 두 번째의 구면이라 낯이 선 법 없이 가장 친밀하게 대하고 말을 걸 수 있음이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더구나 내게는 하치않은 그림장이나 그려서 먹고사는 몸이기는 하나 외국어의 소양이 얼마간 있었던 까닭에 그들의 서투른 일어와 맞서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외국어의 범벅으로 의사를 소통하는 편이 피차에 편한 노릇이어서 관주도 그들과의 교섭에 나를 내세운 셈이었고 그들 역 나를 의뢰하고 믿는 바 많았다. 이것이 내가 그들의 사정을 남달리 깊게 관찰하게 된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가령 조그만 일이 있거나 원이 있어도 그들의 누구나는 반드시 사무실로 쫓아오거나 복도에서 나를 붙들고는 피차에 통함직한 말을 뒤섞어 용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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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때에도 내가 막 광고지에 광고문을 적고 났을 때 문간과 복도에서 지껄지껄 요란하던 총중에서 한 사람이 문득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내 앞에 나타났으니 일행 중에서 춤으로는 으뜸 격에 가는 카테리이나였다. 별안간 방안이 환해진 것은 그의 누런 머리카락과 흰 살결과 사치한 차림차림으로만이 아니라 그의 손에 쥐인 한 묶음의 꽃으로 말미암음이었다.

간단히 인사의 말을 던졌을 때 카테리이나는 방긋 웃으며 하는 말이 꽃을 꽂을 터인데 혹시나 남는 화병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화병? 화병쯤이야 있구 말구.”

나도 웃음으로 대답하면서 일어서서는 영화잡지 신문 포스터 등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궤를 열고는 뒤적뒤적 묵은 화병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요행 화병을 찾아서 책상 위에 내놓았을 때 카테리이나는 기뻐하면서 메르시! 라고도 해보았다 하라쇼! 라고도 했다 하며 혼합된 단어로 감사를 표한다. 내친 걸음에 나는 프라스코의 물을 화병에 붓고 그 속에 꽃꽂는 것을 도와줄 때 옆에 섰던 동료는 능청맞게 딴전을 보면서 나만이 알아들을 말로,

“괜히 그림 속의 바랑에게 반해서 그러지 말구, 가까운 눈앞의 떡이나 후려보지 그래. 바랑보다 어디가 못해. 오히려 나면 낫지. 모습부터가 비슷하잖은가.”

“실컷 놀려 보게나.”

“찬찬히 뜯어보라니까. 비슷한 바가 많찮은가.”

그의 말로 새삼스럽게 깨달을 것도 없이 카테리이나는 참으로 바랑과는 같은 바탕의 미인이었다. 동그스름한 윤곽도 같으려니와 깊고 부드러운 눈매며 불룩한 콧망울이 바랑을 그대로 떼어 붙인 것도 같고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입술이 엷고 두 볼이 팽팽해서 바랑보다는 조금 쌀쌀할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면에 다른 효과를 자아내서 그 냉정하고 침착한 속에 말할 수 없이 으늑한 일종의 애수를 담은 것이었다. 눈앞을 깔아보고 그 어디인지 먼 곳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기색이 눈과 볼에 나타나서 그것이 알 수 없는 매력을 더한다.

꿈의 매력이라고도 할까─바랑에게도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의 남국적인데 비해 카테리이나의 그것은 북국적인 향기를 풍겨 그와는 또 다른 힘으로 사람을 잡는다. 참으로 동료의 말마따나 나는 가장 가까운 내 눈앞에 꿈의 대상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어서 용기를 내서 한몫 대어 보지. 이런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닐텐데─용기가 첫째야.”

조롱인지 격려인지 동료가 뜨끔 눈짓을 하고는 인쇄소로 간다고 내가 그린 광고지의 원고를 가지고 사무실을 나갔을 때 나도 꽃을 다 꼽은 꽃병을 카테리이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무대 옆방이 너무 침침해 꽃이나 꽂아 놓아야 조화가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사온 꽃이라는 뜻이었다.

“그 방이 원래 어두워요. 창이 적은 까닭에 여름엔 더웁구.”

“좀 와 보세요. 창을 떼야 할텐데 떼어도 좋은지 어쩐지.”

꽃병을 들고 나가면서 흘끗 눈을 돌리는 카테리이나의 뒷모양을 바라보고는 마침 손에 일이 삠했던 차이라 나도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의 두 번째 영사가 시작되었던 까닭에 관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관객으로 복도는 어지러웠다. 옆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들어가 무대 옆방에 이르렀을 때 활짝 열어젖힌 문안으로 울긋불긋한 방안의 모양이 들여다보였다. 좁은 방안에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트렁크들을 열고 무대 의상들을 내서 벽에 걸며 화장품 그릇을 책상 위에 놓고 하면서 복작거리는 것이 답답하게들 보였다. 처음 보는 초면의 처녀 그들이 아마도 새로 단원이 된 마리이와 이리이나일 듯 소년 소녀가 미이샤와 안나일 듯하고는 그 외는 모두 구면이었다. 피아니스트인 스타아홉, 수풍금을 울리는 크리이긴, 기타를 타는 아키임, 북을 치는 이와높, 바이올린 켜는 피엘─모두가 나를 보고는 방긋이들 웃으면서 구면임을 그 스스로들 기뻐한다. 그 한 커다란 가족에 대한 반가움이 버쩍 솟으면서 나도 창께로 가서는 그들을 조력해서 한편 창을 떼어냈다. 답답하던 방이 한결 시원해진 것 같다. 카테리이나를 비롯해서 모두들,

“메르시! 스파시이보!”

하면서 감사의 말을 던지는 것을 나는 아이같이 솔직하게 기쁜 것으로 들었다. 문득 등뒤에 나타난 것은 일좌의 지배인 빅톨이었다. 거리에서 막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땀이 이슬 같고 똥똥한 몸집에는 늘 보이는 그 너그러운 웃음을 벙글벙글 띠이고 있다.

“가스파딘 킴!”

하고 내게 손을 내미는 그의 등뒤에는 그의 아내인 그라아샤가 막 따라 들어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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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준비도 있고 한 까닭에 그날 밤 영화가 끝난 후 거의 열 시가 넘었으나 쇼오의 일행은 전부 한번 무대에 모이기로 되었다. 스크린 뒤편에 배경을 세워야 하고 그 옆으로 조그만 막을 층층으로 드리워야하고─관객들이 헤어져 버린 빈 홀에서 숨을 놓고 그들은 설렐 대로 설렜다. 나는 책임상 관의 대표자격으로 남아서 피곤한 것을 무릅쓰고 그들과 동무하게 되었다. 조용한 속에서 꺼릴 것이 없이 못박는 소리를 탕탕내면서 며칠 후이면 다시 뜯어 버려야 할 객지의 살림살이를 차려놓느라고 법석들을 하는 양이 내게는 엄숙하면서도 한편 애닯게 보였다. 좌중의 장골은 뚱뚱한 빅톨과 이와높이어서 거센 일은 대게 그들이 앞서서 하는 것이었으나 그 아무 자리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늠름한 의장부들이 하필 할 일들이 없어서 낯설은 외지 조그만 무대에 와서 하치않은 그 일들을 하고 있노 느껴지면서 왠일인지 인생의 애수라는 제목이 가슴속에 굵게 맺혀오는 것이었다. 의장부라면 그 두 사람뿐이 아니라 조금 몸이 호리호리들은 하나 기타와 수풍금의 아키임과 크리이긴도 유라시안인 바이올리니스트 피엘(독일 성에 동양의 피가 섞였다고 한다)도 미목이 수려하고 총명하게 보이는 의장부여서 그들이 어쩌다 그런 삼류급 예술가의 행세를 시작했으니 말이지 그런 초라한 배경 속에서 벗어나서 의젓하고 소중한 사회의 자리에 앉혀 본다면 넉넉히 그 위품을 보존해 갈만한 인물들이다. 그런 그들로서 기껏 그 자리에서 못질을 한다 피아노를 끌어다 놓는다 의자의 위치를 작성한다 하는 것이 천하게만 보이면서 인물들이 아까워 견딜 수 없다. 총중에서 제일가는 예술가는 역시 스타아홉일 듯 타고난 풍모가 가장 순수할 뿐 아니라 그의 피아노의 실력도 그 정도의 무대에 내세우기는 아까울 만큼 높고 본격적인 것이었다.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의 그날 밤 무대에서 맡은 일은 악기의 소제였다. 피아노의 안과 밖을 닦고 갖은 장기를 내서 키의 음을 조절하는 그의 모양은 피아니스트라느니 보다도 한 사람의 공인의 자태였다. 그와 친한 것이 카테리이나인 모양이어서 피아노 옆에 붙어 서서 잔손질을 돕는 것이 보기에도 다정한 풍경이었다. 그 앞을 어릿광대같이 어깻짓을 하면서 빙빙 도는 것이 그라아샤 단장 빅톨과는 나이로서 벌써 짝이 되어 비록 몸은 작아도 중년의 올찬 태도 속에 일좌를 인연 중에 누르고 있는 힘이 보인다. 밤불에 비취어져서 그런지 처음 보는 마리이의 자태는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카테리이나와는 갑을을 나누기가 어려울 정도의 용모로서 그보다도 도리어 젊고 수줍어하는 자태가 한층의 매력조차 더한다. 날씬한 맵시에다 부드러운 얼굴이 귀한 집 외딸의 품격을 띠었다. 그에게 비기면 이리이나는 같은 낫세이면서도 용모가 수단 떨어져 설레지 않고 잠자코 서만 있는 것이 흡사 인형 같이만 보인다. 대체 무슨 재주를 감추었는지 조용한 모양으로는 무대에서 관객을 놀라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 어린 미이샤와 안나의 한 쌍은 무대 한편 구석에 웅크리고 서서는 서먹서먹한 눈매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어린 그들이 왜 그리도 기운이 없을까 하면서 찬찬히 바라보니 둘 다 여윈 얼굴이 퍽도 창백하다. 서리맞은 새같이 앙크런 그들이 왜 고생을 하면서 어른들과 함께 무대에 서야 되는가. 측은히 여기는 내 눈초리를 짐작했는지 빅톨이 가까이 오더니 함께 그들을 바라보며,

“남맨데 약해서 큰일났어요. 무대를 좀더 홍성히 해볼 양으로 하얼빈서 특별히 구해 냈는데 몸들이 어찌 가냘픈지 무대에서 쓰러지지나 않을까 겁이 나오.”

일단의 주인으로서 지당한 걱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은 누구의 눈에도 잔약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며칠 동안의 무대생활에 별 탈이 없기를 축원하는 것은 참으로 거짓 없는 나의 진정이었다. 거의 열한 시가 넘어서야 일들을 마치고 일행은 관을 나왔다. 나도 길이 같은 까닭에 그들이 유숙하고 있는 호텔 가까이까지 동행했으나 비단 소녀 소년뿐이 아니라 그들 전부에 대한 일종의 애감이 곡절 없이 가슴속에 솟으면서 그러므로 그들을 유달리 친밀히 느끼게 되어 나의 걸음은 약간의 흥분조차 띠어갔다.

5 편집

이튿날 오전 아직 개관하기 전에 무대에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나는 사무소를 뛰어나갔다. 스타아홉이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나타나기 전의 한적한 시간을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요란한 재즈가 아니고 고요한 명곡임을 느끼고 나는 곧 파데랩스키의 「미뉴에트」임을 쉽게 깨달았다. 삼박자의 경쾌하면서도 애수를 띤 무도곡이 빈 홀을 사치하게 치장했다.

불도 안 켠 어둑스레한 홀 복판 의자에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아무도 없을 줄 안 것이 웬 사람인고 하고 가까이 갔을 때 검은 웃옷을 걸치고 의자에 뚝 묻혀 앉은 카테리이나였다.

“놀라라.”

흘끗 고개를 돌리면서 오도깝스럽게 눈을 떴다.

“되려 내가 놀랬쇠다. 이렇게 혼자 우두커니 앉았다니.”

별로 앉으라는 권고도 없었으나 나는 내 멋대로 옆 의자에 허리를 걸치면서,

“조그만 음악회의 단 한 사람의 청중이란 말이죠.”

“그래요. 스타아홉의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 나라면 나니까요.”

“한 사람의 청중과 한 사람의 연주자와―대단히 아름다운 음악회요.”

“스타아홉은 저래 뵈어도 예술가라나요.”

“상당히 능한 피아노인 줄을 나두 대강 짐작합니다만.”

“우리 단원으로는 아까운 한 사람이예요. 큰 뜻을 가지면서도 기회를 못 잡아서 이렇게 방랑은 하나.”

“송곳이 뾰죽하면 어느 때나 염낭을 뚫을 날 있겠죠.”

“들으세요. 저 아름다운 터치와 감정의 바른 해석.”

카테리이나는 말도 채 못 마치고 음악 속에 정신을 뺏겨 갔다. 곡조는 다시 첫 대문의 모티브로 들어가 가벼운 리듬이 반복되었다. 어디선가 먼 곳에서 울려오는 것 같은 아련하고 애끓는 정서이다. 파데레프스키 자신의 연주를 레코드에서 늘 들었으나 지금 무대의 연주도 거의 명장의 재주를 쫓아감직한 것인 듯 느껴졌다.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엄숙하게 뜯는 그 태도부터가 범인의 것은 아닌 듯싶었다.

곡조가 끝났을 때 그는 두 사람의 청중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띠이고 카테리이나는 거기에 대답하는 듯이 박수를 울렸다. 나도 그를 본받아 박수를 한다는 것이 소리가 지나치게 켜져서 앙콜인 줄 짐작했는지 스타아홉은 또 한 곡조를 시작했다.

“오, 쇼팽! 쇼팽의 왈츠.”

카테리이나는 뛸 듯이나 기뻐하면서 몸을 흔들었다. 나도 그 곡조를 대강은 짐작하는 터이었으나 쇼팽의 왈츠가 그들에게 그렇게도 큰 기쁨을 주는 것일까.

화려하면서도 슬픈 곡조이다. 동양적인 애수가 구절구절에 넘쳐흐른다.

“폴란드의 음악은 왜 저리도 모두 슬픈고, 파데레프스키도 쇼팽도…….”

중얼거린다는 것이 그만 소리를 치게 되었다.

“그래요 슬퍼요. 나라가 슬프니까 음악이 슬픈지 음악이 슬프니까 나라가 슬픈 것인지.”

카테리이나는 대답하고는 내 귀밑에다가 거의 입속말로,

“스타아홉도 폴란드 사람이에요.”

“오라 그래서…….”

그의 음악이 그렇게 슬픈 이치를 터득한 것 같았다.

6 편집

“왈소오의 국립극장에서 세계적으로 이름낼 날을 꿈꾼 적이 있었다나요. 한번 동쪽으로 흘러온 후로는 예술도 점점 타락해서 저 모양이 됐죠. …… 지금은 왈소오는커녕 하루아침에 조국이 없어지지 않았어요. 스타아홉의 꿈도 영원히 사라진 셈예요.”

“흠…….”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스타아홉의 지난 경력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나는 카테리이나의 눈물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 고개를 무대 편으로 깊숙이 뽑았다. 작은 아침의 음악회는 아직도 끝날 줄 몰랐다.

흥행은 예측대로 대단한 인기여서 첫날부터 관내는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다. 영화 「망향」이 시작되었을 때 홀은 빈자리가 없이 차서 문밖에는 만원사례의 붉은 간판을 내세우고 손님을 거절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망향」의 영사 다음이 애트럭슌의 시작이었다. 영화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일행은 한 사람 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대 옆방에 들어가 행장을 풀고 조급하게 무대 화장을 시작하는 패들도 있었으나 거개 더운 김에 홀 안을 질숙거렸다, 복도 의자에 주저앉았다들 했다. 이와높은 이리이나와 한 짝인 듯 대개 동행하는 눈치였고 관 안에 들어오더니 복도에 놓인 소파에도 나란히 걸쳐 앉았다. 짝이라면 그들은 맞춤인 짝이어서 뚱뚱한 몸집이며 불그스름한 얼굴이며가 남매인양 비슷하게 보였다. 이리이나는 몸집이 건강한데다가 무뚝뚝하고 말이 적은 것이 도리어 애티가 나고 애잔해 보였다. 항상 번잡하게 말을 거는 것이 이와높이었다. 손바닥으로 부채질하는 시늉을 내면서 나를 보더니 꽃송이같이 입을 연다.

“아, 덥다. 현기증이 나면서.”

그 무슨 불만 같이도 들리기에 나는 내 고장을 변호하려는 듯이,

“여름은 더우라는 법이 아니요. 어디나 일반으로.”

이와높은 만만히 휘어들지 않는다.

“그럴 리가 있나. 세상에서 안 더운 곳이 꼭 한 곳 있지. 송화강, 송화강은 아무리 복더위에도 시원하다나.”

“왜 여기도 강이 있다우. 송화강보다 더 맑은 강이. 모두들 나가 헤엄치고 놀고 하는 강이.”

지껄이다가 나는 문득 그런 소리가 그에게는 무의미함을 느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에게 딴 고장의 자랑이 무슨 위안이 되랴. 차라리 고향의 회포에 잠기는 편이 그에게는 더 보람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고향이 하얼빈이란 말이죠. 송화강 근처라면.”

“내 고향은 치타. 학교도 다니다 농사도 짓다 군인으로도 뽑혔다가 지금은 이 노릇. 고향에 가서 살고는 싶으나 전과는 달러 지금은 아주 재미없는 곳이 됐다우. 하얼빈은 이리이나의 고향. 고향이래도 이름뿐이지 부모를 다 여읜 곳이 무슨 고향이겠수. 이리이나는 고아라우.”

듣고 보니 그런지 얼굴을 쳐드는 이리이나의 모양이 애처롭다. 허부룩한 머리조차가 돌보아줄 사람 없는 것이거니 생각하니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이리이나의 그 허부룩한 머리와 애티 나는 몸집이 쓸쓸한 것이라면 마리이의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자태는ㅡ그것은 대체 쓸쓸한 것이 아니란 말일까. 아키임과 함께 팔을 끼고 들어오는 뒤를 크리이긴이 따라 들어온다. 세 사람 가운데서 유독 눈을 끄는 것이 마리이였고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보니 흰 얼굴에 푸른 눈이다. 먼 고향의 하늘빛인 푸른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마리이의 자태는 쓸쓸한 것이 아니었던가. 세 사람의 한패가 무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와높은,

“마리이의 아버지는 제정시대의 육군 소장이었다우. 지금은 외딸을 저렇게 밖으로 버려둘 지경으로 하얼빈 뒷골목에서 답답한 나날을 보내지만 한때는 다 이름은 날리던 사람이라나요.”

“그래 아버지를 구할려고 이번에 한몫 새로 끼어 나왔나요.”

“아버지까지를 구하다니 자기 한 몸을 살리기가 간신인데, ……아키임도 저래 뵈어도 명문의 집안에 태어난 귀족의 아들이구 크리이긴도 한때는 한다하는 군인이었다우.”

이리이나만이 고아의 외로운 정경이 아니라 듣고 보면 그들 모두가 비슷한 처지였던 것이다. 그런 것을 들을 때 나는 좁던 내 마음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짐을 깨닫게 되면서 모르던 정회를 그들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7 편집

“고향은 없어도 고향이 그리워요. 송화강은 이웃 사람들과의 단란의 곳이거든요. 얼른 이런 흥행이 끝나고 그곳에 가서 함께들 잠길 날을 생각해요.”

그럴 것이라고 나도 이와높의 감정을 그대로 품을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애트럭슌이 시작되었을 때 홀 안은 지금의 여지도 없이 관객으로 찼고 박수가 파도같이 번거롭게 울렸다. 나도 지난해에 본 후로는 처음이라 두 번째의 기대로 얼마간 흥분에 사로잡히면서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관주며 안내하는 아이들이며 관내가 총출동으로 들락날락하며 사무실의 동료도 내 옆에 앉아서 호기심에 눈을 똑바로 무대로 보낸다.

빅톨은 단장일 뿐이 아니라 무대에서도 한몫을 보아서 서투른 일어와 괘사스런 몸짓으로 틈틈이 나와서는 관객을 웃겼다. 그의 사회의 역할이 일단으로서는 확실히 중요한 부문으로 짐작되었으나 그만큼 그의 무대에서의 노력은 눈물겨우리만치 필사적이었다. 관객을 웃기고 끊임없는 흥을 돋아주는 곳에만 그의 생명이 있는 듯 보기에도 딱하리만큼 갖은 노력을 다했다. 우리의 흥미의 대부분도 사실 그에게 걸려 있었다.

피엘은 그의 양친 중에서 어느편이 독일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그마한 몸에는 동양의 피가 더 세게 흐르고 있는 듯 눈매나 코 맵시가 부드럽고 연하다. 켜는 바이올린 소리도 부드럽고 가늘어서 애끓는 대문에나 이르면 빅톨은 그의 앞을 막아서면서,

“먼 데 둔 아내 생각이 간절해서 바이올린 소리가 이렇게도 구슬프답니다.”

하고 괘사를 피워서 관객을 웃기고 피엘의 얼굴을 붉혀 주고 하는 것이었다.

빅톨과 피엘이 어릿광대같이 앞에서 설레는 뒤편에는 밴드의 패가 바른편에서부터 차례차례로 피아노의 스타아홉, 수풍금의 크리이긴, 기타의 아키임, 북 치는 이와높의 차례로 늘어앉고 무대 복판에 마이크로폰을 세우고 마리이와 그라아샤가 번갈아로 나와서 노래 부르고 간간이는 크리이긴과 아키임이 밴드 좌석에서 빠져 나와 노래에 섞여 수풍금과 기타 독주를 했다. 빅톨의 아내인 그라아샤는 노래도 춤도 온전하지 못하고 남편 모양으로 무대 위를 부질없이 건들거리는 넌덜군이오 마리이의 노래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가는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른 것은 확실히 장내의 인기를 한꺼번에 가로채게 되어 요란한 갈채로 두 번 세 번 무대 위에 불리우게 되었다. 외국 소녀가 부르는 아리랑타령이 왜 그리고 마음을 잡아 흔드는지 사실 나도 애끓는 곡조에는 눈물이 핑 돌 지경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가 외국의 다른 어떤 노래를 부른대도 그토록 사람의 가슴을 뒤흔들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는 간들간들한 그의 푸른 눈은 그렇게 흔하게 어디서나 볼 수 없는 쓸쓸한 정감을 복돋우게 했다.

마리이의 아리랑은 확실히 한 토막의 성공된 예술이었다.

그러나 그뿐 그에게서 더 신기한 재주는 볼 수 없었고 귀족의 후생인 푸른 눈의 처녀에게는 결국 외국의 그 한 곡조 노래가 단 하나의 준비된 예술인 모양이었다. 여러 번 앙콜을 받고 나오는 그의 모양을 카테리이나는 무대 한구석에서 차라리 측은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듯도 했다. 물론 조롱도 아니요 시기도 아니겠지만 그의 냉정한 시선에는 확실히 한 줄기의 불만이 엿보이는 듯하다. 그만큼 카테리이나의 무대에서의 노력은 성의 있고 열중된 것이어서 흡사 그 혼자가 일단의 운명을 짊어지고 동행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만신의 힘을 다하고 있음을 알았다. 까삭의 춤, 헝가리의 춤을 비롯해서 다채한 의상을 차례차례로 갈아입고 나와서는 거의 무대를 휩쓸어가려는 듯 열정적으로 각가지의 춤을 추어댔다. 요란스런 관중의 박수소리와 함께 스스로의 열정으로 점점 피곤해 가는 모양이 역력히 관객석으로 보여 온다. 참으로 성의 있는 예술가는 카테리이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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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비기면 이리이나는 무대의 허수아비였다. 노래 한 곡조 부르는 법 없이 춤 한 번 추는 법 없이 마치 벽의 꽃인 양 밴드 뒤편 막에 붙어 서서 한 송이의 치장의 역할밖에는 더하지 않았다. 소년 소녀 미이샤와 안나의 한 쌍 역시 대단한 재롱은 피우지 못하고 손을 잡고 탭을 밟는 것이 위태스럽게만 보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무능한 그들까지를 긁어모아 쓸쓸한 무대를 번거롭게 하려는 그들의 마음씨가 내게는 아프게 흘러오면서 예술의 성과를 떠나서 그들의 속사정에 마음이 부드럽게 되는 것이었다.

한 시간 남짓한 무대가 그렇게도 피곤케 하는지 출연이 끝났을 때 그들의 수고를 말할 겸 무대 옆방을 들어서니 화장을 떤다 의상을 갈아입는다 하면서 볶아치는 그들의 얼굴에는 확실히 피곤의 빛이 보였다. 한판의 싸움을 하고 난 뒤와도 같을 법 싶었다.

“돼서 이 노릇도 못해 먹겠다 이젠.”

빅톨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빙글빙글 겸연쩍게 웃어 보인다. 사십이 넘은 장년 신사의 절구통 같은 목덜미는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었고 손가락에까지 땀이 내배인 것이 보인다.

“사람을 웃기기가 세상에 얼마나 어려운 노릇이라구요.”

“이곳 사람들은 돌부처요 샌님들이 돼서 좀처럼 웃어봐야 말이죠.”

“그만큼 사람을 웃김은 상당한 예술가가 아니면 못될 일이요. 나도 허리를 꺾다시피 했소.”

내가 빅톨을 위로하고 있는 동안에 아키임은 마리이를, 스타아홉은 카테리이나를 각각 추어 주고 위로해 주는 눈치였다. 밤 출연까지에는 여러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이와높은 이리이나를 데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어디론지 가고 뒤를 이어 빅톨 부처가 거리로 나간 후로는 남은 패들은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허비할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스타아홉에게 영화구경을 권했을 때 그는 금시 찬성하고 카테리이나와 함께 나를 따라 홀 안에 들어가 알맞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리이와 아키임도 우리를 본받고 크리이긴도 어느결엔지 우리들의 앞 아키임과 마리이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망향」은 벌써 퍽 많이 나가 알제리의 그 야릇하고 복잡한 거리의 묘사를 거쳐 파리의 여자 갸비이의 출연의 대목을 이르고 있었다. 갸비이로 분장한 바랑의 요염한 자태에는 거듭 보아도 다기를 수 없는 신선한 매력이 넘쳤다.

현실의 모든 것을 잊고 우리들은 갸비이의 매력으로 정신이 쏠렸다. 내게는 그 순간 카테리이나의 생각도 없었다. 영화는 미처 숨도 갈아 쉴새 없는 긴장한 박력을 가지고 차례로 페페와 갸비이의 상봉─두 사람의 약속─호텔에서의 갸비이의 불만─페페의 초조한 연정─정부의 질투─결심한 페페의 출발─의 대목으로 발전하다가 드디어 페페가 우연히 거리에서 갸비이를 만나는 장면에 이르렀다. 페페는 낙심하던 끝에 문득 만나자 말없는 감격 속에서 그를 이끌고 방에 이른다. 야릇한 방, 페페의 정성, 준비된 식탁, 갸비이의 호기심, 페페의 열정─두 사람의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신기하고도 뜨거운 것이다. 갸비이의 두 눈은 별같이 탄다…….

그 불타는 화면에서 문득 내 시선을 떼게 한 것은 몇 자리 앞에 앉은 아키임과 마리이의 돌연한 거동이었다. 영화에서 감동을 받음인지 별안간 페페와 갸비이를 모방해서 그들의 열정을 연장시킨 것이다. 충동적으로 몸을 쏠리더니 번개같이 얼굴을 댄다. 어둠 속으로도 그 열광적인 자태는 또렷하게 눈에 띠었다. 그 순간 눈을 굴린 것은 나만이 아닐 듯싶다. 그들은 한참이나 있다가 얼굴을 뗐으나 몸은 그대로 가까웠다. 나는 영화에서는 벌써 마음이 떠서 두 사람만을 쏘아보게 되었다. 변괴는 뒤를 이어 일어났다.

두 사람의 거동을 보고서인지 옆에 앉았던 크리이긴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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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죽거리다가 아키임들을 향해 무어라고 지껄이더니 마리이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함께 밖으로 나가자는 눈치인 듯했다. 아키임이 대꾸하면서 엉거주춤 자리를 일어서서 실내기를 치다가 관객의 눈을 끌 것을 두려워함인지 주저앉으니까 크리이긴도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도 오고 가는 말이 한참이나 많은 모양이더니 이윽고 크리이긴은 혼자 자리를 일어서서 사잇길을 지나 비틀비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은 아키임과 마리이는 아까와는 다른 조금 불안한 듯한 기색으로 정신없이 지껄거린다.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눈치였다. 크리이긴은 다시 안 들어오고 두 사람은 수군거리면서 벌써 영화는 보면 말면 하는 기색이었다.

마리이를 사이에 두고 아키임과 크리이긴이 은연중에 대립하고 있는 눈치는 벌써 내게는 첫눈에 짐작된 것이었다. 두 사나이는 호리호리한 몸맵시며 신경질로 보이는 기질이며가 흡사해서 마치 형제인 듯한 인상을 준다. 이와높의 말대로 아키임은 귀족의 후신이요 크리이긴은 훌륭한 군인이었던 관계인지 아키임의 부드럽고 상냥한데 비겨 크리이긴은 그 어디인지 뻣뻣스럽고 억센 데가 보이기는 하나 그러나 대체로 비슷한 풍격과 기질이 마리이에게 대해서도 같은 정감과 호의를 품게 한 듯하다. 연연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던 마리이의 온순한 마음씨가 두 사람에 대해서 선명하게 구별되지 못했던 까닭에 두 사람도 얼삥삥해서 함께 속을 태우는 듯했으나 아키임과의 사이가 크리이긴과 보다도 현저하게 기울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눈앞에 보는 크리이긴의 심사가 안온할 리는 없어서 두 사람에게 대해서 자연 눈에 모가 서는 것이 국외자인 내게조차 확적히 보였다. 더구나 객지에 나와 헤매이는 몸으로 따뜻한 여자의 정이 몸에 사무쳐서 그리울 것도 사실, 일단이 도착한 날부터 크리이긴의 쓸쓸한 자태는 내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영화 「망향」으로 하여 마음이 불시의 충동을 받았던지 기어코 그 당장에서 두 사람에게 대한 감정이 터졌던 것인 듯하다. 아키임의 태도가 지나쳐 노골적이었던 것만큼 크리이긴의 딱한 심정도 추측하기에 족하다.

“사람들두 왜 하필 우리 앞에서 저 처신인구.”

그 장면에서 받은 인상이 카테리이나에게도 유쾌하지는 않은 듯 확실히 불만스런 어조였다.

“아키임이 너무 햇등거리는 것 같아. 좋아 지내는 건 자유지만 멀 하필 보라는 듯이 크리이긴의 앞에서 그럴 것이 있나. 안 보는데서라면 또 몰라두……. 마리이두 철이 좀 없구.”

스타아홉의 맞장구도 내게는 바른 것으로 들렸다.

“쓸쓸하기야 피차 일반이지. 남의 눈을 자극시킬 법은 없을 텐데…….”

마리이의 거동이 크리이긴만을 찌른 것이 아니라 카테리이나 자기의 눈도 자극했다는 듯한 말투이다.

“두구 보지. 저들이 꼭 한 북새 일으키지 않나, 좀더 삼가지들 않구.”

벌써 더 앉았을 경이 없어진 듯 스타아홉은 자리를 일어서고 카테리이나도 그를 본받았다. 영화에서 흥미가 사라진 지는 벌써 오래였다. 나도 혼자 머무르기가 멋쩍어 앞에 앉은 아키임과 마리이 한 짝만을 남겨 두고 자리를 일어섰다.

관을 나와 본댔자 별로 가야할 신통한 곳도 없는 것 같기에 나는 그들과 더 이야기나 할 기회를 얻을까 해서 앞을 섰다.

“깨끗한 찻집을 아는데 어떠슈들.”

“글쎄 심심도 한데.”

스타아홉과 카테리이나는 신선하게 뒤를 따랐다.

단골로 다니는 ‘고향’이 가까웠고 요행 손님도 삠했다. 오후의 참 때이라 차와 샌드위치를 분부하고 음악을 주문했다. 낯선 손님들을 대접하려는 듯 차이코프스키의 「호도인형」이 흘러왔다. 흰 커튼 사이로 바람이 간들거리고 분의 종려나무 잎새가 숨쉰다. 두 사람은 조국의 음악소리에 폭 잠긴 듯 잠시 말을 잊었다. 농민의 춤의 리듬이 흐를 때 스타아홉은 차에 사탕을 넣으면서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이번 흥행이 끝나면 난 북으로 갔다가 바로 구라파로 갈는지 모르오.”

음악으로 구라파를 생각해 냈다는 말인지 일단의 어수선한 사정에 싫증이 났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향인 구라파에 대한 애수가 그의 가슴속에 서리어 있을 것은 확실했다. 비록 안 지가 며칠을 안 된다고는 해도 그의 말─보다도 그의 어조는 역시 내게는 섭섭한 것이었다.

“카테리이나도 가나요.”

스타아홉보다는 나는 카테리이나 편을 보려고 애썼다.

“글쎄요. 전 어떻게 될는지……,.”

“카테리이나 같은 여자가 얼마든지 있다면 나도 한번은 구라파를 찾구야 말 것이오.”

지껄이고 나는 겸연쩍기도 해서 탁자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카테리이나도 웃음을 머금고 탁자 위를 보았다. 나는 손가락에 찻물을 찍어 가지고 카테리이나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찻잔 옆에서 그의 아름다운 뎃상이 역시 웃고 있었다.

구라파에 대한 애착을 나는 가령 구라파 사람이 동양에 대해서 품는 것과 같은 그런 단지 이국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보다도 한층 높이 자유에 대한 갈망의 발로라고 해석해 왔다. 문화의 유산의 넉넉한 저축에서 오는 풍족하고 관대한 풍습이야말로 가장 그리운 것의 하나이다. 막상 밟아 본다면 그 땅 역시 편벽되고 인색한 곳일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영원히 마지막의 좋은 세상은 올 턱 없는 인간사회에서 얼마간의 편벽됨은 면할 수 없는 사정인 것이요 실제로 밟아보지 않은 이상 그리운 마음이 삘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고집을 피우고 뻗대고 간에 오늘의 세계는 구석구석이 그 어느 한 곳의 거리도 구라파의 빛을 채색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현대문명의 발상지인 그곳에 대한 회포는 흡사 고향에 대한 그것과도 같지 않을까. 지금의 내 심정은 구라파로 가고자 하는 스타아홉의 회포와도 같은 것, 다 함께 일종 고향에 대한 정임에 틀림없다.

“구라파의 원이요. 그야 카테리이나 같은 여자도 많지요. 물론 카테리이나는 여기 꼭 한 사람밖에는 없지만.”

스타아홉은 카테리이나에게 대한 존경을 표시하려는 듯 그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웃는다.

“고향 타령은 왜 이리들 해요. 그렇지 않아도…….”

아닌 때 무시로 고향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이 카테리이나에게는 도리어 서글픈 노릇인 모양이었다. 외국에서 고향을 말함은 금물이라는 어조이다.

“나는 지금 내 고향 속에 살면서도 또 다른 곳에 고향이 있으려니만 생각되는 건 웬일인지 모르겠소.”

내게 이런 실토를 하게 한 것이 역시 그들과 같이 있게 된 그 분위기였다.

그들과의 교제가 내게는 결코 서먹서먹한 것이 아니요, 도리어 정 붙고 즐거운 노릇이었다. 반드시 호기심과 숭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역 일종 향수의 표현임을 나는 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핏속에 사무쳐오고 탁자 위에 그린 카테리이나의 얼굴이 말라 가면 나는 손가락에 물을 찍어 가장 익숙한 운필로 또다시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광고지 위에 미레이유 바랑의 얼굴을 그릴 때 이상의 친밀한 감동이었다.

그날 밤 단골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면서도 나는 같은 정서에 잠기며 찻집에서 느낀 회포가 더욱 간절히 솟았다. 취흥에서 오는 감상도 덮쳐서 보통 때보다 감정이 한층 과장되었다. 마치 구라파가 지금 가까운 눈앞에 놓여 있는 듯이 그곳에 감이 가장 쉬운 노릇인 듯이 마음이 알 수 없이 대견했다. 긴하게 와서 술을 따라 주고 정성을 보이는 유라조차도 내 눈에는 심드렁하게 보였다.

“애트럭슌이 재미있다죠. 한번 가봐야겠는데. 미인이 많다는데 더러 좀 데리구 오세요.”

“요새 이국정서 속에 흠뻑 잠겨 있는 셈이지.”

“늘 원하던 터에 잘됐군요.”

싫은 소리였던지도 모르나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무관심한 태도를 지녔다. 유라는 나를 존경하고 내 마음의 지향을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내 마음은 그에게로 타오르려 하다가도 냉정한 반성과 원대한 희망을 일깨울 때 다시 식어지면서 유라의 심정을 안타깝게만 만들었다. 범상한 연애를 하다가 범상한 결혼을 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평생을 얽어매고 희생하기에는 내 이상이 허락지 않는다. 유라는 단지 직업이 초라할 뿐이었는지 여자로는 출중한 인금이다. 내 값이 그보다 몇 곱절 웃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나는 그 유혹을 이기기에 무한한 인내와 노력을 해 온다. 쇼오 일행의 출현은 내 마음을 한 번 더 매질하려는 의지의 채찍인 셈이었다. 여러 해 동안 공들여 모은 저금이 수천 원에 가까웠다. 그것이 점점 차 가는 것이 더없는 기쁨이었고 내 결심을 더욱 죄어 주는 나사였다. 저금을 한정하고 나는 내 길 떠나는 날을 작성할 수 있을 터이니까 말이다.

“술이 과하지 않으세요.”

“아 유쾌하다.”

유라야 실망하든지 마든지 그의 심중이야 어찌 되었든지 나는 퍽 유쾌함을 막을 수 없었고 알 수 없는 희망이 취흥과 함께 도도히 가슴을 치밀었다.

11 편집

애트럭슌으로 말미암아 낮이나 밤이나 만원이었으나 내게는 변화 없는 같은 연기를 거듭 볼 흥미는 없었다. 연기에서 오는 흥미는 고사하고 단순한 재주를 가지고 관객을 끌고 나가려는 일행의 무한한 노력이 보기에 딱했다.

몇 번이고 같은 무대를 보고 그들의 밑천의 바닥을 긁어내고 그들의 전부를 알아 버린다는 것이 잔인한 것 같이만 생각되어서 부질없이 관객석에 앉는 버릇을 삼갔다. 그것이 가난한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도리였던 것이다.

되풀이에서 오는 싫증은 그러나 나보다도 그들 자신이 몇 곱절이나 더 심각하게 느끼는 눈치였다. 신선한 풍미를 갖춘 식탁을 대할 때와 같은 항상 새로워지는 감격을 가지고 무대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깔깔한 모래를 씹으러 억지로 목을 끌려 나가는 셈이었다. 힘써 목소리를 높이고 몸을 너털거리고 웃음을 꾸미면서 그러는 속으로 그 모든 것을 의식하고 헤아림은 얼마나 그들을 피곤하게 할 것인가. 무대에서 뛰어나오면 땀을 흘리고 가슴을 헤치면서 말할 수 없이 노곤하고 싫증이 나는 모양들이었다. 그러나 무대 밖 생활 역시 단조해서 무대에서 받은 그 피곤을 풀어 줄 변화는 흔하게 없었다. 나날의 생활의 연구가 그들에게는 또한 한 가지의 난사인 모양이었다.

이틀이 지난 날 밤 무대가 끝난 뒤에 스타아홉에게서 함께 호텔로 안 가겠느냐는 청을 받았다. 무슨 신기한 수나 있느냐고 물으니까 밤마다 로비에서 심심파적으로 무도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호기심도 없지 않아 나는 사무실 일을 정리하고 그들과 걸음을 같이했다.

일행이 많은지라 호텔에서 방들은 각각 위층의 조그만 것을 차지했으나 밤이 늦은 후의 로비는 거의 그들의 독차지가 되었다. 구석으로 의자를 모니 가운데가 넓게 비었고 맥주들을 마시면서 그들만의 즐거운 한때였다. 축음기에 레코드를 걸고 곡조를 따라 번갈아들 일어섰다. 여자가 네 사람에 사내가 여섯 사람인 까닭에 아무래도 한꺼번에 일제히 일어설 수는 없었고 번번이 짝이 기울었다. 이리이나는 대개 이와높과 일어서고 그라아샤는 빅톨과 겯고 하는 속에서 마리이가 가장 인기가 높아 개개 한 번씩은 그에게 가서 춤을 비는 지경이었다. 아키임과 크리이긴은 거의 경쟁이나 하는 듯 피엘도 그에게로 발이 향하고 빅톨도 간간이 아내 그라아샤를 달래 놓고는 마리이에게로 손이 갔다. 아키임과 크리이긴은 영화관에서 일이 있은 후 내게는 특히 눈에 띠이게 된 두 사람이었으나 미묘한 신경의 갈등은 감추면서도 다른 눈앞에서는 지극히 평온한 자태를 꾸미려고 애쓰는 것이 속일 수 없었다. 내 눈에 그들보다도 더욱 기괴하게 비친 것은 빅톨이었다. 두 사람 속에 끼어 마리이를 상대로 확실히 그도 한몫을 보고 있음을 나는 그날 밤 적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내 그라아샤의 빛나는 눈도 벌써 그의 마음의 고삐를 붙들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마리이를 사이에 두고 그들 세 사람의 은근한 마음의 고백은 나를 놀라게도 하고 어지럽게도 했다.

카테리이나의 호의로 나는 두어 번이나 그와 서투른 스텝을 밟게 되었다. 무대에서 발레가 훌륭한 만큼 그의 발 맵시는 고와서 나는 도리어 그의 부드럽고 가벼운 몸짓으로 리드를 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스타아홉이 내 춤을 비평해서 제법 됐다고 말한 것은 순전히 카테리이나의 덕이었던 것이다. 없는 재주에 흥만이 들어서 탱고와 왈츠가 즐기는 바였다. 나는 욕심스럽게 음악이 울릴 때마다 은근히 카테리이나의 손이 비기를 바랬다. 세 번째인가, 그와 왈츠를 걸고 일어선 때였다. 느릿한 삼박자의 리듬으로 몸이 유쾌하게 요동하기 시작했을 때, 문득 카테리이나의 등 너머로 수선스런 기색이 들렸다. 음악의 박자는 여전히 변치 않고 흐르건만 좌중의 리듬은 금시 깨트러지면서 몸이 뒤틀거리는 것이 벌써 춤의 분위기가 아니요. 심상치 않은 변동이 일어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2 편집

“염치들을 알게나. 이리떼와 다를 것이 무언가.”

빅톨이 마리이의 손을 낚으면서 소리를 높인 데서부터 동요가 시작되었다.

“오늘만이 날인가. 그렇게 욕심들을 부리게.”

확실히 아키임과 크리이긴에 대한 비난인 모양이었으나 비난이고 뚱딴지고 간에 그의 손에 잡혔던 마리이는 벌써 그의 눈앞에서 흘리워 버리지 않았는가. 아키임이 그의 앞에 날쌔게 나서면서 마리이와의 사이를 막아 버린 것이다. 빅톨이 허수아비같이 서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은 맞붙들고 슬금슬금 움직였다.

“다른 데가 아니라 눈 뽑을 세상이 바로 여기구나.”

빅톨은 어이가 없어서 두 손을 버리고 초점 없는 시선을 하염없이 던졌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자리가 수습된 것이 아니었다. 아키임과 마리이가 불과 몇 걸음을 디디지 않았을 때 그들은 크리이긴으로 말미암아 같은 봉패를 당하게 되었다. 흡사 아키임이 빅톨에게 했던 것과 같이 크리이긴은 별안간 아키임과 마리이의 사이에 선뜻 들어서면서 두 사람을 갈라버린 것이었다. 농담도 아니오 장난도 아닌 것은 그의 표정으로 역력히 알 수 있었다. 그가 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키임도 그것을 농으로 받을 리는 없어서 나긋나긋 휘던 몸이 금시 말뚝같이 뻣뻣해지면서 됩데 크리이긴의 앞에 막아선 격이 되었다. 마리이는 그 서슬에 슬그머니 손을 놓고 옆에 나서게 되었을 때 벌써 세 사람이 두 사람으로 정리되어 그 두 사람의 대립이 선하게 좌중에 드러나게 되었다. 내가 카데리이나의 어깨너머로 주의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장면부터였다. 춤추던 다른 사람들의 몸 자체도 그것을 목격하면서부터 이지러지기 시작했고 나도 서투른 발이 더욱 비틀거려짐을 느꼈다.

이윽고 나는 춤을 자세를 풀면서 카테리이나의 손을 놓았고 이와높과 이리이나도 피엘과 그라아샤도 각각 떨어지면서 몸을 돌린 것은 아키임과 크리이긴 사이에 드디어 복닥질이 일어난 까닭이었다.

“예의를 모르는 자이다.”

라는 아키임의 고함에 크리이긴도 발끈하면서,

“욕심쟁이는 예의로 대할 수 없는 것이야.”

고 대거리를 한 것이다.

“욕심쟁이건 무어건 왜 자꾸 남을 귀찮게 굴어.”

“뭇사람 앞에서 혼자만 욕심을 부리는 것부터가 예의에 어그러난 짓이다.”

하며 두어 마디 건네고 받고 하더니 누구 편에선지도 모르게 주먹을 건네자 금시 두 사람은 그 자리로 얼러붙은 것이었다.

“마리이는 우리 단체의 여자이지 한 사람만의 차지는 아닌 것야.”

“단체는 단체, 사생활은 사생활이지 남의 속일까지가 아랑곳이냐.”

“쓸쓸한 외지에서는 서로 겸손해야 하는 것이지 욕심은 결국 이기주의일 뿐이다.”

“나는 마리이를 사랑한다. 사랑에 무슨 연설이 필요한가.”

“나도 마리이를 남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내게도 내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꺼번에 치고 박는 것이 아니라 피차에 할 말은 다하면서 번갈아 치고 갚고 하는 싸움이었다. 기운과 결이 비등한 까닭에 쉽사리 끝장이 안 나고 질질 끌 모양이었다. 마리이는 그 꼴이 보기 싫은 듯이 의자에 가 주저앉았고 다른 패들도 별로 두 사람을 말리는 법 없이 우줄우줄 섰기도 하고 앉기도 하는 속에서 혼자 약이 올라 설레는 것이 그라아샤였다. 결국 두 사람의 싸움으로 되었으나 실상은 남편 빅톨도 그 속에 한몫 끼었던 셈이요 그야말로 장본인이라는 듯이 싸움과는 떨어져 남편을 못살게 쑤셔대는 것이었다.

“부끄러워하시오 당신도.”

마리이도 눈앞에 있고 한 판에 감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으나 은근히 남편을 노리는 두 눈에는 불이 철철 흘렀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

“한 식구의 어른으로 머리가 허얘가지고 무슨 꼴이란 말요.”

두 패로 갈라지려는 싸움을 보기 민망해서인지 스타아홉은 빅톨 부처의 사이를 가르더니 아키임과 크리이긴의 팔을 잡아 낚구었다.

“무슨 꼴들이요. 우리 모두의 수치가 아니오.”

13 편집

보이들이 달려오고 카운터에까지 싸움의 기색이 알려진 까닭에 스타아홉의 만류함이 차라리 한 기회가 되어 두 사람은 싸움의 흥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조그만 사사로운 일로서 뭇사람 앞에서 더구나 동족끼리도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까지 그런 꼴을 보이게 된 것을 즉시 뉘우친 눈치였다. 싸움의 흥분이 크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즉시 냉정하게 반성하게 되는 그들의 교양의 정도를 나는 살필 수 있었다. 그러나 뭇시선 앞에서 싸움을 멈추었을 뿐이지 두 사람의 반감이 서로 마음속으로 푸석푸석 타들어 가고 있을 것도 사실이었다.

원래 그들의 싸움이 뿌리 깊은 적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일종 애달픈 향수에서 온 것임이 사실이매 낯설은 곳에서의 근심이 삐지 않는 한 마음이 개운하게 개일 리도 없어 우울의 긁어리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음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키임과 크리이긴이 각각 방으론지 올라간 후로는 로비의 공기는 쓸쓸한 침묵 속에서 견딜 수 없이 적막한 것이었다. 총중에서도 서성거리는 빅톨의 양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어지러운 신경을 좀처럼 수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뚱뚱한 의장부의 체격으로 마음의 중심을 잃고 설렁거리는 모양은 한층 보기 딱했다.

이 밤의 싸움을 계기로 하고 일단에는 확실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듯하다. 생활의 중추를 뺏긴 듯 통일이 없어지고 안정이 잃어졌다. 신경이 곧추 선데다가 울적한 심사까지가 덮쳐서 흡사 병든 기계같이 어긋나고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이튿날 낮 무대 때의 빅톨의 전에 없던 심한 짜증은 전날부터의 심사의 폭발에서 왔음이 명확했다. 소년 소녀 미이샤와 안나의 무대 솜씨가 물론 처음부터 설핀 것이기는 했으나 그날 유독 빅톨이 어린 그들을 상대로 그렇듯 화를 낼 법은 없었다. 흰 복색을 하고 실크햇을 쓰고 탭을 추는 미이샤의 주위에서 같은 소복을 하고 머리에 리본을 단 안나가 손을 잡고 맴을 돌았다. 가제나 푸른 안색에다가 소복을 하니 한층 애잔하게들 보이면서 무대를 휘돌아치는 가는 다리가 휘춘휘춘 휘이면서 금시 그대로 쓰러질 듯이나 위태스럽게 보였다. 막 옆에 붙어 선 빅톨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옮기지 않으며 맥이 풀리려는 그들의 쉴새없이 격려하고 편달했다. 요행 쓰러지지 않고 몇 분 동안의 힘찬 연기를 마치고 무대를 들어가게 되면 그것으로 보고 있는 내게는 큰 성공이라고 느껴졌으나 빅톨의 눈에는 번번이 대단한 불만인 모양이었다. 기어코 두 번째 「주정꾼의 춤」을 추고 옆방으로 들어섰을 때 빅톨은 소리를 높였다.

“너희들은 무대를 놀음터로 아는 모양이지. 그게 춤이냐 장난이냐, 수백 명이 보고 있는 속에서는 한 발자국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건 연기가 아니고 놀음이요 장난이야.”

마침 나는 그때 방문간에 서서 아이들의 무대 모양을 잘 보고 있었던 까닭에 빅톨의 꾸지람이 부당한 듯이도 생각되었으나 그는 나를 그다지 주의하는 법도 없이 책망을 계속했다.

“무대에서 장난들을 치라고 너희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니, 어른들의 애쓰는 꼴들이 보이지 않니, 다 같이 힘쓰는 속에서 일단의 생명이 간신히 지탱해 나감을 보지 못할 리 없지.”

“그만하면 걔들도 힘껏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오.”

보기 민망해 내가 한마디 참견한 것이 빅톨을 더한층 노엽힌 결과가 되었다.

“아니오. 무대를 업수히 여긴 것이요. 꾀를 피운 것이요. 의지가지없는 측은한 몸이라고 우리 일단이 주워 올려준 호의를 잊어버린 것요, 측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저런 애들을 데리고 다니겠소.”

“측은하니까 그만치만 하는 것이 좋지 않소.”

벨이 울리고 다음 무대의 시작을 고한 까닭에 피엘과 카테리이나들이 와서 빅톨을 만류하고 그의 출연을 알렸으나 고집스럽게 버티고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아이들이 불쌍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불유쾌하지 않소. 어서 그만두시오.”

“불유쾌하다면 나같이 불유쾌한 사람이 또 어디 있소. 이까짓 일단쯤 오늘 이 자리로 헤쳐 버려도 좋은 것이오.”

미이샤가 입술을 물고 뻣뻣이 섰을 때 소녀 안나는 맥이 풀렸는지 무릎이 휘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인 품이 눈물을 흘린 모양이었다.

밤 출연 때 미이샤와 안나는 빅톨의 시선 앞에서 기를 잃고 더구나 맥을 못 추었다. 미이샤는 그래도 사내꼬치라 다구지게 무대를 휘돌아쳤으나 안나는 너무도 겁을 먹은 데다가 몸까지 노곤한 듯 간신히 미이샤의 손을 잡고 그의 주위에서 비슬거렸다.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피곤한 모양이었다. 기어코 그는 그 힘찬 무대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막까지 불과 얼마 안 두고 별안간 무대 도중에서 벨이 울리고 막이 내린 듯 관객석의 소란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사무실에서 뛰어나갔다. 홀에는 확실히 가벼운 동요가 일어나 있는 눈치였다. 무슨 일인고 하고 홀로 통하는 검은 막을 쳐들었을 때 관객의 한 사람이 마침 자리를 일어서 나오면서,

“아이가 쓰러졌어요.”

하고 고한다.

막은 내렸고 등불이 켜져 있다.

즉시 나와 무대 옆방으로 가는 복도를 걸어갈 때 마침 뛰어나오는 이와높과 마추쳤다.

“쓰러졌다니요.”

“안나가 무대에서 졸도했어요.”

황겁지겁 더듬으며,

“포도주를 곧 구할 수 없을까요.”

“사오죠.”

이와높의 걸음을 가로채서 나는 곧 되돌아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웃 약국에서 약용 포도주 한 병을 사들고 무대 옆방으로 뛰어갔을 때 안나는 소파 위에 눈을 감은 채로 번듯이 누워 있었다. 안색이 누렇고 입술이 희다. 포도주를 거의 반잔이나 먹여도 간신히 눈을 떴을 뿐이지 금시 퍼들퍼들 소생되지는 않았다. 단순한 빈혈증만은 아닌 듯싶었다.

“의사를 불러 보는 것이 어떻소.”

내친걸음에 내가 제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14 편집

“글쎄 빈혈증이라면 대개 기운을 차릴 텐데.”

이와높이 대답하면서 손으로 소녀의 골을 짚어 본다. 머리맡에서는 이리이나가 앉아서 안나의 작은 손을 잡고 흡사 어머니나 누나처럼 부드러운 말을 걸고 있고 의자에는 미이샤만이 앉아 있다. 다음 막이 곧 이어 열린 까닭에 다른 축들은 소녀를 어루만지고 앉았을 수만도 없어서 무대로 몰려나간 뒤이다. 설레던 방안이 별안간 비어진 것이 고요하기 짝 없는데 미이샤는 말없이 앉았고 이리이나는 단 한 사람의 육친같이 소녀를 어루만지고 있는 이와높은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그 한순간의 방안의 포즈가 내게는 그지없이 쓸쓸한 것으로 보였다. 등불이 외롭고 벽에 걸린 각색의 의상들이 그림자같이 괴괴하다. 감상에 젖을까를 두려워해서 나는 의사를 부르러 방을 나왔다. 전화를 건 것이 늦은 밤이라 거의 반시간이 넘어 밤무대가 다 끝났을 때에야 의사가 왔다. 설레는 속에서 진찰을 마쳤을 때까지도 안나는 쾌한 기색이 없었다.

“빈혈증만이 아니라 감기를 겸한 모양이오. 열이 대단히 높소.”

듣고 보니 소녀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었고 눈매에 정기가 없다. 손을 쥐어 보니 불덩이같이 달다.

“아직 무언지 확실히 진맥할 수는 없으나 극히 안정하게 해서 하룻밤을 지내 보이소.”

“무대 형편도 있고 하니 한시라도 속히 낫게 해야겠는데.”

“내일이면 증세가 확실히 알려지리다. 그럼 곧 약을 처방해 보내지요.”

의사기 나간 뒤 빅톨은 자기 화를 못이기는 듯이 골을 흔들면서 무의미하게 주먹을 부르쥐곤 했다.

“왜 이리 모든 것이 내 뜻을 거슬리는고.”

누구에겐지도 없이 짜증을 내면서,

“아무나 얼른 자동차를 못 불러오는가.”

말없는 속에서들 무대 의상을 갈아입고 차림들을 하고 있는 속에서 이와높이 한 걸음 먼저 방을 나갔다. 묵묵히들 참으로 그것은 고집스런 침묵이었다. 빅톨이 혼자 견딜 수 없이 약을 올리는 것이었다.

“어린것을 쓸데없이 왜 그리 꾸짖으라우 누가. 어른들의 허물을 아이들에게 씌울려구.”

그라아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빅톨은 고함을 쳤다.

“시끄러워.”

자동차가 왔을 때 안나를 태우고 이리이나가 따라 먼저 호텔로 보내고 나머지 패들은 여전히 말없는 속에서들 뚜벅뚜벅 영화관을 나갔다.

이튿날 오전 나는 한 묶음의 꽃을 사들고 호텔을 찾았다. 복도에서 처음으로 만난 피엘에게 안나의 병세를 물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단히 근심스런 표정이다.

“밤새도록 열이 사십 도를 내리지 않는구료.”

“병명은 진단됐나요.”

“의사가 막 다녀간 뒤인데 아마도 말라리아인 모양이요.”

“말라리아.”

듣고 생각하니 딴은 무더운 여름철이라 감기로부터 학질이 도섬이 첩경일 듯도 하다. 그러나,

“그 어린것이 이 복더위에 학질을 앓고 어떻게 견디나요.”

남의 일 같지 않게 걱정되었다.

“아무튼 열이 너무 높아요. 몸은 약한데다가.”

피엘의 근심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구름다리를 뛰어올라갔다.

삼층 층계를 올라서 바로 모퉁이 방이 안나의 병실이었다. 열어젖힌 문으로 서슴지 않고 들어서니 침대에 누워 있는 안나의 옆에 미이샤가 앉아 있고 빅톨과 그라아샤 부부가 앞에 서서 무엇인지 말다툼하고 있는 눈치였다. 다른 패들은 벌써 영화관으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해 있는 까닭에 아래층 로비에들 모여 있고 빅톨 부부만이 안나의 조처로 그 방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흥분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빅톨은 내게 침착하게 감사의 말을 던지고 꽃묶음을 받아서 탁자 위에 얹었다.

“지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몰라 서성거리고 있는 중이요. 아닌 때 병이 났으니 출연을 계속할 수도 없고 그만둘 수도 없고 참으로 진퇴유곡의 처지요. 오늘 우선 나는 부득이 극장으로 나가야겠으므로 그라아샤에게나 병시중을 맡길까 하는 중인데.”

“딱하외다.”

하면서 의자에 앉는 나를 안나는 침대에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녁 햇빛같이 애잔한 시선이다. 하룻밤 동안에 얼굴은 깎은 듯이 핼쑥해지고 빛깔이 마알갛다. 나를 보는 그의 눈 속에는 무슨 마음이 숨어 있을까. 아마도 백지같이 흰 마음이리라. 하늘같이 맑은 마음이리라.

“속히 그를 낫게 해줍소서.”

소리를 높여서 효험이 난다면 그러고도 싶은 내 마음이었다. 일단 중에서 왜 하필 잔약한 그가 괴롬의 희생으로 뽑혀졌단 말일까.

“당신은 당신의 허물을 일곱 번 뉘우쳐도 부족해요.”

문득 그라아샤의 말이 터져 나온 것은 빅톨과의 말다툼의 계속인 모양이었다.

벌써 안나의 병과는 딴 문제로 그라아샤의 감정은 남편에게 대해 적지아니 격해 있는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법석을 해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요. 괜히 시끄럽기만 했지.”

빅톨은 벌써 한 수 접혀서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피하는 눈치였다.

“법석을 안하고 될 노릇이요. 결과를 생각해 보시오. 뉘 허물인가를 안다면 당신 맘이 그렇게 편편할 리는 없잖소.”

“허물을 알면 그럼 대체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란 말요.”

“부끄러워하시오. 백번 부끄러워하시오.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의 체면을 생각하시오.”

무엇이 그다지도 견딜 수 없는지 그라아샤는 사람의 앞임을 헤아리지 않고 제 스스로 핏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15 편집

“그 잘난 계집애 하나 때문에 사족을 못쓰면서 일단의 통일까지를 잃게 했단 말이오. 결국 어린것까지를 병들게 하구.”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 늘어놓는다.”

빅톨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아찔이라는 듯이 손을 터나 그라아샤는 여전히 고집스럽다.

“쓸데없긴 왜 쓸데없어요. 그래도 아직 그 맘을 버리지 못하나부다.”

빅톨은 질색을 하면서 내 앞을 부끄러워함인지 문밖으로 휙 나간다. 그라아샤의 눈에는 병인도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찰거머리같이 남편의 뒤를 따라 나가면서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그년을 일단에서 안 쫓아낼 테요. 마리이를 냉큼 처치하지 못한단 말요. 재주도 아무것도 없는 치마저고리를 이 이상 더 붙여 두겠단말요.”

“시끄럽달 밖엔.”

그라아샤의 발악을 들으면서 나도 미상불 놀랐다. 남편에 대한 장황한 충고가 결국 마리이에 대한 질투에서 나온 것이요, 그것을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해 올 때 빅톨뿐이 아니라 국외자인 나까지도 사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남편이나 아내나 그렇게까지 마음이 달뜨고 거칠어들 졌던가. 소녀의 병이 내외 싸움까지 불붙이게 되도록 그토록 일단의 평화는 이지러져 버린 것임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문밖 복도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부부의 격렬한 말소리가 오고가는 눈치더니 별안간 툭하며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라아샤가 핸드백을 던진 모양이었다. 그토록 그는 냉정한 이지를 잃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인 내 처지가 괴로워서 소년과 소녀에게 한껏 부드러운 위안의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일어서는 수밖에는 없었다. 복도에서 으르고 섰는 부부의 앞을 지나기가 겸연했으나 빅톨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도움이 된 모양, 그는 시간이 늦었음을 칭탁하고 내 뒤를 따라 내려왔다. 다른 패들은 벌써 나가 버린 뒤였다. 결국 그라아샤만을 간호로 남겨 놓고 다들─빅톨까지도 나와 영화관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일상 다변하던 그였건만 그날만은 관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날부터 무대는 물론 전에 없이 설핀 것으로 되기 시작했다. 소년 소녀의 한 쌍이 빠져서 만이 아니라 전체로 단체의 공기가 늦추어지고 긴장이 풀려져서 모든 연기에 성의가 없어진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 보였다. 밴드의 반주가 조화의 장단을 잃을 뿐이 아니라 노래를 해도 흥이 적고 춤을 추어도 흥이 줄어져서 흡사 단원 전체가 그 무슨 보이지 않는 요괴에게 사로잡힌 것과도 같았다. 출연을 시작한지 며칠이 안 되는 때 무대의 계약이 채 끝나지도 못한 도중에서 그들의 의기가 그렇게까지 가라앉은 것이 보기에 딱할 뿐이 아니라 그들을 계약한 관의 입장으로 보아도 불리한 것으로서 그럴 줄은 예측도 못했던 관주는 의외의 변에 실망이 적지 않아서 부질없이 나를 따지고 내게 싫은 소리를 하며 했다. 나로서는 그런 관주의 잔소리를 그대로 일일이 일단에게 전할 수도 없는 터에 얼떨떨한 지경이었다. 오월동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긁어모아서 된 일단의 성질로서 그런 부조화는 처음부터 약속되었다는 것일까. 소녀의 병으로 인해서 그렇게도 급작스런 변화가 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괴이하고 뜻밖의 일이었다. 그들을 맞이했을 처음의 일종의 감격과 흥미로 긴장되었던 나도 웬일인지 마음이 설레며 실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실망은 동정으로도 변하고 서글픔으로도 변했다. 그들 단체의 운명은 마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과도 같이 이유없이 서글프고 애달픈 것이었다. 며칠 전 찻집에서 스타아홉들과 함께 들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도 같이 서글픈 것으로 나는 그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단을 흔들기 시작한 변조와 함께 나의 이 느낌은 더욱 더해 갔다. 반드시 나의 지나친 주관의 채색이 아니라 그들의 그 후락한 모양을 보고는 누구나가 똑같이 느낄 수 있는 인상이었다.

소녀의 병은 날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으나 그 뒤를 잇는 듯, 그러나 그보다 더 큰일이 일단에 일어나게 되었다. 이튿날 오후 연기가 끝난 후 일차 호텔에들을 갔다가 밤 연기 시간을 대서 다시 영화관으로들 나왔을 때였다. 빅톨은 사무실로 나를 찾아오더니 적지 아니 황당한 어조였다.

“아키임과 마리이를 못 보았소.”

“왜 또 무슨 변이 있었단 말인가요.”

유유한 내 반문을 빅톨은 초조하게 여기면서,

“오후부터 두 사람의 자태가 안보였단 말요. 이때까지 그런 법이 없었는데 저녁식사에도 참례하지 않고 방에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쯤에 거리를 헤매고 있을 리도 없을 텐데.”

16 편집

“그럼 설마─.”

“연기 시간까지 더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소.”

“물론 기다려는 보지만 암만해도 수상하단 말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면서.”

아키임과 마리이의 두 사람은 밤 연기 시간까지도 물론 나타나지 않아서 그날 밤 무대는 엉망이었다. 소년 소녀의 출연이 없는데다가 아키임의 기타와 그나마 마리이의 아리랑타령이 빠지게 되니 연기의 차례는 흠뻑 줄어지고도 흥없고 쓸쓸한 것이었다. 남은 단원들이 쓸쓸한 무대를 흥성하게 할 양으로 갖은 애를 다 써야 원체 사람의 수효가 부족함은 어쩌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관객석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불만의 소리가 들리고 조롱의 고함이 터져 나올 때 단원들은 보기에 딱하리만치 겸연해서 얼굴을 붉히고들 했다. 그 모양으로는 같은 무대를 남은 며칠 동안이라도 옳게 지탱해 나갈 성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무대 성적보다도 더 긴급한 것이 아키임과 마리이 두 사람의 종적이었다. 대체 어디를 갔는고 어떻게 되었는고 해서 아마도 그 날 밤이 새도록 일단의 걱정은 삐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날 오전 내가 소식을 물으러 호텔로 가기 전에 빅톨은 일찍이 영화관으로 나왔다.

“여기도 물론 소식이 없지요.”

“막 호텔로 갈려던 차였소.”

“대체 웬일일 것 같소. 무슨 대책은 없으시오.”

“경찰에 수색원을 내봄이 어떻소.”

“창피만 했지 무슨 소용이 있겠소. 어디로 내뺐다면 벌써 수천리는 갔겠소.”

그날 하루도 물론 두 사람은 안 나타났고 그 다음날이 되어도 소식이 없어서 결국 두 사람은 실종한 것으로 단정되었다. 피차의 열정을 억제할 수 없어 어수선한 분위기를 빠져 나기 위해 손을 잡고 대담하게 사랑의 줄행랑을 놓은 것이다. 아마도 만주로나 들여 뛰었을 것이다. 수중에 지닌 얼마간의 비용으로서 그 어느 거리에서 두 사람만의 생활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향수에서 벗어나서 장해 많은 사랑을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외지로 나오기 전에 두 사람의 사랑이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낯설은 곳에서 주물리우는 동안에 사랑이 익고 불붙었을 것이다. 귀족의 후손이라는 아키임의 기름하고 하얀 얼굴과 후리후리한 키와 부드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마리이의 푸른 눈과 아리랑을 부를 때의 연연한 자태가 생각난다. 짝이라면 일행중에서 가장 맞는 짝이다. 마리이에게 다른 남자를 배치해 보아도 어색하고 아키임에게 다른 여자를 짝지어 본대도 맞지 않을 듯하다. 두 사람은 용모로 보나 기질로 보나 참으로 자연스럽게 들어맞는 선택을 피차에 한 것이다. 마음의 선택을 한 그들에게는 벌써 외지의 분위기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당돌한 도피행도 그들로서는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단체에 대한 책임이나 의리 같은 것은 사랑의 필요 앞에서는 사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스런 그들의 행위가 반면에 의외로 큰 희생을 요구했으니 그것은 단체에 끼치게 된 불리보다도 참으로 크리이긴과 빅톨 두 사람에게 던지게 된 불행이다. 빅톨이 조바심을 하고 안달을 하면서 두 사람의 종적을 찾으러 휘돌아치는 꼴에는 단의 책임자로서의 심정보다도 마리이에게 대한 실망과 초조가 드러나 보이는 듯하다. 며칠 전 호텔 병실에서 그의 아내 그라아샤가 마리이를 냉큼 내쫓아 달라고 고함을 쳤던 것이 그럴 필요조차 없게 제물에 해결이 되어 마리이 쪽에서 마치 그 말을 엿듣기나 한 듯이 스스로 해결 짓게 된 것이 신통하다면 신통할까. 그라아샤에게는 숨은 만족을 주었을 반면에 빅톨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까는 추측하기에 넉넉하다. 주체스런 몸을 이끌고 휘돌아치는 빅톨의 양이 딱하기 짝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빅톨보다도 한층 속이 타는 것은 크리이긴이 아니었을까. 아키임과 같은 모습이기는 하나 신경질이요 빳빳스런 그의 기질이 애태우고 맞서던 사랑을 뺏기고 얼마나 속이 휘둘리웠을까. 말하는 법 없이 고함치는 법 없이 더욱 벙어리같이 침묵해 가는 그의 마음속이 얼마나 울가망하고 답답한 것이었을까. 가령 나는 그의 옆을 지나는 길에 무어라고 한마디쯤 말을 걸어보려는 것이나 첫째 그의 시선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눈앞을 보지 않고 그 어디인지 먼 데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노리고 있는 한 가지에 생각에 열중해 있음은 그 우악스런 눈매와 모가 져 보이는 턱의 각도로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마리이일 듯한 그 한 가지 환영에 불같이 마음을 뺏기고 있는 것이다.

17 편집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나는 비를 무릅쓰고 며칠 번겼던 까닭에 일찍이 꽃을 사들고 호텔로 안나의 병실을 찾았다.

하루 건너씩 열을 내는 소녀의 병이 아직 쾌하지는 못했으나 그날은 마침 열을 번기는 날이라 침대에 일어나 앉은 그의 얼굴은 괴롬의 빛 없이 개이고 평온한 것이었다. 침대 옆에는 이리이나가 앉아 안나와 미이샤를 상대로 그림책을 뒤적거리면서 동무하고 있었다. 이리이나는 비록 무대의 재주는 없으나 그렇게 아이들을 상대로 하고 있을 때에는 참으로 인자한 어머니와 누나라는 인상을 준다. 소녀는 이리이나의 이야기에 정신을 뽑히우고 잠시 육신의 괴로움도 잊은 듯했다. 탁자에는 깨끗한 쟁반에 약병들과 과일접시가 놓이고 화병에는 꽃이 새로워서 그날 아침은 별스럽게도 근심 없는 즐거운 병실이라는 느낌이 났다. 다만 창밖에는 가는 비가 추근히 뿌리고 있는 까닭에 방안이 조금 어두울까 한 것이 건듯하면 마음을 답답하게 하려고 했다. 그림책을 손가락질하며 설명에 열중하다가도 창밖에 시선을 보낼 때에는 이리이나의 가슴속도 흐려지는 듯해서─다시 말하면 그는 그 흐려지는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림책에 일부러 열중해 있는 것이라고도 보면 볼 수 있었다. 창밖은 바로 호텔의 후원으로서 백양나무와 벚나무 잎사귀를 흠뻑 적시고 있는 빗발이 회색의 실다발같이 내다보인다.

“마리이가 없어져서 쓸쓸들 하지요.”

공연한 소리도 아닐 것같이 위로겸사말을 거니 이리이나는 창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우리야 쓸쓸하지만 차라리 잘들 했지요. 더 묵어야 별수없는 노릇이니.”

“무대도 며칠 안 남았는데 그렇게 조급하게들 할 법이 있었나요.”

“무대가 끝나도 단체와 같이 있으면 좀체 빠지기 어렵거든요. 뭇사람 속에 끼어 있노라면 옥신각신이 빼날 있어야지요.”

“하긴 사랑에는 용기가 첫째긴 하지만.”

“잘들 하구 말구요. 하얼빈에는 마리이의 아버지가 있고 아키임에게도 일가붙이가 있으니 거기 가면 활개도 펴고 맘들도 편편할 테니까요.”

“부럽단 말입니까.”

“사실 부러워요.”

창밖 빗발을 통해서 문득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얕게 가라앉은 으늑한 멜로디가 흡사 나뭇잎 사이에서 솟는 듯이 빗발 속에서 생겨나듯이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되어서 깨끗한 음도 그대로 흘러왔다. 금시 어디선지도 모르게 솟아 나온 한줌의 영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줌의 영감같이 티끌 한 점 없이 순수하게 흘러와서는 그대로 마음을 오붓하게 둘러싸는 것이다.

“또 「로맨스」─피엘은 집에서는 저 곡조밖에는 모르나봐요. 사시장철 켠다는 게 「로맨스」.”

이리이나의 말투는 감정의 어조가 아니라 확실히 불평의 표현이었다. 사실 베토벤의 「로맨스」는 가라앉은 마음을 잡아 흔드는 것이었고, 늘 듣는 이리이나에게는 감동에서 드디어 불평으로 변한 것인 모양이었다.

“로맨스는 늘 들어도 왜 저리 구슬픈 것일까요.”

“뉘 아나요. 베토벤같이 청승맞은 음악가가 있을까. 로맨스가 왜 그리 슬퍼야 하는지.”

탄식하는 이리이나 앞에 더 머무르기도 구접스런 노릇이기에 나는 그만 안나의 앞을 일어섰다. 일변해진 방의 분위기에도 견디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음악에 이끌리는 듯이 층 아래로 내려와 로비에 들어섰을 때 창 기슭에 피엘이 서서 바이올린에 정신이 없었다. 곡조는 첫 대문 반복되는 구절에 돌아와 구슬프게 계속되었다. 열어젖힌 창밖 백양나무에 비는 자꾸 내려 쏟고 날은 무겁고 어둡다. 아키임과 마리이 두 사람 빠진 것이 왜 그리도 휑휑한지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다 모여 있건만 자리는 쓸쓸하기 짝없다. 그 유난스럽게 소슬한 느낌은 모두들 말없이 웅층거리고 앉은 그 자태에서 오는 것인 듯도 했다. 기어코 빅톨은 벌떡 자리를 일어나더니 피엘을 향해 고함을 쳤다.

“그래도 그만 두지 못할까. 그 빌어먹을 놈의 곡조.”

그러나 피엘은 못들은 체 떨리는 활을 쉬지 않았다.

18 편집

내게는 음악이 슬프고 그들의 처지와의 관련이 애달픈 뿐 아니라 며칠안가 그대로 작별하게 될 것이 서글펐다. 사오 일 동안의 그들과의 교제가 비상히 마음에 배는 것이었고, 더구나 예측하지 않은 가지가지 불행한 일의 목격이 더욱 그들에게 내 마음을 얽어놓게 하였다. 사랑의 갈등이니 부부의 싸움이니 소녀의 병이니 아키임들의 실종이니 하는 사건들이 없었던들 나는 다만 색다른 정서의 대상으로서 그들을 볼 뿐이었을 것이나 불행이 뒤를 거듭함을 따라 그들에게 대한 동감이 더욱 솟게 되고 마치 내 자신의 불행이나 당한 것처럼 마음속 깊이 그들의 자태가 새겨지게 되었다. 곡절 많던 그들의 무대도 앞으로 이틀이면 끝나고 따라서 관과의 계약도 끊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또 어디로 근심 많은 연주의 길을 계속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틀 후에 그들과 작별하게 될 것이 한없이 서글퍼진다.

결국 진진하게 한번 이야기하고 놀아보지도 못하고 어수선한 변화 속에서 흐지부지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경 없는 노릇인가. 애끊는 음악소리를 듣노라니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에 없이 친밀히 생각되면서 다시 한 번씩들 바라다 보이는 것이었다.

스타아홉과 카테리이나 두 사람에게 대한 정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대한 그것보다 좀더 두터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더두 말고 두 사람에게 대해서라도 내 한껏의 친절을 마지막으로 베풀어서 작별의 기념을 삼을까 해서 나는 두 사람에게 오찬의 초대를 권해 보았다. 동료들의 앞도 있고 한 관계인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거듭 청해 볼 때 그들 역시 내게 대해서는 좀더 정을 주어 온 터이라 쾌히 대답하고 나와 함께 찻속에 앉았다. 비오는 거리를 밟고 닫는 것도 한 가지 흥이라면 흥이었다. 특히 조선음식이 소원이라기에 강으로 향한 조촐한 요정에 올라 강을 내려다보는 깨끗한 방에 앉게 되었다.

항용 서쪽 사람들은 딴 고장의 음식이나 절차에 대해 보수적이요 배타적인 것이나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신기한 것으로 보며 솔직하게 그대로들 받아들였다. 음식이나 의복이나는 순전히 풍토에서 차이가 생겼을 뿐이지 문화의 높고 낮음이 관계된 바 아닌 듯싶다. 비록 동쪽과 서쪽이 다르기는 하나 그러나 코와 입이 한 모양인듯 모든 음식 절차도 그 어디인지 근본적으로 근사한 데가 있는 것이다.

“오체니 브쿠우스노!”

“야 볼리쉐 류블류…….”

두 사람이 수저를 어색하게 쓰면서 찬탄을 마지않음이 반드시 헛말로만 들리지 않아서 내게는 유쾌한 것이었다.

확실히 두 사람은 만족한 것같이 보였고 그 짧은 오찬의 시간은 즐거웠다. 그들에게 동양을 맛보였다는 기쁨이 마치 내가 서양을 맛보았을 때와도 마찬가지로 내게는 뿌리깊은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니 낮이 조금 지났다. 출연 시간에는 아직도 두어 시간의 여유가 있었던 까닭에 관에 나가기도 이른 것 같아서 우리는 다시 호텔로 차를 몰았다. 문을 들어가 로비로 들어선 때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원망스럽게 보면서 망간 일어난 사건을 직각시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조화로 어떻게 된 곡절로 단에는 또 거듭 변이 일어난 것이었을까. 이때까지 일어난 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일까. 일단의 운명은 더 기구해야 한단 말일까. 그 무슨 짓궂은 뜻이 있어서 그것이 단의 평화를 심술궂게 자꾸만 뒤흔들려고 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무슨 이유론지 크리이긴이 망간 검속을 당했다는 것이다. 부 고등계에서 두 사람이나 나와서 의사도 잘 소통되지 못한 채 크리이긴은 변을 당했고 빅톨도 책임상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남은 두 사람들은 큰일이나 치고 난 뒤의 한 식구들같이 불안한 얼굴들을 하고 근심스럽게 몰켜들 있었다.

돌연한 소식에 나도 미상불 놀라면서 혼자만 자유롭게 거리에 나가 있노라고 그 불행을 당하는 현장에 참례해 있지 못한 것이 미안한 것 같아서 살며시 의자에 가 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일이 당한 것만으로 마음이 가득하고 더 여유가 없다는 듯한 눈치들이었다. 나도 빅톨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들과 같이 말없이 앉아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빅톨이 돌아왔대도 크리이긴의 검거의 이유에 관해서는 그 역 아무 수긍할만한 조목을 밝히지 못하고 온 것이었다.

“무 무슨 혐의랍디까.”

궁금해서 감질들을 내나 빅톨은 대답할 바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무슨 혐의인지 말을 하니 알겠나.”

“이유 없이 그럴 법이야 있소.”

“전에 까삭병으로 있었던 것이 말썽되는 눈치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에게 지금 무슨 일을 칠 주변이 있단 말인가.”

“까삭병의 장교 노릇을 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까지 화된다. 만주서 번번이 당하던 그같은 혐의란 말이지.”

“만주서 이곳으로 통지를 했나부데. 행동을 감시하고 주의하라고, 어디를 가나 인젠 꼬리표를 단 죄수지 꼼짝달싹할 수 있는 줄 아나.”

“속히 몸이나 받아 내오지 못했소.”

“취조니 무어니 하구 아무래도 며칠 걸릴 눈치야.”

“그럼 무 무대는 어떻게 하란 말인구.”

“큰일이야.”

19 편집

빅톨은 두 손을 벌리면서 눈을 멀거니 뜨는 것이었다. 기운없는 눈이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고 마지막 고패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듯하다.

출연시간이 임박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일은 곧 내 일이요 관의 일이다. 나는 잠자코만 있을 수 없어서 곧 빅톨을 끌고 영화관으로 나갔다. 물론 놀라고 급한 것은 우리보다도 도리어 관주 편이었다. 그는 당장 눈앞에 낮 연기를 어떻게 하노 하고 황겁지겁 설레면서 솔선해서 빅톨과 나와 세 사람이 함께 또 한 번 서를 찾았다. 관주는 거리에서는 옷섶이 꽤 넓은 편이었고 더구나 그 방면과는 밀접한 교섭이 있어서 그의 말이 대단히 소중히 여겨지는 때가 있었으나 그날만은 막무가내 하여 당국의 뜻은 의외로 완고했다. 영화관에는 벌써 애트럭슌의 연기를 기대하는 수천관객이 차 있어서 그들에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관주가 설명해도 헛일이었고 그럼 이틀 동안만 모든 책임을 지고 몸을 맡아 내겠다고 자담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관주의 실망은 초조로 변하고 초조는 일단에 대한 분개로 변하는 것이었다.

열두 사람 단원 중에서 거의 반이 크리이긴까지 도합 다섯 사람이 빠지게 되었으니 아무리 곧추서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대는 계속할수 없는 것이었다. 춤과 노래는 둘째치고 첫째 밴드가 성립되지 않는다. 무대는 물론 중지되어서 나는 관주의 이름으로 확성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백배 천배 간곡한 사과를 하고 스크린에는 애트럭슌 대신에 창고에서 부랴부랴 찾아내온 낡은 사진을 걸게 되었다. 관객들은 수물거리면서 불평들이 많았으나 사진이 이미 영사되게 되니 차차 가라앉아 갔다. 가라앉지 않는 것은 관주였다. 서에서의 불성공이 원인이 되어서인지 그의 낯빛은 좋지 않고 드디어 일단에 대해서 싫은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꼴을 보자고 애초에 당신들과 비싼 약속으로 계약을 했겠소. 작년에 왔을 때에 호평을 받았던 호의로 모든 것을 굽혀서 이번에 특별히 맺은 것이 그래 결국 이 모양이 된단 말요.”

“미안하외다. 모든 일이 알지 못할 사정으로 제물에들 일어나게 되니 낸들 어찌 그것을 막아 내겠소. 우리도 사실 작년 요량만 댔던 것이 그만 어쩌다 뜻밖에 뒤틀려지면서 이 결과가 되는구료.”

빅톨이 목소리를 부드럽히고 허리를 고분히 해서 거의 빌듯이 하는 것이나 관주의 마음은 즉시로는 풀리지 않았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니 수천의 관중을 상대로 하고 있는 나로서 꼴이 됐단 말요. 신용도 신용이려니와 내 체면이 무어란 말요.”

“그러게 이렇게 미안해 하는 것이 아니오. 올은 대단히 불길한 해였소. 나그네의 길이 언젠들 그다지 행복스러울까만.”

빅톨의 하소연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관주에게는 관주로서의 배짱이 있었던 것이요, 무엇보다도 그의 상인인 것이다. 항상 주판을 머리 속에서 쩔그럭거리는 장사치인 것이다. 모든 거래에 있어서 이익이 주목인 것이었다.

“그럼 오늘로서 계약이 실상에 있어서 끊어지는 셈이니 약속한 액에서 이틀 분은 탕감해야 할 것이오. 알겠소.”

그 말이 옳다는 것인지 야박하다는 것인지 빅톨은 말이 없이 한참이나 관주를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삼천 원의 약속에서 이틀 분을 제하니 이천 원이 채 차지 못했다. 장사하는 사람의 도덕으로서 그렇게 정확함이 물론 당연한 것이겠지만 관주로서는 애트럭슌 대신에 묵은 사진을 집어내서 걸게 된 것이 이익에 있어서는 일단과의 계약 해체로 인해서 받는 손해는 없었다. 일단의 처지를 생각해줄 아량을 가지려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단으로서도 맡은 일에 대한 보수였으므로 결한 시간에 대해서는 배당을 요구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단지 수입을 목적으로 하고 외지로 흘러온 그들에게 역시 귀중한 것은 넉넉한 수입의 액수였다. 사실 금고에서 관주가 소절수장을 집어내서 일금 이천 원을 적어서 빅톨에게 줄 때 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나타난 것보다도 옆에서 보는 나로서 일종의 섭섭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단돈 이천 원이 많이 식구를 거느린 그에게 결코 많은 액이 못될 것이며 만약 그렇게 될 줄을 그가 애초에 예료했던들 그것을 바라고 이 먼 곳까지 나왔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무슨 인연인가 보오. 약소하나마 섭섭하게 생각지 말고 다음 기회에나 또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갑겠소.”

관주의 판에 박은 듯한 말을 그다지 반갑게도 여기지 않으며 소절수를 주머니 속에 수습하는 빅톨의 자태가 내 눈 속에 엉켜붙는 듯도 하다. 이천 원! 며칠 동안 그들의 수고의 값이 이천 원인 것이다. 싸우고 병들고 도망하고 잡히고─그 수다스런 희생의 값이 이천 원인 것이다. 그 모든 희생을 이천 원에 팔기 위해 그들은 일부러 이곳을 찾은 셈이다. 짧은 동안의 어수선한 일들을 생각할 때 빅톨의 가슴속에는 그 이천 원의 뜻이 얼마나 뼈저리게 맺혀질까가 넉넉히 추측되었다. 빅톨이 사무실을 나갈 때 나는 문득 가슴이 벅차지면서 자리를 벌떡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았다.

“아니 그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단 말요.”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고 폐가 많았소이다.”

“그래 작별이란 말요. 이것으로 작별이란 말요.”

“어처구니없게 됐소. 너무도 일이 어그러져서 지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소. 호텔에 가서 좀 생각을 해봐야겠소.”

사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계약이 끊어졌고 보수를 받았고─이제 벌써 할 일은 남지 않은 것이다. 극장과도 하직이요 이 고장과도 하직이다. 짐을 싸가지고 어디든지로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일인 것이다.

우울한 심사에 나는 더 호텔로 그들을 찾지도 않았으나 그날 밤 영화가 끝났을 때 일행들은 짐을 거두러 관으로 왔다. 무대 옆방에서 의상들을 거두어 트렁크 속에 수습한다 화장품 그릇들을 치운다 무대에서 막을 뜯어 건사한다 악기들을 살펴서 넣는다 하면서 며칠 전에 같은 그곳에서 같은 살림을 차려놓기에 열중했던 그들이 오늘은 그것을 헐고 뜯고 수습하기에 분주하다. 우두커니 서서 그 모양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앞이 아찔아찔해지면서 인간의 살림살이라는 것이 한없이 서글픈 것으로 어리웠다. 살림살이는 왜 그런고. 그런 것이 살림살이인가. 변하고 불행하고 슬픈 것이 살림살이인가.

“정녕코들 떠난단 말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니 이와높이 쓸쓸하게 웃어 보인다.

“떠나는 게 우리의 일인가 부오. 왔다 떠났다 왔다 떠났다─풀었다 쌌다 풀었다 쌌다.”

“왜 왜 떠난단 말요. 왜 그리 어처구니없이…….”

20 편집

나는 감상 속에 잠기게 됨을 극력 경계는 했었으나 가슴이 빠지근해짐을 억제하는 수가 없었다. 아찔아찔한 내 눈앞에 별안간 카테리이나가 와 섰다.

“스파시이보!”

감사의 말과 함께 내드는 것은 화병이었다. 꽃을 뽑아 버린 빈 병이었다.

그가 처음 왔을 때 사무실로 꽃을 사들고 와서 내게서 빌려 간 그 꽃병이 이제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잘 썼어요. 얼마나 방이 생색 있게 빛났던지 몰라요.”

그대로 버려 두던지 어쩌든지 하지 왜 그렇게 긴하게 꽃병을 들고까지 와서 상하기 쉬운 남의 기억을 일깨워 주는고 하고 나는 카테리이나의 목소리를 도리어 얄궂게 듣는 것이었다.

울적한 심사를 이길 수 없어 나는 기어코 밤늦은 거리를 걸어 유라에게로 갔다. 대중없이 취해 집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새벽에 가까운 때였다. 괴로운 밤이었다. 날이 새어도 골은 여전히 무겁고 아프면서 세상사가 귀찮게만 생각되었다. 나도 이 기회에 저금을 찾아가지고 어디로든지 내빼 볼까 하는 생각조차 들면서 늦은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관에 이르니 벌써 쇼오 일행의 간판은 갈리었고 광고창에 내놓았던 일행의 사진과 포스터도 뜯어버린 뒤였다. 새로 봉절될 영화의 스틸이 나불었고 포스터가 장식되어서 일단의 출연은 벌써 먼 옛날의 기억인 듯 그들의 종적도 냄새조차도 관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변화의 양을 보려니 별안간 가슴이 뭉클해져서 나는 그 길로 바로 호텔로 향했다. 하룻밤 동안에 대체 어떻게들 되었는지 그 짧은 사이가 몹시 궁금했다.

늦은 아침때래서 그랬던지 늘 오붓이들 모여 있던 로비에는 썰렁한 속에 이와높과 스타아홉의 자태만 보였다. 여자들은 방에들 있고 빅톨은 아마도 외출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나를 전에 없이 반기는 품이 그들 역시 작별이 섭섭한 마음에 한결 친밀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일없이 피곤함을 느끼면서 나는 권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언제들 떠나시오.”

긴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 구절에나 이른 듯한 나지막한 어조여서 그랬던지 대답하는 스타아홉도 한참 동안을 두었다.

“언제 떠날지도 의문이오. 뚝 떠나지도 못하게 된 것이 안나의 병은 아직도 완쾌되지 못했고 크리이긴마저 저 모양이 됐으니 두 사람을 남겨두고야 떠나는 도린들 있소.”

“진퇴양난이구료.”

“빅톨은 또 한번 사정을 해볼까 해서 서로 갔는데 웬걸 뜻대로 되겠소.”

이와높이 뒤를 받아서,

“크리이긴은 크리이긴대로 두고라도 안나나 일어났으면 개운치나 않겠소.”

“각각 따로따로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는 중이오.”

영화관과의 결말이 났을 뿐이지 단으로서의 정리는 아직 못된 것이다. 떠난다는 것이 뜻뿐이요 사정은 아직도 뒤죽박죽이다. 삐지 않는 근심이 차례차례로 그들을 낫자루같이 얽어놓는 셈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는 사실 그들도 나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안나를 생각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삼층 병실을 찾았다. 거기에도 길 떠날 행장이 정돈되어 있다. 침대 밑에는 커다란 트렁크가 놓여 있고 탁자 위도 말끔하게 건사되어 있다. 정리되지 못한 것은 안나의 병뿐이다. 몇날 동안 바깥을 못 보고 병원에서만 구느라고 얼굴은 콩나물과 같이 멀겋다. 침대에서는 일어났으나 걸어앉은 그의 자태가 불면 날듯이 해까워 보인다. 그와 동무하노라고 그런지 미이샤도 홀쭉하게 축이 나 보인다. 그들을 보는 것도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웬일인지 거짓말만 같아서 나는 종시 단 한마디의 알맞은 이별의 말도 못 걸고 방을 나왔다. 다시 로비에 들어섰을 때 스타아홉은 방으로 갔는지 종적이 없고 이와높이 혼자 고개를 숙이고 앉아 내 기척을 모르고 손장난을 하고 있다. 기급할 듯이 놀란 것은 그의 손에 쥐인 것이 한 자루의 피스톨인 것이다. 나는 뜨끔하면서 쏜살같이 그에게로 달려갔다.

“아니 웬일이요.”

“놀랄 것이 없소. 심심하기에 장난삼아 만지고 있는 것요.”

“장난에도 분수가 있지.”

“나는 답답할 때 항용 이런 장난을 해요. 이건 내 마지막 위안이거든요. 울울해 못 견딜 때 이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라앉아요. 이 이상 가는 생각은 없으니까요.”

죽음을 생각할 때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그의 말을 나도 알 법하다. 죽음을 생각해서 밖에는 사람은 근심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카테리이나가 나타나지 않았던들 그는 종시 무기를 수습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외출을 할 작정인지 화려하게 단장한 카테리이나의 자태가 방 가운데 나타났을 때 이와높은 황급하게 그것을 감추었다. 나도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저금이나 찾아가지고 나도 짜장 길이나 떠날까.”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겸 카테리이나의 아름다운 모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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