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別[이별]의 曲[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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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심은 집으로 돌아오자 옷을 아갈 입을 생각도 없이 외투만 벗어 걸고는 이층 자기방으로 올라가자 책상머리에 탁 엎드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소리를 내어 오랫동안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온 자신이 자꾸만 서글퍼 졌다. 자기는 왜 어른다운 이야기만 그처럼 기를 쓰고 늘어놓고 왔느냐고, 그 마음의 초록별이 자기에게 있어서 어떠한 존재였더냐고, 잔인하리만큼 표독한 자기의 그 가지가지의 말들이 그지없이 얄밉고 한없이 영심은 원망스러웠다.

『대아가 뭐냐! 신앙 생활이 뭐냐?』

있는 것은 오직 그리움 뿐이었다. 별도 좋고 태양도 좋고 꽃도 좋다. 그 별과 그 태양과 그 꽃이 내게 좋아야만 나도 좋은 것이다.『아아, 어린애의 철부지를 지닌 그 눈물겨운 애정의 말들……』

자기 옆에 그저 앉아만 있으면 무한히 행복하다는 지운의 그 어리디 어린 말들이 영심의 영혼을 무섭게 흔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영원히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그의 앞에서 할 수 없는 불구자가 되려는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영심의 심신을 폭풍처럼 습격해 왔다.

『별이어, 대답하소! 태양이여, 대답하소!』

그러나 하늘과 땅은 아무런 계시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이 하늘의 오직 하나인 사연인양 눈만 자꾸 내려 퍼붓고 있었다.

『저처럼 무심한 하늘도 뜻만 있으면……』

그 눈의 한 송이가 땅을 그리워하는 하늘의 사람의 편지와도 같다고, 영원히 자기 가슴 속에 파묻어 두어야만 하는 가지가지의 말들이 이윽고 검푸르게 이끼가 끼고 녹이 쓸 것이 무한히 슬펐다.

『지운, 지운, 임 지운……』

마음속으로 지운의 이름을 애달프게 부르고 있는데 아랫층으로부터 아버지의 목소리가 굴러 올라 왔다.

『영심아.』

『네?』

영심은 후딱 눈물어린 얼굴을 들었다.

『너 무엇하니?』

『아, 아무것도 안해요.』

『그럼 내려와서 바둑이나 한 판 두어볼까?』

바둑을 둘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아버지의 그 무심한 생념이 다소 한스럽기는 하였으나 얼마나 갑갑했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네. 인제 옷 갈아 입고 곧 내려가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옷을 갈아 입고 얼굴을 고치고 아버지 방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벌써 바둑판을 깨끗이 닦아놓고 단정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심 선생이 요지음 수가 좀 약해진 것 같던데……여섯 목만 놓아 보는 것이 어떻소?』

『다섯 목만 놓겠읍니다.』

네 목을 놓던 영심이었다. 그 영심이가 결혼식을 지나고나서부터는 수가 판연히 약해졌다. 그 원인을 오 진국씨는 결혼 생활에 있다고 보는 것이었다.

바둑을 두는 동안 영심은 애써 얼굴을 폈으나 마음의 오뇌를 숨길 수가 도저히 없다. 때때로 시선을 들어 아버지의 그 근엄한 얼굴을 죄인처럼 후딱 쳐다보곤 하였다. 삼강 오륜(三綱五倫)의 가르침과 부창 부수(夫唱婦隨)에 일부종사(一夫從事)의 길을 영심은 이 아버지에게 배우고 자랐다. 그러한 영심이가 오늘 아버지와 남편의 눈을 속이고 남편 아닌 딴 사나이에게 손길을 잡히었을 뿐 아니라 순전히 자기자신의 의사로 그 사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은 이미 간부와 간부의 밀회를 의미하는 간음의 행동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영심의 바둑은 자꾸만 어지러워졌다. 뜻하지 않은 실패를 영심은 되풀이하고 있었다.

『난심(亂心)은 필패(必敗)라고 했소. 영심 선생 오늘은 다소 마음이 거치른 모양인데 어떻게 된 노릇인가요?』

오 진국씨는 그러면서 영심을 바라보았다. 영심은 당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하던 항우 장사 초패왕도 운이 없으면 패어 오강(敗於烏江)이라고, 인간의 운명을 소중히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은 어느 분이신데요?』

기를 쓰고 하는 영심의 대꾸였다.

『좋은 말씀이요. 운명을 안다는 것은 천명을 받음이요, 천명을 받을 줄 안다는 것은 인간 수업의 최대 이상이지요. 우혜, 우혜여(虜兮虜兮[노혜노혜]), 그대를 어이 하리! 오호(鳴呼[명호])라! 오호라!』

무심 중 흘러나온 아버지의 이 최후의 영탄에서 영심은 불현 듯 지운을 생각했다.

한고조(漢高祖) 패공(沛公)과 형(가)을 다루어 오강에서 패전한 항우 초패왕이 총희(寵姬)우미인(虜美人)을 부여안고 차마 죽지 못해서 부른 애달픈 연가(戀歌)의 한 구절이다.

『우여, 우여, 그대를 어이 하리!』

지운, 지운, 지운! ― 지운의 이름을 수 없이 불러 보며 애달퍼하는 자기 심정과도 흡사한 것이라고 아버지는 마치 자기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영심은 무섭다. 차마 혼자 죽지 못해하는 초패왕의 그 다급한 안타까움이 영심은 저의 일만 같았다.

바둑은 두 판으로 끝을 막았다. 두 번 다 참패를 한 영심을 향하여,

『마음이 다소 평화롭지를 못한 것 같으오. 이 삼일 수양 하면 평온이 오겠지요.』

그런 말을 하면서 오 진국씨는 딸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우수의 빛을 물끄러미 골라본다. 결혼 생활이 순조롭지 못한 탓인가? 희노애락의 빛을 가볍게 안색에 나타내는 것은 여자의 부덕(不德)을 말하는 것이라고, 그러한 아버지의 교훈을 영심은 어려서부터 받고 자란 몸이다.

『아니예요. 아버지의 수가 갑자기 느신 탓이예요.』

영심은 바둑판을 치우면서 그렇게 말하여 아버지의 근심을 덜어 드렸다.

『음, 말인즉 그럴 듯하지만 그것은 부당한 말이다. 갑자기 줄 수는 있지만 갑자기 늘 수 없는 것이 바둑의 길이다. 그리고 그것은 뭇 수도(修道)의 길에도 통하는 것인데……』

『아버지의 말씀대로 수양을 하겠읍니다. 그리고 오늘의 참패를 반드시 돌려 드리겠어요.』

『좋은 말이야, 자기자신에 이기(克己[극기])는 길만이 오직 하나인 수도의 길이니까……올라가 쉬어라.』

『네, 그럼……』

영심은 다시 이층으로 물러나 왔다. 물러 나오면서 영심은 자기 자신에 이기는 길을 결정적으로 택하고 있었다.

내일 최후로 지운을 만나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청산할 것을 마음 깊이 영심은 각오하였다. 그리고 내일밤으로 자기의 불미로웠던 행동을 남편과 아버지 앞에 깨끗이 아룀 으로써 속죄의 뜻을 표하려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이 아버지와 이 남편의 옆에서 단하루의 삶도 유지할 수가 도저히 없다.

그날밤, 영심은 곤히 잠든 남편의 머리맡에 꿇어 앉아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마음속으로 맹세를 하였다.

『제 마음은 약했읍니다. 제게 힘을 주시요. 저는 내일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읍니다.』

밤 사이에 눈은 멎었다. 영심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하였다.

하늘은 화난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흐린 날씨였으나 추위는 그리 맵지 않았다.

영심의 굳은 결심이 한결 마음을 거뜬하게 하였다. 늦조반을 먹고 남편은 또 외출을 하였다. 후방 전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열 한시 반에 영심은 집을 나섰다. 어제 눈에 치마와 버선이 젖어서 하는 수 없이 양장을 하고 나섰다.

영심이가 집을 나선지 오 분도 못되어 유 민호의 자동차가 영심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오분 차이로 유 민호와 대면하지 않게 된 것은 영심에게 있어서 우선은 다행한 일이었다.오늘따라 영심은 경학원 마당으로 해서 명륜동 전차 정류장으로 나가는 길을 버리고 창경원 담장밑 지름길을 택했기 때문에 유 민호의 눈에는 다행히도 띠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 민호는 양과자 한 상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 진국씨가 유 민호를 맞이하였으나 들어오라는 말은 통 하지 않았다. 과자를 내 놓고 마루 아래 선 채 유 민호는 인사를 하였다.

『영심씨가 결혼을 하셨다고요. 청첩이 없어서 통 모르고 있었읍니다.』

오 진국씨는 잠자코 있었다.

『허형은 후방으로 전근이 되었읍니까? 국방부 총무국에 자주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읍니다만……』

『전근은 아직 되지 않았지만……』

『영심씨는 어디 나가셨는가요?』

『인제 방금 나갔네. 경학원 마당에서 보았을텐데……』

『아, 그렇습니까! 실은 결혼식에도 참석을 못했고……다소 송구스러워 제 성의만을 표하고 싶어요……』

유 민호는 외투 안 주머니에서 금일봉을 공손히 내놓았다. 일금 이십 만환의 보증수표가 들어 있는 봉투인 줄은 오 진국씨는 물론 알 길이 없었다.

『감사하네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넣어 두게.』

『무슨 말씀을 선생님은……제가 미리 좀 알았으면 다소의 힘이 되어 드렸을 것을…』

『자네에게 축하금을 받아도 좋을 그런 결혼식이 못되니까……』

그렇게 굳이 사양을 하다가 오 진국씨는 그러한 자기가 너무 소심한 위인 같이 생각키워서 문득 봉투를 집어 알맹이를 꺼내 보았다.

『이십 만환, 오 진국씨는 다시 수표를 봉투에 넣어서 유 민호 손에 가만히 집어 주며,

『기천환, 이라면 모르지만 이건 분명 축하금이 아니고 이 오진국을 저울질해 보는 금액이야! 가지고 가게!』

『선생님, 제 성의를 왜 그처럼 오해를 하십니까?』

『어서 가지고 가게. 자네의 신세는 이미 많이 지고 있는 몸이야. 그것만도 마음의 짐이 되어 있는데……』

그러면서 오 진국씨는 제 손으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 닫아 버린 창문을 유 민호의 눈초리가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럼 선생님, 물러가겠읍니다.』

그러나 방안에서는 대답이 없다.오늘 유 민호가 오 진국씨를 찾은 것은 별다른 깊은 의미가 있어서 취해진 행동은 아니었다. 저번에도 한 번 경제적 원조를 하겠노라고 찾아 온 유 민호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경제적 원조를 쾌히 받을 오 진국 씨가 아님을 유 민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속으로는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고 체면은 체면대로 채울 수 있는 이러한 행동을 가끔 가다가 한 번씩 취해 보는데 입맛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오 진국씨의 마음을 저울질 해 보는 한낱 낚시질과도 같은 도락이었다. 미끼를 던져서 안 물리면 안 물리는대로 손해는 없는 노릇이었고 물리면 물리는대로 유 민호에게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고기가 상당히 완고해 놔서……』

차를 타고 명륜동 전차 정류장으로 빠져 나오면서 유 민호는 유쾌히 중얼거렸다.

『영심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나왔으면 수지는 맞을텐데……』

눈 깜빡할 사이에 채 정주를 잃어 버린 유 민호였고 인국 엄마 마저 놓쳐 버린 유민호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유 민호도 요지음에 와서는 마음속이 다소 비어 있는 것 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랜 만에 영심의 얼굴이라도 한번 바라보고 왔으면 소비된 가솔린 대금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담로우즈도 인제는 냄새가 났다. 그것은 저번날 저녁 석란의 입으로부터 마담이 자기와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한 마디를 들었을 순간부터였다. 임신한 타이피스트 박 미경의 처소를 찾을 만한 성의도 또한 없다. 부산 본점서 무 주임의 아내는 두 번도 만나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유 민호는 어제부 산 대청동으로 김 옥영에게 전보를 쳤다. 하루바삐 서울로 올라와서 살자는 전보였다. 김 옥영만은 아직도 유 민호가 입맛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삼년에 걸친 김 옥영과의 동서생활에서 유 민호는 싫증보다도 도리어 니코친의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천하 일품이야!』

김 옥영의 육체를 불현 듯 연상하며 창경원 담장을 끼고 대학병원 시체실 앞까지 다달았을 때였다.

『아, 저건 영심이……』

유 민호는 소리를 내어 외쳤다.

영심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창경원 문을 향하여 영심은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영심이가 스케팅을 시작했는가?』남녀 중학생 서넛이 스케트를 들고 메고 영심의 뒤로 따라 들어가서 표를 산다. 그러나 영심은 스케트를 들지 않았다.

『가솔린 값은 충분히 됐다!』

서서히 몰고 있던 차를 유 민호는 멈추었다. 그리고는 핸들에다 자물쇠를 채우고 차에서 내렸다.

어제와 꼭 같은 코오스를 둘이는 걷고 있었다. 지운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쓸어 낸 스케트장은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유 민호는 얼음 위로 내려가서 학생들 속으로 자기 몸을 감추어 버렸다. 둘이가 걷는 코오스는 결국 이 연못을 중심으로 삥돌아 나오게 된 길이어서 학생들의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면 둘이의 행동을 빤히 올려다 볼 수 있는 유 민호의 위치였다.

사나이의 모습에 낯이 익다. 그러나 그것이 언젠가 마담로우즈의 방에서 본, 정능 계곡을 배경으로 한 석란의 사진 속의 인물인 임 지운인 줄로 알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쨌든 흥미꺼리인 걸!』

가솔린 값 쯤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급차 한 대 쯤은 손쉽게 내던져 손에 넣기 힘든 흥미꺼리라고 유 민호는 지금 망원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두고 봐야만 알 일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 영심이가 이럴 줄은 실로 천만 외의 일이었다. 여자를 가리켜 신비로운 동물이라고 간파한 것이 누군지는 몰라도 선각자임에는 틀림 없다고 자기의 여성관이 아직 여물지 못했던 것을 유 민호는 지금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여자는 사성(蛇性)의 동물이야!』

자기의 지론을 한 번 더 확인하며 마음의 허리 띠를 유 민호는 졸라매는 것이다.

식물원 앞으로 해서 둘이는 수정각 뒷길을 삥 돌고 있었다. 어제 걸터 앉았던 노가지나무 옆을 그대로 지나쳐 연못가 오솔길을 둘이는 걸어 내려왔다. 사람의 발자욱은 하나도 없는 새 눈길이었다. 왜 그처럼 눈길을 걸어야만 하는지, 더 욱더 유 민호에게는 흥미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둘이는 못을 삥 돌아 근정전 뒷길로 걸어 올라갔다.

『……그러니까 오늘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헤어진다는 말이지요?』

『네, 그럴 수 밖에……』

깊은 한숨 소리가 둘이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어른이 돼 가지고 오신다고……어저께 그처럼 굳은 약속을 하셨는데 ……』

『되겠읍니다! 영심씨의 소원이 진정으로 그러시다면 어른이 되지요!』

지운은 눈물을 글썽글썽하며,

『영심씨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제 힘이 모자라지요. 성실한 진실이면 움직여 주실 줄로 믿었던 영심씨였읍니다.』

『지운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제 마음을 못알아 주실 지운씨가 아니실 텐데……』

영심이도 운다.

『알지요! 잘 알고 있지요!』

『그러시담……그러시담 제 청 들어 주세요!』

『듣겠읍니다. 다시는……다시는 어리광을 부려서 영심씨를 괴롭히지 않겠읍니다!』

근정전 뒷뜰에 눈을 하얗게 인 오층탑이 한 기둥 서 있었다.

『탑 곱지요?』

영심의 외로운 마음이 자연을 그리워했다.

『곱군요.』

실감을 상실한 대답을 지운은 했다.

『그렇지만 제게는 인제 아무런 것도 고운 것이 없어졌읍니다. 모두가 다 보기 싫어졌지요. 영심씨를 잃어 버린 탑이 무어가 그리 고울까요. 꽃도 미워지고 새도 미워지고 마음의 오아시스이던 창경원 연못도 인제는 미워졌읍니다.』

손등으로 눈물을 어린애처럼 씻으며,

『생각하면 영심씨는 저 보다도 더 괴로우실 줄 알아요. 나는 지금 영심씨한 사람만을 그리워 하면 되지만……영심씨에게는 허중령이 있으니까요.』

『아아, 그런 줄을……아시면서……』

와락 눈물이 솟구쳐 나와 영심은 앞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인제 영 만나지 않겠읍니다. 영심씨, 그럼 되지요?』

어린애를 달래듯이 지운은 기웃하고 영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럼……그럼 되지요.』

영심은 마침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걸었다.

발길을 덮는 눈길이었다. 눈 속에 파묻힌 돌하나를 밟고 영심의 하이힐이 퉁그러 졌다. 팔 하나를 붙들고 균형을 잃은 영심의 몸을 지운은 부축했다.

『영심씨, 인제 울지 말아요.』영심의 팔을 부축하고 지운은 걸었다.

『저도 인제 울지 않겠읍니다.』

영심을 위로하는 편에 지운은 이미 서 있었다. 위치가 바뀌어진 것이다.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 영심씨를 이 이상 더 괴롭힌다는 건 확실히 죄악이지요.』

울지 말라면 더 울고 싶다. 영심은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흐느끼는 얼굴로 지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근정전을 조금 지나친 쓸쓸한 숲새였다. 가지마다 눈을 하얗게 인 이름 모를 나무들이 둘이의 주위에는 있었다.

『몸 조심하셔서……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영심은 좌악좌악 운다.

『영심씨가 읽어만……읽어만 주신다면……그것으로 저는 행복을 삼겠읍니다.』

영심의 팔 하나를 부축했던 지운은 남은 손으로 영심의 남은 손길을 가만히 쥐어 보며,

『영심씨의 말대로 저는 노력을 하겠읍니다. 노력을 해서 「愛人[애인]」의 후편을 쓰겠읍니다. 만나지는 못하지만……저는 항상 영심씨 옆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겠읍니다.』

『……고 고마워요, 지운씨!』

영심의 자세가 앞으로 쓰러져 오는 것과 지운의 몸이 맞받아 끌리워 나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영심의 어깨 위( )서 지운은 울었고 지운의 품 속에서 영심은 흐느꼈다.

무섭게 흐느꼈다. 그 울음과 그 흐느낌 속에서 둘이는 똑같이 새로운 또 하나의 죄악을 창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절실히 느꼈다.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한 오늘의 이 서글픈 이별이건만……이 이별이 두 사람에게 지금 새로운 죄를 창조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죄악이다. 죄악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헤어 진다는 것은 확실히 죄악입니다.』

지운은 잠고대처럼 중얼거렸다.

『지운씨!』

지운의 품 속에서 영심의 억압된 목소리가 흐느낌과 함께 솟구쳐 나왔다.

『노력을 하다가……노력할대로 노력을 해서 정말로 어쩔 수 없을 때는……』

영심은 또 한참 느껴 울다가『지금까지는 어디서 사는 누군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랬었지만…… 지금은, 지금은…… 제 노력이 정말로 끊어질 때……저는 지운씨를 찾아갈 테에요……』

『아아, 영심, 영심!』

『그러니까 지운씨도 이상 더 노력이 불가능할 때는 언제든지 언제든지 저를 찾아 주세요.』

『아아, 영심! 내 생명이요 내 우주인 오 영심이다!』

줄기찬 외침과 함께 지운은 무섭게 몸부림을 쳤다.

영심은 마침내 애정의 자세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어제처럼 말을 골라서 할 이유가 영심에게는 이미 없다. 지운의 품에서 이윽고 영심은 가만히 빠져 나오며,

『지운씨, 알으셨죠?』

『알았읍니다!』

『그 때까지 서로 노력을 하는거에요.』

『알았읍니다!』

영심은 가만히 얼굴을 쳐들고 나서,

『인제 나가요.』

둘이는 눈물을 거두고 근정전 앞 뜰로 묵묵히 나섰다. 돌다리를 건늘 때 영심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혹시……혹시 저희들에게 무슨 불행이 있어서……죽음이 올 때는……그 때는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

지운은 후딱 영심의 안색을 살펴 보았다. 죽음에 대한 그러한 의구심은 둘이 다 상대편에서 느끼고 있었다.

『영심,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해서는 안돼요!』

『아니예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증거예요.』

둘이는 묵묵히 창경원을 나섰다.

『인제 가세요.』

『영심씨가 먼저 가세요.』

『저는 여기 좀 서 있겠어요.』

『아닙니다. 제가 여기 서 있겠읍니다.』

영심이가 마침내 졌다. 지운을 빤히 쳐다보며,

『그럼 지운씨, 영원히 안녕히……』

그리고는 한 번 더 다사로운 눈인사를 영심은 하고 나서 홱 돌아서갔다.한 번도 뒤는 돌아보지 않고 밑 눈길을 빠른 걸음걸이로 사라져갔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지운은 오랫동안 창경원 앞 한길에 우두머니 서 있었다. 입술이 삐쭉삐쭉 이그러지며 눈물이 스루루 두 볼을 미끄러져 내렸다.

굽은 장갑을 끼고 영심의 뒷모습이 사라지려는 무렵에 신사 하나가 창경원 문을 나섰다. 멍하니 서 있는 지운과 조그맣게 담장 밑을 돌아가는 영심의 뒷모양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윽고 멈추어 놓았던 차를 운전하여 곧장 원남동 쪽으로 천천히 달려갔다.

지운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영심이가 사라진 쪽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발꿈치를 돌려 원남동 정류장까지 터벅터벅 걸어 오는데 우루루 전차가 들어 닿았다.

목적 없는 전차를 꿈결처럼 지운은 탔다. 지구의 넓이만큼 전차가 달려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을지로 사가에서 전차는 부득부득 지운을 한길가에 부려 놓았다. 갈데는 없다. 지운은 무턱대고 걸어갔다. 어디를 걷는지 지운은 몰랐다. 이처럼 외로운 길을 왜 혼자서 걸어야만 하느냐고 지운은 영심이가 자꾸만 원망스러워졌다. 영심이와 함께 활개를 치며 이 거리를 걸어볼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왼쪽 편 국도극장에서 사람들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영화 구경을 다니는 군중이 지운은 부럽기 한이 없다.

『아, 선생님!』

여성의 목소리 하나가 등뒤에서 들왔다다. 비교적 밝은 목소리 였다.

돌아 다보니 석란이었다. 석란의 옆에 정주도 서 있었다. 정주는 말이 없이 공손히 인사만했다.

『구경 오셨댔어요?』

석란이가 따라오며 명랑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아니요.』

지운은 물끄러미 두 여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한두 번 인사 쯤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지운의 흐린 표정이었다.

『정주 언니가 하도 고독해 해서 제가 극장구경 데리고 왔어요.』

『석란이도……』

정주는 곱게 석란을 흘겼다.

『선생님.』

『네.』

『아니, 선생님도, 대답이 왜 그처럼 고루해요?』

석란은 여전히 명랑하다.『선생님, 저희들에게 차 한 잔 사 주실 친절, 베풀어 주시겠어요?』

『사 드리지요.』

셋은 다방을 찾아 걸어갔다.

『원기가 통 없어 보이는데,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조금만 명랑하세요.』

지운은 대답을 않고 묵묵히 걸었다.

『선생님이 그처럼 무뚝뚝하시면 저희들이 무슨 죄나 진 것 같잖아요?』

정주가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지운을 대신하여 웃어 주는 웃음 같았다.

『창경원에서 헤어진 애인, 아직 못 찾으셨어요?』

『………』

『아이, 석란이도!』

정주가 옆구리를 콕 질렀다.

『그럼 어때?』

정주를 석란은 반박하고 나서,

『아직도 못 찾으셨담 저희들이 협력해서 찾아 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

지운은 그냥 걷기만 했다.

이윽고 조그만 다방 하나를 한길가에 발견하고 셋은 안으로 들어갔다. 지운을 위하여 석란은 위스키 티이를 청했고 자기네들은 홍차를 주문했다.

두 여성 앞에 지운은 우커머니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꾸뻑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주씨 출판 기념회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주는 다소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저는 그 대신 축사를 보내 드렸어요.』

석란이가 옆에서 일부러 샘을 내 보였다.

『감사합니다.』

지운은 또 석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차가 왔다. 지운은 위스키 티이를 절반이나 훌훌 마셨다. 목이 갈하다.

『정주 언니의 보고를 들음 암만해도 그 무슨 중령부인이 애인같이 생각된다구요.』

『애두 참……』

정주가 또 얼굴을 붉히며 석란을 막았다.『………』

지운이 후딱 시선을 들었다.

『여성들은 육감이 빠르답니다. 더구나 정주언니처럼 선생님을 아직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여성에게는……』

『석란이가 자꾸만 그런 말만 하면 난 갈테야!』

일어나는 정주를 석란은 부득부득 끌어 앉혔다.

그러나 표정이나 말처럼 석란의 마음은 밝지는 못했다. 어쨌든 단 하룻 동안이나마 부부가 아니었더냐고, 모든 것을 주고 받은 둘이의 비밀이 전설처럼 희미했고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 생생하면서도 지극히 희미한 기억의 틈사리를 타고 한 오락 신비로움 같은 것이 석란에게 왔다. 다사로운 신비감이었다.

석란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울음이 자신의 발랄한 포오즈와는 어울리지가 않았기에 울음은 석란의 가슴속에서만 서글픈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저도 그 여자 한 번 봤어요. 언젠가 임교수와 같이 타고 온 차 안에서…… 얌전한 사람이던데요.』

『오해를 하지 마시요. 그 이는 남의 부인입니다.』

지운은 비로소 변명을 했다.

『글쎄 오해람 다행이지만요.』

『석란인 알지도 못하고……』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아서 정주는 질색을 했다.

『석란씨!』

지운은 이윽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네 ―?』

『저는 석란씨에게 인간적인 죄를 지었읍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한참 동안 석란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죄는 제가 지은 계산이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모두가 제 불찰이었읍니다.』

『그렇다면 계산이 약간 틀려진 게 아냐요?』

『보상할 수만 있으면 그럴 생각으로 있지만……현재의 저로는 보상할 방도가 전연 없읍니다. 다만 석란씨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 따름입니다.』

『빌어 주지 않는 것 보다는 났겠지만……구태여 힘든 일 안하셔도 괜찮아요.』

석란은 쓸쓸히 웃으며,『그 보다도 집에 가끔 오셔서 생선 요리나 좀 하세요. 소설이나 써 가지고야 제 돈 내고 요리집에 가겠어요?』

참으로 좋은 말을 석란은 했다고, 지운은 그 한마디가 자기의 구미에는 딱 들어 맞는 것이다.

『정주 언니도 가끔 오지요. 셋이서 맛있는 음식 채려 놓고 우리 한 번 하하 웃어 봐요.』

『석란 고맙소!』

석란의 그 재치있는 인사가 지운에게는 진정 고마왔다.

『그러다가 좋은 신랑감이라도 있음 저 중신 좀 들어 주세요. 선생님이 중신을 드신다면 나 무조건 승낙할테야요.』

지운은 비로소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이런 것이 다 석란의 좋은 점이라고, 지운은 애써 석란에게 좋은 점만을 바라 보고 있었다.

『허술한 자유보다도 탐탁한 속박이 갑자기 좋아졌어요.』

그러한 석란의 성장을 지운은 저으기 놀라고 있는 것이다.

다방을 나서서 셋은 묵묵히 을지로 입구까지 걸어왔다. 석란과 정주는 명동 쪽으로 가야만 한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는 길이었어요?』

『그저……저기 좀……』

『무척 쓸쓸해 보이셔. 저희들 세 사람 중에서 선생님이 제일 고독해 보이셔. 웬 일일까요?』

그러면서 석란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고 헤어져요.』

지운은 가만히 석란의 손을 잡았다.

『생선 요리와 정주 언니와 그리고 석란이와……저의 집에 오시기만 하면 이 세가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지요. 쓸쓸해서 정말로 견디지 못하시면 오세요. 다소의 위안이 되실는지 몰라요.』

『고맙소!』

석란은 악수를 풀며,

『정주 언니와도 악수를 하셔야지.』

정주의 손 하나를 석란은 끌어당겨 지운의 손길에 쥐어 주었다.

『제일 쓸쓸한 사람이 선생님이라면 그 다음으로 쓸쓸한 사람은 정주 언닐 거예요. 그런 줄 알고 악수 하셔요.』

석란은 옆에서 주석을 달았다.『정주씨의 행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정주는 고개를 숙였다.

『인제 됐어요. 악수가 너무 길다는 건 한국인의 상식 부족을 말하는 거니까요.』

최후까지 석란은 마음의 울음은 보이지 않았다.

『안녕히……』

『안녕히……』

둘이는 명동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나믄 걸음도 채 못 가서 석란은 홱 돌아서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바이 바이! 미스터 지운!』

허수아비처럼 지운은 한길 한 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火焰[화염] 속에서 그날밤, 허 정욱은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 돌아 왔다. 취기가 있을 때는 장인 오 진국씨의 방에는 얼씬도 않고 이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허 정욱이었다. 장인이라는 생각보다도 은사라는 관념이 허 정욱에게는 한 층 더 강렬히 작용하고 있었다.

영심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대로 이십 만환의 축하금을 갖고 왔더라는 유민호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

『어디까지나 엉큼한 작자야! 누구의 마음을 떠 보려는 심산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면서 유 민호를 그대로 돌려 보낸 장인을 우러러 보며,

『선생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허 정욱은 여전히 오 진국씨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영심은 남편의 자리를 깔아 주며 모든 것을 성실한 남편에게 고백을 하여 남과 아울러 자기 자신에게 거짓없는 인생의 자세를 취하고자 결심은 하였으나 막상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하기가 영심은 무섭다. 아무런 것도 모르는 이 남편에게 격분과 절망을 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이어 영심은 좀 처럼 입을 열 수가 없다.

진실의 불행을 영심은 여기서도 한 번 더 절실히 느끼는 것이었다.

자기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 남편의 마음은 영원히 평온할 것이 아니냐고, 허위의 효용(効用)이 인간의 행복과 이처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어젯밤 영심이가 신명께 맹세한 것처럼 어쨌든 자기는 오늘 이기고 돌아왔다. 자기자신에 이기는 길만이 인간 수업의 최고 이상자라는 아버지의 교훈을 충실히 이행하고 돌아온 것이다. 이미 지운과는 영원한 이별을 짓고 온 영심이었다. 다시는 그러한 불미로운 행동이 자기에게는 있을 수 없다. 말로는 비록 둘이의 노력이 불가능할 때는 찾아오고 찾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영심에게 있어서 노력의 불가능이란 죽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심이가 이처럼 망설이고 있는데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고는 소리가 났다.

취기가 있으면 곧 잠이 들어 버리는 남편이었다.

『내일 밤……』

내일 밤으로 어쨌든 영심은 자기의 고백을 연기 할 수 밖에 없이 되었다.

그러나 내일 밤이 와도 진실의 불행과 허위의 행복 속에서 자기의 거취는 오늘밤과 마찬가지로 망설일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숨김 없이 이야기 하여 남편의 벌을 받기는 쉬웠다. 그 남편이 받는 불행한 충격이 영심은 무서운 것이다.

『어떻거면 좋아……』

이러한 난관이 자기 앞길에 가로 놓여 있을 줄을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영심이었다. 모든 것을 고백만 하면 될 줄 알았던 단순한 생각이 비로소 눈을 부비는 것이다.

영심은 이윽고 남편의 잠자리에 손질을 하고 조용히 몸을 일으키었다. 영심은 우선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있는대로 이야기하여 자기 거취에 대한 모든 적절한 지도를 받기로 결심을 했다.

할머니는 아랫방에서 이미 잠이 들어 있었고 아버지는 전등 밑에서 주역(周易)을 펼쳐들고 있었다.

『아버지, 아직 안 주무셔요?』

영심은 들어가서 아버지 앞에 공손히 꿇어 앉았다.

『응 ──』

책에서 시선을 들며,

『영심 선생이 아마도 어제의 복수전을 하러 온 모양 같은데……』

아버지는 주역을 문갑 위에 올려 놓았다. 바둑을 두자면 어린애처럼 기뻐하시는 아버지였다.

『아니예요, 아버지.』

영심은 잠시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마음이 너무 어지러워서……』

영심은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응?』

마음이 너무 고르지 못한 영심인 줄은 오 진국씨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심이가 이 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아버지 방을 찾아 온 것은 오늘 이 처음이다.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생겼니?』

오 진국씨는 애정을 가지고 물었다.

『네,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읍니다!』

『죄?』

『네, 죄를 짓고……저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해 나가지 못할 일을 저질었읍니다.』

『무슨 말인고……찬찬히 이야기를 해 보아라.』

오 진국씨는 안색을 가다듬었다.

영심의 긴 이야기를 오 진국씨는 끝까지 침묵으로 듣고 있었다. 태산이 무너져도 동하지 않은 오 진국씨의 태도였다. 불혹(不惑)을 지나 이미 천명을 받든 오 진국씨의 귀는 사리에 닿기만 하면 거역하지 않으려는 이순(耳順) 의 연륜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김 없이 잘 말해 주었다!』

그러나 오 진국씨의 음성은 떨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떨림을 딸에게 보인 것이 다소 마음에 걸려 오 진국씨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장해! 영심은 과연 내 딸이다!』

그러면서 오 진국씨는 눈을 지긋이 감아 버렸다. 벽에 등을 기대고 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무릎을 짚은 오 진국씨의 한쪽 주먹이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음, 바로 임 교수 아들이……그 소설책의 주인공이 바로 너희들이었다는 말이겠다!』

신음과 영탄이 한데 엄버무려진 비장한 목소리였다.

『일부종사의 미덕을 가르쳐 주신 할머니에게 뵈일 낯이 없고……삼강 오륜의 길을 깨우쳐 주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읍니다!』

영심은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울었다.

『너의 그 극심한 마음 고생이 측은하다만……네게 한 가지 잘못이 있다.

너는 끝끝내 지운을 만나지 않았어야만 하는 것이다. 동기는 여하튼 만나서는 아니되었다.』

『제 마음이 약했읍니다. 그렇지만 제가 만나려 갔던 동기대로 오늘 깨끗이 헤어져 왔읍니다.』『용해! 그러나 가지 않았어야 했다! 나쁜 놈 같으니라구……제 입으로 축사까지 해 준 친구의 부인을 꾀어 내려고 이렇궁 저렇궁……』

꾹 참고 있던 오 진국씨의 분노가 조금씩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열 번 찍어서 꺾히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꺾히는 편보다도 꺾는 편에 죄는 있는 거다. 임교수를 내가 만나마! 글을 쓴다기에 선비로 알았더니 유부녀를 꾀어 내는 패륜의 자식같으니……』

분에 격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이왕 무사히 지내버린 일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

일을 더 크게 만들지 않기를 영심은 진심으로 원했다.

『아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그 녀석이 또 너를 꾀어 낼 것이 분명해. 임교수가 마다하면 내가 대신 교훈을 시키고 오마! 너희들의 심정을 내가 못 알아 보는 바는 아니야. 그렇지만 어쨌든 친구의 부인이 아니야?

사내 대장부가 정에 못이겨 인간의 의리를 못알아 본다면 개 돼지보다 나은 게 무어야? 임교수는 지금까지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고?』

오 진국씨의 주먹이 차차 더 폭 넓게 떨리고 있었다.

『네 남편에게는 아무런 말도 마라! 네 뜻이 이미 그처럼 훌륭한 이상, 허군의 마음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고래로부도(婦道)라는 것은 남편의 심뇌를 덜어 남편으로 하여금 뜻한 바를 잘 받드는데 있는 것이다. 잘못 건드려서 쓸데 없는 오해를 사는 것보다는 그대로 덮어두고 자기의 실행(失行)을 보상하는 길을 취해야만 할 것이다. 알겠니?』

『네, 알아 들었읍니다.』

『임교수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건 내일 몇시 쯤 인고?』

『저녁 무렵이면 댁에 계실 거예요.』

『음, 내일 저녁 내가 다녀오마. 네 남편에게는 그저 인사차로 간다고 그래 두어라.』

『네.』

『음, 글을 쓴다는 놈이 남의 유부녀를 꾀어내? 간사한 놈 같으니……』

그것만이 오 진국씨는 분하다.

『이후에라도 만일 그 놈이 또다시 그런 꾀임 수를 쓸 때는 내게 꼭 알려다오. 내가 다시 가마!』

『………』

『알아 듣겠니?』

『네, 알아 들었읍니다.』『분한 노릇이다! 네가 꾀임에 넘어 창경원에 가지만 않았던들 임 교수의 자녀 교육을 한번 보기 좋게 비웃어 주고 오는 것을…… 네가 그만 따라가 버렸으니 내 체면이 서지를 않는구나!』

그것이 또 오진국씨는 분했다.

『네가 다시 그 놈을 만난다면, 그때는 너는 이 아비와 함께 죽어야 할 줄만 알아!』

『아버지, 안심하셔요!』

영심은 공손히 아버지의 뜻을 받들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위의 평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영심은 다시 이층으로 올라왔다. 남편의 잠은 골아 떨어져 있었다.

영심은 책상 머리에 앉기가 바쁘게 걱정이 또 하나 생겼다. 그것은 지운의 죽음이었다.

『잘못하면 그이는 죽을런지도 모른다.』

그러한 예감은 벌써부터 있었다. 그래서 오늘 헤어질 무렵에 영심은, 혹시 죽는 일이 있을 때는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의사를 완곡히 표시해 둔 것이었다.

지운의 죽음에 대한 영심의 위구심은 차차 더 커져만 갔다. 진실의 불행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찾아 헤매는 지운의 인생관은 허위의 평온을 끝끝내 고집한 영심을 위하여 전적으로 양보를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비장한 양보의 배후에는 영육의 완전한 포기로서 자기자신을 고뇌로부터 구출할 생각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 아닌가하고, 영심의 조바심은 밤하늘의 어두움과 더불어 자꾸만 확대 되어 갔다.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인 꿈 속에서 영심은 독약을 마시고 쓰러진 지운의 시체를 부여안고 가슴 아프게 흐느껴 울다가 깨어났다.

늦조반을 먹고 허 정욱은 운전수와 같이 오늘도 또 외출을 했다.

『오늘은 일선에 잠깐 다녀오겠소. 휴가가 끝나는대로 국방부로 전임이 될런지 모르겠기에 잠깐 다녀와야겠소.』

그런 말을 남겨 놓고 허 정욱은 집을 나섰다.

허중령이 지이프차에 올라 타는데, 덕흥상사의 사원 한 사람이 편지를 갖고 왔다.

『저 허 중령이신가요?』

젊은 사원은 편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말고 지이프차에 올라 탄허 정욱에게 물었다.

『그렇읍니다. 내가 허 정욱이요.』『아, 저 유 민호 사장의 편지를 갖고 왔읍니다.』

『편지?』

허 정욱은 봉투를 받아 들고,

『회답을 받아 오라는 거요?』

『아닙니다.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요?』

젊은 사원은 다시 돌아서갔다. 지이프차도 출발 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허 정욱은 편지를 뜯었다.

『축사?』

허중령의 표정이 후딱 어두워졌다.

편지 맨첫머리에 조금 큰 글자로 『축사』라고 써 있었다.

『동창생에게 청첩장 한 장 보내지 않는 군의 그 두터운 우정을 감사히 생각하며 늦게나마 군의 결혼을 위하여 축사 한 마디 드리는 바이네.──』

이러한 서두로서 편지는 시작되어 있었다. 실은 어제 다소의 축하금을 쌓아 가지고 인사를 갔었다는 이야기, 신랑도 신부도 외출하고 없어서 섭섭히 돌아왔다는 이야기, 축하금을 물리치신 오선생님은 역시 출중한 인격자라는 이야기, 돌아오는 길에 창경원 앞에서 신부를 보았다는 이야기, 그리고는 다소 고상하지 못한 취미이기는 하지만 창경원으로 영심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어떤 사나이와 밀회를 하는 광경을 보았다는 이야기, 근정전 뒷 뜯에서 포옹을 하며 울더라는 이야기를 쭉 느려놓은 후에,

『……기는 놈이 있으면 나는 놈이 있다는, 내 손에서 영심을 빼앗아간 허정욱 위에 나는 놈이 또 하나 있었다는 말이네. 이처럼 행복스런 결혼 생활을 어찌 축복하지 않고 견딜수가 있겠느냐 말이야. 그래서 감히 서투른 붓을 들고 두어 마디 축하의 말을 쓰는 것이지만 여자란 실로 앙큼한 동물이라고, 학덕이 겸비한 인격자 오 진국 선생의 따님이요 용감무쌍, 정의를 보고 눈을 감지 못하는 성실한 인간 허 정욱 중령의 부인이신 오 영심이가 결혼한 지 달포도 못되어 남편 아닌 딴 사나이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은 실로 한낮 허황한 꿈이 아니기에 늦게나마 축하하는 바이네. 가도가도 모를 것은 애욕의 길이었던가? 기지도 날지도 못하는 유 민호는 씀 ──』

와들 와들 떨고 있는 허중령의 커다란 손이 독수리처럼 편지를 구겨쥐며,

『스톱!』

하고 외쳤다.

『차를 돌려라!』

미아리 고개 위에서의 일이었다.

차는 미아리 고개를 화살같이 되돌아 내려오고 있었다. 얼룩얼룩 눈이 녹다 남은 비탈길이었다.

구겨쥐었던 편지를 잠바 주머니에 쓰러넣은 허중령의 떨리는 손길이 그대로 조금 더 뻗어 내려가자 허리에 찬 권총 케이스를 꽉 부여잡았다. 허중령의 그 불길과도 같은 감정의 무더기는 질풍처럼 달리는 지이프차의 속력과 더불어 차츰 더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허 정욱은 행동의 인간이었다. 오랬동안 생각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죽느냐 사느냐의 두 길 밖에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비오듯이 퍼붓는 총탄 속에서 적군과 마주 선 찰나와 똑같은 심정이었다.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자기는 죽는 것이다.

허중령은 편지 도중에서 그 창경원의 사나이가 임 지운인 줄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무심히 지나쳐 버린 대목 대목이 후딱후딱 허중령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결혼 식장에서의 영심의 현기증, 피로연 석상에서의 임 지운의 동심에 어린 노래, 임교수 부인의 눈물 젖은 얼굴, 출판 기념회에서의 영심의 꽃다발 증정 광경 등등……유 민호의 축사는 결코 허위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임 지운과 오 영심은 (愛人[애인]) 후편의 소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허중령은 자기 총탄에 쓰러지는 임 지운과 오 영심을 통쾌하게 상상하고 있었다. 자기의 이 감정의 무더기를 무마할 길은 오직 그것 하나 밖에 없었다.

『간부와 간부!』

눈자욱에 불길이 튄다. 차는 동소문 고개를 넘고 있었다. 혜화동 로타리를 지났다. 명륜동입구를 들어섰다. 돌다리를 건너 경학원 앞마당으로 들어 서자 무엇을 생각했는지 허중령은 갑자기,

『스톱!』

하고 차를 멈추었다.

『십분 동안만 여기서 쉬고 돌아가자. 담배 한 대 만 피울 동안……』

『네.』

운전수인 젊은 호위 군인은 길을 비껴 하얗게 눈을 인 솔밭 속으로 차를 가져다 세웠다.

허중령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 감정의 무더기를 그대로 지니고 영심의 앞에 나서기가 갑자기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허중령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됐다! 이제 들어가자.』

『네.』차는 이윽고 대문 밖에서 멈추고 허중령은 내렸다.

『곧 떠날테니 차를 돌려 놓고 기다려.』

『네.』

허중령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오 진국씨는 낮잠이 들어 있었고 할머니는 온돌방에서 돋보기를 쓰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리미질을 하고 앉아 있었던 영심이가 시선을 들었다. 남편의 무서운 얼굴이 자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안 가셔요?』

대답이 없다. 영심은 후딱 불안해졌다. 다리미를 놓고,

『연대에 다녀 오신다더니……』

『…………』

『왜 그러세요?』

『똑똑히 대답해 주시요!』

비로소 남편은 입을 열었다.

『네?』

영심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간단히 묻겠소. 간단히 대답을 해 주시요.』

『갑자기 무슨……무슨 말씀을……』

『어제 창경원에 갔었소?』

『아 ──』

영심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미 모든 것은 결정적인 판국에 온 것이다.

남편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허위의 평온은 이미 깨져 나가고 있었다.

『네, 갔었읍니다.』

한편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영심은 쓰러지려는 상반신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임 지운을 만났었소?』

『네……만났읍니다.』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겠소. 내 입으로 차마 그것을 물을 수 없소.』

영심은 고개를 푹 수그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저는 숨기지 않겠읍니다. 무엇이든 물어 주셔요.』

『하나만 더 물으면 되오. 몇번이나 만났소?』

『그저께와 어제……두 번 만났읍니다. 그렇지만 어제로서 최후의 작별을하고 왔읍니다.』

『만났다는 그 사실만이 내게는 중요하오! 이것을 읽어 보시오.』

구겨 넣었던 유 민호의 축사를 영심 앞에 홱 내던지고 바람처럼 휙 허중령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아, 잠깐만……』

영심이가 따라 나왔을 때는 이미 남편을 실은 차는 달리고 있었다.

『다행이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간 보람은 확실히 있었다. 영심의 몸에 손질 하나 대지않고 나올 수 있는 것은 확실히 그 한 꼬치의 담배의 혜택이었다.』

허중령은 와들와들 치를 떨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전찻길까지 나왔을 때, 운전수는 물었다.

『남대문 통……』

차는 종로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허 정욱은 담배를 피우며 이 화염과 도 같은 감정의 덩어리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무슨 커다란 파괴 하나가 자기의 손으로 이루워져야만 하였다. 그 파괴의 대상으로 유 민호와 임 지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유 민호의 축사대로, 적어도 학덕이 겸비한 인격자 오 진국 선생의 딸이요. 허중령의 아내가 딴 사나이와 눈을 마추고 있다는 그 사실만이 허 정욱은 분한 것이다.

유 민호만 없애 버리면 이러한 추문(醜聲)이 이상 더 퍼지지 않을 것이다.

유 민호의 입을 허중령은 영영 막아 버려야만 하였다.

오로지 그래서 달려가는 허 정욱이었다.

십분 후, 지이프차는 덕흥상사 앞에서 허 정욱을 내려놓았다. 허 정욱은 잠바의 깃을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 민호는 사장실에 있었다. 정중한 인사를 유 민호는 하였으나 입가에는 한 줄기 비웃음이 노골 적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 승리자와도 같은 비웃음을 바라보자 허 정욱은 다짜고짜로 허리에 찬 권총을 꺼냈다.

『앗……허, 허군……』

사무탁자 앞에서 유 민호는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종이장처럼 해말쑥해졌다.

『위, 위험하네, 위험해!』

총구멍을 비끼노라고 유 민호는 두 손바닥으로 총뿌리 앞을 연방 막으며,

『말로……말로 하세! 그런 건…… 그런 건 넣어 두고……』사장실로 들어 서서 아직껏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허 정욱이기에 유민호는 그 무서운 표정만을 상대로 할 수 밖에 도리가 없다.

『떠들지 말아, 떠들면 빨리 죽는다!』

『아아, 떠들지 않을 테니……그것만은 좀 넣어 둬!』

유 민호는 새파래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창경원에 들어가서 편지 속에 있는 광경을 본 것은 너 혼자냐?』

『아, 나 혼자다.』

『편지를 갖고 온 젊은 사원이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는가?』

『모, 모른다.』

『너 이외에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없다! 누구 보고도 나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그렇다면 너 하나만 죽으면 되는 거다!』

『아아, 허군! 무슨……무슨……소리를?』

『보잘 것 없는 몸이지만 허 정욱 중령의 명예와 오 진국 선생의 체면을 보존하기 위해서 너는 죽어 다오!』

허중령의 총뿌리가 휙 들리며 정확한 조준으로 유 민호의 가슴을 겨누었다.

『오오, 허군……』

총뿌리를 피하여 유 민호는 방바닥에 넙적 엎드려 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리운 손길을 펴 합장을 했다.

『절대로……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을테니……살려 주게. 나를 쏘면 자네도 죽을 것이 아닌가?』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다.』

『오오, 정욱군! 군과 내가 무슨 원수를 져서 이래야만 하는가? 자네의 명예와 오선생님의 체면을 위하여 영원히, 영원히 비밀(秘密)은 지킬테니.』

허 정욱은 물끄러미 유 민호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진정으로 허 정욱은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불명예와 영심의 사랑을 이미 잃어버린 허무 속에서 어찌 다시금 삶의 길을 택할 수 있으랴.

『나만 입을 닫치고 있으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은가? 이처럼 살고 싶어하는 유 민호 하나 죽였댓자……』

그러면서 유 민호는 네 발 걸음으로 벌벌 기어 오자 허 정욱의 두 다리를 껴안고 얼굴을 부볐다.그 순간, 허 정욱은 무기를 거두고 휙 돌아서서 총총히 사장실을 나섰다.

『안국동, 임 지운의 집으로!』

지이프차에 올라 타며 허 정욱은 외쳤다.

안국동을 향하여 차를 모는 동안 허 정욱은 여러 번 허리에 찬 무기를 어루만져 보았다. 이번에야 말로 그 무기가 사용될런지 모를 일이라고, 자기의 절실한 감정의 무더기가 그 조그만 화염(火焰)과 함께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이유여하가 허 정욱에게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친구의 아내를 꾀어 내다가 품에 안았다는 그 패덕의 행동이 문제였다. 자기가 참으로 정의를 보고 눈을 감지 못하는 위인일진대 「문답무용」(問答無用)의 한 마디로서 자기의 정의감을 행동화하면 그만이었다.

안국동 네거리에서 차는 곧장 골목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윽고 지운의 집 대문 밖에서 차는 멈추고 허 정욱은 내렸다. 대문을 향하여 뚜벅뚜벅 허정욱은 걸어 들어갔다.

걸어 들어가던 허 정욱은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두 번 했다. 그리고도 또 대문은 열지 않고 잠시 서 있던 허 정욱이가 휙 돌아서 나오면서 허리에 찼던 권총을 케이스와 함께 떼어 운전수에게 내 주며,

『맡아 두어.』

『네?』

젊은 군인은 수상히 여기며 권총을 받아 자기 왼편 허리에 찼다. 호위병을 겸임하고 있는 이 운전수도 자기 오른편 허리에 똑같은 권총의 필요는 느끼지 않고 있었다.

허 정욱은 이윽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집에는 지운과 복순이가 있었다. 오늘은 휴강인 임교수는 목욕을 하러 갔고 임교수 부인은 서대문 친정 편 일가댁을 찾아가고 없었다.

지운은 자기 방으로 허 정욱을 맞아 들였다. 허 정욱은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표시하는 무서운 얼굴로 지운과 마주 앉았다.

허 정욱의 표정에서 지운은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 온 이유를 임형은 아마도 모를 것이요.』

그 말에 지운은 조용히 머리를 들어 허 정욱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알 것 같습니다. 영심씨가 이야기를 한 것이겠지요.』

『아내의 입에서 들은 것은 아니요. 임형과 내 아내의 밀회 광경을 본 사람이 있소.』『아, 그렇습니까!』

지운은 이미 떠들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에 가느다란 홍조가 한 줄기 떠올랐을 뿐이었다.

『창경원에서 두 번 만났다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제 헤어질 때는 영원히 만나지 않기로 하고 헤어졌읍니다.』

『나는 지금까지 임형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있었소.』

『나도 허형을 존경하고 있었읍니다.』

『오 영심은 허 정욱의 아내요.』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소.』

『그것도 잘 알고 있읍니다.』

이런 쓸데 없는 이야기를 느려놓으려고 온 허 정욱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게 지운의 그 온순한 태도에 접하는 순간, 어쨌든 일단은 사리를 가려 놓아 둘 생각이 허 정욱에게는 들었다.

『최후의 작별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내에 대한 임형의 사랑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요!』

『사랑은 노력으로서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상 더 만나지 않겠다는 것 뿐이지요.』

그 순간, 허 정욱의 표정이 그 무엇을 최후적으로 결정짓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한 여자를 두 사나이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렇다면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임형과 나와, 어느 편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솔직히 대답해서 허형이 없어져 주었으면……하고 생각하지요.』

『무엇이?』

허 정욱의 손길이 휙하고 허리로 갔다. 만일 그 손길이 무기가 잡혔던들 사건은 간단히 처리가 되었을런지 몰랐다.

그러나 허 정욱의 손길에 무기는 잡히지 않았다. 자기 감정의 무질서한 폭발을 사전에 경계했던 자기의 행동이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뉘우쳐졌다.

『철썩……철썩……』무기를 잡지 못한 허 정욱의 커다란 손길이 미친 낫(鎌)처럼 지운의 뺨을 무섭게 내갈기고 있었다.

『어마나? 저 일을……』

댓돌 아래서 엿듣고 섰던 복순이가 철썩철썩 매를 얻어 맞고 있는 사람이 지운임을 알아보고 방문 밖에서 공둥공둥 뛰었다.

허중령의 그 호된 군대식 기압을 지운은 조용히 받고 있었다.

『남의 유부녀를 꾀어 낸 작자가 도리어 권리를 주장해?』

허 정욱은 손길을 거두며 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칠대로 거칠어진 허 정욱의 어조였다.

『영심씨는 허형보다도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운은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울긋불긋 손가락 자리가 지렁이처럼 뻗어 있었다.

『아니다! 영심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심은 너를 버리고 나를 택한 것이다. 영심의 이성은 나를 사랑했다.』

『영심씨의 감정은 나를 사랑하고 있지요. 감정을 상실한 애정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허형은 결국 영심씨의 허수아비만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려보내 주시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없어져야만 하는 때는 허형이 없어져 주기를 나는 바랍니다.』

허 정욱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아내를 유인해 낸 간부가 남편더러 없어져 달라는 것이다.

허중령의 의분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나의 정의감은 당장이라도 군을 없애 버리고, 싶지만……』

허 정욱의 음성이 무섭게 떨고 있었다.

『나는 신사다! 공평한 승부로서 두 사람 중의 하나가 없어질 방도를 취하기로 하마!』

『무슨 뜻이요?』

『결투를 하자! 이것은 허 정욱의 군인 정신이 발휘하는 최대의 자비심이다!』

지운은 물끄러미 허중령을 쳐다보다가,

『그것은 무의미한 행동이요. 결투의 필요성을 나는 느끼지 않았오.』

『승부에 자신이 없다는 뜻인가?』

『아니요! 중세기와 같은 봉건적 사회에서는 결투로서 한 여성의 운명을좌우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시대가 다르오. 체면이라든가 명예를 위해서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도 싫고 바치기도 싫소.』

『비겁한 위인이다!』

그 말에 지운도 훌쩍 자리에서 일어서며 허 정욱과 딱 마주섰다.

『그 말을 취소하시요!』

『취소 못하겠다! 비겁한 인간을 비겁하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겁해서 결투를 피하는 것이 아니다. 결투로서 오 영심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은 비극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얘이, 사내답지 못한 자식아!』

허중령의 손길이 철썩하고 갔다.

『글 쓰는 자식들은 모두가 너 같은 겁쟁이냐……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며 남의 집 유부녀의 엉덩이나 살살 따라다니는 썩어빠진 연체동물(軟體動物)들아!』

『말을 삼가라!』

지운의 얼굴에는 비로서 대항의 굳은 의지가 알알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리어 내가 말을 삼가? 너희들의 그 지지리 못난 문약(文弱)이 오늘의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요모양으로 약화시킨 줄을 알아야 해! 목숨이 아까우면 아깝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 너희들의 슬로오건인 진실일 것이 아닌가?』

지운의 대항 의식이 극도로 앙양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표시하는 지운의 어조는 이미 침착해 졌다.

『결코 비겁하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 주면 될 것이 아닌가?』

『결투를 하겠다는 말이냐?』

『그렇다! 허 정욱과 더불어 임 지운은 당당히 싸워야만 할 것을 결심했다.』

『무기는 무엇에 자신이 있는가?』

『권총에는 자신이 있다!』

권총은 쥐어도 보지 못한 지운이었다.

『그럼 나가자!』

허 정욱은 문을 박차듯이 열고 앞장을 서서 대문 밖으로 나갔다.

지운은 조용히 넥타이를 매고 옷을 갈아 입었다. 죽음을 절실히 원하고 있던 지운이었다.

『아이구, 어딜 가세요?』

복순이가 따라 나오면서 지운의 손길을 잡고 공둥공둥 뛰면서 울어댔다.지운은 복순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오시거든 전해다오. 지운은 절대로 비겁한 인간은 아니었다고.』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나가자 지이프차에 올라탔다. 차는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