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16장
處女 [처녀]
편집1
편집『그래 마담의 딸이 어떻게 생긴 아가씬가, 한 번 보여 줘요. 절대로 손은 대지 않을 테니까 ─』
저녁 식사와 함께 반주를 나누면서 유민호는 어린애처럼 졸랐다. 적당한 육체의 피로가 마담로우즈의 화려한 얼굴을 한층 더 윤택있게 만들고 있었다.
『개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당신의 눈에는 암컷만 보이는가 봐.』
『그런게 아니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점잖아서 의사표시를 하지 않을 따름이지, 사나이들의 마음이란 거지반 다 똑같이 돌아가고 있는 거야.』
『아전인수(我田引水)도 분수가 있지, 사람들이 다 당신 같은 악당인 줄 알아?』
『모르는 말이야. 옛날부터 남녀 칠세에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고 우리의 조상인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남성의 눈에 띠일 것이 무서워서 장옷을 쓰고 나돌아다녔어. 왜?……사나이들의 마음이 다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증거야. 교양이라든가 도덕이라는 것이 간신히 그것을 누르고 있지만 그까짓 교양 도덕이 무슨 힘이 있는 줄 알아? 한낱 무기력한 도금(鍍金) 일 뿐이야.』
『아이구, 거 무서워서 어떻게 나돌아다녀? 인제부터라도 장옷을 써야겠네.』
『괜찮아. 옛날과는 달라서 장옷은 커녕 벌거벗고 다니지 못해서 야단이야. 여름철에 좀 봐요. 유방이 들여다 보이는 잠자리 날개 같은 나이론 샤쓰, 겨드랑이털이 부수수 들어나 보이는 팔소매 없는 원피이스, 빈대한테 물린 자리가 울긋불긋 꽃무늬를 그리고 있어도 가리우고 싶지 않는 그들의 다리, 다리, 다리……』
『참 세상이 어째서 그처럼 변했을까?』
『여성들이 남성의 악마성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떠서 그것을 도발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야. 그리고 그것은 이미 악마성이라고 불리워지기에는 너무나 떳떳한 인간성임을 그들이 발견한 까닭이야.』『아이구, 요 귀여운 악당아. 그거 저 좋을대로만 이야기하면 되지.』
그러면서 마담은 젓가락으로 유민호의 볼을 한 번 콕 찔렀다.
『어서 마담의 딸을 보여줘요. 마담의 작품이니까 걸작은 걸작이겠지.』
『없어. 외출하고 없어.』
걸작이라는 한 마디에 마담은 선뜻 화장대 설합에서 라이카 판 사진 몇 장이 들어있는 조그만 흙 봉투를 꺼내 주었다. 저번날 지운이와 함께 정릉 계곡에서 찍은 기념 사진 한 뭉치였다.
『아, 이 학생이……』
저번날 오영심과 자동차를 같이 타고 왔었다는 말을 유민호는 하면서,
『무척 깔끔하던데……』
『녹녹치 않을 걸!』
『두고 봐야지.』
『그만하면 걸작이지?』
『타작은 분명 아니야.』
『건드렸다가는 죽을 줄 알아요!』
『죽을 각오를 하면 되겠군?』
『악당!』
『그래 이 사나이는 누군데?』
『석란의 임자가 될 사람이야. 소설가 임지운을 몰라?』
『소설가?……아이구, 따분해. 배가 고프면 쌀먹을 생각은 못하고 자존심으로 요기를 하는 특수한 동물이야. 그래서 한국의 식량사정은 다소의 도움을 보고는 있지만.』
『입도 나쁘지!』
『그러나 악마의 이해자로서 다소의 존경은 하고 있지. 응? 이게 누구야?……』
사진 한 장을 골라 쥐고 유민호는 시선을 들었다.
정릉 계곡에서 석란과 더불어 포옹의 윤리 문제로 장시간 논쟁을 하던 중년 신사 내외의 사진이 유민호 손에 쥐어져 있었다.
2
편집마담의 설명으로 유민호는 이 중년 부부의 사진이 찍혀진 경로를 알았다.
『도대체 누군데 그래?』
『사나이는 모르지만 여자는 알아.』『악마의 손에 걸렸던 여자로군.』
『응, 헤어진 여자다. 인숙이 엄마 ─』
『얌전하게 생겼는데……』
『분명히 부부라고 그랬었지?』
『분명히! 그래서 지운의 편에서도 약혼자라고 그랬다니까 ─』
『음 ─』
유민호는 물끄러미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민호는 갑자기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일종의 상쾌한 질투였다. 더구나 같이 찍혀진 사나이가 점잖은 도덕가라는 한마디가 유민호의 가슴속에 불길을 질러 놓았다. 자기와 헤어졌어도 결혼은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인숙 엄마가 다른 사나이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이 유민호에게는 그지없이 불유쾌했다.
『왜 갑자기 불쾌한 얼굴을 하는 거야? 저 먹긴 싫어도 개주기는 싫다는 말인가?』
『말인즉 꼭 맞았다.』
『사내들이란 참 언어도단이지! 헤어진 계집애까지 신경을 쓰고 있으니, 아이고, 지긋지긋한 욕심이야!』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내탓은 아니야.』
유민호는 벌떡 일어서서 모자를 썼다. 여덟 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앙클한 계집! 이렇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시집을 가?』
동대문으로 차를 몰면서 유민호는 질투에 불타고 있었다. 시집을 가건 안 가건 무슨 상관이냐고, 언어도단인 자기자신을 뻔히 깨달으면서도 유민호의 감정은 평온하지가 못했다.
『흥, 도덕가?……』
도덕이라든가 성실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하는 말처럼 유민호로 하여금 적개심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차라리 자기와 같은 사나이에게 시집을 갔던들 유민호의 감정은 이렇듯 불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질투심은 다시 없는 홀몬제다!』
실로 오랫만에 맛보는 질투심이었다. 낡아빠진 장난감처럼 아무런 매력도 없던 인숙 엄마의 육체의 구석구석이 도덕가라는 상대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신선하게 빛을 낼줄은 진정 몰랐다. 그리고 이 질투심을 잘 육성해서 활용하는데 자기다운 애욕의 철학이 있는 것이라고 유민호는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동대문밖 창신동을 찾았으나 인숙 엄마가 들어 있던 셋방은 얼마전부터 비어 있었다. 어디로 이사해 갔는지 주인도 모른다고 했다.
『어디서든지 한 번은 만나겠지.』
활줄 같은 긴장이 풀리며 유민호는 곧장 청파동 자택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일단 풀렸던 긴장은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채정주를 생각함으로써 다시금 소생하기 시작하였다. 인숙 엄마에 대한 질투심을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는 채정주 위에서 발휘시켜 본다는 것은 실로 광적(狂的)에 가까운 논리이기는 했으나 유민호는 지금 논리의 세계를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논리를 무시한 감정의 쾌락!』
유민호 철학의 궁극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바깥 채 법률 사무소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현관 앞에서 차를 멈추 었다. 운전수가 나왔다.
『아버지!』
채정주의 손목을 끌고 인숙이가 뛰쳐나왔다.
3
편집『선생님과 석란과의 결혼 문제 때문에 제가 굉장한 마음의 타격을 받을 것같이 생각하시는 건 선생님의 오산일 거예요. 제게는 연애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제 자존심을 울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비교적 수월하게 임지운은 잊어버릴 것이라고 지나간 날 해질 무렵의 동대문통에서 지운과 더불어 아름다운 최후의 이별을 지었던 채정주였다. 그리고 끝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청파동까지 걸어올 수 있는 채정주였다.
채정주는 유민호 변호사와 같은 청파동에 살고 있었다. 모 제약 회사 영업부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수입이 신통치 않아 육·이오 이후 부산 피난시절부터 정주는 쭉 가정교사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환도후 유민호 변호사의 전처 딸 인숙을 맡게된 것이다. 대우도 비교적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집이 가까운 것이 정주에게는 편했다.
인숙이가 무척 정주를 따랐다. 어머니를 잃은 인숙의 외로움이 눈물겨워 인숙이가 붙드는 대로 태반은 인숙이와 같이 자고 같이 먹었다. 그것을 또한 유번호사도 환영했다. 살림살이에 쓰이는 돈을 식모에게 맞기는 것보다는 정주에게 맡기는 편이 정확하고 조리가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가정교사라기 보다도 가정부의 지위를 정주는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식모가 두 사람, 법률 사무소에 있는 서생 하나가 먹고 잤다. 그만큼 정주의 책임이 컸으나 그것도 유번호사가 결혼만 하면 벗어날 수 있는 책임이기에 유종의 미를 정주는 걷우려고 하는 것이다.
사업 때문에 태반 집을 비워두고 다니는 유변호사였다. 그러나 가끔 가다가 집에 들어와서 자는 날이면 참으로 좋은 인숙의 아버지였다. 좋은 아버지는 따라서 좋은 남편도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어째서 인숙 엄마와 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유변호사의 사회적 지위로 보던지 조금도 헤실픈 데가 없는 그의 인품으로 보던지, 여성들의 결혼난관 오늘날처럼 극심한 사회에서는 그리 쉽사리 찾아질 존재는 아니었다. 그래서 정주는 유변호사의 은사의 딸이라는 한 여성을 세속적인 의미에서 부러워도 했다.
그것은 물론 애정 문제를 토대로 한 선망은 아니었다. 연애 없는 결혼이 반드시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과 연애 있는 결혼이 반드시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채정주의 총명은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임지운과 관계에 있어서 채정주는 자기가 일종의 연애 불 적격자(戀愛不適格者)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았다. 연애 행동에는 일종의 노예적인 근성이 필연적으로 요청되지만 채정주의 자존심은 그것을 허용하지 못했다.
차라리 연애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심을 붙들고 고독하게 사는 편이 좀더 가치가 있었고 좀더 행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임지운이라는 사나이는 자기의 자존심을 문질러 준 하나의 불유쾌한 존재로서밖에 더 생각키워 지지가 않았다. 이리하여 임지운을 단념하는데 있어서 채정주는 남처럼 오랜 시일을 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보고 싶었나?』
『네, 보고 싶었어요.』
인숙을 안고 유민호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채정주가 가방을 들고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상당한 넓이의 정원을 가진 이층 적산 주택이나. 팔 조 온돌과 십조 다다미가 이 가정의 내실로 되어 있었다. 다다미는 양실로 꾸며져 주로 유민호의 가구가 놓여있었고 온돌에는 인숙의 잔자부런한 도구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구, 아버지 수염 아파요.』
인숙이 볼을 부벼대는 유민호의 입술을 인숙은 손으로 떠밀었다.
『맛나는 것 줄까?』
『네, 빨리 주세요.』『채선생, 가방 속에 크리임 초콜렛이 들었읍니다.』
정주는 가방을 열고 초콜렛 한 뭉치를 꺼냈다.
『인숙이가 자지않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구나.』
정주는 아랫방 찻장서 접시를 꺼내다가 소탁자 위에 초콜렛을 소담하게 담아 놓았다.
『채선생님도 같이 앉아 잡수시요.』
『네.』
인숙이와 정주는 초콜렛을 녹이고 있는 동안에 식모가 밀크티를 석 잔 끓여 가지고 들어왔다.
유민호는 양복저고리를 벗어 장 속에 걸고 그 위에다 까운 식으로 된 다갈색 잠옷을 걸치면서 소탁자 옆 암녹색 비로드 소파에 걸터 앉았다. 담배를 피워 물며,
『인숙이가 엄마를 만났다지?』
『응.』
『이 담엔 만나지 말어.』
『왜요?』
『엄마는 나쁜 엄마야. 인숙일 버리고 간 엄마니까 ─』
『……』
정주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면서 인숙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주는 차를 마시며 조용히 웃었다. 초록색 스웨터의 채정주의 모습이 요즈음에 와서는 다소 우울해 보이는 것이 유민호에게는 좋았다. 명랑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정상적인 상태에는 틈사리가 없다. 감정이 이미 병들어 있는 것이라고 채정주의 우울을 유민호는 그렇게 해석하였다.
『채선생이 요즈음 무척 피곤해 보이십니다. 인숙이 단련이 고단하신가 본데……』
『아니요. 고단은……』
『약 잡수셨어요?』
『네.』
『열은 많습니까?』
『다소 있지만 괜찮아요.』
유민호는 묵묵히 일어나며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전기곤로에다 코드를 꽂고 약장문을 열었다. 크고 작은 주사기가 서넛 들어 있는 알마이트 벤또곽에 물을 붓고 뻘개진 곤로 위에 올려 놓았다.
정주는 찻잔을 놓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약장앞에 쭈구리고 앉아서 유민호는 주사약을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필요 이상의 사교적인 말을 하지 않는 한 사람의 충직한 사나이의 모습을 처녀 채 정주는 유민호에게서 본 것 같았다. 그것은 결코 오늘 뿐이 아니었다. 무척 친절하면서도 그것을 조금도 생색내지 않았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곧잘하는 친절의 보수 같은 것은 추호도 요구하는 기색이 없다. 그래서 채정주는 유민호라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무척 견고한 인품이라고도 보아 왔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에게는 통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였다.
『선생님, 괜찮아요. 그만 두세요.』
정주는 일어서서 곤로 옆으로 걸어갔다.
『그만 둬요?』
유민호는 충직한 표정을 하며 약장 앞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대 맞으시면 좋을 텐데요.』
『아이,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시다면……』
유민호는 도로 주사약을 약장에 넣었다. 그러나 주사기를 담은 벤또곽은 이미 보글보글 끓어 나기 시작하였다. 채정주는 미안해졌다. 그 조그만 물거품이 툭툭 튀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며 자기는 지금 유민호의 인간적인 친절을 이유없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라고 뉘우쳐졌다.
5
편집『아마도 채선생은 내 솜씨가 믿어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유민호는 무시당한 친절을 조금도 나무람이 없이 빙그레 웃으며 전열선(電熱線)에 꽂았던 코드를 빼려는데,
『아이, 선생님, 그래도 좀더 끓여요.』
처녀는 마침내 졌다. 스물 세 살이 지닌 버지니티(處女性[처녀성])의 한도(限度)였다. 그리고 그정도의 채정주의 한도를 유민호는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뽑았던 코드를 유민호는 다시금 묵묵히 꽂으면서,
『인숙이 엄마가 몸이 허약해서 내 손으로 주사를 많이 놔 주었답니다.』
『왜 헤어졌어요?』
기대했던 질문이 마침내 채정주 입에서 흘러 나왔다. 아까부터 유민호는 인숙 엄마의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오늘밤의 화제로 삼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나이와 달아났답니다.』
자기가 난봉을 피워서 다라났다는 말은 마담로우즈 같은 여성에게나 효과가 있는 것이지 처녀 앞에서는 금물이다.
『어쩌면?……』
정주가 과연 관심을 보여 왔다.
『자기 아내를 남에게 빼긴다는 건 남자의 세계에서는 다소 수치스런 이야기랍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엄숙해졌다. 채정주 같은 여성 앞에서는 지나치게 화려한 분위기는 금물이다. 그러한 들뜬 분위기는 정주로 하여금 갑옷 동물처럼 목을 움츠러뜨리게 할 우려가 다분히 있다.
『선생님은 그분을 지금도 때때로 생각하세요?』
『때때로가 아니지요.』
유민호는 쓸쓸히 웃었다.
그 지극히 쓸쓸한 웃음이 채정주의 가슴에 거스름없이 순수하게 왔다. 거스름을 거슬러 줄만큼 채정주는 경험도 없고 불량하지도 못했다. 다만 채정주의 비교적 차거운 성격이 다른 여자들 처럼 값싼 동정을 표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지금도 나는 인숙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답니다. 하하하…… 싱거운 사나이라고 흉보지 마세요.』
그러나 그와는 반대 효과가 채정주의 감정 속에서 차차 움터가고 있었다.
싱겁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유민호의 성실면만이 확대되어 갔다.
『이쁜 분이었나 봐요.』
여성들에게 있어서 미추(美醜)에 대한 관심처럼 큰 것은 없다. 그리고 채정주도 여성이었다.
『이쁘지는 못했읍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참된 애정은 이쁘다 밉다, 하는 것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요. 용모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한 애정에는 깊이가 없읍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미혼 처녀의 굳건한 이상을 불태우는 주옥 같은 말이었다. 정주는 비로소 유민호의 참된 인간성을 발견한 것 같았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서 단 몇시간이라도 접촉해 본 뭇 남성은 모두가 다 헤실픈 찬미자였다. 임지운의 애정도 결과로 보아서는 오 십 보 백 보의 일이었다.
그렇건만 과거 두 달 남짓한 시일에 있어서 채정주를 대하는 유민호에게는그러한 헤실픈데도 없었고 그러한 값싼 찬미도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다 못 설명 없는 친절 뿐이었다.
『자아, 인제 다 끓었읍니다.』
유민호는 코드를 빼놓고 핀셋으로 주사기를 끓는 물에서 집어냈다.
6
편집열 시가 거지반 되었다. 같은 청파동이지만 거리 관계로 정주가 돌아갈려면 지금 일어서야만 했다. 그러나 이십 시이시이의 굵다란 주사기에다 칼슘과 사르보르를 섞어서 유유히 넣고 있는 유민호의 호의를 무시하고 일어설 수는 차마 없었다. 십분쯤 늦어져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 선생님 아픔 어떻거나?
인숙이가 정주의 팔에 매어달린다.
『아프긴……』
인숙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유민호의 뒤를 따라 소탁자로 왔다.
『자아 ─』
유민호가 정주를 재촉하였다. 정주는 다소 어색한 감을 느끼며 스웨터를 벗고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렸다.
유난히 흰 살결을 정주의 팔은 갖고 있었다. 솜털이 보수수 들여다보이는 전등 밑 탁자 위에 팔을 뻗치며 정주의 굳건한 처녀성이 얼굴을 붉혔다. 지나간 날 임지운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피부의 일부였다.
정주는 유민호의 손길을 미리 방지하는 의미에서 얼른 한 손으로 자기 팔고 비 위를 누르고 주먹을 쥐어 정맥에 피를 모았다. 정맥이 새파랗게 두드 러졌다.
그러나 유민호는 좀처럼 주사기를 대지는 않았다. 물끄러미 정주의 신선해 보이는 피부를 들여다보면서 왼손으로 정맥 위를 서너번 쓸어내렸다. 의사들이 곧잘하는 솜씨라고 정주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유민호는 기실 손바닥에 느끼는 다사로운 감각을 향락하고 있었다.
애욕의 경험이 없는 처녀의 피부로서는 상상도 못할 악마적인 음탕한 감각이었다.
『어서 놓세요.』
정주는 시간의 경과에 신경을 쓴다.
『아 ─』
유민호는 감각의 세계에서 펄떡 깨어나자 알코올솜으로 닦아 내고 혈관을뚫었다. 깜붉은 핏줄기가 한 오락 소르르 주사기로 스며들다가 다시금 혈관 속으로 휙 사라졌다.
『아이 무서워!』
인숙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웠다.
『주먹을 펴고……손도 놓고……』
『선생님 아주 손이 익으셔요.』
『모두 다 인숙 엄마의 덕택이랍니다.』
인숙 엄마라는 한 여성의 존재를 정주는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숙 엄마를 그처럼 골똘히 생각하시면서 어떻게 선생님 결혼을 또 하실 생각이 나셨어요?』
『아, 이번 결혼 말입니까?』
『네.』
유민호는 쓸쓸히 웃으며,
『뭐라고 할가요?……일종의 의리 결혼이지요.』
『의리 결혼이라고?……』
『은사의 말씀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요.』
정주는 놀랐다.
『그럼 서로 애정같은 것은?……』
『별로 없지요.』
정주는 또 한 번 놀랐다. 이 시대에 그런 형식의 결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 였다. 정주는 차츰차츰 유민호라는 인간을 동정하기 시작하였다. 칼슘이 화끈화끈 정주의 전신을 감돌고 있었다. 막혔던 코가 수르르 풀리는 것같은 흐뭇한 체온이 기분에 상쾌하다.
『아이. 다 들어갔다.』
인숙이가 옆에서 외쳤다.
유민호는 한 손으로 정주의 새하얀 피부를 누르며 바늘을 뺐다.
정주가 다시 블라우스 소매를 내리고 스웨터를 입었을 때는 열 시를 십 분이나 지났을 때였다.
『인제 저는 가야하겠어요.』
정주는 일어섰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던가요?』
유민호는 능청맞게도 팔뚝시계를 들여다보며,
『십분이 넘었는데 괜찮겠읍니까?』
『괜찮아요.』『인숙이와 같이 주무시고 가시지.』
그런데 인숙이가 달려붙으며,
『선생님, 자고 가요. 어젯밤에 하던 아리바바 이야기 마저 해 주세요.』
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유민호는 생각이 난듯이,
『아참, 채선생께 선물을 드린다는 걸 깜빡 잊어먹었군요?』
『…………』
정주는 무척 초초하면서도 시간이 없다고 뛰쳐 나갈 수는 도저히 없었다.
7
편집인숙이와 같이 자고 갈 각오 없이는 일분 일초도 그대로 서 있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정주는 바눌처럼 아프게 느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민호는 우선 주사기부터 유유히 약장에 넣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선물을 주려거든 어서 주었으면 좋으련만도 그렇다고 이편에서 재촉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열 시 십 오 분이 되었다. 자고가느냐, 돌아가느냐? 정주가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유민호가 가방을 들고 정주 앞으로 걸어왔다.
『채선생이 좋아하실는지 어쩔는지는 모르지만, 어미 없는 인숙을 그처럼 귀여워 해 주시는 채선생을 생각하면……』
『아이, 선생님도 무슨 말씀을……』
『마음에 없는 말은 될 수 있는대로 하지 않고 살아 볼려고 하지요.』
그 한 마디와 함께 가방 속에서 조그만 케이스 두 개를 꺼냈다. 똑같은 케이스였다. 케이스 속에 순금 목걸이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내가 잘 아는 금은상이 부산에 있지요. 그래서 하나는 이번 결혼하는 사람에게 주고 하나는 채선생께 드릴려고 사 갖고 왔읍니다.』
『어머나……』
정주는 눈앞이 휘황했다. 더구나 약혼자와 꼭같이 자기를 대우해 준다는 사실이 정주의 자존심을 흐뭇하니 만족시켰다.
『그렇지만 제가 그런 걸 어떻게 받아요?』
무엇인지 정주는 무섭다. 정주는 경계를 하는 것이다.
『왜 못 받습니까? 인숙을 생각하면……』
『사소한 물건이면 모르지만……』
『요즈음 금값은 대단히 싼 편이지요. 몇푼 짜리되지 않습니다.』『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떨려서 감히 손을 내밀 수가 없다.
『사실은 백금반지 같은 것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잘못하면 채 선생의 오해를 살는지도 모를 것 같아서 이걸 택했답니다. 반지 선물에는 그러한 애정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지만 목걸이에는 그런 의미는 없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어쨌든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갈 시간은 넘었다. 정주는 각오를 하고 도로 주저앉았다. 저번에도 한 번 인숙이와 같이 자고 있는데 통행금지 시간이 넘어서 돌아온 유민호와 미닫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잔 적이 있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다소 불안했으나 지극히 점잖은 유변호사였던 사실을 되씹어 생각하며 인숙을 무릎 위에 안았다.
『채선생, 피곤하시면 내려가서 주무시지요. 나는 좀더 앉아 있겠읍니다.』
『괜찮아요.』
정주는 자꾸만 안심이 된다.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한 남성들은 대개가 다 자기와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기를 원했건만 유민호는 반대로 어서 가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에게 통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가 하면 약혼자와 똑같은 목걸이를 사 갖고 오는 성의도 있다. 신비로운 남성이었다. 신비로운 곳에 호기심은 움직이는 것이다. 결혼식이 며칠 후로 박두해 있건만 결혼 생활에 대한 흥미는 통이 느끼지 않는 것 같은 신비로운 사나이 유민호에게 정주는 호기심과 호의와 동정까지 갖게 되었다.
『애정이 없어도 결혼할 수가 있을까요?』
이번에는 정주 편에서 애정 문제를 화제로 꺼냈다.
그것은 오늘날 유민호가 정밀한 계산 밑에서 기대했던 화제였으며 기대했던 시각이었다.
8
편집『불행을 각오하면 애정없는 결혼도 할 수야 있지요.』
『그렇지만 결혼의 목적은 불행해지는데 있는건 아닐텐데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주는 유민호의 결혼에 대하여 항의 같은 것을 하고있는 자기자신을 깨닫고 저으기 당황하였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기는 하지오. 그러나 나는 다소 봉건적이긴 하지만 인간 대 인간의 의리를 무시하고 살기는 싫습니다.
의리를 살리는 데 좀더 폭 넓은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선생님, 보기에는 무척 세련된 인품 같지만 생각하시는 바가 다소 고루 할이만큼 지나치게 굳건 하네요.』
그 지나치게 굳건한 것이 여성의 입장으로서는 대단히 좋은 것이다. 여성의 불행은 태반의 굳건하지 못하는 남성의 횡포에서 오기 때문이다. 실로 유민호와 같은 굳건한 남성은 요즈음 이 거리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주옥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정주는 폭 한숨을 지었다. 지운을 석란에게 빼앗긴 고독한 영혼이 지금 불행한 결혼을 자진해서 하려는 유민호의 쓸쓸한 영혼과 오뚝 마주 서 있는 것이다.
『아, 인숙이가 잠이 들었네.』
그 말에 유민호는 얼른 일어나서 아랫간에 자리를 폈다. 정주가 인숙을 안아다가 자리에 눕히고 자리옷으로 갈아 입히고 있는데 유민호는 그 옆에다 다시 정주의 자리를 손수 깔아 놓고,
『어서 채선생도 주무세요.』
『아이, 선생님도 제 자리까지……』
정주는 황송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인숙 엄마의 자리는 꼭 내 손으로 깔아 주었답니다.』
정주는 순간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부부간의 잠자리에 대한 예비 지식을 유민호는 지금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가 빨랑빨랑 돌아갔음 선생님이 인숙이 옆에서 주무실 걸 그랬어요.』
인간적으로 믿기워 지기는 했으나 유민호와 같은 방에 자기를 거부하는 완곡한 말이었다
『아닙니다. 나는 소파에서 자기를 좋아한답니다. 온돌은 딱딱해서요.』
저번에도 그랬었다. 그러나 비좁은 소파에서 자기가 좋을 리는 만무 할 것이라고, 어디까지나 여성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지켜주는 유민호의 인격이 자꾸만 우러러 보였다.
이윽고 불을 끄고 미닫이를 꼭 닫친 후에 유민호는 소파에다 자리를 깔고 누웠다. 눕기 전에도 채정주의 손길 한 번 쯤 잡아 보아도 좋을만큼 시기는 충분히 익어져 있었으나 유민호는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것을 감히 하지는 않았다.채정주가 다소 딱딱한 여성이기에 섣불리 손을 댔다가 데이기보다도 정주 편에서 저절로 익어 떨어지기를 끈기있게 기다리는 편이 한층 더 정확성이 많았다.
『채선생, 주무세요?』
한참만에 유민호는 어둠 속에서 정주를 찾았다.
『네, 아니요.』
정주의 대답이 안정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선생님, 왜 안 주무셔요?』
이야기를 좀더 해 보고 싶어하는 대답이다. 유민호는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으며,
『채선생이 왜 좀더 미리부터 제집에 와 주시지 못했을까요?』
그러면서 유민호는 꺼질 것 같은 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정주는 대답을 못하고 숨소리를 꼭 죽였다.
9
편집무대의 장면이 지극히 좋다. 이러한 효과적인 연애 장면을 구성하기까지에는 유민호의 극작가적인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창문에 달빛이라도 비춰 주었던들 무대효과는 한층 더 있었을 것을……아까운 노릇이라고 유민호는 생각하며,
『인간의 운명이란 정말 모를 일이지요. 애정도 없는 불행한 결혼을 왜 하느냐고, 채선생은 아까 절더러 물으셨지만……그렇지만 채선생을 만나 뵙기까지에는 그 결혼을 거부할만큼 강렬한 애정의 대상이 내게는 없었답니다.』
정주는 여전히 숨길을 꼭 죽이고 있었다. 미닫이 하나를 사이에 둔 웃간 소파 위에서 유민호의 쓸쓸한 사랑의 고백이 절절하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늦었지요. 이 결혼을 방해하는 무슨 커다란 기적이 나타나기 전에는 좋던 싫던 사흘 후에는 그 여자의 남편이 돼야만 하는 운명이랍니다. 이런 말을 끝끝내 하지 않고 배겨 볼려고, 그 동안 극심한 노력도 꾀하여 봤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역시 약한 동물인가 봐요.』
그때야 비로소 채 정주는 그처럼 무관심했던 유변호사의 태도가 하나의 건실한 노력의 결과였던 사실을 깨닫고 가벼운 전률을 전신에 느꼈다. 정주의 순결한 처녀성이 무섭게 흔들려졌다.
『그래서 채선생을 대할 때는 언제나 대범할려고 노력했었지요. 사흘 후에결혼을 해야만 하는 사나이가 애정의 고백을 해 봤댓자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도 유민호는 애정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모순을 간파하기에는 채정주의 영혼이 지나치게 떨고 있었다. 지운에게서 받은 자존심의 상처가 뜻하지 않은 유민호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차츰차츰 아물어지고 있었다.
『채선생, 주무세요?』
『…………』
정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채선생!』
『어서 말씀하세요.』
정주의 대답은 떨고 있었다.
『결혼을 한 내가 일생을 두고 아내 이외의 여성인 채선생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은 확실히 죄악이지요. 채선생!』
『네?……』
『나는 용기가 있읍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고 나는 생각을 했읍니다.
채선생만 저같은 인간을 버려 주지 않는다면……나는……나는……용기가 있읍니다. 내일이라도 이 결혼을 파괴할 용기가 있읍니다!』
『무……무슨 그런 말씀을……』
정주는 오주주 말을 떨었다.
『아닙니다! 진정입니다! 결혼식을 거행하지 않겠읍니다!』
사흘 후로 박두한 결혼식을 파괴시켜서까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유민호의 정열을 채정주는 엄숙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분에 넘치는 행복이었으나 그것을 이 자리에서 승인할 수는 도저히 없다.
『안되십니다. 선생님! 그건 무서운 일이예요!』
『무서운 일이 아니라, 참되고도 엄숙한 일이지요. 내일밤이나 모레 밤까지…… 어쨌든 결혼식을 거행하는 전날밤까지만 승낙해 주시면 언제든지 나는 용기가 있읍니다!』
『…………』
정주는 또 숨을 죽였다.
유민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미닫이가 있는 어둠속을 한 걸음 한 걸음 더듬어 갔다. 저절로 익어 떨어질 무렵이라고 유민호는 생각했기 때문에……10 그러나 유민호는 캄캄한 미닫이 앞에서 우뚝선 채 그것을 경솔하게 열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도덕가의 아내가 되었다는 인숙 엄마에게서 불태우면 정욕의 불길을 그대로 고스라니 채정주 위에서 연소시키고 있던 들뜬 감정을 억제할 만큼 유민호는 계산이 밝다. 사랑의 고백이 그 질에 있어서는 무척 강렬했지만 시간적 여유를 두고 그것을 저울질해 볼 겨를이 채정주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마음에 각오가 완전히 서지 못하여 처녀의 무경험이 호다닥 놀라며 결사적인 반항을 할 것만 같았다.
오영심은 원체 자기에게서 영혼의 흔들림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삼 년이라는 긴 세월의 공작이 필요했지만 비록 짧은 시간일 망정 이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만일 채정주가 아니고 오영심이었다면 그만한 영혼의 동요만 느낀다면 충분히 익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채 정주는 다소 달랐다. 영혼의 흔들림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흔들림이 오영심처럼 강하고 예민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정 이입(感情移入)에 있어서 다소의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오영심은 예술가적인 자멸적(自滅的) 감정이 풍부해서 안 떨어질 때는 죽어도 안 떨어지지만 떨어질 때는 수월히 떨어진다. 그러나 채정주는 감정만으로는 잘 떨어지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지성의 발판을 언제나 찾고야만 떨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다소 걸려야만 했다 그래서 섣불리 건드리다가 손까락을 물어 뜯기우는 것보다는 하루 이틀의 여유를 주어 영혼의 흔들림과 채산을 맞추어 보라는 편이 한층 더 수월할 것 같아서 다시 소파로 가만히 돌아와 누워 버렸다. 누워서 점잖게 좀더 피리를 불고 북을 쳐가면서 명일에의 효과를 정확히 기대하는 편을 유민호는 택했다.
『채선생, 어서 주무셔요.』
『네, 선생님도……』
『채선생은 다소 차가운 데가 있지만, 그 차거움을 참되게 인식하고 있는 건 저밖에 없을 거야요.』
입때까지 자기의 감정만 토로했을 뿐, 상대자에 대한 찬사가 통이 없었던 것을 유민호는 지금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의 아름다움에는 지속성이 없지만 지성의 아름다움에는 영원성이 있지요. 인류의 온갖 불미로움을 구할자는 오직 하나 인간의 차거운 지성뿐이나까요. 채선생!』
『네?……』
『제게 용기를 내어 주시요!』
『운명이 적당히 해결해 주겠지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렇지만 개척할 수 있는 운명이라면 제 손으로 개척해야만 되지 않겠읍니까? 말하자면 채선생은 제 운명의 열쇠를 잡은 분이지요.』
『아이, 제가 무슨 그런……』
그러면서도 정주는 조금도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무슨 애정 같은 것을 정주는 유민호에게 느끼기까지 하였다. 거울이 광선을 반사시키 듯이 여성의 애정은 그 태반이 수동적이다.
『이 사흘 동안에 내 운명이 결정될 것을 생각하면……내게 용기를 주시요!』
『아이, 선생님 자꾸만 그러심……』
『애정 없는 결혼을 파괴하는데, 왜 용기를 못 내겠읍니까? 어서 편히 주무셔요.』
『네, 선생님도 어서……』
『인숙이 이불 차 버리지 않았읍니까?』
『아니요.』
이리하여 유민호는 끝끝내 점잖은 하룻밤을 극기(克己)로써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