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15장
惡魔[악마]의 領域[영역]
편집1
편집바로 그날밤 그 무렵, 유민호는 부산 송도 해변 어떤 여관 일실에서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있었다.
사조 반 온돌방이다. 가구라고는 별로 없다. 여자가 누워있는 잠자리 머리맡에 초라한 경대가 하나 놓여 있었고 자리옆으로 여자가 벗어 놓은 양단 치마저고리의 희한한 금실 꽃무늬가 구렁이 껍질처럼 길처럼 길다랗게 도사리고 있었다.
되는대로 흘어져 있는 곤색 양복저고리 위에 여자의 흰 인조 속치마와 새하얀 버선 두짝이 요염하게 얹히어 있는 방 한가운데 일어나 앉아서 유민호는 지금 물빛 와이샤쓰를 주워입고 있는 것이다.
『왜 갑자기 일어나세요?』
이부자리 속에서 여자는 물었다.
스물 너더댓은 실히 되어 보인다. 계란 같은 타원형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표정이 가난하다.
『마누라 생각이 갑자기 나서……』
경대를 끌어당겨 유민호는 넥타이를 매는 것이다.
『유사장이 언제 장가를 들었게……?』
『장가는 안들었어도 마누라는 있어.』『그게 누군데?……』
여자는 갑자기 신경을 쓴다.
『산판을 가져와요.』
『산판은 갑자기 또 무얼해요?』
『하도 많아서 셀 수가 없으니까 ―』
『흥, 돈많은 재센가 보군요.』
『미안하오. 어서 일어나 입어요.』
『난 안갈테야!』
『그럼 그만두어요. 내 가는 길에 박군한테 들려서 부인을 모셔 가라고 충고를 하지요.』
표정하나 까딱 없는 얼음장 같은 유민호다.
『흥!』
여자는 샐쭉해지며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매며 유민호는 거울속으로 앙상하니 뼈대가 들어난 여자의 빈약한 두 어깨를 바라보며 박군의 월급을 좀더 올려줘야 겠다고 생각한다. 박군이란 부산에 있는 덕흥상사 본점의 서무주임이다.
『양단옷은 천천히 해 입고 영양분을 좀 취해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영양분이 다 뭐요?』
『염려말아. 박군의 월급이 멀지 않아서 고양이 꼬리로 변할테니까 ―』
양복을 입으면서 유민호는,
『박군이 눈치를 챈 모양인데……』
『벌써부터!』
치마를 허리에 두르면서 여자는 대답했다.
『그래도 암말 없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모양이예요.』
『살림살이 잘돼 간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만원 세 뭉치를 꺼내주며,
『곗돈 탔다고 들어가서 그래요. 그리고 애들 데리고 기다리기에 좀 갑갑했겠느냐고 고기나 두어근 술이나 한 병 사 갖고 들어가요.』
『내일 올라가시면 언제 또 내려오세요?』
『이번엔 좀 걸릴 걸. 한 달 쯤……』
영심이와 결혼 생활을 계산에 넣고 하는 말이다.
방을 나서기 전에 유민호는 경대 앞에서 얼굴을 고치고 일어서는 여자를 한 번 안아주며『집에 돌아가서 박군 보고 그래요. 오늘 영도다릿목에서 관상을 보았더니만, 멀지 않아서 남편이 출세를 할 거라고……그래서 술 한 병 사들고 왔다고 그래요.』
『아이유, 어쩌면 거짓말도 잘 주워다 붙이시지! 회사에선 그처럼도 얌전하다는 사장인데……』
『그것도 다 타고난 분복이니까. 부러워했댔자 소용이 없을 거요.』
이윽고 두 사람은 캄캄한 해변길을 시내로 향하여 택시를 몰았다.
2
편집충무로 근처에서 여자를 부리고 유민호는 곧장 대청동으로 차를 돌렸다.
이 대청동에는 유민호의 소위 마누라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마누라였다. 호적에만 오르지 않았을 뿐, 삼 년 전 본처와 이혼을 한 후, 지금까지 쭉 계속해 오고 있는 동거생활이었다.
그만큼 유민호는 모 중학 교원이던 이 김옥영(金玉英)을 좋아했다.
유민호는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였으나 단 한 사람도 정식으로 호적에 올린 적은 없었다. 여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불평을 말하면 이렇게 대답하였다.
『호적에 오르나 안 오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한 사람의 여자를 상대로 일생을 보낼 그런 미련한 인간은 아니니까, 공연히 이혼 수속만 귀찮아지는 거야. 그대들이 결혼계(結婚屆) 한 장으로 내 자유를 속박해 보려는 것은 이미 그대들의 애정도 아니고 성실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대들의 의식주를 보장 받으려는 하나의 상행위(商行爲)니까, 그런 위험률이 많은 상행위에 내가 동의를 할만큼 무식하지도 않고 미련하지도 않다. 결혼 계 한장으로써 결혼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애정의 유무가 결혼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률상의 아내라야만 된다면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 어째 그러냐 하면 그대들에 대한 나의 애정의 지속을 나 자신도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싫다고 본처는 나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중학교 교원이던 이 김옥영은 유민호의 이론을 승인함으로써 삼 년에 걸친 동거생활을 계속해온 것이다.
『당신이 이번에는 정식으로 결혼한다죠?』
두 살 먹은 어린 것이 아랫목에서 자고 있었다. 영옥은 파자마를 입은 채유민호 옆에서 술을 따르고 있었다. 스물 일곱 살, 갸름한 얼굴이 다소 우수에 잠겨 있었다.
『왜 샘이 나서 그래?』
유민호도 잠옷으로 갈아입고 술상 앞에 반석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 감정은 별로 없어요. 한 두 번 이래야 샘도 나지.』
『걱정 말아, 내가 너를 좋아 하는 한, 염려할 것 없어.』
『새색시를 얻어 오면 헌색시는 싫어질 것 아냐요?』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이번 여자는 다소 얌전하다 뿐이지, 매력은 너만 못해.』
유민호는 손을 뻗쳐 옥영의 턱을 넌지시 쓸어 올리며,
『천하 일품이야!』
했다.
『이번엔 결혼식도 한다면서?』
『그래야만 말을 듣겠으니까, 하는 수 없지 않아?』
『이번에도 호적에 안 올려요?』
『안 올려! 그건 확고한 인생관이니까 ―』
『결혼식까지 하고도 호적에 안올리면 저편에서 가만 있을라고?』
『가만 안 있으면 어떻게? 이미 불장난을 본 후니까, 마음대로 하라면 되는 거야.』
『그만하면 심장이 어지간히 튼튼해요.』
『그런게 아니라, 여자 편에서 나를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결혼계를 그만 두자면 도리어 고마워 할거야. 그러니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기어코 손에 넣어 보는데 남자로서의 정복감은 만족하는 거야.』
옥영의 미끄러운 턱을 만지던 손으로 술잔을 쭉 들이키며,
『더구나 그 여자에게는 내 중학 동창 하나가 붙어 다니는데…… 말하자면 일종의 경쟁 심리에서 나온 행동이야.』
『경쟁 심리라고요?』
여성의 입장으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심리였다.
『자기에게 조금도 애정을 느끼지 않는 여자 하나를 손에 넣으려고 결혼식까지 한다는 말이예요?』
『이거 봐요. 내 사랑하는 사람아!』
한 잔 거나한 유민호는 옥영을 끌어당겨 옆으로 껴안으며,
『남자에게는 애정 이외에 정복욕이라는 것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여자의 입장으로서는 남성들의 호의가 그 어느 종류에 속하는 것인가를 알아야만해. 이 정복욕과 애정은 일란성(一卵性) 쌍동이처럼 얼굴이 꼭 같으니까, 남성들의 호의를 통틀어 애정이라고 생각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여성의 비극은 그 대부분이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줄만알아 둬.』
『그럼 이번 결혼하는 여자에게 대해서도 애정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예요?
『별로 없지. 경쟁심에서 출발한 정복욕! 그 왕성한 정복욕 때문에 실로 삼 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점잖게 서서히, 끈기 있는 공작을 해온 것이니까 ―』
『어떤지 누가 알아?…… 누가 요 가슴속을 홀랑 들어갔다 나왔담 모르지만……
옥영은 그것이 애정이 아니고 단순한 정복욕이라는 말에 어지간히 마음을 놓으며 유민호의 가슴패기를 어루만졌다.
『생각해 봐요. 성적을 다투던 동창생과 경쟁이 붙었다니까! 더구나 저편 남자는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래서 여자나 여자의 부모가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강적(强敵)이야. 그런 꼴을 보고도 가만히 내버려 둬야만 해?』
『그렇지만 여자가 불쌍하지 않아?』
옥영은 같은 여성의 불행을 진심으로 동정하였다.
『그런 것은 내 알배가 못돼. 더구나 나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여자를 동정해야만 할 이유는 없어. 결혼이란 하나의 수단이지 문제는 라이발(戀敵[연적])보다 먼저 여자의 육체를 소유해 버리는데 있는 거야.』
『나쁜 사람!』
그러면서 옥영은 다소의 흥분을 가지고 유민호의 넓적다리를 꼬집었다.
『너만 나쁘지 않으면 되지 않아?』
『난들 어떻게 알아? 언제 어느 때 버림을 받을는지……』
『버림을 받을 때까지 취직을 한 셈 치고 있으면 돼. 삼 년 동안을 계속한 건 너 하나 뿐이다.』
『천하 일품이니까 ―』
『그렇지 않아도 네 생각이 간절해서 뛰쳐왔어.』
『어디서?……』
『어떤 빈약한 육체의 품안에서……』
『솔직하시구려!』
『명백하지.』
『흥, 여자의 감정을 학대하는 것을 당신은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지.』
『학대 받는 감정 속에 질투가 있고 질투의 감정 속에 감미로운 감각을 느끼는 것이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애무를 의미하는 거야.』『잔인한 심리학자!』
『자비로운 애욕의 철학자다! 고맙게 생각하고 질투심을 향락해야만 되는 거야.』
『악마와 같은 사람이야요. 당신은……』
『그것은 명예로운 존칭이다. 인간 생활에 악마의 영역(領域)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일생 칠십은 투명 무미한 증유수(篜溜水)처럼 아무런 맛도 없을 것이다. 증유수는 성자에게나 드리고 악마는 흐리터분한 천연수를 마셔야 산다!』
유민호는 술상을 밀어치우고 전등을 껐다. 옥영을 붙들고 자리에 들어서 혼잣말처럼 외쳤다.
『인간의 행복의 대부분은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아아, 명예로운 악마, 악마, 악마의 영역이여!』
3
편집이튿날 오후 유민호는 비행기 편으로 상경하여 남대문 통에 있는 덕흥상사 서울 지점에 들렀다.
남자 사원 오륙 명과 여자 타이피스트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사무실을 거쳐 사장실로 들어갔다. 전찻길을 눈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양지바른 방이었다.
커다란 사무 탁자 옆에 털썩 주저앉자 마자 며칠 동안 밀렸던 결재 서류를 들고 간부 사원 두 사람이 바뀌어 들어와서 간단한 보고와 함께 서류에 결재를 맡아 들고 나갔다.
유민호는 필요 이상의 웃음을 짓지 않는다. 사무처리는 지극히 명쾌 신속하였고. 우물쭈물 하는데가 조금도 없는 속결주의였다. 유민호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네 시다. 며칠동안 밀렸던 사무처리를 하는데 단 삼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유민호는 대단히 바쁘다. 회사일 이외의 애욕의 사무처리가 여러 군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선 그는 손을 뻗쳐 청파동 자택에 있는 법률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응? 소송 건이 둘?……알았소. 오늘은 바쁘니까 내일로 밀고……인숙이, 학교에서 돌아왔소?』
『네, 지금 안방에서 가정교사와 공부를 하고 있읍니다.』
『인숙이 좀 전화에 불러줘요. 인숙의 목소리가 듣고 싶으니까. 그리고 가정교사도……』
그러나 실은 딸 인숙이보다도 가정교사 채정주의 음성이 더 듣고 싶은 것이다.
이윽고 복도를 콩콩 뛰쳐 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아버지예요? 언제 부산서 오셨어요?』
국민학교 이학년의 명랑한 목소리였다.
『지금 막 오는 길이다. 공부 잘했나?』
『응, 지금도 채선생님과 막 공부를 하던 중인데……근데 말이야 아버지!
나 어저께 엄마 봤지!』
『엄마?…… 엄마는 어디서?……』
유민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진다.
『학교서……학교 문 앞에서……』
『그래 무슨 말을 하더냐?』
『아버지가 정말로 장가를 드느냐고……그리고 아버지가 매일밤 집에 들어와서 주무시느냐고, 그런걸 자꾸만 물어보면서……참, 나 맛나는 것 먹었지.』
『뭔데?……』
『양식! 양식 먹었어, 칼하구 삼지랑 갖고 먹는 거 있잖아?』
『음 ―』
유민호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잘했군! 그럼 인숙이는 이제 그만하고 채선생님을 대다오.』
전화가 바뀌어졌다.
『아, 채선생, 얼마나 수고가 많습니까?』
점잖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갑자기 되었다.
『무슨 수고가……인숙이가 얌전해서 하나도 힘드는 것 없읍니다.』
『선생님이 그처럼 얌전하시니까 제자도 따라가는 모양이지요.』
『아이, 선생님도……』
『음성이 조금 이상한데, 감기 드셨군요?』
『네, 약간……』
『잘 조심하셔야겠읍니다. 감기는 만병의 근원이라고……안방 약장 안에 아스피린이 있으니까, 그걸 우선 잡수시고 그 속에 좋은 주사약도 들어 있으니까, 이따 제가 돌아가서 놔드리겠읍니다.』
『아이 선생님, 주사도 놓실 줄 아세요?』
『엔간한 의사들보다는 났읍니다. 하하하……』유민호는 이 무척 딱딱한 가정교사의 피부가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전문적은 아니지만 다소의 의학적 상식과 문학적 교양을 갖는다는 것은 현대 문화인의 한 조건이니까요. 정맥 주사도 문제 없는 솜씨니까, 피하나 근육 주사야 무엇이 어렵겠읍니까? 중이 제머리 못깎는다고, 채선생이 아무리 의학생이라고는 하지만 제 손으로 제 살을 뚫으기는 다소 힘들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
웃음도 점잖고 이야기도 교양적이다. 그러나 무척 차가워 보이는 이 가정 교사의 새하얀 피부의 일부를 건드려 보고 싶어 하는 유민호의 소위 악마의 영역을 경험 없는 채정주의 처녀성으로서는 하나의 자비로운 천사의 영역 밖에는 더 해석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산 갔다 왔던 기념으로 채선생께 조그만 선물을 하나 사 갖고 왔읍니다.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지만 이따 밤에 돌아가서 드리겠읍니다.』
『아이유, 황송합니다.』
『천만에요. 어미 없는 인숙이가 지금 오직 채선생 때문에 외롭지 않게 지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쑥스런 말이지만 눈물이 나도록 고맙지요.』
『제가 뭘 한다고……』
『그럼 이따 제가 다소 늦더라도 돌아가시지 말고 꼭 기다려 주시오.』
그리고는 저편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채칵 하고 전화를 재빨리 끊어버렸다. 대답할 여유를 저편에 준다는 것은 불리하다. 선물을 미끼로 통행금지 시간을 넘길 작정이니까, 너무 늦어지면 내일 주세요, 하는 말이 튀어나오게 되면 아니되기 때문이다.
전화기는 놓이자 마자 또다시 째르랑 째르랑 울렸다. 유민호는 수화기를 또 들었다. 오영심이었다. 어저께 정식으로 임학준 교수의 승낙을 받았으나 청첩을 찍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다.
『알았읍니다. 곧 찍도록 수배하겠읍니다.』
『그럼……』
하고 전화를 끊을려는 것을,
『잠깐만 ―』
하고 막으며 다소 서글픈 어저로,
『영심씨 슬픔니다.』
『왜 그러셔요?』
『적어도 며칠만 지나면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될 우리들의 사이가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들의 사이에 사무적인 것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영심씨!』
『네……?』
『이 다음부터는 전화를 너무 빨리 끊을려고 그러지 마시오.』
『아, 그런 뜻이라면……미안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제가 세상 일에 다소 서툴러서 그만……이담부터 주의 하겠어요. 용서하세요.』
『그렇게까지 나오면 도리어 이편이 미안하지요. 영심씨!』
『네.』
『우리 결혼해 가지고 재미있게 살아요, 네?』
『네.』
『그때까지는 온갖 정열을 꾹 참고……그것이 점잖고 얌전한 신부를 대하는 신랑의 예의라고 생각하지요. 신혼 여행으로는 벌써 동래온천에 깨끗한 호텔 한 방을 예약해 놓았답니다. 아아, 생각만 해도……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 좀 바빠서 내일 오선생님을 한 번 찾아 뵙지요.』
『아버지께 그렇게 말씀 드리겠어요.』
『그럼 내 사랑하는 아내여. 감기 들리지 말고 잘 자요!』
전화를 끊고 유민호는 팔걸이 의자에 깊숙히 파묻혀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리고 감기가 들린 채정주와 감기가 들리지 않은 오영심을 나란히 세워 놓고 저고리, 치마, 속옷 ― 이렇게 하나 하나씩 옷을 벗겨 보기 시작하였다.
5
편집최근 유민호가 접촉하고 있는 십여 명의 여성 가운데서 아직 옷을 벗겨 보지 못한 것은 오영심과 채정주 뿐이었다. 그만큼 유민호에게 있어서는 이 두 사람의 여성이 가장 신선한 매력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오영심도 결국에 있어서는 옷을 벗기우는 여성 가운데 하나일 뿐, 무슨 영구적인 애정이라든가 무슨 인격적인 존경의 념을 가지고 해로동혈(偕老同穴)의 결의 같은 것은 추호도 없다. 결혼식이라는 다소 비용이 드는 과정 하나를 더 거치는 것 따름이다. 그리고 그 결혼식이 며칠 후로 박두한 지금 오영심의 소유는 이미 결정적 단계에 들어간 셈이니까, 유민호로서는 채정주에 대한 선무 공작을 더 활발하게 전개시켜야만 하였다.
오영심은 다소 채산이 맞지않는 장시일의 공작을 필요로 했었지만 채정주는 비교적 쉬울 것 같았다. 겉으로는 대단히 말랑말랑해 보이면서도 오영심의 심지는 어딘가 딱딱한 데가 있다. 거기 비하면 채정주는 일견 딱딱하고 차가운 데가 있기는 하지만 후딱 한 번 마음의 키만 돌려 놓으면 아주 간단한 여성이라고 유민호는 자신을 가지는 것이다.
눈을 지긋이 감고 이 두 여성의 나체를 요리조리 골고루 비교해 보다가 휙 몸을 일으켜 외출을 할려고 모자를 쓰는데 문이 조용히 열리며 타이피스트 박미경(朴美京)이 가 들어왔다. 검은 스커어트에 자주빛 자켓을 입고 동글납작한 얼굴에 허리가 지나치게 가는 여자였다.
박미경은 벙어리처럼 걸어 들어와서 벙어리처럼 유민호 앞에 섰다. 일개 미천한 지위에 있는 타이피스트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사장 앞에서 왜 그러고 서야만 하는지를 유민호는 물론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
박미경은 여전히 말은 없이 유민호의 얼굴을 원망스럽게 체다보고만 섰다.
『나좀 바쁘니까, 이야기가 있거든 후에……』
『사장님도 바쁘겠지만 저도 좀 바빠요.』
비로소 박미경은 반항적인 한 마디로 대꾸를 했다.
『그래도 내가 더 바뻐!』
『아냐요. 제가 더 바뻐요.』
『뭔데, 대관절?』
『임신을 했어요.』
유민호는 그러나 별반 놀라지도 않는 표정으로 박미경의 허리를 한 번 훑어 보았다. 그럴 성싶어 그런지, 미경의 가는 허리가 다소 굵어진 것도 같다. 얼굴은 별로 볼 것이 없었으나 그 가는 허리에 대한 다소의 매력이 점점 확대되어 마침내는 손을 대어버린 유민호였다.
『그래서?』
『어떻검 좋아요?』
두 사람의 대화가 모두 차겁다.
『임신했으면 낳아야지. 그것이 자연의 법측이니까 ―』
『괜찮겠어요?』
『괜찮지 않을 것 같으면 그만 둬도 좋고……』
유민호의 그 얼음장같이 차거운 대답이 마침내 박미경의 눈에서 눈물을 강요하였다.
『결혼을 한다죠?』
『아, 하지.』
『제 일은 어떻걸 셈이세요?』『그건 문제가 달라.』
『어떻게 달라요?』
『우리의 행동은 결혼을 전제로 하지는 않았으니까 ―』
『그러나 그건 세상의 상식이 아냐요?』
『그것은 하나의 우매한 상식이다. 진실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아는 인간은 그러한 우매한 상식의 노예가 될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미경이도 자신의 참된 가치를 잘 알아 채리고 쓸데 없는 상식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건 좋지 않아!』
박미경은 비웃음에 찬 얼굴로 유민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6
편집『이이거 봐요.』
『유민호가 다소 부드러운 어조가 되며 박미경의 눈물과 조소가 한데 엄 버무려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애욕은 결혼이라든가 생식(生殖)이라든가, 그러한 심리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애욕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거야. 이리하여 나는 애욕의 예술성을 부르짖는 사람이야. 따라서 결혼이라든가 가정이라든가 자존이라든가 하는 심리적인 것을 생각한다는 것처럼 불순한 애욕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애욕의 순수한 예술성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는 말이야. 이러한 순수한 애욕의 행동자인 유민호에게 결혼이라든가 가정이라든가 하는 불순한 조건을 강요하려는 박미경을 나는 존경할 수가 없어.』
『그건 사장이 남성의 횡포를 변명하려는 괴변이예요. 우리들 여성은 그러한 남성의 부동적(浮動的)인 애욕보다도 좀더 조용하고 고정적인 애정을 원하기 때문에 자연히 결혼이라든가 가정이라든가 하는 일정한 형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결코 실리 만은 아니예요. 남성들의 애욕의 세계에는 그러한 악마적인 데가 있는지 모르지만 여성들의 애정에는 성스러울 만큼 이쁘고 아름다운데 가 있는 줄을 알아야 하실 거야요.』
그러면서 박미경은 흑흑 느껴 우는 것이다.
『사장은 그러한 악마적인 마음을 가지고 저를 사랑해 주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저는 정말……천사와 같았어요.』
결국 여성은 남성의 그러한 악마성 앞에 머리를 숙이고 동정을 구하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라고 유민호는 마음속으로 빙그레 웃으며,『악마의 자비심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지?……』
대답은 없이 미경은 더 한층 고개를 숙이며 울었다.
천사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힘이 없다. 추하기는 하지만 악마에게는 힘이 있는 것이다. 천사와 악마의 투쟁에 있어서 현실의 승리자는 언제나 악마였다. 천사의 승리는 언제나 약자의 관념과 미래 속에서만 살아 있고 희망되어 왔다.
이리하여 무진장한 인간의 관념과 무한대의 시간적 미래는 약자의 마음 속에 종교심과 이상을 부여함으로써 종교가와 출중한 철인들로 하여금,
『악마여, 두고 보자!』
는, 한 마디로서 현실의 패배를 위무하여 온 것이라고 이것이 박미경에 대한 유민호의 자비심의 논리적 근거였다.
『잘 알았어. 그러니까 울지 말고 눈물을 씻어요. 문제는 결혼식을 한다든가 결혼계를 낸다든가 하는, 그런 형식적인 수속만 밟지 않을 뿐이지, 본질에 있어서는 애정 문제로나 경제 문제로나 꼭같이 대우를 할테니까, 미경이, 안심하고 나가 있어요. 임신은 몇 개월이지?』
『삼개월 ―』
『그러니까 그 문제는 적당히 처리를 해요. 미경의 장래를 위해서 지금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 아마도 편할 거야. 법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기실 법이 없는 세상이니까, 쓸데 없이 울고 불고 해 봤댔자 공연히 악마의 노여움만 살 거 아니야? 악마의 자비심이 움직일 때에 적당히 타협을 하는 편이 천사를 위해서도 좋을 거니까 ―』
그러면서 유민호는 미경을 한 번 안았다 놓고 명함에다 간단히 소개장을 한 줄 써서 지폐뭉치와 함께 미경에게 내주며,
『이걸 가지고 종로 삼가 XX산부인과 원장을 찾아가요.』
명함에는 ⌜적당한 처분을 앙망⌟이라는 여덟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리고는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미경을 그대로 남겨 두고 사무실을 나와 부원 한 사람에게 청첩 인쇄를 부탁한 후에 차를 몰아 명동 ⌜식도락⌟으로 유민호는 달려갔다.
여자를 방문할 때면 차는 반드시 손수 운전을 한다. 그만큼 운전수에 대해서도 유민호는 비밀주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아직 일러서 이층 좌석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 유민호는 마담로우즈의 방을 제방처럼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서 저고리를 벗고 경대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 마담의 적당히 살찐 흰 목덜미에다 입을 맞추며,
『왜 이렇게 살만 자주 찌는 거야? 암돼지처럼……』『늙어가면서 살이 쪄야 여자는 미인 노릇을 하는 줄도 몰라? 아직 풋내기로구먼. 아이, 간지려!』
눈썹을 그리노라 울렸던 오른편 팔을 탁 내리면서 마담로우즈는 유민호의 다섯손가락을 팔고비로 막아 대며 몸을 흠짓 움츠러 뜨렸다.
『못써! 어린 것이! 남자는 여자에게 대해서 언제든지 점잖아야만 매력이 있는 거야.』
『점잖게 대할 상대가 따로 있어. 썩어가는 세포조직을 아무리 코티분으로 문질러 봐댔짜 파리에 있는 화장품상인만 기쁘게 할테니까 ―』
『걱정도 팔자지!』
『게다가 신분이나 똑똑하면 또 모르지만 접대부의 오야가다(대장)을 보고 일일이 점잖게 대할려다가는 접잖음의 가치가 환불(圜弗)교환률처럼 폭락을 할테니까 ―』
『정말이야?……』
마담이 휙 앉았다. 빨강이를 갓바른 젖은 입술이 파들파들 떨었다.
『정말이래서 좋겠다면 그대로 두고 나쁘겠다면 취소를 하지.』
『풋돈 몇푼 들여 놓았다고 줏하면 안돼! 유민호 변호사에게 인격이 있다면 마담로우즈에게도 그만한 인격은 있는 거야.』
『아이고, 배가 고파! 부산서 아침을 먹고는 진종일 공기만 마셨어. 뭐 맛나는 것 없을가?……』
『아이 참, 어린 것이 능칠 줄도 다 알고……그래 접대부가 돼서 뭐가 못 마땅하다는 말이야. 사람은 간판을 하나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거야. 사기 협잡배에게는 간판이 여러개 필요하지만 접대부의 간판은 하나 밖에 없어 떳떳한 간판이야!』
『하아, 이건 정말 뜻하지 않은 부부싸움이로군.』
『오늘날 세상이 어째서 요처럼 잘되가는 줄이나 알아?』
『모르겠소이다. 원컨대 하교를……』
『그 잘난 양반들이 정치를 함네, 문화사업을 함네, 하면서 뒷구멍으로 딴 간판을 여러개 걸고 있기 때문이야, 거기 비하면 접대부의 간판은 하나밖에 없는 명명 백백한 간판이야. 술과 웃음밖에 판 것이 없어!』
『술과, 웃음……그밖에 뭐가 또 하나 있을 법한데……』
『뭣이?……』
금물을 올린 쇠부치 콤팩트가 분가루를 날리면서 유민호의 면상을 향하여 날아갔다.
이마에서 실오락 같은 피가 한 줄기 흘러 내렸다. 유민호는 묵묵히 경대를잡아당겨 설합에서 마담의 탈지면을 꺼내 꾹꾹 찍어 냈다.
그 모양이 다소 처량해서 마담의 감정이 후딱 누구러졌다.
『아이구, 가엾어! 우리 아기가……』
새로운 탈지면을 한 줌 뜯어쥐고 등뒤로 유민호를 껴안으며 다가앉았다.
『마담은 애욕의 철학자야.』
『무슨 소린데……?』
『부부싸움은 뒷맛이 있어.』
『아는 것도 많지.』
『증오의 감정은 새로운 애정의 샘물이 되고, 낡은 애정의 표백제(漂白劑)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
유민호는 번 듯 마담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입술을 모았다.
7
편집마담로우즈의 파트론은 석달이 멀답시고 바뀌어진다. 그 맨 최근의 파트론이 유변호사인 줄은 일군들도 짐작을 한다. 그래서 유변호사가 들어앉은 마담의 방앞으로는 그림자조차 얼씬 않는다.
이층 좌석에서는 술취한 사람들이 여러 차례 마담을 불렀다. 그러나 방문이 굳게 닫혀진 마담의 방안에서 마담의 빨간 입술은 지금 취객의 부름에 대답할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먹고 말하는 기능 이외의 또 하나의 기능을 인간의 입술은 갖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방안으로부터 말소리가 도란도란 들려 나왔다.
『결혼을 해도 나한테 올래?』
『오고 말고.』
『젊은 것 데리고 좋아할 생각을 하면 죽이고 싶네.』
『이 품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장가를 못 가서 섭섭할 거야.……도대체 어떤 년인데?』
『그저 그렇구 저렇구 하지.』
『그 년의 팔자도 고약하지. 하고 많은 게 사네녀석인데, 하필 왜 이런 악마와 같은 남자를 골랐어?』
『악마는 신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무슨 소리야?』
『마담로우즈는 지금 악마 유민호와 같은 영역의 거주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거야. 지금 자기가 악마라고 생각해요?』
『뭐가 뭔지, 난 모르겠어.』『마담은 지금 자기가 천사라고 생각해요?』
『모르겠다니까, 글쎄……』
『그러나 마담은 자기가 악마도 천사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만은 깨닫고 있을 거야.』
『거야 그렇지만……』
『세상은 민주주의가 되고 자유주의가 되었다. 이 사실은 다시 말하면 일부 독재적인 강권 주의자들만이 향유하던 악마의 영분(領分)을 백성에게 공평히 분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이냐? 박탈되었던 인간성의 탈환이다. 인간성이란 본능의 순수성을 말하는 것이야. 이리하여 인간성이 순수를 옹호하는 것은 악마의 예술가 뿐이다.』
『악마야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너무 흥분하지 말아요.』
『그러기 때문에 악마는 예술가를 좋아하는 거야. 예술가만이 인간의 악마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밖의 온갖 정치적인 것, 종교적인 것, 교육적인 것들은 모두가 다 인간성의 불순과 억압을 꾀하는 악마의 것일 수밖에 없어!』
『악마의 강의는 인제 그만해요.』
자기 딸과 정부의 유민호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게 된 것을 기연(奇緣)이라고 마담은 말했을 때, 유민호는,
『그런 숙성한 딸이 있으면 왜 내게 소개를 안했어?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으니까 좀 보여 줘요.』
『말 좀 삼가해요! 벼락을 맞아도 좋아?』
『악마가 다 벼락을 맞아 죽었으면 종교는 오늘날처럼 성행하지는 않았을 거야.』
『최후의 심판을 받아야 할 거야.』
『심판자는 언제든지 권력자가 되는 법이야.』
『참, 사내들은 악마야!』
『여자들은 천사고……』
『이래서 요리집 자녀들은 시집 장가를 못간다는 말도 들을 법하지.』
『그런 말 들었어?』
『그래 한바탕 해대기는 했지만……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야. 맹자님의 어머니는 삼천(三遷)을 하셨다는데 이런 악마들이 무서워서 어서 어서 치워 버려야겠어! 또다시 그런 부질없는 수작을 해봐라! 내 성미 알지?』
『네네, 잘 알아 모십죠.』
마담과 유민호는 비로소 옷 주제를 단정히 거두고 보이를 불러 저녁 식사를 청했다.
마담의 꽃무늬를 흰 머리핀이 두 동강이로 부러져 나간 채, 여기 한 쪼각 저기 한 쪼각 방안에 흩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