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45장

45.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물

“민구 오빠, 미안해!”

영란은 민구의 흙 묻은 옷을 털어 주며 감사에 넘치는 얼굴로 민구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그 자식이 깨알곰보와 한패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면서 민구는 흩어진 신문 뭉치를 다시 옆구리에 끼었다.

영란은 이번에는 다릿목 쓰레기통 옆에 서 있는 은철이 앞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코피가 흘러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은철은 종잇조각으로 묵묵히 문지르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은철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영란의 가슴은 알지 못할 감격으로 콱 막혀 버리는 것 같았다. 영란의 눈은 뭉클하게 솟구쳐 나오는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피 묻은 얼굴을 문지르고 있던 은철은 영란이가 내주는 손수건과 영란의 눈물 젖은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은철은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잠자코 영란의 손에서 손수건을 받아 쥐었다. 너무나도 하얀 손수건이었다.

은철은 새하얀 손수건에 피를 묻히기가 아까워서 받아 쥐었던 손수건을 도로 영란에게 내주며 말했다.

“넣어 둬.”

“괜찮아. 어서 그걸로 닦아.”

영란은 은철의 손등을 가만히 밀었다.

“손수건이 아까워, 그냥 넣어 둬.”

“아깝긴...... 손수건 하나가 뭐가 그리 아깝다고......”

영란은 은철의 손에서 손수건을 받아 쥐고는, 은철에게 바싹 다가서며 제 손으로 은철이의 얼굴에 묻은 피를 정성 들여 닦기 시작했다.

“괜찮아, 가만있어.”

영란은 골고루 피를 닦아 주고 나서 말했다.

“나를 용서해 줄래?”

그러면서 영란은 은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슬 같은 눈물이 새까만 두 눈동자를 담뿍 감싸고 있었다.

“용서는...... 용서는, 내가 무슨 용서를......”

더듬거리는 말로 은철은 대답했다.

“아냐. 나는 용서를 받아야 돼. 내가 나빴어! 나는...... 나는......”

영란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영란의 그 참된 후회의 눈물을 바라보자, 아프도록 맺혀 있던 은철이의 가슴속에서도 어느새 다사로운 감정의 실마리가 맑은 샘물처럼 솟구쳐 나왔다.

“울지 마라!”

은철은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 은주에게 대하던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부드러운 감정으로 영란에게 말했다.

“영란아, 울지 마! 네 눈물은 나의 모든 감정을 깨끗이 씻어 주었어. 자아, 이제 그만 울고 빨리 집으로 가서 은주를 만나 보자.”

은철은 영란의 손에서 손수건을 받아 쥐고, 그것으로 이번에는 영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은철아, 빨리 가자. 너무 늦었다.”

그 때 민구가 옆에서 재촉하는 바람에, 일행은 저녁 어스름이 내리깔린 청계천 길을 걸어 종로 4가 전차 정류장까지 왔다.

“나는 신문을 마저 팔고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

“응, 그래라. 민구야, 오늘 고맙다.”

은철이가 영란을 대신해 민구에게 감사의 말을 하였다.

“민구 오빠, 내일 꼭 예술회관으로 구경하러 와야 돼?”

“응, 꼭 갈게!”

그러면서 민구는 곧바로 신문 사라는 소리를 외치며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신문요! 내일 아침 신문요!”

은철은 구두 닦는 상자를 둘러메고 영란과 함께 전차를 탔다. 삼선교에서 둘은 내렸다. 영란은 다릿목 가게에서 달걀 다섯 개를 샀다.

“은주 갖다 줘야지.”

그러면서 영란은 은철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은철이도 무척 기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섭게 자리 잡았던 흐린 감정의 물결이 넓고 넓은 푸른 바다를 향해 좌악 쏟아져 나가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둑어둑한 개천가 길을 걸어 언덕 위에 있는 판잣집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은철이와 영란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 불이 켜져 있고,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대구로 출장을 갔던 이창훈 씨가 부인과 함께 은주를 찾아와서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아, 아버지!”

영란은 고함치듯 아버지를 부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오, 영란이냐? 그리고 은철 군도......”

이창훈 씨 내외는 영란이와 은철이가 사이좋게 들어서는 것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은철이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은철 군. 얼굴은 왜 다쳤는가?”

그 말에 영란이가 나서서 오늘 거리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쭉 털어 놓았다.

“아이, 어쩌면......”

부인이 크게 감동하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음, 은철 군, 감사하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영란이와 사이가 좋아졌다는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야. 모든 것은 은철 군의 그 성실한 마음의 덕택일세. 영란이가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도 좋은 일이고, 자네의 성실성이야말로 미래에 스스로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네.”

“선생님, 무슨 그런 과찬의 말씀을......”

“아니야, 부모의 말도 선생님의 말도,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던 영란이가 은주의 노래에 머리를 숙이고 자네의 성실성에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결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은주도 훌륭하고 은철 군도 훌륭하지만, 이제 보니 영란이에게도 좋은 점이 있었군. 음, 그래! 그랬어!”

이창훈 씨는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부인은 옆에서 계속 “어쩌면! 어쩌면!” 하고 감탄의 소리만 연발했다.

“그런데 은주는 좀 어때요?”

영란은 어머니와 은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주 좋은 편이다. 아침과 점심때보다도 더 기운이 났단다.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콩쿠르에 나가겠다고 어떻게나 열심인지......”

“아이, 좋아! 은주야.”

“응?”

“너 정말 괜찮니?”

“응, 괜찮아. 오늘 밤만 지나면 문제없어.”

은주도 어지간히 자신 있는 대답을 했다.

“아이, 그럼 됐다! 오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그 때 부인이 손수 식사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자아, 오늘은 우리 여기서 은주와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하자.”

그 때 영란은 달걀 다섯 개를 내놓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이거 은주 주려고 사 왔어요.”

“아이고, 우리 영란이가 언제부터 이처럼 어른이 됐나?”

그 말에 아버지는 영란이가 대견한 듯 웃으며 칭찬을 했다.

“동생이 또 하나 생겼으니, 언니 노릇 제대로 하려고 작정했구나.”

“아이, 아버지도 참......”

영란은 은주를 힐끗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은철이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 때, 은철은 주머니에서 꽁꽁 묶은 돈 뭉치를 꺼내 이창훈 씨 앞에 내놓았다.

“선생님, 이건 제가 선생님께 허락 없이 빌려 썼던 2만 원입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받아주십시오.”

은철은 그 동안 푼푼이 모아 두었던 손때가 새까맣게 묻은 돈을 이창훈 씨 앞에 내놓았다. 이창훈 씨 내외는 눈이 동그래지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과연 은철 군은 정직한 소년이야! 그 지극한 성실성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이 돈은 받겠다! 그리고 이 돈은 아무 데도 쓰지 않고 오래 오래 간직해 두고, 우리 집안의 교훈으로 삼겠다! 음, 참으로 훌륭한 돈이다!”

이창훈 씨는 정말로 그 새까맣게 손때가 묻은 돈 뭉치를 무슨 귀중한 보물처럼 생각하며, 영란에게 그 피 묻은 손수건을 달라고 해서는 거기에 정성 들여 꼭꼭 싸면서 말했다.

“여기 있는 때 묻은 돈과, 피 묻은 이 손수건은 우리 가정의 귀중한 보물이다. 영란이는 이제부터 마음이 거칠어질 때마다 이 손수건과 때 묻은 돈을 가만히 들여다보아라! 그러면 거칠어진 마음의 물결이 잔잔해질 것이다. 알겠니, 영란아?”

“네, 잘 알겠습니다. 아버지!”

영란은 머리를 푹 숙이고 진심으로 대답을 했다.

“피 묻은 이 손수건과, 은철 군이 애써 마련한 손때 묻은 돈...... 이것이야말로 실로 고귀한 보물이라는 것을 모두 알아야 해. 음......”

이윽고 모두는 경건한 마음으로 단란한 저녁상에 둘러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