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11. 고려 4

교수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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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고려 말기의 약 40년간의 정세와 함께 고려 멸망의 모습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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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제31대】 이후 4대 40여 년간은 고려의 말기로서, 이 왕이 즉위한 때는 일본의 고무라카미(後村上) 천황 【제97대】 시대에 해당한다.

변경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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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신라 통일시대의 중기 무렵, 즉 일본에서는 헤이안(平安) 시대 초기 무렵부터 신라의 국정은 점차 문란해져, 그 변방 백성들은 일본의 규슈(九州)로 나갔으며, 아울러 일본해 연안을 여러 차례 괴롭혔다. 때문에 일본은 그에 대한 방비를 엄중히 했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자 이러한 일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고려의 말기에 이르러 공민왕이 즉위하기 얼마 전부터, 일본에서는 소란이 계속되어, 천황은 요시노(吉野)로 행차하셨으므로, 중앙 정부의 명령은 국내에서 널리 행해지지 못했으며, 그에 편승하여 변방 바닷가의 인민들은 배를 타고 나가 마음대로 중국이나 조선 연안의 백성을 괴롭혔다. 이에 중국과 고려의 백성들은 크게 괴로워했으며 그들을 왜구(倭寇)라고 불렀다. 고려에서는 공민왕 이후에 그 피해가 매우 심각하자, 여러 차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침범을 막아 줄 것을 요청했다. 때문에 바쿠후(幕府) 등에서도 침범을 중지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쉽게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명·원과 고려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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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때, 그때까지 대단히 광대한 국토를 보유하고 있던 원나라도 분열되어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며, 중국의 남부에서는 명나라가 일어났다. 명나라가 점차 북쪽을 공격하여 마침내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함락시킨 것은 같은 왕 17년이다. 원나라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북쪽 몽고 지방으로 달아나 겨우 그 나라를 유지했다. 이러한 까닭에 고려의 신료들 가운데에는 새롭게 명나라를 섬기자고 하는 자들과 과거와 같이 원나라를 섬기자고 하는 자들의 두 파가 생겨나 서로 권세를 다투었다. 이것이 고려 말기의 모습이었다. 이때 고려의 신하들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이성계(李成桂)였다.

이성계 및 그의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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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조상은 원래 전주(全州)에서 살다가 신라의 신하로 지냈지만, 후에 까닭이 있어 함경도로 이주했다. 때문에 원나라가 함경도 지방을 차지할 무렵에는 원나라를 섬겨 그곳의 지방관이 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공민왕 때에는 원나라가 크게 쇠약해지자, 왕은 공공연히 원나라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여, 이 왕 5년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원나라의 연호를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장수를 파견하여 영흥(永興)의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했다. 【쌍성총관부에 관해서는 이 책 고려 2 비고 7 「고려의 영토」 참조】 이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후에 추존하여 환조(桓祖)라고 했다.】 은 영흥에 있었는데, 왕명을 받들어 몰래 고려군을 도와, 쉽게 성을 함락할 수 있도록 했다. 이자춘은 후에 그 공으로 이 방면의 지방관 【삭방도(朔方道)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 에 임명되어, 함흥(咸興)에 있으면서 고려의 국경을 안정시켰다. 이것이 이씨가 드러나는 시작이다. 그 후 이성계는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아 오랫동안 이 방면에서 재임했지만, 당시 함경도의 북부에는 여진족(女眞族)이 대단히 많이 살고 있어, 반역과 복종이 항상 일어났으므로, 늘 그것을 안정시키고 위무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또한 여러 차례 그 지방들에서 왜구를 방어하고 그들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리하여 이름이 크게 알려졌으며 마침내 국정(國政)에 참여하는 데까지 오르게 되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당시 고려는 나라의 운명이 매우 곤란한 처지여서, 때로는 원나라와 친했고 때로는 명나라와 친하여 그 방침이 일정하지 않았지만, 이성계는 처음부터 명나라와 친하게 지낸다는 방침을 취하고 점차 세력을 획득했으며, 마침내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제32대】 을 추대하여 옹립했다.

고려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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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과거의 공훈이 혁혁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왕을 추대하여 옹립함으로써 위세가 그보다 더한 자가 없었으며,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뜻을 이성계에게 기울이고, 그를 왕으로 추대할 그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단지 정몽주(鄭夢周) 등은 그 계획을 반기지 않고 오히려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반대자에게 암살당했으며, 그 결과 완전히 이성계에게 저항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양왕은 폐위당하고 이성계는 많은 사람이 바라던 대로 대신 왕위에 올랐다. 이 해는 일본에서는 바로 고카메야마(後龜山) 천황 【제98대】 이 고코마쓰(後小松) 천황 【제99대】 에게 황위를 물려주셨으며, 이른바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의 분쟁이 완전히 없어진 겐추(元中) 9년에 해당한다. 고려는 태조가 건국하고부터 이때까지 34왕 475년 만에 멸망했다.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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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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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삼한(三韓) 통일 후에도 일본에게 조공(朝貢)했다는 것은, 나라(奈良) 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국사(國史)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헤이안(平安) 시대에 들어서는 조공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변방 백성들이 배를 타고 와서 이키(壹岐), 쓰시마(對馬)와 더불어 규슈(九州) 등에 출몰하여, 일본의 연안 지방들을 노략질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그에 대해 방비를 매우 삼엄하게 했는데, 고려 시대가 되자 이들 변방에 대한 침입은 매우 드물어졌다. 그런데 호조씨(北條氏) 바후쿠[幕府]가 실권을 장악할 무렵부터, 일본 변경 바다의 백성들이 배를 타고 조선 연해에 출몰하는 일이 있게 되자, 고종(高宗) 때 【같은 왕 10년】 왜구(倭寇)라는 말이 처음으로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이 무렵은 단지 일본인뿐만 아니라 송나라 사람들도 많이 무역을 주로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협박하여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그 후 원나라가 고려와 함께 일본을 침략했다. 【겐코[元寇]를 말한다.】 이때부터 왜구의 성질은 눈에 띄게 악화되어, 고려 및 원나라의 해안에 이르는 곳은 피해를 입었으며, 고려에서는 폐왕(廢王) 우(禑) 시대에 그 피해가 가장 심했다. 고려의 나흥유(羅興儒), 정몽주(鄭夢周) 같은 학자들이 사신으로 와서 침략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 왕 때이다. 그런데 이 무렵의 왜구에는 조선인이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바쿠후[幕府]와 더불어 규슈의 탐제(探題)도 모두 그 요청에 대해 크게 호의를 나타내어 침입을 금지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쉽게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씨 조선 초기에 이르게 된다.

신우·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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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제31대】 23년에 왕은 환관에게 시해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우(禑), 창(昌), 요(瑤)가 대를 이어 가며 즉위했다. 이들 네 왕은 곧 고려 말기의 왕들로서, 그들의 재위 연수를 합치면 41년이다. 위의 왕들 가운데 우, 창, 요는 모두 폐위당했으며, 요는 이조 태종 때 공양왕(恭讓王)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지만 다른 두 왕은 시호를 받지 못했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그들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 이 폐왕 우의 출생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역사가들이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씨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여러 서적들에 따르면, 우는 사실은 신돈(辛旽)이 첩인 반야(般若)를 받아들여 낳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공민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우를 자기의 아들로 거짓으로 칭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폐왕 창은 우가 이인임(李仁任)의 조카딸을 아내로 삼아 낳았다고 한다. 따라서 보통은 이들 두 왕은 고려 왕씨(왕씨)의 후예가 아니라고 하여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고려와 이조의 학자로서 우와 창이 신씨(辛氏)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것을 확정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본서(本書)에서는 단지 우(禑) 및 창(昌)이라고 부른다.

이성계 등의 위화도 회군부터 고려 멸망까지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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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환관에게 시해되어 후계의 문제가 발생하지만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이 많은 사람의 의견을 뿌리치고 우(禑)를 옹립한다. 왕은 이때 나이가 고작 10세였다. 이인임은 왕을 옹립한 공으로 정권을 전횡하여, 정몽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해진다는 방침을 취했다. 당시 왜구를 방어하는 등의 무공(武功)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 두 사람이었다. 우 말년에 이인임이 늙어 병이 들자 벼슬에서 물러나고 최영이 대신 정권을 장악했으며, 왕은 그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최영은 이인임과 마찬가지로 친원파(親元派) 사람이었으므로 왕 말년 【14년】 에 왕과 모의하여 여러 도(道)의 병력을 불러 모은 뒤 명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최영이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으로 출진(出陣)했으며,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출병했다. 이성계는 출병이 불가함을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을 때 두 장수는 나아가 강을 건너지 않고 함께 임금에게 글을 올려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가서, 우선 최영을 잡아 그를 유배시키고, 왕을 강화(江華)로 추방했다. 【후에 둘 다 죽임을 당했다.】 이 때문에 다시 또 후계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결국 조민수의 계책으로 우(禑)의 아들 창(昌) 【이인임의 조카딸인 근비(謹妃)가 낳았다.】 을 맞이하여 옹립했다. 왕은 이때 나이가 고작 9세였다. 그런데 그 후 조민수와 이성계 두 사람의 반목이 심해졌는데, 조정 신하들의 대다수가 이성계와 한 편이었으므로, 이에 편승하여 먼저 조민수의 죄를 물어 그를 유배시켰고, 이어서 왕을 폐위하여 강화로 쫓아내어 평민이 되게 했다. 창이 왕위에 오른 지 고작 1년 만이었다. 이리하여 이성계는 왕씨(王氏)의 종실(宗室)인 요(瑤)를 왕으로 맞이하여 옹립했다. 이미 이성계의 공훈 및 위세와 명망은 그와 어깨를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이 비밀리에 그를 추대하려고 했으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芳遠)도 역시 여기에 참여했다. 정몽주 등은 이에 반대하여 이성계에게 가담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므로, 방원은 기선(機先)을 제압하여 휘하의 무사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정몽주를 암살하게 했다. 그 후 4개월 만에 요를 폐위시켜 원주(原州)로 보내고, 이어서 이성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씨 대신 정권을 장악했다. 실로 요가 즉위한 지 4년 7개월 만이었다. 폐왕 요는 이어서 간성(杆城)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삼척(三陟)으로 옮겨 갔지만, 후에 살해되었다. 이조 태종 때 공양왕(恭讓王)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