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1/10. 고려 3

교수요지 편집

본과에서는 주로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시대의 문화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

주자학의 전래 편집

이미 서술했듯이 고려 초기에는 그 문화가 상당히 성황을 이루었지만, 중기에 들어서서 발전하지 못했다. 특히 무인(武人)이 세력을 얻고 또 전란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무(武)를 숭상하고 문(文)을 천시하여 학문이 크게 쇠퇴했다. 원나라에 복속된 후에 문운(文運)이 점차 회복되는 듯했지만, 오히려 승려들이 한학(漢學)을 가르치는 양태였다. 이 시대의 사건으로서 기억해야 할 것은 주자학(朱子學)이 전래된 것이다. 이 학문을 전한 것은 백이정(白頤正)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충숙왕(忠肅王) 【제27대】 때 원나라에 갔다가, 당시 그의 나라에 유행하던 정주(程朱)의 학문을 배워 돌아왔다. 이것이 조선에서의 주자학의 시초이다. 이제현(李齊賢) 【호는 익재(益齋)】 등이 주자학을 배웠으므로, 이 학문은 처음으로 흥성했고, 고려 말기에는 이색(李穡), 【호는 목은(牧隱)】 정몽주(鄭夢周) 【호는 포은(圃隱)】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이조(李朝)에 이르러 점점 더 발전했다.

불교와 미신 편집

불교는 태조 왕건 이래 역대 왕들이 깊이 존중하여 믿었으므로, 신라 시대보다 한층 융성했다. 정치에서는 갖가지 변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각 시기를 통하여 줄곧 쇠퇴하지 않았으며, 왕자 등이 승려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문종(文宗) 【제11대】 때 불교가 가장 융성하여, 이 왕 21년에 지은 흥왕사(興王寺) 【절터는 경기도 개성군 진봉면 흥왕리에 있다.】 라는 대가람(大伽藍)은 공사에 12년이 걸렸다. 또 문종의 왕자인 후(煦)는 가장 유명한데, 송나라에 가서 법(法)을 구했으며, 또한 많은 불서(佛書)들을 구해 왔다.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라고 한다. 그렇지만 불교가 너무 성행하여 재력(財力)을 낭비하게 되고, 또는 정치적으로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것이 결코 적지 않았다. 공민왕(恭愍王) 【제31대】 때 왕은 승려 신돈(辛旽)을 믿고 국정을 맡겼으므로, 신돈의 전횡은 나날이 심해져, 의복과 수레 등이 왕의 것에 비길 정도였으며, 그 패거리가 조정에 가득했는데, 마침내 모반을 꾀하여 유배에 처해졌고 이어서 주살되었다. 이것이 불교의 정치적 폐해 중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또 신라 무렵부터 풍수설(風水說)이라는 일종의 미신(迷信)이 성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현혹하였다.

비고 편집

백이정 편집

백이정(白頤正)은 남포군(藍浦郡) 【충청남도】 사람으로, 보문각(寶文閣) 학사(學士)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이다. 백이정은 충선왕(忠宣王) 【제26대】 을 섬겼는데, 왕을 도와서 인도하는 데 뜻을 두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이때 정주(程朱)의 학문이 처음으로 중국에서 시행되었지만 아직 고려에 전해지지 않았다. 백이정은 원나라에 있을 때 정주의 학문을 배워 돌아와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등에게 전했다. 이로 인해 주자학(朱子學)이 반도에서 전해졌다.

이제현 편집

이제현(李齊賢)은 자(字)가 중사(仲思)이고 호는 익재(益齋)이다. 충렬왕 【제25대】 13년에 태어났다. 나이가 15세가 되자 성균관(成均館)의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때마침 백이정은 원나라에서 정주(程朱)의 학문을 터득하여 돌아오자, 이제현은 이를 크게 기뻐하여 주자학을 배웠다. 이로 인해 송나라 유교의 성리(性理)의 학문이 비로소 고려에 전해졌다. 충선왕(忠宣王) 【제26대】 은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내외의 학자들을 불러모았다. 이제현도 역시 초대되어 원나라로 건너가 석학들과 왕래하여 학문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 후 왕은 자리에서 물러나 항상 원나라에 있었지만, 모함을 받아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었다. 이제현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사면을 요청하여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충목왕(忠穆王) 【제29대】 이 즉위할 당시 나이가 겨우 8세였다. 이제현은 왕의 스승이 되어 모든 정성을 다해 왕을 인도하는 데 힘을 쏟음과 동시에, 찬수(纂修)의 사업에도 종사하여 공을 세웠다. 공민왕(恭愍王) 【제31대】 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 81세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라고 한다. 『익재집(益齋集)』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이색 편집

이색(李穡)은 자가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다. 찬성사(贊成事)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원나라에서 살면서 학문을 배워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하며, 또한 시문(詩文)을 잘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 원나라에서 돌아와, 임금에게 글을 올려 당시의 폐정(弊政)을 논하고, 이어서 원나라가 개성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유관(儒官)이 되었으며, 또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직했다. 이색은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가르쳤으며, 강의가 끝나면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학자들이 대단히 많이 모였으며, 정주(程朱)의 학문이 크게 일어났다. 폐왕(廢王) 우(禑)는 이색을 사부(師傅)로 삼았으며, 한산군(韓山君)에 봉했다. 조민수(曺敏修)가 우를 폐위하고 창(昌)을 왕으로 세우려 하여,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인 이색의 말을 빌리려고 몰래 그것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이색은 그것을 찬성했다. 이 때문에 조민수가 죄를 짓게 되자 이색도 역시 그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함창(咸昌)으로 유배되었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여 일단 용서받고 돌아왔지만, 정몽주가 죽임을 당하자 그에 연루되어 그의 둘째 아들과 함께 파직되어 유배되었다가, 여흥(驪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9세 때이다.

정몽주 편집

정몽주(鄭夢周)의 자는 달가(達可)이며, 호는 포은(圃隱)이다. 공민왕 9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선발된 첫 번째 사람이다. 정몽주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문에 뛰어났으며, 정주(程朱)의 학문에 정통했다. 때문에 동방이학(東方理學) 【즉 정주(程朱)의 학문】 의 시조라고 불렸다. 벼슬은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했다. 정몽주는 성격이 호탕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도 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힘쓴 적도 적지 않았다. 또 폐왕 우 시기에, 일본 【하카타(博多)】 에 사신으로 가서 침략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고, 일본의 유학자들과 만나 글로써 이름을 알렸다. 공양왕 때, 정몽주는 대명률(大明律)과 원나라와 고려의 법령을 참작하여 새로운 법령을 지어 올렸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위세와 덕망이 나날이 높아지는 것을 꺼려했으며, 또한 그가 야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비밀리에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를 추대할 계책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틈을 타 일을 도모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꾸로 반대파들이 먼저 일을 도모했다. 공양왕 4년에 이성계가 세자 석(奭)이 명나라에 가서 조현(朝見)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을 맞이했으며, 이어서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했으므로,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으로 가서 그를 문안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이방원(李芳遠) 등에게 암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대각국사 편집

대각국사(大覺國師) 후(煦)는 자가 의천(義天)이며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이다. 태조 왕건 이후 역대 왕들은 독실하게 불교를 믿어 서자(庶子)는 반드시 승려가 되어야 한다고 정했다. 후는 적출(嫡出)의 왕자였지만, 어려서 출세의 뜻을 접고 스승을 따라 영통사(靈通寺)에서 살았다. 자질이 총명하여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유교와 불교에 모두 통달했다. 후는 송나라에 들어가 법(法)을 구하려고 했지만 부왕(父王)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종(宣宗) 2년에 재상의 적극적인 간언에도 불구하고 몰래 제자 두 명과 송나라 상선을 타고 송나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성지를 탐방했으며, 명승(名僧)들을 방문한 뒤 이듬해 귀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했다. 후는 또한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불서(佛書)를 요(遼), 송(宋) 및 일본(日本)으로부터 약 4천 권을 구입하였는데, 그것들을 모두 간행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쪽을 유람하여 명산(名山)들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해인사(海印寺)에서 거주했다. 숙종(肅宗) 【제15대】 이 즉위하자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 왕 6년에 4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라고 한다.

신돈 편집

신돈(辛旽)의 처음 이름은 편조(遍照)였으며, 계성현(桂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영산군(靈山郡) 안에 있다.】 옥천사(玉川寺)의 한 천한 승려였다. 공민왕(恭愍王) 【제31대】 이 몰래 불러서 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공민왕은 신돈이 매우 총명한 것을 크게 기뻐했으며, 마침내 그를 믿고 사부(師傅)로 삼았으며, 국정을 자문하여 그의 말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14년에 왕은 그를 진평후(眞平侯)에 봉했는데 이때부터 더욱 존중받았으며, 이름을 ‘돈(旽)’으로 고쳤다. 이리하여 신돈은 전횡이 날로 심해져 의복과 수레 등이 왕의 것에 비길 정도였으며, 그의 패거리들이 조정에 가득했는데 마침내 왕을 해치려고 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스스로 안심하지 못했으며 점차 그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20년에 체포하여 수원(水原)으로 유배시켰으며 이어서 그를 주살했다.

고려판 대장경 편집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때 불교가 처음으로 조선반도에 전래된 이후 경문(經文)의 수입, 서사(書寫), 간각(刊刻) 등은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대장경 전체를 판각(板刻)하여 인쇄 발행한 것은 고려 현종(顯宗) 및 고종(高宗) 때의 두 번뿐이다. 그런데 전자는 이미 유실되어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지만, 후자는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海印寺)에서 경판(經板)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수량은 8만 1137매이다. 거의 누락된 판이 없다. 이 경판은 원래 몽고의 폭압을 물리치기 위한 고종의 발원(發願)에서 시작되었으며, 15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670년 전】 현존하는 대장경 가운데 가장 완비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참으로 세계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설 편집

풍수설(風水說)은 또 지리법(地理法), 상지술(相地術), 감여술(堪輿術) 등이라고도 부른다. 풍수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藏風得水]라는 의미이다. 즉 산이나 강의 형세의 특수한 조건에 적합한 땅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곳에 도읍, 궁궐, 무덤 등을 정함으로써, 한 나라나 한 가정의 번영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설(說)은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대에 성행했으므로, 반도에서는 그의 영향을 받아, 이미 신라 통일시대부터 행해졌으며, 고려 시대에 들어서서 더욱 성행했다. 그렇지만 신라와 고려에서는 주로 도읍 건설, 마을 건설[設邑], 궁궐 건립의 경우에 사용되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능묘(陵墓)의 위치 선택에도 이 설을 응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조(李朝) 시대에 들어서서 한층 왕성하게 보급되었으므로 상하 모두가 이 미신에 빠져들었으며 온갖 폐해를 낳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고려 시대에는 서운관(書雲觀)이라는 관청을, 이조 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천문(天文), 지리(地理)에 관한 사항을 관장했다. 오늘날에도 민간에서 일관(日官)이라 불리며, 택지(擇地), 복일(卜日) 등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 앞에서 기록했듯이 풍수설은 신라 시대부터 행해졋는데 누구에 의해 전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개 도선(道詵)을 이 설의 시조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그의 약전(略傳)을 덧붙인다.

도선 편집

도선(道詵)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다.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신라 흥덕왕(興德王) 【제42대】 2년에 전라남도 영암(靈巖)에서 태어났다. 나이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 【구례군 지리산의 화엄사】 의 승려가 되었다. 나이 20세 무렵에 혜철대사(惠徹大師) 밑에서 배워 크게 깨우침을 얻었다. 이리하여 명성이 사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도선은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雞山) 옥룡사(玉龍寺) 【절터는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면에 있다.】 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좋아하여, 이곳에서 남은 생을 마치기로 했다. 때문에 옥룡자(玉龍子)라고 부른다. 헌강왕(憲康王) 【제49대】 은 그를 불러 궁중에 머물도록 했지만 곧 산으로 돌아갔으며, 신라 효공왕(孝恭王) 【제52대】 2년에 72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궁예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라고 칭하기 3년 전】 도선은 일찍이 비범한 사람을 만나 모래를 모아서 산천순역(山川順逆)의 이치를 배웠는데, 그로부터 더욱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법을 연구했다. 그곳이 지금의 구례군(求禮郡)이다. 그는 역시 일찍이 송악군(宋岳郡)에 갔다가 우연히 융(隆) 【왕건의 아버지】 의 집을 지났는데, 훗날 왕건이 태어나 왕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비한 전설들은 원래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도선이 풍수지리설에 통달한 신승(神僧)이라고 부르는 것, 특히 고려 태조의 출생을 예언했다고 일컫는 것은, 고려의 역대 왕들과 일반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받들어 마지않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현종(顯宗) 【제8대】 때 처음으로 도선에게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숙종(肅宗) 【제15대】 은 그에게 왕사(王師)라는 칭호를 더했으며, 인종(仁宗) 【제17대】 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했고, 의종(毅宗) 【제18대】 은 명령을 내려 그의 비석을 세웠다. 이처럼 그는 풍수설의 유행과 함께 세상 사람들의 독실한 존숭과 믿음을 받았으며, 예로부터 전해 오는 『도선밀기(道詵密記)』 등으로 일컬어지는 비서(秘書)가 민간에 유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한 바가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