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아동용/권2/7.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 편집

광해군(光海君) 【제15대】 때에 남만주(南滿洲)에 있는 여진족(女眞族)이 일어나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금(金)이라고 했다. 명나라는 크게 놀라 이를 정벌했으며, 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 도왔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의 장수들은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거나 전사했다. 금나라는 나아가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도읍을 지금의 봉천(奉天) 【성경성(盛京省)】 으로 옮겼다.

이괄의 난 편집

광해군은 무도(無道)하여 폐위되고, 왕의 조카가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를 인조(仁祖) 【제16대】 라고 한다. 이괄(李适)이라는 자가 인조가 즉위하는 일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지만, 상이 적은 것에 원한을 품고 마침내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수도를 빠져나와 공주(公州)로 난을 피했다. 곧 이어서 이괄이 주살되고 난이 평정되자 그 잔당들은 금나라로 도망갔다.

청나라의 침략 편집

금나라는 조선이 몰래 명나라를 지원하는 것에 원한을 품고, 조선에서 투항해온 장수를 안내자로 삼아 장수를 파견하여 공격했다. 이때가 인조 5년 【정묘년】 이다. 왕은 한때 강화도로 피신했지만, 곧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서로 배신하지 않기로 서약했다. 그 후 10년 동안 금나라는 그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금나라 군주는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으며, 나아가 명나라를 정벌하기로 하고 먼저 조선을 복속시키려고 했다. 조선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청나라의 태종(太宗)은 스스로 군대 10만 명을 이끌고 와서 공격했다. 인조는 왕자 등을 강화에 보내고 스스로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 으로 들어갔으므로 태종은 나아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이때가 인조 14년 【병자년】이다.

청나라에 복속되다 편집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45일에 이르자, 성 안에는 식량이 부족했으며 지원병들은 도착하지 못하여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왕은 할 수 없이 성을 나와 청나라 군대에게 항복했다. 태종은 항복을 받을 단상을 설치하고 인조의 항복을 받아들였으며 인질을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조선은 영원히 청나라에 대해 속국(屬國)의 예의를 갖추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군이 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