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아동용/권2/13. 통감부의 설치

일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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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3년 【광무 4년】 에 청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이때 러시아는 대군(大軍)을 출병하여 만주를 점령했지만, 내란이 진정된 후에도 이를 반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대를 조선에 보내 점차 야심을 드러냈다. 만주와 한국은 모두 일본에 가까워 그 안위(安危)는 일본의 안위에 매우 큰 관련이 있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교섭했지만 러시아는 고의로 답변을 미루면서 육군과 해군의 군비(軍備)를 정비하여 일본을 위협했다. 이 때문에 일본과 러시아의 국교는 마침내 파기되고 일본 함대는 러시아 함대 2척과 인천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여 이를 격파했다. 이때가 메이지 37년 【광무 8년】 2월이었다.

일·한의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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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한국은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영구히 일본과 친교(親交)를 보장했으며, 일본 정부의 충고에 따라 국정의 개혁을 추진할 것을 약속했다. 이로부터 양국의 관계는 또한 급변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러시아 군대를 반도에서 몰아냈으며 더 나아가 적군과 전투를 벌여 해군과 육군 모두를 크게 격파했다.

일·한 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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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일본과 조선은 좁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서로 이해를 같이해 온, 입술과 이의 관계였다. 그런데 예로부터 두 나라는 어떤 때는 친했고 어떤 때는 멀어졌는데, 특히 근세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국력이 충분하지 못하여 항상 외교상으로 실패를 초래하여 연달아 일본이 불이익을 당했으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메이지 38년 【광무 9년】 에 러시아와 화의를 맺은 다음 점차 일·한(日韓) 양국의 관계를 긴밀히 함으로써, 양국의 안녕을 도모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실히 하려고 다시 한국과 협약을 맺었다.

통감부의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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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약을 맺은 결과, 일본 정부는 통감부(統監府)를 경성에 설치하고, 한국의 여러 외국에 대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했다. 이 때문에 후작(侯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에 임명되어 경성에 주재(駐在)했다. 【메이지 39년, 광무 10년】

헤이그 밀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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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0년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렸다. 이때 이상설(李相卨) 등이 한국 황제의 사절이라고 하면서 이 회의에 참석하여 협약의 잘못된 점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