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 (이상)

소녀 편집

소녀는 확실히 누구의 사진인가 보다. 언제든지 잠자코 있다.


소녀는 때때로 복통이 난다. 누가 연필로 장난을 한 까닭이다. 연필은 유독(有毒)하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탄환을 삼킨 사람처럼 창백하고는 한다.


소녀는 또 때때로 각혈한다. 그것은 부상(負傷)한 나비가 와서 앉는 까닭이다. 그 거미줄 같은 나뭇가지는 나비의 체중에도 견디지 못한다. 나뭇가지는 부러지고 만다.


소녀는 단정(短艇) 가운데 있었다——군중과 나비를 피하여. 냉각된 수압이——냉각된 유리의 기압이 소녀에게 시각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허다한 독서가 시작된다. 덮은 책 속에 혹은 서재 어떤 틈에 곧잘 한 장의 '얇다란 것'이 되어버려서는 숨고 한다. 내 활자에 소녀의 살결내음새가 섞여있다. 내 제본에 소녀의 인두자죽이 남아있다. 이것만은 어떤 강렬한 향수로도 헷갈리게 하는 수는 없을——


사람들은 그 소녀를 내 처라고 해서 비난하였다. 듣기 싫다. 거짓말이다. 정말 이 소녀를 본 놈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소녀는 누구든지의 처가 아니면 안 된다. 내 자궁 가운데 소녀는 무엇인지를 낳아놓았으니— 그러나 나는 아직 그것을 분만하지는 않았다. 이런 소름 끼치는 지식을 내어버리지 않고야 ——그렇다는 것이—— 체내에 먹어들어오는 연탄처럼 나를 부식시켜 버리고야 말 것이다.


나는 이 소녀를 화장(火葬)해 버리고 그만두었다. 내 후공(鼻孔)으로 종이 탈 때 나는 그런 내음새가 어느 때까지라도 저회(低徊)하면서 사라지려 들지 않았다.


육친의 장(章) 편집

기독(基督)에 혹사(酷似)한 한 사람의 남루한 사나이가 있었다. 다만 기독에 비하여 눌변이요 어지간히 무지한 것만이 틀렸다면 틀렸다.

연기오십유일(年紀五十有一).

나는 이 모조 기독을 암살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 일생을 압수하랴는 기색이 바야흐로 농후하다.

한 다리를 절름거리는 여인—이 한 사람이 언제든지 돌아선 자세로 내게 육박한다. 내 근육과 골편과 또 약소한 입방의 혈청과의 원가상환을 요구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게 그만한 금전이 있을까. 나는 소설을 써야 서푼도 안 된다. 이런 흉장(胸醬)의 배상금을——도리어——물어내라 그리고 싶다. 그러나——

어쩌면 저렇게 심술궂은 여인일까. 나는 이 추악한 여인으로부터도 도망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단 한 개의 상아 스틱. 단 한 개의 풍선.


묘혈에 계신 백골까지가 내게 무엇인가를 강요하고 있다. 그 인감은 이미 실효(失效)된지 오랜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그 대상(代償)으로 나는 내 지능의 전부를 포기하리라.)


칠 년이 지나면 인간 전체의 세포가 최후의 하나까지 교체된다고 한다. 칠 년 동안 나는 이 육친들과 관계없는 식사를 하리라. 그리고 당신네들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칠년 동안은 나를 위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혈통을 얻어보겠다——하는 생각을 하여서는 안 되나.

돌려보내라고 하느냐. 칠 년 동안 금붕어처럼 개흙만을 토하고 지내면 된다. 아니——미여기처럼.


실낙원(失樂園) 편집

천사는 아무데도 없다. ‘파라다이스’는 빈터다. 나는 때때로 이삼인의 천사를 만나는 수가 있다. 제각각 다 쉽사리 내게 ‘키스’하여 준다. 그러나 홀연히 그 당장에서 죽어버린다. 마치 웅봉(雄蜂)처럼——


천사는 천사끼리 싸움을 하였다는 소문도 있다.


나는 B군에게 내가 향유하고 있는 천사의 시체를 처분하여 버릴 취지를 이야기할 작정이다. 여러 사람들을 웃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S군 같은 사람은 깔깔 웃을 것이다. 그것은 S군은 오 척이나 넘는 훌륭한 천사의 시체를 십 년 동안이나 충실하게 보관하여 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까——


천사를 다시 불러서 돌아오게 하는 응원기 같은 기(旗)는 없을까.


천사는 왜 그렇게 지옥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지옥의 매력이 천사에게도 차차 알려진 것도 같다.


천사의 ‘키스’에는 색색이 독이 들어있다. ‘키스’를 당한 사람은 꼭 무슨 병이든지 앓다가 그만 죽어버리는 것이 예사다.

면경(面鏡) 편집

철필(鐵筆) 달린 펜축(軸)이 하나. 잉크병. 글자가 적혀있는 지편(紙片) (모두가 한 사람 치)

부근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읽을 수 없는 학문인가 싶다. 남아있는 체취를 유리의 ‘냉담한 것’이 덕(德)하지 아니하니 그 비장한 최후의 학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사할 길이 없다. 이 간단한 장치의 정물은 ‘투탕카멘’처럼 적적하고 기쁨을 보이지 않는다.

피(血)만 있으면 최후의 혈구 하나가 죽지만 않았으면 생명은 어떻게라도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피가 있을까. 혈흔을 본 사람이 있나. 그러나 그 난해한 문학의 끄트머리에 ‘사인’이 없다. 그 사람은——만일 그 사람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사람이면——아마 돌아오리라.

죽지는 않았을까——최후의 한 사람의 병사의——논공(論功)조차 행하지 않을——영예를 일신에 지고. 지리하다. 그는 필시 돌아올 것인가. 그래서는 피로에 가늘어진 손가락을 놀려서는 저 정물을 운전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결코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아니하리라. 지껄이지도 않을 것이다. 문학이 되어버리는 잉크에 냉담하리라. 그러나 지금은 한없는 정밀(靜謐)이다. 기뻐하는 것을 거절하는 투박한 정물이다.


정물은 부득부득 피곤하리라. 유리는 창백하다. 정물은 백골까지도 노출한다.


시계는 좌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계산하는 ‘미터’일까. 그러나 그 사람이라는 사람은 피곤하였을 것도 같다. 저 ‘칼로리’의 삭감——모든 기구(機構)는 연한(年限)이다. 거진거진 잔인한 정물이다. 그 강의불굴(强毅不屈)하는 시인은 왜 돌아오지 아니할까. 과연 전사(戰死)하였을까.


정물 가운데 정물이 정물 가운데 정물을 저며내이고 있다. 잔인하지 아니하냐.

초침을 포위하는 유리덩어리에 남긴 지문은 소생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그 비장한 학자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하여.


자화상 (습작) 편집

여기는 도무지 어느 나라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거기는 태고와 전승(傳承)하는 판도가 있을 뿐이다. 여기는 폐허다. ‘피라미드’와 같은 코가 있다. 그 구녕으로는 ‘유구한 것’이 드나들고 있다. 공기는 퇴색(褪色)되지 않는다. 그것은 선조가 혹은 내 전신(前身)이 호흡하던 바로 그것이다. 동공에는 창공이 응고하여 있으니 태고의 영상의 약도다. 여기는 아무 기억도 유언되어 있지는 않다. 문자가 닳아 없어진 석비처럼 문명의 ‘잡답(雜踏)한 것’이 귀를 그냥 지나갈 뿐이다. 누구는 이것이 ‘데드마스크’(死面)라고 그랬다. 또 누구는 ‘데드마스크’는 도적맞았다고도 그랬다.

주검은 서리와 같이 내려 있다. 풀이 말라버리듯이 수염은 자라지 않는 채 거칠어 갈 뿐이다. 그리고 천기(天氣) 모양에 따라서 입은 커다란 소리로 외친다——수류(水流)처럼.

월상(月傷) 편집

그 수염난 사람은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나도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늦었다고도 그랬다.


일주야(一週夜)나 늦어서 달은 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심통한 차림차림이었다. 만신창이 - 아마 혈우병인가도 싶었다.

지상에는 금시 산비(酸鼻)할 악취가 미만(彌蔓)하였다. 나는 달이 있는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나는 걱정하였다——어떻게 달이 저렇게 비참한가 하는


작일의 일을 생각하였다——그 암흑을——그리고 내일의 일도——그 암흑을——

달은 지지(遲遲)하게도 행진하지 않는다. 나는 그 겨우 있는 그림자가 상하(上下)하였다. 달은 제 체중에 견디기 어려운 것 같았다. 그리고 내일의 암흑의 불길을 징후하였다. 나는 이제는 다른 말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나는 엄동과 같은 천문(天文)과 싸워야 한다. 빙하와 설산 가운데 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달에 대한 일도 모두 잊어버려야만 한다——새로운 달을 발견하기 위하여——


금시로 나는 도도한 대음향(大音響)을 들으리라. 달은 추락할 것이다. 지구는 피투성이가 되리라.

사람들은 전율하리라. 부상(負傷)한 달의 악혈 가운데 유영하면서 드디어 동결하여 버리고 말 것이다.


이상한 귀기(鬼氣)가 내 골수에 침입하여 들어오는가 싶다. 태양은 단념한 지상 최후의 비극을 나만이 예감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드디어 나는 내 전방에 질주하는 내 그림자를 추격하여 앞설 수 있었다. 내 뒤에 꼬리를 이끌며 내 그림자가 나를 쫓는다.

내 앞에 달이 있다. 새로운——새로운——

불과 같은——혹은 화려한 홍수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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