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우애
“자네 이즘 뭘로 소일하나?”
“그저 그렇지”
길에서 만난 C가 물어볼 때에 A군은 오연히 이렇게 대답하고 지나가버렸다. C는 A군의 동창생의 하나인 재산가요, A군은 무직자였다.
“오 A군! 이즈음 생활이 어떠시오?”
“노형, 아픈 데 있소?”
다른 친구가 길에서 만나서 물을 때에 A군은 불유쾌한 듯이 이렇게 대답하고 휙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어떤 회사의 고급 사원이었다.
“자네 이즈음 용처 벌이나 하나?”
“자네가 돈 잘 벌어서 부자 되게.”
또 다른 친구에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장사하는 친구였다.
남이 아무 짓을 하든 무슨 관계야. 자기네들이나 어서 돈 많이 벌어서 잘
살지. 친구들이 자기에게 문안하는 것조차 A군에게는 수모와 같았다.
이전에 학교에 같이 다닐 때에는 모두 벗이었다. 그러나 일단 교문을 나서서 빽빽이 자기의 업에 달려든 다음부터는 모두들 적이 되었다.
부잣집 아들은 호강을 하였다. 재산 있는 사람은 월급쟁이가 되었다. 재산 없는 사람은 그래도 제 직업 하나씩은 붙들었다. 그러한 가운데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고 놀고 있는 A군이었다.
친구들이 그를 만나서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A군에게는 마치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데 자네는 뻔뻔 놀고 있나 하는 듯이 들렸다.
이제 언제, 이제 언제…… 그는 주먹을 부르쥐며 때때로 생각했다.
겨울이었다.
일없이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던 A군은 저녁때 무거운 다리를 집으로 돌렸다. 늙은 어머니를 어쩌나. 병신 누이동생을 어쩌나. 모두가 그에게는 근심 뿐이었다.
아아, 날도 춥거니와 세상도 춥다…….
그의 얼굴빛은 송장과 같이 핏기가 없었다.
집에는 아랫목에 어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병신 누이동생이 그 곁에 웅크리고 있었다. 방 안이 바깥보다 더 추웠다.
‘모두들 헐벗었구나.’
A군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책상 귀에 무슨 편지가 놓여 있었다.
“아까 누가 두고 가더라.”
“오늘 누가요?”
“내가 알겠니?”
A군은 봉을 찢었다.
‘친구의 정일세. 과동이나 하게.’
그리고 은행깍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A군의 얼굴은 하얘졌다가 문득 시뻘개졌다.
‘누가 거지냐. 누가 돈을 달라더냐.’
은행깍지는 다시 그날 밤으로 보냈던 사람의 집에 들어뜨려졌다.
‘양반은 얼어죽어도…….’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목이 메어서 그 뒤는 계속하지를 못하였다.
어떤 날 집에 돌아오매 늙은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눈을 연하여 부비며 무슨
비단옷을 짓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어머니는 한순간 눈을 치떠서 A군을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A군도 다시 묻지 않았다.
저녁 뒤에 어두운 석유불 아래서 어머니는 그 옷을 다시 들었다.
“그게 뭡니까?”
A군은 또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A군은 또다시 묻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 뒤에 어머니는 혼잣말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괜찮지만 출입하는 사람이야 옷 한 벌은 있어야지 않니. 품팔이를 해서라두 옷 한 벌은 장만해야지…….”
A군은 탁 가슴에 무엇이 받쳐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눈이 아득하였다. 그는 얼른 머리를 돌이키고 말았다.
이튿날 그는 낡은 교과서를 한 보퉁이 몰래 싸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하루 종일 전당국에서 낡은 책방으로, 또다시 전당국으로 돌아다녔으니 80전밖에는 거두지를 못하였다.
C를 찾을까 해보기도 하였으나 죽으면 죽었지 C를 찾지를 못하였다.
‘할 수 없다. 이것으로 옷 한 벌은 못해 드리나마 따뜻한 국 한 그릇이라도 끓여드리자.’
그는 저자를 보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뜻밖에 봄같이 화기가 돌고 있었다. 그리고 윗목에는 C가 앉아 있었다.
군은 순간에 A 불붙는 눈으로 C를 보았다. C도 A군을 쳐다보았다.
“A군, 노여워 말게.”
아아, 감격에 넘치는 순간에 사람은 능히 저편 쪽의 심리며 진심까지 귀신과 같이 꿰뚫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A군은 C의 눈에서 순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결코 부르주아의 자비심이 아니고 진정의 마음에서 나온 우애였다.
A군은 둘러보았다.
질소(質素)는 하나마 두텁고 뜨뜻한 옷에 싸여 있는 어머니와 병신 누이동생을…… 그리고 깨끗한 돗자리를…… 또한 두꺼운 이부자리를…….
A군은 C의 앞에 꿇어앉았다.
눈물이 샘 솟듯 그의 눈에서 흘렀다.
그리고 A군은 이때에 처음으로 알았다. ‘순정’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과, 그 앞에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 귀엽고 또한 기쁜 것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