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는 인명과 수없는 재물과 수없는 인류의 보화를 삼키고 세계 대전쟁이 종식이 되었다.

일본도 이 전쟁에 참가는 하였다 하나 겨우 동양의 한구석 교주만 근처에서 퉁탕거려보고 의리적으로 불란서 전선에 군대를 약간 보내본 뿐이라 재정적으로 손해가 극히 적었다.

그 대신 이 전쟁 때문에 얻은 이익은 지극히 컸다. 지금껏 온갖 약품이며 기계를 독일에서 수입하던 것이 독일과 국교 단절을 한 관계상 자작자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과학계의 발달이 놀라웠다. 유럽에서는 전쟁으로 덤비느라고 일용품조차 제 나라에서 만들지 못하는 관계상 미국이며 일본 등에 주문하여다가 쓰게 되니만치 무역상의 이익이 놀랍게 되었다. 해운으로 굴러 들어온 돈도 막대하였다. 위체 관계로 얻은 이익도 막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적지 않은 이익의 반면에는 손해도 또한 없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주의의 흥성과 사치 ─ 이것이 가장 눈에 뜨이는 악영향이었다.

서양 문명의 겉물핥기 ─ 이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도리우치를 쓰는 학생이 없었고 금단추 이외에는 쓰메에리가 쉽지 않았고 학생은 세비로를 안 입던 동경이 갑자기 변하여 십팔구 세만 되면 세비로 한 벌은 장만하고 여학생들은 새빨간 하오리를 휘날리고 여자 양복도 드문드문 보이게 되었다.

서양 문명의 겉물을 핥은 또 그 겉물을 연실이는 핥았다.

아무 속살도 모르고 단지 겉만 흉내내면서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이렇게 나날이 향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속 알맹이는 그 몇 해 전 ‘베개를 내려오라’면 내려오던 그 시절에서 한 걸음도 진전된 바 없었다.

조선 신문화는 대개 동경 유학생의 힘으로 건설되었고 문화의 제일 과정은 자유 연애였다.

연실이가 장차 조선에 돌아가면 건설하려던 조선 신문학은 연실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아직 동경 유학할 동안에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 이고주(李古周)라는 청년 문학도가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이 청년 문학도가 문학이라는 무기를 이용하여 처음 부르짖은 것이 자유연애였다.

이 현상은 연실이로 하여금 더욱더 연애와 문학은 불가분의 것이라는 신념을 굳게 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최명애는 연실이보다 1년 앞서서 졸업을 하고 동경을 떠나게 되었다. 송안나는 최명애보다 1년 전에 귀선하였다.

명애가 귀선할 날짜가 거진 가까운 어느 날 연실이는 명애의 하숙을 찾아갔다. 오래간만이었다. 서로 연애에 골몰한 동안은 동무를 찾을 겨를도 과연 없었다.

“아이, 오래간만이로구나.”

“언니 졸업 턱 받으러 왔수.”

이런 인사로써 둘은 마주 앉았다.

여자들끼리 만나면 으레 나오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한참 돈 뒤에 연실이는 이런 말을 물어보았다.

“언니, 돌아가선 무얼 하겠소?”

이 질문에 명애는 눈가에 명랑한 미소를 띠고 잠깐 연실이의 얼굴을 본 뒤에 대답하였다.

“시집가련다.”

“시집을?”

“그래, 우스우냐?”

“턱은 대었수?”

“글쎄, 누구한테 갈지 갈팡질팡일세. 돈 있는 작자는 시부모가 있구, 단가 살림은 돈이 없구. 너무 잘난 녀석은 휘어잡기 힘들구, 너무 못난 녀석은 셋샤 마음에 안 맞구.”

그런 뒤에 명애는 최근 삼사 년간에 졸업하고 귀선한 남학생을 한 오륙 명 꼽아대었다. 그 가운데 세 사람은 명애하고 특별한 관계가 있던 것을 연실이도 안다. 그로 미루어서 나머지들도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어디, 네가 간택을 해봐라. 누가 제일 낫겠니?”

“내가 아우? 아재 간택하는 법두 있수?”

“하하하하. 얘, 너 고창범이라구 알지?”

알기뿐이랴, 연실이도 한두 번 명애 몰래 만나본 일이 있는 W대학 문과 출신의 서울 사람이었다.

“셋샤 마음에는 고창범이가 가장 맞는구나.”

싱거운 사내였다. 호인 이상은 보잘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고씨가 지금 어디 있수?”

“Y전문학교 문과 교수라네.”

“부자인가?”

“저 먹을 게나 있지. 조끔 덜난 편이지만…….”

“그 사람 어디가 마음에 드우? 난, 원, 시원찮소.”

“그렇기에 내 마음에 들지. 너나 내나 시원한 남편 아래서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안 될 말이지.”

“난 귀선해서도 시집은 안 가겠수. 사내라는 건 도대체 한 달만 가까이 지내면 벌써 부려먹으려 덤벼드는 걸 시집까지 가주면 영 종 노릇하게.”

“그두 그래 하긴. 그래두 늙으면 자식 생각 난다더라.”

“시집 안 가군 새끼 못 낳소?”

“예끼, 화냥년.”

그때 연실이는 임신 3개월이었다. 따져보아도 누구의 종자인지는 분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때때로 이것을 뉘게다 책임을 지울까고 생각하고 하던 중이었다.

지금껏 진실한 의미로의 인생을 밟아보지 못한 이 처녀들은 인생의 근심을 몰랐다. 인생의 가장 중대한 일을 가장 가볍게 여기고 웃음과 희롱 가운데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그날 낮에 놀러 갔던 연실이는 밤도 깊어서야 제 하숙으로 돌아왔다. 입덧이 나기 때문에 식성이 까다롭게 된 연실이는 제 하숙의 낯익은 음식보다 사루소바 두 그릇을 참 맛있게 먹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연실이의 아버지에게서 여러 장의 편지가 왔다. 첫 장은 꼬리표가 다섯이나 붙어서 겨우 연실이의 지금 하숙을 찾아온 것이었다.

수년간을 한 장의 편지도 않던 딸에게 갑자기 뒤따라 편지를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다.

연실이에게 시집을 가라는 것이었다. 신랑의 나이는 연실이와 동갑, 소실의 자식이나 사람 똑똑하고 한 300석내기 물려받을 것도 있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하는 것이다.

그때 배가 남산만하게 되어 학교도 쉬고 하숙도 옮기고 있던 연실이는 첫 편지에는 귀찮아서 자기 주소만 알리고 편지 내용에는 회답도 안 하였다.

둘째 편지에는 그런 젖비린내 나는 아이에게 시집이 다 뭐냐는 배짱으로 답장도 안 하였다.

셋째 편지는 방금 연실이가 몸을 푼 이튿날 배달되었다. 여전히 회답도 안 하였다.

몸을 푼 지 한 달쯤 지나서 외출을 할 수 있게 된 때 연실이는 갓난애(사내애였다)의 아버지 후보자 중의 한 사람인 맹호덕이와 함께 어린애를 붙안고 놀러 나갔다. 나갔던 길에 셋(갓난애까지)의 사진을 찍었다.

며칠 후 사진을 찾아보니, 정녕 내외가 아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어때요? 맹 상.”

이 말에 맹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오라범, 누이, 누이의 사생아.”

“애끼.”

“하하하하.”

물론 이 사진은 방에 장식하든가 맹과 자기가 나누어가지고 기념하든가 하려는 목적으로 찍은 것이 아닌지라 의리상 맹에게 한 장 주고, 자기가 두 장은 맡아두었다.

공교롭게도 사진을 찾아온 이튿날 고향에서는 또 혼사 의논의 편지가 왔다.

여기 대해서 연실이는 회답 대신으로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무언의 거절이었다. 저는 벌써 인처요 자식까지 있습니다 하는 뜻이었다.

과연 이 사진을 보낸 다음부터는 다시 편지 왕래가 끊어졌다.

연실이는 제2학기 한 학기를 병을 칭탁하고 쉬었다.

제3학기부터는 애는 유모 주고 다시 학교에 다녔다. 3학기 한 학기로 연실이도 ‘전문학교 졸업생’이 되는 것이었다.

세계대전쟁의 여파가 온 세계에 가지가지로 일어나는 가운데 자유주의의 나라인 미국이 던진 몇 개가 꽤 세계를 소란하게 하였다.

가로되 국제연맹, 가로되 민족자결주의, 가로되 무엇, 가로되 무엇.

이 가운데 민족자결주의라 하는 여파는 조선반도도 한동안 흔들어놓았다.

연실이가 몸을 푼 뒤에 산후도 깨끗하여 3학기부터 학교를 가려고 준비할 때부터 동경 유학생 간에도 적지 않은 동요가 있었다. 제3학기 초부터는 동요도 쾌 커갔다. 경찰로 붙들려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연실이의 애기의 가정(假定) 아버지 되는 맹호덕이도 이런 일에는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 끼리끼리 밤을 새워가면서 수군거리며 돌아갔다.

조선의 신문학도요 겸하여 조선의 연애 교사인 이고주도 동경을 건너왔다가 무슨 글을 하나 지어주고 재빨리 상해로 달아나고, 남은 사람들은 그 글을 유학생 간에 돌리고 모두 사법의 손에 붙들렸다.

그러나 그 일은 연실의 생활이며 감정이며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3학기를 시작하였다.

3학기도 끝나고 내일 모레면 졸업식이라 하는 3월 초하룻날, 온 조선에도 무슨 중대한 일이 폭발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과 관계없고 연애와 관계없는 이상에는 역시 연실이의 아랑곳할 것이 못 되었다.

졸업하고 곧 서울로 돌아가려던 예정이었다(고향인 평양 따위는 벌써 잊은 지 오랜 연실이었다). 그러나 조선 안이 꽤 소란스러운 듯하므로 연실이는 그 음악학교에서 작곡과를 1년간 더 하고 조선이 좀 안돈된 뒤에 돌아가기로 하였다.

3월 초하룻날의 소란은 조선에서 꽤 커다란 결과를 주었다. 사내(寺內) 총독의 무단정치를 그대로 답습한 장곡천(長谷川) 총독은 경성 시내에 장곡천정(長谷川町)이라는 정명(町名) 하나를 남겨두고 갈려가고 재등실(齋藤實)이 새 총독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3월 초하루의 소란은 무단정치에 대한 반항이라 하여 문화정치라는 깃발을 내세웠다.

그 덕에 지금껏 탄압하던 출판계가 좀 완화되어 신문 잡지 그 밖 서적들이 뒤이어 나타났다. 동시에 신문학의 싹도 차차 완연해갔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고 연실이는 그냥 편편히 동경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작곡과 1년간을 황황히 마친 뒤에 연실이는 행장을 가다듬어가지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어린애는 사도코로 주었다.

어서 돌아가서 선각자의 자리를 남에게 앗기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어린애 같은 것을 달고 다닐 수가 없었다. 온갖 방면으로 조선 선구녀형의 표본인 연실이는 자식에게 가질 모성애라는 것도 결핍된 사람이었다.

연실이가 서울로 귀환할 때는 조선에도 두어 파의 젊은 문학도들이 생겨 있었다. 이 문학도들의 전기생(前期生)이요 겸하여 조선 연애 교수인 이고 주는 아직 상해로 피신해 있는 채 돌아오지 않았다.

“당추고추 맵다더니 시집살이 더 맵구나. 언니, 시집살이 재미가 어떻수?”

연실이가 서울로 와서 찾아든 곳은 명애의 집이었다. 명애는 고창범이와 결혼을 하고 이 도회 서부 어떤 고지대에 선양(鮮洋) 절충식 문화주택을 짓고 살고 있었다.

명애의 집에 들어 짐을 대강 정리한 뒤에 연실이는 이렇게 물었다.

“야, 미나리 고쳐야겠더라. 청밀사탕 달다더니 시집살이 더 달더라구……”

“그렇게 재미나우?”

“그럼. 밤에는 서방 있것다, 아침엔 구찮은 서방은 학교에 가구 나 혼자 편히 할 노릇 다 하것다. 오후에는……야, 오후엔 우리 집 살롱엔 별별 청년들이 다 모여든다.”

“무슨 청년들이우?”

“너 좋아하는 문학청년들.”

“고 선생……”

“아서라. 네 입에서 웬 갑작스리 선생이냐. 고 상이지.”

“고 상은 너무하니 아재라 해둡시다. 아재 찾아오오?”

“아재는…… 나 찾아오지.”

명애에게서 들은 바에 의지하건대 조선의 새 문학도는 대개 두 파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시작』이라는 잡지를 무대로 활약하는 파로 이를 ‘시작파’라 한다. 나머지 하나는 『퇴폐』라는 잡지를 무대로 활약하는 파로 이를 ‘퇴폐파’ 라 한다.

그런데 시작파와 퇴폐파를 손쉽게 구별하자면, 말하자면 기생네 집에 놀러 간다 할지라도 시작파들은 기생방 아랫목에 누워서 기생을 호령하여 술을 부르고 음식을 부르는데 반하여 퇴폐파는 꽃다발을 받들고 기생집을 찾아가서 무릎 꿇고 이것을 바치는 사람들이라 하면 짐작이 갈 것이다. 퇴폐파는 그 명칭과 같이 불란서 시인식의 퇴폐적 기분이 꽤 농후하였다.

명애의 살롱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퇴폐파거나 혹은 그들의 친구들이었다.

“와서는 무얼들 하우?”

“입에 거품을 물고 문학이 어떠니 인생이 어떠니 떠들지.”

“그럼 언니는 어떻게 허우.”

명애는 미소하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놓구 말이지 어디 무슨 소린질 알겠더냐? 그래서 그저 웃고 보고 듣고 있지.”

“오늘도 오우?”

“그럼. 나 없어두 저희들끼리 들어와서 한참씩 덤비다가 가니까…….”

“나 좀 참가 못할까?”

“왜 못해. 네가 참가하면 모두들 아아, 우리의 새 여왕이시어 하면서 손으루 키스를 보내리라.”

“이름은 누구누구요?”

명애는 그들의 이름을 대강 꼽았다. 듣고 보니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듣던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연실이는 매우 흡족하였다. 조선 신문단에서 활약하는 사람의 대부분을 손쉽게 사귈 기회를 얻었다.

2년간 동경과 서울, 이렇게 만 리를 상격하여 있다가 만난 터라 서로 바꾸는 뉴스는 끝이 없었다. 그 가운데서 연실이가 가장 통쾌하게 들은 것은 송 안나에 관한 뉴스였다.

송안나가 동경 유학 당시의 가장 마지막 애인은 I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I와의 애정이 다른 여러 과거의 애정들보다 가장 깊었다. 그런데 송안나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I는 먼저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병나서 죽었다.

송안나는 I가 죽은 반년 뒤에 졸업하고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벌써 약혼자가 하나 생겨서 약혼자와 동반하여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곧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으로 간다는 데가 어디냐 하면 죽은 I의 고향이었다. I의 고향에서 송안나는 신혼한 남편과 함께 죽은 애인의 무덤에 절하고(사죄라 하는 편이 옳을지) 새 남편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I의 무덤에 비석을 해 세워주었다…… 이런 뉴스였다.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자면 송안나(뿐 아니라 연실이며 명애며 다 마찬가지다)의 심리며 행동이며는 제정신 가진 사람의 일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명애는 깔깔대며 이 뉴스를 여성이 남성에 대한 대승리라 하여 연실이에게 알렸고 연실이는 손뼉을 두드리며 찬성하였다.

명애의 소위 살롱이라는 것은 마루방에 유리창을 달고 센터 테이블을 가운데로 값싼 의자가 대여섯 대 둘러 놓여 있고, 센터 테이블에는 재떨이 몇 개와 성냥 몇 갑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오후3시쯤 대여섯 명의 무리가 밀려왔다. 머리를 기르고 토이기(土耳其) 모자를 비뚜루 쓴 청년, 새빨간 노끈을 넥타이 대신으로 쌍코를 내어 맨 청년, 머리를 통 뒤로 젖히고 칼날 같은 코를 때때로 이태리식으로 쿵쿵 울리는 청년…… 동경에서 사립 음악학교를 다닌 연실이에게도 신기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소설이나 시나 한번 활자화되기만 하면 서로 이름쯤은 기억이 될만한 단순한 시대라, 더욱이 여자인 김연실의 이름은 그들의 기억에도 있던 바였다.

그 위에 이 집 여왕 명애의 입을 통해서도 누차들은 일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들은 두 손을 들어 환영하였다.

그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은 연실이에게도 약간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다. 옷은 별다르게 입지 않았으나 가장 유행형이었다. 구주전쟁 때문에 세계적으로 온갖 물자가 결핍하기 때문에 옷 같은 것도 놀랍게 짧고 좁고 팽팽한 것이 유행되어 그 유행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시절이라 옷이 좁고 짧은 것이 흠할 것이 아니지만 이 청년의 것은 유달리 좁고 짧아서 누구가 보든 남의 것을 빌려 입은 것 같았다. 박형(薄型) 나르단 제(製)의 금시계와 꽤 커다란 금강석 반지와 밀화 권연 물부리 등으로 부잣집 청년이라는 점이 증명되기에 말이지, 의복만으로 보자면 남의 것을 빌려 입은 듯했다. 김유봉이라는 이름이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이었다. 이 청년을 연실이는 잠작한다.

김유봉은 평양 사람이다. 김유봉의 증조할아버지는 평양의 전설적 치부가였다. 김유봉의 할아버지는 참령(參領)이었다.

이 김유봉의 할아버지가 참령 시대에 연실이의 할아버지는 군졸이었다. 옛날 같으면 연실이의 할아버지일지라도 김유봉의 앞에 감히 앉을 자격도 없고 가까이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연실이는 아버지도 이속이 되기 전에는 김 강동(강동 군수를 살았다고 김강동이라 한다) 댁에 하인 비슷이 드나들었다. 연실이의 아버지가 영리가 된 뒤에도 김 강동에게는 늘 하인같이 문안 다니고 하였다.

이러한 호상 관계가 있는 김유봉과 지금 대등의 자격으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할 때에 연실이의 마음에는 일종의 긍지까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동서고금의 온 예술가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비판과 논란이 오르내렸다.

지금까지 자기들 여류 문학자로 자임하고 선각자로 자부하던 연실이로 하여금 적지 않게 불안을 느끼게 한 것은 이 청년들이 떠들고 법석하는 이야기를 잘 알아듣기가 힘들뿐더러 그들의 입에 예사로이 오르내리는 서양 문호들의 이름조차도 연실이는 모르는 자가 적지 않은 점이었다. 명애의 말도 ‘그 작자들의 이야기는 내놓고 말하자면 잘 못 알아들겠더라’ 하더니만 연실이 자기도 그러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막연히 느껴지는 바는, 연실이 자기의 학우들이던 그곳 남녀들과 이 청년들이 전혀 마음 가지는 법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곳 남녀들은 단지 배울 것 배우고 놀 것 놀고 먹을 것 먹는 뿐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의 마음가짐 가운데에는 자기의 배운 것으로 사회를 어떻게 한다 하는 ‘대사회’라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연실이가 명애의 집에 기류하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연실이와 명애는 대판 싸움을 한번 하였다. 명애는 자기의 남편 되는 고창범이가 세상에 드문 호인인 것을 다행히 여기고 온갖 행동을 자유로 하였다. 그 소위 ‘온갖 행동’ 이라는 데에는 연애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창범이도 짐작은 한다. 그러나 성격이 덜났으니만치 호인인 그는 아내와 싸우기가 싫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해서 모른 체하는 모양이었다.

명애의 상대 남자라는 것은 소위 살롱의 문학청년도 있고 남편의 친구도 있고 하여 대중이 없었다. 어느 일요일 날, 이날도 아마 명애는 그 애인 중의 누구를 만나러 나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 놀러나가려면 연실이를 두고 나갈 까닭이 없었다.

집에는 창범이와 연실이와 하인밖에 없었다.

창범이와 연실이는 같은 방에서 창범이는 신문을, 연실이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 소설에는 마침 ‘어떤 여자(주인공)가 이전 학생 시대에 자기와 관계 있던 남자의 아내(친구끼리다)에게 놀러 간다. 아내는 지금 찾아온 동무와 제 남편이 과거에 그런 일이 있은 줄은 모른다. 아내는 동무를 위하여 과일이라도 사러 가게에 나간다. 과거에 관계 있던 남녀가 단둘이 남는다. 여자가 눈을 들어 사내를 본다. 사내도 마주본다. 서로 싱그레 웃는다. 서로 손을 내민다. 서로 쓸어안는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것을 읽다가 연실이는 뜻하지 않게 고창범이를 건너보았다. 그러매 고창범이도 연실이가 자기를 보는 기수에 신문을 내리매 마주 보았다.

뜻하지 않게 서로 싱그레 웃었다. 수년 전에 마주 서로 보고 싱그레 웃던 일이 생각났다. 연실이가 말을 던져보았다.

“재미가 꿀 같죠?”

“세상살기가 귀찮아집니다.”

“꽃 같은 부인에…….”

“좀 가까이 와서 옛날같이 이야기나 해봅시다.”

고창범은 손을 길게 뻗쳤다.

“명애한테 큰일나게.”

“이건 왜 이래.”

창범이는 연실이의 옷깃을 잡았다. 옷깃에서 팔목으로, 팔목에서 어깨로 서로 나란히 …… 하고 그 뒤에는 어깨를 붙안고 뺨을 부비고…… 꼴이 차차 우습게 되어갈 때에 문이 홱 열렸다.

깜짝 놀라서 남녀가 떨어져 앉을 때에 문에 나타난 사람은 이 집의 여왕 명애였다.

명애에게는 너무도 의외인 모양이었다. 잠깐 멍하니 섰다. 서로 떨어진 남녀도 무슨 할 말도 없어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드디어 명애에게서 노염이 폭발되었다.

“흥.”

이것이 첫 호령이었다. 다음 수간 화닥닥 뛰쳐들었다. 첫 발길로 남편을 걷어찼다. 다음 발길로 연실이를 차려 하였다. 연실이가 몸만 비키지 않았더라면 물론 차였을 것이다.

연실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켰다. 그 때문에 허공을 찬 명애는 탁 엉덩이를 주저앉았다.

“이놈의 계집애, 손질까지 하는구나.”

악이었다. 달려들면서 연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여기서 두 여인은 한참을 서로 악담을 퍼부어가면서 머리채를 맞잡고 싸웠다. 명애의 남편은 어디로 언제 피하였는지 없어져버렸다.

이 집 하인이 들어와서 간신히 떼놓을 때까지 두 여인은 서로 옷을 찢으며 찢기며 머리를 뽑히며 코피를 쏟으며 가장집물을 부수며 격투를 계속하였다.

하인의 중재로 겨우 떨어진 뒤에 연실이는 도둑년이라 부르짖으며 명애는 화냥년이라 부르짖으며 각각 하인에게 이끌려 딴 방으로 갈렸다.

제 방으로 돌아온 연실이는 즉시로 얼굴을 닦고 머리를 매만지고 옷을 갈아입고 행장을 수습해가지고 명애의 집을 나왔다.

인력거에 몸과 짐을 실은 뒤에 연실이가 인력거부에게 가리킨 방향은 패밀리 호텔이었다.

이 패밀리 호텔에는 김유봉이가 묵고 있었다.

연실이가 동경으로 처음 떠날 때에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훔쳐가지고 떠났던 돈은 그가 공부를 끝내고 돌아와 명애의 집에 기류해 있는 동안 다 썼다.

그러나 당시는 대정(大正) 팔구 년의 대경기 시대라, 돈이 함부로 굴러다니던 때니만치 금전은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만록총중의 일점홍으로 사천 년래의 제일 첫 사람인 신시인에게 생활 곤란의 문제가 생길 까닭이 없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내야 하는 이 호텔의 방세는 괴상한 복장의 청년들이 경쟁적으로 순서를 다투며 부담하였다. 매 끼니끼니는 이 청년 중의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씩이 내고 하였다. 일용품들도 연방 갖다 바쳤다. 직접 금전으로 바쳤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없어진다 할지라도 연실이의 생활은 튼튼히 보장되었다. 김유봉이가 연실이의 패트런이 되었다.

한 호텔에서 한 가지의 취미를 즐기는 젊은 남녀였다. 그 사이가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연실이는 연애를 동경한 지 수년, 이 패밀리 호텔에서 비로소 소설에서 읽던 연애를 사실적으로 체험하였다.

가장 유행형인 의복으로 맵시나게 차린 김유봉과 동반하여 혹은 교외를 산책하고 혹은 밤의 거리를 방황하며 호텔의 창에서 갈구리 같은 달을 우러르며 혹은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일찍이 소설에서 읽은 바와 같은 달콤한 속살거림을 서로 주고받았다.

“연실 씨, 연실 씨의 곁에 가까이 앉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그려.”

“아이 참, 김 선생님. 우리가 왜 좀더 일찍이 만나지 못했을까요?”

“그게 참 큰 한입니다. 아아, 이 달밤에 우리 산보나 같이 나가볼까요?”

“네, 참 그러세요.”

그러고는 서로 잡았던 손에 힘을 주고 서로 뺨을 부벼대고 하였다.

싸우고 난 뒤에는 다시 명애를 만나지 않았다. 여자의 친구는 남자일 것이지 여자는 여자의 친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날 그 일에 일종의 희망을 붙였는지 명애의 남편인 고창범은 몇 번 연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날 우연한 찬스에 다시 한번 붙안겨보기는 하였지만 고창범 같은 남자에게는 일호의 흥미도 느낄 수 없는 연실이는 다시 창범을 만나지 않았다.

퇴폐파의 문사며 그 밖 젊은이들도 차차 연실이를 김유봉의 애인으로 인식해 주는 사람이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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