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 대륙의 동방 소비에트 연방의 일단.

눈앞에 거슬리는 한 구비의 산도 없이 훤히 터진 넓은 대륙의 풍경과 그 끝에 전개되어 있는 근대적 다각미를 띠운 도시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배가 반가운 기적을 뚜―뚜― 울리며 붉은 기 날리는 수많은 배 사이를 뚫고 두 가닥 진 반도의 사이를 들어가 항구 안에 슬며시 꼬리를 돌렸을 때에 그는 석탄고 속에서 문득 곤한 잠을 깨었다.

요란한 기관소리와 끊임없는 동요가 별안간 문득 그쳤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 왔구나 !」

닻줄 내리는 요란한 윈치 소리를 들을 때에 그는 숨을 기게 내쉬었다.

동해안의 항구를 떠나 석탄고 속에 신음한 지 밤낮 사흘이었다. 미친놈같이 앉았다 섰다 누웠다 소리쳤다 하면서 암흑과 고독과 괴롬과 사흘 동안 싸워 왔었다.

사흘되는 이제 꿈꾸던 나라의 목적한 곳에 탈 없이 이르렀음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어둠속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석탄더미 위에 일어나 앉았다.

파도는 잔잔하고 배는 고요히 섰으나 그는 아직도 배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갑판에서는 세관과 해상 국가 보안부에서 서기와 역원들이 와서 취조와 검사가 잦은지 배는 오랫동안 고요히 섰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부두석벽 갖다 바싹 대는 듯하였다.

수많은 선객들이 갑판 위에 열을 짓고 비로소 대륙의 바람을 쏘이면서 일각을 다투어가며 상륙을 재촉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함에 그의 가슴도 시각이 바쁘게 울렁거렸다.

오랜 전부터 사모하여 오던 땅 ! 마음속에 그려오던 풍경 ! 가죽 옷 입고 에나멜 혁대 띤 굵직한 마우자들 숲에 한시라도 속히 싸여 보고 싶었다.

―푸른 하늘, 푸른 항구, 수많은 기선, 화물선, 정크, 무수히 날리는 붉은 기, 돌로 모지게 쌓은 부두, 쿠리, 노동자, 마우자, 기중기, 창고, 공장, 흰 연돌, 침착한 색조의 시가, 돌집, 회관, 거리거리를 훈련하고 돌아다니는 피오닐, 콤사몰카들의 활보, 탄력있는 신흥계급의 기상―

어두운 석탄고 속에서 아직 밟지 않은 이 땅에 대한 가지가지의 환영을 마음속에 꽃 피울 때 가슴은 감격과 초조에 몹시도 수물거렸다.

그러나 버젓하게 선표를 사가지고 선실에서 여행한 것이 아니니 남과 같이 제법 떳떳하게 상륙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하는 수 없이 밤이 될 때까지 어둠이 항구를 쌀 때까지 석탄고 속에서 초조하게 속을 앓으면서 더 기다릴 수밖에는 없었다.

이윽고 밤이 되어서야 한 걸음 먼저 상륙하였던 살롱의 김군이 총총한 걸음으로 석탄고를 찾아와 주었다. 그의 하얗던 뽀이 복색은 어느덧 검은 루바시카로 변하여 있었다.

「자 이것으로 갈아 입게.」

하면서 역시 검은 루바시카와 바지 한 벌을 그에게 주었다.

「결국 목적한 곳에 다 왔단 말일세그려 !」

이렇게 새삼스럽게 반문하여 보았으리만치 그의 마음은 끔찍이도 반가왔던 것이다.

「박군도 부두에 와서 기다리니 얼른 갈아입고 나가게.」

하나에서 열까지 도와 주고 위로하여 주고 힘 돋아 주는 김군의 호의와 친절에는 눈물겨운 것이 있었다.

그의 비쳐주는 회중전등의 광선을 의지하여 그는 새옷을 갈아입고 헌 옷을 똘똘 뭉쳐 한 손에 들고 김군과 같이 석탄고를 나갔다.

지리하던 석탄고―그것은 사흘 동안의 감옥이었고 암흑의 지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에게는 아름다운 꿈의 보금자리였고 이 땅과 저 땅을 행동과 행동을 연락하여 주는 고마운 중매였다. 그보다 이전에 얼마나 많은 친구가 이 고마운 중매의 은혜를 입었으며 현재 수많은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수많은 뱃속, 그 어두운 구석에서 얼마나 많은 동무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으며 장차 또 얼마나 많은 동무가 이 고마운 보금자리를 이용할 것인가. 생각하면 우리의 생활과 뗄 수 없는 인연 깊은 곳이다. 바라건대 새 날이 올 그때까지 길이길이 우리의 비장한 꿈의 보금자리가 되고 중매가 되어라!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칠 벗은 검붉은 석탄고의 문을 징긋이 닫고 그 위에 마지막 고별의 시선을 오랫동안 던졌다.

쇠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인기척 없는 갑판 위에 나서니 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는 헌 옷 뭉치를 들고 난간에 의지하였다.

주머니 속에 들었던 단 한 권의 노서아어 회화책을 새 호주머니 속으로 옮겨 넣고 헌 옷을 다시 똘똘 뭉쳐 들었다.

(자, 그럼 너와도 작별이다.)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는 헌 옷을 바닷물 속에 장사 지내 버렸다. 오랫동안 몸에 걸쳤던 단벌의 옷―어두운 등잔 밑에서 침침한 눈을 비벼가면서 고국의 어머니가 바늘귀 촘촘하게 정성껏 기워 준 피눈물 나는 그 옷이언만 그는 이제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닷속에 시원히 장사지내 버렸다. 물론 아울러 지금까지의 모든 과거도 헌 옷 뭉치와 함께 이 바닷속에 청산하여 버렸던 것이다.

「고국의 어머니여. 다시 뵈올 그때까지 부디부디 건재하여 주시오!」

마음속으로는 늙으신 어머니의 건재를 이렇게 빌어 드렸다.

김군이 따라주는 물에 낯을 씻고 머리를 가다듬에 올리고 나니 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국에 대한 새삼스런 애수를 바다 멀리 떨쳐 버리고 배를 내려 부두에 한 걸은 나서 굳은 땅을 밟으니 그립던 대륙 ! 말할 수 없는 감개와 안도를 일시에 느꼈다.

부두 한편 등불 밑에서 기다리고 섰던 동지 로만박이 어느덧 쫓아왔었다.

「칵 파쥐빠아 예테?」

거친 이 한 마디를 건네면서 억센 손아귀와 손아귀가 한데 맞닿으니 단순한 이 동작 가운데에 수만 언으로도 바꾸기 어려운 깊은 동지의 정미가 스스로 넘쳐 흘렀다.

밤의 부두는 안개 속에 자옥하였다.

때 마침 오월이랄 항구는 한창 안개의 시적이었던 것이다. 석달동안 항구 안에 꽁꽁 얼었던 얼음이 사월에 들어가서야 풀려 버리고 그믐께부터는 안개의 시절이 시작되어 오월을 접어들면 바야흐로 농후하여지는 때이다.

굻은 기선의 선체, 높은 마스트, 육중한 기중기, 연하여 늘어서 있는 창고, 얼크러진 철로―이 모든 것이 마치 필름 속의 화폭같이 안개 속에 웅장하게 흐려져 있는 부두지대를 벗어나 세 사람은 묵은 회포를 이야기하면서 약간 경사진 높은 거리로 ! 밝은 시가로 ! 걸어 올라갔다.

―이렇게 하여 그는 처음으로 이땅을 밟았고 새살림의 첫 계단에 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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