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appyMidnight/후한서/권69

卷六十九 竇何列傳第五十九

  竇武字游平,扶風平陵人,安豐戴侯融之玄孫也。父奉,定襄太守。武少以經行著稱,常教授於大澤中,不交時事,名顯關西。

  延熹八年,長女選入掖庭,桓帝以為貴人,拜武郎中。其冬,貴人立為皇后,武遷越騎校尉,封槐里侯,五千戶。明年冬,拜城門校尉。在位多辟名士,清身疾惡,禮賂不通,妻子衣食裁充足而已。是時羌蠻寇難,歲儉民飢,武得兩宮賞賜,悉散與太學諸生,及載餚糧於路,丐施貧民。兄子紹,為虎賁中郎將,性疏簡奢侈。武每數切厲相戒,猶不覺悟,乃上書求退紹位,又自責不能訓導,當先受罪。由是紹更遵節,大小莫敢違犯。

  時國政多失,內官專寵,李膺、杜密等為黨事考逮。永康元年,上疏諫曰:「臣聞明主不諱譏刺之言,以探幽暗之實;忠臣不恤諫爭之患,以暢萬端之事。是以君臣並熙,名奮百世。熙,盛也。臣幸得遭盛明之世,逢文武之化,豈敢懷祿逃罪,不竭其誠!陛下初從藩國,爰登聖祚,天下逸豫,謂當中興。自即位以來,未聞善政。梁、孫、寇、鄧雖或誅滅,梁冀、孫壽、寇榮、鄧萬代,見《桓紀》也。而常侍黃門續為禍虐,欺罔陛下,競行譎詐,自造制度,妄爵非人,朝政日衰,奸臣日強。伏尋西京放恣王氏,佞臣執政,終喪天下。今不慮前事之失,復循覆車之軌,臣恐二世之難,必將復及,二世即胡亥。趙高之變,不朝則夕。趙高使女婿閻樂弒胡亥於望夷宮。近者奸臣牢修,造設黨議,遂收前司隸校尉李膺、太僕杜密、御史中丞陳翔、太尉掾范滂等逮考,連及數百人,曠年拘錄,事無效驗。臣惟膺等建忠抗節,志經王室,此誠陛下稷、禼、伊、呂之佐,而虛為奸臣賊子之所誣枉,天下寒心,海內失望。惟陛下留神澄省,時見理出,時謂即時也。以厭人鬼喁喁之心。臣聞古之明君,必須賢佐,以成政道。今台閣近臣,尚書令陳蕃,僕射胡廣,尚書朱宇、荀緄、音古本反。劉祐、魏朗、劉矩、尹勛等,皆國之貞士,朝之良佐。尚書郎張陵、媯皓、苑康、楊喬、邊韶、戴恢等,文質彬彬,明達國典。內外之職,群才並列。而陛下委任近習,專樹饕餮,外典州郡,內干心膂。宜以次貶黜,案罪糾罰,抑奪宦官欺國之封,案其無狀誣罔之罪,信任忠良,平決臧否,使邪正毀譽,各得其所,寶愛天官,唯善是授。如此,咎徵可消,天應可待。閒者有嘉禾、芝草、黃龍之見。夫瑞生必於嘉士,嘉士猶善人也。福至實由善人,在德為瑞,無德為災。陛下所行,不合天意,不宜稱慶。」書奏,因以病上還城門校尉、槐里侯印綬。上音時丈反。帝不許,有詔原李膺、杜密等,自黃門北寺、若盧、都內諸獄,繫囚罪輕者皆出之。都內,主藏官名。《前書》有都內令丞,屬大司農也。

  其冬帝崩,無嗣。武召侍御史河閒劉倏,參問其國中王子侯之賢者,倏稱解瀆亭侯宏。武入白太后,遂征立之,是為靈帝。拜武為大將軍,常居禁中。帝既立,論定策功,更封武為聞喜侯;子機渭陽侯,拜侍中;兄子紹鄠侯,遷步兵校尉;紹弟靖西鄉侯,為侍中,監羽林左騎。

  武既輔朝政,常有誅翦宦官之意,太傅陳蕃亦素有謀。時共會朝堂,蕃私謂武曰:「中常侍曹節、王甫等,自先帝時操弄國權,濁亂海內,百姓匈匈,歸咎於此。今不誅節等,後必難圖。」武深然之。蕃大喜,以手推席而起。武於是引同志尹勛為尚書令,劉瑜為侍中,馮述為屯騎校尉;又征天下名士廢黜者前司隸李膺、宗正劉猛、太僕杜密、廬江太守朱?等,列於朝廷;請前越巂太守荀翌為從事中郎,辟潁川陳寔為屬:共定計策。於是天下雄俊,知其風旨,莫不延頸企踵,思奮其智力。《續漢志》曰:「桓帝初,京都童謠曰:『游平賣印自有評,不避賢豪及大姓。』案:武字游平。與陳蕃合策戮力,唯德是建,鹹得其人,豪賢大姓皆絕望矣。」

  會五月日食,蕃復說武曰:「昔蕭望之困一石顯,元帝時,閹人石顯為中書令,譖御史大夫蕭望之,令自殺也。近者李、杜諸公禍及妻子,況今石顯數十輩乎!蕃以八十之年,欲為將軍除害,今可且因日食,斥罷宦官,以塞天變。又趙夫人及女尚書,旦夕亂太后,女尚書,內官也。夫人即趙嬈。急宜退絕。惟將軍慮焉。」武乃白太后曰:「故事,黃門、常侍但當給事省內,典門戶,主近署財物耳。今乃使與政事而任權重,子弟布列,專為貪暴。天下匈匈,正以此故。宜悉誅廢,以清朝廷。」太后曰:「漢來故事世有,但當誅其有罪,豈可盡廢邪?」時中常侍管霸頗有才略,專制省內。武先白誅霸及中常侍蘇康等,竟死。武複數白誅曹節等,太后冘豫未忍,冘音淫。冘豫,不定也。故事久不發。

  至八月,太白出西方。劉瑜素善天官,惡之,上書皇太后曰:「太白犯房左驂,上將星入太微,其占宮門當閉,將相不利,奸人在主傍。願急防之。」又與武、蕃書,以星辰錯繆,不利大臣,宜速斷大計。武、蕃得書將發,於是以朱?為司隸校尉,劉祐為河南尹,虞祁為洛陽令。武乃奏免黃門令魏彪,以所親小黃門山冰代之。使冰奏素狡猾尤無狀者長樂尚書鄭□,音立。送北寺獄。蕃謂武曰:「此曹子便當收殺,何復考為!」武不從,令冰與尹勛、侍御史祝瑨雜考□,辭連及曹節、王甫。勛、冰即奏收節等,使劉瑜內奏。

  時武出宿歸府,典中書者先以告長樂五官史朱瑀。瑀盜發武奏,罵曰:「中官放縱者,自可誅耳。我曹何罪,而當盡見族滅?」因大呼曰:「陳蕃、竇武奏白太后廢帝,為大逆!」乃夜召素所親壯健者長樂從官史共普、張亮等十七人,喢血共盟誅武等。曹節聞之,驚起,白帝曰:「外閒切切,請出御德陽前殿。」令帝拔劍踴躍,使乳母趙嬈等擁衛左右,取棨信,閉諸禁門。棨,有衣戟也。《漢官儀》曰:「凡居宮中,皆施籍於掖門,案姓名當入者,本官為封棨傳,審印信,然後受之。」召尚書官屬,脅以白刃,使作詔板。拜王甫為黃門令,持節至北寺獄收尹勛、山冰。冰疑,不受詔,甫格殺之。遂害勛,出鄭□。還共劫太后,奪璽書。令中謁者守南宮,閉門,絕復道。複音福。使鄭□等持節,及侍御史、謁者捕收武等。武不受詔,馳入步兵營,與紹共射殺使者。召會北軍五校士數千人屯都亭下,令軍士曰:「黃門常侍反,盡力者封侯重賞。 」詔以少府周靖行車騎將軍,加節,與護匈奴中郎將張奐率五營士討武。夜漏盡,王甫將虎賁、羽林、廄騶、都候、劍戟士,合千餘人,出屯朱雀掖門,與奐等合。明旦悉軍闕下,與武對陳。甫兵漸盛,使其士大呼武軍曰:「竇武反,汝皆禁兵,當宿衛宮省,何故隨反者乎?先降有賞!」營府素畏服中官,於是武軍稍稍歸甫。自旦至食時,兵降略盡。武、紹走,諸軍追圍之,皆自殺,梟首洛陽都亭。《續漢志》曰:「桓帝末,京師童謠曰:『茅田一頃中有井,四方纖纖不可整。嚼復嚼,今年尚可後年磽。』案:易曰『拔茅連茹』,茅喻群賢也。井者,法也。時中常侍管霸等憎疾海內英賢,並見廢錮。『茅田一頃』言群賢眾多也。『中有井』者,言雖厄窮,不失法度也。『四方纖纖』言奸慝不可理也。『嚼』,飲酒相強之辭也。言不恤王政,徒耽宴而已。『今年尚可』者,言但禁錮也。『後年磽』者,陳蕃、竇武等誅,天下大壞也。」磽音苦教反。磽猶惡也。收捕宗親、賓客、姻屬,悉誅之,及劉瑜、馮述,皆夷其族。徙武家屬日南,遷太后於雲台。

  當是時,凶豎得志,士大夫皆喪其氣矣。武府掾桂陽胡騰,少師事武,獨殯斂行喪,坐以禁錮。

  武孫輔,時年二歲,逃竄得全。事覺,節等捕之急。胡騰及令史南陽張敞共逃輔於零陵界,詐雲已死,騰以為己子,而使聘娶焉。後舉桂陽孝廉。至建安中,荊州牧劉表聞而辟焉,以為從事,使還竇姓,以事列上。會表卒,曹操定荊州,輔與宗人徙居於鄴,辟丞相府。從征馬超,為流矢所中死。飛矢曰流矢。中,傷也。

  初,武母產武而併產一蛇,送之林中。後母卒,及葬未窆,有大蛇自榛草而出,《廣雅》曰:「木藂生曰榛。」徑至喪所,以頭擊柩,涕血皆流,俯仰蛣屈,蛣音丘吉反。若哀泣之容,有頃而去。時人知為竇氏之祥。祥,吉凶之先見者。《尚書》曰:「亳有祥。」

  騰字子升。初,桓帝巡狩南陽,以騰為護駕從事。公卿貴戚車騎萬計,徵求費役,不可勝極。騰上言:「天子無外,乘輿所幸,即為京師。臣請以荊州刺史比司隸校尉,南陽屬荊州,故請以刺史比司隸。臣自同都官從事。」帝從之。《漢官儀》曰「都官從事主洛陽百官,朝會與三府掾同」也。自是肅然,莫敢妄有干欲,騰以此顯名。黨錮解,官至尚書。

  張敞者,太尉溫之弟也。《漢官儀》曰:「溫字伯慎,穰人也,封互鄉侯。太史奏言有大臣誅死,董卓取溫笞殺於市以厭之。」

하진전(何進傳) 편집

15 하진(何進)의 자(字)는 수고(遂高)이고, 남양(南陽)군 완(宛)현 사람이다. 이복누이[1]가 선발되어 후궁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어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으니, 벼슬을 받아 낭중(郎中)에 오르고, 다시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에 천거되었으며, 영천(潁川) 태수(太守)가 되었다. 광화(光和)[2] 2년(179년), 귀인이 황후에 즉위하자 하진을 불러들여, 시중(侍中)·장작대장(將作大匠)·하남윤(河南尹)의 벼슬을 내렸다.

16 중평(中平)[3] 원년(184년), 황건적(黃巾賊)[4] 장각(張角)[5]등이 발호하자, 하진으로써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좌우의 우림(羽林) 오영(五營)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도정(都亭)에 주둔하여,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이로서 수도를 지켰다. 장각의 별당(別黨) 마원의(馬元義)가 낙양에서 봉기를 모의하였는데, 하진이 그 내란을 발견하니, 이 공(功)으로 신후(慎侯)에 봉해졌다.

  四年,滎陽賊數千人群起,攻燒郡縣,殺中牟縣令,詔使進弟河南尹苗出擊之。苗攻破群賊,平定而還。詔遣使者迎於成鮧,拜苗為車騎將軍,封濟陽侯。

  五年,天下滋亂,望氣者以為京師當有大兵,兩宮流血。大將軍司馬許涼、假司馬伍宕說進曰:「《太公六韜》有天子將兵事,《太公六韜篇》:第一《霸典》,文論;第二《文師》,武論;第三《龍韜》,主將;第四《虎韜》,偏裨;第五《豹韜》,校尉;第六犬韜,司馬。《龍韜》云:「武王曰:『吾欲令三軍之眾,親其將如父母,聞金聲而怒,聞鼓音而喜,為之柰何?』」可以威厭四方。」進以為然,入言之於帝。於是乃詔進大發四方兵,講武於平樂觀下。起大壇,上建十二重五采華蓋,高十丈,壇東北為小壇,復建九重華蓋,高九丈,列步兵,騎士數萬人,結營為陳。天子親出臨軍,駐大華蓋下,進駐小華蓋下。禮畢,帝躬擐甲介馬,擐音宦。擐,貫也。介亦甲也。稱 「無上將軍」,行陳三匝而還。詔使進悉領兵屯於觀下。是時置西園八校尉,以小黃門蹇碩為上軍校尉,虎賁中郎將袁紹為中軍校尉,屯騎都尉鮑鴻為下軍校尉,議郎曹操為典軍校尉,趙融為助軍校尉,淳于瓊為佐軍校尉,又有左右校尉。帝以蹇碩壯健而有武略,特親任之,以為元帥,督司隸校尉以下,雖大將軍亦領屬焉。

  碩雖擅兵於中,而猶畏忌於進,乃與諸常侍共說帝遣進西擊邊章、韓遂。帝從之,賜兵車百乘,虎賁斧鉞。進陰知其謀,乃上遣袁紹東擊徐兗二州兵,須紹還,即戎事,以稽行期。

  初,何皇后生皇子辯,王貴人生皇子協。群臣請立太子,帝以辯輕佻無威儀,不可為人主,《字書》曰:「佻,輕也。」然皇后有寵,且進又居重權,故久不決。

  六年,帝疾篤,屬協於蹇碩。碩既受遺詔,且素輕忌於進兄弟,及帝崩,碩時在內,欲先誅進而立協。及進從外入,碩司馬潘隱與進早舊,迎而目之。進驚,馳從儳道歸營,引兵入屯百郡邸,《廣雅》曰:「儳,疾也。」音仕鑒反。因稱疾不入。碩謀不行,皇子辯乃即位,何太后臨朝,進與太傅袁隗輔政,錄尚書事。

  進素知中官天下所疾,兼忿蹇碩圖己,及秉朝政,陰規誅之。袁紹亦素有謀,因進親客張津勸之曰:「黃門常侍權重日久,又與長樂太后專通姦利,靈帝母董太后居長樂宮。將軍宜更清選賢良,整齊天下,為國家除患。」進然其言。又以袁氏累世寵貴,海內所歸,袁安為司徒、司空,孫湯為司徒、太尉,湯子成五官中郎將,成生紹,故云「累代寵貴」也。而紹素善養士,能得豪傑用,其從弟虎賁中郎將術亦尚氣俠,故並厚待之。因復博征智謀之士逄紀、何顒、荀攸等,與同腹心。

  蹇碩疑不自安,與中常侍趙忠等書曰:「大將軍兄弟秉國專朝,今與天下黨人謀誅先帝左右,埽滅我曹。但以碩典禁兵,故且沉吟。今宜共閉上合,急捕誅之。 」中常侍郭勝,進同郡人也。太后及進之貴幸,勝有力焉。故勝親信何氏,遂共趙忠等議,不從碩計,而以其書示進。進乃使黃門令收碩,誅之,因領其屯兵。

24원소(袁紹)가 다시 하진에게 이르기를, “전에 두무(竇武)가 그들을 주살(誅殺)하려하였으나, 반대로 해를 입는 바가 되었습니다.

25그 말이 누설되었고, 오영(五營)의 백관(百官)이 궁중 사람들을 복종하고 무서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으뜸가는 국구(國舅)의 중함을 이미 가지시었고, 형제가 모두 굳센 병사를 거느리고, 부곡(部曲)의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영준(英俊)이자 명사(名士)이므로 기꺼이 죽을 힘을 다할 것이니, 사정(事情)은 장군이 장악한 것입니다. 하늘이 그 때를 돕고 있습니다. 將軍宜一為天下除患,名垂後世。雖周之申伯,何足道哉![6] 今大行在前殿,將軍宜受詔領禁兵,不宜輕出入宮省。」進甚然之,乃稱疾不入陪喪,又不送山陵。遂與紹定籌策,而以其計白太后。太后不聽,曰:「中官統領禁省,自古及今,漢家故事,不可廢也。且先帝新棄天下,我柰何楚楚與士人對共事乎?」進難違太后意,且欲誅其放縱者。紹以為中官親近至尊,出入號令,今不悉廢,後必為患。而太后母舞陽君及苗數受諸宦官賂遺,知進欲誅之。數白太后,為其障蔽。又言:「大將軍專殺左右,擅權以弱社稷。」太后疑以為然。中官在省闥者或數十年,封侯貴寵,膠固內外。進新當重任,素敬憚之,雖外收大名而內不能斷,故事久不決。

  紹等又為畫策,多召四方猛將及諸豪傑,使並引兵向京城,以脅太后。進然之。主簿陳琳入諫曰:「《易》稱『即鹿無虞』,《易·屯卦·六三爻辭》也。虞,掌山澤之官。即鹿猶從禽也。無虞言不可得。諺有『掩目捕雀』。夫微物尚不可欺以得志,況國之大事,其可以詐立乎?今將軍總皇威,握兵要,龍驤虎步,高下在心,此猶鼓洪爐燎毛髮耳。夫違經合道,天人所順,而反委釋利器,更征外助。大兵聚會,強者為雄,所謂倒持干戈,授人以柄,《前書》梅福上書曰:「倒持太阿,授楚其柄。」功必不成,秖為亂階。」進不聽。遂西召前將軍董卓屯關中上林苑,又使府掾太山王匡東發其郡強弩,並召東郡太守橋瑁屯城鮧,使武猛都尉丁原燒孟津,火照城中,武猛謂有武蓺而勇猛者。取其嘉名,因以名官也。皆以誅宦官為言。太后猶不從。

  苗謂進曰:「始共從南陽來,俱以貧賤,依省內以致貴富。國家之事,亦何容易!覆水不可收。宜深思之,且與省內和也。」進意更狐疑。紹懼進變計,乃脅之曰:「交構已成,形埶已露,事留變生,將軍復欲何待,而不早決之乎?」進於是以紹為司隸校尉,假節,專命擊斷;從事中郎王允為河南尹。紹使洛陽方略武吏司察宦者,而促董卓等使馳驛上,欲進兵平樂觀。太后乃恐,悉罷中常侍小黃門,使還里舍,唯留進素所私人,以守省中。諸常侍小黃門皆詣進謝罪,唯所措置。進謂曰:「天下匈匈,正患諸君耳。今董卓垂至,諸君何不早各就國?」袁紹勸進便於此決之,至於再三。進不許。紹又為書告諸州郡,詐宣進意,使捕案中官親屬。

  進謀積日,頗泄,中官懼而思變。張讓子婦,太后之妹也。讓向子婦叩頭曰:「老臣得罪,當與新婦俱歸私門。惟受恩累世,惟,思念也。今當遠離宮殿,情懷戀戀,願復一入直,得暫奉望太后、陛下顏色,然後退就溝壑,死不恨矣。」子婦言於舞陽君,入白太后,乃詔諸常侍皆復入直。

   8월 하진이 장락궁(長樂宮)에 들어가 하태후에게 아뢰기를, ‘모든 상시(常侍) 이하를 모조리 죽이고 삼서(三署)의 랑(郎)들을 뽑아 이들로 하여금 환관들의 거처를 포위하게 끔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여러 환관들이 모여 의논했다. "대장군 하진이 병이 났다면서 상(喪)에도 나오지 않고, 장례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왜 느닷없이 입궁한답니까? 무슨 뜻이 있는거 아닙니까?" "예전에 두무(竇武)가 환관들을 죽일 때처럼 또다시 그렬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곧 장양(張讓)등은 사람을 시켜서 엿듣게 하여 그 말을 전해듣고 상시(常侍)인 단규(段圭)와 필람(畢嵐)등 수십명을 이끌고 무기를 들고 궁궐 측면의 작은 문 주위에 매복하게 하였다. 하진이 나오자 하태후의 조서(詔書)라고 속이고 하진을 불렀다. 하진이 작은 문 안으로 들어오자 장양은 하진을 꾸짖었다.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우리들 잘못 때문 만은 아니오! 《설문》에 이르기를, 궤궤(憒憒)는 어지럽다는 것이다. 예전에 영제(靈帝)가 하태후랑 사이가 안 좋아 거의 하태후를 황후에서 폐립하려고 했을 때 우리들이 울면서 간신히 구해 주기도 했고 각각의 집안에서 천만금을 각출하여 예물을 들여 공을 기쁘게 해드렸던 것은 모두 공의 집안에 의탁하려고 그랬던 것이오! 그런데도 이제 공이 우리들을 모조리 죽이려 드니 이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공은 우리들이 더러운 놈이라는데 그렇다면 공의 사람들 중에 그렇게 충성스럽고 깨끗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요?" 하진이 어찌하지 못하자 상방감(尚方監) 거목(渠穆)이 가덕전(嘉德殿) 앞에서 하진을 칼로 베었다. 讓、圭等為詔,以故太尉樊陵為司隸校尉,少府許相為河南尹。尚書得詔板,疑之,曰:「請大將軍出共議。」中黃門以進頭擲與尚書,曰:「何進謀反,已伏誅矣。」

  進部曲將吳匡、張璋,素所親幸,在外聞進被害,欲將兵入宮,宮合閉。袁術與匡共斫攻之,中黃門持兵守合。會日暮,術因燒南宮九龍門及東西宮,欲以脅出讓等。讓等入白太后,言大將軍兵反,燒宮,攻尚書闥,因將太后、天子及陳留王,又劫省內官屬,從復道走北宮。複音福。尚書盧植執戈於閣道窗下,仰數段圭。段圭等懼,乃釋太后。太后投閣得免。

  袁紹與叔父隗矯詔召樊陵、許相,斬之。苗、紹乃引兵屯朱雀闕下,捕得趙忠等,斬之。吳匡等素怨苗不與進同心,而又疑其與宦官同謀,乃令軍中曰:「殺大將軍者即車騎也,士吏能為報仇乎?」進素有仁恩,士卒皆流涕曰:「願致死!」匡遂引兵與董卓弟奉車都尉旻攻殺苗,棄其屍於苑中。紹遂閉北宮門,勒兵捕宦者,無少長皆殺之。或有無須而誤死者,至自發露然後得免。死者二千餘人。紹因進兵排宮,或上端門屋,以攻省內。

  張讓、段圭等困迫,遂將帝與陳留王數十人步出谷門,奔小平津。谷門,洛城北當中門也。公卿並出平樂觀,無得從者,唯尚書盧植夜馳河上,王允遣河南中部掾閔貢隨植後。貢至,手劍斬數人,余皆投河而死。明日,公卿百官乃奉迎天子還宮,以貢為郎中,封都亭侯。

  董卓遂廢帝,又迫殺太后,殺舞陽君,何氏遂亡,而漢室亦自此敗亂。

  論曰:竇武、何進藉元舅之資,據輔政之權,內倚太后臨朝之威,外迎群英乘風之埶,卒而事敗閹豎,身死功頹,為世所悲,豈智不足而權有餘乎?言智非不足,權亦有餘,蓋天敗也。《傳》曰:「天之廢商久矣,君將興之。」斯宋襄公所以敗於泓也。《左傳》曰,楚伐宋,宋公將戰。子魚諫曰:「天之棄商久矣,公將興之,不可。」宋公不從,遂與楚戰,大敗於泓也。

  贊曰:武生蛇祥,進自屠羊。進本屠家子也。惟女惟弟,來儀紫房。上惛下嬖,人靈動怨。將糾邪慝,以合人願。道之屈矣,代離凶困。代,更也。

  1. 영사황후 하씨(靈思皇后 何氏, 156년 ~ 189년 9월 30일)는 후한 영제의 황후로 소제의 어머니이다.
  2. 광화(光和)는 중국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세 번째 연호이다. 178년 3월부터 사용하여 184년 12월에 황건적의 난이 비로소 진압될 때까지 6년 10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3. 중평(中平)은 중국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네 번째 연호이다. 184년 12월에서 189년 4월까지 5년 5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4. 황건적(黃巾賊)은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장각(張角)을 우두머리로 하여 봉기해 184년 황건의 난을 일으킨 유적(流賊)이다. 머리에 누런 수건을 쓴 것이 특징이며, 태평도(太平道)라는 종교를 세워 후한을 타도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 장각(張角, ? ~ 184년)은 중국 후한 말의 종교 지도자로, 기주(冀州) 거록군(鉅鹿郡) 사람이다. 황건의 난을 일으켰다.
  6. 진수(3세기),《삼국지》〈권6 원소전(袁紹傳)〉 “九州春秋曰:初紹說進曰:「黃門、常侍累世太盛,威服海內,前竇武欲誅之而反為所害,但坐言語漏泄,以五營士為兵故耳。五營士生長京師,服畏中人,而竇氏反用其鋒,遂果叛走歸黃門,是以自取破滅。今將軍以元舅之尊,二府並領勁兵,其部曲將吏皆英雄名士,樂盡死力,事在掌握,天贊其時也。今為天下誅除貪穢,功勳顯著,垂名後世,雖周之申伯,何足道哉?今大行在前殿,將軍以詔書領兵衞守,可勿入宮。」進納其言,後更狐疑。紹懼進之改變,脅進曰:「今交搆已成,形勢已露,將軍何為不早決之?事留變生,後機禍至。」進不從,遂敗。”(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이르기를, 처음에 원소가 하진에게 이르기를, “황문·상시가 대대로 크고 번성하여 온 세상을 복종시켰습니다. 전에 두무(竇武)가 그들을 주살(誅殺)하려하였으나, 반대로 해를 입는 바가 되었습니다. 다만, 앉은 자리에서 말이 누설되었으니, 이는 오영(五營)의 병사(兵士)들이 들었기〔耳〕 때문입니다. 오영의 병사들은 수도(首都)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궁중(宮中) 사람들을 복종하고 무서워하는데도, 두씨(竇氏)는 그 병력을 써서 반기를 들었는 바, 마침내 그 결과, 오영 병사들이 배반하여 황문에게로 달려 돌아갔으므로 이로써 스스로 파멸하였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으뜸가는 국구(國舅)의 존엄으로서, 이부(二府)가 모두 굳센 병사를 거느리고, 그 부곡(部曲)의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영웅이자 명사(名士)이므로 기꺼이 죽을 힘을 다할 것이니, 사정(事情)은 장군이 장악한 것입니다. 하늘이 그 때를 돕고 있습니다. 지금 천하를 위해 탐욕스럽고 더로운 자들을 죽여서 없애면, 공훈(功勳)이 현저하고 이름을 후세에 전할 것이니, 雖週之申伯,족히 말하여 무엇하오리까? 지금 전전(前殿)으로 크게 나아가 장군께서 조서(詔書)로서 병사에게 명령하여 지키게 하면, 가히 입궁(入宮)을 금할 수 있습니다.” 하진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가, 뒤에 다시 여우처럼 의심하였다. 원소는 하진의 변심을 걱정하며, 하진에게 위협하여 말하기를, “지금 서로 얽혀 있음이 이미 이루어졌고, 형세가 이미 드러났는데 장군께서는 어찌 어서 결정하지 않으시는지요? 일이 더뎌지고 변고(變故)가 생기면, 훗날 화(禍)가 미칠 것입니다.”하였다. 하진은 좇지 않았고, 마침내 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