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appyMidnight/인류 이야기

the Story of Mankind

대항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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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중세의 편협한 제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좀더 탐험을 할 공간이 필요했다. 유럽세계는 그들의 야망에 비해서 비좁았다. 발견을 위한 대항해 시대가 도래했다.

십자군은 여행계에서 어떤 교훈이 되었다. 그러나, 베니스에 자페( Jaffe)까지 잘 닦여진, 잘 알려진 상도를 넘어서 모험을 해 보았던 사람은 매우 적었다. 13세기에, 베니스의 상인들 폴로 형제는 대몽골 사막을 건너 방랑하고 달[月]에 이르기만큼 높은 산에 오른 후, 캐세이의 대(大)칸, 즉 위대한 중국 제국의 궁정으로 이르는 길을 발견하였다. 마르코라는 이름을 가진 폴로 형제의 한 아들은 그들의 모험에 관한 책 하나를 썼는데, 이 책은 20년 넘는 기간을 다루고 있다. 지팡구(그가 일본을 지칭하는 이탈리아식 표현이다)의 이상한 섬에 있는 황금 타워를 기술하면서 그는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동쪽으로 가기를 원했다. 거기서 그들은 이 황금토지를 찾아 부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행은 너무 멀고도 위험했으므로 그들은 집에 머물렀다.

물론, 바다로 여행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매우 합리적인 이유들로, 중세 시대에는 바다는 매우 인기가 없었다. 먼저, 배들이 너무 작았다. 마젤란이 수년간을 지속적으로 전세계를 항해하는 데 이용했던 배들도 현대의 페리보트만큼 크지 않았다. 이 배들은 20~50명의 남자들을 실어날랐는데, 그들은 똑바로 서 있기에도 너무 낮고 어두침침한 방에게 살았다. 그리고 주방기구는 열악했고, 날씨가 조금만 좋지 않아도 불을 피울 수 없었기에, 선원들은 매우 열악하게 조리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중세 시대에도 청어를 염장하고 생선을 말리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해안이 저 멀리 사라지자 마자, 통조리됨 음식도 신선한 채소도 "청구서"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물은 작은 통에 담겨서 운반되었다. 곧 물은 상해서 썩은 나무와 녹슨 쇠 맛이 났고 미끌미끌한 것이 잔뜩 자라기 시작했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미생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13세기의 학식있는 수도사, 로저 베이컨은 미생물의 존재를 의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 발견을 현명하게도 혼자만 알고 있었다.), 더러운 물을 마시는 것은 다반사였고, 때로는 모든 선원들이 티푸스 열로 죽기도 했다. 참으로 배 위에서 죽어나가는 모습은 초기의 항해자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마젤란의 그 유명한 세계 일주 항해에 따라나서, 1519년에 세비야를 떠난 선원 200명 중에서 단지 18명만이 되돌아왔다. 서유럽과 인디아 사이에 활기찬 무역이 이루어졌던 17세기에 들어서서도 암스테르담에서 바타비아까지 왕복 여행에서 40%의 사망률은 이례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들 희생자의 대부분은 괴혈병으로 숨졌는데, 이는 신선한 야채의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서, 잇몸에 영향을 주고 환자가 극심히 탈진하여 죽을 때까지 혈액에 독을 퍼뜨리는 질병이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바다가 사람이 살기에 최상의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마젤란,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은 유명한 발견자들이 함께 여행을 했던 선원들은 전에 감옥을 들락날락하던 죄수였거나, 미래의 살인자나, 직업없는 소매치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 항해자들은 편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할 위험에 직면하여 희망없는 일들을 수행하게 해 준 용기에 있어서 확실히 존경받을 만하다. 그들의 배는 물이 샜고, 삭구(索具)가 투박했다. 13세기 중반부터 그들은 몇 종류의 나침반(이것은 중국으로부터 아라비아와 십자군을 거쳐 유럽에 들어온 것이다)을 손에 넣었지만, 그들의 지도는 매우 조잡하고 부정확한 것이었다. 그들은 항로를 신(神)과 추측에 맡겼다. 운명이 그들과 함께 한다면 1, 2, 3년 후에는 돌아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백골이 어느 외로운 섬에 남겨졌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은 운명을 걸고 도박을 했다. 그들에게 삶이란 영광스러운 모험이었다. 항구를 떠난 뒤로는 모습도 잊어버렸던, 새로운 해안의 희미한 외곽선이나 잔잔한 대양의 물결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을 때, 모든 고통, 갈증, 허기는 사라졌다.

다시 말하지만, 난 이 책을 몇 천장쯤 되도록 만들고 싶다. 초기 신대륙 발견이라는 주제는 정말 매혹적이다. 그러나, 과거에 관한 진정한 사상을 주기 위해, 역사는 렘브란트가 만들곤 했던 에칭화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역사책이라는 것은 어떤 중요한 원인들-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것들-에 대해서는 생생하게 부각시켜야 한다. 그 나머지는 그림자로 감추어 두거나 몇 줄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장(章)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발견들의 단상(斷想)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항해자들은 단지 한 가지 욕망, 즉, 중국 제국으로, 지팡구(일본) 섬으로, 그리고 그 신비로운 섬들(이 섬들은 십자군 시대 이래로 중세 세계가 즐겨찾게 된 향신료가 산출되는 곳이었다. 냉장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들은 이 향신료를 필요로 하였다. 고기와 생선은 빨리 상하는데, 후추와 육두구를 흩뿌려두어야만 먹을 수 있었다.)로 가는 편안한 길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독자들은 이를 잘 새겨두기 바란다.

베네치아인들과 제노아인들은 지중해의 위대한 항해자들이었다. 그러나 대서양 연안 탐험의 영광은 포르투갈인들에게로 옮겨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무어인들에게 대항하여온 오래된 투쟁이 발전시켜준 애국적인 힘으로 넘쳐났다. 그러한 힘은 일단 존재하기만 하면 새로운 통로로도 쉽게 영향을 받는다. 13세기에, 국왕 알폰소 3세는 스페인 반도 남서쪽의 알가르브 왕국을 정복하여 그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다음 세기에 포르투갈인은 이슬람으로 방향을 돌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랍인의 도시 타리파(아랍어로 "재고"라는 뜻으로서, 스페인어를 거쳐 영어의 "tariff"로 전해졌다.)와 탕헤르의 반대편에 있는 도시 세우타를 점령했다. 세우타는 알가르브 왕국의 아프리카 쪽을 담당하는 수도가 되었다.

그들은 탐험가로서의 직업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1415년, 포르투갈의 후안1세와 필리파(곤트의 존[윌리엄 세익스피어의 연극 리차드 2세에서 볼 수 있는 이름이다]의 딸)의 아들이자, 항해왕 엔리케라고도 알려진 엔리케 왕자는 북서 아프리카를 체계적으로 탐험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