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appyMidnight/사기/권111

1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青)[1]은 평양(平陽)[2]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정계(鄭季)는 관리(官吏)가 되어 평양후(平陽侯)[3] 집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후(候)의 비첩(婢妾) 위온(衛媼)과 사통(私通)하여, 위청(衛青)을 낳았다. 위청의 동복형(同腹兄)은 위장자(衛長子)이고, 누나 위자부(衛子夫)[4]평양공주(平陽公主)[5] 집안(에서 섬기다가 여기)에서 천자(天子)[6]의 총애를 얻었으므로, 모성(冒姓)을 위씨(衛氏)로 하였다.[7] (위청의) 자는 중경(仲卿)이다. 위장자(衛長子)는 자를 장군(長君)이라 고쳤다. 장군(長君)의 어머니를 위온(衛媼)이라 불렀다. 위온(衛媼)의 큰 딸은 위유(衛孺), 둘째 딸은 위소아(衛少兒)[8], 셋째 딸이 곧 위자부(衛子夫)이다. 뒤에, 위자부의 남동생 위보(衛步)·위광(衛廣)도 모두 위씨(衛氏)를 모성(冒姓)하였다.

2 위청은 (평양)후(侯) 가문의 하인(下人)이었는데, 어릴 때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는 (위청에게) 양(羊) 기르는 일을 시켰다. 先母之子皆奴畜之,不以為兄弟數。青嘗從入至甘泉居室,有一鉗徒相青曰:「貴人也,官至封侯。」青笑曰:「人奴之生,得毋笞罵即足矣,安得封侯事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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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將軍郭昌,雲中人也。以校尉從大將軍。元封四年,以太中大夫為拔胡將軍,屯朔方。還擊昆明,毋功,奪印。

41 장군(將軍) 순체(荀彘)는 태원(太原) 광무(廣武)사람이다. (뛰어나게) 말을 모는 것으로 인하여 (천자를) 뵙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교위(校尉)가 되어 여러 번 대장군(大將軍)을 따라갔다. 원봉 3년 (기원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조선(朝鮮)을 쳤으나 공(功)이 없었다. 누선장군(樓船將軍)[9]을 체포함으로 인하여 법에 따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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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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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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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청(衛靑, ? ~ 기원전 106년)은 전한의 한 무제의 장군으로 장평후(長平侯)가 되었다.
  2. 하동(河東) 평양(平陽)은 현재의 산서성(山西省) 임분시(臨汾市)이다.
  3. 평양후(平陽侯)는 서한(西漢) 후작(侯爵)의 하나로서, 서한의 개국공신 조참(曹參)이 봉(封)해진 것이 시초이다. 전한 무제 때, 제6대 평양후 조종(曹宗)이 무고지화(巫蠱之禍)에 연루되어 죽음을 다함으로써 없어졌다. 평양현(平陽縣)은 서한 때 하동군(河東郡)에 속하였고, 위치는 현재의 산서 임분(山西臨汾)이다.
  4. 무사황후 위씨(武思皇后 衛氏, ? ~ 기원전 91년)는 전한 무제의 두 번째 황후로, 자는 자부(子夫)이다.
  5. 평양공주(平陽公主, ? ~ ?)는 전한 경제와 효경황후 왕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전한 무제의 누나이다.
  6. 전한 무제를 말한다.
  7. 모성(冒姓)이란 남의 성씨를 빌려 쓰는 것을 말한다. 청의 성씨가 위씨가 된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8. 곽중유(霍仲孺)와 혼인하여 곽거병(霍去病)을 낳는다.
  9. 양복(楊僕)을 말한다.: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천자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