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동명왕/제3장

空閨 편집

1 편집

주몽에 관한 기별은 날마다 가섬벌에 들어 왔다. 그것은 어디서 주몽을 잡을 뻔하다가 놓쳤다 하는 것이었다. 주몽 을 사로잡거나 죽여 잡거라 큰 상금을 받는다는 바람에 활 에나 칼에나 재주가 있다는 패가 많이 주몽을 따랐으나 닷 새가 되어도 열흘이 되어도 주몽을 잡은 자는 없었다. 주몽 은 언제나 한 걸음 앞서서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모양이었 다. 백성의 인심을 많이 산 주몽인지라 철모르는 아이들까 지도 그를 아껴서 뒤따르는 관군이 물을 때에는 주몽이 간 길을 바로 알리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은 주몽의 일행이 간 것과 반대 방향으로 관군에게 길을 가르치는 일도 있어서 나중에 그 일이 발각이 되어 온 동네가 큰 벌을 받는 일도 있었다. 가섬벌 사람들은 신이 나타나서 주몽을 돕고 대소 를 아니 돕는다고 말하였다. 대소의 군사가 주몽이 들어 자 는 동네 가까이 갔을 때에 문득 그 동네가 온통 불바다가 되어서 근접할 수가 없으므로 뒤로 물러와 본즉 그 불은 허 깨비였다는둥, 난데 없는 노파가 나타나서 바람결에 흙을 날려 따르는 군사와 말이 눈을 못 뜨게 하였다는둥 이런 소 리가 떠돌았다. 아무려나 사람들과 신명들이 모두 주몽을 도와서 대소의 손에 아니 잡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예랑은 주몽이 잡히지 아니하였다는 기별을 들을 때마다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강월로 더불어 밤이면 단 위에 맑은 물을 떠 놓고 주몽이 무사하기를 하늘에 빌고 별에 빌었다.

한 달이나 지나 팔월 가위 때나 되어서 주몽이 엄체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예랑은 안심하였다. 엄체수가 어딘지 예랑은 잘 몰랐으나 사람들의 말에 앙당물이라는 강은 한량 없이 멀고 먼 곳이요, 그 물을 건너면 거기는 무엇이 사는 지 모를 먼 나라라고 믿는 것이었다.

나라에서는 주몽이 어디서 군사를 모아 가지고 가섬벌을 쳐들어 올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하고 있었다. 더구나 평 소에 주몽을 미워하는 대소 이하 모든 왕자들이 그러하였고 예사 백성들도 주몽과 같이 잘난 사람이니 반드시 여러 왕 자들에게 대한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랑의 아버지 예백도 가끔 집에서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을 예랑도 들었다. 예백은 나라에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었 다. 그는 하늘과 땅과 들과 물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에서 하는 모든 예법을 맡은 벼슬아치여서 궁중에서도 가장 지위 가 높고 금와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천문과 지 리도 알고 저 한 나라 글도 알아서 그이가 모르는 것은 없 다고들 말하였다. 대소 이하로 왕자들이 다 그에게 글과 예 법을 배우고 주몽도 그러하였다. 그는 싸움하는 재주는 많 지 아니하나 세상 일을 잘 알았다. 왕도 대소도 다른 왕자 들도 때때로 예백의 집에 왕림하였다. 대소가 예랑을 처음 본 것도 그런 기회에서였다. 주몽도 그러하였다. 예랑은 대 소의 마음에 먼저 들고 다음에 주몽의 마음에 들었으나 예 랑의 마음에는 주몽만이 깊이 든 것이었다.

2 편집

주몽이 무사하게 앙당물을 건넜다는 소식은 예랑을 기쁘게 하였으나 동시에 새로운 슬픔을 예랑에게 가져 왔다. 그것 은 주몽이 한정 없이 멀리 떠났다는 것이었다. 주몽이 간 곳이 이 나라 밖이다. 해가 떠오르는 동해 바다에 가까운 곳이라하나 그것이 대체 어떠한 곳인고. 거기는 이마에 눈 하나만 있는 나라도 있고 또 눈이 셋 박힌 나라도 있다는 것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가슴에 구멍이 뚫어져서 그리 로 몽둥이를 꿰어 맞들고 다니는 나라도 있다는 말이다. 또 좋은 소문으로는 그 나라에는 금이 많고 먹으면 무슨 병이 나 낫고 오래 살 수 있는 약풀이 있는데 그 뿌리는 사람과 같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그 나라에 가면 산이 높고 물 이 맑으며 각색 과일이 다 맛이 있다는 것이었다. 주몽은 앙당물을 건너 해뜨는 나라, 아침의 나라, 금과 인삼 나는 나라로 간 것이었다. 그러나 예랑은 언제나 다시 주몽을 만 나기는커녕 언제나 다시 그 소식을 듣나.

주몽이 잡힐 것을 근심하여 조심하던 것이 없어진 대신 주 몽을 그리워하는 생각이 예랑의 마음을 볶았다. 밤에 자리 에 누워도 잠이 아니 들었다. 돌아 눕고 또 돌아 누워 한없 이 돌아 누웠다. 방 속에서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한 마디 도 아니 빼고 들으려는 것 같았다. 창에 뜬 달 그림자도, 뜰 에 들리는 나뭇잎 지는 소리도 모두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에 근심을 자아내는 것이다.

『잠이 안 드시오?』

하고 강월이 자리에 일어 앉으며 예랑을 부른다.

『잠이 안 드는구나. 너는?』

하고 예랑도 두 팔을 이불 위에 내어 놓는다.

『저도 잠이 안 들어요. 아가씨 돌아 누우시는 소리가 제 가슴을 쾅쾅 울려요.』

『잠만 들면 꿈에는 그 어른을 꼭 뵈올 것 같은데 잠이 안 드는구나. 강월아, 왜 잠이 안 들까. 기나긴 가을 밤을 뜬 눈으로 어떻게 새우니?』

『겨울 밤은 더 길지요.』

『그러기에 말이다. 천년 같은 겨울 밤을 어떻게나 지내 나.』

『참고 참고 지내지요. 세월이 가노라면 기다리는 날이 끝 날 때도 있겠지요.』

『그 어른이 오시거나 이 몸이 죽거나, 네 말같이 끝날 날 도 있겠지. 이렇게 잠 못 이루고 눈물 한숨에 몸이 달고 살 기로 며칠 살겠니? 내가 이렇게 그 어른을 그리고 그리다가 죽거든 강월아, 네가 살아 남아서 그 어른 뵈올 때에 내 그 리던 정경을 아뢰어다오. 밤이면 잠 못 이루고 돌아 눕고 돌아 누워 밤을 새더라고. 꿈에라도 뵙고 싶어서 잠이 들려 고 애를 쓰더라고.』

『아씨께서 돌아 가시면 소인네는 살아요? 아씨께서 돌아 가시고 소인네가 살아 남는 일이 있더라도 저 한 나라 사람 들이 한다는 모양으로 소인네는 산채로 아씨의 무덤에 들어 갈 걸요. 들어 가서 아씨 몸을 붙들고 만지고 울다가 촛불 꺼지듯 꺼질 걸요.』

두 사람의 음성은 울음으로 끝이 흐린다.

3 편집

『이래서 쓰겠느냐.』

하며 예랑은 이불을 걷어 안고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는 다. 옥같이 흰 몸이 달빛속에 떠나온다. 칠같이 검은머리, 가느스름한 목, 불룩한 젖가슴, 곱게 휜 가는 허리, 묵직하 고 둥그스름하게 펑퍼짐한 두 볼기짝, 강월은 예랑의 아름 다움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강월과 예랑은 어려서부터 짝이 어서 피차에 모르는 바가 없건마는 이날밤 예랑의 몸에서는 무슨 알 수 없는 빛이 발하는 것 같았다. 강월은 하도 소중 스러워서,

『아가씨, 감기 드시리다.』

하고 처네를 들어 예랑의 등에 걸치며,

『벌써 선선한 걸요. 된 서리는 아직 안 왔어도 무서리는 몇 번이나 친 걸요.』

하고 예랑의 살에 찬바람이 닿지 아니하도록 꼭꼭 싸준다.

『추운 줄도 모르겠어. 가슴에 불이 타니 그러한가. 냉수라 도 한 그릇 벌꺽벌꺽 먹었으면.』

하고 예랑은 반갑고 고마운 듯이 팔을 들어 강월의 허리를 안는다.

강월은 황송하여서 예랑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예랑은 강월의 허리를 안은 팔에 지그시 힘을 주며,

『강월아. 그날, 나으리께서 떠나시던 날 나으리께서 너를 안아 주셨지?』

하고 강월의 뺨에 제 뺨을 스친다.

『황송하오. 아씨께서 강월이 불쌍하니 한번 안아 주라하 셔서.』

하고 강월은 고개를 폭 수그린다.

『그래. 그 어른이 강월을 힘껏 안아 주시던가?』

『모르겠소.』

『으스러져라 하고 껴안아 주시지 아니하던가?』

『모르겠소. 소인네는 꿈꾼 것과 같아서 모두 희미하오. 꿈 꾼 것만 생각이 나고 무슨 꿈인지 생각이 아니나는 그런 꿈 과 같아서 잘 모르겠소.』

『옳아. 네 말이 옳아. 거짓 없는 강월이야. 나도 그날밤 일은 꿈과 같아서 지금 생각해도 생각이 안나. 꿈, 그래 꿈 이야. 잊어버린 꿈이야. 그렇고도 잊을 수 없는 꿈이야. 그 어른이 몸에 품어 주시던 이몸은 이렇게 여기 있거든. 이몸 도 꿈일까. 그 어른이 주신 칼도 옷자락도 여기 이렇게 있 거든. 이것이야 꿈 될 수가 있나. 그런데 강월아.』

하고 예랑은 더욱 음성을 낮춘다. 이 처소는 예백 집 후원 별당이라 큰소리를 하여도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건마는 젊 은 아가씨네들에게는 바람이 들을까 보아 부끄럽고 겁이 나 는 말도 있는 것이었다.

『네? 왜 그러셔요?』

강월도 더욱 음성을 낮추고 제 귀를 예랑의 입에 갖다가 댄다.

『내가 이달에 보일 것이 안 보여. 웬 일일까? 좀 메슥메 슥한 것도 같고. 강월아 웬 일일까?』

강월의 귀와 뺨에 닿는 입김은 덥고 숨은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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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무슨 걱정이오? 경사 아니요?』

하고 강월은 예랑을 안아 자리에 누이고 젖먹이를 덮어주 듯 이불 귀를 눌러 주며,

『어서 누우시오. 손금 보는 마누라의 말이 아씨께서 큰 임금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아니하셨소? 큰 임금의 어머니, 아니 그런 경사가 어디 있어요? 가만 계셔요. 제 나가서 정 화수 갈아 모시고 잡수실 물 떠 가지고 들어 올께요.』

강월은 밖에 나왔다. 서리 맞은 동산에는 벌레 소리도 없 고 차디찬 이슬 방울에 달빛만 번쩍이고 있었다. 강월은 흘 러 내리는 샘에 손과 낯을 씻고 정화수를 갈아 모신 뒤에 달빛 어린 물 한 그릇을 떠가지고 방에 들어 왔다.

『아씨. 한 모금 잡수시오. 벌써 달이 다 저물 때가 되었으 니 닭이 울 때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인제부터라도 한 잠 주무시지. 그리고 내일은 곰릐에 머루랑 다래랑 돌배랑 따 먹으러 가시지요. 시원히 바람도 쏘이시고, 또 대소 태자 귀찮음도 피하시고.』

『이것이 애기라면 내 앞 길이 딱하지 아니하냐. 부모님은 필시 나를 집에서 내어 쫓으실 것이요, 그나 그뿐인가 내 뱃속에 든 애기가 주몽아기의 씨라고 알면 대소아기는 필시 내 배를 갈라 그 애기를 없앨 것이니 어찌 걱정이 아니 되 겠느냐? 앞으로 내가 믿을 사람은 강월이 너 한 사람 밖에 없다. 너까지 나를 버리면 나는 하늘에도 땅에도 나무에도 돌에도 붙일 데 없는 사람이 아니냐? 강월아, 너는 나를 배 반하지 않겠지?』

하고 예랑은 강월의 손을 잡는다.

『원, 배반이라니, 소인네가 죽기로니 아씨를 어떻게 배반 하오? 죽더라도 아씨 곁에 묻히고 살아서는 아씨 곁을 아니 떠나오.』

『정말 그러냐? 무슨 고생이 있더라도 너는 나를 아니 떠 나지?』

『그럼요. 하느님이 내려다 보시고 햇님·달님·별님이 굽어 보시오.』

『고맙다. 그러면 나는 마음을 놓아. 내가 큰 임금의 아내 의 자리에 들어 가더라도 너와 같이 갈 것이다. 네가 나와 고생을 함께 하듯이 나도 너와 낙을 같이 할 것이다. 내 마 음도 하늘이 굽어 보시고 햇님·달님이 굽어 보신다.』

『고마우셔라.』

강월은 예랑의 손길을 두 손으로 꼭 쥔다. 그 손끝은 찼다.

『만일 소인네가 죽어서 아씨께 좋을 일이 있으면 언제나 죽사오리다. 손을 하나 자르라시면 자르고, 눈알을 하나 빼 라시면 빼리다. 평생에 소인네를 종같이 아니 부리시고 동 기같이 귀애하신 깊은 정 높은 은혜를 머리를 깎아 신을 삼 아 드리기로 아깝다 하리까, 갚았다 하리까. 아씨 소인네 일 은 아예 걱정마시오. 상아라 강물이 말라도 방아라 산이 다 닳아도 강월의 마음은 변하지 아니하오.』

『고마워. 고마워. 우리 서로 의지하고 살자. 자, 그럼 한잠 자 볼까. 압다. 저 보아, 닭이 우네, 첫닭이 우네.』

닭의 소리에 깨어난 듯한 새벽 찬 기운이 방안에 돌고 창 에 비친 달그림자는 더욱 높았다.

5 편집

주몽을 잡으러 갔던 장수 대목(大目)이 돌아 와서 금와왕과 대소 태자에게 주몽 도망하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아뢰었다.

간 데마다 백성들이 주몽을 아끼고 돕는다는 말은 꺼려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주몽이 결코 관군을 향하여 활을 당긴 일이 없다는 말은 아뢰었다. 이 말을 듣고 금와왕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대소의 눈에는 비웃음이 떴다.

금와왕은 아들 대소의 태도를 보고 만족하던 웃음을 거두 고 근심스러운 듯이,

『대소야.』

하고 불렀다.

『네.』

『너는 주몽이가 어찌하여 그 잘 쏘는 활을 한번도 안 당 기고 나라 밖으로 나갔는지 아느냐?』

『겁이 나서 그랬을 것이요.』

『주몽이가 언제 무엇에 겁내는 것 보았느냐?』

『이번에는 붙들리면 모가지가 떨어질 것이니 제 아무리 주몽이기로 겁이 아니 나겠소이까. 주몽이가 몽둥이 무서워 하는 개가 꼬랑지를 끼고 달아나듯이 도망한 것이 가엾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오. 그러나 대목이가 주몽을 붙잡지 못하 고 돌아 온 것이 괘씸한가 하오. 만일 소자가 갔더면 반드 시 주몽의 대가리를 베어 말 꼬리에 달고 돌아 왔을 것이 요.』

하고 대소는 분하여 치를 떤다.

『이 보아라, 대소야. 네가 마음을 잘못 가지는구나. 네가 그런 불인한 마음을 먹다가는 필시 주몽에게 패할 날이 있 을 것이야. 첫째로, 네가 남을 미워하는 것이 잘못이요, 둘 째로, 네가 남을 시기하는 것이 잘못이요, 셋째로, 네가 남 을 멸시하는 것이 잘못이야. 왕자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 다. 나보다 나은 자를 존경하고 나보다 못한 이를 어여삐 여기고 사냥을 가서 짐승을 보고 활을 쏘거나 창을 던지되 맞혔다고 기뻐하거나 못 맞혔다고 분해하는 것은 큰사람의 마음 가지는 법이 아니다. 왕자의 마음은 하늘의 마음을 본 받아야 하는 것이야. 내가 보기에는 주몽은 왕자의 마음을 가졌다. 내 저를 아들로 사랑하였고 또 제 어미 이 나라에 있으니 가섬벌을 향하여 활을 당길 리가 없다. 그래서 그런 것이지 겁이 나서 활을 못 쏜 것이 아니다.』

금와왕의 말이 이렇게 옳았으나 대소에게는 좋게 들리지 아니하였다. 모두 늙은 아버지의 망령인 것만 같아서 불쾌 하였다. 그러나 부왕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어서 속으로만 주몽을 무수히 저주하고 무한히 미워하였다.

왕과 태자의 언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대목은 무릎걸음으 로 왕의 앞에 나아가 품에서 엷은 버드나무 조각 하나를 꺼 내어 두 손으로 받들어 왕께 올렸다.

『젛사오나 이것을 올리오. 이것은 엄체수를 건넌 뒤에 주 몽이가 활로 쏘아 화살에 달아 보낸 글발이오.』

왕은 그 버들 조각을 받아 들고 본다. 거기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吾母老斯. 吾妻寓斯. 斯土斯民. 孰敢犯斯.(내 어미 여기 늙고 내 아내 여기 머물거니 이 땅 이 백성을 뉘 감히 건드 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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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은 주몽의 글발을 읽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더 니 그것을 대소에게 주며 이렇게 일렀다.

『네 읽어 보아라. 그리고 그 뜻을 생각해 보아라.』

대소는 무릎을 꿇고 그 나뭇 조각을 왕의 손에서 받아 읽 는 대소의 몸은 흠칫하고 눈은 커졌다. 대소는 제 눈을 못 믿어 두 번 세 번 그것을 읽었다. 쫓겨 달아나는 한낱 망명 객으로서 감히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지키기를 약속한 것이 엄청남을 놀라와하는 것보다도 「내 아내 여기 머물거니」

라는 말에 놀란 것이었다. 「내 아내」가 누구일까. 예랑이 아닐까. 주몽이 예랑을 찾아 다닌다는 소문도 아니 들은 것 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는 태자, 주몽은 말 먹이는 천한 놈 ─대소는 이렇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예랑을 주몽에게 빼앗 기리라고는 생각도 아니하였다.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예랑 을 지나가는 솔개에게 빼앗긴다 함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몇 번 보아도 「내 아내 여기 머물거니」라는 구절 은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대소는 임금의 앞에 있는 것도 잊고 그 나뭇 조각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웬 일이냐? 무엇을 생각하고 그러느냐?』

대소는 그것이 예랑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예랑이 주몽의 것이 되었는가 보아서 질투의 분심이 치미는 것이라 고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주몽의 말이 괘씸하고 방자해서 그러오. 이 앞에 주몽이 있으면 당장에 세 동강을 내겠소.』

하고 대소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한번 윽물었다.

왕은 아들의 뜻을 떠보려는 모양으로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주몽의 말이 무엇이 괘씸하고 방자하단 말이냐? 자식으 로 부모를 사모하니 효요, 부모 처자가 의탁하는 나라를 범 하지 않는다 하니 인이다. 주몽의 말이 무엇이 잘못 되었단 말이냐?』

『꼬리를 끼고 달아나는 강아지와 같은 신세가 그저 살려 줍소사 하고 비는 것이 아니라, 제가 무엇이길래 감히 천하 에 으뜸 가는 이 나라를 범하고 말고가 있소이까. 제가 이 나라를 범할 뜻이 있기로니 무슨 힘으로 감히 풀한 포긴들 건드리오리까. 제 아내가 있다하니 누군지 모르거니와 그것 을 잡아 끓여 먹거나 구워 먹거나 제가 감히 어찌하오리까.

그러매로 주몽이 이 앞에 있으면 한칼로 세 동강에 낸다고 아뢰었소.』

『앗아라.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왕자의 말이 아니라 필부의 말이야. 말을 삼가야 한다. 왕의 덕을 가진 자는 말 한 마디도 천하의 범이 되게 하는 것이야. 주 몽의 말에는 왕의 기상이 있거늘, 네 말은 어찌 그리 악착 한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큰 그릇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 다. 너 내가 하는 말을 잊지 말렷다. 이후라도 주몽의 어머 니와 아내를 잘 대접하렷다. 말 한 마디도 불공함이 없으렷 다. 주몽을 두려워하라 아니하거니와 어려워하렷다. 대소야, 이 말을 잊지 말렷다?』

하는 왕의 정녕하고도 엄숙한 말씀에 대소는 속에 없는 말 이나,

『네.』

하고 물러나왔다.

7 편집

대소는 제가 왕이 못되고 아직 태자인 것이 원망스러웠다.

우선 듣기 거북한 주달을 하는 대목의 늙은 머리를 갈겨 버 리고 싶었다. 주몽이 관군을 향하여서 활을 아니 쏘았다는 말이나, 또 그 버드나무 쪽의 글발이나 모두 대소를 내려 누르는 힘이 있었다. 저는 분명히 주몽만 못하였다. 칼 쓰 기, 활 쏘기 같은 재주에만 못한 것이 아니라 기상에 못하 였다. 못하니까 분하고 미웠다. 주몽이 죽었으면 좋을 것이 나 아무리 하여도 주몽이 죽지를 아니하였다. 사냥 가는 기 회에서도 여러 번 혹은 사람을 시켜서, 혹은 제 손으로 주 몽을 겨누었으나 번번이 무슨 까닭이 생겨서는 주몽을 죽이 는 목적을 달하지 못하였다. 지난 마지막 번 사냥 때에 대 소가 숲 속에 숨어서 주몽을 겨누고 쏜 화살은 공교롭게도 난데 없는 꿩이 날아와서 중간에서 제 몸으로 살을 막아 버 렸다.

『아아 하늘이다.』

하고 대소는 한탄하였다.

그런 뒤로 더욱 주몽이 밉고 또 무서웠다. 주몽은 제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저를 노려 보는 무슨 큰 힘인 것 같 아서 마음이 아니 놓였다.

대소는 군사 두엇을 데리고 말을 타고 예백의 집을 찾았 다. 예백 이하로 온 집안이 떨어나 대소를 맞았으나 그중에 예랑은 없었다. 예랑은 강월과 계집 종을 데리고 뒷산에 머 루 다래 따러 나갔던 것이었다.

좌정 후에 대소는 예백에게 정식으로 예랑과의 혼인을 청 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백은,

『황송하오. 미거한 것이 감당 못할 듯 저퍼하오.』

하고 읍하고 겸사하였다.

대소는 마주 읍하며,

『겸사요. 내가 가섬벌에 누구누구하는 집 처자를 아니본 바가 없으되 따님만한 사람을 못 보았소. 내 뜻은 바위같이 굳게 작정되었으니 다시 사양 마시오. 마땅히 상감께 여쭈 어서 우으로부터 예백에 분부가 계실 것이어니와, 비록 나 라의 힘이라도 혼인이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으니 예백이 쾌히 허락하시오.』

하고 매우 초조한 빛을 보인다. 그것은 예랑이 주몽과 혼 약이 있을까 보아서 겁을 냄이었다.

『아비 된 몸으로 딸자식이 국모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데 황송하고 기뻐할 것 밖에 무슨 다른 뜻이 있사오리까.

그러하오나 혼인이란 나라의 힘으로도 억지로 못한다 하옵 거니와 또 부모의 힘으로도 억지로 못하는가 하오. 그러하 옵길래로 예로부터 조상님네 법이 총각이 처녀의 집에 가서 일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이러하기를 며칠이고 몇 달이고 하여서 처녀의 마음을 움직인 뒤에야 두 집 부모들 사이에 혼인 말이 왔다갔다 하기로 되었으니 이것이 예요. 그러하 온즉 동궁마마께서 소인의 딸년의 마음을 움직이시와서 그 년의 말을 들어 보시오.』

이 말에 대소는 비로소 안심하고,

『그러면 나도 예백 집에 삼년 머슴을 살아야 사위가 되겠 는가.』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8 편집

『딸 아기를 좀 만나게 해 주시오.』

대소는 마침내 이렇게 청하였다.

『계집애 동무들과 산 놀이를 나갔으니 뒷산에 있을 줄 아 오. 이제 사람을 보내어 부르오리다. 그동안 여기서 쉬시 오.』

하고 예백의 아내는 종을 불러,

『이 보아라. 네 뒷산에 뛰어 가서 아가씨 냉큼 집으로 돌 아 오라고 일러라. 동궁마마께오서 기다리신다고, 지체말고 냉큼 오라신다고 일러. 이 골에 없거든 저 골에 달음박질 찾아 다니며 소리쳐 부르렷다.』

하여 종을 떠내어 보내고 곤두박질하다시피 들며 나며 왕 자를 대접하는 분별 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예백은 대소의 접대를 아들 예도에게 맡기고는 근 심스러운 얼굴로 제방에 돌아와 있었다. 예백의 부인은,

『아니, 대감은 웬 일이시오? 집안에 큰 경사가 났는데 왜 그렇게 찌푸리고 계시오? 아들을 낳았다가 공주부마가 되는 것도 경사려든 딸을 길렀다가 동궁비로 들여보내게 되니 가 문에 이런 경사가 또 있소? 두 팔 홀짝 벌리고 덩실덩실 춤 을 추실 것이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숨이요? 점을 쳐서 무슨 불길한 괘가 났소?』

하고 서둔다.

『점을 친 것도 아니요, 불길한 괘가 난 것도 아니요.』

하는 예백의 말에는 기운이 없고 얼굴에는 빛이 없었다.

『그럼 왜 그러시오? 어디 지피는 데가 있어 그러시오? 말 씀을 하시구려. 왜 혼자만 앓소?』

예백의 아내도 무슨 심상치 아니한 것을 느낀 듯 남편의 옆에 앉아서 까닭을 듣고야 말겠다는 모양을 보인다.

『나도 무엇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나 자연 마음에 걱정이 되는구려.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매양 위태한 일이야. 큰 복이 들어오던 문으로 큰 화가 들어 온다는 것이요. 우리 집이 이만큼 사는 것도 분에 넘는데 딸이 국모로 들어 간다 면 그것은 과한 일야. 나는 예랑을 왜 일찍 시집을 안 보냈 던고 하고 그것을 한하오. 제 신체로 보더라도 임금의 집에 들어 가는 것보다 그닥 지위 높지 아니한 집 며느리로 가는 것이 편해. 높은 자리는 매양 위태한 법이어든. 사람의 눈에 뜨이는 자리에는 사람의 질투가 모이는 법이야. 나는 딸을 동궁비로 보내기는 싫소. 이따가 그애가 오거든 동궁 말씀 을 듣지 말라고 그래 보오.』

예백의 이 말에 부인은 새뜩하고 돌아 앉으며,

『원 별 말이 다 많소. 들어오는 복을 박차도 유분수하지 딸을 동궁비로 들여 보내려고 청은 못할망정 나라에서 청하 시는 것을 이쪽에서 튀기는 법이 어디 있소? 그런 말씀은 아예 입 밖에 내지도 마시오. 또 대감은 평생에 충의를 말 씀하시니 위로서 하라시는 말씀을 거역하면 그것이 불충의 가 아니고 무엇이요? 죽으라시면 죽기도 하려든, 상감님 며 느님이 되라시는데 마다고, 못합니다고, 그런 소리가 원 어 디 있소?』

하고 펄펄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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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이라는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는 아니하였으나 역시 함박(太白) 쪽박(小白) 두 봉우리가 분명하고, 소나무, 잣나 무, 전나무 같은 높은 나무의 수풀과 박달, 제리알, 쇠느티, 실나무, 떡갈, 참나무 같은 잡목 숲도 있고, 크지는 못하나 군데군데 폭포와 소를 이루는 개울도 있었다. 큰 산줄기에 연한 산이라 때로는 범과 곰도 난다고 하나 가섬벌이 차차 큰 도시가 되어서 사람이 많이 살게 되므로부터서는 그런 큰 짐승은 흔히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예랑은 아랫굿터 웃굿터도 지나서 시내를 따라 올라 갔다.

나무들이 모두 단풍이 들어서 잎과 열매가 모두 울긋불긋하 였다. 풀이파리 하나도 다 아름다운 빛을 다투어서 차마 그 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어떤 관목의 열매는 붉은 구슬 꾸 러미 같고 어떤 것은 자주 구슬 같았다. 그리고 머루는 까 맣게 익은 위에 서리를 뿌린 것같이 흰가루가 묻어 있어서 입에 넣으면 녹는 것 같았고, 으름과 다래는 꿀과 같이 달 았다. 주춤주춤 보고는 가고, 먹고는 가고 물을 따라 올라 가는 것이 어디까지 간지를 몰랐다.

『참 좋다!』

하고 수없이 예랑은 감탄하였다.

『이런 데 집을 하나 짓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강월도 좋아하였다.

『이런 좋은 단풍도 앞으로 며칠 못 갈 게다. 된서리만 한 번 치면 고만야. 그러면 이 빛깔이 다 거무스레하여지고 말 게다. 모두 잠깐야. 우리들이 젊은 것도 잠깐이고.』

예랑은 물가 바위 위에 앉으면서 이런 소리를 하고 시무룩 하였다.

『참 그래요. 아가씨 모시고 여기 꽃구경 왔던 것이 엊그 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로군요.』

강월도 추연하였다.

『피었던 꽃들은 다 열매가 되었겠지.』

『열매 못되고 진 꽃도 있겠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열매도 못 맺고 진 꽃도 있지. 피어 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봉오리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면 설어요. 소인네 같은 피어 보지 못한 봉오리지요?』

하고 강월은 매우 언짢아한다.

예랑은 물에 비추인 제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물이 흔들림을 따라서 얼굴도 눈도 코도 입도 흔들렸다. 그것은 젊은 얼굴이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눈동자는 정열로 반짝 거리고 입술은 그리움으로 떨렸다. 불현 듯 주몽이 그리워 졌다. 그의 힘차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제 얼굴의 그림자 옆에 주몽의 그림자가 금시에 나타날 것 같았으나 지는 잎이 들을 흔들어 예랑의 얼굴까지 지워 버 리고 말았다. 예랑의 눈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핑 돌았다.

『강월아?』

『네.』

『나으리는 지금 어디 가 계실까?』

제가 생각해도 어리석은 말이었다. 예랑 자기도 모르는 주 몽의 거처를 강월이가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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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도 그리우니 물어 보는 것이었다. 옆에 사람이 없으면 바윗돌을 보고라도 담벼락을 보고라도 그리운 임이 계오신 곳을 물어 보는 것이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었다.

『나으리 마님 계오신 데도 이렇게 열매는 붉고 잎은 누르 고 가을이 깊었을 거야요. 나으리께서는 그 즐기시는 사냥 을 납셔서 지금쯤 이런 단풍 든 산골에서 큰 사슴을 쏘셨을 지도 몰라요. 뿔 큰 숫사슴이나 살찐 암사슴이나 나으리께 서 이렇게 활을 당기시는 양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아 요.』

하고 강월은 눈을 들어 어딘지 모르는 데를 바라 본다. 그 는 허공에서 주몽의 모습을 찾는 것이었다.

『너는 나으리 활 쏘시는 것을 본 일이 있니?』

『뵈온 일은 없어도…….』

『보지도 못한 모양을 너는 그리고 있고나. 가여워라. 강월 아.』

『네.』

『그날 밤에, 강가 달 아래서 나으리가 너를 껴안아 주실 때에 가만히 껴안으시더냐, 힘껏 껴안으시더냐?』

『아이, 아가씨도, 벌써 몇 번째 같은 소리를 물으셔요? 꿈 같아서 모른다고 여쭈었는데.』

하고 강월은 고개를 숙이고 낯을 붉힌다.

『그래. 네가 그렇게 대답하였지, 꿈 같아서 잊었노라고.

그런데 나는 네 그 말이 싫어. 샘이지?』

하고 예랑이 강월을 바라볼 때에 강월은 대답이 없다.

『강월아.』

하고 예랑은 일어나서 강월의 옆으로 가서 강월의 허리를 가볍게 안으며 다정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묻는다.

『강월아, 너는 어느 것이 좋아. 왕후가 되어서 많은 비빈 을 거느리는 것이 좋아, 사냥군의 아내로 한 남편을 혼자 가지고 평생에 서로 떠나지 않는 것이 좋아? 생각하는 대로 똑바로 말해 보아.』

『임금의 아내로 많은 시앗을 보는 이보다 사냥군의 여편 네로 단둘이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하고 대답하는 강월의 마음은 괴로웠다.

이때에 어디서,

『웨에이, 웨에이.』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산 속에서 사람을 찾 을 때에 하는 군호다.

『누가 웨겨?』

예랑은 귀를 기울였다.

『웨에이, 웨에이.』

가늘게 그러나 힘있게 울려 왔다.

『오라버니 소리 아니야?』

예랑은 더욱 숨을 죽이고 귀에 손을 대었다. 옥같이 흰 손 가락이 늦가을 찬 공기에 불그레하였다.

『네, 서방님 목소린가 보아요.』

강월도 귀에 손을 대었다.

다람쥐 한 마리가 두 사람의 바로 발부리를 지나서 바위 옆에 서 잣나무로 기어 올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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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 소린가 보아요.』

하고 강월은 눈을 모으다 귀에 손을 대어 한번 들고 나서 귀에 대었던 손을 떼며,

『서방님 소린데요, 아가씨. 마주 외칠까요?』

하고 두 손을 모아 주라처럼 만들어서 입에 대이고, 숨을 많이 들여 쉬어서 외친다.

『여어이. 여어이.』

강월의 짱짱한 목소리는 예도의 우렁찬 남성과 대조하여서 몹시 날카로왔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두 여자는 골짜 기에서 낙엽을 밟으며 높은 데로 더 걸어 올라 웃굿터에 나 섰다. 여기는 이 산의 젖가슴이라 할 만한 데여서 안계가 넓었다.

『아유!』

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여자는 감탄하는 소리를 발하였 다. 눈앞에는 오색이 영롱한 나무 바다였다. 붉고 누렇고 갖 은 빛깔로 수놓은 바탕에 잣나무와 전나무의 푸른 모양이 우뚝우뚝 솟아 오른 것이 형용할 수 없이 찬란하여서 도무 지 이 세상 것 같지 아니하였다. 수없는 나무 끝들이 한데 엉키어서 꼼짝도 아니하는 것 같았다. 골짜기 물소리도 안 들리니 천지는 오직 빛깔만이요 소리 없는 세계인 것 같았 다. 예랑은 여기서 한번 크게 소리질러 이 고요함을 깨뜨려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우어어.』

하고 한번 길게 소리를 뽑았다. 그 곱고도 힘있는 소리는 차마 스려질 수 없어서 저 수풀의 빛깔과 같이 엉키어서 언 제까지나 남는 것 같았다.

이윽고 꿩의 깃 꽂은 모자를 기우듬히 쓰고 검은 단을 단 흰 웃옷에 검은 띠를 띤 예도의 씩씩한 모양이 나타났다.

활도 칼도 아니 가지고 오직 손에는 채찍을 들었을 뿐이었 다. 흰 옷에 검은 단은 그들이 즐겨하는 빛이었다. 그는 나 는 듯이 예랑이 선 곳으로 뛰어 올라왔다.

예랑은 이러한 외딴 곳에서 오라비를 만나는 것이 반갑고 도 기뻤다.

『오라버니 웬 일이시오? 오라버니도 머루랑 다래랑 따먹 으러 올라 오셨소?』

하고 농담을 한다.

『너는 머루랑 다래랑 따먹으러 왔느냐, 이 꼭대기까지?』

『차츰차츰 예까지 왔어요. 애초부터 여기 올 생각은 없었 는데 누런 잎, 붉은 열매에 홀려서 오는 줄 모르고 예까지 왔어요. 그런데 오라버니는 웬 일이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 오라고 걱정하셔서 오셨소?』

『아버지보다 더 높고 무서운 어른이 너를 부르셔.』

『아니, 아버지보다 더 높고 더 무서운 어른이 누구시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 가시고 안 계시고, 설마 상감마마께서 나를 부르실 리도 없고. 오라버니는 나를 놀리느라고 속이 시는 게지.』

『아니다. 내가 너를 놀리는 것도 아니요, 속이는 것도 아 니다. 동궁마마 대소아기께서 집에 행차하셨어. 오늘은 아버 지께도 너와 혼인하기를 청하셨어. 자 어서 내려가자. 글쎄 과년한 계집애가 무엇하러 이런 곳에까지 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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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하러라니. 가을 구경 왔지요.』

하고 예랑은 손을 들어서 단풍 바다인 사면 수풀을 가리키며,

『여기 안 오고야 이런 좋은 경치를 볼 수가 있어요? 날마 다라도 보고 싶고, 하루 열 번이라도 보고 싶어요. 여기 집 을 하나 짓고 이 속에서 살고 싶은 걸요. 잣이랑 머루 다래 랑 따먹고 새랑 다람쥐랑 벗 삼아서, 그리고 살고라도 싶은 걸요.』

하고 눈에 띄게 소리를 내어서 한숨을 쉰다.

『왜 그런 적막한 소리를 하느냐. 한창 젊어서 낙이 많은 시절에 왜 늙은이나 할 소리를 하느냐 말이다. 게다가 임금 의 아드님이 사랑을 청하고 혼인을 청하는 이 판에 왜 그리 청승맞은 소리를 하여? 네가 임금님의 며느님이 되고 또 얼 마 있다가는 임금님의 마나님이 되신다면 그런 가문의 영광 이 또 어디 있느냐. 이 오라비도 네 덕에 한번 호강하고 세 도 좀 부려 보자꾸나.』

하고 예도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게 하하 웃는다.

『오라버니.』

하고 예랑이 새뜩 정색하고 예도를 부른다.

『왜 그래?』

하고 예도는 먼 산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아니한 듯이 헛대 답을 한다.

『오라버니는 그런 말을 해도 좋소?』

하고 예랑은 예도의 곁으로 한걸음 다가 서며 날카롭게 묻 는다.

그제야 예도가 고개를 돌려 예랑을 바라 보며,

『왜 그래? 내 말이 무엇이 잘못됐니?』

하고 농담이 아니라는 엄숙한 빛을 보인다.

『애초에 주몽아기를 모시고 와서 내게 인사시킨 것은 누 구요?』

『내지. 그러니 어떻단 말이냐?』

『그러고는 이제 또 대소아기하고 혼인을 하라고요?』

『너헌테 다니기는 대소아기가 먼저 아니야? 세상에 소문 이 짜하도록 대소아기가 너를 귀애하시지 않았어? 너도 대 소아기께 마음이 솔깃한 모양이길래 이 사내도 하나 구경해 보아라 하고 주몽아기를 모셔 온 게지. 한 사내만 보고 반 하지 말고 여러 사내를 보고 고르라는 게야. 그게 그렇게 잘못이냐?』

『주몽아기를 내게 인사시킨 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니요.

이제 와서 대소아기와 혼인하라 하시는 말씀이 잘못이란 말 요. 오라버니 뜻대로 벌써 골라 잡았소.』

『골라 잡아? 누구를? 주몽아기를?』

하고 아무 데도 놀라지 아니할 듯한 예도도 참으로 놀라는 빛을 보인다.

예랑은 숙인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게 정말이냐?』

『정말 아니고요. 나는 벌써 주몽아기의 아내야요. 주몽아 기는 내 남편이고요. 아직까지 오라버니를 속인 것은 죄야 요. 그러나 부끄러워서 말 못한 것이니 이 못난 누이를 용 서하셔요. 그런 말은 제 그림자 보고 하기도 부끄럽지 않아 요?』

예랑의 말끝은 눈물로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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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랑의 말에 예도는 침통한 표정을 보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네가 내게 숨긴 것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마는 주몽아기는 이제 가고 없지 아니하냐.

아마 다시 돌아 오실 기약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너는 주 몽아기를 기다릴 작정이냐?』

『네.』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네.』

『왕후가 될 기회도 버리고? 오늘 네 말 한마디로 네 운명 과 우리 온 집안 운명이 결정이 될 터이다. 네가 동궁마마 의 말씀을 들으면 가문에 큰 빛이 날 것이요, 네가 그 말씀 을 거역하는 날이면 네 몸과 우리 집안이 온통으로 결단이 날 것이다. 그야 당장에 동궁마마가 칼을 빼어서 너를 치거 나 우리 식구를 모두 무슨 죄에 몰아서 죽이거나 잡아 가두 지는 아니하겠지마는, 조만간에 네가 아버지나 내나 그 운 명을 당할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늦어도 금상마마 만세 후면 영락 없이 그렇게 될 것이야. 금상마마께서는 인자하 시지마는 동궁마마는 그렇지를 못하셔. 냅뜨는 용기는 없으 셔도 윽물고 벼르는 성미시어서 당장보다 후환이 무서운 어 른이시어. 그런데도 너는 대소아기 말씀을 아니 듣고 주몽 아기를 기다리겠단 말이냐?』

『네에. 그렇지만 아버지께나 오라버니께 누가 미친다면 어떻게 하나. 내가 지금 죽어 버리면 모두 무사하겠지마 는.』

하고 예랑은 말을 뚝 끊고 손으로 배를 만진다. 뱃속에 든 아기는 죽여서는 안된다. 낳아야만 되고 길러야만 된다. 이 일을 위하여서는 무엇이나 참아야 하고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한다.

예도는 그의 타고 난 총명과 동기의 애정으로 누이 예랑의 정경을 다 안 것 같았다. 그는 물론 주몽을 존경하는 사람 이었다. 사람의 값으로 치면 도저히 대소는 주몽과 견줄 바 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소가 못났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도 잘난 사람이었으나 주몽이 더욱 잘난 것이었다. 만일 주 몽이 아니 났더면 대소가 당세에 가장 잘난 사람이었겠지마 는 주몽이 나매 대소는 지새는 달과 같이 빛이 없었다. 주 몽은 대소를 어여삐 여기고 대소는 주몽을 내려다 보고 질 투하면서 한 하늘 아래서 살아 갈 운명을 가진 것이었다.

대소는 큰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제 손으로 망해 버리려고 이 세상에 나왔고, 주몽은 천하게 자라서 제 손으로 큰 나 라를 세워 칠백년 왕업을 후손에게 물리려고 난 사람이었 다. 그러나 예도도 이처럼 분명히 장래를 내다 볼 수는 없 었다. 그의 눈에는 대소는 역시 동궁이요, 주몽은 역시 일개 망명객이었다. 인물로 보면 사랑하는 누이 예랑을 주몽의 짝을 삼고 싶으나 부귀 영화로 보면 동궁의 아내를 삼고 싶 었다.

<어떻게 누이의 마음을 돌렸으면.>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예도는,

『자 내려 가자. 우선 오늘은 치를 손님을 치러 보내고, 서 서히 생각하지.』

하여 예랑의 매운 마음을 녹이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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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올라 올 때에는 그렇게도 좋던 경치가 지금 내려올 때에는 치어다 보기도 싫었다. 울긋불긋하게 그렇게도 아름 답던 단풍의 빛깔도 지금 예랑의 눈에는 잿더미와 같이 무 미하였다.

대소가 예랑에 대하여 가진 생각을 예랑도 모름은 아니었 다. 그래도 주몽이 있을 때에는 대소는 무엇에나 은근히 주 몽을 꺼려서 냅뜰 힘이 없었다. 웬 일인지 대소는 주몽을 대하면 무서웠다. 눌리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대소는 주몽을 더욱 미워하였다. 무엇이 가르치는 것인지는 모르나 대소는 자나 깨나 주몽이 저를 범하는 것만 같았다. 혹 감기가 들 어서 열이 나거나 먹은 것이 체하여서 꿈을 꿀 때에도 헛것 모양으로 주몽의 모양이 대소의 눈앞에 나타나면 오싹 소름 이 끼쳤다. 지위로 말하면 도저히 주몽이 대소에게 손을 대 일 수가 없건마는 늘 이렇게 주몽이 무서웠다. 임금의 자리 도 주몽에게 빼앗길 것 같고 무엇이나 좋은 것은 다 주몽에 게 빼앗길 것 같았다. 예랑에 대하여서도 그러하였다. 대소 는 주몽이 예랑과 가까이하는 줄을 알고 있었다. 급히 서둘 지 아니하면 예랑이 주몽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몽 을 꺼려서 급히 서둘지도 못한 것이었다. 안타까울이만큼 대소는 주몽의 앞에서는 기를 못 폈다. 대소와 주몽과 한 자리에서 무슨 놀이를 하거나 한 곳에서 사냥을 하거나 하 는 경우에 대소는 있는 재주를 다 내일 수가 없었다. 매양 무섭고 눌리었다. 그러니까 억지로 뽐내어 일부러 주몽을 멸시하고 위협하는 태도를 가지려 하나 무서운 것 앞에 부 러 안 무섭다고 안간힘을 쓰면 더욱 쭈뼛 무서운 모양으로 대소가 위엄을 내어서 고개를 번쩍 들려 하면 무엇이 손으 로도 아니고 발로 정수리를 꽉 내려 누르는 것 같았다. 진 실로 대소에게는 미칠 노릇이요, 병들 노릇이었다.

주몽이 앙당물을 넘었다 하는 기별을 듣고는 마음이 좀 놓 였으나 그 글발을 생각하면 역시 무시무시하였다. 주몽은 부여 나라를 죽이고 살리는 힘을 제 손에 쥐고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태도를 그 글에 보인 것이요, 주몽의 그 마음이 너무도 분명하게 대소에게 보여서 대소를 위압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주몽이 이제는 머나먼 곳에 있으니 마음 펴고 하고 싶은 노릇을 해보자 하는 것이 이번 대소의 예백 집 행차였다.

예랑은 대소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집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태자의 위풍과 권세로 내려 누를 때에 그 것을 막아 낼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집이 바라 보일 때부터는 예랑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그것 은 「日月之子, 何伯之外孫」이라는 주몽의 운수에 몸을 내 어 맡기자는 것이었다. 옳은 사람의 옳은 일을 반드시 하늘 이 도우시리라 하는데 밖에는 지금 예랑이 믿을 곳이 없었 다. 주몽과 예랑과 그리고 예랑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운명 이 어찌 될 것인가, 그것을 미리 알 이는 화식 먹는 인간 중에 없을 것이었다.

15 편집

아버지가 훈계하는 말도, 어머니가 간청하는 말도 듣기만 할 뿐, 예랑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몸을 씻고, 얼굴을 단장 하고, 옷을 갈아 입고, 패물을 찾고, 이 모양으로 귀빈 앞에 나가는 차림차림을 예랑은 그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말 없 이 순순히 좇았다. 강월도 예랑과 함께 단장하였다.

강월은 무슨 큰일이 예랑의 위에 오늘 안으로 생길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제 몸으로 예랑의 운명을 대신하고 싶었고, 적더라도 예랑이 받는 무슨 고초든지 저 도 꼭 같이 받고야 말리라고 결심하였다. 그것은 주몽의 의 리라든가 그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요, 강월 자신도 모르는 무슨 줄이 강월을 예랑과 같이 묶어 놓아서 아무도 그것을 뗄 수가 없었다. 강월은 예랑을 사랑하였다. 그저 그립고 소 중하여서 예랑을 위하여서는 아무 것도 아낄 생각이 없었 다. 만일 제가 죽어서 예랑의 모든 고생과 불행이 스러진다 면 강월은 대신 죽기를 아끼지 아니하였을 뿐더러 기쁜 소 원 성취로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까닭이냐. 그것은 강 월도 모른다.

한편 예랑도 강월에게 대하여서 그러한 깊은 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난 정일까. 그렇다고만 할 수 는 없다. 같이 자라나고도 한 형제로도 서로 미워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많은 사람이 나는 중에 어찌 어찌하다가 서 로 비위가 꼭 맞고 정이 드는 두 사람이 태어나는 때문일 까. 그렇지 아니하면 천지가 생길 때부터 무슨 깊고 깊은 인연을 가진 두 사람이 두루두루 나고 죽고 나는 동안에 예 랑과 강월과 만나듯이 만나는 것일까. 가다가다 이러한 두 사람이 태어나서는 서로 지극한 사랑도 보이고 혹은 그와 반대로 주몽과 대소와 같이 하늘 아래 함께 할 수 없는 원 수도 되는 것이다.

대소가 좌정한 방으로 한걸음 걸어 가는 예랑의 뒤에는 그 림자와 같이 강월이 따랐다. 나이도 키도 얼굴도 몸가짐도 비슷한 두 여자는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분별하기가 어려 웠다. 앞을 선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이 때때로 뒤를 돌아 보고, 어떤 때에는 책망하는, 또 어떤 때에는 애원하는 눈짓 을 딸에게 주었다.

긴 복도를 지나서 일행이 큰 사랑 뒷문 밖에 다다랐을 때 에 안으로부터 예도가 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들어 서서 읍 할 때에 대소가 자리에 일어나서 마주 읍하였다. 어머니 뒤 에 예랑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두 무릎을 꿇고 손을 읍하 여 이마에까지 올려 원을 그리고 배까지 내렸다가 다시 들 어 젖가슴쯤 대고 사르르 팔짱을 껴서 두 손을 소매 속에 감추며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몸을 반쯤 어머니 뒤에 가리우고 섰다. 강월도 그 모양으로 절을 드리고 예랑의 뒤 에 숨듯이 섰다. 그러하는 동안에 대소는 고개를 가볍게 끄 덕여서 답례하였다.

섬 밑에 핀 국화의 향기가 고요한 방안에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