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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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吳) 태백(太伯)과 동생 중옹(仲雍)은 모두 주(周) 태왕(太王)의 아들이자 주의 왕 계력(季歷)의 형이었다. 계력이 현명한데다 성스러운 아들 창(昌)이 있었기 때문에 태왕이 계력을 세워 왕위가 창에게로 전해지게 하고 싶었다. 이에 태백과 중옹 두 사람은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왕으로 쓰일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계력을 피했다. 과연 계력이 왕에 오르니 이가 왕 계(季)이다. 그리고 창은 문왕(文王)이 되었다.

태백은 형만으로 달아나 스스로를 구오(句吳)라 불렀다. 형만 사람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따랐는데, 1천 여 집이 귀순하여 그를 오 태백으로 세웠다.

태백이 죽고 아들이 없어 동생 중옹이 서니 이가 오 중옹이다. 중옹이 죽자 아들 계간(季簡)이 섰고, 계간이 죽고 아들 숙달(叔達)이 섰다. 숙달이 죽자 아들 주장(周章)이 섰다. 이때 주 무왕(武王)이 은(殷)을 태백과 중옹의 후손을 찾다가 주장을 알게 되었다.

주장이 이미 오의 군주인지라 그곳에 봉했다. 이어 주장의 동생 우중(虞仲)을 주의 북쪽 옛날 하(夏)의 터에 봉했다. 이가 우중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주장이 죽고 아들 웅수(熊遂)가 섰고, 웅수가 죽고 아들 가상(柯相)이 섰다. 가상이 죽자 아들 강구이(彊鳩夷)가 섰고, 강구이가 죽고 아들 여교의오(餘橋疑吾)가 섰다. 여교의오가 죽자 아들 가로(柯盧)가 섰다. 가로가 죽자 아들 주요(周繇)가 섰고, 주요가 죽고 아들 굴우(屈羽)가 섰다. 굴우가 죽고 아들 이오(夷吾)가 섰고, 이오가 죽자 아들 금거(禽處)가 섰다. 금거가 죽고 아들 전(轉)이 서고, 전이 죽자 아들 파고(頗高)가 섰다. 파고가 죽자 아들 구비(句卑)가 섰다. 이 무렵 진(晉) 헌공(獻公)이 주의 북쪽 우공(虞公)을 멸하고 진이 괵(虢)을 치는 길을 열었다. 구비가 죽자 아들 거제(去齊)가 섰고, 거제가 죽고 아들 수몽(壽夢)이 섰다. 수몽이 서자 오는 더욱 커지기 시작하여 스스로 왕을 칭했다.

태백이 오를 만들고 5대가 되었을 때 무왕이 은을 물리치고 그 후손 둘을 봉했는데, 하나는 우(虞)로 중국에 있고, 또 하나는 오로 이만(夷蠻)에 있었다. 12대가 지나 진(晉)이 중국에 있는 우를 멸망시켰다. 중국의 우가 망한 지 2대가 지나 이만의 오가 강성해졌다. 모두 합쳐 태백에서 수몽까지 19대였다.

오왕 수몽 2년, 망명한 초(楚)의 대부 신공무신(申公巫臣)이 초의 장수 자반(子反)에게 원한을 품고 진(晉)으로 달아났다가 진의 사신으로 오에 와서는 군대를 훈련시키고 전차 사용법을 가르치는 한편 그 아들이 오의 행인(行人)이 되게 했다. 오는 이로써 처음 중국과 통교하게 되었다. 오가 초를 쳤다.

16년(기원전 570년), 초 공왕(共王)이 오를 정벌해 형산(衡山)에 이르렀다.

25년, 왕 수몽이 죽었다. 수몽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다. 큰아들이 제번(諸樊), 다음이 여제(餘祭), 그다음이 여매(余眛), 그다음이 계찰(季札)이었다. 계찰이 어질어 수몽은 그를 세우고 싶어했으나 계찰은 안 된다며 사양했다. 이에 큰아들 제번을 세워 나랏일을 대행하게 했다.

왕 제번 원년(기원전 560년), 제번이 상을 맟고 계찰에게 양위하려고 했다. 계찰은 사양하면서 “조(曹) 선공(宣公)이 죽었을 때 제후와 조나라 사람들은 새 국군이 의롭지 못하다 하여 자장(子藏)을 세우려 하였으나 자장이 떠남으로써 성공이 새 국군이 되었습니다. 군자들이 ‘자장이 절개를 지킬 수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당신이 합법적 계승자이거늘 누가 감히 당신을 침범한단 말입니까? 나라의 국군은 제 뜻이 아닙니다. 이 계찰이 재목은 아니지만 자장의 의리를 따르려고 합니다.”라 했다.

오 사람들이 한사코 계찰을 세우려 했으나 계찰이 집을 버리고 밭을 갈자 비로소 멈추었다.

가을, 오가 초를 정벌하였으나 초가 오의 군대를 물리쳤다.

4년, 진(晉) 평공(平公)이 섰다.

13년(기원전 548년), 왕 제번이 죽었다. 동생 여제에게 자리를 주라는 명을 남겼는데, 차례로 전하여 나라가 결국 계찰에 이르게 함으로써 선왕 수몽의 뜻을 따르려 한 것이다. 또 형제들이 계찰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그가 장차 나라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계찰이 연릉(延陵)에 봉해졌기 때문에 연릉계자(延陵季子)라 불렀다.

왕 여제(餘祭) 3년, 제(齊)의 대부 경봉(慶封)이 죄를 짓고 제에서 오로 도망쳐 왔다. 오는 경봉에게 주방현(朱方縣)을 봉읍으로 주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더 부유하게 해주었다.

4년, 오가 계찰을 노(魯)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계찰이 주(周)의 음악을 들려주길 청했다.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연주하자 계찰이 “아름답구나! 왕업의 기반을 다지는구나. 왕업을 미처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부지런하며 원망하지 않는구나!”라고 평했다.

「패풍(邶風)」, 「용풍(鄘風)」, 「위풍(衛風)」을 연주하자 “아름답고 깊이가 있구나. 근심이 있으나 궁하지는 않구나. 내가 위(衛) 강숙(康叔)과 무공(武公)의 덕행이 이렇다고 들었는데 이것이 그 「위풍(衛風)」이구나!”라고 평했다.

「왕풍(王風)」을 연주하자 “아름답구나! 시름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으니 이는 주가 동쪽으로 천도한 후의 음악일 것이다.”라고 평했다.

「정풍(鄭風)」을 연주하자 “그 섬약함이 이러하니 백성이 감당하지 못했지. 이래서야 어찌 먼저 망하지 않을까?”라고 평했다.

「제풍(齊風)」이 연주되자 “아름답구나, 큰 바람처럼 웅혼한 기상이여! 동해를 나타내고 있으니 곧 태공(太公)이 아니겠는가? 이 나라는 헤아릴 수 없구나!”라고 평했다.

「빈풍(豳風)」을 연주하자 “아름답구나, 호탕한 기운이여! 즐거우면서 음탕하지 않으니 이는 주공의 동쪽 정벌을 나타내는 것일 게다.”라고 평했다.

「진풍(秦風)」을 연주하자 “이것이야말로 하나라의 소리다. 하나라의 소리라야 이처럼 웅대함이 극에 이를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곧 옛 주의 음악이 아니겠는가?”라고 평했다.

「위풍(魏風)」을 연주하자 “아름답구나! 가락의 높낮이가 완만하고, 호방하면서 부드럽고, 간결하면서 쉽구나.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니 맹주로다!”라고 평했다.

「당풍(唐風)」을 연주하자 “생각이 깊구나! 도당씨(陶唐氏)의 유풍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근심이 깊을 수 있겠는가? 덕 있는 후손이 아니라면 누가 이럴 수 있을까!”라고 평했다.

「진풍(陳風)」이 연주되자 “나라에 주인이 없으니 오래갈 수 있겠는가?”라고 평했다.

「회풍(鄶風)」 이하에 대해서는 평을 하지 않았다.

「소아(小雅)」가 연주되자 “아름답도다! 슬프지만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원망하지만 드러내지 않으니 주의 덕이 쇠잔해졌을 때가 아니겠는가? 선왕의 유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평했다.

「대아(大雅)」를 연주하자 “너그럽고 즐겁구나! 완곡이 있으면서 곧고 힘차니 문왕의 덕이로다!”라고 평했다.

「송(頌)」을 연주하자 “지극하구나! 곧지만 뻣뻣하지 않고, 굽혔지만 떨어뜨린 것은 아니고, 가깝지만 대들지 않고, 멀지만 마음은 떠나지 않았고, 내쳐졌지만 지조를 지키고, 자리에 돌아와서도 태만하지 않고, 슬퍼하지만 시름에 잠기지 않고, 즐기면서도 막가지 않고, 끝없이 사용해도 모자라지 않고, 넓지만 바로 드러내지 않고, 베풀지만 낭비하지 않고, 가지더라도 욕심부리지 않고, 멈추더라도 주저앉지 않고, 움직이더라도 딴 곳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성(五聲)과 팔풍(八風)이 조화를 이루고 절제와 순서를 지키니 덕이 넘치는 사람이 다 이러하구나!”라고 평했다.

‘상소(象箾)’와 ‘남약(南籥)’의 춤을 보고는 “아름답지만 뭔가 여한이 있구나!”라고 평했다. ‘대무(大武)’라는 춤을 보고는 “아름답구나, 주의 번성 또한 이랬지 않았을까?”라고 평했다.

‘소호(韶護)’의 춤을 보고는 “큰 덕을 가진 성인도 부족함을 느끼지 성인이 되기란 참 힘들구나!”라고 평했다. ‘대하(大夏)’의 춤을 보고는 “아름답구나, 힘들게 일하고도 자신의 덕이라 하지 않으니 우(禹)가 아니면 누가 미치겠는가?”라고 평했다. ‘초소(招箾)’의 춤을 보고는 “덕행이 지극하고 크구나! 감싸지 않은 곳이 없는 하늘처럼, 담지 않은 것이 없는 땅처럼! 그 덕이 가득 찼으니 더 보낼 것 없구나! 그만 보리라. 다른 음악이 남았다 해도 내가 더는 볼 수 없구나!”라고 했다.

(계찰이) 노를 떠나 제로 갔다. 안평중(晏平仲)에게 “그대는 서둘러 봉읍과 정권을 내놓으시오. 봉읍과 정권이 없어야 재앙을 면할 수 있소. 제의 정권은 장차 어딘가로 옮겨갈 터인데 그 자리를 찾기 전에는 재난이 그치지 않을 것이오.”라고 설득했다.

이에 안자(晏子)는 진환자(陳桓子)를 통해 정권과 봉읍을 내놓음으로써 난씨(欒氏)와 고씨(高氏)가 일으킨 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계찰이) 제를 떠나 정(鄭)으로 갔다. 자산(子産)을 보니 마치 오래 전부터 사귀어온 친구 같았다. 자산에게 “정의 집정자가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재난이 곧 닥치고 정권은 분명 당신에게 갈 것이오. 그대가 정권을 맡으면 예의에 따라 신중하게 처리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정은 몰락할 것이오.”라고 일렀다.

정을 떠나 위(衛)로 갔다. 거원(蘧瑗), 사구(史狗), 사추(史鰌), 공자(公子) 형(荊), 공숙발(公叔發), 공자 조(朝)에게 “위에는 군자가 많으니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고 했다.

위에서 진(晉)으로 가서 숙읍(宿邑)에 묵으려는데 종 연주 소리가 들리자 “이상하다! 내가 듣기로 말만 잘하고 덕이 없으면 죽임을 당하기 마련이라고 했소. 그대는 군주에게 죄를 짓고도 이곳에 있소. 두려워해도 부족하거늘 이렇게 희희낙락할 수 있소?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은 제비가 장막에 둥지를 튼 것과 마찬가지오. 군주가 아직 관에 누워 있는데 어찌 즐길 수 있단 말이오?”라며 떠나 버렸다. 손문자(孫文子)는 이 말을 듣고 평생 음악을 듣지 않았다.

진(晉)에 가서는 조문자(趙文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에게 “진이 당신들 세 집안에 집중될 것이오.”라고 했다. 떠나기에 앞서 숙향(叔向)에게 “당신이 애쓰시오. 군주가 교만하고 사치하나 좋은 신하가 많고 대부들 모두 부유하니 정권이 이 세 집안에게로 돌아갈 것이오. 당신은 곧은 사람이나 재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꼭 생각하시오!”라고 했다.

계찰이 당초 사신으로 나서면서 북쪽 서군(徐君)을 지나갔다. 서군이 계찰의 검이 마음에 들었지만 차마 입을 말하지 못했다. 계찰이 마음으로 알았지만 사신으로 여러 나라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검을 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국을 들렀지만 군주가 죽고 없었다. 이에 보검을 풀어 서국 군주 무덤 위의 나무에 걸어 놓고는 떠났다. 시종이 “서군은 이미 죽었는데 누구에게 주시려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계찰은 “그런 말 하지 마라. 당초 내가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죽었다고 내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7년, 초의 공자 위(圍)가 그 왕 겹오(夾敖)를 시해하고 왕에 오르니 이가 영왕이다.

10년, 초 영왕이 제후를 모아 오의 주방(朱方)을 공격하여 제에서 도망쳐 온 경봉을 죽였다. 오 또한 초를 공격하여 세 개 읍을 빼앗았다.

11년, 초가 오를 정벌하여 우루(雩婁)에까지 이르렀다.

12년, 초가 다시 정벌에 나서 간계(乾谿)에 주둔하였으나 초의 군대가 패해 달아났다.

17년, 왕 여제가 죽고 동생 여매가 섰다.

왕 여매 2년, 초 공자 기질(棄疾)이 그 군주 영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4년(기원전 527년), 왕 여매가 죽으면서 동생 계찰에게 왕위를 주려하였으나 계찰이 사양하며 도망갔다. 이에 오 사람들은 “선왕의 명으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대신하니 계찰에게 왕위가 이르러야 마땅하지만 지금 계찰이 자리를 피했다. 왕 여매가 뒤를 이었는데 지금 왕이 죽었으니 그 아들이 잇는 것이 마땅하다.”며 왕 여매의 아들 요(僚)를 왕으로 세웠다.

왕 요 2년, 공자 광(光)이 초를 정벌하였으나 패하여 왕의 배를 잃었다. 광이 두려워 초를 기습하여 왕이 배를 다시 가지고 돌아왔다.

5년, 초의 망명 대신 오자서(伍子胥)가 도망해오자 공자 광이 그를 객으로 대우했다. 공자 광은 왕 제번의 아들이다. 늘 “내 아버지이 형제가 넷인데 자리는 계찰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었다. 당초 계찰이 나라를 받지 않으려 하여 이 광의 아버지가 먼저 오른 것이다. 이제 계찰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니 나 광이 오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며 몰래 유능한 인재를 받아들여 왕 요를 습격하려고 했다.

8년, 오는 공자 광에게 초를 치게 하여 초 군대를 패배시키고 지난 날 초의 태자였던 건(建)의 어머니를 거소(居巢)에서 모시고 돌아왔다. 내친김에 북쪽을 쳐서 진(陳)과 채(蔡)의 군대를 깨뜨렸다.

9년, 공자 광이 초를 정벌하여 거소(居巢)와 종리(鍾離)를 빼앗았다. 당초 초의 변경읍인 비량(卑梁)의 처녀들과 오의 변경 읍에 사는 여자들이 뽕나무를 놓고 다투었다. 여자들의 집안사람들까지 성이 나서 서로를 없애려 했다. 두 나라 변경의 읍장들이 이를 알고는 같이 화를 내며 서로를 공격한 끝에 오의 변경 읍을 없앴다. 이에 오왕이 성이 나서 초를 공격하여 두 마을을 취하여 돌아간 것이다.

오자서가 처음 오로 도망을 와서는 오왕 요에게 초를 정벌하는 이점에 관해 유세했다. 공자 광은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이 초에서 살해당해서 그 원한을 갚으려는 것일 뿐 이점은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자서는 광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 용사 전제(專諸)를 찾아 광에게 그를 만나게 했다. 광은 기뻐하며 오자서를 객으로 대했고, 자서는 물러나 교외에서 농사를 지으며 전제의 거사를 기다렸다.

12년 겨울, 초 평왕이 죽었다.

13년 봄, 오는 초의 국상을 틈타 정벌에 나섰다. 공자 개여(蓋餘)와 촉용(燭庸)에게 군대를 이끌고 초의 육(六)과 첨(灊)을 포위하게 했다. 계찰을 진(晉)으로 보내 제후들의 반응을 살피게 했다. 초가 군사를 보내 오 군대의 후방을 끊으니 오의 군대가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공자 광은 “이때를 놓칠 수 없다!”며 전제에게 “구하지 않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진짜 왕의 계승자로 올라야 하는 것이 당연하니 그렇게 하고자 한다. 계찰이 온다 해도 나를 폐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알렸다. 전제는 “왕 요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 어미는 늙고 아들은 어리며, 두 공자는 군대를 이끌고 초를 공격하였으나 초가 그 길을 끊은 상황입니다. 지금 오는 밖에서는 초에 곤욕을 치르고 있고, 안은 비어 기둥이 될 만한 강직한 신하가 없으니 저를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공자 광은 “이 몸이 그대의 몸이다.”라고 했다.

4월 병자일, 광이 갑옷을 입은 병사를 지하실에 숨겨 놀고 왕 요를 술자리에 초청했다. 왕 요는 왕궁에서 광의 집에 이르는 길에 병사들을 배치했는데, 대문과 계단, 출입문과 자리에까지 모두 왕 요의 측근들이었고 하나같이 장검을 들었다. 공자 광은 발을 다친 척하며 지하실로 와서는 전제에게 구운 생선 속에다 비수를 숨긴 채 올리게 했다. 비수로 왕 요를 찌르자 긴 창을 든 호위병들이 전제의 가슴을 찔렀다. 왕 요를 마침내 죽이고 공자 광이 왕을 대신하니 이가 오왕 합려(闔廬)이다.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경(卿)으로 삼았다.

계찰이 와서는 “선군의 제사를 없애지 않고 인민이 군주를 폐하지 않아 사직을 받든다면 바로 나의 군주다. 내가 감히 누구를 원망하리오? 죽은 이를 애도하고 산 사람을 섬겨 천명에 따를 뿐이다. 내가 일으킨 난이 아니라면 추대된 누군가를 따르는 것이 선조들의 법도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복명하고 요의 무덤에서 곡을 한 다음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명을 기다렸다. 오의 공자 촉용과 개여 두 사람은 병사들과 함께 초에서 포위당해 있다가 공자 광이 왕 요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병사들을 데리고 초에 항복하니 초는 서(舒) 땅에 이들을 봉했다.

오왕 합려 원년(기원전 514년), 오자서를 행인(行人)으로 발탁하여 나랏일을 함께 꾀하였다. 초가 백주리(伯州犁)를 죽이니 그 손자 백비(伯嚭)는 오로 도망쳐 왔다. 오는 그를 대부로 삼았다.

3년, 오왕 합려와 오자서 그리고 백비가 군사를 거느리고 초를 공격하여 서를 빼앗고 오에서 도망간 두 공자를 죽였다. 공자 광이 영(郢)으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장군 손무(孫武)가 “인민들이 지쳐서 안 되니 기다립시오.”라고 했다.

4년, 초를 공격하여 육과 첨을 취하였다.

5년, 월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6년, 초가 자상(子常) 낭와(囊瓦)에게 오를 공격하게 하자 이에 맞싸워 예장(豫章)에서 초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는 한편 초의 거소를 취하여 돌아왔다.

9년, 오왕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를 청하여 “처음 그대들은 영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어떻소?”라고 물었다. 두 사람은 “초의 장군 자상은 욕심이 많아 당과 채에서 원망이 많습니다. 왕께서 굳이 크게 정벌하고 싶으시다면 당과 채의 도움을 얻어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합려는 이에 따라 군대를 크게 일으켜 당, 채와 함께 서쪽으로 초를 정벌하러 나서 한수(漢水)에 이르렀다. 초 역시 병사를 보내 오를 막아 한수를 끼고 진을 쳤다. 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전투에 나서려 했으나 합려가 허락하지 않았다. 부개는 “왕께서 이미 신에게 군의 통솔을 맡겼고 전세도 유리한 상황인데 뭘 더 기다린단 말입니까?”라 하고는 자신의 부대 5천으로 초를 기습해 초의 군대를 대파하여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에 오왕도 병사를 풀어 뒤를 쫓아왔다. 북으로 영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을 싸워 초가 다섯 번 모두 패했다. 초 소왕(昭王)은 영에서 빠져나와 운(鄖)으로 도망쳤다. (운의 현령인) 운공(鄖公)의 동생이 소왕을 죽이려 하자 소왕은 운공과 수(隨)로 도망쳤다. 오 군대가 마침내 영에 진입했고, 오자서와 백비는 초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을 가함으로써 부모의 원한을 갚았다.

10년 봄, 월은 오왕이 영에 있어 나라가 비었다는 것을 알고는 오로 쳐들어왔다. 오가 다른 군대에게 월을 치게 했다. 초는 진(秦)에 위급함을 알리자 진은 군대를 보내 초를 구하고 오를 공격하니 오의 군대가 패했다. 진과 월이 잇따라 오를 공격하고 오왕은 초에서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을 합려의 동생 부개가 보고는 오로 도망쳐 돌아가서는 자기가 오왕이 되었다.

합려가 이를 알고는 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 부개를 공격하니 부개는 패하여 초로 달아났다. 초 소왕은 이 틈에 9월 다시 영으로 돌아왔다. 이어 부개를 당계(堂谿)에 봉하여 당계씨(堂谿氏)로 삼았다.

11년, 오왕이 태자 부차(夫差)에게 초를 공격하여 번(番)을 취하였다. 초가 두려워 영을 버리고 약(鄀)으로 도읍을 옮겼다.

15년, 공자(孔子)가 노(魯)의 상(相)이 되었다.

19년 여름, 오가 월을 공격하자 월왕 구천(句踐)은 취리(檇李)에서 이를 맞이하여 싸웠다. 월은 결사대로 도전하여 오의 군대 앞에 세 줄로 서서는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목을 그었다. 오의 병사들이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이 오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니 군대는 7리를 후퇴했다. 오왕은 부상이 도져 죽었다.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뒤를 잇게 하면서 “너는 네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부차가 “어찌 감히!”라고 대답했다. 3년 뒤 월에 보복했다.

왕 부차 원년(기원전 495년), 대부 백비를 태재(太宰)로 삼았다. 군사들에게 전투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면서 늘 월에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2년, 오왕은 정예병을 모두 모아 월을 정벌하러 나서 부초(夫椒)에서 패배시킴으로써 고소(취리)의 패배를 갚았다. 월왕 구천은 갑옷 입은 병사 5천을 데리고 회계산(會稽山)에 숨는 한편 대부 문종(文種)에게 오의 태재 백비를 통해서 오왕에게 화친을 구하게 했다. 그리고 나라를 넘겨주고 신하와 노비가 되겠다고 청했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오자서는 이렇게 간했다.

“옛날 유과씨(有過氏)가 짐관씨(斟灌氏)를 죽이고 짐심(斟尋)을 정벌함으로써 하(夏)의 후손 제상(帝相)을 멸망시켰습니다. 마침 임신 중이던 제상의 비후민(后緡)은 유잉국(有仍國)으로 도망가서 소강(少康)을 낳았습니다. 소강은 유잉국에서 가축을 관장하는 목정(牧正)이 되었습니다. 유과씨가 다시 소강을 죽이려 하자 소강은 유우국(有虞國)으로 도망쳤습니다. 유우국은 하(夏)의 은덕을 생각해서 딸 둘을 시집보내고 윤(綸) 땅을 읍으로 주어 사방 10리와 500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습니다. 그 뒤 하의 무리를 거두고 관직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적을 미혹시킨 뒤 마침내 유과씨를 멸망시키고 우(禹)의 공적을 되찾았습니다. 하늘과 하의 제사를 함께 드리게 되었고, 지난날의 공업을 다시 찾았습니다. 지금 오나라는 유과씨만큼 강하지 않지만 구천은 소강보다 셉니다. 이참에 없애지 않고 그냥 둔다면 어찌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구천은 힘든 것도 잘 견디는 자라 지금 없애지 않으면 장차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오왕은 듣지 않고 태재 백비의 말대로 월과의 화평을 허락하고 맹서한 뒤 군대를 철수시켰다.

7년, 오왕 부차는 제 경공(景公)이 죽고 그 대신들이 서로 싸우는 데다 새 군주는 어리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일으켜 북으로 제 정벌에 나섰다. 오자서가 간하기를 “월왕 구천은 음식의 맛을 중시하지 않고 옷은 아름다운 것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조문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면서 이들을 활용하려 합니다. 이자가 죽지 않는 한 오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월은 우리 뱃속의 질병과 같거늘 왕께서 먼저 손쓰지 않고 제에 힘을 기울이려 하시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오왕은 듣지 않고 끝내 북으로 제를 정벌하여 애릉(艾陵)에서 제의 군대를 무찔렀다. 증(繒)에 이르러 노 애공(哀公)을 불러 제사용 가축을 무리하게 요구했다. 노의 계강자(季康子)가 자공(子貢)을 사신으로 보내 주(周)의 예법으로써 태재 백비를 설득하여 겨우 그만두게 했다. 내친 김에 (오는) 제와 노 남쪽 땅을 공략했다.

9년, 추(騶)를 위해서 노를 정벌하러 나서 노와 맹서하고 떠나왔다.

10년, 돌아오는 길에 제를 정벌했다.

11년, 다시 북으로 제를 정벌했다.

월왕 구천이 무리를 이끌고 오에 인사를 드리고 많은 뇌물을 바치자 오왕이 기뻐했다. 오자서만 “이는 오를 버리는 것입니다.”라며 두려워하면서 “월은 뱃속의 근심거리입니다. 지금 제에서 뜻을 얻긴 했지만 이는 자갈밭이나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습니다. 「반경지고(盤庚之誥)」에 보면 ‘화근은 절대 남기지 않는다. 상이 이를 따라 흥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라고 간했다.

오왕은 듣지 않고 오자서를 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는 그 아들을 제의 포씨(鮑氏)에게 부탁하고 돌아와 오왕에게 보고했다. 오왕은 이를 알고 크게 노하여 오자서에게 촉루검(屬鏤劍)을 내려 죽게 했다. 죽기에 앞서 오자서는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관을 짜고, 내 눈알을 도려내어 오의 동문에 걸어 월이 오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고 했다.

제의 포씨(鮑氏)가 제 도공(悼公)을 죽였다. 오왕이 이를 듣고는 군문 밖에서 사흘을 통곡하고는 바닷길을 통해 제를 공격했다. 제 사람들이 오를 물리쳤고, 오왕은 군대를 거두어 돌아왔다.

13년, 오가 노와 위(衛)의 국군을 불러 탁고(橐皐)에서 회맹했다.

14년 봄, 오왕은 북쪽 황지(黃池)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여 중국을 제패함으로써 주 왕실을 보전하려 했다.

6월 병자일, 월왕 구천이 오를 공격했다. 을유일, 월의 5천 명이 오와 싸워 병술일에 오의 태자 우(友)를 포로로 잡았고, 정해일에는 오에 진입했다. 오 사람이 오왕 부차에게 패배를 알렸는데 부차는 이 일이 알려지는 것이 싫었다. 누군가 이 일을 누설하자 오왕이 노하여 군막 안에서 일곱 명을 죽였다.

7월 신축일, 오왕은 진(晉) 정공(定公)과 맹주 자리를 다투었다. 오왕이 “주 왕실에서는 내가 윗사람이다.”라고 하자, 진 정공은 “희씨 성 중에서는 내가 패주다.”라고 했다. 조앙(趙鞅)이 화를 내며 오를 치려했다. 이에 진 정공이 맹주가 되었다. 오왕은 맹서를 하고 진 정공과 헤어진 후 송을 정벌하려 했다. 태재 백비가 “승리할 수는 있겠지만 차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라고 했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귀국했다. 오나라는 태자를 잃었고, 나라 안은 비었다. 왕은 밖에서 오래 머물렀고, 병사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이에 바로 사신을 보내 후한 예물로 월과 화친했다.

15년, 제의 전상(田常)이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18년, 월이 더욱 강해졌다. 월왕 구천이 군대를 이끌고 다시 오를 정벌하여 입택(笠澤)에서 (오를) 물리쳤다. 초가 진(陳)을 멸망시켰다.

20년, 월왕 구천이 다시 오를 정벌하러 나섰다.

21년, 마침내 오의 수도를 포위했다.

23년 11월 정묘일, 월이 오를 패배시켰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를 용동(甬東)으로 옮기가 민가 100호를 주어 살게 하려고 했다. 오왕은 “내가 나이가 많아 군왕을 섬길 수 없다. 내가 자서의 말을 듣지 않아 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하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월왕이 오를 멸망시키고 태재 백비를 불충하다고 하여 목을 베고는 돌아갔다.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孔子)는 ‘태백의 덕은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천하를 세 번이나 양보하였으나 인민들은 어찌 칭송할지를 몰랐다.”라고 했다. 내가 <춘추>의 고문을 읽고서야 중국의 우와 형만의 구오가 형제임을 알았다. 연릉계자의 어진 마음은 끝없이 의리를 사모하여 미세한 것을 보고도 맑고 흐림을 아는 구나. 오호라! 그는 또 얼마나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한 군자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