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준서(平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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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가 흥기할 무렵, 진(秦)나라의 피폐된 국면을 계승할 때에 장년의 남자들은 군대에 끌려갔고, 노약자들은 군량을 운송했다. 노동은 번다하게 많아졌으나, 물자는 매우 부족했다. 천자도 털 색깔이 균일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갖추지 못했고, 장군과 재상들은 겨우 소가 끄는 수레밖에는 탈 수가 없었으며, 백성들은 가축을 기르고 곡식을 쌓아둘 여력이 없었다.

이때에 기존의 진나라의 돈은 무거워 유통하기가 불편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별도의 돈인 유협전(楡莢錢)으로 만들 것을 명령했고, 황금 일금을 한 근(斤)으로 정했다. 또 법령은 간소하게 하였고, 금지령을 대폭 줄였다. 그리하자 법령을 지키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도모하는 상인들이 매점매석하여 시장의 물가가 크게 올라 쌀 한 섬은 만 전(錢), 말 한 마리는 백금에 거래되었다.

천하가 평정된 후에 고조(高祖)는 곧바로 명령을 내려 상인들에게 비단옷을 입는 것과 수레 타지 못하게 하고,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제적인 곤란은 물론 인격적인 모욕을 주었다. 효혜제(孝惠帝)와 고후(高后) 때에는 천하가 안정되기 시작하여 상인을 억압했던 법령들을 풀어주었으나, 상인의 자손이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나라에서는 관리의 봉록과 관용의 경비에 산출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산림, 하천, 동산, 연못, 시정(市井)의 조세 수입과 천자로부터 귀족들이 소유한 탕목읍(湯沐邑, 천자가 제후에게 재계하는 비용에 쓰라는 명목으로 내리는 사읍(私邑))에서 나오는 수입은 각기 사적인 비용으로 충당했고, 나라의 경비로 지출하지 않았다. 수로로 산동(山東)에서 운송한 곡식은 수도의 각 관공서에 공급했는데, 매년 수십만 섬에 불과했다.

효문제(孝文帝) 때에 이르러 협전(莢錢, 무게는 3수(銖)이고 한흥(漢興)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음)이 더욱 많아지고 가벼워져서 별도로 사수전(四銖錢)을 주조했는데, ‘반량(半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 백성들도 스스로 동전을 주조할 수 있게 하였다. 때문에 오왕(吳王, 유비(劉濞))은 제후였지만 자기가 소유한 동산(銅山)에서 마음대로 돈을 주조하여 그 부가 천자에 버금갈 정도가 되었고, 결국은 반역까지 일으켰다.

또한 등통(鄧通)은 대부(大夫)에 불과했지만 스스로 돈을 주조하여 그 재산이 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래서 오나라와 등씨가 주조한 돈이 천하에 유포될 정도였다. 그래서 사적으로 돈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게 되었다.

흉노(匈奴)가 자주 북쪽의 변경을 침략했는데, 그곳에 주둔하는 병사가 대단히 많아 변경의 양식만으로는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국가에 헌납할 수 있는 양식을 가진 백성들과 양식을 변경까지 운반할 수 백성들에게 그 대가로 작위를 주었는데, 최고작위로 대서장(大庶長)까지 이르게 할 수 있었다.

효경제(孝景帝) 때, 상군(上郡) 서쪽으로 가뭄이 들자 또 다시 관직을 매매할 수 있는 명령을 수정해 작위의 가격을 낮추어 백성들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형벌을 받은 죄인들 중에 죄를 사면 받는 대가로 형기가 마칠 때까지 노역을 하는 사람들 또한 조정에 양식을 헌납하면 죄를 완전하게 사면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목장을 크게 증축해 군용 말을 대량으로 사육했고, 궁실(宮室), 누관(樓觀) 등을 더욱 증축하고 수레와 말을 잘 갖추게 했다.

지금의 황제(한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이 지난 때는 한나라가 건국한지 이미 70여 년이 지난 사이로 국가에 큰 일이 없었고, 홍수나 가뭄이 발생하지 않아서 백성들은 집집마다 자급자족하였고, 곡식창고들도 꽉 차게 되었다.

관청의 창고에는 재화가 넘쳐흘렀고, 경사(京師, 수도)의 돈은 억만금이나 되었는데, 돈을 묶은 줄이 썩은 것이 헤아릴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태창(太倉, 수도의 곡식창고)의 양식은 차고 넘쳐나, 결국에는 노천까지 쌓아두었다가 썩어서 먹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보통 민가의 거리에서 백성도 말을 타고, 전야마다 말들이 무리를 짓고, 젊은 암말을 탄 사람들은 배척을 받아 모임에 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골목길에 사는 자들도 고량진미를 먹었으며, 관리들에게는 늙을 때까지 인사이동이 없어서 관직명으로써 자신들의 성씨를 삼았다. 이 때문에 사람마다 스스로 아끼고, 범법을 매우 엄중히 다루었으며, 의를 행하는 것을 우선삼고, 치욕스런 행위를 하는 것을 배격했다.

당시의 법망은 느슨하고 백성들은 부유했으나, 재물을 이용하여 사치스럽고 교만하게 불법행위를 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남의 토지를 멋대로 겸병하며, 혹은 지방호족들은 자기 고장에서 무력으로 위세를 부리며 제멋대로 설쳤다. 봉지(封地)가 있는 종실(宗室)과 공경대부(公卿大夫) 이하들도 다투어 사치를 부렸고, 저택과 거마, 의복 등이 모두 과분한 것이 한도가 없었다. 무슨 사물이든 융성하면 반드시 쇠퇴한다고 하는데, 진실로 그렇게 변화되는 것이다.

이후부터 엄조(嚴助)와 주매신(朱買臣) 등은 동구(東甌)를 불러들여 양월(兩越)을 평정하는 전쟁이 발생하자, 강수(江水)와 회수(淮水) 지역은 엄청난 군비가 부과되어 경제적으로 파탄이 나서 매우 스산하고 어수선해졌다. 당몽(唐蒙)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서남이(西南夷)의 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산을 깎고 천여 리에 길을 놓고, 파(巴)와 촉(蜀) 지방까지 연결시키니, 현지의 백성들은 피곤하여 완전히 지쳐버렸다. 팽오(彭吳)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기 위해,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지역은 바람에 초목이 쓰러지듯 소동이 일어났다.

왕회(王恢)가 흉노를 격퇴시키기 위해 마읍(馬邑)에 병사를 매복시키자는 계략을 펼치자, 이를 사전에 알아챈 흉노는 한나라와 화친을 끊고 북쪽 변경지방을 침략하니 전쟁은 끊이지 않고,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천하의 백성들은 수고를 무릅쓰고 노역에 시달렸다. 전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전쟁터로 가는 사람들은 군수품을 휴대해야 했고, 남은 사람들은 배웅하기 바빴다. 나라 안과 밖이 소동으로 인해 들썩이고 더욱 군비가 증대되었는데, 백성들은 피폐해져서 교묘한 방법으로 피해나가고, 물자는 점차 소진되어도 보충할 수가 없었다.

재물을 바치면 관리가 되고, 뇌물을 주면 죄도 면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는 파괴되고 염치를 따지지 않으며 힘이 있으면 중용되었다. 법령은 날로 엄격해지고 명령은 더욱 번다해졌으며 자기 이속만을 챙기는 신하들은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청(衛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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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한나라의 장군들은 매년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흉노족을 공격했고, 마침내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衛靑)은 흉노의 하남(河南) 지방을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했다. 이 당시에 한나라는 서쪽과 남쪽의 오랑캐와 통하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동원된 인부만도 수만 명에 달했다.

천 리 밖에서 짊어지고 메어서 양식을 운반했는데, 대략 매번 십여 종(鍾)을 보내면 겨우 한 섬 정도만 도착했다. 그리고 장차 돈을 준다고 하면서 공(邛)과 북(僰) 일대의 백성들을 인부로 불러서 모았다. 몇 년 동안 도로가 개통되지 않자, 그곳의 오랑캐들이 기회를 편승하여 여러 차례 공격했다. 이에 관리들은 군사를 파견해 그들을 주살했는데, 파나라와 촉나라 지역의 조세를 다 써버렸는데도 부족했다.

이에 남쪽 오랑캐 지역에서 밭이 있는 호족들을 모아서 그들의 식량을 현지 현관(縣官)에게 보내고, 도성의 내부(內府)에서 그 대금을 받도록 했다. 동쪽으로 창해군까지 도로가 개통될 때에도 그 인건비용은 남쪽 오랑캐 지방에 쓰이는 것과 유사했다.

또 십여 만 명을 동원해 삭방성을 쌓고 지켰는데, 수륙운송의 길이 너무나 멀었다. 이를 위해 산동 지방에서 모두 노역에 나서고, 쓴 비용만도 10억에서 1백 억에 다다라 관청의 창고는 더욱 비어만 갔다. 이에 백성들을 모아 조정에 노비를 바치는 자에게는 종신토록 조세와 요역을 면제해주고, 원래 낭관(郎官)이었다면 품계를 올려주었다. 조정에 양(羊)을 바치고 낭관이 된 것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 후 4년에 한나라는 대장(大將, 위청)을 파견하여 여섯 장군을 통솔하고, 십여만 군사를 이끌고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을 공격했는데, 사살하고 또한 포로로 노획한 자 만 오천 명에 달했다. 다음해 대장군은 여섯 장군을 통솔해 재차 흉노에 출격하여 사살하고 포로로 노획한 자가 만 구천 명이었다. 포로를 잡았거나 사살한 군사들에게 상으로 황금 2십여만 근을 내렸다. 투항한 포로 수만 명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고, 이들의 입을 것과 먹을 것은 모두 현(縣)의 관청에서 지급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군사와 말이 죽은 수는 십여 만에 달했고, 병기와 갑옷 등의 군수품의 비용과 수륙운송에 소요된 비용은 모두 계산에 넣지 않았다. 이에 대사농(大司農)은 그동안 저축했던 돈과 조세수입도 다 써버려 전사들에게 지급할 비용이 부족할 정도라고 했다. 주관관리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천자께서 말씀하시길 ‘짐은 5제(五帝)의 교화가 서로 중복되지 않았으나 천하를 잘 다스렸고, 우왕(禹王)과 탕왕(湯王)의 법률은 같지 않았으나 왕 노릇을 잘했으며, 노선은 달랐으나, 수립한 공덕은 완전히 일치했다고 들었다. 북방 변경이 안정되지 않아 짐은 이를 애달프게 생각했다. 근래에 대장군이 흉노를 공격해,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자가 1만 9천 명이나 되었는데, 공을 세운 군사들은 머물면서 밥 먹을 곳도 없다. 백성들에게 작위를 살 수 있도록 하고, 속죄금을 내면 금고형(禁錮刑) 등의 죄를 감면해 줄 수 있도록 의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근거로 상관(賞官)을 설치하게 청해 ‘무공작(無功爵)’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한 등급은 17만 전이면 모두 삼십 만 금(金)의 가치가 있습니다. 무릇 무공작 중 관수(官首) 한 등급을 산 자를 시험 삼아 관리로 보충하여 우선 임용하고, 천부(千夫)은 5대부(五大夫)과 같은 대우를 하고, 죄가 있는 사람이 작위를 사면 두 등급을 감했고, 무공작의 최고 작위는 악경(樂卿)까지 이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방법으로 돈을 모아 군사들의 공로를 널리 드러냈습니다.”

군공을 세운 자들에게 준 작위는 대부분 등급을 초월했다. 공이 큰 자는 제후나 경(卿), 대부(大夫)로 봉해지고, 공이 작은 자는 낭(郎)이나 리(吏)가 되었다. 관리 제도는 매우 복잡다단해서 관명이 조금만 변경되어도 직무에 혼란이 생기고 축이 난다.

공손홍(孔孫弘)은 『춘추(春秋)』의 의리로서 신하들을 바로잡고 다스려서 한나라 승상(丞相)이 되었고, 장탕(張湯)은 준엄한 법조문으로 안건을 심리해 정위(廷尉)가 되었다. 이에 견지지법(見知之法, 관리가 범죄를 보고도 묵살하면 그 관리도 똑같이 처벌하는 법) 생겨서 ‘폐격(廢格, 황제의 영을 집행하지 않고 미뤄두는 행위)’이나 ‘저비(沮誹, 황제의 영을 집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등 끝까지 쫓아가서 다스려야할 사건들이 많아졌다.

다음해에 회남왕(淮南王), 형산왕(衡山王), 강도왕(江都王) 등의 모반 음모가 발각되었다. 공경들은 그 단서를 찾아 안건을 심리하다 마침내 그들과 같은 뜻을 가지고 무리를 찾아냈다. 이 사건에 연좌되어 죽은 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이때부터 장리(長吏, 지방관)는 더욱 무자비하고 급해졌으며, 법령은 세밀하게 따지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방정(方正), 현량(賢良), 문학(文學)으로써 존경을 받고 있는 선비들을 초치했는데, 어떤 자는 공경대부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공손홍은 한나라의 재상으로서 평민처럼 베옷을 입고, 음식도 매우 간소하게 먹으며 천하의 솔선수범을 보였다. 그러나 검소하게 풍속을 바꾸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고, 드리어 사람들은 점차 공리(功利)에만 힘썼다.

다음해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은 재차 흉노를 공격하여 적 4만 명을 참수했다. 이해 가을, 흉노의 혼야왕(渾邪王)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에 한나라는 수레 2만 량(輛)을 동원하여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장안에 도착하자 상을 받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병사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이해에 쓴 경비는 모두 일백여 억이었다.

애당초, 십여 년 전에 황하의 제방이 관현(觀縣)에서 터져 양(梁)과 초(楚) 일대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곤경에 처했다. 그래서 황하를 접하고 있는 군(郡)들은 제방을 쌓아 범람을 막았으나, 매번 쉽게 제방이 터져 무너지니, 이때에 쓰인 경비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후에 파계(番系)가 저주(底柱)를 지나는 조운의 경비를 줄이기 위해, 분수(汾水)와 황하의 물길을 파서 농지로 관개하기 위해 동원된 인부가 수만 명에 달했다.

정당시(鄭當時)는 위수(渭水)의 조운 수로가 구불구불하고 노정이 멀어서 장안에서 화음(華陰)에 이르는 직통 수로를 팠는데, 동원된 인부가 수만 명이었다. 삭방군(朔方郡) 또한 수로를 팠는데, 이때에도 수만 명이 동원되었다. 이렇게 각기 2~3년이 지났지만 공사는 끝나지 않았고, 비용 또한 각기 십 수 억이 들었다.

천자는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대량으로 말을 키웠는데, 장안으로 와서 길러진 말이 수만 필이 되었다. 말을 길들이는 병졸이 관중(關中)에 부족해지자, 바로 부근 각 군에서 징발했다. 투항한 흉노인들에게 모두 관부에서 의식(衣食)을 제공해왔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공급할 수 없게 되자, 천자는 바로 음식비용을 줄이고, 네 필 수레의 말을 풀어 어부(御府, 황실의 창고)와 금장(禁藏, 제왕 궁중의 창고)에서 돈과 재물을 꺼내어 그들을 구휼했다.

다음해에 산동 지방은 수해를 당해 백성들 대부분은 기아로 곤경에 처했다. 이에 천자는 사자(使者)를 파견해 각 군국(郡國)에 있는 창고에서 물자를 꺼내 빈민을 구제했으나 여전히 부족했다. 그래서 또 부호들을 소집하여 빈민들에게 양식을 빌려주게 하였으나 그래도 빈민 모두를 구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 빈민들을 관서(關西) 지방으로 이주시켰고, 나머지는 삭방성 이남의 신진(新秦) 지방으로 보냈는데, 모두 칠십 여만 명으로 의식(衣食)은 모두 관부에 의존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관부에서 그들에게 가옥과 토지, 농기구 등을 빌려주고, 사자를 부분별로 파견하여 그들로 보호하게 했다. 이러한 사자들의 수레가 끊이지 않았고, 그 경비는 억을 헤아려 계산할 수 없을 정도여서 관부의 창고가 크게 비었다.

그러나 부유한 상인들 중에 혹자는 재물을 축적하고 빈민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화물을 실은 수레가 수백 량에 이르렀으며, 읍 안에서 매점매석을 하여 물자를 독점했다. 군(君)으로 봉해진 자들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물자를 빌릴 정도였다.

혹자는 철기를 주조하고 소금을 만들어, 재물을 만금이나 축적했으나, 국가가 위급할 때에 돕지 않았기 때문에 서민들만 이중삼중으로 괴롭게 되었다. 이에 천자와 공경들이 상의하여 별도로 새로운 동전과 화폐를 만들어서 조정의 재정으로 쓰고, 경박하고 음란하며 불법적으로 토지를 겸병한 자들을 억누르려고 했다.

이때에 황제의 금원(禁苑, 제왕 궁전 정원)에는 흰 사슴이 있었고, 소부(少府)에는 많은 은과 주석이 있었다. 효문제(孝文帝) 때부터 별도의 사수전(四銖錢)을 주조하여 이미 4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건원(建元) 이래로 용도가 적어져서 조정에서 자주 동(銅)이 많은 산에 가서 동전을 주조했고, 민간에서도 그 기회에 편승하여 역시 몰래 동전을 주조하여 그 수량은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었다. 동전은 더욱 많아졌고 그 가치가 떨어졌고, 물품은 더욱 적어질수록 가격은 올라갔다. 담당관리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고대의 가죽 화폐는 제후들이 빙향(聘享, 외국 방문과 향연)할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금에는 삼 등급이 있는데, 황금(黃金)은 상등급, 백금(白金)은 중등급, 적금(赤金)이 하등급으로 삼습니다. 지금의 반량전(半兩錢) 법에 정한 중량은 사수(四銖)인데, 간사한 사람들이 몰래 한쪽 면을 마모시켜서 동(銅) 가루를 취하니, 동전은 더욱 경박해지고 물가는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먼 곳에서 반량전을 사용함은 번거롭고 비용도 절감되지 않습니다.”

이에 평방 1척의 횐 사슴 가죽 가장자리에 화려한 수를 놓아서 가죽 화폐로 삼았는데, 장당 40만 전이었다. 왕후(王侯) 종실(宗室)이 입조해 천자를 배알하고 빙향할 때에는 반드시 가죽 화폐로 옥벽(玉璧)로 받친 뒤에 비로소 예의를 행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은과 주석으로 백금(白金)을 주조했다. 하늘에서는 용만한 것이 없고, 땅에서는 말만한 것이 없으며, 사람에게는 거북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서 백금을 세 품종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품종은 중량이 8량(八兩)으로 둥근 모양에 용무늬를 했기 때문에 백선(白選)이라 명명했는데, 그 가치가 3천전이었다. 두 번째 품종은 중량이 비교적 가볍고, 사각 모양에 말 무늬를 했는데, 그 가치는 5백전이었다. 세 번째 품종은 중량이 더욱 가볍고, 타원 모양에 거북 무늬를 했는데, 그 가치는 3백전이었다.

지방관청에서 반량전을 녹여 다시 삼수전(三銖錢)을 주조하게 하고, 전문(錢文)과 중량이 같도록 명령하였다. 각종 백금이나 사수전을 몰래 주조하는 자는 모두 죽였으나, 그러나 관리나 민간인 중에는 여전히 몰래 백금을 주조하는 자가 헤아릴 수가 없이 많았다.

이에 동곽함양(東郭咸陽)과 공근(孔僅)은 대농승(大農丞)으로 임명하고, 소금과 쇠를 주관하라고 하였다. 상홍양(桑弘羊)은 계산에 밝아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함양(咸陽)은 제(齊)나라 지방에서 크게 소금 제조업을 하던 사람이고, 공근(孔僅)은 남양(南陽) 지방에서 크게 철을 제조했던 사람이었는데, 모두 사업을 잘해서 천금(千金)을 모았다. 그래서 정당시(鄭當時)가 그들을 조정에 천거했다. 상홍양은 낙양(雒陽)의 상인이었는데, 암산에 능하여 열세 살에 시중(侍中)이 되었다. 때문에 이 세 사람은 이윤에 관한 일은 가을철에 털갈이를 하여 새로 돋아나는 짐승의 가는 털까지도 분석할 정도였다.

법령이 갈수록 엄격해지자 많은 관리들도 죄에 연루되어 면직되거나 파면되었다. 전쟁이 여러 차례 발발하자 백성들은 돈을 내서 요역을 면제 받거나 작위를 사서 오대부(五大夫)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관부에서는 징집할 수 있는 병사는 더욱 적어졌다. 이에 천부(千夫)나 오대부들을 관리로 임명했는데, 원하지 않는 사람은 말 한 마리를 내게 했다. 원래 파면되거나 면직된 관리들은 그 벌로써 상림원(上林苑)에서 가시나무를 베거나, 곤명지(昆明池)를 파는 작업에 보내졌다.

다음해에 대장군(위청)과 표기장군(곽거병)은 대대적으로 흉노로 출격했는데, 적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자가 8~9만 명에 달했다. 이에 상으로 장졸들에게 오십만 금을 하사했다. 하지만 한나라는 군마 십여만 마리가 죽었고, 운송과 전차, 갑옷 등에 든 비용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이때에 재정상태는 매우 궁핍하여 전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봉록을 받지 못했다.

복식(卜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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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들 중에 삼수전의 중량이 너무 가볍고 간사한 자들의 위조가 쉽다고 하면서 각 군에서 오수전(五銖錢)으로 개량하여 주조할 것을 주청했다. 그리고 동전의 사방에 윤곽을 넣어서 주조하여 갈아서 동(銅) 가루를 얻지 못하게 하였다.

대농(大農)은 염철승(鹽鐵丞) 공근, 동곽함양과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산과 바다는 천지간에 물자를 보관하는 대창고이니, 모두 마땅히 소부(少府)에 예속시켜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사유하지 마시고 대농(大農)에 귀속시켜 부세를 보충하게 해 주십시오. 바라옵건대 백성들을 모아 그들이 자비를 들여 관부의 기구로 소금을 굽게 해주고, 이때에 관부에서 지급하는 뇌분(牢盆, 소금 굽는 기구)를 이용하게 해주십시오.

부식(浮食, 덕에 비해 식록이 많은 사람)과 기민(奇民, 친히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제후)들은 산과 바다의 화물(소금과 철)을 멋대로 독점해 치부하고 가난한 백성을 노비처럼 부리고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금과 철을 관부에서 운영한다는 것에 대한 반대의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감히 사적으로 철기를 주조하여 소금을 끓이는 자들에게는 왼쪽 발목에 차꼬를 채우고, 그 기구도 몰수해야만 합니다. 군(郡)에서 철이 나오지 않으면 소철관(小鐵官)을 두어 군내의 각 현(縣)을 감독시켜야 합니다.”

이에 공근과 동곽 함양로 하여금 수레를 타고 천하를 다니면서 천자의 뜻을 전하고, 소금과 철의 관영화를 실행으로 옮기려 했다. 그리하여 철과 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관부를 세우고, 원래부터 염철을 경영했던 부자들을 관리로 임용했다. 이로 인해 관리제도는 더욱 난잡하게 되었고, 선거제(選擧制)는 통하지 않았고, 관리 중에 상인 출신이 많아졌다.

상인들은 화폐의 주조가 자주 변하자 물건을 축적하여 이윤을 추구했다. 이에 공경대신들은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군국(郡國)들이 자주 재해를 입고 빈민들은 산업이 없었으므로 그들을 모집하여 땅이 넓고 풍요한 곳으로 이주시켜 주었습니다. 이를 위해 폐하께서는 좋은 음식을 줄이시고 비용도 절약했으며 황궁의 돈을 내서 백성들을 구휼하셨고, 대여와 부세도 관대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두 밭으로 나가 경작에 힘쓰지 않고, 오히려 상인의 수만 계속 증가했습니다.

가난한 백성은 저축한 것이 없어 모두 관부에서 제공하는 의식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초거(軺車, 경쾌하고 빠른 마차)나 상인들의 민전(緡錢, 엽전 꿰미)에 관한 세를 징수할 때, 모두 이미 정해진 등급이 있었으니 청컨대 옛날처럼 그것을 산출해 부과해 주십시오.

여러 상공업자 중에 고리 대금업자, 매매업자, 성 안에 살면서 물건을 매점매석하는 사람, 그리고 행상을 통해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은 비록 시적(市籍, 영업등록증)이 없어도 각자 재산에 따라 신고하고, 일률적으로 민전(緡錢) 2천에 1산(算)씩 납부해야 합니다. 조세가 있는 여러 수공업자들과 주조업자들도 일률적으로 민전 4천에 1산씩을 납부하도록 해야 합니다.

관리에 버금가는 삼로(三老), 북쪽 변병의 기사(騎士)가 아니면서 초거(軺車)가 있으면 1산을, 상인들의 초거는 2산, 배가 5장(丈) 이상이면 1산을 납부시켜야 합니다. 만약 재산을 은닉하고 신고를 하지 않았거나 부실하게 신고한 자는 그 죄로 일 년 동안 변방에 보내 수자리를 서게 하고, 민전은 모두 몰수해야만 합니다.

이런 사실을 고발하는 자에게는 몰수한 민전의 반을 지급해야 합니다. 상인으로 영업등록한 자나 그 가족들은 모두 전답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해 농민에게 이익을 주어야만 합니다. 감히 명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전답과 동복(僮僕)을 몰수해야 합니다.”

천자는 곧 복식(卜式)의 말이 생각이 나서, 그를 불러들어 중랑(中郎)으로 삼고, 좌서장(左庶長)의 작위와 전답 10경(頃)을 하사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이 사실을 명백히 알도록 하였다.

애초, 복식은 하남(河南) 사람으로 농사와 목축을 업으로 삼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갔을 때에 그에게는 어린 동생이 있었다. 동생이 성장하자 복식은 집을 나와 분가하면서 홀로 키우던 양 1백 마리만 취하고, 전답과 재물 등은 모두 동생에게 주었다.

복식은 산에 들어가서 십여 년 동안 방목하여 양을 천여 마리로 늘려서 그것으로 전답과 집과 샀다. 그러나 그의 동생은 완전히 파산하니, 복식은 다시 동생에게 자신의 재산을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누어주었다. 이때에 한나라는 마침 수차례 장수를 파견해 흉노를 공격하고 있었다. 복식은 글을 올려서 자신의 재산 반을 조정에 바쳐 변방 작전의 비용에 보태자고 했다.

이에 천자는 사자를 보내어 복식에게 그 이유를 묻게 했다. “관리가 되고 싶은가?” 복식이 대답했다. “신은 소싯적부터 목축만 해서 관리가 되는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사자가 물었다. “집안에 억울한 일을 당해서 그 일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인가?” 복식이 말했다. “신은 평생 남과 분쟁한 적이 없고, 저는 고을 사람들 중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주었고,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가르치고 순종시켜서 고을 사람들 모두가 저를 따릅니다. 제가 어찌 남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겠습니까? 저는 고발할 말이 없습니다.”

사자가 말했다. “진실로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해 이렇게 많은 재산을 나라에 기부했는가?” 복식이 대답했다. “천자께서 흉노를 토벌하려면 제 소견으로 현자는 마땅히 변방의 싸움터에서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켜야하고, 재산이 있는 자들은 마땅히 조정에 헌납해야 흉노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사자는 그의 말을 들은 그대로 천자에게 보고했다.

천자가 이 사실을 승상인 공손홍에게 이야기하니, 공손홍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인정에 맞지 않습니다. 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교화의 모범으로 삼아 법을 어지럽혀서는 아니 되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의 청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이에 황상(皇上)은 오랫동안 복식의 상서에 회답하지 않다가, 몇 년이 지난 후 복식에게 그만 두도록 했다. 복식은 돌아간 후에 예전처럼 농사를 짓고, 목축을 했다.

한해 남짓이 지난 후에도 한나라 군대는 수차례에 걸쳐 출정에 나섰다. 이에 혼야왕(渾邪王) 등이 투항해 왔고, 조정에서 쓰는 비용이 증가하여 창고가 텅 빌 정도였다. 그 다음해에는 빈민들이 대량으로 이주해 와서 모두 조정에만 의지하니, 그들을 다 구휼할 수 없었다. 이 무렵 복식은 20만 전을 가지고 하남 태수에게 주면서 이민(移民)들을 위한 일에 보태게 하였다. 하남 태수는 빈민들을 도운 부자들의 명부를 상부에 올리니, 천자는 복식의 이름을 보고, 그를 기억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자는 본디 전에도 자기 재산의 반을 변방의 비용으로 헌납했다.” 그리고는 곧 복식에게 4백 명이 변경을 지키는 요역에서 면제 받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복식은 또 그 권한을 다시 조정에게 전부 반납했다. 이때에 부자들 모두 다투어 재산을 은닉하려고 했는데, 오직 복식만은 앞장서서 재산을 조정에 헌납하여 변방의 비용에 보태고자 했다. 천자는 마침내 복식이 덕망이 높은 장자(長者)라고 여기고, 그를 높여서 백성들의 모범으로 삼고자 했다.

애초부터 복식은 낭관(郎官)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상이 이렇게 말했다. “짐의 양들도 상림원에 있는데, 당신이 짐을 대신하여 그것들을 키웠으면 좋겠소.” 이에 복식은 바로 낭관의 직위를 받아들여, 베옷과 짚신 차림으로 양을 키웠다. 1년 남짓이 되자 양은 비대해지고 또 왕성하게 번식했다. 황상이 지나는 길에 복식이 양을 돌보는 것을 보고, 그의 방법이 좋다고 칭찬했다.

복식이 아뢰었다. “비단 양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 또한 이와 같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생활하도록 해야 합니다. 병든 양이 있으면 바로 제거하여 나머지 양들에게 전염되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황상은 그가 뛰어난 인물이라고 여겨, 구지(緱氏) 현령(縣令)으로 발령 내어 그를 시험했다. 구지현 사람들이 그가 편하다고 하자, 다시 성고(成皐) 현령으로 승진시켜 조운(漕運)까지도 맡겼는데, 가장 성적이 좋았다. 이에 황상은 복식이 성실하고 충성스런 사람으로 여겨, 그를 제왕(齊王)의 태부(太傅)로 삼았다.

장탕(張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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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공근(孔僅)은 천하 각지를 다니면서 철기를 주조하는 일을 돌보았는데, 3년째 되던 해에 대농령(大農令)으로 승진해,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상홍양(桑弘羊)은 대농승(大農丞)이 되어 여러 가지 회계의 일을 관장했는데, 점차 균수제도(均輸, 값이 쌀 때 사들이고 비쌀 때 방출하는 등 물가 안정제도)를 도입하여 화물을 유통시켰다.

처음으로 관리도 조정에 곡물을 헌납하고 보관(補官)할 수 있게 하고, 낭관으로 6백석까지 오를 수 있었다.

백금과 오수전을 제조한 지 5년째가 되던 해에 아전과 백성들 중에 사사로이 돈을 주조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수십만 명을 사면했다. 하지만 미처 죄가 발각되지도 않았는데, 죽인 자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자수한 자 중에 백여만 명을 사면했으나, 실제 범죄자의 절반도 안 되었다. 이는 천하의 사람들 대개가 거리낌이 없이 몰래 금전을 주조했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너무 많아서 관리가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박사(博士) 저대(褚大), 서언(徐偃) 등을 파견해, 여러 조로 나누어 각 군국을 순찰하고, 토지를 겸병하고 있는 무리나 군수와 제후의 재상 중에서 사리사욕을 취하는 관리들을 고발하게 했다. 이때 어사대부(御史大夫) 장탕(張湯)은 바야흐로 존귀한 신분이 되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감선(減宣)과 두주(杜周) 등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되었고, 의종(義縱), 윤제(尹齊), 왕온서(王溫舒) 등은 참혹하게 법을 집행하여 구경(九卿)의 반열로 승진해 있었고, 직지(直指) 하란(夏蘭)과 같은 무리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대농령(大農令) 안이(顔異)가 죽임을 당했다. 애초에 안이는 제남(濟南)의 정장(亭長)을 지냈는데, 청렴하고 정직해 거듭 승진하여 구경의 지위에 이르렀다. 황상과 장탕은 그 전에 흰 사슴으로 된 가죽화폐를 만들고는, 안이에게 그 타당성 여부를 물어보았다. 안이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후들이 폐하께 하례할 때에 창벽(蒼璧, 푸른 옥벽)을 바치는데, 그 값은 수천 전에 불과하나 그것을 감싸는 가죽는 도리어 40만 전이나 되니, 본말이 걸맞지 않습니다.” 황상이 듣고는 매우 언짢게 여겼다.

장탕은 또 안이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안이가 조정을 비방했다고 고발하자, 그 사건을 장탕에게 주어 안이를 심문하게 했다. 안이는 손님과 얘기할 때에 그 손님이 처음에 조령이 반포되었을 때 불편했다고 토로하자, 안이는 대꾸 없이 단지 입술을 약간 삐죽거려 암묵적인 동의를 표시한 적이 있었다.

장탕은 이 사실을 천자에게 알리고 안이가 구경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령(政令)에 불편한 것이 있었으면, 입조해 진언을 하지 않고, 복비(腹誹, 마음속으로 비난함)했으니 죽음으로 논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복비라는 죄명이 생겨서, 공경대부들 대부분이 아첨과 취용(取用, 편 하려고 남의 뜻에 순종함)했다.

천자가 이미 민전령(緡錢令, 일종에 상인들의 재산세)을 반포하고, 복식(卜式)을 존숭하여 따르게 했으나, 백성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재산을 덜어 조정을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고민전령(告緡錢令)을 내리고 양가(楊可)로 하여금 책임지고 집행하라고 하였다.

군국(郡國)에는 간교한 방법으로 돈을 많이 주조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분량이 부족하여 가벼웠다. 그래서 공경은 경사(京師, 수도)의 종관(鍾官)들로 하여금 적측전(赤側錢, 적측(赤仄)으로 불리기도 하고 적동(赤銅)으로 테두리를 두른 화폐)을 주조하게 청했는데, 적측전 1전은 오수전 5전에 상당한다고 했고, 조세를 낼 때에 적측전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았다. 백금도 점차 가치가 떨어져서 백성들도 쓸모없다고 여기고 쓰지 않았다.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이러한 상황을 금지시켰으나 여전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년 남짓 후에 백금은 마침내 폐기되어 발행되지 않았다. 이해에 장탕이 죽었는데, 백성들은 아무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 2년 되던 해, 적측전의 가치가 떨어지자, 백성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사용하여 시장에서 유통하기 불편하게 되자, 다시 폐기했다. 이에 모든 군국에서 동전을 주전하는 것을 금지되고, 오로지 상림(上林)의 삼관(三官)에게만 동전을 주조할 것을 명령했다. 이미 주조된 동전이 많아서 천하에 삼관전(三官錢) 이외에는 통용을 불허했다. 그리고 여러 군국에서 이미 주조했던 동전은 모두 폐기해 녹여서, 그 동은 삼관(三官)으로 보내게 했다. 백성들도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더욱 줄어들었는데, 그것은 동전을 주전하는 비용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교묘한 기술을 가진 장인과 크게 간교한 상인들만 몰래 주조했다.

복식(卜式)이 제나라 왕의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양가(楊可)가 주관하는 고민(告緡, 자산을 자진 신고하지 않는 사람을 고발)이 천하에 두루 퍼져, 중산층 이상의 상인들은 대부분 고발되었다. 두주(杜周)가 고발된 사람들을 다스렸는데, 사건을 뒤집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 이에 어사(御史), 정위(廷尉), 정감(正監) 등의 관원들을 조로 나누어 군군에 파견하여 고민사건을 처리했다. 그 결과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재산은 억으로 계산할 정도였고, 노비의 수는 천만, 경작지는 큰 현의 경우에는 수백 경(頃), 작은 현의 경우에는 백 수십 경 정도를 얻었고, 주택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이에 중등 이상의 상인들은 대부분이 파산했고, 백성들은 겨우 달게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에 만족해야지 사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축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정은 소금과 철을 관영하고 민전을 고발한 연유로 재정이 더욱 풍요로워졌다. 함곡관을 더욱 확장되고, 경성에 좌우보(左右輔)를 설치했다.

처음에 대농령(大農令)은 염철관(鹽鐵官)을 관리하면서 사방에 많이 분포되었고, 이 때문에 수형도위(水衡都尉)를 설치해서 소금과 철을 주관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양가가 민전을 고발한 사건이 발생한 후, 상림원이 재물이 많아지자 곧 명령을 내려서 수형으로 하여금 상림원을 책임지게 했다. 상림원에 재물이 이미 꽉 차자, 상림원의 규모를 더욱 확충했다.

이때 남월(南越)이 한나라와 배를 이용해서 결전을 벌이려고 하자, 바로 곤명지(昆明池)를 크게 수리하고 그 주위에는 누각을 건축했다. 또한 망루가 있는 배를 건조했으니, 그 높이가 십 수장(丈)이나 되었고, 그 위에 깃발을 꽂으니 매우 장관이었다. 이에 천자는 감동하여 백량대(柏梁臺)를 건축하니, 그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었다. 궁실의 건설은 이때부터 나날이 화려해졌다.

그리고 바로 민전(緡錢)을 각 관부에 나누어주고, 수형(水衡), 소부(少府), 대농(大農), 태복(太僕) 등은 각기 농관(農官)을 두고 이따금씩 각 군현(郡縣)이 몰수한 전답으로 내려가 경작하도록 했다.

몰수한 노비는 여러 원(苑)으로 보내어 개와 말 등의 짐승들을 키우도록 했고, 일부는 여러 관부로 나누어 보냈다. 여러 관부가 더욱 잡다하게 늘어나니, 노역에 종사하는 노비가 또한 늘어나서 황하 하류에서 조운으로 올라오는 4백만 석에다 관부에 스스로 산 양식을 보태야만 겨우 충족시킬 수 있었다.

소충(所忠)이 진언을 올려 말했다. “세가(世家)의 자제들과 부자들 중에 혹자는 닭싸움 투기를 하거나 개와 말을 경주시키고, 사냥으로 도박하면서 유희를 벌려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에 바로 법령을 어긴 자들에게 징벌하도록 하니 상호 연루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을 ‘주송도(株送徒)’라고 명명했다. 재물을 바치는 자는 낭관(郎官)에 임명될 수 있어서 낭관을 선발하는 제도는 줄어들었다.

이때 산동 지방은 황하로 인해 재해를 당해서 몇 년 동안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재해지방은 사방 1, 2천 리에 달했다.

천자는 그들을 가련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강남(江南)은 밭이나 논농사를 짓는 곳으로서, 굶주린 백성들로 하여금 장강과 회수 사이로 옮겨가 먹게 하고, 머물고자 하는 자는 머물 곳을 마련해주어라!”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사자들의 수레의 덮개가 이어질 정도였고, 이재민들을 보했으며, 파와 촉 지방의 양식까지 내려 보내 그들을 구휼했다.

그 다음해 천자가 군국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오자, 하동 태수(河東太守)는 천자의 어가가 행차할 것으로 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제대로 접대하지 못하여 자살했다. 천자의 행렬이 서쪽으로 농산(隴山)을 지나자, 농서(隴西) 태수는 천자의 행렬이 갑자기 맞이하여 천자의 수행원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서 역시 자살했다.

이에 천자는 북쪽으로 소관(蕭關)을 순찰했는데, 이때에 수만 기병을 수행해 신진(新秦) 지방에서 사냥을 하면서, 변경의 병사들을 점검한 후 돌아왔다. 그러나 신진 지방에 간혹 천리에 이르는 동안 요새지의 병졸들이 보이지 않자, 북지(北地) 태수 이하 담당 관원들을 죽였다. 더불어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변경의 현에서 목축할 있도록 하고, 관청으로부터 암말을 빌려 만 3년 뒤에 돌려줄 때, 10분의 1의 이자를 내도록 하고는, 고민령을 폐지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진 지방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미 보정(寶鼎)을 얻은 후에 후토사(后土祠)와 태일사(太一祠)를 건립했고, 공경대신들이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할 것을 논의하자, 천하의 각 군국들은 미리 길과 다리를 수리하고 원래 옛 궁을 고쳤으며, 대로변에 현들은 물품를 비축하고 필요한 용구를 갖추어 천자가 행차하기를 기다렸다.

그 다음해 남월(南越)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서강(西羌)이 변경을 제멋대로 침범해 해악을 끼쳤다. 이에 천자는 산동 지방의 구휼을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천하의 죄수들을 모두 사면시키고, 남방의 수군(水軍)과 더불어 20만 명으로 남월을 공격했다. 그리고 삼하(三河) 서쪽의 기병들을 수만 명을 징발해 서강을 공격했고, 또다시 수만 명을 파견해 황하를 건너 영거성(令居城)을 쌓도록 하였다.

처음에 장액군(張掖郡)과 주천군(酒泉郡)을 설치해 상군(上郡), 삭방(朔方), 서하(西河), 하서(河西) 등의 개전관(開田官, 둔전관)과 척새졸(斥塞卒, 변방을 개척한 병사) 60만으로 하여금 변경을 수비하고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게 하였다. 내지에서 도로를 고쳐 식량을 운반했는데, 먼 곳은 삼천리, 가까이 곳은 천여 리에 달했는데, 모두 대농(大農)의 공급에 의존했다. 변경의 병기가 부족하면 무기고나 공관(工官, 수공업을 담당하던 부서)의 병기를 꺼내어 보내주었다.

전차와 전마(戰馬)가 모자라거나 떨어졌는데도 조정에 돈이 적어서 말을 사기가 어려우면, 바로 명령을 내려서 봉군(封君, 작위와 봉지를 가진 신하) 이하 심 백석 이상의 관리들로부터 전국의 정(亭)에서 암말을 차출했다. 정에서 암말을 키우게 하고는, 매년 얼마나 번식하는지를 심사했다.

제나라의 제상 복식이 글을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 폐하께서 근심거리가 있는 것은 신하의 치욕이라고 했습니다. 남월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신의 부자(父子)는 제나라 사람 중 배를 익숙하게 다루는 자들과 더불어 전쟁터에 가서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천자가 조서를 내려 이렇게 말했다. “복식은 비록 몸소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도 이익만을 취하지 않고, 여유분이 생기면 늘 조정의 비용에 보태려고 애썼다. 지금 천하가 불행에 빠져 위급한 일이 발생하니, 복식은 발분하여 자식과 더불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려고 한다. 비록 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충의가 안으로부터 드러났다고 이를 수 있다.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황금 60근, 밭 40경(頃)을 하사하노라.”

이 사실을 천하에 포고했으나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열후(列侯)에 봉해진 자가 수백에 달했으나, 아무도 종군하여 서강이나 남월을 격퇴시키겠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9월에 제후들이 입조하여 종묘에 주금(酎金)을 바칠 때가 되자, 소부에서 이를 검사했는데, 열후 중에 주금의 분량이 부족하여 작위를 삭탈당한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복식이 어사대부로 임명되었다.

복식은 어사대부의 자리에 있으면서 군국의 대부분이 조정에서 소금과 철을 직영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까닭은 철기의 순도가 떨어지고, 가격 또한 비싸며, 혹은 백성들에게 강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배에는 산세(算稅)가 있었는데, 상인은 적고, 물가는 비쌌기 때문에 바로 공근(孔僅)을 통해 황상에게 배에 산세를 징수하는 문제에 대해 진언했다. 황상은 이때부터 복식을 탐탁찮게 생각했다.

한나라는 3년 동안 연속하여 전쟁을 하여 침입한 강의 군대를 제거하고, 남월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반우(番禺) 서쪽과 촉군(蜀郡) 이남에 처음으로 군(郡) 17개를 설치했는데, 우선 그곳의 옛 풍속대로 다스리게 하면서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남양(南陽)과 한중(漢中) 사이의 옛 군(郡)은, 각기 그 땅에서 가까운 신설된 군의 관리 및 병졸들의 봉급과 식량, 화폐, 물자 등을 공급했고, 역전에서 파발로 쓰이는 수레와 말에 사용되는 덮개까지도 대주었다. 그러나 신설된 군에서는 때때로 소규모의 반란이 일으켰고, 관리들이 살해되기도 했다.

이에 한나라에서는 남방의 관리와 병졸들을 징발해 그들을 진압하러 나섰는데, 매년 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모두 대농에서 지급되었다. 대농은 균수법으로 각지의 소금과 철의 소득이 있어서 부세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겨우 동원된 자들의 비용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가 지나가는 각 현에서는 부족한 것을 없도록 공급해야지, 감히 법에 정한대로 부세를 거두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균수 평준(均輸 平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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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인 원봉(元封) 원년에 복식은 좌천되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고, 상홍양은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되어서 대농까지 겸하여 거느리게 되었다. 완전히 공근을 대신하여 천하의 소금과 철을 관리하게 되었다.

상홍양은 각지의 관원들이 스스로 매매하면서 서로 경쟁을 해서 물가가 올랐고, 천하 각지에서 조세를 운송하는데, 어떤 것은 조운의 운임 비용만도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대농부승(大農部丞) 수십 명을 배치하여 부서를 나누어 각 군국을 주관하게 하고, 각자 주요한 현에는 균수관과 염철관 등을 배치할 것을 청했다.

그리고 ‘먼 곳에서 바친 물품이 가장 비쌀 때에 상인들이 외지에서 파는 가격에 맞추어 세금을 내게 하고, 각지의 화물이 상호 교류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사에 평준관(平準官)을 설치하여 전국에서 운반되어 오는 화물을 모두 받아들이고, 공관(工官)을 불러 수레와 여러 기물을 제조하게 하면, 그 비용은 모두 대농이 공급하여야 한다고 했다. 대농에 소속한 관청에는 천하의 화물을 모두 장악해서 비쌀 때는 내다 팔고 쌀 때는 사들이도록 했다.

이와 같으면 돈 많은 장사꾼들은 큰 이익을 취할 도리가 없어져서 곧 본업인 농업에 힘쓰게 될 것이고, 만물의 가격은 오를 수가 없게 되며, 천하의 물가를 억제할 수 있으니, 이름 하여 ‘평준(平準, 물가를 공평하게 조절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천자는 도리가 있다고 여겨 그의 주청을 허가했다. 이해에 천자는 북으로는 삭방, 동으로는 태산, 또 해상을 순찰하고, 아울러 북방의 변경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지나간 곳마다 모두 상을 내려서, 비단 백여 만 필, 금전은 거만(巨萬)에 헤아렸는데, 이것은 모두 대농에게서 지출한 것이다.

상홍양은 또 관리들이 조정에 양식을 바치면 승진시키고, 죄인들이 양식을 내면 속죄가 될 수 있도록 청했다. 백성들 중에 감천궁의 창고에 양식을 내는 자는 각기 차등을 두어 종신토록 요역을 면제해주었고, 고민(告緡)에서도 제외시켜 주었다. 기타 각 군도 긴급한 곳에 양식을 보내주었고, 여러 농가도 수확한 양식을 바치니, 산동 지방의 조운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여 6백만 석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일 년 내내 태창과 감천궁의 창고는 양식으로 가득 찼고, 변경에도 남는 곡식과 물품이 있었는데, 균수(均輸, 물건 값이 싸면 나라에서 사들이고 비싸면 이를 내다 팔음)의 방법을 통해 옮겨서 파니, 비단 5백만 필의 이익이 생겼다.

이 덕분에 백성들은 더 이상의 세금을 내지 않아도 국가의 재정은 풍요로워졌다. 그리하여 상홍양은 좌서장(左庶張)의 작위를 받았고, 황금을 2백 근을 받았다.

이해에 작은 가뭄이 있어, 천자는 관리들로 하여금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복식이 진언하여 말했다. “조정은 마땅히 조세로써 입는 것과 먹는 것을 충당할 뿐입니다. 지금 상홍양은 관리를 저자거리의 줄지은 상점에 앉게 하여 이윤을 취하고 있습니다. 상홍양을 삶아 죽이면 하늘은 곧바로 비를 내릴 것입니다.”

사마천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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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은 말한다.

“농업, 공업, 상업 간의 상호 교역이 통하게 되면 귀(龜), 패(貝), 금(金), 전(錢), 도(刀), 포(布) 등과 같은 화폐가 바로 흥기한다. 그 유래는 아주 오래되었다. 고신씨(高辛氏) 이전의 일은 오래되어 기록을 얻기 어렵다. 고로 『상서(尙書)』에서 말하는 당우(唐虞, 요순(堯舜)) 세대와 『시경(詩經)』에서 기술하는 은주(殷周) 세대는, 세상이 평안하고 학교를 세우고, 농업을 근본으로 삼고, 상업을 말단으로 삼아 억제했으며, 예의로써 이익을 탐하는 것을 방지했다.

세상에 변란이 많이 일이나면 이와 정반대이다. 사물이 흥성하면 쇠락하기 마련이고, 시대가 극에 달하면 곧 전환하기 마련이다. 한번 질박하면 한번 화려해지는 것도 끝에 이르면 처음으로 돌아오는 변화인 것이다.

「우공(禹貢)」에서는 천하를 아홉 개의 주(州)로 나누고, 각자 그 토지에 적당한 작물을 심어 백성의 다소에 따라 걸맞은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상나라의 탕왕(湯王)과 주나라의 무왕(武王)은 전 왕조의 폐단을 승계했으나, 때에 맞게 변통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피곤하지 않게 하였다. 그들은 각자 조심하면서 신중하게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결국 점차 쇠락해졌다. 제 환공(齊桓公)은 관중(管仲)의 계략을 채용하여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며 산과 바다에서 산업을 일으켜 부유했다. 또 제후들로 하여금 천자에게 조회하도록 했고, 보잘 것 없는 제나라가 패주(覇主)의 명성을 천하에 드러내게 하였다.

위나라에서는 이극(李克)을 등용하여 땅의 힘을 이용하여 농업생산을 발전시켜 강국의 임금이 되었다. 이후 천하는 상호 다투게 되었고, 교활한 무력을 중시하고 인의(仁義) 도덕(道德)을 경시했으며, 부유함을 최우선으로 삼고, 겸양함은 뒤로 미뤘다. 그래서 백성들 중 부자는 혹은 억만금을 모았고, 가난한 자는 지게미와 쌀겨마저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강대한 제후국은 군소국을 병탄하여 제후들을 신하로 만들었고, 약한 나라는 간혹 제사마저 단절되어 세상에서 소멸되었다. 진(秦)나라에 이르러 마침내 천하는 통일되었다.

우하(虞夏, 순임금과 탕임금) 시대의 화폐는 금을 세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혹은 황(黃), 혹은 백(白), 혹은 적(赤)이었다. 이 밖에 혹은 전(錢), 혹은 포(布), 혹은 도(刀), 혹은 귀갑(龜貝)을 화폐로 썼다.

진나라에 이르러 일국의 화폐는 두 가지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황금은 ‘일(溢)’을 단위로 명칭으로 하고 상등 화폐로 삼았고, 동전에 ‘반량(半兩)’이라고 문자를 새긴 것을 하등 화폐로 삼았다. 그리고 주옥(珠玉), 귀패(龜貝), 은석(銀錫)과 같은 종류는 단지 기물(器物)이나 장식품으로 진귀한 보물로 여겼지 화폐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화폐는 시간에 따라 달라 그 가치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때에는 밖으로는 오랑캐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공업을 일으켰다. 전국의 남성들은 힘써 농사를 지었으나 양식으로는 부족했고, 여자들이 베를 짰으나 의복으로 입기에 부족했다. 고대에는 일찍이 천하의 재물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었으나, 오히려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여기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추세라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서로 부딪치게 마련이니, 어찌 괴이할 것이 뭐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