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
〈노동은 신성하다.〉
이러한 표어 아래 A가 P고무공장의 직공이 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자기의 동창생들이 모두 혹은 상급학교로 가고 혹은 회사나 상점의 월급장이가 되며, 어떤 이는 제 힘으로 제 사업을 경영할 동안, A는 상급학교에도 못 가고 직업도 구하지 못하여 헤매다가 뚝 떨어지면서 고무공장의 직공으로 되었다.
〈노동은 신성하다. 〉
〈제 이마에서 흐르는 땀으로 제 입을 쳐라. 〉
〈너의 후손으로 하여금 게으름과 굴욕적 유산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게 하라.〉
이러한 모든 노동을 찬미하는 표어를 그대로 신봉한 바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헤매다가 마침내 직공이라는 그룹에서 그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일종의 승리자와 같은 기쁨을 그의 마음 속에 깨달았다. 그것은 사회에 이겼다느니보다도, 전통성에 이겼다느니보다도, 한번 꺾여지면서 일종의 반항심보다도, 자기도 이제는 제 힘으로 살아가는 한 개 사람이 되었다는 우월감에서 나온 기쁨이었다.
「우으로 —우으로.」
생고무를 베어서 휘발유를 바르며 흑은 틀어 끼워서 붙이며 이제는 솜씨 익은 태도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는 때때로 소리까지 내어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공장에 들어와서 한 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는 동안에 그는 여기서 움직이는 온갖 게으름과 시기와 허욕을 보았다. 힘을 같이하여 자기네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할 이 무리의 사이에도 온갖 시기와 불순한 감정의 흐름을 보았다. 남직공들이 지은 신은 비교적 공평되이 검사되었지만, 여직공이 지은 신은 그의 얼굴이 곱고 미움으로 〈합격품〉과 〈불량품〉의 수효가 훨씬 달랐다. 생고무판의 배급에도 불공평이 많았다. 서로 남의 신을 깎아먹으려고 서로 틈을 엿보았다. 자기가 일을 빨리 하기보다 남을 더디게 하기에 더 노력하였다. 흑은 남의 지어 놓은 신을 못 보는 틈에 자리를 내어놓는 일까지 흔히 있었다. 점심 시간에는 서로 입에 담지 못할 음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런 모든 엄벙뗑의 거친 감정과 살림 아래서 A는 오로지 자기의 길을 개척하려고 힘썼다. 사람으로서의 감정과 사랑과 양심을 잃지 않으려—그리고 밖으로는 늙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처자의 입을 굶기지 않으려— 휘발유 브러시 로올러는 연하여 고무판 위에 문질러지며 굴렀다.
「우으로 우으로!」
🙝 🙟
그것은 A가 이 공장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일을 끝내고 한 달에 두 번씩 내주는 공전을 받은 뒤에 그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도시락 갑을 꽁무니에 찰 때였다.
「여보게 A, 놀라 가세.」
A와 같은 상에서 일하는 B가 찾았다. C, D 두 사람도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나도 놀라 가잔 말인가?」
「같이 가기에 찾지.」
「그럼 내 집에 잠깐 들러서.」
「이 사람 걱정 심할세. 잠깐만 다녀가게. 이 사람, 그렇게 비싸게 굴면 못써.」
「그래라.」
그는 다시 무슨 말을 못 하고 따라갔다. 그들은 그 공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어떤 집까지 이르러서 주인을 찾지도 않고 줄레줄레 신발을 문 안에 들여 벗은 뒤에 들어갔다. A는 의외의 얼굴을 하였다.
그 집 안주인은 공장 근처에 있는 서른댓쯤 난 여인이었다.
B는 그 여인에게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보였다.
「어디 갔소?」
「내보냈지. 놀다 오라구 오십 전 줘서.」
「잘됐어. 넷만 데려다 주.」
「넷? 넷이 있을까? 하여간 잠깐 기다려요. 가 보구 오께.」
여인은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A도 앉게나. 왜 뺏뻣이 서 있어?」
「B, 난 먼저 가겠네.」
「또 나온다. 앉게.」
「참 가 봐야겠어.」
「몹시도 비싸다. 사람이 비싸면 못써.」
「비싼 게 아니라……」
A는 하릴없이 주저앉았다.
잠깐 다녀오마고 나간 주인 여인은 한 시간이나 넘어 지난 뒤에야 겨우 돌아왔다.
「자 한턱 내야지.」
그 여인의 이런 소리와 함께 뒤로는 다른 젊은 여인 넷이 들어왔다.
「저 얼간이와 또 맞선담. 죄우간 이리 와.」
B는 선 등 서서 들어오는 젊은 여인을 손짓하며 웃었다.
「저 싱검등이와 또 놀아? 에라 놀아줘라.」
얼간이란 그 여인도 대꾸를 하면서 B의 곁으로 내려와 앉았다. C도 하나 맡았다. D도 하나 맡았다. 그리고 A의 몫으로 남은 것은 같은 P고무공장의 여직공으로 다니는 십 팔구 세난도순(道順)이라는 뚱뚱한 계집애였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할 때와 달리 비단옷을 입고 얼굴에는 분도 약간 발랐다. 이것을 한 번 둘러본 뒤에 A는 불쾌함을 참지 못하여 몸을 일으켰다.
「B, 난 먼저 가겠네.」
「에이 못난 자식, 가고 싶으면 가……여보게, 우리 좋은 친구끼리 놀라 왔다가 혼자 먼저 간다면 우리가 재미있겠나. 한 시간만 있다가 같이 가세.」
A는 일으켰던 몸을 하릴없이 다시 주저앉았다.
남녀 여덟 명은 둘러앉았다. 술상도 들어왔다. 잡수세요. 먹어라, 먹자, 먹는다. 술은 돌기 시작하였다.
「샌님 먹게.」
술잔은 연하여 A에게 왔다. A는 한 잔도 사양치 못 하고 다 받아 먹었다. 그러나 첫 잔부터 불쾌한 기분 아래서 받은 술은 그 수가 많아감과 함께 불쾌함도 따라 늘어갔다. 술을 먹을 줄을 모르는 A는 차차 자기가 취해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의식하면서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사양하려면 B가 막았다. 술잔을 받아 놓고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여인들이 채근했다.
「하하하! 맛있지?」
A가 술을 삼킬 때마다 낮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B 가 재미있는 듯이 손뼉을 치고 하였다. 여인들도 깔깔 웃어댄다.
될 대로 되어라. 몇 잔 안 되어서 벌써 얼근히 취한 A는 마음의 불쾌와 몸의 불쾌의 가속도로 늘어가는 것을 마치 남의 일과 같이 재미있게 관찰하면서, 오는 술잔은 오는 대로 다 받아 먹었다. 다섯 잔이 열 잔이 되고 열 잔이 스무 잔이 됨에 따라 그의 눈살은 더욱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무슨 거친 생활이냐? 너희에게는 너희의 봉급을 기다리는 어버이나 처자가 없느냐? 술? 환락? 술보다도 환락보다도 먼저 너희와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것이 너희의 할 일이 아니냐? 우으로! 우으로!」
술에 취한 몽롱한 눈으로 어두운 등잔 아래서 뭉기며 헤적이는 몇 개의 몸집을 바라보던 그는 뜻하지 않고 숨을 길게 쉬었다.
「망측해, 우시네.」
곁에 앉아서 술을 따르고 있던 도순이가 A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A가 울어?」
B가 이편으로 머리를 획 돌렸다. A는 얼굴을 돌렸다. 눈물이 나오는 바는 아니었지만 취한 그들에게 얼굴을 보이기가 싫었다.
「A, 우나? 도련님, 샌님. 하하하! 또 한잔 들게—도 라지, 도라지, 도라지—짜. 은율 금산포 도라지……까 (콧노래를 부르며) 하하하. 뚱뚱보, 그렇지? 또 한 잔 먹어라.」
「B, 난 정 먼저 가겠네.」
「가? 가갸거겨는 언역지 초요, 이마 털 뽑기는 난봉지초로다—이 자식, 글쎄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이냐? 푸른 술 있것다. 미희 있것다—야, 너무 비싸게 굴지 말아라. 천 냥짜리다. 만 냥짜리다. 십만 냥 줘라, 자. 또 한 잔.」
A는 또 받아 마셨다.
「하하하, 십만 냥이라는 바람에 또 먹었구나. 먹은 담에는 열 냥짜리다. 그러나 A, 내 말을 듣게. 나도……나도……」
B는 지금껏 뚱뚱보에게 걸고 있던 왼팔을 풀어서 양 팔굽으로 술상을 짖었다. 그리고 얼굴을 A의 앞으로 가까이 하였다.
「A, 정우나? 올지 말게.」
울지도 않는 A에게 울지 말라고 권고하는 B는 자기 눈에 갑자기 괸 눈물은 의식치 못하는 모양이었다.
「울 게 아니라네—세상사가 다 그렇다네. 나도 상당한 학부를 졸업한 사람일세. 처음에는 자네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지. 세상을 좀 더 엄숙하게 보자고……그러나 틀렸어. 세상에 어디 엄숙이 있나? 예수? 석가여래? 모두 다 샌님이야. 이 뚱뚱보 얼간이보담도 —」
B는 한 번 탁 계집을 붙안았다가 놓았다.
「듣기 싫어, 싱검둥이—」
「꼴에 비싸게 구네. A! 자네 밥만 먹고 살겠나? 반찬도 있어야 하고 물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지.
돈 있는 놈의 반찬은 명월관 식도원에 있고 우리 반찬은 이 뚱뚱보, 말라꽁일세그려. 자네네 그 올빼미— 도순이 말일세. 오죽이나 얌전한가? 우리 얼간이하구 바꾸어 볼까? 하하하, 또 한 잔 먹게, 탄력 있는 몸집 그래 어때?」
B는 술을 따라서 A에게 주지 않고 자기가 마셨다.
하하하하. 쾌활히 웃는 그의 오른편 눈은 그 웃음에 적당하게 쾌활한 빛이 있었지만, 커다랗게 뜬 왼편 눈에서는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A, C, D, 그리구 이 요물들아, 내 말을 들어라.
오늘이 우리 아버지 생신이다, 저녁에 고등어 사 가지고 가마 했다. 그러나 고등어가 다 뭐냐! 술이다. 술이야. 어따 A, 너 또 한 잔 먹어라.」
「B, 그럼 자네도 집에 가야겠네그려?」
「나? 내일 저녁에 가지. 남의 걱정까지는 말고 술이나 먹어라. 그렇지만 A, 이까짓 자식들—」
B는 손을 들어서 C와 D를 가리켰다.
「자식들과는 이야기할 게 없지만 때때로 생각하지 않는 바가 아니야. 상당한 학부까지 마치었다는 자식이 그래 십여 년을 배운 것을 써먹지도 못하고 고무신을 붙여서 한 켤레에 오 전씩 받는 것, 이것을 가지고—이런 술도 안 먹고야 어쩌겠나. A, 울지 말게, 울지 마.」
B는 손수건을 내어 제 눈물을 씻었다.
🙝 🙟
좀 뒤에 도순의 집까지 몰아 넣으려는 것을 몸을 빼쳐서 피한 A는 취한 술을 깨우기 위하여 공원에 갔다.
고요한 밤의 공원이었다. 전등불에 비치어서 A는 그 나무들의 늘어진 가지에서 장차 터지려는 탄력을 보았다. 겨울의 혹독한 바람 아래서도 자포(自暴)를 일으키지 않고 오랫동안 기다린 그 가지들의 겨우내 간직하였던 힘과 생활력을 한꺼번에 씨 보려는 그 자 랑을 보았다.
「우으로—우으로, 좀 더 사람다이.」
이 나뭇가지의 용기와 아까의 B의 자포적 기분의 두 가지를 마음 속에 그려 놓고 비교할 때에는 어느 편을 도울지 알지를 못하였다. B의 말에는 그럴듯한 근거가 있었다.
「아무 바람과 광명을 발견할 수 없는 이 환경 아래서 혼자서 위로 광명으로 손을 저으며 헤매며 그것이 무슨 쓸데가 있으랴. 필경에는 실망에 실망을 거듭한 뒤에는 또다시 탐락의 생활에 빠져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지 않으랴? 그러면 도대체 장래의 실망이라는 것을 맛보지 않게 지금부터 탐락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도리어 올지 않을까? 위로? 위로? 무엇이 위로 냐?」
「술이다, 술이야.」
아까 B가 부르짖던 부르짖음은 A 자기의 「위로 위로」라고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보다도 더 침통하고 진실한 부르짖음이 아닐까? 더 범인적인 부르짖음이 아닐까? A는 연하여 딸꾹질을 하며 취하여 쓰러지려는 몸을 다시 일으키고 일으키고 하였다.
🙝 🙟
이튿날 종일을 A는 불쾌하게 지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과음하였기 때문에 얼굴은 뚱뚱 부었다. 가슴이 별하게 쓰렸다.
그는 공장에서도 일하던 손을 뜻하지 않고 멈추고는 눈을 껌벅껌벅하였다.
「어때, 샌님?」
B가 찾는 것도 들은 체도 안 했다. 몇 번을 저절로 눈이 도순이 있는 편으로 쏠리다가는 혼자서 혀를 차고 하였다. 주위의 인생이란 인생, 여인이란 여인이 모두 더럽게만 보였다.
「그러고도 사람이냐? 더러워! 위로! 위로!」
그는 몇 번을 혀를 차고 주먹을 부르쥐고 하였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려 할 무렵에 B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또 가 볼까?」
하였지만 A는 대답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하하하하!」
뒤에서 B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위로 —위로 —」
A는 머리를 숙이고 걸음마다 힘을 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날 점심때 점심을 끝낸 장화공들은 넓은 방에 앉아 잡담들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여공이 이런 말을 꺼냈다.
「이즈음 불량품이 많이 나.」
「당신은 면상이 멍텅구리거든.」
어느 남직공이 놀렸다.
「아니야, 나도 많이 나는데.」
이번은 얼굴 좀 빤빤한 계집애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당신은 얼마나 예쁘우?」
아까의 남직공이 또 놀렸다.
「아이구, 당신은 입이 왜 그리 질우?」
「질지 않아 물이면 어때?」
한참 이렇게 주고받을 때에 B가 쑥 나섰다.
「그런 것들이 아냐, 내게서도 이즘 불량품이 많이 나는데 아마 배합이 나쁜가봐.」
사실 이즈음은 불량품이 많이 났다. 그것은 얼굴 미운 여공에서만 많이 나는 것이 아니요, 남직공이며 얼굴 예쁜 여직공에게서도 검사에 불합격되는 신이 많이 났다. 불량품 한 켤레를 낼 때마다 그 직공은 〈불량품을 낸 벌〉로서 한 켤레와,〈불량품이 된 원료에 대한 보상〉으로서 한 켤레— 이렇게 두 켤레를 공전을 안 받고 만드는 것이 고무공장의 내규였다. 그런지라, 한 켤레의 불량품을 내면 그 직공은 공전 못 받는 세 켤레〈불량품까지〉를 만드는 셈이었다. 잘 해야 하루에 십 칠팔 켤레 이상은 못 붙이는 그들이 어떻 게 해서 하루에 세 켤레만 불량품을 내어놓으면 그날은 공전받는 일은 칠팔 켤레밖에는 못 한 셈이 되는 것으로, 사실 불량품이 많이 난다 하는 것은 직공들에게 대하여는 큰 문제였다.
「배합이 나빠.」
B의 말을 따라서 제각기 일어섰다.
「난 어제 네 켤레 퇴맞았는데.」
「난 그저께 여섯 켤레.」
한 시간 전까지는 불량품 낸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그 수효를 줄이거나 감추려던 그들은 그것의 책임이 자기네에게 있지 않는 것을 아는 동시에 각각 그 수효의 많음을 자랑하였다. 세 켤레다, 네 켤레다, 제각기 들고 있어섰다.
「여러분들, 이럴 것이 아니라—이렇게 지껄이기나 하면 뭘 하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 대책을 연구합시다.」
「대책이래야 배합사를 두들겨 주는 밖에 수가 있나?」
누가 이런 말을 하였다.
「두들겨라.」
「때려라.」
몇 사람이 응하였다. 하하하, 웃는 사람도 있었다.
「담뱃불 좀 주게.」
딴소리 하는 사람도 있었다.
「좀 조용들 해요. 우리 문제를 좀 구체적으로 생각 해 봅시다그려.」
그들은 머리를 모으고 의논하였다. 제각기 의견을 제출하였다. 그러던 끝에 마침내 B의 의견을 쫓아서 지배인에게 배합사를 주의시켜 달라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자로는 A가 뽑혔다. A는 그 직책을 달갑게 받았다.
🙝 🙟
모든 장화공들의 성원 아래 그들을 문 밖에 남겨 두고 A는 지배인의 앞에 갔다. 지배인은 무슨 일이 났는가고 눈이 둥그렇게 되며 장부를 집어치웠다.
「무슨 일이어?」
「저 다름이 아니라—」
A는 분명하고 똑똑하게 이즈음 유화(硫化)할 때에 불량품이 많이 발견되며, 이 때문에 장화공들의 받는 손해가 막심하니 배합사를 불러서 좀 주의하도록 명하여 달라고 말하였다. 지배인의 명으로 배합사가 왔다.
「이즈음 배합이 나빠서 불량품이 많이 난다는데 ……」
이 지배인의 말에 대하여 배합사는 즉시로 반대하였다.
「네? 그럴 리가 있겠읍니까? 꼭 저울로 달아서 이 전과 같이 하는 배합에 변동이나 착오가 있을 리가 없읍니다. 아마 네리(鍊)가 부족한 모양입지요.」
「네리? 그러면 네리공을 불러.」
네리 공이 왔다.
「네리를 이즈음 어떻게 하나?」
「전과 같습니다.」
「그래두 생고무 품질이 나빠서 불량품이 많이 난다고 말이 있는데.」
「네리에는 부족이 없읍니다. 그럼 흑은 유화가 흑은 과하거나 부족하거나 하지 않습니까? 유화시킬 때의 취급이 너무 거칠지는 않습니까?」
「어디 유화공을 불러 봐.」
유화공이 왔다.
「이즈음 유화를 어떻게 하나?」
「네?」
「이즈음 불량품이 많이 나는 건 알겠지?」
「네?」
「왜 잘 유화시키지 않아?」
「천만에, 붙이기를 잘못 붙이는지는 모르겠읍니다 만 유화에는 잘못이 없읍니다. 기압 오십 파운드로 한 시간 반씩 과 부족이 없윱니다.」
배합에서 네리로, 유화로, 이 세 책임자들의 말고 듣는 동안 A의 머리는 점점 수그러졌다.
(내가 무엇하러 여기 들어왔는가? 서로 책임을 밀고 주고……여기 들어온 나부터가 벌써 마음을 잘못 먹지 않았나? 사람이란 당연히 제가져야 할 책임까지도 남에게 밀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하나. 여기 들어 온 나부터가 잘못이다. 아무리 배합이 나쁠지라도, 아무리 네리가 부족할지라도, 아무리 유화가 잘못 되었을지라도 성심껏 붙이기만 하면 안 붙을 바가 아니었다. 왜 그 책임을 남에게 밀려 했는가? 위로! 위로!
좀 더 사람다이!)
감격키 쉬운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괴려하였다.
「자네도 듣다시피 제각기 잘 했노라니까 어느 편이 잘못했는지 모르겠네그려. 허허허.」
지배인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네, 듣고 보니 아마 붙이기를 잘못한 것 같습니다.」
A는 머리를 숙인 채 돌아서서 지배인실을 나왔다.
그가 머리를 숙이고 직공들 틈을 지나갈 때에, 어떤 여공이 그를 멍텅구리라 하였다. A는 그 말을 들은 체도 않고 빨리 공장으로 돌아와서 제 모자를 뒤집어쓰고 도시락갑을 꽁무니에 찼다. 그리고 막 밖으로 나오려다가 B와 마주쳤다.
「잘 만났네. 술 안 먹겠나? 내 한턱 냄세.」
「뭐! 술, 만세, 좌우간 오늘 일을 끝내고—」
「에 불쾌해!」
「왜 그러나? 하하하, 제각기 책임을 밀던가? 그런 거라네, 사람이란 건……거기서 네, 장화공들이 붙이기를 잘못하였나 보이다 하던 자네의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 이데, 예수 그리스도야. 예수, 석가여래, 하하하하, 하여간 좀 있다 술을 잊어서는 안되네. 그리스도의 술을 얻어먹기가 쉽겠나?」
🙝 🙟
이튿날 아침 몹시 목이 말라서 깬 때는, A는 뜻밖에 도 도순의 집에 있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A는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아뜩하였다.
(이게 무슨 일이냐? 이게 무슨 짓이냐?)
무한한 자책과 불쾌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증오에 불타는 눈을 도순의 얼굴에 부었다. 얼굴에 발랐던 분이 절반만큼 지워져서 버짐 먹은 것같이 된 면상에 미소를 띠고 있는 도순을 보매 불쾌감이 더욱 맹렬하여졌다. 그 얼굴에 침을 탁 뱉고 싶었다.
A는 황급히 일어났다. 무엇이라 그의 등을 향하여 도 순이가 부르짖었지만 듣지도 못하였다. 문 닫고 가란 말만 간신히 들렸다. 잠에 취한…… 그 집을 뛰쳐나온 A는 자, 어디로 가나 하였다. 밤을 다른 데서 보내고 이제 어슬렁어슬렁 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그의 양심은 너무도 맑았다. 지금껏 아 내 이외의 딴 계집을 접해 본 일이 없는 그였다.
(무슨 짓이냐, 이 내 꼴은?)
불쾌하였다. 침이 죽과 같이 걸게 되었다. 마음은 부단히 향상을 바라면서도 행위에 있어서 양심과 배치되는 일을 저지르는 제약함을 스스로 꾸짖어 마지않았다. 그는 불쾌한 감정 때문에 연하여 사지를 떨면서 골목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골목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아아, 거친 삶이다. 바보, 바보, 왜 나는 좀 더 사람답게 못 되는가. 사람으로서의 사랑과 감정과 양심— 이것을 왜 기르지를 못하느냐? 위로, 위로, 좀 사람다 이!)
그는 메시꺼운 듯이 침을 뱉고 하였다. 하릴없이 공장으로 갔다. 하루종일 불쾌하게 지냈다. 공장에서 일 할 동안 저편 여직공들의 일터에서 무엇이 좋다고 재재거리는 도순의 뒷태도를 증오에 불붙는 눈으로 수 없이 흘겼다.
「벌써 잊었느냐? 에익 더러워. 한 사내와 한 계집의 결합이라는 것은 결코 농담이 아닐 것이다. 무지로 다. 더럽다.」
소리까지 내면서 중얼거리고 하였다. 여전히 천하를 태평히 보자는 B는 일손을 멈추고 A를 들아보며 웃었다. 그러나 A는 그의 미소에는 응하지 않고 타는 듯한 증오의 눈을 B에게 보낼 뿐이었다.
「오늘 밤도 또 가려나?」
응하지 않는 것을 탓하지 않고 B가 두 번이나 말을 붙일 때에, A는 몸까지 홱 B편에서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날 밤, A는 혼자서 몰래 몇 잔을 먹은 뒤에 또다시 도순의 집의 문을 두드렸다. 아직 양심이 썩지 않은 A는 자기의 양심이 어긋나는 이 행동에 대하여 억지로 자기 스스로를 속일 핑계라도 없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속여서도순에게 한 사내와 한 계집의 결합이라는 것은 좀 더 엄숙히 볼 문제라는 것을 설교해 주겠다고 핑계를 만들었다.
🙝 🙟
배합사와 장화공 사이의 문제는 A의 철저치 못한 태도와 지배인의 「허허허」 하는 웃음소리로 한 단락을 맺은 듯하나 그것으로 온전히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이튿날도 불량품을 낸 직공에게마다 배합사에 대한 원성이 나왔다.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날이 지날수록 그들의 원망은 차차 더하였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든지 하자는 사람은 없었다.
「제길 도적놈!」
이것이 그들의 최고의 원성이었다.
A는 지배인에게 향하여 이제부터는 잘 붙여 보겠노라 하고 나온 뒤로 정성을 다하여 붙였다. 전에는 하루 열여섯 켤레 붙이던 그가 그 다음부터는 열 두 켤레를 한하고 붙였다. 그러나 이틀에 한 켤레씩은 역시 불량품이 나왔다. 아무런 일에든지 〈되는 대로〉를 표방하고 지나는 B에게서는 하루 평균 세 켤레가 났다.
어떤 날, 브러시질하던 손을 멈추고 B를 찾았다.
「여보게 B, 이러다가는 참 안 되겠네.」
「뭐이?」
「불량품 문제 말일세.」
「하하하, 자네도 걱정이 나는가? 붙이기만 잘 붙여 보게나—아닌게아니라 걱정일세. 그래서 어저께 나 혼자 몰래 지배인을 찾아갔다네. 그자(지배인)하구 우리 집하구는 본시 세교집안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일개 직공이라 해도 그리 괄시를 못 한다네. 그래서 담판을 했지. 배합사를 내쫓아 달라구. 그랬더니 그 대답이 이렇더구만. 지금의 배합사는 이 공장이 창설될 때 공장에서 일부러 코오베까지 보내서 수천 원을 삭여 가면서 배합법을 도둑질해 온 거라구. 그래서 보통 배합사라면 한 달에 월급 일백 이십 원은 줘야 하 는데 그자에게는 월급 그 반액 육십 원밖에 안 준단다. 십 년 동안을 육십 원씩 주고 그 뒤부터야 보통 배합사의 월급을 준다네. 그런 사정이 있으려까 내보낼 수가 없대.」
「B, 난 어젯밤에 이런 생각을 해 봤는데 어떨까.
우리 장화공의 수효가 삼백 명이 아닌가. 그 삼백 명 이 한 달에 네 켤레씩 불량품을 낸다면 그 공전 손해가 육십 원이지? 그리고 불량품을 낸 배상으로 이천 사백 켤레의 공짜 신까지 합하면 매달 일백 팔십 원 이라는 돈이 떠오르네그려. 그 떠오르는 돈으로 즉— 우리 돈으로 말일세. 우리 돈으로 우리가 배합사 한 명과 네리공 한 명을 야도우(雇)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말이야. 공장측 배합사와 네리공을 감독하는 셈일세그려. 우리가 지금 배합이나 네리가 나쁜 탓으로 받는 손해가 한 달에 한 사람 네 켤레는 될 걸세그려.」
「만세! A만세! 씨르럭푸르럭 톨스토이식의 헛소리나 하는 자넨 줄 알았더니 이런 지혜도 있었나? 만세 만세, 만만셀세. 그렇지만 역시 공상가의 생각일세.
도련님의 생각이야. 샌님 도련님, 직공들이 말을 들을 줄 아나? 배합이 나빠서 한 달에 일만 원을 손해를 볼지언정 그것을 개량할 비용으로 십 전은커녕 일 전 도 안 낸다네.」
「그럴 리야 있겠나?」
「그러기에 자네는 샌님이라지, 하하하하.」
「사리를 설명해—」
「사리? 사리를 알 것 같으면 자네 같은 철학자나 나 같은 주정군이 되지. 좌우간 말해 보게나. 나쁜 일은 아니니깐.」
A는 다시 브러시를 들었다. B의 이야기는 독단이었다. 사람의 사람으로서의 신성함을 무시하는 독단이었다. A는 다시 그 이야기를 B에게 안 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공장에 출근할 때는 그는 어저께 B에게 이야기한 것과 같은 규맹서를 작성하여 가지고 왔다.
점심때를 이용하여 그는 B에게 도장 찍기를 원하였다.
B는 웃으면서 찍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좀처럼 도장을 받지 못하였다.
「도장을 못 가져왔구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들 찍으면 나도 찍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집에 가서 의논해야겠네.」
어떤 사람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이리하여 그가 받은 도장은 삼백 명 직공 가운데서 겨우 열 서너 사람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날 일을 끝내고 몹시 불유쾌하여 돌아가려 할 때에 B가 따라왔다.
「어때, 몇 사람이나 받았나?」
「에익, 더러워! 짐승만도 못한 것들.」
「하하하하, 안 찍던가? 글쎄 내가 그러지 않던가?
안 찍네, 안 찍어.」
「돼지, 개!」
「몹시 노여우신 모양일세그려. 술 먹고 싶지 않은가, 한턱 내게나.」
A는 B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B의 얼굴에 뱉으려고 준비하던 침을 탁 땅에 뱉은 뒤에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였다.
🙝 🙟
도순과의 일이 있은 뒤부터 A는 자주 도순을 찾았다. 도순이 집을 다녀온 이튿날마다 몹시 불쾌하여 다시 안 가려고 맹세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은 뜻하지 않고 그리로 향하여지고 하는 것이었다. 공장에서는 도순과 A는 서로 모른 체하였다. 처음 한동안은 도순이가 말을 붙여 보려 하였으나 A가 부끄러워 피하고 하였다. 그 뒤부터는 도순이도 모르는 체하였다.
간간 도순이가 A의 곁으로 지나다가 꼬집고 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오월 단오가 가까운 어느 날이었다. A가 저녁을 먹고 거리(?)에라도 나갈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에 아내가 찾았다.
「어디 또 나가려우?」
「응.」
「여보, 응이 대체 뭐요, 응이 뭐야? 집안 꼴 좀 봐요. 쌀이 있소, 내일 모레가 명절인데 아이 옷이 있소?」
「우루 사이 온 나다나 (귀찮은 여편네로군!)」
「할말 없으면 저런 말 한담.」
아내는 어이없는지 핏 하고 웃었다. A도 그만 웃어 버렸다. 그리고 싱겁게 귀동이(그의 두 살 난 아들)를 두어 번 얼러 본 뒤에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선 그는 B를 찾아가서 B를 문간까지 불러 냈다.
「여보게 B, 돈 한 이 원만 취해 주게.」
「밤중에 돈은 해서 필 하겠나?」
「집에 쌀이 떨어졌네그려.」
「뭐? 쌀? 그거야 되겠나? 가만 있게, 이 원으로 되겠나? 한 오 원 줄까?」
A는 B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하 만사를 되는 대로 해 나가는 듯한 B—그가 집에는 생활비용을 여유 있게 남겨 두며, 친구의 청구에 두말없이 꾸어 주는 그의 태도,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오 원이면 더 좋지.」
「잠깐 기다리게.」
B는 들어가서 제 아버지(?) 와 중얼중얼하더니 오 원을 가지고 나왔다.
「자, 쓰게. 딴 데는 쓰지 말게.」
「이 사람아.」
이런 일에 감격키 쉬운 A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막고 B에게 사례를 하고 돌아섰다.
집에 들어서면서 장한 듯이 홱 내던진 그 물건들을 아내는 생긋이 웃으면서 집어치웠다. 제 저고리감에 대하여는 그는 그다지 기뻐하는 듯이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펴 본 뿐, 곧 집어치웠다. 자리에 누워서도 당신의 옷이나 끊어오지요할 뿐, 제 것에 대한 치하는 안 했다. 이튿날 아침, A가 깨어서 세수를 하려고 문을 열 때였다. 혼자서 불을 때며 제 저고리감을 뒤적이고 있던 그의 아내는 A의 나오려는 바람에 얼른 감추어 버렸다. 얼굴이 주홍빛이 되었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었지만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역력히 보였다.
집을 나서서 공장으로 가는 동안, A의 마음은 명절을 맞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괴상히도 들먹거렸다. 무 한 명랑하고 기뻤다. 단 일원, 그것으로 아내의 마음을 그만큼 기쁘게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싸지 않느냐.
그는 문득 도순을 생각하였다.
연애? 그것도 아니었다. 성의 불만?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성 정복이라는 일종의 병적 쾌감이 그를 도순에게 끄는 유일의 원인이었다. 그것은 더러운 감정이었다.
「위로 —위로 —」
이리하여 그는 도순의 집을 다시 가지 않았다. 공장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도순을 보지 않으려 하였다.
집에 누워서 때때로 그 도순의 일을 회상하고는 심란해질 때는 언제든지 귀동이를 찾았다.
「야. 귀동아!」
「어?」
「응, 너 착하지.」
「필?」
「따— 떼여이,」
「그렇지 따, 떼, 여이지.」
그리고 그는 거기서 도순과 만났을 때와는 온전히 종류가 다른 만족과 희열을 발견하였다. 귀동이의 까, 따, 빠는 도순의 흥에 지지 않을 매력이 있었다. 제 아내에게 무슨 물건을 사줄 때마다 본 체 만 체하는 아내의 태도는 사다 주는 물건에 입을 맞추며 기뻐서 날뛰는 도순이보다도 A에게는 은근스럽고 흡족하였다.
그의 생활은 다시 건전한 데로 돌아섰다.
🙝 🙟
여름도 절반이 갔다.
그 어떤 여름날 공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A는 문득 앞에 B가 도순이를 끼고 소근거리면서 가는 것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은 뒤에 곤하여 자려 하였으나 그의 마음은 공연히 뒤숭숭하였다.
「아빠.」
귀동이가 찾으면서 왔다. 그러는 것을 그는 밀었다.
「저리 가!」
「따 띠?」
「필?」
「여 이따—떼이.」
「엄마한테 가.」
「마?」
「응. 응.」
A는 벌떡 일어났다. 더워하면서 그는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야시며 일없이 거리를 빙빙 돌다가 아홉 시쫌 하여 도순의 집 앞에가서 귀를 기울였다.
「올빼미 같으니.」
「흥—넌 싱검둥이지?」
안에서는 확실히 B와 도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A는 문을 두드렸다. 안의 소리들은 끊어졌다. A는 두 번째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A는 또다시 두드렸다. 세 번째야 「누구요」 하는 소리가 건넌방에서 들렸다.
「도순이 있어요?」
「놀라 나갔소.」
「언제쯤이오?」
「아까요.」
A는 홱 돌아섰다.
「나를 따는구나. 있고도 없다고. 짐승들! 더러워!
더러워!」
거기서 돌아선 그는 그로부터 두 시간쯤 뒤에도순의 집에 이르렀다. 그때는 그는 먹을 줄 모르는 슬에 정신없이 취해 있었다.
「도순이!」
그는 몸 전체로 대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 여력으로 넘어진 그는 주저앉은 채로 대문을 찼다.
「도순이!」
한 마디 부르고는 앉은 채로 서너 번씩 대문짝을 차고 하였다.
「지금 연놈이 끼고 누워 있나?」
「어이, 나가네,」
이윽고 안에서 대답 소리가 났다. B의 목소리였다.
「이 사람아, 좀 기다려. 대문 쪼개지겠네.」
안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고 신발 끄는 소리가 나고 대문이 덜걱덜걱하다가 열렸다.
「자, 들어가세.」
A는 그만 싱겁게 일어났다.
「B인가. 난 누구라구 가겠네. 어 취해,」
「들어가세나.」
「가겠네, 재미보게. 응, 재미봐.」
A는 뿌리치고 돌아섰다.
「바보! 바보! 뭘 하러 거기까지 다시 갔던가? 이야말로 태산을 울린 뒤에 겨우 쥐 한 마리란 격이로구나,」
술과 불쾌 때문에 그는 귀가 어두워지고 눈이 어두워졌다.
「바보! 바보! 이게 무슨 창피스런 꼴이냐?」
「집에만 돌아가면 즐거운 가정이 있지 않느냐? 귀동이가 있지 않느냐? 아내가 있지 않느냐? 시골에는 늙은 어미가 있지 않느냐?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나 하나를 힘입고 살고 있지 않느냐? 나는 그들을 돌볼 권리와 의무가 있지 않느냐? 나는 사람이다. 위로!」
술과 노여움으로 홍분된 A는 혼자서 중얼중얼 말을 하면서 고개를 뚝 숙이고 거리거리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디선지 쓰러져 자 버렸다.
🙝 🙟
이튿날—새벽에 길로 뛰쳐나왔다.
A는 오늘은 공장을 쉴까 하였다. 공장에서 B를 만나기가 싫었다. 그러나 갈 데가 (이 이른 새벽에) 없어서 빙빙 돌다가 오정쯤 드디어 공장으로 갔다.
「요!」
B는 여전히 손을 들어 인사하였다. 이것은 A에게는 의외였다. B는 부끄러워하려니 하였다. 그런 일이 있 고 뻔뻔스럽게도 천연하랴? 그날 일을 하는 동안에 B에게 대한 시기가 차차 커 가다가, 그 시기가 노염이 되고 노염은 종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폭발이 되었다.
B는 자기의 브러시가 보이지 않았던지 A의 승낙도 받 지 않고 A의 브러시를 집어갔다.
「이 자식—남의 것 왜 집어가는 거야?」
A는 붙이던 신을 상 위에 놓은 뒤에 팔을 내밀었다.
B는 브러시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손을 돌렸다.
「자네 것이면 좀 못 쓰나?」
「내해, 내 것, 내, 내, 내해야.」
A는 숨을 덜컥덜컥하였다.
「야, A, 비싸게 굴지 마라.」
「뭘? 이리 못 내겠느냐?」
「내 쓰고 주지 않으랴.」
「에익!」
A는 주먹으로 B를 쥐어박았다. 눈이 충혈이 되면서 일어섰다. 이 통에 다른 직공들도 왁 하니 일어서 서둘러섰다. 큰 구경이 난 것이다. 그 가운데서 일단 넘어졌던 B는 옷의 먼지를 털면서 일어났다. A는 B가 달려들 줄 알고 그 준비를 할 때에, B는 옷을 다 털고 나서 앞에 놓인 왜 굵은 쇠뭉치를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쇠뭉치의 중간에 대고 양손으로 쇠뭉치의 양끝을 잡아 힘껏 당겼다. 쇠뭉치는 그 두려운 힘에 항복하는 듯이 구부러졌다.
「A, 이봐, 내가 힘으로 너한테 지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너한테 차마 손을 못 대겠다. 네브러시를 쓰지 않으면 그뿐이 아니냐. 예따, 받아라! 네브러시로다.」
B는 브러시를 A에게 던졌다. 그리고 제 브러시를 얻어 가지고 방금 그 분쟁을 잊은 듯이 제 일을 시작하였다. 그 오후, A는 일할 동안 몇 번을 B를 몰래 보고 하였다. A는 지금 브러시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B가 달라기만 하면 곧 주고 싶었다. 아까의 제 행동을 뉘우쳤다. 부끄러운 일이라 하였다. 사람의 짓이 아니라 하였다. 저녁때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 할 때 A는 공장 문 밖에서 B를 기다렸다.
「여보게 B!」
「또 싸움을 하—」
「아까는 미안하이.」
「하하하하, 사죄인가. 경우 밝은 녀석일세. 세 시간도 못 지나 사죄할 일을 왜 한담. (또 콧노래 한 가락 하고 나서) 그런데 A, 브러시가 그렇게 아깝던가?」
A는 머리를 숙였다.
「B, 웃지 말고 대답해 주게, 도순……」
「하하! 아, 알았다. 아까 그 일이 거기서 나왔구나, 이 못난 자식아. 샌님이야, 술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은 내가 한턱하지.」
A는 술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B에게 대한 미안한 생각은 A로 하여금 싫은 술좌석일지라도 기쁜 듯이 가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그날 저녁을 기회로 A의 생활은 또다시 불규칙하게 되었다. 또다시 술, 계집…… 그날 저녁 B는 얼간이를 소개하였다. 얼간이는 싱겁게 웃은 뒤에 이를 승낙하였다. A는 순교자와 같은 비창한 마음으로 이를 승낙하였고, 대단한 불쾌와 그 가운데 약간 섞여 있는 호기심으로 얼간이의 집으로 갔다.
이날의 이 일은 A에게는 마치 아편의 독소와 같았다.
(위로—위로, 더욱 높은 데로!)
마음으로는 여전히 향상을 바라고 부단의 자책과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의 이성, 그의 양심을 무시하고 그의 행동은 어긋나는 길로가는 것이었다.
그날의 그 일은 A의 양심의 첨단을 갈아내는 줄이었다. 커다란 이 줄에 끝을 쓸리어 나간 그의 양심은 그로 하여금 얼굴 붉힐 일을 연하여 행하게 하였다.
아침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언제든 그는 이즈음의 제 생활을 돌아보고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였다.
(고쳐야겠다. 이런 생활에서 어서 떠나야겠다.)
이런 생각이 아침 일어날 때마다 그의 마음을 지배 하였지만, 공장에서 돌아올 때에 동무들이 그의 어깨를 한 번 툭 치는 것을 기회로 그의 양심은 자취를 감추고, 또다시 그들과 어깨를 겯고 좋지 못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뒤에는 술과 계집과 방탕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술은 언제든 A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남들은 술이 들어가면 언제든 마음이 들뜬다 하나, A의 속에 들어가면 언제든 마음이 차차 무거워 갔다. 순교자와 같은 비참한 마음이 늘 생겼다. 술은 언제든 그의 양심으로 하여금 부기케 하였다. 제 거친 생활을 뉘우치게 하였다. 취기가 들면 들수록 그는 자기의 비열하고 참되지 못한 생활과 행동을 뉘우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곳에 같이 따라 온 제 약한 마음을 채찍질하였다.
「위로 —위로 —」
「아아!」
지금은 주량도 무척 는 그였다.
🙝 🙟
불량품 문제는 이전의 그 자리에서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역시 불량품이 많이 났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제각기 불평을 말하면서도 어떤 조처를 하자고 발의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생각조차 하는 사람도 없었다.
「제길! 또?」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원성이었고 가장 큰 반항이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여름이라 하는 시절은 고무공업은 한산한 시절이라 공장주측에서도 아무런 조처도 없었다. 직공은 직공대로 다만 목 잘리지 않기를 위주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제기! 〉 와 많은 불량품 가운데서 한산한 여름은 지나갔다.
🙝 🙟
어떤 날 낮, 배합사가 A와 B를 찾아서 저녁때 좀 조용히 만나기를 청하였다. 저녁때 배합사와 A와 B의 세 사람은 어떤 조용한 중국 요리집에 대좌하였다. 처음에 두어 마디 잡담이 돌아간 뒤에 배합사는 옷깃을 바로 하며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오늘 부러 두 분을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특별히 부탁할 일이 있어선데 들어 주시겠읍니까?」
하고 공손히 부탁하였다.
A는 B의 얼굴을 보았다. B는 배합사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 대답도 없는데 배합사는 또 말을 꺼냈다.
「들어 주시겠읍니까가 아니라, 꼭 들어 주셔야겠읍니다. 이것은 내게뿐만 아니라 노형들에게 해롭지 않은 일이외다.」
「어디 말씀해 보세요.」
B는 담배를 붙여 물고 배합사를 바라보았다.
「네, 형공 두 분을 믿고 말씀드리리다. 다른 게 아 니라, 그 배합에 대해서도 언젠가도 이야기가 났었지만……불량품이 많이나는 건 역시 배합사가 나빠서 그래요. 부끄러운 말씀올시다만 내 집안 식구가 열셋이야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받는 월급이 겨우 육십 원이겠지요. 그걸로 어떻게 열 세 식구가 살아갑니까? 보통 배합사면 아무 데를 가든지 월급은 백 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 공장과 나와의 사이엔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그 관계란 것이……」
말의 순서를 잘 따질 줄 모르는 배합사의 선후며 연락이 없는 이야기를 종합하여 듣건대—그리고 정 이 해가 어려운 곳은 다시 묻고 또 묻고 하여 알아들은 결론에 의지하건대, 그의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그는 자기가 이 공장의 돈으로 고오베까지 파견되어 배합법을 배워온 경유를 말한 뒤에 말을 계속하여—자기는 분명 그 은혜가 크기는 크다. 금전으로 바꾸지 못할 귀중한 보배, 마를 길 없는 지식의 샘(배합이라는), 공장의 덕으로 머릿속에 잡아 넣기는 넣었다. 그 은혜의 큰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한 달에 겨우 육십 원이라는 봉급으로는 열 세 식구가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십 년 만기까지는 이 공장에 팔린 몸이매 제 자유로 나갈 수도 없다. 은혜 내지는 의리와 현실 생활—이러한 딜레마에서 헤매던 그는 마침내 한 가지의 방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즉 공장에서 자기를 내쫓도록 수단을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러 배합을 허투루 하여 고무가 붙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직공측에서도 문제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잠시 일어나던 문제는 사라지고, 그러는 동안에 고무 공업계의 한산기인 여름 이 되어서 그냥 잠자코 있었는데—아무리 하여도 육십 원의 월급으로는 열 세 식구가 살 수가 없으니, 직공측에서 운동을 하여 자기를 내쫓도록 해 달라는 것— 이것이 배합사의 부탁의 뜻이었다.
「A, 자네 의견은 어떤가?」
배합사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B는 A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다. 모든 일을 농담으로만 넘겨 버리려는 B의 얼굴에도 이때만은 비교적 엄숙한 기분이 되었다.
「글쎄 ……」
A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이즈음 술과 허튼 생활로써 마비된 A의 머리로는 이런 일에 임하여 갑자 기 옳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온갖 일이 권태의 대상이요, 〈 감동〉이라 하는 것을 잃어버린, 한낱 기계와 같이 되어 버린 A의 머리에는 이러한 미묘한 감정에 얽힌 인생 문제는 판단 내릴 수가 없었다.
「글쎄……」
또 한 번뇌면서 A는 곤한 듯이 담배를 붙여 물었다.
1. 열 세 식구와 육십 원—이러한 괴로운 경지에서 배합사가 쓴 수단에 틀림없으나, 사랑하는 부모 처자의 구복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쓴 수단이니 배합사의 행위는 용납할 것인가?
2. 저부터 살고야 볼 것인가, 남부터 살릴 것인가?
3. 배합사는 공장의 덕택으로 일생을 써먹어도 마를 길이 없는 귀한 보배인 지식을 얻었다. 여기 대한 의리와 의무를 벗어 버리려는 배합사의 행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만약 옳다 할진대 그것은 에고이즘이다. 그르다 할진대 너무도학적이다.
4. 자기의 한 가족을 위하여 몇 달 동안 삼백여 명의 직공과 수천 명의 가족들을 괴롭게 한 그 행위는 밉다 볼 것인가?
5. 비열한 행동은 해서 못쓴다.
6. 밥은 먹고야 산다.
7. 그러나〈정당한 행위〉와 밥이 서로 배제될 때는 어느 길을 취해야 하나?
순서 없이 연락 없이, 그리고 한 토막의 해답도 없이 이런 생각이 머리에 얽혀 돌아갔다.
B가 지금껏 먹던 담배를 획 내던지고 코를 두어 번 울리었다. 배합사를 찾았다.
「좌우간 여보 노형, 혼자를 위해서 몇 달 동안 배합을 못 되게 해서 삼백여 명의 직공을 손해 입혔으니 그게 무슨 비열한 짓이오? 지금 새삼스러이 성내야 쓸데없는 일이지만, 미리 서로 어떻게든 의논했으면 좀 더 달리 변통할 도리라도 있었지요.」
「면목 없읍니다.」
「면목? 면목쯤으로 당하겠소……좌우간 우리는 어차피 노형을 배척은 해야겠소. 그건 노형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만……이 뒤 다른 데 가서라도 그런 짓은 아예 다시 하지 마오—A, 자네 돈 가진 것 있나?」
A는 주머니를 뒤졌다.
「일 원밖에 없네.」
「일원 내게.」
「뭘 하겠나?」
「글쎄, 내게.」
B는 돈을 받아 가지고, 보이를 불러 가지고 회계를 명하였다. 배합사가 창황히 말렸다.
「이보세요, 이번 것은 내 내지요. 두 분께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부러 청한 것이니깐.」
「걱정 마시오. 조합식으로 합시다. 이런 부탁을 받으려고 음식을 먹었다면 우리도 속으로 불유쾌하니깐 삼분해서 내기로 합시다.」
A는 눈을 들어서 B와 배합사를 번갈아 보았다. 커다랗게 뜬 오른쪽 눈을 약간 떠는 뿐, 아무 표정도 없 는 B의 얼굴과 부끄러움으로 풀이 죽은 배합사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동안, A의 마음에는 〈 감동〉이라고 밖에는 형용할 수 없는 괴상스런 감정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은 이즈음 한동안은 그의 마음에서 발견할 수 없던 감정이었다.
A의 눈도 약하게 떨렸다.
🙝 🙟
삼사 일 동안은 그 배합사의 문제는 A와 B 두 사람이 아는 뿐, 일절 누설치 않았다. 온갖 일에 대하여 자기의 푯대의 주장을 가지고 있는 B는 이런 일을 당할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
A의 든 바— 1. 임금 인상 2. 대우 개선 3. 배합사 해고 이 세 가지의 문제에 대하여 B는 웃어 버렸다.
〈배합사무조건 해고.〉 B의 주장은 이 단 한 가지 조건이었다.
「소위 개선이라 하는 건 한 가지씩 점진적으로 해야 된다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구했다가는 질겁을 해서 승낙을 안해. 지금 우리에게 절박한 문제는 배합사가 아닌가. 게다가 공연히 〈임금 인상〉이며 〈대우 개선〉을 덧붙였다가는 공장주측에서 질겁을 하고 물러서고 말리. 한 가지씩 한 가지씩 해 나가면 손쉽게 될 가능성이 있는 걸 공연히 섣불리 덤벼서 동맹 파업이라 무엇이라 해 가지고 피차에 손해를 보면 긁어 부스럼이야. 우선 급한 문제만 해결하고 기회를 봐서 서서히……」
그리고 또 이렇게 보태었다.
「또 공장주측에서 배합사를 내쫓을 때 배합사를 유학시킨 비용을 증서로 받는다든가 하면 배합사가 불쌍하지 않은가! 우리측에서 보면 배합사의 한 일은 괘씸하지만, 그것도 무슨 악의에서 나온 바가 아니고 자기의 밥을 위해서 한 거니까, 그 수단이 무지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장래도 생각해 줘야 할 거야. 〈악 의〉는 용서할 수 없지만 〈무지〉는 용서할 여지가 있는 일이야. 그 사람도 노동자일세.」
A는 이러한 B의 말을 들을 때에 막연하게나마 커다란 인류애를 느꼈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제각기 활동을 하는 사팔뜨기 B의 표정에는 이런 때는 신성하고 엄숙한 기분이 넘쳤다.
이러한 삼사 일 동안, A는 금년 여름을 보낸 그 들 뜬 기분을 잊었다. 때때로 불끈 그 생각이 솟아오를 때는 그는 얼굴을 붉혔다. 그의 마음은 마치 핸들을 잡은 운전사와 같이 긴장되어 있었다. 온갖 술과 계집의 허위와 너털웃음의 들뜬 생활—여름 동안은 그렇듯 그의 마음을 끌고 그의 온 정신을 유혹하던 그 생활— 더구나 삼사 일 전까지도 계속되던 그 생활은 이제는 그에게는 이상한 애조로서 장사당한 한 옛적의 일과 같이 어떤 엷은 베일로 감추어져 버렸다.
B는 아무 일에도 구애됨이 없이 낮에는 천연히 일 하였다.
「네 나이는 열 아홉, 내 나이는 스물 하나—니까.
너고 나고 언제든……」
늘 콧소리로 흥얼거리면서, 한편 불량품을 연하여 내면서 때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여공들의 일간을 향하여, 큰 소리로 농담도 던지면서 천연히 일을 하였다. A는 B를 부러워하였다. 아무런 일에 처하여도 자기의 본심만은 잃지 않는 B는 어떤 의미로 보아서는 A에게는 영웅으로까지 비치었다. 아무런 일이든 B는 그 일이나 마음을 지배하였지 거기 지배당하지는 않았다. 꼭 같은 믿을 A와 B가 할지라도 A에게 있어서는 〈그 일에 끌려서 행하는 것〉에 반하여 B는〈그 사건을 지배〉하였다. A에게는 B의 그 점이 몹시 부러웠다. 그리고 A는 막연하게나마 자기의 성격이라 하는 데 대하여도 처음으로 이해의 눈이 벌려지기 시작하였다. 공장 노동이라 하는 것은 자기에게 적당치 않은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B와 같이 굳센 성격의 주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 소생할 여망 없이 타락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는, 공장 노동이란 십중팔구는 그 사람의 성격을 파산시키며 순진함과 향상 욕을 멸망케 하는 커다란 기관이란 것도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검은 물은 들기가 쉽고, 따라서 무서운 전파력을 가졌다는 평범한 진리도 다시금 느꼈다.
🙝 🙟
며칠 뒤, 좀 두드러진 직공 몇 사람을 모아놓고 이번의 배합사 문제를 내놓고 배합사를 내쫓도록 공장 측에 요구하자는 의향을 그들 앞에 제출할 때에 반대 가 있으리라고는 뜻도 안 하였다. 그 반대의 이유는 이러하였다.
「그럼, 그 배합사는 부러 배합을 고약하게 해서 우리를 손해를 입혔단 말이지? 그러면 말하자면 배합사는 우리의 원수인데 우리가 애써서 그 사람을 내쫓아서 봉급 많이 주는 데 갈 수 있게 해 줄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거기 대하여 B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보게,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닐세.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지배합사를 위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네, 배합사는 잘 되건 못 되건 생각할 필요가 없고, 우리는 우리 문제, 불량품 많이 나는 문제만 없어지면 그뿐 아닌가. 배합사의 봉급 참견까지야 할 필요가 어디 있나?」
「글쎄, 남의 일은 참견 말고 우리 일이나 하세그려.
무조건 해고든 무조건 해고든, 그것까지야 왜 참견하 자나?」
어떤 직공이 또 이렇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제 말 재간을 자랑하는 듯이 둘러보았다.
「그건 궤변이야. 궤변은 함부로 쓰면 못써.」
「궤변?」
그 직공은 〈궤변〉의 뜻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싱거운 듯이
「궤변 아니야.」
할 뿐 잠잠하여 버렸다. 다른 직공이 또 반대하였다.
「노동자는 제 밥벌이만 해도 바쁜데 원수까지 사랑할 겨를은 없네. 우리는 예수교인이 아니니까.」
「이 사람아(B의 말이었다) 말을 왜 그렇게 하나?
아무리 겨를이 없다 해도 겸사겸사해서 해지는 일을 왜 피하겠나? 저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을, 왜 나만 좋자고 그 사람의 일을 일부러 뽑겠나. 그 사람—배합사도 노동잘세.」
「그 사람은 양복 입었네.」
또 반대였다.
「나도 양복이다.」
B는 마침내 성을 내었다. 그는 발을 구르면서 죄다 해진 양복의 앞자락을 쳐들었다. 왁 하니 웃음소리가 났다. 그러나 A에게는 그것은 결코 웃지 못할 장면이었다. 다 해져서 걸레에 가까운 알파카 양복의 앞자락을 쳐들며 일어서는 B의 모양에는 웃지 못할 엄숙함 이 있었다. 문제는 진행되지 않았다. 변변치 않은 문제에 걸려서 제각기 의견을 제출하고 반대하고 하노라고 그날은 종내 해결짓지 못하였다. 그리고 내일 다시 모이기로하고 헤어졌다.
이튿날 다시 회의는 열렸다. 회의의 벽두에 누가 동맹파업의 문제를 일으켰다. 그때에 뜻밖에도 동맹파업이라 하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흥미를 몹시 일으켰다. 뭇 입에서는 동맹파업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았다.
처음에는 어이 없어서 방관적 태도로 입을 봉하고 있던 B가 너무도 모든 사람의 의견이 그리로 몰리므로 종내 입을 열었다.
「여보, 일에는 순서가 있지 않소? 먼저 우리의 요구를 제출해서 그 요구가 용납되지 않으면 동맹파업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동맹파업부터 먼저 한다는 법이 어디 있소?」
「요구야 물론 안 들을 게지.」
「아, 들어 줄지, 안 들어 줄지 지내 봤소? 대체 여보 당신네들이 알고 그러우, 모르고 그러우? 어쩐 셈이오?」
「알고 모르고가 있나?」
도리나 레바(노래가사)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여보들, 순서를 밟아서 일을 하면 혹은 무사히 우 리 요구를 들어 줄지도 모를 일을 파업부터 하면 필 하오?」
「그래야 혼내우지.」
「하하하하. 설사 혼이 난다 합시다. 혼이 나면—그동안 우리들의 집안 식구는 어떻게 무얼로 살아갈 테요?」
「그런 걱정까지 해서 큰일을 하나.」
「아아, 이 무지여! 외래사상을 잘 씹지도 않고 그저 그대로 삼켜서, 그것이면 무조건하고 좋다고 자기의 환경과 입장을 고찰하지도 못하고 덤비는 이 무리들이여—」
A에게는 딱하고 한심하기가 끝이 없었다.
B와 A의 의견과 다른 직공들의 의견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를 갖다가 맞붙이기는 힘들었다.
직공들의 대부분은 공연히 동맹파업이라는 생각에 들떠서 사리를 생각할 여유를 잃은 모양이었다.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로 세째 날로 넘어갔다.
문제는 다섯째 날에야 겨우 타협점을 발견하였다.
1. 배합사의 해고에 〈무조건〉이란 문구를 뽑을 것.
2. 공장측에서 직공의 요구를 듣지 않는 경우에는 동맹파업을 하되 B와 A가 그 지도자가 되어 줄 것.
이러한 조건 아래 타협이 성립된 것이었다.
🙝 🙟
그날 밤, B와 A는 교외에 산보를 나갔다. 벌써 저녁때는 꽤 서늘한 절기였다. 달 밝은 밤이었다. 소나무들은 커다란 그림자를 땅위에 던져 주고 있었다. A와 B는 잠자코 걸었다. 어떤 바위에까지 가서 걸터앉았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한참 뒤에 A가 먼저 입을 열었다.
「B, 나는 공장을 그만둘까 봐.」
「찬성이네.」
B는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갈까 봐.」
「찬성이네.」
「이즈음 한 주일을 거의 한잠도 못 자고 생각했는 데 참 못 견디겠어.」
「글쎄, 시골로 가도 자네 같은 결벽의 사람에게 만 족이 될지 안 될지는 의문이지만, 도회보다야 낫겠지.
가 보게.」
말은 또 끊어졌다.
한참 뒤에 이번엔 B가 말을 꺼냈다.
「자네 결벽도 무던하데. 좌우간 도회, 더구나 공장 노동자로서는 그런 결벽을 가지고는 사실 성격까지 파산하겠기에 그 결벽을 없이해 보려고 나도 왜 애를 썼지만 자네 같은 벽창호 결벽가가 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뜻도 못 했네, 하느님의 초특작품이데.」
A는 적적히 웃었다. 담배를 꺼내어 B에게 권하였다.
서너 모금뻐금뻐금 빤 뒤에 A는 또 입을 열었다.
「어머님도 내려오시라고 —」
「어머님? 참 어머님도 자네가 놀아난 것을 눈치챘겠지?」
「우리 처가 편지를 한 모양이야. 몰시 걱정하시던데……」
「부인은 나를 원망하겠네그려?」
「왜 안 원망하겠나?」
「하하하하, 나도 못된 놈이지.」
B는 적적히 웃었다. A도 따라 적적히 웃었다.
「자네마저 가면 난 적적할세그려.」
「피차.」
B는 하늘을 우러러 콧노래를 불렀다.
「네 나이는 열 아홉, 나는 벌써 스물 셋이니까.」
그러나 A에게는 이 노래가 몹시 구슬프게 들렸다.
A는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섰다.
이튿날 직공들은 공장에 자기네의 조건을 제출하였다. 공장측에서는 한 주일의 유예를 청하였다. 한 주일 뒤에 가부간 회답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기간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아니 기다리지 않고 A는 공장을 그만두고 처자를 거느리고 시골로 떠났다.
🙝 🙟
A가 시골로 내려간 지 두 주일쯤 뒤에 B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 편지에는 이런 말이 비어 있었다.
- (상략) 공장주측에서는 직공측의 요구를 다 승낙하였소. 그러나 직공측에서는 역시 만족해하지 않았소.
- 왜? 다름이 아니라, 직공측에서는 〈동맹파업〉이라는 것을 일종의 유희적 기분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공장주측에서 모든 조건을 승낙하니 〈동맹파업〉을 일으킬 구실이 없어지기 때문이오. (중략)
- 무지의 위에 〈외래사상〉을 도금한 것—이것이 도 회 노동자의 모양이외다. 외래사상을 잘 씹지도 않고 삼켜서 소화불량증에 걸린 딱한 사람들이외다. (하략)
이 편지에 대하여 한 A의 이런 말이 있었다.
- (상략) 농촌도 도회 같지는 않으나 소화불량증이 꽤 침입이 되어 있소. 좋은 의사가 생겨나서 좋은 약을 발견하거나 발명하지 않으면 큰 야단이외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