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외한의 수첩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 친한 동무였다. 그러므로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결코 무슨 비밀이란 것은 있을 터수가 아니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교우록 속에 씌여져 있는 그의 ‘호패(號牌)’에 붉은 줄을 그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였다.

이러한 간단한 사실이 모르는 사람으로 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을지 모르겠으나 남달리 상처(相處)해오든 벗을 한 사람 잃어버린 나의 호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 수 없이 서러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글을 쓰려는 오늘 아침에 이제는 고인인 R의 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 편지 한 장과 「문외한(門外漢)의 수첩(手帖)」이란 유고 한 권이 보내여 왔다.

그 유고는 이래 10년에 쓴 고인의 일기인 모양인데 그도 출일(逐日)해서 쓴 것도 아니고 때때로 마음이 내킬 때마다 써둔 것이며 그 맨 끝 페―지에 “○○형(兄)에게”라는 이 세상 사람으로서의 절필인 듯한 글씨가 묵흔(墨痕)이 임리(淋漓)한 것은 소리 없는 내 눈물을 더욱 짜내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 글 내용은 일기는 일기면서도 대부분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였다. 그 편지 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 있게 생각나는 부분만을 써서보기로 한다면 그도 처음에는 문학청년이였든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하고저 한 문학을 끝끝내 완성할 수 있는 행복된 사람은 아니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죽든 날까지도 문학을 단념하지는 않었다는 것은 어느 해 겨울 그와 나는 우연히도 어느 온천에서 만났다. 그때는 바로 동경에서들 풍자문학록이 한참 대두할 때이였으므로 그도 또한 예에 빠지지 않고 이것의 조선에 있어서 가능하다는 설교를 하는 것이였다. 그때 좀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한 나의 말에 그는 말하기를 조선사람은 생활 그 자체가 풍자적으로 되여 있다고 떠들어대기에 나는 그에게 더 진지한 태도로 사물을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였고 그 다음날 우리는 서로 갈린 채 영원히 보지 못할 사람이 되였다.

이 글은 그때 나와 갈려서 며칠 동안에 쓴 것이라고 생각난다.

一九三 ×年 ×月 ×日

―○형(兄)! S역에서 형과 갈려서 나는 ○동까지 50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왔소. 동리 거리에 피곤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 집 초당방을 찾어 들어가면 이 밤을 뜨뜻한 아랫목에서 지낼 수도 있겠거니와 그들과 함께 살을 맛대이고 지나며 그들의 생활을 체득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유쾌한 일이겠습니까?

나는 여기서 형이 일찍이 하든 말을 생각해 보았소. 상해 어데선가? 목욕을 갔을 때 불란서 사람과 서반아 사람과 같은 욕조에 들어갔을 때의 감정을 얘기한 것을 기억이나 하시는지요. 그때는 적나라한 몸둥이들이 모두 꼭같은 온도를 느낄 수 있더라고 세계는 모름지기 목간통같이 되어야 한다고.그러나 오늘의 나의 심경은 그와는 정반대로 어데까지나 육친애를 느껴볼 결심이였소. 그래서 세계는 차라리 초당방같이 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았소. 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 다른 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오는 동안에 나는 가졌든 담배를 모조리 다 피워 바렸소.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첫겨울의 눈우바람이 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끝이 저리기도 해서 담배도 살 겸 주막집 있는 데로 가까이 찾어갔소. 그곳에는 마침 담배 가게가 있고 젊은 농부인 듯한 사람이 있기에 오전짜리 한 푼을 던지고 ‘마코’ 한 갑을 달라고 하였더니만 나는 여기서 뜻하지 못한 실패를 하였소. 그것은 내 행동이 몸차림과 어울리지 않은 데가 있었든지 또는 언어에 무의식적인 불손이 있었든지 그 젊은 농부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 “문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하며 코웃음을 픽 하며 ‘마코’ 한 갑을 내 앞으로 툭 던지는 것이였소.

나는 처음 이 농부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어름어름하였소. 그것은 담배 가게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도회에서 보는 담배 가게와 같이 백색 ‘타일’타로 대를 싸올리고 ‘네온’등을 달고 유리창을 단 것이 아니고 처마 끝에다 석유 궤로 목판을 짜서 장수연, 희연, ‘마코’, 단풍 이런 것들을 몇 갑씩 넣어둔 것이였소. 그래 내가 들어갈 문이란 어데 있겠소.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날이였나 부오. 장꾼들이 들신들신하고 그 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 그만 그곳을 떠나 돌아나오랴니까 바로 내 머리 뒤에서 “건방진 녀석, 눈에 유리 창을 붙이고”……하면서 별러대는 것이였소. 그때 나는 모든 것을 다 알었소.

시골 산촌에선 유리라는 것은 들창에나 붙이는 것인데 네 눈에 붙인 등창을 열고 다시 말하면 문안에 들어와서 (안경을 벗고) 담배를 가져가란 말였소.

내가 안경을 쓰게 된 것은 시력이 부족한 탓이였고 그 젊은 농부가 내 안경 쓴 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것은 고루한 인습의 소치라고 하드래도 그 표현방법이 얼마나 내 뼈를 저리도록 쑤시는 풍자이였겠소. 과연 여기에 남과 나라는 투명한 장벽이 서서 있다는 것을 나는 안 듯하였소.

그리고 내 발길은 무겁게 옮겨졌소. 아주 몇 해를 두고 어느 사막이라도 걸어온 듯한 피로를 깨달았소. 하늘은 점점 어두워오고 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 듯하였으나 나는 다시 옷깃을 단속지는 않었소. 될 수 있으면 차디찬 눈보라가 내 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여미듯이 얼어붙으라고 하여 본 것은 일종의 자기잔학일른지도 모르겠소.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나는 과연 어느 집 초당방에 손이 되였소. 방안에는 초말 냄새가 코를 찌를망정 모이는 사람은 대략 6, 7명이나 되었고, 연령은 최저 십팔로 최고 삼십이, 인품은 모두 순후하고 황소같이 질박한 놈도 있으며 암사슴같이 외로운 연석도 있었소. 그날 밤은 내라는 존재가 그들로 보면 낫설은 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는 갖지 않었든 모양이였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의 자미 있는 얘기를 들려달라는 것이오.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 들려줄까 하고 망설이는 판에 그들 중에도 연령과 지식의 정도가 있어서 삼십에 가까운 사람들은 『화용도(華容道)』를 들려 달라하고 그중 한사람은 『춘향전』을 얘기하라 하였소마는 여기도 또한 의견은 일치되지 않었소. 그 중에도 제일 얼굴이 말쑥하고 나이가 이십오 세쯤 되여 보이는 농부 한 사람 말을 들으면 보통학교를 중도퇴학은 하였어도 그들 가운데서는 식자연하고 내로라는 듯이 뽐내면서 ‘서양’ 얘기를 무에나 들리라는 것이오. 그래서 결국은 ‘춘향전’파와 ‘서양’파가 절충한 결과 나는 이 진귀한 ‘서양춘향전’을 친절하게도 강좌를 담임(擔任)하게 되였으며 그는 득의만면하야 내 담배갑에서 ‘마코’ 한 개를 빼여 물고 인조견 옥색관사 홑조끼에서 성냥을 꺼내여 담배를 피우는 것이였소. 이 방에서는 모두들 이 사람을 ‘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 ‘상’자가 나에게는 조금 귀익지 못하나 아마 이것을 도시말로 번역하면 ‘모―던뽀이’란 말도 같소.

그러나 이 ‘서양춘향전’이란 진본서는 가난한 나의 문헌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알어낼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린드뻑’이 대서양을 어떻게 횡단하였다든지 ‘크레오파트라’의 국적이 어느 나라냐고 설왕설래를 하여보았자 ‘하이카라상’이라는 이 방의 “쏘크라테쓰”도 그까지는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았소.

그래서 나는 생각다 못해 ‘쉑스피어’의 『로미오와 주리엣트』를 얘기하기로 하고 위선 그 주인공의 이름을 그들이 알어듣기 쉽게 ‘노미’이와 ‘준’이가 이렇게 얘기를 하니 그래도 모두 그것이 자미가 있었든지 ‘준’이가 추방당튼 날 새벽에 ‘노미’를 찾아가 이별을 하는 판인데 이곳에야 ‘나이팅겔’이 울 수가 있을 리도 없겠고 생각다 못해 속담에 꿩값에 닭이라니 닭을 울리고 ‘준’이를 떠나보냈구려! 그래도 이때는 모두들 감탄해서 흥흥 콧소리를 치며 신 삼고 가마니 치든 손을 쉬이는구려!

밤은 벌써 오전 두 시나 되였는데 바깥에서는 눈보래가 쉬지 않고 나렷소. 사람들은 차차 긴하품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 베고 자는 이도 있고 또 그 자는 이의 다리를 베고 자는 사람도 있으며 나중에는 ‘하이카라상’과 나만이 남어서 나는 이 동리의 서러운 전설을 듣는 것이오. 옛날에 이 동리와 건너마을이 편을 갈러서 정초(正初)이면 ‘줄댕기’가 시작되였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씩 모여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 있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히 그 자손들은 변함없이 이 동리를 지켜 왔건마는, 지금은 어쩐 일인지 그 사람들은 누가 오란 말도 없고 가란 말도 없건만은 다들 어데인지 한 집씩 두 집씩 동리를 떠나고 그럴 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 시작한 사랑은 그 봄이 다가기도 전에 덧없이 흘러가고 만다는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야 이 사람은 창졸간에 미친 듯이 쓰러져 흑흑 느껴가며 우는 것이였소. 나는 이것을 왜 우느냐 물어볼 힘도 없고 울지 말라고 위안을 줄 수도 없었으며 다만 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 불쌍한 미완성 초연의 순정자로구나 하고 동정을 살피노라니 이 사람도 그냥 잠이 들고 먼데 닭이 잦은 홰치는 소리가 들리며 눈은 끄쳤는지 바깥은 바람이 몹시 불었소.

나는 몇 시간 남지 않은 이 밤을 도저히 잘 수는 없었소. 내 머리는 해저(海底)와같이 아득하고 내 가슴은 운모(雲母)와같이 무거웠소. 돌아누울래야 돌아누울 수도 없으려니와 옆에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는 검은 시체를 실은 마차의 수레바퀴를 갈고 가는 듯하오. 그럴수록 방안의 정적은 무거워져서 자꾸만 지구의 중심으로 침전되는 듯하였소. 나는 참다못하야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웠소. 바로 그때였소. 누구인지 내 머리맡에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혹은 저녁 전에 담배 가게에서 본 농부일른지도 모르겠소. 그가 나에게 한 말은 분명코 “문안에 들어와서……”였소. 나는 여기서 눈을 번쩍 뜨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소.

‘오! 그렇다. 나는 문외한(門外漢)이다.’ 아무리 하여도 인생의 문(門)안에 들어서지 못할 나이라면 차라리 영원한 문외한으로 이 세상을 수박 겉 핥듯이 지나갈 일이지 그 좁은 문을 들어가려고 애를 쓸 필요가 어데 있겠소. 문밖에서 살어가면 책임과 부담도 가벼우려니와 그 문안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보물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안에서 지킬 때에 나 혼자만 문밖에서 그 모든 것을 파수 본다면 그것도 나의 한 가지 임무가 아니겠소. 그렇다면 나는 달게

인생(人生)의 문외한(門外漢)이 되겠소.

그래서 남들이 모두 문(門)안에서 보는 세상을 나는 문(門)밖에서 보겠소. 남들은 깊이 보는 세상을 나는 널리 보면 또 그만한 자긍이 있을 것 같소. 오늘은 고기압이 어데 있는지 풍속은 64미리오. 이 동리를 떠나 아무도 발을 대지 않은 대설원을 걸어 가겠소. 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을 가는 느낌이오. 누가 나를 따라 이 길을 올 사람이 있을는지? 없어도 나는 이 길을 영원히 가겠소.

×

나는 이까지 보고 위선 이 유고를 덮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한 사람이 인생의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원히 걸어간 기록이다. 오! 그러면 나도 역시 문외한(門外漢)인가?

丁丑 七. 二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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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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